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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일(신29;27-29) 1711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5. 19:05
2017-11-05 14:55:35조회 : 13         
   오묘한 일 17110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오묘한 일(신명기 29: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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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11-05 15:56 

오묘한 일 

2017년 11월 5일                     본문 말씀: 신명기 29:27-29 

(29: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을 향하여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29: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 보내심이 오늘날과 같다 하리라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오늘날 현대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성경 속의 단어는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서 과학시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취급합니다. 합리적으로 관찰하여 그들을 따져서 인간의 생활에 유용하다고 판정 난 것들만 ‘진리’ 혹은 ‘지식’이라고 간주하면서 확대시켜 나갑니다. 따라서 이런 작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갈수록 무시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줄줄이 죽음을 품고 낙엽처럼 다들 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은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있어 결코 유용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마치 이 세상에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혹은 눈 돌려야 하는 불길하고 재수 없는 것처럼 처리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고 나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행복’ 중심이 아니라 ‘말씀 성취’에 관심 두고 세상을 이끌고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뭘 행하면 내가 행복할까?”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관심사를 공격하고자 하는 적대세력의 유혹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저주를 단언하십니다. 

이 땅을 저주로 확대시키겠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숨겨진 ‘오묘한 일’에 해당됩니다.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오묘한 일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을 때 그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저주받았습니다. 따라서 그 오묘한 일이 온 세상으로 번지게 되면 이는 곧 온 세상의 저주라는 결말에 당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묘한 일의 결말은 인간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 기대하는 결말과 정반대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계속 번영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역량을 여기에다 결집시킵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듯이 든든한 기초를 다지고 또 다져서 하늘에까지 인간들의 이름을 드높이려고 합니다. 

종교도 여기에 거듭니다. “신은 우리 편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구호로 ‘오묘한 신의 뜻’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입니다. 진정한 오묘함이란 저주의 당위성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함입니다. 저주의 당연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위주가 아니라 말씀 위주인 것이 합당하다는 겁니다. 

이방인에게는 이런 신이 낯설지만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역사의 주가 되셔서 기어이 이스라엘을 약속해주신 이 땅에서 흩어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붕괴하고 말살시켜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묘함을 품은 인격자의 지상등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냥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상에 모습과 오묘한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이질적인 메시야관’이 바로 하늘의 오묘함이 지상에 구현된 겁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오묘함이 세상을 공개됩니다. 

고린도전서 4:9-13에 보면,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깝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도가 세상 사람이 다 기피하는 실패한 자로 전락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상의 오묘함’
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 잃지 않는 존재로 사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반대되는 분위기를 주님께서는 오묘하게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9:15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빼앗기는 분’으로 메시야의 오묘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늘의 숨겨진 비밀인 이 오묘함을 방해놓은 부류는, ‘죽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기쁘게 ‘죽고자 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 갖추어지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의 오묘함’이 한 분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당신을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입니다. 즉 어떤 특정분을 통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비밀이 다 풀리는 겁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분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 끝에,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말씀 완성에 관심을 두고 계시다면 그 관심거리를 직접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오묘함으로 제공해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더 살 욕심을 갖지 않게 된 겁니다. 성도는 홀로 도 닦는 자가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해서 사랑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신약에서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쪽에서 먼저 신을 사랑해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요한·1서 4:10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이미 자신이 같은 인간으로서 다같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고 그런 토대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6:14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5:6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관계가 곧 사랑이요 이 사랑에서 영생이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사랑만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8강-신 29장 27 – 29절(오묘한 일 )171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9장 27 – 29절입니다. 구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 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

오늘 본문을 봐도 하나님의 관심사가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말씀과 율법 성취에 있지 개인 개인의 행복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 하죠. 행복을 위해서 교회 왔다면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예요. 갓바위 쪽으로, 수능을 위해서 빌기 위해, 이쪽 말고 저쪽으로, 절로 가야돼요. 절로. 온갖 절로 다 가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오묘한일입니다. 오묘한 일, 오묘한 일이 언급된 이유는, 바로 이 오묘한 일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만 속하는 거고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오묘한 게 없어요.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냥 생존하면 그것뿐입니다.

잘 먹고 잘 살면 그 뿐이에요. 하지만 이스라엘한테는 하늘의 숨겨진 그 오묘함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달되고, 그러면 땅에 속한 오묘함이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이방인들은 이 오묘함을 모릅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게 다예요. 성경에서 설명을 하면서 계속 마음에 큰 짐이 있고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성경에서 언급한 대로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게 굉장히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닌가, 무례하게 여러분들 열심히 사시는데 초치는 게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갖습니다.

어떻게 산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 성경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마음에 심히 불편을 초래하는 짓이 되죠.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것’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데 하늘과 땅과” 그리고 거기 보면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들’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이 시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 합리적이고 과학적 시대예요.

과학이라 하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 원칙을 뽑아내고 그 원칙은 원칙을 위한 원칙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활에 유용하기 위한 원칙만 원칙이에요. 포프라는 철학자가 말했던 인간의 진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해 줘야 그것이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과학을 두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편리하지 않으면 그건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건 욥기에 나온 것과 반대예요. ‘황무지에 비를 내린다’ 황무지엔 텃밭도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예요. 황무지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낭비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낭비를 할 때, ‘저런 비 말고 지금 비 안 오는 여기 남한에다 비 내리게 하시지 황무지에 비를 왜 내리시느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데 굉장히 낭비가 심하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자체가 우리가 과학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꼭 맞는 것만 신께서 제공한다면 신을 안 섬길래야 안 섬길 수가 없는데 왜 하나님은 일을 바보같이 처리하느냐 그 말이죠. 내 뜻대로 기도해서 응답되게 되면 남들은 십분의 일만 바친다는데 나는 십분의 2,3 그런 걸 바칠 용의가 되어 있는데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느냐 하면서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거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오묘한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묘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고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보이는 세상은 어디에 포위되어 있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겁니다. 공격 표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부터 보면 진노라는 말부터 먼저 나오죠. 오묘함은 이 땅을 어떤 대상으로 보느냐 하면 진노 받아야 마땅한 땅이라고 그것을 미리 인지하고 있으면 당신은 오묘함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저주 받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남을 여러분들이 수긍을 하신다면 여러분의 보이는 세상, 과학적 세상을 떠나서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 속한 분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을 쉽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은 현재 저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 합니다. 저주 받는 게 힘들지요. 이스라엘이 분명히 힘들지요. 하지만 그건 오묘함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묘함을 위해서. 그 비슷한 예가 고린도전서 4장에 나오는데 그 4장의 이야기를 제가 살짝 읽어 드리겠습니다. 9절부터.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함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미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이 사도를 이런 식으로 다루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묘함이에요. 이 오묘함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저주로 나타난 신이 진짜 하나님이고, 사도를 만물의 쓰레기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는 식대로 생각했던 하나님,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기도하면 응답받고, 애쓴 만큼 보상해주고 원상복귀해주는 그러한 하나님은 오묘한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가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롭게 이 땅에 와야 되듯이 사도가 새롭게 이 땅에 와야 되는 겁니다. 여러 번 이야기 했듯이 이렇게 이야기한 사도는 마귀도 알아줘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겁니다. 마귀나라에서도 유명한 진짜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 여기에 보면 세상에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사도를 수치스럽게. 여러분은 이렇게 살 용의가 없지요, ‘정말 나는 저렇게 안 살 거야, 저렇게 살면 저주야’ 하는 저주꺼리, 쓰레기 같은 인간을 가지고 런웨이, 패션쇼 하는 길인 런웨이를 가게 만들어요. 

그러니 우리가 교회 와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장난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취미생활인지, 친목단체인지 이거는 엉망진창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기존의 교회를 모델로 삼아서, 우리도 비슷하게 하면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가짜교회, 절이죠, 그 가짜 교회를 계속해서 키워 온 겁니다.

말씀에 입각한 교회는 오묘한 것에 속하는 데, 인간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조작한 교회는 지금도 수십 개 수백 개 계속해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후에 기도하는 것도 런웨이 달리는 거예요. 패션쇼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 되는 겁니다.

패션쇼 하는데 파란천이 있어야 되는데, 이 염색해 놓은 파란 천을 누가 훔쳐갔어요. 오토바이 타고 온다고 무릎, 발 다 까지고. 지금 황금빛 내 인생 드라마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지금 40주년 이벤트 해야 되는데. 

그처럼 이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알아요. 주님은 예수님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 둘 사이에 관계예요. 그 둘 사이에 어떤 관계인가 하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아예 귀머거리 되기로 작심을 한 거예요. 

아예 소경되기로 작심을 한 거예요. 이걸 자발적 죽음이라고 하는 데, 스스로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스스로 죽는 것처럼, 스스로 안 듣고, 바보 되고, 스스로 쓰레기 되기를 작심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고 주님이 뭐라 하냐면 그게 바로 땅에 있는 오묘함이라는 겁니다. 그게 땅에 있는 오묘함이에요.

왜? 그래야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느냐 하면 이쪽에서 흉내를 내도 못 올 지경이에요. 어줍지 않게 흉내 낸다고 자기를 비우고 뭐 흉내내도 그게 안 될 정도로, 그 정도로 돼야 진짜 오묘함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 오묘함을 오늘 본문대로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늘에서 보기에 저주다. 그러면 누가 손들고 앞장서서 이 세상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저주성을 자기 신체에 다가 자진해서 수용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겁니다. 아무도 없어요.

이스라엘에게 그 일을 맡겼거든요. 이스라엘은 전부다 거절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저주 받아요. 본인이 거절하든, 인정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스라엘의 존재의 취지에 맡도록 그냥 밀어 붙이는 겁니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수요일에도 하고, 결정은 오묘함에서 결정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반대한다고 해서 인정한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리고 그런 건 없습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 안하든, 그대로 가 버리는 거예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 더 나가 봅시다. 여기 29절 보면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자손에게 속하였나니” 할 때에 여기 ‘우리 자손’이라는 말을 제가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묘한 것이 나타나는 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저주적인 상황, 핵폭탄 그런 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먼저는 우리 자손에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자손이 뭐냐 하면 인간이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뭘 발견해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왜 저주 받아야 합당하냐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오묘한 것을 찾아내야 돼요.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가 그걸 발견하지 못했어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덮쳐서, 하나님의 그 십자가가 덮쳤기 때문에 자기 본인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이 세상의 구경거리처럼, 아까 읽어 드렸던 고린도 전서 4장 말씀처럼, 형편없잖아요. 누구보고 그렇게 살라 해도 자진해서 그렇게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본인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그 길로 가 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게 바로 오늘날의 작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다’라고 보는 겁니다. 오묘함의 등장이 꼭 이런 식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이 인생 망가지고 사업 실패할 때에 너무 고소하다고 신나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거 남의 일 아니에요. 사람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단도리 잘 하고 자기 노후대책 잘 하고 삽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친척이 휘발유차 타고 가다가 불 질러 버리면, 그거 다 물어 줘야 하잖아요. 만약에 어떤 친척 중에 아줌마가 있는데 못 살겠다고 투신했어요. 아침 6시 8분인가. 아줌마 나이는 58인가 하는데, 투신 할 때 그 밑에 지나가는 할아버지는 68인데, 투신하는 몸에 맞아서 둘 다 죽었어요.

그럼 누가 누구에게 물어줘야 합니까? 만약에 투신한 아줌마가 우리 가까운 친척이고 도와 달라하면 돈 좀 내 줘야 하죠. 노후대책 하다가. 만약에 엄마 같으면 내 딸이 그랬다 하면 그거 물어 줘야 돼요.
왜? 고소할거니까. 내 단도리 잘 한다고 세상이 내 뜻대로 풀리는 게 아닙니다. 요즘 철에 가장 가까운 오묘함은 뭐냐 하면 낙엽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낙엽이 떨어진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떨어져 죽는 다는 겁니다.

이런 오묘함이 있어요. 낙엽이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중력에 의해 매달려 있다가 힘 빠져 죽는 겁니다. 우리 신세하고 똑같아요. 모든 인간은 낙엽 따라 줄줄이 다 떨어집니다. 그러면 사전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떨어질 것 떨어지더라도 오묘함이 있는 이 땅에 있는 오묘함을, 그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젤로 중요하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기쁨, 그게 사도 바울의 기쁨이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정도입니다. 노래 가사지만, ‘너를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됨이라’ ‘10월의 어느 날’이라는 노래가사입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낙엽이 되어도 좋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하면 귀머거리 되고, 세상에 대해 몰라도 좋고, 나는 주님 만남으로 더는 소원 없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동시에 세상에 누가 저주 받는 가.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다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들은 아직도 소원이 있기 때문에.

계획이 있어요. ‘나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 거야.’ 하는 계획이 있어요. 그거는 이 오묘한 일에 대면 저주 받아야 할 일입니다. 지난 울산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이 하나님의 기준은 주께서 추호도 변경할 마음이 없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내립니다. 따라서 낙엽처럼 떨어지기 전에 주께서 먼저 오묘한 일을 이 땅에서 예수님 보내셔서 정말 예수님 만나서 더는 소원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 빼놓고 다 지옥 보냅니다.

이게 인간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위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위주, 하나님의 계획 위주로 세상을 꾸려나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그 다음에 오늘 말씀의 마지막 대목,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함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모든 말씀을, 율법을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슬람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는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보면 레위기에 돼지고기 먹지마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 사람들이 뭐가 잘 못 됐냐 하면, 그 사람들은 행한 데로 해서 구원을 못 받아요.

행한 데로 해서 구원을 못 받는 데도 불구하고, 행한 데로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을 대체할 중보자가 없어요. 이슬람교는. 그냥 무작정 행하는 거예요. 구약 말씀대로, 그리고 코란대로. 그냥 행하는 거예요. 유대교도 마찬가지예요. 중보자가 없어요.

중보자가 없으니까 그냥 행하는 거예요. 이슬람교가 그렇고 유대교가 그래요. 이제 마지막 남았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그래요. 오늘날. 기가 차지요. 천주교 기독교가 그래요. 중보자가 뭐하는 분인 지도 몰라요. 철거된 담에는 줄을 그을 필요가 없다고. 자아가 없어졌는 데 무슨 내가 행할 게 있어요. 행해도 내 안에 다른 분, 오묘한 분이 행해야지요. 이게 중첩되어야 하거든요.

내 안에 또 다른 분.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도 쑥~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제 운전대를 그분이 잡는 겁니다.
영화 ‘아이언 맨’ 보신 적 있으십니까?
철갑 속에 사람이 들어 있어서 사람이 운전 하는 거예요.
바깥에 로봇.
우리는 철저하게 로봇이 되게 되면 우리에게는 더는 소원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더는 소원이 없어요.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데로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거든요. 이슬람교 적인 기독교, 유대교 적인 기독교, 불교적인 기독교 교인들이 하는 말이 “여기 신명기 29장 29절에 ‘우리로, 구원 받은,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행해야지. 성령 받고 예수 믿었으니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줘야지”라고 이야기 했을 때 우리는 뭐라고 이 이슬람교에 반박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 반박거리 두 가지 오늘 특별히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지고 “봐, 예수 믿고 율법을 행해야 하잖아”하는 사람에게 들이 대시길 바랍니다. 그런 기회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첫 번째는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여기에 사랑이 나와요. 사랑으로 행하라. 모든 율법은 신약에 와서 사랑으로 완성이 되죠. 그 사랑이 밖으로 방출되게 하는 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사랑으로 행하려면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지요. 사랑은 절대로 혼자서 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나르시스즘이라고 하죠. 자기애. 사랑은 반드시 상대가 있어요. 상대와 나 사이에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내 안에 있어줘서 나는 내 일을 할 모든 것이 금지 되고, 내 안에 계신 분이 나를 통해서 행할 때,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완성이 되는 거예요. 사랑은 1이 아니고 2가 되고 2가 되어서 그 사이에 생기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자아를 갖고 있으니까 최종적으로 하나예요. 하지만 성도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내가 두 조각나요. 내가 있고, 내 안에 쑥~들어오신 예수님 계시고. 그분은 영이고 나는 육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둘 사이에서 그분을 남편이라고 이야기 하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남편 되시는 그분은 말씀의 율법을 완성을 가지고, 그냥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완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위로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오해 할까 싶어서 제가 마태복음 9장 15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는 말은 내가 혼인집에 가서 뷔페를 얼마나 맛난 것을 먹었느냐를, 내가 얼마나 이익이 있느냐를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나 말고 누가 들락거리냐가 중요해요. ‘예수님이 오셨다. 감사하다. 예수님을 잃어 버렸다. 슬프다.’ 

그러니까 정말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기적으로 나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서 예수님 생각, 예수님의 십자가 생각이 옅어지게 되어서, 그게 슬퍼지게 되면 나는 나만이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님을 확인할 수 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부부가 싸우다가 하나 죽고 난 뒤에는 그렇게 그리워하잖아요. 인간극장 보면 얼마 전에 나왔어요. 경남 하만인가 거기에 보면 언니 둘하고 사는데 나이가 56세인데 남편이 몇 달 전에 죽었답니다. 남편이 그리워서 미치겠는 거예요.

그러면 부부가 같이 있을 때 그립다 해야 하는 데, 또 같이 있으면 말을 안 해요. 말을 하라고, 사랑하라고 그렇게 하면, “나는 경상도 여자기 때문에 꼭 말로 해야 하나?” 그놈의 경상도 아무튼 편리하기도 해요. 내가 보니 전라도도 말 안 해요.

있을 때 좀 말하지, 꼭 없을 때 찾는다고요, 힘들다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둘 사이에 관계인데 이 관계에 있어서 상대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안에 내 존재의 근거가 있는 게 아니고 내 맞은편에 내 존재의 근거가 있는 거예요.

그분 때문에 내가 사는 거예요.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라는 이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생각하는 사람, 성도의 특징이에요. 참, 이런 이야기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죠.

그래서 여기 보게 되면, 아까 고린도전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고린도전서 16장에 “너희는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라”예요. 너의 솜씨 내세우지 말고 “나 이렇게 개판인데 우리 주님 때문에 산다” 그걸 그대로 살면 돼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어디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기억 못하실까봐 다시 묻습니다. “예수 믿었으면 바르게 살고 거룩에다 뭐를 더하고 이런 식으로 온유하게 살아야지”하고 성경 들이 댈 때에,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나에게서 나오면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나를 사랑하신 분으로부터 그 사랑이 나오면 그 자체가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반드시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고 고백이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한 적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더불어 같이 나와야 돼요. 수반해서. 요한 1서 4장에 나온 이야기고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말은 우리 몸이 주님 사랑을 증거 하는, 울산 강의에서도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도마 있잖아요. 고등어, 갈치 위에 놓고 자르는 그 도마.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마로 사용하세요. 도마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도마에다가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요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 사랑을 들어내면 되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가 필수적으로 따라 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 걱정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 정도는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할 거예요. 아까 뭐 패션쇼, 사도 바울이 구경거리 되는데, “그건 뭐, 사도니까 할 수 있고, 나도 뭐 그러면 그러죠.” 하거든요. 그런데 이 부분 들어보시고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는가를 한 번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거 됩니까? 남을 위해서 내 목숨 바치는 거, 이거 됩니까?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이것은, 소위, ‘예수 믿었으니까 성령 받았으니까 이제 착한 일 해야지’ 하는 사람에게 이 본문을 들이 대 보세요. 착하다고요? 그럼 내가 돈 5억이 필요한데 5억 줄래? 네 목숨이 필요한데 간 떼어 줄래? 간보다도 내가 네 덕분에 좀 더 살고 싶은데 너는 그만 살래? 하면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세요.

어느 누구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의 최종 목표가 자기가 살아남는 거예요. 아까 한 거 다시 이야기 합니다. 오묘한 것을 가로막는 게 뭐냐? 이러 이러해서 살겠다는 것이 오묘함을 가로 막는 악마의 원수적인 작태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이런 말씀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할 때에 우리는 이렇게 대우하시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고 온 율법을 이룹니다. 뭐냐 하면 “주여, 이거 못합니다.” 참 쉽지요. “돈을 사랑하는 게 일만 악의 뿌리다” “주여, 저 못합니다.”

그럼 주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네가 한다 못한다는 일체 개입할 수 없다” ‘한다 못한다’ 그 말 듣고 나를 내치지 않습니다. “네가 한다 해도 못하는 거고, 못한다 해도 못하는 거고. 그래서 나는 너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쓰레기로 만들어서 이런 인간도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겠다”는 것이 사랑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면 될 걸, 자기 스스로 자기 구원받는 티낸다고 어설프게, 믿음도 없는 게 믿는 척 하려고 얼마나 위선 떨었습니까. 주여, 못함을 감사하면서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


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