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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언약의 연결(신31;1-4) 1712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2. 10. 17:55

모세언약의 연결(신명기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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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12-10 15:50 
모세 언약의 연결 

2017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신명기 31:1-4 

(31:1)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베푸니라 

(31:2) 곧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1: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너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게 하실 것이며 

(31:4)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모세는 약속의 땅 입성에 합류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귀하게 쓰시던 모세를 왜 죽입니까? 죽는다는 것이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차원의 실패는 오직 ‘언약의 연속성’이 훼손될 상황을 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개인 사정의 실패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곧 언약의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이 죽는 것도 실패가 아닙니다. 즉 언약을 위해서 모세는 죽어야 될 때에 죽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죽으면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언약의 어떤 단면을 열어보이느냐입니다. 

달리 말해서, 모세로 하여금 기어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그 조치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과 관련 있다는 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언약 완성 단계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비-온전함의 모델로 거론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심판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여전히 구약적 발상을 가졌고 그래서 율법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11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크게 높이면서도 ‘지극한 작은 자’를 주님이 또 함께 거론하십니다. ‘지극히’ 단어까지 집어넣으면서 말입니다. 질적으로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점에 다를까요? 세례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는 이런 분이었습니다. 착한 분으로 오셔서 나쁜 사람을 착하게 고쳐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3:11-14에 보면, “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메시야는 이 땅에서 죄인으로 오셨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락없는 죄인의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세례요한으로서는 충격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그 어떤 자의적 노력으로도 하늘나라에서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전부 죽이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살리려는 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대표적으로 죄인으로 보내신 자신의 아들 뿐입니다. 인간을 살려주겠다는 것은 악마가 제안한 일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안 죽는 방식으로 삶을 삽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욕망은 그 대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욕망은 자신을 대상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는 간격을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욕망의 대상이 욕망하는 나 내부까지 쳐들어오면, “내가 너를 욕망했다”는 주체적 의지가 다 깨어지기 때문에 내가 싫은 겁니다. 따라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욕망하는 것은 실은 가짜 예수에 영원히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노리개감으로서의 예수일 뿐입니다. 영원히 천국까지 나를 살려내고자 말리라는 일념으로 예수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소자’는 어떻게 생겨난 겁니까? 자아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충동 때문입니다. 충동이란 자아가 거부하기 전에 이미 자아를 덮치고 점령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언약의 충동이 모세와 그리고 후계자 여호수아를 덮치고 이끕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나 여호수아는 언약 앞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니다.(롬 14:8) 언약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인도할 자격자는 없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언약 내용의 완성자’임을 증명하십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존재 취지나 여호수아의 존재 취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흔적’입니다. 흔적이란 쉽게 풀이하면 이러합니다. ‘5-5=0’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으로 보면 이 피조물 세계에 대해서는 ‘5-5=1’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1’이란 평소에 ‘5’와 더불어 있었던 그 토대로서의 언약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없는 것 곧 ‘0’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0’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모든 게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자리에 ‘한결같은 토대’로서의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과 비교해서 절대적 ‘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1’이 아프고, 수난받고, 미움받습니다. 도대체 이 고귀하고 영원한 ‘1’를 핍박하는 요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육이 내뿜는 저주성입니다. 육의 저주성은 육의 고유한 성질로 인하여 생겨납니다. 즉 육은 저주를 더욱더 쌓게 하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버리고 세상 쪽으로 신나게 돌아서는 것이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라, 이 땅이 저주받기에 합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저주받을 자를 그렇게 다루시고 계시는 겁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의를 쌓지 못하는 이유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인간의 육이 저주를 유발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5에 보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날’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계시는 겁니다. ‘진노의 날’를 성사시키는 위해서 조금도 하자없이 철저하게 실시하고자 합니다. 모세의 육적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셔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가는 근거로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세가 분노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쳤다는 것을 내세우십니다.(민 20:11-12) 

하지만 모세는 비록 약속의 땅은 못 밟아봤지만 천국에는 갔습니다.(마 17:3)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언약의 일꾼으로 사용하여 언약의 관점에 바라본 삶과 죽음을 알리는 경계선으로 삼은 겁니다. 이점은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언약의 흔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3강-신 31장 1 – 4절(모세언약의 연결 )171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1장 1 – 4절입니다. 구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베푸니라, 곧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오늘날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너희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앞서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모세가 죽으면서,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어디서 죽는가와 왜 죽어야 되는가를 아울러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하나 죽여도 그냥 자기 백성을 쓸모없이 죽이는 법은 없어요. 로마서에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뽑아 낼 것 다 뽑아내시는 겁니다.

모세가 어디서 죽었느냐, 그리고 모세가 왜 죽었느냐, 더 중요한 것은 모세에게 이 백성을 인도할 때에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가나안 땅을 의도적으로 못 보게 하시는 이유를 너희가 아느냐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씀을 하는 순간에 무엇이 떨어져 나가느냐 하면 ‘나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싫어, 죽는 건 겁나’라는 그런 자아와 결부된 떨어지지 않는 이 두려움을 주께서는 강제로 이걸 두 쪽으로 떼 내는 거죠.

죽어도 괜찮은 요소가 살아있을 때 이미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살아있는 것이 네가 살고 싶어서 살려 준 게 아니고 아직까지 떨어질 때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너에게 붙어 있었지, 이제 때가 되매 너라는 육과 하나님의 의도하고는 떨어져 나갈 때가 되었기 때문에 죽었을 뿐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표 떼듯이 떼는 것이지 우리를 미워해서 우리에게 감정이 많아서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쓸 곳에 다 썼다 싶으면 떼는 거예요. 어떤 분이 죽음이 뭔지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질문을 하시기도 하는데 저는 그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광물’이라고.

광물이라는 말은 그냥 굴러다니는 광물성 있잖아요, 철광석 같은. 그게 죽음이에요. 자기 소견, 자기 의견, 자기 결심, 자기 선택 그거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겁니다. 돌멩이가 그냥 길에 바람 불면 굴러다니듯 굴러다니는 것처럼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름대로 부지런히 뭔가 설치를 하고 열심히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광물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뜻 아니었고, 내 주장 아니었고, 내 결심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덮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점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나는 죽는 게 싫어서 내가 나를 기어이 살려 내야해’라고 하면서 버티고 있는데 저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욕망’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욕망.

여기서 욕망과 충동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욕망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게 필요해서 내 앞에 내가 끌어당기는 것을 욕망이라 합니다. 욕망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그 대상이 결코 내게 들어오지 않는 특징이 있어요. 다만 이용할 뿐이지 내 속까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욕망은 우리가 예수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욕망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거는 내 욕심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 안에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만약에 내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해 버리면 무엇이 죽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가 다 박살 나 버려요.

그게 싫은 거예요. 내가 잘 해서 구원 받고 싶어요. 내가 열심히 헌신하고, 헌금하고, 충성해서 칭찬 받고 싶어요. 그걸 욕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욕망 이야기 하니까 벌써 인상들이 안 좋은데, ‘아우, 그래가지고는 나는 구원 못 받잖아’라고 걱정들을 하시는 것 같은데 욕망 말고 딴 거 또 있습니다. ‘충동’입니다.

충동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이미 들어와 있는 걸 충동이라 해요. 들어와 있기 때문에 충동은 욕망을 비켜갑니다. 욕망 따로 놀고 충동 따로 놉니다. 사람들은 비겁한 변명을 합니다. “나는 저 여자가 맘에 들어.” 이거는 마치 남들 앞에 내가 선택해서 그 여자를 좋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그 여자가 나타날 때 내 마음 속에는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동이 벌써 벌어진 거예요.

주님께서 구원 할 때는 보쌈 하듯이 구원한다고 했지요. 이렇게 은혜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보쌈을 해가지고 옴팍 건져 버립니다. 그러면 그 주님의 충동이 내 욕망을 무시하고 계속 화살 쏘듯이 쏘아 댑니다. 사냥꾼이 노루 사냥하다 보면 노루에게 화살을 쏘고 난 뒤 사냥꾼 한 열 댓 명이 와가지고 노루를 잡았다고 보면 화살이 한두 개 꽂힌 게 아니고 열 명이 쏜 화살이 거기에 다 꽂혀 있잖아요. 그러면 노루는 여기저기 화살 덩어리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겠다’라고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지만 막상 구원 되고부터는 그동안 내가 생각 안했던 그러한 일들까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용도로 이미 나한테 찾아 온 거예요. 모든 매사가, 뭐 사윗감 얻는 것도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요, 며느릿감 얻는 것도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고. ‘내가 교회 가서 예수 믿는다.’는 이런 것만 딱 다가오지 그런 것은 관련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다 돌아보게 되면 그런 것이 구원과 다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교회 나와서 하는 거 말고 어디 가서 사업 벌이는 것도 내 구원과 관련 있습니까?”“있습니다.”“어떻게 있습니까?”바로 그 내가 상관없다고 여기는 그 자리까지 우리 친절하신 율법이 다 찾아가요. 다 찾아가서 “먹고, 마시고,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돈을 사랑하는 건 일만 악의 뿌리다.”하는 식으로 이미 구원 받은 충동에서 나온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온 사랑의 음성이 그 가지가 가지를 쳐가지고 모든 구석구석 일상생활에 다 파급을 시켜 놨어요.

모든 곳에서, 어디 하나 예외 없이, 구석구석 모세혈관까지 다 찾아가서 주님께서는 뭘 들춰내느냐하면 내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천국과는 상관없이 저주를 유발하는 요건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설쳤다는 것을 다 폭로시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죠.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충동적으로 줄 때는 이미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는 것으로 정해 놓으셨어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으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우리는 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을 수밖에 없었느냐, 왜 내가 착하게 사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느냐’라고 의아해 하고 황당해 하죠.

거기에 주의 피에서 파급된 말씀이 다 구석구석 화살처럼 쏘아 데면 ‘아, 이러니까 우리는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한다.’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지만 신약에 보면 세례요한이 나오거든요. 그 세례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냐 하면 “여자로부터 태어난 사람 중에 제일 위대한 것은 세례요한이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이 작은 아이도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다”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에게 뭔가 비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죠. 비교하란 말이죠.

천국에서 작은 자와 구약에서 큰 자인 세례요한과 어떤 차이가 있는 가 그 차이를 뚜렷하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 차이를.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칭찬하신듯하지만 사실은 엿 먹이죠. 왜냐 하면 천국에 작은 아이라도 세례요한 보다 큰 자라고 했단 말이죠.

이 만큼 띄워 놓고, 천국의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 보다 크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세례요한은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파악을 해야 돼요. 세례요한은 뭐라고 오해를 했냐면 이런 오해를 했어요. 착한 분이 이 땅에 와서 착하게 우리를 건지고 우리를 데리고 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누가? 세례요한이.

정말 착한 분이 오셔가지고 죄 많은 우리를 데리고 천국 가는 그것이 구원이라는 거예요. 가시면서 우리보고 나처럼 이렇게 착한 일 시키면 같이 동반해서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세례요한의 주장이었습니다.

그게 누가복음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메시아가 심판 날 오는데 어떻게 살면 됩니까?”라고 물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두 벌 옷이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고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요”이건 누구든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요즘 교계나 한국 교회, 미국 교회보고 “아,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선언한 판에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면 세례요한 같으면 이렇게 했어요. “한 40만 불 정도면 벙커하나 살 수 있습니다. 벙커하나 사게 되면 마지막 아마겟돈 핵전쟁에 피할 수 있어요. 거기서 생수 다 나옵니다. 기관총까지 설비 되어있어요. 다른 사람이 건빵 훔치러 오면 총으로 쏴버리면 됩니다.”

요즘 벙커가 그렇게 잘 팔린 데요. 북한에 핵폭탄 같은 이런 게 잘 팔린답니다. 미국에는 이상한 기독교가 있어가지고 마지막 때에 환란이 있게 되면 지하 벙커를 구입한 사람만 살고 나머지는 핵폭탄에 다 죽는다는 겁니다. 살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가격은 한 40만 불에서 100만 불됩니다. 돈 얼마 안 해요. 뭐 4억 내지 10억 정도. 푼돈이지 뭐. 죽는 거 보다 낫지. 그게 지금 주문이 쇄도하고 있는 거예요. 적어도 3년 정도는 핵폭탄 해가지고 핵진 날아가는 3년 기간은 다 버틸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세례요한이에요.

세례요한은 요령껏 하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제일 작은 자보다 못한 자냐 하면 천국에 있는 자는 어떤 자냐 하면 의인이 온 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죄인을 보내신 거예요. 이 땅에서.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나보다 착한 분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 세례요한에게 자기보다 더 심한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도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크게 오해한 겁니다. 크게 잘 못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살리는 일이 아니고 우리를 죽이는 일이에요. 살리는 일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만 살리느냐, 자기 아들 예수만 살립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빠져나가는 그것을 보라는 말이죠. 그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겉돌아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낸 그 아들만 살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아, 우리는 애초부터 구원 되어서도 안 되고, 구원 될 수도 없고, 천국 가서는 안 되는 구나, 아 그렇구나.’하면서 자인하면 되는 겁니다. 그냥 인정하면 돼요. 참 쉽죠.

여러분 평소 하시는 데로 사세요. 지옥 가십니다. 그리고 평소대로 안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건 아닙니다. 안 해도 지옥가고 사시는 데로 살아도 지옥가요. 그게 인간의 마땅함이에요. 설교 여기서 끝낼까요?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천국에 작은 자가 있잖아요.

그럼 도대체 천국의 작은 자는 무슨 빽으로 어떻게 그렇게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모세 다음에 여호수아예요. 모세 다음 여호수아. 그런데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건너오기 전에 반드시 모세가 죽어야 되는 겁니다.

모세가 죽을 때 모세가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못가도록 의도적으로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러면 ‘모세는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아니다.’로 판정 나는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아닙니다.

모세는 같은 이스라엘 소속이기 때문에 인도자가 못 돼요. 인간에게서 나온 인간은 인간을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모세로 이스라엘은 망해야 하는데 여호수아는 뭐고,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에 걸려있는 그 관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자식이 아니에요. 육적인 자식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에 전달되면서 오늘 본문에 나오거든요. 모세 쭉 가다가 여호수아로 전달되면서 뭘 남겼느냐 하면 인간은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자, 흔적이라는 말은 이번 수련회 1월 7일부터 하는데 수련회 교재 보면 흔적에 대해서 언급해 놓았습니다. 흔적은 뭐냐. 5 빼기 5는 무엇일까요?

5 빼기 5는 0 이 아니고 1입니다. 과학에서는 5 빼기 5가 0 이고 3 빼기 3은 0 이고 17 빼기 17은 0 이에요. 그러나 언약에서는 성경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실제에서는 7 빼기 7이 1 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뺐다는 그것이 하나의 흔적으로 숫자로 쳐야 돼요.

원래 5가 있었는데 누가 손대서 5를 뺐다는 그 작업, 그 과정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게 1이에요. 그래서 0 은 사실은 1을 의미합니다. ‘0 이 나오도록 누가 있는 데서 없게 하셨습니다.’라는 그 흔적이 하나로 마지막에 있어야 돼요. 1 이 흔적으로.

그 흔적이 뭐냐 하면 지상의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가 뭐냐. 이 땅에 언약의 흔적이 있어야 돼요. 남들 보기엔 죽었다고 어떤 복음 믿는 사람이 죽었다면 다른 사람 보기엔 그냥 ‘죽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죽었다’가 돼버리면 이 세상에 통용되는 ‘제로’가 되요. 살았다가 죽었으니 제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냥 성도가 죽는데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언약의 흔적을 남기고 죽었으니까 그 사람은 숫자 1로써 하나님이 간주해 버립니다. 그 숫자 1 이 다 모이면 언약의 숫자가 되고 그 숫자를 가지고 144,000이라고 요한계시록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144,000은 그냥 숫자로부터 바로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열두 지파와 관련이 되어 있고 열두 지파가 1만 2000, 열두 지파가 곱하기 12해서 144,000이고 그 열두 지파는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의 의해서 생겨난 흔적으로써 열두 지파예요.

그러니까 흔적 있는 자가 다 모인 이것이 144,000입니다. 흔적 있는 사람 다 모이라는 말은 살아 있을 동안에도 언약의 흔적을 지닌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거예요. 따라서 죽는 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죽는 다는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고 그 언약과 이제는 광물체 되는 이 흙덩어리하고 하나님의 언약과 뚝 떼어 놓는 겁니다.

주께서 쓸 곳에 다 쓰고 이제는 회수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껏 너를 언약대로 이끌었다. 안녕, 모세. 이 모세 같은 인간아, 나는 이제 여호수아에게 인계할게.” 그것 떼 내면서 언약이 다시 돋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스라엘 인도했던 모세로 하여금 어디서 죽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죽는 게 아닙니다. 광야에서 죽는 게 아니에요. 어디서 죽는가, 약속의 땅이 보이는 경계선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는 그냥 라면 먹고 일반적으로 살다 가지만 그들은 경계에 선 사람들이에요. 언약도 보여주고 이 세상의 허접함도 같이 보여주고. 그 경계선에서 양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서울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사람이 동탄에 아파트 있는데 신월동에 아주 후진 곳 있어요. 재개발 들어간. 신월동에 얼쩡거리면 신월동 사람들이 “너네 집 가!”하면 “갈게, 동탄으로.”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어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작자가 이 동네 돌아다니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남들 앞에서 “너네 집에 가!”하면 “그래, 갈게!”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언약의 흔적으로써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묻는 것은 왜 모세로 하여금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약속의 땅에 간다 하면서도 왜 자기는 광야와 경계선 사이에서 죽고 마느냐. 그것은 인간의 육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인간이 저주 받을 요건들을 마저 채우는 성질들이 나와요.

인간의 저주 받을 이유가 되는 요건을 채우는 성질들이 육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2장 5절에서 나와요.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구나”여기, 진노를 네게 쌓는 다는 대목이 나와요. 이, 진노를 네게 쌓는 다는 대목이 육을 가진 모든 인간의 일상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뭐냐 하면 자꾸 어떤 일을 벌이고 생각들을 하는 데 그 생각들이 뭐냐 하면, 그 생각들과 어디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와 저주를 마저 채우기 위해서 계속 유인 받고 있는 식으로 행동이 옮겨 가는 겁니다. 

계속 유인 받고 있어요. 하나 예를 들면 ‘교회 와서 은혜를 받아서 이제는 언약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하는 그 순간에 순간이지만 교회 문이 유리문이라 투명해서 그런지 문만 나가면 다 잊어 버려요. 유리문 나가서는 그 다음부터 ‘오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더라..’하고 스케줄 데로 살아가게 되면 거기에 매혹되고 거기에 치중하게 되는 그것의 끈 뒤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진노의 요건을 충실하게 채우는 일들과 관련되어 있어요. 내가 죽어도 마땅한 이유들과 연결되어 있어요.

동물의 왕국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아프리카에서 개미를 먹고 사는 어떤 동물은요 삼각형으로 땅을 파가지고 미끄러지게 만들어서 한번 미끄러지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삼각 굴에서 못 나오듯이 인간은 자동적으로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옹알옹알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 할 때부터 제 마음에 있는 모든 외치는 욕망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꾸 쌓고 또 쌓고 적금 붓듯이 계속 붓는 거예요. 이 육이. 그러니까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게 없다는 걸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은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교회 와서 예수 믿어야지.’ 하면 교회 와서 예수 믿는 그것으로 그 사람은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욕망하기 때문에. 자, 이 욕망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되 대상과 나는 별개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절대로 내 것으로 전환이 안돼요. 왜? 내가 그 욕망의 대상을 내가 선택했고 내 것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내 앞에 똘마니로 내 앞에 있어요. 예수가 되었든, 삼위일체든, 누가 되었든 나의 똘마니가 되는 거예요.

왜? 내가 나 살기 위해서 예수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예수는 마귀가 앞장세운 예수죠. 모세가 그랬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이용했다면 모세는 기어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자 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모세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의 저주 받을 짓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걸 제가 아까 충동이라고 했는데, 충동이라는 언약에 의해서 보쌈 싸이게 되면 모세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언약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간 이유가 민수기 20장 12절에 나와 있어요.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내 영광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이 약속의 땅에 못 간다.”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 위주일 것 같으면 영광을 보이도록 하면 될 텐데 그냥 반석에서 물주면 될 걸 꼭 모세에게 시켜서 모세가 성질나게 만들었어요. 

성질나게 만들어서 작대기 가지고 반석을 2번 치게 만들었어요. 탕!탕! 참, 하나님도 그렇지, 한번 치나 두 번 치나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거예요? 진짜 하나님 뒤끝 있다. 성질나서 한 번치나 두 번치나 그게 뭐 문제가 된다고 그걸 빌미 삼아서 약속에 땅에 못 가게 하시냔 말이죠. 그런데 모세는 나중에 알게 되요. 자기를 약속에 땅에 못 가게 함으로써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모세는 천국에 가서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그렇게 가는 거예요.

절대로 내 뜻을 받아 주지 않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겁니다. 왜? 천국 가서 주님의 뜻이라고 원 없이 외치기 때문에. 원 없이. “내가 예수 믿는 거 안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거 인정 했더라면 나는 지금 지옥 가 있어요.”

나의 욕망대로 하지 않고 ‘왜 예수 믿게 했지? 왜 교회 오게 했지? 이거 내 취미 아닌데. 나는 내 육이 하고 싶은 거 따로 있는데.’ 그런데 그거 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우세하게, 하나님의 일이 더 우세한 거예요. 힘이 더 센 거예요. 

모세 고집보다 하나님의 고집이 더 센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피’라는 바닥을 깔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 흘리는 그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본인이 하신 자존심이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의 착함이 섞이지 않도록 우리의 열심이 섞이지 않도록 “그런 것은 지옥에나 갖다 버려라”하시며 계속 밀어내면서 오직 피만이 뚜렷하게 너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식으로 이렇게 모세도 인도하고 여호수아도 인도하고 그 다음 차례는 우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알았다 했는데 막상 복음을 안게 아니라 우리의 욕심이었고 욕망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분은 주님인데 마치 우리가 말씀을 순종해서 구원되는 것처럼 그렇게들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피만, 주님의 거저주시는 사랑만 극대화 하는 그런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주와 함께하는 생활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