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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신30;5-10) 1711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20. 07:13
2017-11-19 15:02:49조회 : 38         
   마음의 할례(2) 171119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마음의 할례(2)(신명기 30:5-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YYAXVqWatQ, Hit:1
 이근호17-11-19 15:37 

마음의 할례 (2) 

2017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신명기 30:5-10 

(30: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30: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30: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인생이란 그 자체로 허무합니다. 죽음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살다보니 죽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의도가 담긴 채 인생을 보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세상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필연적 현상을 보이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담은 ‘언약’이라는 것을 제공해주셨는데 그 상대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이 아브라함에서는 ‘할례’라는 언약을 신체에 새기게 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이렇게 되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의 운반체가 됩니다. 그것도 대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신에 새겨진 이 할례 표징과 결부해서 추가적인 언약적 조치가 연이어 주어집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가서 종결되느냐 하며는 바로 ‘마음의 할례’의 완성에 이릅니다. 할례란 ‘둥글게 도려내는 행위’입니다. 육신은 칼로서 그것이 가능하지만 마음은 표피도 아니기에 칼들고 구체적으로 도려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음의 할례’를 언급하신 하나님의 뜻이 취소될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할례’는 친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마무리 짓겠다는 것인데 그 완성에 이르는 경로에서 ‘육신의 할례’의 취지가 소멸할 리가 만무합니다. 즉 ‘할례 행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내 백성 못된다’는 취지는 생생하게 살아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이 할례’가 인간의 육신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마음의 할례’란 인간의 마음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즉 마음이 문제가 되면 이 마음에게 제시된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고 이는 뒤따라 저주가 퍼부어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마땅합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할례의 완성은 곧 인간 마음에 ‘언약적 저주’를 심는 바가 되는 겁니다. 

이 저주가 온 몸으로 확대가 되면, 당사자는 더 이상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정당함을 내세울 구역이 점점 좁아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언약 장착자’의 등장은 주변에 ‘언약이 없는 자’와 차별화됩니다. 그러한 대비 구조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자칫 우리가 오해하기를, 언약이 없는 자의 주장은 무시해도 상관없지 아니한가 라는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점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 구원을 위하여 언약을 준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만사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통해서 비-언약의 주장을 진지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바냐 1: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소위 믿는 척이라도 하는 자라도 이런 노골적 주장에 대해서 분개하는 척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위 신앙인들이 평생 수 십년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면서 느끼는 체험은 바로 이 주장이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복도 주고 저주를 내린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보다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음을 확인해주는 사례가 훨씬 더 많은 게 아닐까요? 예레미야 44:17-18은 보다 더 노골적입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바로 이런 주장을 증명해줄 경우들을 우리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는게 아닐까요? 즉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복 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로 인정하기 보다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에게는 복을 꼭 주셔야 합니다는 식으로 떼를 쓰는 것을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우기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는 신자보다 불신자의 우세가 확산되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시편 73:2-5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모독받고 미움받고 핍박받는 상황으로 함께 담겨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대조를 극한까지 끌어가십니다. 그 결과가 빌립보서 3:18에 나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왜 사람들은 십자가를 싫어할까요? 그것은 십자가 안의 완성이 보여주는 바가, 인간의 본성이 노리고 원하는 바를 저주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19-20) 

즉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십자가를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 언약이 장착된 자들은 예수님의 가신 길을 하게 됩니다. 즉 세상 사람들 전혀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 점은 성도 자신이 자기에게 세상적으로 실망을 유도합니다. 

참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주님만 생각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고, 남들이 보지 않더라도 자신만 예수님에게 몰입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타인들의 눈에 비정하고 냉정하게 비쳐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끝날 때에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이 합당한 사랑의 조치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11-20 00:02 
160강-신 30장 5 – 10절(마음의 할례 )1711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0장 5 – 10절입니다. 구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열조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그 토지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그 조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거기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복에 대해서 잔뜩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건이 빠진 상태에서 복을 얻으려고 시도하다 보니까 결국에 우리는 사탄의 올무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이라고 되어 있고 그 사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뭔가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그걸 오늘 설교 제목이 ‘마음의 할례’인데 원래 이 마음의 할례라 하는 것은 본인이 본인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할례를 해주는데, 원래 할례라 하는 것은 창세기 17장 13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시면서 할례를 행하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할례를 행할 때에 본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할례를 그들이 행했다 할지라도 온전히 내가 했다하면 안돼요. 할례라는 그 아이디어가 하나님 쪽에서 언약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냥 언약이 자기 속에 새겨지는 것에 활용되었을 뿐이지 “내가 이거 했으니까 구원해주세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뭔가 외부에서 반도체 칩처럼 자기한테 장착되는 거죠. 할례라는 것이. 그러면 장착되게 되면 그것은 외부적이 것이고, 할례를 행하도록 몸을 제공하는 자기는 자기 자신이 되겠죠. 그러니까 외부적인 것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그 외부적인 것이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암세포처럼 번지게 되어있어요. 육적인 할례가 어디로 넘어가느냐 하면 마음의 할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충분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식까지 해가면서 율법 줘가면서 활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흔히 말하기를 마음의 상처가 있다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상처가 있는 곳이라야 사랑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아가도 마찬가지고 신약에 와서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오늘 본문이 나오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오늘 본문이 나오거든요. 

여기 6절에 보면 “네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사랑에 대해서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냉정한 집착이에요.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유도 모르는 체 상대방에게 집착을 하는데, 집착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비정하고 냉정할 정도로 집착이 강렬한 겁니다. 정신도 없는 거죠. 

그래서 보통 사랑이라는 말 뒤에 붙는 게 있습니다. 사랑에 빠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뭔가 푹 빠져버린 거예요. 경험들 없으시죠? 이용하기 바빠서. 푹 빠지게 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상대가 나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한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바보등신처럼 감사를 할 지경 같으면 이거는 혼을 다 빼앗긴 겁니다. 

이걸 그 사람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 냉정하고 비정하고 차갑다고 합니다. 그걸 세자로 ‘차도남’이라고 합니다. 차가운 남자, 차가운 여자. 사랑에 빠져버리면 외형적으로 사랑이 풍성한 게 아니에요. 굉장히 차가와요. 정신을 딴 데 팔수가 없습니다. 

스마트폰 들고 전화할 정신도 없어요. 그렇게 그런 과정, 그 완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그때는 마음의 할례가 없을 때인 거예요. 마음의 할례는 없는데 뭔가 증후는 있어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이 육체의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게 자꾸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삼세판해서 실패로 끝나면 또 다시 하면 되는데, 하나님에게는 그게 용납이 안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차도남이거든요. 차갑고 냉정해요. 율법을 어기면 곧 바로 저주 들어옵니다. 

육체에 율법을 행했다는 말은 이제는 자꾸 뭐가 번지느냐 하면 하나님께 받은 저주가 자꾸 확장되고 커져가는 겁니다. 저주가. 복하고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주가 극단적인 마지막 저주까지 다 받아 놓고 “참으로 그게 합당합니다. 정말 적절한 조치였습니다.”라고 할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은 마음의 할례에 도달한 경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을 때에는 이 암세포가, 저주의 세포가 나의 온 구석 다 돌아다니면서 다 파먹는 거예요. 컴퓨터 게임하는 것처럼 온 구석구석 다 돌아다니면서 잡아먹어서 어느 구석하나 저주 아닌 곳이 없도록 다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2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앞에서 저주이야기를 몇 줄을 갖다 부어요. 저주 이야기를. 모든 인간은 저주 받기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쫙 이야기 해 놓고 심지어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저주에서 면제될 인간은 없다는 것으로 쭉 갑니다. 

로마서 2장 앞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하시면서 네가 하는 그것이 마음의 할례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육신의 할례를 가졌다고 유대인들은 자랑하는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마음의 할례를 해야지 육신의 할례 가지고는 저주를 버텨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1장, 2장의 이야기예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헬라인 이방인들은 아예 할례조차도 없으니까. 

근데 그 저주가 뭐냐 하면 우리를 괴롭히려고 저주한 게 아니에요. 포항의 지진이 우리 괴롭히려고 저주한 게 아니고 마음의 할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진노의 날에 징조를 주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못살겠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래 너는 살 자격도 없는 거야. 왜 그걸 몰라.” 라는 식으로 다그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속에 저주를 계속 새기는 이유가 저주를 새기면 새길수록 오늘 본문 말씀이 분명해 지거든요. 죄 많은 우리 몸을 통해서 오늘 신명기 말씀이 증명이 되요. “마음의 할례 받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 받으면 하나님께서 네게 줄 복을 다 줄 거야” 이거는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게임을 할 때 우리와 협의를 안 하고 우리를 불러다 앉혀 놓고 일방적으로 자기 게임을 우리에게 통보를 하는 식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언제 주님의 마음의 할례 행해서, 언제 사랑해서, 언제 하나님에게 합당해서 천국 가겠습니까?”라고 할 때는 그 이야기는 저주 이야기 듣게 되면 이거는 우리에게 아예 해당사항이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마음의 할례 행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천국가고 하는 우리 나름대로의 이런 계획 자체가 용납이 안돼요. 

사랑의 절정에 대해서 어느 노래 가사에 보면 잘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이은미씨가 불렀던 ‘애인 있어요’라는 노래예요. 이게 아까 전에 이야기 했던 겁니다. 너무 빠졌기 때문에 다른 게 안 보인다는 말이죠. 

그냥 그 사람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못 봐요. 내 눈에만 보이는 거예요. 뭐 찬송가가 따로 있습니까? 의미만 주면 다 찬송가 되죠.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할례가 시간을 보내면서 신약에서 어떻게 마음의 할례로 완성이 되는가하는 그 과정을 추적해야 되죠. 

왜 우리를 갉아 먹는가, 왜 우리에게 기대를 한다든지 격려를 하는 식이 아니라. 격려 같으면 아예 저주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죠. “그래 못 지켰냐?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또 기회를 줄게.” 이렇게 나오시는 게 아니고 저주는 저주대로 다 적용시키고 계속 마음의 할례를 요청하니까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육체의 할례밖에 없어요. 육체의 할례를 우리가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육체의 할례의 취지와 마음의 할례의 취지가 서로 통하는 게 있을 텐데 그 통하는 것이 뭐냐. 더러운 것을 잘라내는 거예요. 그러면 더러운 것을 잘라 낼 때, 코 잘라내고 머리카락 잘라내고 이러면 안돼요. 왜냐면 머리카락 잘라 낸다고 해서 죄가 멈추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어디를 잘라내느냐 하면 우리의 죄가 계속해서 연속 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 지점은 한 지점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번식하게 만드는 어떤 지점이 있어요. 남성의 생식기죠. 여성은 왜 할례가 없는가. 아예 없으니까 그렇죠. 그러면 남성은? 있으니까 잘라내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는 처음부터 문제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 있었는데 그 생식기를 잘라냄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다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부모의 성관계로부터 태어난 너의 신체 자체가 다 문제 있는 거예요. 모든 게 몽땅 다 문제가 있어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그 말씀에 대처하지 말고 이 몸을 가지고 증명하면 되는 겁니다. 

나의 위신을 위해서 증명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합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그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줬는데 시간이라는 것이 이런 거예요.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미래를 살면 우리가 미래를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고 미래를 살면 살수록 계속해서 과거만 쌓여요. 그렇죠? 내일되면 오늘이 과거 되잖아요. 

그래서 그 만큼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과거가 누적이 되고 비축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한평생 다 살았다고 칩시다. 이제 곧 10초 뒤에 죽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우리는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미래도 없고, 현재도 이동하기 때문에 없고, 전부다 뭐냐 하면 과거뿐이에요. 

그 과거를 통해서 통째를 통해서 우리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나님께서는 증명하고자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인생이라 하는 것은 고생과 고난뿐이라는 겁니다. 시편 90편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앞에 전제 되는 게 있어요. 인간 중에서 의로운 인간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하고 일방적으로 게임을 벌이는 거예요. “너한테는 의가 없어. 너는 복 받을 자격 없어. 내기 해?”라고 주님께서 혼자 이야기 해 놓고 “내기 하자” 하시는 거죠. 우리는 내기하자 한적 없는데 하나님께서 홀로 스스로를 증명해 버리는 식으로 우리를 활용하는 겁니다. 욥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욥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만한 믿음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탄에게 이야기 해 놓고, 시달리기는 욥만 아무 이유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유 없이 고난 받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나쁜 짓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나쁜 짓인지도 몰라요. 뭐가 나쁘고 옳은 짓인지를 우리는 억지를 부려서 내 기준을 내세우는데, 그 기준 철회하세요. 

잘되면 운이 7이고 노력이 3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도 철회하세요. 다 쓸데없어요. 사주팔자 그런 것도 필요 없고요. 그냥 잘되든 못되든 그게 저주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있는데, 그 저주를 저주로 합당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 다른 인생을 살게 해요. 

진짜 저주 받는 쪽, 진짜 영원한 저주, 마지막에 저주 받는 쪽과 그리고 저주를 받으면서도 천국으로 미끄러져가는 그러한 택한 백성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저주 받는 쪽에서 어떤 발언을 내세우는지, 어떤 주장을 하는 지를 성경에서 나타냅니다. 

스바냐1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그들이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도 내리지 아니하고 화도 내리지 아니한다고 성경에 나올 때, 우리는 이 성경의 취지는 모르고 ‘그렇지, 안 믿는 사람은 이런 엉터리 소리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라고 왜 안 믿는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하는지 그들의 주장을, 그들의 심중을 한번 헤아려보자는 거예요. 

헤아려 볼 것도 없어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교육받은 게 이겁니다. “너의 하기 나름으로 복 받지 하나님이 복주고 벌주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신은 인간이 만든 거야. 그런 신은 없는 거야.”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까. 

사실 교회 의자에 앉아 있지만 이 안 믿는 사람의 주장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인생은 너의 하기 나름이야.” 라는 것으로 우리는 이중 삼중 백중으로 그런 소리에 둘둘 감겨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척 한다고 “하나님께서 복 주셨습니다.”라고 하지만 주께서 가슴을 푹 쑤십니다. “솔직히 이야기 해봐. 하나님이 복 주신거야, 네가 복 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복을 주신거야? 복 받을 원인을 네가 제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안주면 안 되겠지? 그런 생각이 더 강렬하잖아. 솔직히 이야기 해봐.” 하면서 푹 푹 쑤시는 거예요. 

계속 쑤시니까 멍들고 멍 들면 마음의 할례 되는 거예요. 교회 이십년, 삼십년 자랑할게 뭔데요? 십년 다니면 뭐하고 이십년 다니면 뭐해요. 목사님 장로님이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스바냐 1장 12절 말씀이 팍 박혀 있는데요. 

“하나님, 누가 봤나? 내가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은 잘했다고 복주고, 십일조 했다고 복주고, 십일조 안했다고 저주하는 그런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있는지 없는지 본 놈이 없다! 내가 솔직히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장로라서 말은 못하고 있다.” 이게 본심이지 하나님 살아계셔서 복주고 저주주고 한다는 정말 그런 분이 있다면 그 사람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요. 

이거는 사랑에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은 드물어요. 여러분, 이 세상은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데 영웅은 300대 1을 뚫을 때는 영웅이에요. “와, 대단하다~ 이번 계대 음대 300명 왔는데 합격했대. 와~3000명 왔는데 됐대. 와~ 대단하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열심히 하고 노력하게 되면 뚫을 수 있다는 약간의 가능성이 있어요. 

영웅이 있어야 이 사회에 희망이 있어요. 그런데 300명 중에 1명 됐대. 이건 미친 거예요. 왜? 내가 따라갈 희망이 없기 때문에. 정신병자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3만명 중에 하나가 아니에요. 수억 분에 하나예요. 

그래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주변사람들한테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왜 내가 못한 소리를 하느냐 이 말이죠. 내가 체험할 수 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 신앙인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적 받은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많은 오해와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가 못한 이야기가 네 입에서 나오는데? 미운 거예요. 연속성이 끊어지니까 미운 거예요. 또 하나 더 볼까요? 예레미야 44장 17절 18절은 그 주장이 가관입니다. 얼마나 가관인지 우리 가슴이 다 시원할 정도예요. 뭐냐 하면 “우리가 하늘 여신을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때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그렇게 교인들이 원하는 복이 여기 나오네요.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지진도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늘 여신을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는 것을 폐한 후에는 핍절하고 가난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하고” 모든 하는 꼬라지가 안돼요. 하는 일이 잘 되는 일이 없어요. 예레미야 44장 17절 18절은 줄 쫙 그어놔야 해요. 이거 액자 만들어서 나눠주고 싶어요.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는 게 우리의 본심인 걸, 이 본심을 누가 속입니까? 이십년 교회 다니고, 세례 받고, 그런 형식적인 거 다 걷어치우세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게 무슨 소용이 있던가요? 우리가 30년 40년 경험하고 경험한 결론은 뭐냐, ‘소용없다’입니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구원 받을라고 할 도리 다 해 봤는데 하나님이 안 도와줘. 나도 할 도리 다 했는데 안 돼. 그건 하나님이 책임 져야지 내 책임 아니에요. 시편 73편 3절~7절은 이건 진짜 가관입니다. 멋진 말씀이에요. 왜 이런 말씀을 사람들은 모르는지 몰라. 

내가 악인의 형통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라. 악인이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이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이 재앙도 없고 세상에 평생토록 예수 안 믿는다고 작심을 한 사람이 죽을 때도 편안하게, 얼마나 인자한지 꼭 석굴암의 부처 같은 얼굴을 하고 아무 고통 없이 “나 잔다.” 하더니만 5초 후에 죽으시고. ‘나도 죽을 때 저래 죽으면 원이 없겠다.’ 할 정도로. 

그런데 그거는 불신자의 몫입니다. 저주 받은 자의 몫이에요. 도대체 이 성경에 우리가 뭔가 희망을 삼아서 그걸 목표로 믿음을 더욱 더 증강할 어떤 내용도 일체 없습니다. 주께서 이러시는 거예요. “이래도 아직 교회 나오나? 바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외쳐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내 눈엔 주님만 보여요~~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내 눈에만 보여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정말인가요? 마태복음 8장 29절에 귀신들린 청년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딱 오니까, 이 말은 얼마 전 부산강의 가서 제가 들었던 말인데,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과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쪽에서 당신 밀어 내고 이제 당신과 나는 없는 관계로 칩시다. 이제는 예수 안 믿을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이야기 하면 다 믿을 거 같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수모를 당한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죠. 이런 말씀이 결국엔 조합해서 빌립보서 3장 18절에 이릅니다. 빌립보서 3장 18~20절을 보게 되면 최종 결론이 정답이 나와 있어요.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내가 통곡하면서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결국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마지막에 “내 눈에만 보여요. 주님 사랑밖에 나 몰라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십자가가 마음의 할례로, 그 더러운 거를 잘라내고 거기에다가 십자가를 꽂아 놓은 게 마음의 할례예요. 

그게 사랑의 전부고, 이게 마지막이에요. 모든 것은 과거만 있어요. 과거, 과거되면 결국에 남는 것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 과거만 살았어요. 그 과거가 뭐냐, 말씀이 말씀대로 과연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주받을 자는 저주 받고 복 받는 자는 친히 우리에게 십자가를 꽂아서 마음의 할례를 완성시킨, 그 마음의 십자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자기 말씀을 완성시킨 토대로써 우리를 활용하신 거예요. 성도를. 

“저의 마침은 멸망이고 저의 신은 배요” 배는 몸, 육신의 배를 가리킵니다.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그들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이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요” 영의 세계에 지진 난 것은 생각도 안하고 포항에 지진 난 것만 며칠 째 계속 뉴스에 나오고 있어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뉴스 나올게 땅의 일밖에 안 나와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가 여기 왜 나옵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오직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에 시민권이 있어요.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 있으면 하늘에 살지 왜 이렇게 땅에 살고 있는지. 그것은 이 땅에 우리의 낮은 몸, 철저하게 낮아진 쓰레기 같은 우리 몸으로, 그 안에 주님께서 독생자의 영광을 심어놓기 때문입니다. 

지난 낮에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밟기 위해 사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남들에게 부러움이 되고 남들에게 인기가 있는 게 있다면 우리는 필히 그 인기 관리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나 이정도로 평가 받기 때문에 이 정도가 나의 것이다, 자아의 것이다’라고 우기는 거. 주께서는 거기에다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은 복도 안줘, 하나님은 아예 없어” 그런 소리를 계속 듣게 해서 그게 우리의 상처가 되게 하고 그 상처가 암 덩어리처럼 온 몸에 퍼지게 하는 겁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 주님의 사랑이 더욱더 넘치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두지 마시고 세상에 대해서 뭔가 안전망을 구축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우리가 발 딛일 곳은 없습니다. 뭐 늙어서 자식에게 기댄다고요? 저 뒤에 있는 자식이 웃겠네요. 

자식이고 뭐고,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기대지 마세요.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 안에 십자가라는 이 피가, 이 보배가 들어 있는 보배 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살고자 하지 않게 하옵소서. 죽어야 될 자이기에 마땅히 죽어야 되는 것이 당연한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기준을 적극 거부하고 나 잘났다하는 기준을 따로 만들어내는 악마의 노림수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