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사망
2017년 12월 3일 본문 말씀: 신명기 30:15-20
(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30: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30: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30: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30: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인간이 원하는 신은 그 내용까지 인간들이 정하기 마련입니다. 신과 교류가 가능한 방식을 인간들이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대해서 인간 쪽에 유리하도록 조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보다 인간이 더 귀하다고 각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버리지 않는 신이라는 조건 하에 인간들은 신을 받듭니다.
이 말은 곧 인간 머리 속에서는 아무리 궁리해도 참된 하나님을 찾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저 가짜 신만을 상상하고 그런 신만이 좋은 신이라고 단정짓게 됩니다. 인간에게 끝까지 관대하고 인간이 비록 실수하더라도 끝까지 참아주시고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서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을 맛보게 하는 그런 신을 인간들은 요청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원하는 신 속에는 지옥이라든지 저주라든지 죄라든지 심판이라 하는 것은 본질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그 대신 축복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영생이라든지 용서가 주된 내용이 됩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 인간들은 창세기 3장에서 미리 사단의 지시에 따르는 자로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참된 신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이 요구하는 식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히십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와 징벌의 현실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처럼, “축복과 저주는 너희들 하기 나름이다”고 말씀하시지만 저주에 대해서 필히 저주가 주어짐을 명확하게 하시므로 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내세우신 분 위주로 진행됨을 나타내십니다.
즉 율법 앞에 그 어떤 존재도 중립적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다만 사랑을 빛내기 위해 보조적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모든 인간들을 쳐내기 위함입니다. 그 누구도 복달라 하거나 복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 마음 속에 ‘다른 신’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신이든 누구든 다 나를 위하여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품은 자들이 바로 모든 인간들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에 자기 외에 다른 이를 사랑할 여유가 없는 겁니다. 비록 희생적인 행동을 보이더라도 그것은 우회적으로 자기 잘남을 드러내는 계기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에게는 애초부터 복은 해당되지 않고 저주가 적합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계속 진행되는 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지는 언약궤 위입니다. 상자 안에 돌판이 들어있고 그 뚜껑은 1년 한 차례 대규모 죄사함을 위해 피를 발라지는 속죄소가 됩니다.
이 속죄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합니다. 곧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계명과 율법과 율례는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그 ‘하나님 이름’을 겨냥한 것입니다. 비록 자기 백성이 범죄해도 그 ‘이름’에서 지속적으로 완벽한 수행으로 전면적인 이스라엘 멸망을 막아주고 날마다 새로운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 ‘언약궤 기능’에 주목해야 하는 겁니다. 여호수아 6:13에 보면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하나님의 언약궤의 효능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의지는 해야하지만 그 취지는 결코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닙니다. 언약궤를 위함입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막강한 적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진행경로를 막게 했던 겁니다. 즉 적들이 그저 언약궤 앞에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이런 관점을 이스라엘도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사기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의 거주가 자신들을 위한 거주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이방민족들로 하여금 침공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이 자기를 위한 땅이 아님을 수시로 알아야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방신의 구조와 참된 하나님의 구조를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구약 끝자락에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맙니다. 이는 곧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기를 위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과연 누가 영원히 약속의 땅에 거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65:1에 보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더 이상 인간들의 자율성에 기대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율성이 아니라 완전 타율적 구원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7:5에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의 수행자는 따로 하나님께서 지정해두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철저하게 타율적 구원이 개시됩니다. 오뚜기가 아무리 해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이유는, 중심에 쇠조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쇠조각으로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으로 자리잡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로마서 9:31-33에 보면,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히 확정된 과거, 곧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예정된 자는 그 미래도 ‘예수 안’에서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존재는 곧 오뚜기 중심에 있는 십자가의 기능이 나오는 증거자로 가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벌써 영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만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2강-신 30장 15 – 20절(생명과 사망 )171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0장 15 – 20절입니다. 구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먼저 게임을 벌이듯이 우리에게 제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둔다는 것, 생명과 사망도 마찬가지이고,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둔다는 말은 네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네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생각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게임을 하나님께서 요청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게임을 맞이했지만, 인간한테 하나님과 거래하거나 게임을 하라 하면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예 지옥은 없애버려요. 저주도 없애버리고. 좋은 게 좋다고 하나님 좋으신 분, 그 좋으신 분에 대해서 우리도 성의를 다 하겠습니다하는 걸로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일단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를 좋은 것으로 일단 먹고 들어가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너무나 귀하니까. 귀한 이유도 몰라요, 사는 이유도 모르고. 일단 내가 내 인생이 있다는 그 자체로써 우리는 그걸 아끼고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 인생을 망가뜨리면 우리가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성질내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거는 네 생각이지 하나님 생각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내 인생을 내가 끝까지 못 지키면 아까워 죽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지켜 주시면 그런 조건하에 나도 하나님 앞에 내 할 도리를 다 하겠습니다.”라는 조로 나오는데, 하나님은 “누구야? 그 배후에 그런 소리 하도록 부추긴 배후 빨리 나와.”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자기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협조해 주신다면 아낌없이 주 앞에 협조할 용의가 되어있다는 식의 그런 게임과 거래는 우리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자리는 우리가 절대적인 자리, 고립적인 절대자로 만드는 자리가 아니고, 원래의 자리는 선악과 따 먹지 않은 그 자리에요. 그리고 생명나무 있던 그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선악과를 심어 놓은 그 자리에 인간을 만들어 놓았단 말은 인간은 어디까지나 보조에요. 인간이 주가 아니고 시다바리같은 존재란 말이죠. 선악적인 취지, 하나님의 선악과의 취지를 지킬 임무가 있고, 생명나무의 취지를 지킬 임무가 있고 본인 나름대로의 내 놓을 의견에 대해서는 “그 입 다물라”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사정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비로소 열매를 맺어요. 이 하나님이 말씀이. 너의 주장 나불거릴 것이 아니라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할 경우라는 조건하에 그 말씀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이라는 겁니다. 어떤 기능적.
인간이 차라면 주님이 운전사가 되어야지 우리가 운전사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너희 안에 내가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의 제일 중요한 대목을 주님 앞에 양도를 하면 되겠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그 당시 사람도 보았고 우리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예요. “하나님, 저는 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저주라는 것, 화라는 것, 이런 것 들은 아예 없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7절에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가게 되면”다른 신들이 이게 없어요. 다른 신은 인간 쪽에서 선택하는 겁니다. 게임을 인간 쪽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시작을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지만 다른 신은 내 쪽에서 시작을 해요. 내가 필요해서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믿는 그 하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성부가 됐든, 성자가 됐든, 예수가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그건 상관없어요. 그 안에 내용이 중요하니까.
“교회 왜 가십니까? 예수 왜 믿습니까?” 하는데 “나 좋으라고 믿습니다.”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건 꽝입니다. 그건 다른 신이에요. 신명기에 나오는 다른 신이요. “예수 믿으면 어떤 게 좋습니까?”“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그건 꽝이에요. 왜냐하면 “만약 천국에 본인 빠지고 다른 사람 가면 좋습니까?”“그건 안 되죠.”“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신을 섬긴 거예요.”
문제는 인간이 내가 원치 않는 신을 자진해서 포기를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신은 따로 있는데, 무조건 나를 위해주는 신인데, 그거 말고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제시하는 신에 대해서 우리가 거기서 빠져나와서 우리가 원하는 신에게로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당최 생겨먹은 것이 나밖에 모르는 것이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걸 포기하라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거든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인간능력으로서는 그게 안 된다고 하면 천국 가는 쪽은 텅텅 비지 않느냐, 아무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가지 못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하실텐데 이사야 65장에 보면 “내가 구하니 아니한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내가 찾지 아니한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다는 말은 “여기 있지, 진짜 신인 나 여기 있지.”하고 하나님이 알아서 등장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등장 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를 바른 신을 찾으려고 애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신은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라고 평소에 자기 편한 데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이기주의적 욕심을 위해서 살던 사람인데 “짠짜잔~”하고 등장하는 겁니다. 바바리맨처럼.
그러면 바바리맨이 여고생 앞에 등장할 때 여고생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반갑습니다.” 이런 여고생 없지요. “어머나, 망측스러워라. 아이고 부끄러워라.”이러지요. “흘리는 피는 또 뭐고, 어디서 누구한테 얻어 맞아가지고, 저 등짝에 채찍 자국 봐. 누구한테 저렇게 바보처럼 얻어맞고 다니나?”이렇게 하겠지요. 그분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찾던 사람을 거부하고 찾지 않던 사람에게 나타날 때는 이미 찾던 사람은 전부 꽝으로 다 날아갔다는 것을 검증받은 이후에 “보자, 누구 있나..”하시면서 찾아오신 거예요. 혼인잔치를 마련해 놓고 자기 백성에게서 찾는데 뭐 소를 샀다는 핑계, 밭을 샀다고 못가고, 어떤 사람은 핑계 댈 만한 핑계를 대요. 그날 그 시간에 자기가 결혼식을 한다고, 자기 장가간다고 못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임금이 하는 말이 “아무나 와라, 아무나. 길가에서 아무나 데려와라”근데 그 아무나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전부다 교회 와서 신을 믿었는데 그 신은 자기 좋으라고 믿은 신이기 때문에 이미 신이 있는데 무슨 신을 믿어요.
“주님, 저는 정말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나 좋으라고, 나한테 이익이 되는, 미래가 잘 풀리는 그런 하나님을 내가 선택했습니다. 주님이여, 이거 진짜 나쁜 놈이죠. 그러니까 이런 신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이렇게 고함지르는 사람 없어요.
“참, 우리 잘 만났습니다. 주님. 주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이렇게 안심 놓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짜잔!”하고 십자가 앞에 세우니, “나는 십자가까지 그렇게 과도하게 오버할 필요 없는데요. 말씀만 주시면 순종하겠다고 신명기 30장에 나와 있잖아요.”신명기 30장이 뭐냐 하면 “내 앞에 말씀을 두노니 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네가 저주 받는다”고한다면 여기에 십자가가 낄 자리는 없습니다.
전혀 십자가가 낄 자리가 없어요. 지키면 지키는 거고 못 지키면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마지막 때에 십자가 들이 민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즉,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를 실천에 옮겨서 구원받을 사람은 결국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자리, 그 딱 한 자리에서 누가 오느냐 하면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야기하기를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거기에 심어 놓은 겁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게 되면 머리좋은 사람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해요. “처음부터 인간들 약 올리지 말고, 안될 인간들에게 뭐하려고 지키라고 해 놓고, 마음 들뜨게 하지 말고, 김치국 마시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예수님 보내고 예수 믿으라고, 그러면 영생 얻는다고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율법을 주신 것은 다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뭐냐”할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저주나 화를 주실 때는 이 땅에서 정리해야 될게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이 보는 현실은 인간들만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들 배후에서 정신적으로 조종하는 세력이 있어요.
이렇게 귤이나 사과를 농부들이 생산해 놓고 바로 상자에 담지 않습니다. 분류작업을 해요. 크기별로 큰 거, 작은 거, 상한 거 분류하잖아요. 그러면 상품 될 수 없는 거, 떨어진 거, 썩은 거, 벌레 먹은 거, 너무 작은 거, 모양이 험한 거, 이런 거는 따로 다 들어냅니다.
그러면 하나의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뭐가 많으냐하면 쓰레기 같은 것들, 상품이 될 수 없는 거, 흠집 난 것이 이만큼 쌓여 있어요. 이 말은 지옥이라는 거, 죽음이라는 거, 그리고 사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일하실 경우에만 발생하는 부산물입니다.
일종의 언약의 배설물들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배설물들이 지옥, 사탄, 죽음, 이런 거라면,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우리는 중립지역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제거 대상 쪽에 해당돼요.
그러니까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하게 되면 우리는 쓰레기 인데 쓰레기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줘버립니다. 그러면 쓰레기는 무슨 값을 해야 하느냐 하면 쓰레기 값을 해야 되요. 쓰레기 값을 하면서 “아, 우리가 이걸 안 지키면 저주가 온데. 뭐, 그럼 숙제해야 되겠네. 지키자.”지키자고 하고 싶어도 새로운 어떤 환경에 부딪치게 되면 오늘 본문 17절에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시하는 환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가 잘될 것이라고 부추기는 환경이 아니고 “네가 얼추 따라온다 따라온다 해 봤자 너는 안 돼. 왜? 새로운 환경을 줘버리니까 대번에 그쪽으로 마음을 싹 빼앗기면서, 헤헤 거리면서, 나는 하나님 볼일 없다. 여기서 내가 알아서 살면 되겠네.”라고 되는 겁니다.
그쪽으로 벌써 마음을 돌려 버려요. 본색이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면서 처음 줄 때부터 취지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내 언약과 내 계약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내가 보낸 아들 예수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이미 결정 짓고 이 결정 지은 걸 가지고 신명기 율법 속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고 이스라엘 백성과 견주기 하는 겁니다. 비교하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사랑과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과연 그것이 일치 되는 지를 확인시키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오뚝이를 본적이 있는데 오뚝이를 이리 젖혀도 다시 서고, 반대쪽으로 젖혀도 딱 바로 서요. 어릴 때 얼마나 궁금했던지 그 오뚝이를 깨보았습니다. 안에 뭐가 들어 있어서 이렇게 바로 서는지 보니까 그 안에 쇠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간단한 원리예요. 쇠뭉치 들어 있으니까 중심을 잡아가지고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지만, 저는 지금 이 대목에서 그걸 확정된 과거로 봅니다. 확정된 과거.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예수 안에서 구원 될 자를 이미 오뚝이 속에 쇠 조각처럼 집어넣는 거예요. “목사님, 그건 신약 때에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하지만, 구약 때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구약 때도 말씀 주면서 뭐와 동반시켰느냐 하면 제사법을 함께 주었어요. 그 제사법이 응축된 게 언약궤, 하나님의 상자가 있습니다. 그 상자에 피를 뿌리게 되면 7월 10일에 1년치 죄를 다 용서를 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만 달랑 줬으면 지키려고 했을 텐데 십계명 주고 그 옆에다가 제사법을 준거예요.
십계명 지키면서 자기는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새로운 환경이 왔을 때는 지금 이런 환경에서 지켰다고 착각을 했지만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니까 룰루랄라 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푹 빠져 버리는 거예요. 신명기 8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갑자기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집을 잘 짓고 하는 겁니다. 제가 신명기 8장을 읽어 볼게요.12절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우양이 번식하며 네 은근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 네 마음이 교만하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 마음을 교만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교만하게 만들어서 네가 오뚝이에 들어 있는 쇠뭉치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너 자신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너는 운반자 이고 쇠뭉치가 들어 있는 오뚝이지 네가 오뚝이의 중심을 잡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찾습니까?
하나님은 언약궤, 제사 지낼 때 그 이름이 임재 하는 그곳, 그곳이 하나님이 상주하시는 곳이에요. 같이 동행하는 곳이고. 여호수아 6장에 나옵니다. 제가 그냥 빈말하는 게 아닙니다. 빈말 할 수가 없지요.
6장에 보면 여리고 성이 있다고요. 여리고성을 들어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군인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민간인도 아닌 것이 자기들이 견고한 이중성벽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무모한 짓이지요. 그런데 그 여리고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이 분명 앞에 있지만 진짜 마음의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의 땅,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없이는 못 들어가요. 동행하는데 동행하면서 그 여리고 성을 주님께서 맞딱뜨리게 하시는 겁니다. 피해서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여리고성을 맞딱뜨리게 하는 것은 그 성에 네 몸이 들어 갈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게 해 줘야 들어갈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곳은 축복된 땅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축복 된 데 들어가는 네 꼬라지 보니까 전혀 축복이 아니에요. 그러면 축복은 어디서 나오는 가? 본인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하면서 오뚝이 중심에 본인이 들어 있어요. 그걸 빼낼 필요가 있지요. 본인이 있는 그 자리를 허물어야 하는데 어떻게 허무는가?
언약궤가 중심으로 돕니다. 어지럽게 돌아요. 하루에 한 바퀴씩 7일째는 일곱 바퀴 돕니다. 총 열세 바퀴 돌지요. 언약궤가 여리고성을 빙빙 돕니다. 돌면서 마지막에 나팔을 불어 버려요. 마지막에 나팔을 부니까 여리고성이 와르르 무너졌어요. 여리고성이라는 하나의 영화 스크린에 영상 같은 거죠. 실체 없는 그림자 같은 겁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뭘 봐야하냐면 “너희들 언약궤 없지? 우리는 언약궤 있다.” 이런 마음으로 돌라는 말입니다. “너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없지? 우리한테는 있거든.” 이게 바로 오뚝이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 사람의 특징이에요.
여리고성 무너지고 나니까 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잘나서 여리고성 무너진 줄 알았어요. 또 언약궤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 전체로 확산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 7장에 보게 되면 기드온이 전쟁하는 대목이 나오죠.
그 대목에서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나와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미디안 군사가 숫자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십만 명이 넘거든요. 엄청나게 많은 미디안 군대와 이스라엘은 전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사실 이들이 언약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그러면 전쟁에 승리하려면 집나간 언약궤를 다시 돌아오게 해야 돼요. 그러면 언약궤 붙들고 돌아다니면 안 되나? 언약궤 붙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이미 여리고성에서 한번 써먹은 거예요. 그러면 언약궤 붙들고 뭘 생각하겠습니까?‘언약궤만 있으면 우리는 승리하겠지?’이렇게 되겠지요?
분명히 언약궤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리고 성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 문제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도저히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쨉이 못 되는 그런 위인들인데 언약궤 피 때문에 들어가는 거고 주님께서 뭔가 오뚝이의 중심이 되어서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그 중심이 되려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항상 나를 위해서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과 삐걱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계획과 예상을 자꾸 하지요?
그것과는 어긋나는 방법을 주께서 도입함으로 말미암아 너의 존재하는 것이 너를 위함이 아님을 알게 하시죠. 너를 위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여, 나를 위해서, 나 잘 되기 위해서’이런 식으로 거론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제가 아까 설교할 때 처음에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사정도 입 다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여, 우리 사정은 이렇습니다. 어떠 어떠하게 해결해 주세요.” “누굴 위해서?”“저를 위해서요.”“네가 뭔데?”“십일조 했잖아요. 섬기잖아요. 선교헌금 내잖아요. 우리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데 어떻게 키우라고요. 주께서 주셨으니 책임져야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마음이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하기 때문에 울컥 울컥 계속해서 그런 마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에서는 뭐냐? 다 쫓아내버리고 300명 남겨두고, 횃불이 항아리 속에 들어 있지요. 어두운 항아리 속에 횃불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있는 거예요. 저 미디안의 많은 군사는 이미지 영상에 불과한 겁니다. 허수아비들이에요. 그들 이긴다고 우리가 좋은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나를 괴롭히는 사람 좀 죽었으면 좋겠다.’그거 죽는 다고 내가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나를 죽여야 한다니까요. 나를. 나를 위해서 하는 그 나를 죽여야 돼요. 여호와의 칼이 나를 쳐야 돼요. 칼 들고 저쪽을 치지 말고 이쪽을 쳐야 된다니까요. 여호와 찾는 나를 쳐야 돼요. 그런 방식이 구약에서 계속 이어져서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지요.
결국은 신약에 이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아주 정기적으로 실시합니다. 정기적으로 어떻게 실시하느냐 하면 로마서 9장 32절에 나옵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행위에 의존한다는 것은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 있고 인간은 자기가 행동한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잘했을까 못했을까, 주께 순종했을까 순종 못했을까를 잊지를 못합니다. 그 잊지 못하는 것에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행위를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 해 놓고 그 복을 남이 가져가면 우리는 도저히 못 견딥니다. 성질나서.
내가 기도해 놓고 응답은 내가 받아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두 집사가 새벽기도 나와 가지고 아이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한 집사는 기도하다가 맨날 자고 나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 아이는 똑 떨어지고, 저 집사의 아이는 서울대학 가고 그러면 성질나지 않습니까? 성이 나지요. 일부러 붙여 준거예요.‘기도하는 네가 바로 문제다’라는 겁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느냐는 겁니다.“아닙니다. 주님. 성경에 보니까 무시로 기도하라 했습니다. 무시로”“누굴 위해서?”“주님 이야기 했잖아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했잖아요. 주의 말씀에 무시로 기도하라 했으니 내 소원 이제 이루어질 거예요.” 그게 바로 이방신이에요.
그게 바로 사탄을 그동안 모시고 있었던 겁니다. 방울만 안 들었다 뿐이지 무당집에 오신 겁니다. 순종하면 복 받는다고요? 누굴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다리를 걷어 버려요. 여기 로마서 9장에 보면 아주 심술꾸러기 인데 결국은 사랑입니다.
행위로 자기 행위를 잊지 못한 인간들에게 그 행위를 ‘내가 뭐했지?’뭐 한 거 없어요. 금식해 놓고 머리에 포마드 바르고, 구제해 놓고 오른손이 한 것을 모르고, 기도해 놓고 아무것도 안했다고 하는 사람. 자기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을 탁 걷어 버려요. 자빠뜨리는 거예요.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자기 행함에 대해서 기억하고, 기억의 성과와 실적을 은근히 노리고 있는 그 행위에 대해서 부딪칠 돌에 부딪치는데, 그 부딪칠 돌을 시온에 둔다고 했어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보는 순간 우리는 뭘 느껴야 하느냐 하면‘주여, 또 나를 위한 가짜 신을 내가 사당에다 모셨습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할 때 ‘너는 그냥 오뚝이 노릇만 해라. 중심에 있는 쇠뭉치 역할을 내가 한다. 네가 그것을 너의 힘으로 스스로 깨닫는 게 아니거든요.
가롯유다가 끝까지 사탄이 하는 걸 몰랐거든요. 자기가 양심에 어긋났다고 생각했어요. 배후에 사탄이 있는 걸 몰랐어요. 가롯유다는. 하지만 같이 배반해도 제자들은 나중에 찾아오니까 ‘내가 배신하는 것도 주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구나.’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확정된 과거가 창세전부터 이미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오뚝이 쇠뭉치로써 그 안에 집어넣어 놓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 집어넣든지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헤헥 거리다 또 잘못되면 낙심해서‘이럴 수 있습니까? 이러려면 우리 헤어집시다. 돈만 먹고 혜택도 안주고 이런 사기가 어디 있냐?’이런 식으로 계속 흔들리지만 결국은 주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확정된 과거 속에 합류하게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확정된 과거는 확정된 미래라고. 한번 과거에서 예수 안에서 창세전부터 영생 얻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어떠한 변화에도 상관없이 오뚝이는 제자리 서서 결국 십자가 바라보고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흔들립시다. 마음껏 흔들리고, 마음껏 웃고, 마음껏 낙담하고, 마음껏 좋다고 집사가지고 교만해서 ‘나 이제 교회 안 나와도 된다.’이러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는 헌금을 60~100억쯤 헌금을 해서 도대체 얼마나 흔들리는지 보고 싶어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땅, 우리 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땅이었습니다. 천국 우리나라 아니었고 아들의 나라였습니다. 자기만 좋아하는 사람은 못 들어가는 나라,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못 들어가는 나라인데, 우리 죄를 자빠뜨리고, 넘어뜨려서 그 현장에서 십자가 똑바로 보게 하셔서 십자가 나라에 가게하신 주님의 확정된 결정을 존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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