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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자 이스라엘 (신29;22-26) 1710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30. 16:40
2017-10-29 15:01:34조회 : 31         
   증거자 이스라엘 17102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증거자 이스라엘(신명기 2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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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w6miezm4Ln4, Hit:1
 이근호17-10-29 15:48 
증거자 이스라엘 

2017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신명기 29:22-26 

(29:22)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 자손과 원방에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29:24) 열방 사람들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뇨 이같이 크고 열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뇨 하면 

(29:25) 그 때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9: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오늘 본문을 대충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게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백성이라고 하면서 처절하게 망하게 하십니다. ‘망한다’는 의미는, 약속의 땅에서는 언약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도저히 살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언약’이 중요합니다. 언약은 인간에게 유리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전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가지고 기존이 모든 신(神), 곧 우상과 싸우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혹독하고 가차없는 저주를 퍼붓는 것은, 가짜 신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언약’을 통해서만 자기 백성과 만나십니다. 그런데 언약이라는 것은죽음을 담은 상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이 언약에서는 살지 못하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죽음 속에서만 만나시는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점을 분명히 이스라엘이 애굽의 권세를 빠져나오면서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로 이 경험은 지난날 그 때뿐으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한 번 죽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계속 살 일만 남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즉 하나님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오해의 기반에는 ‘죽어야 돼’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돼’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손쉽게 이방신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명칭이나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이방신의 내용은 ‘더 살고자 하는데’ 필요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가나안 땅에 입성하고 난 뒤, 그 땅을 일시 점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점유하고자 한 겁니다. ‘이유’란 ‘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본인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집어넣는 주관적 요소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유와 목적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전부 너무나도 일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신을 인정하듯이 남들의 신들도 될 수 있는 대로 인정해주려고 합니다. 50여명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50여명의 예수가 다 달라요. 하지만 문제될 게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다 다 자기 잘되기 위해 신을 믿는다고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잘 되기 위해 신을 믿고 예수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다양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합당한 ‘유일신’ 혹은 ‘단일신’을 엮어냅니다. 이를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그 우상성에다 언약적 현실성으로 덧입혀버립니다

그 예가 사사기 16장에 나오는 삼손입니다. 삼손은 비록 ‘나실인’입니다. 이는 ‘구별된 자’라는 뜻으로 이 ‘구별된 자’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스라엘을 유지하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나실인의 핵심은 그의 머리카락이 죽음의 제물 속에 합류하는 이벤트입니다.(민 6:16) 

하지만 삼손은 이런저런 관심 없습니다. 그는 언약 위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주로 삽니다. 과연 삼존이 제대로 나실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일단 삼손은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 마음먹은대로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일단 삼손을 망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에 대한 혹독한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공무집행’ 중입니다. 공무집행자는 자신이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이 아니기에 ‘내 마음에 든다, 아니든다’를 따지면 아니됩니다. 그냥 묵묵히 수행할 따름입니다. ‘하겠다 아니하겠다’를 본인이 판단할 처지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갔던 그 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시련을 만나도 그런 일을 당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은혜요 감사할 일이요 사명감당하는 길입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자 여기에 삼손이 여자를 구하는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 14:3에 보면,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삼손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없습니다. 자기 취향대로 여자를 선택했습니다. 삼손의 자신의 선택을 미워할 줄 모릅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주어진 공무집행을 수행토록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실인’으로서의 언약수행입니다. 

즉 수수께끼나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대해서 삼손은 여자로 인해 무너집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내민 조건에 부합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먼저 자기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결코 자기에 대한 자기 사랑이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예상 못한 조건 앞에서 자신이 무너지는 겁니다. 파괴되는 겁니다. 사랑 앞에 버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고집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설정한 조건에 스스로 올무가 된 겁니다. 수수께끼를 알려주지 않자, 여인들은 삼손에게 울고 불고 매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당신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구료” 이점이 이방신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즉 나에게 유리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사랑할 때, 그 신을 용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한 나실인 언약의 완성은 삼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겁니다. 죽게 하십니다. 

삼손은 모든 것을 잃습니다. 비로소 삼손에게 있어 하나님의 언약이 승리합니다. 언약은 ‘죽음을 담는 상자’입니다. 삼손은 비로소 그 ‘죽음의 의미’에 부합되는 나실인으로서의 사명을 마지막에 수행하게 됩니다. 언약과 더불어 죽는 것이 곧 사랑이요 영생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죽고 새 이스라엘은 그 죽음 속에서 부활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만 증거하는 이 공무집행에 군말없이 수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10-30 06:04 
157강-신 29장 22 – 26절(증거자 이스라엘 )1710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9장 22 – 26절입니다. 구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그 온 땅이 유황이 되고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도 없으며 거기에 아무 풀도 나지 않는 것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맹렬한 분노로 멸망시키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열방 사람들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때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땅이 소금이 나고 황폐하다는 말은 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그만 살라는 뜻이거든요. “이 땅에서 너는 살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다”라고 하시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나오게 하실 때 함께 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으로 심판하시는데 그 언약의 구체성, 언약을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심판하는 언약이 분명히 있음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건 엉터리예요.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는 그 언약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계십니다. 언약 바깥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그러면 언약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독하게 멸망당하는 지 보여주는 현장에서 언약은 비로소 살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죽고, 언약은 살고. 구약 전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지 순례한다고 이스라엘까지 갈 필요는 없고, 가 봤자 다 관광지로 개발했을 거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 구약을 성령께서 적으시고 이걸 날마다 성령을 통해서 이 구약이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고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 멸망한 것을 어디서 찾느냐.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네가 이스라엘 되라. 네가 이스라엘 되어서, 언약대로 살지 않을 때는 이렇게 망하는 구나를 표를 다 내라”는 겁니다. 






그걸 네 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공무 집행’이라 해요. 공무집행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나는 이것이 좋습니다, 나는 이것이 싫습니다.”가 용납이 안 되는 것이 공무집행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성공입니다, 이것은 실패입니다, 내 인생은 이렇습니다.” 도 용납이 안돼요. 






그냥 냉정하게 공무 집행하는 겁니다. 꼭 천사와 닮았다고 보시면 돼요. 내일 같으면 이건 좋았다 나빴다가 되지만,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시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부여한 일이기 때문에 이미 내 나름대로의 목적과 목표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언약대로 살면 되는데 왜 못 살았는가? 그건 간단해요.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과 목표가 있었는데 그 목적과 목표를 분석해 보니까 살고 싶은 거예요. 그 약속의 땅에서. 






살고 싶은데, 그 살고 싶은 것과 결부된 것을 가지고 우상 숭배,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다른 신들은 이미 약속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령한 다른 신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거는 그들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을 길게 잇는 다든지 이끌어 갈 여지가 있는 거예요. ‘자 40년 살았으니까 50까지 한번 살아 볼까?’ 이렇게 40까지 산 나의 인생을 50까지 강제로 끌어당기려는 거예요. 






‘90까지 살았으니까 100살까지 한번 살아 볼까?’ 이렇게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역사적이에요. 이걸 역사적이라고 표현을 하니까 여러분이 상당히 낯설어 하는데, 그러면서 “목사님, 역사적이라고 하지 않고 그걸 당연한 거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고 생각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40까지 살았으니 50까지 살아보자, 50살았으니 60 환갑은 해야지, 60살았으니까 칠순은 해야지 않나?’ 






계속해서 이유도 모르는 체 ‘내가 살아보자’가 유일한 내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이유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참,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지만, 그 이유라는 말, 이 이유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자기 정당성을 갖다 붙이는 것이 이유라는 겁니다. 






이유와 비슷한 말 중에 원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원인은 원인이 중심이 되어서 그 다음의 결과를 예단할 수 있지만, 원인과 이유는 달라요. 원인은 과학적으로 이러 이러해서 이렇게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게 원인과 결과 사이라면, 이유는 무조건적이에요. 무조건적. 






“일이 왜 그렇게 되어야 돼?”하면 “그건 내 마음이다. 내 뜻이다. 왜?” “이유가 뭔데?” “내가 살고자 하는 게 이유야. 군소리 하지 마. 무조건 내가 좋은 게 좋은 거야.” 이게 이유예요. 북한이 핵을 왜 만드느냐? 만드는 이유가 뭐냐? “만들고 싶어서” 이걸 이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과 결부되어 있다니까요. 






그 당시 가나안 땅을 점유한 1500가지 우상이 있었어요. 그 1500가지 우상들이, 광주에서 첫째 강의에서 했는데, 그 우상들이 전부 다 서로서로의 우상을 존중해 줍니다. 물론 그때는 우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지요. 






“당신이 믿는 신을 존중합니다.” 라고 하지요. “당신이 천주교 믿든, 개신교 믿든, 절에 가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뭐 이런 거요. 서로가 갖고 있던 신, 종교생활을 인정해 주는 거, 그게 우상의 특징이에요. 






개인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나 살고 싶은데 당신은...? 아, 말 안 해도 내가 살고 싶어 하듯이 당신도 살고 싶어 하실 겁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게 되면 차를 급정거 해가지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여자 운전자가 가는데 남자 운전자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깜짝 놀랐어요. “미안합니다. 놀라게 했지요?” 






그러면 어떻게 보상하면 됩니까? 여자 쪽에서 “우리 십 만원으로 끝냅시다.” 자, 돈 십 만원이 내가 깜짝 놀란 값이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 돈 십 만원자리 종이가 나의 깜짝 놀람을 대신 할 수 있느냔 말이죠. 






십 만원이 들어오게 되면, 나는 지금보다 십 만원어치 값을 하면서 나는 더 수명을 잇게 되고, 수명을 잇게 하는 것이 내 본래적 존재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죽음이 들어 있어요. 언약궤라 하는 것은 죽음을 실어 나르는 상자가 언약궤입니다. “너는 진즉에 죽어야 돼. 내가 새 피조물로 살려줄게.” 이게 언약입니다. 






전쟁이 뭐냐 하면 ‘진즉에 죽어야 돼’를 보여주는 겁니다. 진즉에 죽어야 되는 데 함께 있는 내가 살려 준다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 한 거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작년에 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살아오면 안돼요. 






적어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에게 죽지 않고 살아오면 똑같은 인간이 돼요. 제가 각설이만 생각해도 화가 나는데. 대전에 강의 하는데 각설이가 와가지고 요한복음 강의하는데 시끄러워서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수년전에.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이미 죽고 와야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죽어도 살겠고’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이 ‘죽어도 살겠고’가 성립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너 만큼은 어떤 공무집행을 해야 하느냐 하면 ‘아, 이러면 매 맞아 죽는구나.’라는 그 공무집행을 수행을 해줘야 하는 겁니다. 그게 공무 집행이에요. 






오늘 본문을 그냥 봐 버리면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게 치신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제 말 듣고 보니까 심하게 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고맙지요. “망하게 해주셔서, 이 땅에서 망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왜? 이 땅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님을 새록새록 새롭게 확인시켜 주셔서 이 은혜를 우리가 어디서 얻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감사하게 되는 거죠. 






항상 감사가 안 나오면 주의 일이 아니에요. 고마움이 아니면 주의 일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그들이 공무집행을 하면서 그러면 그들이 공무집행을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을 것이 아닙니까? 하시겠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은 직선적 사고를 못 벋어나요. 직선적 사고를 벗어나려면 수직적 사고로 옮겨 가야해요. 수직적 사고로 옮겨가야 하는데 직선적 사고는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당신이 믿는 예수를 존중 합니다” 하면서 서로서로를 존중해요. 






이렇게 되면 숫자가 일이 아니고 다양하게 되요. 2, 3, 4, 5, 6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인이 만약 50명이라면 50명의 예수가 있어요. 그러면 서로가 서로 다른 예수를 “당신이 믿으니까 존중해 주겠습니다.”라고 제시합니다. 






왜냐면 내 쪽에서 존중해 줘야 저 쪽에서도 나에게 호감을 주니까.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 존중해 주는 거예요. 그거 상호 신뢰라고 이야기 하는데 문제는 이겁니다. 어느 신이 맞는 가는 스스로 안 묻기로 한 거예요. 






어차피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그 기본은 이 존재의 이유가 뭐냐,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이 존재의 이유기 때문에 이거는 ‘나 이런 식으로 산다’하면 그만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을 할 때도 “집사님, 나 이런 식으로 이런 예수 믿고 삽니다.” 하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뭐뭐 해서 그 뒤에 ‘삽니다’가 나오면 100% 가짜입니다. 






“나 교회 다니면서 삽니다”하면서 ‘삽니다’ 하면 이거 100% 이단이에요. “나 교회 다니면서 죽습니다. 나 이런 식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면 혹시...혹시...신자일 수 있겠다고 보시면 되요. 






그러면 하나님의 작전은 뭐냐 하면 그 다양한 우상을 하나로 매듭짓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다양성에서 하나로 매듭을 지을 때, 그건 직선적이 아니고 수직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달 따라 가보신 적 있습니까? 달. 






여기서 달 보나, 저기서 달 보나, 그 달은 그 달이에요. 노사연의 ‘님 그림자’에 나오잖아요. 가사에 보면 달그림자를 따라가는데 여기서 보나, 거기서 보나 달은 그 달이에요. 태양도 마찬가지고. 숫자가 2,3,4가 아니에요. 달과 태양은 1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우상들을 단일한 유일한 하나님으로 묶어내는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이 있는 곳으로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으면 그 인간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똑같은 사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너는 다른 신 믿나? 나는 여호와 믿는다.”라고 말해도 그 바알이나 그 여호와나 살고자 하는 것에 있어서 동일하고, 명칭은 의미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사기 16장에 보면 거기 삼손이라는 사람이 나오는 데, 삼손이 여자를 고를 때 기준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삼손이 여자를 3명을 골랐는데 고를 때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는 겁니다. 삼손은 자기가 좋아서 골랐어요. 다시 말해서 언약과 상관없이 여자를 골랐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블레셋 이방여인을 왜 고르냐고 아버지가 나무라니까, 자기가 좋아서 이 여자를 고른다는 거예요. 






여기서 흔히 말하는 연애한다는 거, 사랑한다는 거 보세요. 보통 사랑 할 때에 일단 자기 조건을 살핍니다. 여자는 키가 얼마는 돼야하고, 대학은 어디 나와야 하고, 재산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 여자 집안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 몸은 건강해야 되고, 키는 168이상 되어야 하고, 성격은 좋아야 되고 하잖아요. 






이미 자기가 조건을 정해서 그 다음에 여자를 찾는다면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면 사랑은 낯 설어야 되요. 깜놀. 깜짝 놀라야 돼요. 예상치 않는 그 느낌 앞에 지금껏 자기가 쌓아놓은 모든 조건은 여지없이 파괴당해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래야 되요. 나는 예수님의 이런 점이 좋아, 이런 점이 좋아하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뭐 사랑 아니라도 예수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했어요. 






이거는 변통이 안돼요. 이 기준은, 구원 멸망 기준은 변경이 안 됩니다. 이거는 어느 목사가 아무리 봐줘도 봐줄 수가 없어요. 저는 지금 공무집행 중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 받아요. 주가 원하는 사랑 일 때 저주를 안 받아요. 






그런데 그 사랑 앞에서는 “나는 이런 주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을 이렇게 편안하게 해주는 주님이면 좋겠습니다. 몸을 건강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런 모든 조건들은 그 앞에 서는 순간, 그 십자가 앞에 서는 순간, “주여, 죽여 주옵소서. 죽여 주옵소서...” 






공무집행중인 인간이 ‘나는 뭐가 좋고, 뭐가 나쁘고, 나는 이 일은 해, 이 일은 안 해.’라는 이거는 공무집행, 다시 말해 증인으로서 자격이 없어요. 증인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풍랑 이는 건 싫고,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은 싫고’ 하는 군말이 입에서 나오면 안 돼요. 입에서 그런 군말 나오면 안 돼요. 






사랑이 나를 그곳으로, 강도 있는 곳으로, 강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풍랑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굶고, 춥고, 매 맞는 곳으로 인도하면, 그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면 끝나는 겁니다. 왜? 공무집행 중이거든요. 지금 ‘나 잘났다’를 보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이거는 언약에 부합되지 않아요. 언약 맨. 언약에 부합되는 사람은 사랑에 미쳐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쳐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에 미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람의 새치기 구원에 대해서 제가 자세히 말씀을 못 드렸어요. 시간 관계상. 아쉬운데요. 사람은 세례요한을 거쳐서 주님을 믿어야 되는데 세례요한 빼버리고 세례요한이 제시한 죄 목록 보면서 ‘아, 요거는 내가 지켰고, 요것만 주의하면 되겠네.’ 이런 식으로 새치기해서 구원되려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누구인지를 전혀 파악을 못하고. 그러면 우리는 메시아에 대해서 엉뚱한 메시아를 찾고 있는 거예요. 구약에서 공무집행 중에 있는 이 삼손도 처음부터 공무 집행중인 줄 몰랐어요. 원래 삼손이라 하는 것은 나실인에서 나왔고, 나실인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실인은 분리 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살 수도 없는 살아서는 안 되는 인간들 가운데에서 살 만한 인간을 따로 뽑아 내겠다 해서 삼손을 보냈고, 그래서 삼손에게 구원에 보탬이 되라고 힘을 줬거든요. 






그런데 그 삼손이 여자를 찾는 조건이 뭐냐, 이거는 이방인들이 하는 조건과 똑같아요. 내 마음에 드니까 저사람, 내 감정에 만족하니까 저 사람을 내 사람으로 뽑은 겁니다. 지금 언약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이 언약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가 만든 조건에 3번씩이나 자기가 말려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내가 제시한 조건에 그 여자가 왔기에 세 번 다 삐짐 삐짐 삐짐입니다. “수수께끼 알려줘” 엉터리로 알려주니까, 칡넝쿨 7번 감아도 풀리거든요. 그 다음에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뭐냐 하면, “당신은 나를 전적으로 사랑하지 않기에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여자의 이름이 드릴라거든요. 드릴라가 제시한 그 마음가짐과 삼손의 마음가짐이 부합되기 때문에 부부로 산겁니다. 합치된 거예요. 삼손은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자기가 채택하는데 있어서 본인이 거기에 대해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자기 선택을 자기가 미워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역사적이라면 수직적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은 바로 이 못난 삼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공무 집행이라는 의지는 분명합니다. 결국 그 여자로 인하여 체포되고 그동안 자기 자랑 질 했던 힘도 다 빼앗기고 머리카락 다 날라가고 그것보다 더 소중한 자기의 목숨, 생명도 같이 날라가는 그 삶이 원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될, 죽음을 바쳐야 될 언약궤 역할, 살아 움직이는 언약궤 역할로서 삼손이 나실인이 된 거예요. 






자기 힘으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처음부터 죽으라고 했잖아. 처음부터 죽으라고 했는데 너는 왜 살고자 했느냐.”란 말이죠. 그 시선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망하도록 돼있는 나라예요.






이 땅에 살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땅에 있는 유대나라는 유대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유대 이스라엘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를 통해서 ‘내가 진짜 신자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나도 망해야 되고, 죽어야 되고, 계획과 목적이 있는데,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잖아요. 지금 앞으로 역사적으로 수명 적으로 40살았으니까 50까지 살아야하는데 그 계획 전부 다 무산 되고 망한다고 해버리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말은 끝까지 들어야 돼요. 






삼손을 예를 들게 되면 이렇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이 인생이 힘든 이유는요, 본인이 선택해서, 뭘 결심해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성과를 은근히 노린다는 점이 본인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어요. 은근히 기대한 게 있잖아요. 






기대 없이 기도하는 사람 봤습니까? 기대 없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기도 했잖아요. 아까 기도 하신 분의 기도의 핵심은 딱 두자로 이겁니다. ‘이미’ 제 오늘 설교의 핵심이 이겁니다. 이미. 이미 구원된 사람은 나올게 감사밖에 없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엉망진창이 되든, 주님은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시고 나는 나 하고 싶은 데로 합니다. 왜? 난 이미 철없는 삼손이기 때문에. 철딱서니 없는 삼손 가지고 주님이 사명을 성취해 줘야 사명만 주의 몫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어차피 나 사는 데만 급급해요. 그래서 내가 우상을 만들어 내요. 계속해서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막 살겠습니다. 주님도 막 사는 거, 뭐 따지지 마시고, 그냥 주님 뜻대로 막 대해주세요.” 






여러분 사랑 앞에 버티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 앞에서는 그냥 무너져야 하고, 버티는 것은 그걸 사랑이라 하지 않고 그걸 고집이라고 합니다. 고집. 우리 고집도 만만치 않다가 가끔은 이 고집이 망가집니다. 






근데 그 고집 망가질 때, 신명기 29장 오늘 본문 한번 보세요. 딱 이 본문과 동일합니다. “아, 그 이스라엘 사람들 왜 그렇게 망했어? 고집 때문에.” 고집은 다른 말로 교만입니다. 자고, 자만 이런 겁니다. 늘 감사해야 되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 인생의 이유,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목표나 목적에 부합되지 않으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건 따로 있는데. 그렇게 내가 생각한 것이 따로 있으면 이 신이 다양성이 되어 버려요. 하나의 죽음이라는, 죽음 속에 있는 하나의 신이 안 되고 다양성이 된다고요. “김 집사님은 좋겠다. 그냥 던져 놓은 땅이 돈이 10배나 오른다면서. 나는 펀드 했는데 이번에 50%나 빠졌다.” 할 때 신이 달라요. 저쪽 김 집사 신과 다르니까 나도 언제 저 김 집사 신처럼 돼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요번에 땅 던져 놨는데 10배 올랐는데 나는 이제 그런 식으로 돈쓰는 재미로 죽을 랍니다.” 끝에 그렇게 “돈 쓰는 재미로, 골프 치는 재미로 죽을 랍니다.” 하면, “나는 요번에 펀드 반 빠졌는데 나는 이런 재미로 죽을 랍니다.” 이러면 둘 다 죽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신을 믿는 겁니다. 






제가 지금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 나 이번에 전교 일등해서 죽게 되었어.” “그래, 엄마는 너 때문에 기뻐서 죽게 되었어.” 뭐,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전교 1등? 와, 너 이제 돈 잘 벌겠다.” 항상 돈으로 더 살 수 있겠다, 앞으로 더 크면 더 잘 산다는 이런 독보적인 나만의 신을 따로 챙기는 거예요. 






십자가는 모든 것을 소멸 시킵니다. 니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일체 묻지 않습니다. 왜? 거울 앞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거울은 그냥 보이는 대로, 그저 많이 비춰라하면 그걸로 끝나요. 






거울 앞에서는 남녀노소도 없고요, 차이도 없고, 직업도 묻지 않고,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너는 어떤 짓을 해도 결국은 죄인이었어. 하지만 그 죄를 비춤으로써 너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된 거야.” 이걸 통보하기 위한 그것이 바로 언약, 그 언약을 증거 하는 공무 집행중인 하늘나라의 공무원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맘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 그런 우리를 주님 맘대로 다루어 주시옵소서. 그 틈바구니 속에서 십자가 피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