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종과 저주
2017년 8월 20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15-19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28: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28: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어디가나 저주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이 땅에 저주로만 깔려 있었던 겁니다. 쓰레기 더미에 눈에 살포시 덮였다고 새세상 되었다고 여기면 착각이듯이 이 세상은 애초부터 저주요소가 깔려 있었고, 왜 그것이 저주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므로서 확인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을 구원할 목적이라면 애초부터 ‘저주’에 관한 사항은 하나님께서 거론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괜히 주눅 들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야기, 반가운 이야기, 긍정적인 이야기만 나열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아에 지옥갈 자들에게나 들려줄 ‘저주 이야기’를 구태여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존재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를 피하고 복을 선택해서 받는 것이 인간의 권리가 아닙니다. 인간은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복을 알리기 위해 있는 인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즉 이 인간 세계에서 복이란 일체 없습니다.
모조리 저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저주가 떨어지는 지점은 곧 인간이 생존이나 생계에 필요해서 공간을 넓힌 곳입니다. 즉 인간의 노고와 애씀과 수고가 묻어 있는 공간은 족족 다 저주의 폭탄이 투하됩니다. 이런 조치에 대해서 “슬프다, 나는 끝났어”라는 식으로 비관적으로 생각하시면 아니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저주 뿐’임을 확인하고 증거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 우리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당연함’을 기정사실화해야 합니다. 복이란 바로 ‘말씀에 준해서 저주가 저주답게 실효화된 그 현장’에서 나옵니다. 그 복이 어떤 특정 지역이 아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이 나옵니다.
이는 참으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난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는 공간에서 어떤 지점을 지정해주면, 우리는 거기 가서 건질 수가 있는데, 특정 인물에게 복이 독점되어 있으면 우리 인간으로서 복을 계속 구입할 수 있는 방도가 없게 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빙의되어 들어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미신에 해당될 말일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몸으로 그리스도 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방식을 위해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약 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법에 대한 위반/ 법 자체에 대한 위반’. ‘법에 대한 위반’이란 이미 하나님께서 주어진 법을 유일한 법으로 인정하고 지키되 그 법이 요구하는 대로 제대로 못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법 자체의 위반’이란, 아예 하나님이 주신 법을 변개해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법으로 고쳐버리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는 법에 대해서, 실제로 부부 이외의 사람과 신체적 관계를 가진 것을 이 법의 위반이라고 여기고, 그런 관계를 안 가졌으니 “나는 간음죄를 범치 아니했다‘고 나오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중 색깔로 되어있는 굵은 글씨가 물기에 의해서 번지면 각각의 원색깔이 따로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죄”라고 규정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계명에 나오는 이 계명을 아무리 분석하고 연구해도 그 뒤에 들어있는 주님의 설명을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해하고 곡해하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인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그 산상설교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는 더 이상 복을 받을 여지는 전무해져 버린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오로지 저주만 주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성경을 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까지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저주를 개무시하는 식으로 처리해버립니다. 예수라는 분이 뭐라고 하든 말든 자신들은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무시하고서는 과연 참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감히 고개쳐 들고 이 세상을 할말 다하고 살려고 할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바짝 엎드려 살 겁니다. 자기 인생을 무슨 수모가 닥치고 험한 꼴을 보더라도 이의 달거나 하나님에게 항변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대신해서 ‘자기가 지킬만한 자신감이 있는 규칙'들을 따로 제조합니다. 즉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 “십일조 낸 걸로 퉁치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은 늘 상 위반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외부적으로 내비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 완성은 멈추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수납해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 방식의 새로운 저주와 축복이 가름되는 방식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의 말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에게 있어 율법이 어떤 식으로 만났기에 이런 결론에 도달된 것일까요? 그것은 로마서 3:25에 보면, 나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경로가 예수님께로 돌려집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율법에 준해서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이러한 경로 변경은 ‘율법 외의 한 의’라는 원칙에 따라 제시된 겁니다. 즉 구원받게 될 자들은 ‘율법’과 ‘율법 외’라는 두 개의 나타난 구원 방식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접수한 자가 됩니다. 즉 ‘율법’은 신약에서 단독적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 의’를 동반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義)’은 인간의 행함에서 주어진 의가 아님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끄시는 그 관계가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는 식으로 이끄신 자입니다. 바로 그 자가 아브라함과 더불어 천국의 본 자손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율법의 완성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08-20 23:47:14 | 조회 : 4 | 147강-신 28장 15-19절(불순종과 저주)170820-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16.46.87.22) | | 147강-신 28장 15-19절(불순종과 저주)1708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15 - 19절입니다. 구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며,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생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저주이야기를 하나님께서 구태여 이렇게 나열하시는 이유는 인간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게 축복이고 이게 저주다. 다만 너희 피조물들은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기 위한 재료로써 활용되는 겁니다.
이것을 섭섭하게 생가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을 위해서 만들어 진 세상은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보고 ‘독립하자, 독립하자’ 하니까, 자꾸 ‘독립해, 독립해’ 하니까, ‘하나님이여, 복을 주옵소서, 복을 주옵소서’ 하지만.
우리가 복을 가졌다 칩시다. 그것을 우리가 놓는 장소가 있을 거예요. 그 놓는 장소마다 주님께서 여기 본문을 보면 아주 폭격을 해버려요. 저주로 폭격을 해버립니다. “니가 성읍에서도 저주 받고” 성읍은 요새 말하면 부동산이죠. 자기 소유의 자기 거주지입니다.
“들에서도 저주 받고” 요새 대구에 들 한 폭에 얼마입니까? 하여튼 ‘여기서 여기는 나와 관련 돼’ 하는 것은 다 저주 받아요. 그리고 거기에는 전부 다 어떤 이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이 될 때는 그냥 만드는 게 아니고 이름을 붙여요.
저기에 꽃이 있더라도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꽃이라 부르면서 나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부를 때는 하나의 포로, 나의 노예로 이름 붙여서 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게 ‘예수’ 아닙니까? 예수는 나의 포로거든요. ‘하나님’, ‘삼위 일체’, 예, ‘이름 is 뭔들’ 어떤데도 다 갖다 붙여요. 이름을 갖다 붙여요.
‘삐삐’, ‘뽀삐’, 강아지 이름, 개 이름, 고양이 이름, 애 낳으면 애 이름까지. 이름을 붙인다는 말은 전부 다 내 관리 하에 내 조종 하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름을 붙일 때 그 사람들 갖고 있는 이름에다가 사람들이 ‘여호와 이름’, ‘주의 이름’을 마치 절에 가서 귀신 부르듯이 전부 다 하나님의 이름을 집어넣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 주소서,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하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아이. 흔해 빠졌어, 흔해 빠졌어. ‘내 이름을 키워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무슨 주의 이름이 내 이름하고 같이 병합되는 그런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이름 없습니다. 주의 이름이 왔으면 내 이름은 날라 가 버려야 되고, 파괴 되야 되죠. 만약에 북한에 벙커가 있다, 미군이 와서 미사일 가지고 그 벙커를 폭격을 해 보니까, 그 지하 벙커까지 박살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북한에 있는 군사 시설은 아예 없는 거예요. 아예 없습니다. 그럼 이름 부를 것도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손해잖아’. 우리는 손해지만 거기에 있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퍼부은 저주의 자리, 요게 남잖아요.
고게 남으면 주님이 이기고 주님이 이기면 우리 이익 아닙니까? “주님이 나한테 저주 했단다. 아~ 나 너무 기분 좋아!” 왜, 주님은 저주를 위해서 나를 활용했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아하면 이건 미친 사람, 미친 사람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부정적인 저주이야기는 성경에서 뺍시다하는 쪽이죠. 만약에 이게 인간들의 상책이라면 저주이야기는 이렇게 있지도 않고 있더라도 짧게 있는데, 앞에 있는 복 이야기가 1절에서 14절까지 인데, 저주이야기가 페이지를 넘어 갑니다.
지겨워요. 어디까지 넘어가느냐 하면 68절 아예 끝까지 갑니다. 신명기 28장 끝까지 저주이야기로 아주 도배를 해놨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니 존재의 바탕 자체가 저주다’라는 뜻이에요. 존재의 바탕 자체가.
아예 저주였습니다. 눈이 와서 살포시 덮어서 대지가 하얗다고 해서 연탄 같은 시커먼 쓰레기가 없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분명히 쓰레기 있는 데, 잠시나마 눈이 덮인 거뿐입니다. 봄에 눈 녹아 버리면 몰래 갔다 버린 쓰레기 다 나오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저주 받아 마땅함으로 이렇게 깔아 놓고, 그 저주가 짝을 이뤄서 그 저주가 있어야 그 다음에 거기서 복이 덮치는 데, 복은 저주를 보고 오는 게 아니고 저주를 저주되게 했던 아지트, 본부가 있습니다.
그 본부는 바로 이 세상에서 미리 와서 우리대신 피해를 보고 저주 받았던 그 분, 그 십자가 자리, 그 십자가 자리를 보고 복은 그쪽을 향하여 오는 겁니다. “수고 했다. 내 아들 예수, 수고했다. 내가 복을 주마.” 그래서 부활이 일어나는 겁니다.
부활은 오직 십자가 달리신 그 분에게서만 부활이 와요. 참~제가 방금 진짜 어려운 이야기 했어요. 부활은 한국에서도 있고, 아프리카에서도 있다는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어떤 지역을 두고 부활이 있다고 한 게 아닙니다.
지역이 아니고 어떤 인격체입니다. 어떤 그분에게 부활이 주어져요. 그래서 한국 있다고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어야 되요. 예수라는 그 인격체 안에 있어야 되요. 제가 말을 괜히 했다. 이건 너무 어려워 가지고.
왜냐하면 이 몸은 어디까지나 한 몸으로 태어나서 끝날 몸입니다. 이 몸이 어떤 제 3자의 몸과 이렇게 결합이 된다? 빙의합니까? 빙의라는 그런 거예요? 내가 그 사람 속에 들어 간다? 물론 사도바울은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한 걸 제가 알아요.
‘나는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 How? 어떻게? ‘어떻게‘라는 문제가 등장하잖아요. 어떻게.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약에 보면. 그래서 구약보다 신약이 훨씬 더 어려워요.
그런데 이 어렵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이런 저주에서 못 벗어난다, 저주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앞에 복은 그냥 폼만 잡은 거예요. 그래서 이 구약의 저주가 신약까지 갔는데 그 가면서 바로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가는 그 노선을 따로 만들어 놨어요.
그 노선을 제가 정리 해 보았어요.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법에 대한 위반과 법 자체에 대한 위반, 이렇게 둘로 제가 정해 봤어요. 법에 대한 위반과 법 자체에 대한 위반. 지금 오늘 본문 같으면 저주이야기 전에 뭐가 있었냐 하면 말씀이, 법이 있어요.
“내 말씀과 내 명령과 내 규례를 순종치 아니하게 되면 너는 어디에 가더라도 저주를 받는다.”라는 거죠. 그 이야기와 요한복음 3장에 36절에 말씀을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했어요.
여러분 제가 읽었던 말씀 다 기억 하죠? 한번 다시 할까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간단해요. 아들이 없다면, 아들이 오지 않았다면 어떤 상태인가 그걸 생각하면 금방 이해 되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영생을 달라 할 어떠한 자격이나 권한도 일체 없습니다.
그냥 죽음의 세계예요. 그냥 저주만 있는 것이 지당한 세계예요. 그래서 교회 세워봐야 소용없습니다. 교회 세운다고 영생 주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영생을 보장하는 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것은 이런 기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인격체 안을 교회라 합니다. 예배당 세우고 파이프 오르간 들여 논다고 그래서 교회될 것 같으면 진짜 돈 받쳐서 교회하겠어요. 진짜 교회에 금을 칠 하겠어요.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못 믿기 때문에 예수 믿잖아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 세우는 거예요. 집에서도 교횐데 그게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세우고 모이는 겁니다. 혹시나 교회인 척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사람은 속아 넘어 가지만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면 교회 될 가능성도 없고 구원 될 가능성이 없다면 ‘그러면 우리는 뭐꼬?’ 우리 자신은 뭐냔 말이죠. 제가 설명 드릴게요. 산상설교를 주님께서 하셨는데, 산상설교 여러분 아시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하실 때 내용이 될 수 있도록 그 사전에 사람들이 있어야 되요.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되요.
‘우리가 뭐냐?, 우리의 존재의 의미가 뭐냐?, 주님께서 왜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불렀느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이름을 왜 박탈하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뭔가 벌리는 일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따로 내가 잘났다는 걸 따로 증명하기 위해서, 따로 내가 지킬 만한 법을 우리가 정리 정돈을 하고 구조를 만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있는 법을 있는 법의 위반이 아니고, 법 자체에 대한 위반이에요. 법 자체의 위반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니까 너무 힘드니까, 자꾸 자기가 기가 죽잖아요. 그래서 기가 죽지 않는 방향으로 내 법을 따로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 이거 못 지킵니다. 타고 났으니까 이거 지킬 수가 없어요. 장사 왜 하는 데, 돈 때문에 하는데. 그걸 못 지키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일조 하는 걸로, 돈을 사랑 안 하는 걸로 우리 퉁 칩시다.“ 라고 내가 법을 만들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내 지킬 법을 따로 장만 해 버리면, 주님의 그 법 자체가 뭐가 되 버립니까? 모독 받는 거예요.
그 짓을 누가 했는가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랜 역사동안 했어요. 내가 왜 그렇게 법을 자꾸 만드느냐 하면, 법을 만든다 하는 것은 내가 지킬 만하기 때문에 만드는 거 거든요. ‘나는 휼륭한 남편이 되어서 퇴근하면 꼭 여섯시, 여섯시까지는 꼭 들어온다.’
그게 훌륭한 남편입니까? 그렇게 하면 저주 안 받아요? 지금 저주는 실과 바늘처럼 어디서 오느냐 하면 주님께서 내세운 법에 의해서 저주가 오는 거예요. 내가 내법 안 지켰다고 해서 막 때린다고 저주가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학생이 일기를 쓰는 데, 영어 일기를 쓰는데 한 두번 빠져먹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영어 일기를 안 쓰고 난 뒤에 성적이 내려갔어요. 그럼 지가 생각하기를 ‘내가 영어 일기를 써야 되는 데 못 지켜서 내가 저주 받는구나.’ 그게 바로 법 자체에 대한 위반입니다.
법 자체에 대한 위반. 쉽게 말해서 그게 악마의 앞잡이에요. 법 자체를 개무시 하는 거예요. 법이 엄연히 있는데. 그 법들을 치우고 내가 법을 만들어 놓고, 지가 법하고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아고, 내가 만든 법을 못 지켰네.’ 지가 스스로 막 치면서 떼찌! 떼찌! 하고 스스로 회개하고, 아주 잘 놀고 들 있어요. 지가 만든 법에 지가 ‘지켰다, 안 지켰다’ 하면서 자기 ‘의’ 놀이하고 게임하고 있는 겁니다. 법을 안 지키면 용서가 되지만 법 자체를 안 지키면 용서가 안 돼요. 용서가 안 된다고요.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법 지키는 거 말고, 다른 방법으로 용서가 너한테 주어진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겁니다.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이에요. ‘율법 외에 법’, 율법 외에 ‘의’ 예요.
“니가 율법 못 지켰다고 탄식했냐? 율법 못 지켰다고 가슴 알이 했나?” 하지만 율법은 너로 하여금 단어 파괴입니다. 단어 파괴. 이것을 저는 단어 파괴라 했습니다. 할 말을 잊어버린 거예요. 더 나아가서 ‘영혼 포맷’ 포맷하면 사람들이 잘 모를 수 있으니까 다른 말로 영혼이 하얗게 표백돼서 날라 가요.
영혼을 컴퓨터에 쳤는데, 랜섬웨어 걸려가지고 다 날라 갔어요. 동영상부터 해서 다 날라 갔습니다. 유튜브노래 다운받다가 걸려가지고 다 날라 갔어요. 30년 데이터 다 날라 갔어요. 그게 포맷 된 겁니다. 하얗게. 하얗게 되니까 할 말을 잊었어요. 갑자기 노래 나올라 하는데. 할 말을 잊었어요. 할말을.
내가 그동안 뭐 하고 살았냐 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저주 이야기 결부된 율법 준 것은 우리를 포맷시키는 겁니다.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그걸 양으로, 어려운 말로 ‘양화’라 하는 데,양으로 인간을 만든 게 아니에요.
이 ‘양화’란 어려운 말이 수학에서 나오는 데, 양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이에요. 이 말이 뭐냐, 인간은 요새 자아는 데이터로 만들어요. 인간은 데이터의 덩어리로 인간을 측정하는 겁니다. 체온은 몇 도? 허리둘레는 얼마? 요새 제가 아랫배에 자신간이 좀 생겼어요. 언제까지 34로 머무를지 모르겠습니다만은 34가 데이터라는 말입니다.
혈압, 괜찮아요. 집사님이 혈압 재주셨는데 괜찮아요. 인간을 조사할 때 데이터로 조사하는 겁니다. 그 데이터에 조합이 오늘날 나의 자아가 되는 거예요. 이 데이터의 특징은, 존재의 특징은 서사구조가 없어요. 이야기가 없어요.
그냥 현재 나는 이 정도야, 습도재고, 온도 재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걸 뭐라하냐면 양화된 존재, 물체 사물화 된 인간이라 합니다. 그게 바로 현대 인간인데, 현대 인간의 모델이 등장하는 데, 그 모델이 바로 인공지능입니다.
이제는 인간은 기계를 따라 붙여야 돼요. 기계를 따라 붙여. 이제 인간은 인간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과 결혼합니다. 인간은 재미없고 잔소리만 하고 짜증만 내서 싫어. 색시, 인공지능 색시는 공부도 잘하고 말은 또 얼마나 잘 듣는지. 모르는 게 없어. “여기에서 가장 좋은 맛 집은? 네, 주인님, 이쪽 뷔페가 괜찮습니다. 가격은 얼마입니다. 10% 할인해 줍니다.“
얼마나 좋아요. 점원도 필요 없어요. “삐릭 삐릭 단골손님이 앞으로 옷 2벌 살 겁니다. 삐릭 삐릭 수입은 얼마이고..“ 인공지능이 다 알아 채 버립니다. 아~멋진 세계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서사구조, 다시 말해 자기의 주체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기계를 닮아 가다가, 이제는 기계가 본래 인간을 모방해야 하는데 이제는 인간이 기계를 모방해가 인간이 기계 못 돼서 환장들을 해요. 기계 못 돼서. 달리기 못한다면 기계 되면 돼요. 기계 되서 볼트인지 드라이브인지 그거보다 더 빨리 달릴 거예요.
모든 것은 돈만 있으면 기계로 장치된 결혼생활, 새로운 가정, 모든 게 기계를 들여 와 버려요. 더덕더덕 갖다 붙이는 인간. 인간이 저주 받는다 고요? 이미 저주예요. 그 자체가 이미 저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라 하는 것은 어떻게 적응하느냐, 학습하느냐, 그것만 남아 있는 사회입니다.
유행을 어떻게 따라가느냐 하는 사회예요. 십자가 안 듣습니다. 예수는 잊어버린 지 옛날이에요. 요새 젊은 사람들 교회와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새로운 유행, 스마트폰 따라가느냐, 관심사가 그것밖에 없습니다.
뭐, 게임을, 새로운 업데이트 게임을 어디에서 얻느냐하는 그거예요. 저주? 웃습니다. 흥!치!뿡!하면서 웃습니다. 복 그런 거 생각도 안하고 신경도 안 씁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굉장히 심각하게 보이는 거예요.
‘아, 이거 기계구나, 사람 아니구나.‘ 심각한데 다들 그렇게 살아가 버리면, 그게 힘으로 살아 가 버리면, 오히려 우리를 이상하게 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모든 게 저주라 하는 게, 예를 들어서 지리산에 사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지리산에 사는 사람이 기도만 하면서 산나물 뜯어서 살아야지 해도, 여러분, 지리산에서 산나물 뜯어서 5일장 나가 보세요.
산나물 값 확 폭락되어 있을 겁니다. 왜냐, 베네수엘라 원유가 폭락했어요. 베네수엘라 원유 파동이 지리산 산나물 가격을 변동시킨다니까요. ‘나는 모든 인기를 버리고 제주도가서 조용하게 살래.’ 살아보세요. 효리네 민박. 완전히 관광지 되버렸는데.
함께 모든 저주는 모델이 있기 마련이고 서로를 모방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성경에 나오는 이런 실효성 있는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율법으로 가두어 두었다고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성경 하나하나가 그냥 우리하고 괴리된 게 아닙니다. 가두어 진거예요, 가두어. 쇼케이스 인간이에요. 그냥 보여주기 인간이에요. 율법의 저주 받으면 이렇다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한 겁니다.
‘나 저주 안 받아야지‘ 이런 뜻이 아니고 “니는 이런 꼴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어.” 이런 뜻이에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복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율법을 내가 지킬 수는 없어요. 왜? 율법에 저주 받기 때문에. 율법 외에 한 의로 나가려면, 율법을 몽땅 가지고 다 이루신 분이 따로 존재해야 돼요.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빠져 나왔느냐, 모델이 뭐냐, 율법대로 죽으신 분이에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세요. 그냥 “아버지여, 장렬하게 죽겠나이다.” 하지 않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끝까지 그 나를 일반 죄인들과 나를 합세했습니다.
그건 요단강에 세례 받을 때부터 일반 인간으로 살기를 작심한 거예요. 세례 받을 때. 원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주셔도 될 분인데. 원래 마지막은 성령세례 주는데 성령세례 주기 전에 물세례 자체가 자신이 저주를 옴빡 뒤집어 쓴 거예요. 예수님이 저주를 뒤집어썼잖아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저주를 뒤집어 쓴 거예요. 태어나면서. 오늘 저주 뒤집어 쓴 아이 하나 왔어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에 비춰 볼 때 저주 받는 겁니다. 저주 받기 때문에 별난 착한 짓은 하지 마세요.
하세요. 결혼. 뭐 따지지 말고 결혼 하세요. 좋은 거 기대하지 말고. 어차피 뭘 해도 저주인데 그 숨통이나 트이도록 성질이나 부리면서. 참 잘 가르쳐준다. 그냥 성질부리면서 살 수 밖에 없어요.
뭐, 참고 산다고요? 참, 바보도 아니고. 뭘, 참고 살면 좋은 날 볼 줄 압니까? 참고 살면 참고 못 살만 한 사건 또 일어납니다. “니가 참고 어디서 착한 짓이야? 이래도 참을래?” 그 모든 인간들의 이러한 모습은 산상설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 필요한 사건들로 주께서는 우리를 활용하신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 너무 멀리 있네, 니한테. 왜? 심령이 가난해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애통하고 아픈 자는 복이 있나니” 이거 전부다 우리에게 해당 안 됩니다. 그리고 쭉 해 놓고 마지막에 끝에 가서, “내 복음으로 인하여 같이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비로소 그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를, 주님께서는 예수님 자기 혼자 다 끌어 당겨버립니다.
이제 자기 심령이에요. 자기 애통함이고 자기 의에 주리고 다 들어갑니다. 한꺼번에 완전히 합치해 놨어요. 이제는 그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 죽으신 부활을 자신과 연결 된 노선으로 받아들이면, 그게 바로 아무 한 것도 없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되는 겁니다.
요 산상설교에서 한 이야기를 로마서 3장에서는 아주 짧게 함축해서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드렸으니, 그 누구도 영광 돌릴 수 없었건 만,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 화목제물로 인하여 믿는 자에게는 의가 주어졌으니, 그 의로 말미암아 너가 영원한 의인이 되리라.”
“하나님도 의가 되고 너도 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일관된 하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프로젝트에 말려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주님의 프로젝트에 완전히 빨려 들어간 겁니다.
어떤 기계 소용돌이가 있는데 기계에 완전히 말려들어 갔는데, 우리가 하나의 제품으로 나와 버립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브랜드를 달고 제품으로 나와 버립니다. 제품 나왔는데, 그 꼬라지 보니까 하여튼 이상한 꼬라지인데, 어쨌든 ‘하나님의 의‘라는 꼬라지예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주님의 의’라는 브랜드가 박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하는 게 뭐냐,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이 세상이 왜, 저주가 어떤 형태로 저주가 다양해지는 가를 우리의 눈으로 목격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면 구경하란 말입니까?” 아니, 구경이 아니고 본인이 그렇게 일조한다니까요, 일조. 이 세상이 저주받을 세상 하는 데 있어서 “나도 같이 밥 먹고 살자, 나도 돈 벌어보자.” 하면서 뛰어들어 가지고 일조한다고요, 같이.
베네수엘라 원유가 파동하든 말든 나는 내 산나물 가격만 구례시장에서 높게 받기를 원할 뿐이에요. 우리는 보는 게 그것밖에 볼 줄 몰라요. 평소에 살아가면서,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이렇게 비교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빼면 안 되고, 나를 포함해서 비교하면 되요. 이제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8장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거기에 보면, 전에도 이야기 했는데, 정말 이 본문 아무리 해도 진짜 부족함이 없습니다.
8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이르시되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음이 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을 받는다는 것은 먼저 자리가 마련돼야 해요. 자리가. “제 자리 복주세요.“ 라고 안 해요. 우리가 내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가는 데, 그 자리에 갈 때는 주께서 까라면 까라고, 자꾸 사용을 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그러면 내 자리는 주께서 항상 따라오게 되면 “예, 주님”, “너는 저기 상 밖에서 꿇어앉아서 먹어!”, “예~”, “왜? 싫어?”, “아닙니다. 종은 할 도리를 할 뿐이죠.” 이런 식으로 자기 주어진 인생 굽이굽이 내게 주어진 어떤 상황, 이건 주께서 나를 종으로 부려먹기 위한 나한테 완전 덮어씌운 하나의 주님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자리를 고수하고 나의 의미를 고수하니까, 우리는 꿈쩍도 안 해요. 가라하면 “또 뭐 주실라고요? 아, 전에 속았는데, 이제 안가!” 이런 식으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들이 어디 있느냐, 바로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의 본 자손입니다. 본 자손이에요.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에요. 요셉도 그렇게 살았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땡기는 데로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 우리도 매일같이 삶이 주께서 이렇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사건들로 이렇게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끝으로 말씀드리는 데, 자기 인생에 대해서 너무 과한 의미를 두지 마세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남하고 비교하고 그런 의미 두지 마시고, 그저 백부장 처럼, “주께서 그렇게 가라 했잖아요. 또 왔어요. 오라 했잖아요. 그래서 왔어요.”, “니가 바로 천국의 자손이다.” 그런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순수를 모르고 자신의 순수만 고집했습니다. ‘주님 내가 이처럼 순수합니다.’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고 그게 저주의 모습인 것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율법의 한 의가 인도하는 데로 그냥 주님의 의만 들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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