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3 14:59:30 | 조회 : 8 |
머리와 꼬리 170813 |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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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꼬리(신명기 28:11-14) 음성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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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7-08-13 15:54 |
머리와 꼬리
2017년 8월 13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11-14
(28: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28: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28: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머리와 꼬리’는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한쪽의 가치와 의미를 몽땅 다 가져가는 겁니다. 즉 한쪽이 다른 한쪽의 취지를 높이기 위해 종속되고 예속된 관계를 갖는 겁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머리가 되거나 꼬리는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해서 나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노릇해야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좀 더 설명을 더 하면, 이러합니다. 낮은 자리에 자청해서 앉은 사람이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높은 자리에 앉은 상대방은 ‘높은 계급 자리에 따로 앉아있다’고 규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이 높은 자리에 꼭 앉기 위해서는 나는 필히 낮은 자리에 꼭 앉아야 하는 운명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관계로 결속되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계급을 놓고 경쟁관계에 놓이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골라 잡을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 치고 낮은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낮은 자리를 자청해서 앉았다는 그 겸손함을 하나님께서 이쁘게 봐서 그 낮은 자리에 잠시 머물게 하다가 높은 자리로 승진시킬 것을 미리 내다보면서 임시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리는 ‘없는데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나타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는 본문 14절에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가 나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미리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 따라 오라는 말씀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실은 인간 앞에 길은 없습니다. 길이란 본인이 만들기 나름입니다. 내 인생 길은 그저 선택이 있을 뿐이며 그 선택에 의해서 결국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대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내가 결정한 인생길의 좌우의 풍경은 미리 내가 고려한 풍경, 기대한 풍경만 반복될 뿐입니다.
만약에 내가 만든 길 좌측에 참으로 멋있어 보이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주저없이 그쪽으로 길을 만들므로서, 그 풍경을 보지 않을 때의 ‘좌측 풍경’은 이제 본 길이 되고, 본 길이었는 그것은 새 길로 인하여 ‘우측 풍경’으로 재조정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이란 애굽이라는 환경 안에서 늘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네가 만든 길이 복된 길이 아니라 나 하나님께서 새로이 만들어내는 길이 복된 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이 짐작한 길과 주님의 길이 항상 티격태격 다투게 됩니다. 그 예가 바로 광야길입니다.
광야길에서 하나님께서는 물없는 곳으로, 양식없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 내부에서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저항하고 반항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담겨 있음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율법과 말씀이란 이런 겁니다. 인간 내부에 말씀을 순종 못할 요소가 있는 발견하게 위한 도구입니다.
마치 스테이크 식당에 들어가서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포크와 나이프와 쟁반이 먼저 테이들에 나오니, 아무리 무식한 손님이라도 그 나이프와 쟁반과 포크를 뜯어먹는 사람은 없겠지요. 메인요리는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죽음의 기호’를 운반하는 운반체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살 궁리, 혹은 멋있고 선하게 살 궁리를 챙기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될 이유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동은 항상 ‘의도’에서 나옵니다. 그 ‘의도’를 가지고 출발해서 ‘의미’를 발굴해서 자기 것으로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도’가 반(反)-율법적인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애굽에서 일어난 출애굽 사건으로 확인이 됩니다. 이 출애굽 분리사건을 위해 모세가 대기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품을 소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출 4:6-7)
모세 밖에서 벌어지는 심판 사건이 모세와 이스라엘 내부 사건과 합쳐 하나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남이 못되면, “그것참 고소하다. 그래 내 말 안 들으면 벌받아도 싸지”라고 즐겨하지만, 실은 그들이 받는 저주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면제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벌받는지 그 요소와 이유를 살펴보면, 소위 구원되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일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인간의 눈으로, 저주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를 구분할 수 있는 구별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니 망하고, 저러니 복받는다‘는 선언적 명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주받을 자와 복 받을 자를 결정짓는 것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신다’는(출 33:19) 하나님의 고유권한에 속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인간쪽에서 개입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율법은 도구입니다. 그 도구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난도질 하십니다. 마치 국세청에서 긴급 세무조사를 하면서, 회사 사무실을 엉망진창으로 어지러 놓는 것과 같습니다.
복을 필히 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를 찾아내시는 겁니다. 주님이 친히 집어넣고 주님이 친히 발견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인간의 모든 의도가 다 깨어지고 묵살당하고 거부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린 복의 내용물, 즉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고 인간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래, 원했던 바가 저거야 저거였어.” 그리고 난 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잠시 돌아보게 됩니다. 약간이라도 대체로 높은 지위에 앉아있다고 느껴지면, 이 자리 오기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졸지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증거’로 소급해서 정렬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러니 복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밖에 없지”라고 자화자찬하게 됩니다.
반면에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적 직위에 상대적으로 처참하다면, “그래 나는 이런 수모를 당해도 마땅해. 왜냐하면 내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야”라고 자기 인생을 해설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인간들은 자신이 미리 짐작한 ‘머리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못하고 도리어 더 강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의도를, 인간들이 기대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상황으로 몰아세워서 인간의 의도 자체를 정죄해버리십니다. 의도 자체가 정죄되면 아무리 겉으로 드러난 것이 건전해보이는 행위라 할지라도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작업과 병행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의미를 이스라엘 속에서 발생되도록 하십니다.
즉 천국과 지옥, 복과 저주, 그리고 머리와 꼬리는 따로따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동시에 조금씩 드러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누가 성령받아 성도가 된 그 순간에, 어떤 이는 지옥행이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머리와 꼬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2-4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재질의 지팡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동행된 사건 속에서는 ‘머리’와 ‘꼬리’라는 상호 이질적인 방향으로 한 가지 사건에서 발생된 두 가지 의미를 같이 보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의도에서는, 인간 자신의 구원함을 쟁취하겠다는 이기주의적 본성이 발생되고 있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달리 나온, 새로운 의미는 ‘죽음의 기호’에서 파생된 의미입니다.
즉 ‘죽음’ 속에서는 나타나는 자기 백성‘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144,000명이라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모두 죽음 속에서 새롭게 구성된 종결된 구원자들입니다. 이들만이 머리, 곧 천국이요 이 사람들 외에는 다 지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 자체가 ‘주님의 길 만들기 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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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강-신 28장 11-14절(머리와 꼬리)1708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11 -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서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로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아멘.
이 말씀이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 되는 이유는 ‘좌로나 우로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좌우가 성립이 되려면 어떤 가야할 특정한 길이 마련되어 있어야 되요. 이 길이 마련되고 난 뒤에 좌측은 좌측이고 우측은 우측이죠.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길은 내가 만드는 거예요. 누가 이게 길이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만든 길은 그 좌측과 우측이 내가 만들면서 새롭게 나타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일방적인 주장입니까? 주님이 오셔서 길을 만들어 주게 되면 ‘아, 저쪽으로 가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결정이 되겠는데, 길을 주님이 만드시기 전에 선점해서 내가 먼저 길을 만들고 가는 식으로만 인생을 살아왔단 말이죠.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우리는 당최 모릅니다. 내가 일을 저질러야 되요. 내가 저질러야 주께서는 ‘그건 아니거든’ 하고 나오신단 말이죠. 그러나 내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는 주의 뜻은 없습니다. 꼭 낭패 속에서 길이 나와요. 내가 낭패 보지 아니하면 ‘이 길이 주의 길이려니’ 하는 착각 속에 밀어붙이게 되어있어요.
방금 이야기 한 걸 두자로 ‘밀땅’이라고 합니다.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하는 거예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나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방해할게‘ 이거거든요. 그럼 우리는 ’그럼 나만 손해잖아요. 먼저 알려 주시면 우리가 순종해서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곧이곧대로 가겠습니다. ‘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제안인데, 문제는 주님이 앞에서 나 말고 길을 두시는 게 아니고, 바로 내 안에서, 엉터리 같은 내 안에서 길을 뽑아내는 겁니다.
내 안에서 뽑아내요. 마술사가 마술하면서 ‘자, 여기 돈 5만원 있습니다. 어, 없어졌네요. 자 어디 있지?’ 이렇게 하면 관중들이 없어진 테이블 위에서 ‘그게 어디있지? 테이블 밑에 있을까?’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술사가 와가지고 관중석에 내려가서 관중석 A26번 앉은 그 사람 안주머니에서 ‘여기 있네’ 하고 딱 끄집어낸다 말이죠.
물론 그거 하기 전에 아무 5만원이면 안되겠죠. 5만원 보여주고 거기에 특정표시하고, 이 같은 5만원은 두 번 다시는 없음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그 5만원을 관중석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럴 때 ‘그 5만원이 언제 거기로 갔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나 건드리지 말고 제발 나 건드리지 말고, 마련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라는 그런 조건으로 순종할 마음을 갖고 있는데, 사실 그 길은 너의 안에 품고 있는 것이지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13절에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 하실 때에 우리는 선택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 보자~어디가 꼬리고, 어디가 꼬리곰탕이고~돼지 머리고~’ 하다가, ‘그래, 난 머리를 선택했어. 결심했어.’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이 출애굽기 4장을 이미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주님의 기적은 모세 품에서 끄집어내요. ‘모세야, 너의 손을 너의 품안에 넣어라, 아니 저를 왜 건드리십니까? 그냥 넣으라면 넣어라, 알겠습니다.’ 끄집어 내 보니까 문둥이가 되어있어요. ‘다시 집어넣어라’ 다시 집어넣고 끄집어내니까 멀쩡했습니다.
결국은 모세 밖에 일어나는 일이 최종 종착점이 아니고, 변할 수 없는 모세 및 이스라엘을 변하게 하는 여기 이 땅에 하나님이 벌이시는 목적이 이스라엘 건지기에 있다는 겁니다. 만일 이스라엘 자체가 주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자기는 생전 변하지 않아요.
변하려고 하면 모델이 없으니까. 따라서 주님께서는 자기 바깥에 난데없이 어떤 징벌과 심판을 해 버릴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착각하게 됩니다. ‘저들이 얼마나 못됐으면 저런 저주를 받겠느냐.’ 하거든요. 그럼 주님께서는 ‘네 이야기야. 네 이야기.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 저주에 너도 한통속이었어. 그런데 그 저주에 불구덩이 속에서 내가 거기에 참여했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너희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벗어났느니라.’
그렇게 되면 개인구원이 주의 목적이 아니고, 그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개입하신 그 모습을 영원히 찬양하고 감사하는 그 동네가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제가 지난번에 누구하고 이야기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당신나라 갈래요, 예수님 나라 갈래요? 죽어서 당신나라 가고 싶습니까, 예수님나라 가고 싶습니까? 그야, 뭐, 예수님 나라죠. 그런데 왜 당신은 당신 나라를 포기할 줄 몰라요? 당신의 꿈과 기대와 미래를 왜 포기 못합니까? 지금 당신은 엉뚱한 나라로 가고 있어요.’
‘뭐..이런 식으로 살면.., 이런 식으로 살면 그건 당신나라 가고 있는 거예요. 당신 나라가 바로 입만 살은 부자의 나라, 지옥이라니까요.’ 부자와 나사로에서 부자가 지옥가도 말이 많아요. ‘어떻게 좀...나사로를 보내셔서...물 한 방울 주시옵소서.‘ 하여튼 입만 동동 떠 있어요. 지옥이 딴 나라가 아니고 자기 나라라니까요.
우리 힘으로는 변화가 일어 날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틀어지는 그 사건이 나와 연루되었음으로 우리는 받아 들여야 돼요. 연루되었음을. 그들처럼 지옥 안 간다고 좋아하지 마시고, ‘누구십니까? 저들을 저렇게 만든 거.’ 그러니까 ‘저들을 저렇게 만든 분이 누구십니까?’ 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 우리가 분리되는 ‘그들’이 사실은 우리하고 차이나지 않아요. 이게 복음증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입니다. ‘저놈은 나쁜 짓해서 벌 받고, 우리는 복음 믿어서 구원 받는다.’ 이렇게 분류가 되면 안 되고, 저들이 하는 짓이 내가 하는 짓과 일치되고, 따라서 인간 대 인간에서 자질과 능력의 차이는 전혀 구원의 차이가 아니에요.
근데, 차이라면, 차이는 주님 본인이 갖고 있어요. 차이는 내 놓을 때까지 몰라요. 누가 구원 받을지 누가 지옥 갈지는 우리끼리 비교해서는 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려요. 따라서 불신자에게 주어지는 그 일은 인간의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요소들로 심판을 하기 때문에 벌 받아서 심판받는다는 소리는 일체 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이미 상태 알잖아요. 선악과 따 먹었으니까 나쁜 짓해서 벌 받고, 착한 일 해서 복 받는다고 이미 안다면, 그런 식으로 구원이 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 겁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그거 말고 다른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도 몰랐어요. 누가 알았느냐, 모세도 몰랐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겁니다. 저쪽을 치는 것과 모세 본인을 치는 것과 동일한 침이고 동일한 파괴라는 사실을 모세가 받아들입니다.
누가 감히, 누가 감히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리요. 아무도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 그들 앞에 확정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복을 받는다 할 때 복 좋아하지 마시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신의 우리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죽음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지 멀쩡한 채로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카오스‘ 혼란으로 몰아넣습니다. ’너, 나‘라는 개념이 있기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거예요. 너, 나가 있어 버리면, ’인간의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시면 간단해요. 너, 나가 있어 버리면 거기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intention' 의도라는 겁니다. 의도.
인간의 모든 의미는 이미 ‘내 의미’에 붙잡혀 있어요. 아이하고 엄마하고 시장가서 ‘엄마 저거 사줘’ 할 때는, 자기에게 의미가 된다고 여겨서 그런 의도를 나타내는 겁니다. 항상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은 그냥 곱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의도를 가지고 나온다는 그 단순한 이야기를 철학에서는 ‘현상학’이라고 합니다. 허슬의 현상학이 바로 그 이야기예요.
인간은 의도 없는 행동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의도는 어디서 나오는 가. 의도를 조정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문제다. 이 이야기가 대 히트를 쳤어요. 현상학이라는 것이.
모든 진리는 가짜다. 왜냐하면 본인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가짜다. 그 사람에게만 진리고 나머지에게는 아니다. 요 이야기 한 거예요. 현상학이라는 것이. 현상학이라 해서 사진 찍어서 뽑아내는 현상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데려갈 때, 모든 의도를 다 끄집어내면서 자신의 본성은 뭐로 구성되어 있는 가를 되돌려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도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자, 이스라엘 백성아 모여라, 너의 숨은 의도를 이실직고 하여라.’ 뭐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의도, 나 의도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밖에 없습니다.’ 라고 시치미 딱 떼는 인간에게 갑자기 물이 없는 곳으로 몰아넣어 버려요. 갑자기 양식이 없는 곳으로 몰아넣어 버립니다. 그럼 뭡니까? ‘이러면 못삽니다. 이러면 제가 주님을 섬기지 못하잖아요.’ 아니, 누가 섬기라 했습니까?
‘너는 주님 섬길 때 너의 의도를 포함하고 섬기거든, 인간들아.’ 인간들은 모두 의도 없이 행동하지 않잖아요. 주님에게 영광 돌리고 찬양한다 할 때, 다 의도가 있어요. 더러운 의도라니까요, 그게.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게 그냥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의도를 의도가 끊어진 상태가 뭐라고 하냐면 그게 의미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 개입할 때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의미를 가지고 후차적으로 이거 내 의미야, 내 존재의 이유야 라고 그걸 수용하거든요. 근데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도를 통해서 나온 의미 말고, 애초부터, 어린양을 보낼 때부터, 하나님이 개입하면서부터, 하나님 고유의 하나님만 아는 의미를 그들에게 심어줘 버립니다.
그러면 이 두 층이 겹치게 되요. 겹쳐서 맨 날 싸워요. 나의 의도와 주님의 의미와 이게 한순간도 조용할 때가 없어요. 늘 이렇게 투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투쟁할 때 그 투쟁과 쟁투와 다툼이 그게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거기서 복이라는 것이 과연 내 행함으로 복 받느냐, 아니면 동행하시는 분으로 복이 오느냐하는 그것을 늘 깨닫게 됩니다. 내 행함으로 복을 받을 경우에는 그 복이 내 의도와 합치된다고 오해를 하게 되지만, 내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동행하심으로 만약에 복이 주어진다면 ‘저 아니에요. 이런 복 받을 자격 없어요.’ 이렇게 손사래 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어제 잘 때 시원했거든요. ‘주님, 이런 복을 주시면 안 됩니다. 지금 가을도 아닌 데, 왜 이래요. 지금 35도 열대야 돼서 밤잠 못자고 뒹굴다가 2시간도 못자고 나와야 됩니다. 오늘 왜 이리 시원해요? 주님, 뭐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못 봤습니다.
일단 ‘콜~ 받을 건 받고, 두 개 더 받고. 이런 단 말이죠. 자, 오늘 본문이 어렵다는 말은 여기 축복부터 먼저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 오해하게 하시는 거예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은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 할 때에 덥썩 무는 거예요.
’그렇지, 좋으신 하나님이 좋은 복 줄지 알았어. 제가 원래 이거 원했어요.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이거 원했어요.‘ 이런 단 말이죠. 성경말씀을 주는 것은요, 율법을 주는 것은 내 속에 율법을 못 지키는 어떤 요소가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도구로 율법을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호텔에 가서 고급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시킬 때, 기본적으로 쟁반주고 포크와 나이프 주잖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사람들 없지만은, 좀 과장되게 예를 든다면, 어떤 촌사람이 와서 포크와 쟁반 그게 요리 단 줄 알고, 그거 뜯어먹고 있으면 안 되지요. 아직 요리가 안 나왔는데. 포크는 도구잖아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도구예요. 썰으라는 겁니다. 뭘, 네 마음을 썰라고 준 도군데 그걸 뜯어먹고 있단 말이죠. 율법을. 벌써 다 뜯어 먹고 칼 반 토막 남았어요. 그게 성화론입니다. 바보인간을 더 바보로 만들었어요. 이 신앙이라는 게.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이스라엘 실패한 걸 똑같이 되풀이하며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이프를 도구를 뜯어 먹으면서 뭐라 하냐면, ‘나의 의도는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삼성그룹 삼성빌딩 40층에 사는 것은 내 아들이고, 그리고 저 밑에 쓰레기 줍는 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옆집아저씨 아들은 저기 있고, 그러면 신명기 28장 말씀대로 절에 갔던 아들은 쓰레기 줍고, 교회 간 나는 삼성 빌딩에 있으니까, 위! 아래!위!위! 아래!’ 하면서 덥석 물지요.
그러니 부모들이 자식 키울 때 꼬리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꼬리곰탕 먹으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거든요. ‘머리가 되어라. 어디가도 대장 질 해라. 바보같이 얻어맞고 오기는. 머리가 되어라.’ 주로 그렇단 말이죠.
그렇게 했는데, 목사가 대신방 가서 신명기 28장 13절을 딱 집어주면, 봉투에 돈을 막 넣으면서 ‘주여, 신방 잘 왔습니다. 우리 아이들 기도 많이 해 주시고,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 주시고, 중학교 때 공부 잘해서 학군 좋은 경시고등학교 가게 해주시고, 서울대 많이 들어가게 해주시고.’
덥석 물라고 주시는 거예요. ‘너 이거 좋아했잖아. 이거 좋아했지?’ 사람들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가 되었어요. 삼성그룹 임원진 됐어요. 임원진 되니까 그걸 자기가 그리던 머리라고 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기가 복을 받을 만해서 이 자리까지 온 거라고 소급해서 자기 정당성과 자기 합리화에 빠져 버립니다.
나이프나 뜯어 먹어라. 도구나 뜯어 먹으라고. 썰어야 될 도구 가지고 그 나이프 가지고 자기 잘났다고 빗질 하고 있는 식이죠. 오늘 좀 오버합니다. 예가 잘 안 맞는데. 하여튼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자기가 합리화 하는 겁니다.
그러면 머리와 꼬리의 의미가 뭐냐. 이 머리와 꼬리는 계층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하나가 하나 다를 먹는 걸 의미해요. 이것은 축복과 저주를 의미하는 데요. 저주 따로 없습니다. 복 따로 없어요. 복이 생기면서 저주가 같이 동반해서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천국은 혼자만 천국이 아니고 반드시 지옥을 같이 같은 속도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건데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한사람은 그 순간 지옥 갔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은 모든 결과물을 남길 때는 우리 속에 나는 살았다가 아니라 죽음의 기호가 먼저 발생하는 거예요.
‘아, 나는 저주 받아야 하는구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서 그 일어난 저주 안에만 축복이 들어 있어요. 저주가 일어나지 않으면 축복은 없습니다. 그 천국도 없어요. 저주가 일어나고 지옥이 일어날 때, ‘무엇이 지옥이냐? 아, 나를 포함해서 내가 지옥 사람이구나’ 라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그 사람 속에서 천국을 주님이 알아서 그 사람을 기초로 해서 천국을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없는 천국이 만들어 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아, 네 자식이 하늘에 별만큼 많다.’ 아브라함은 기분 좋았지요. 그런데 뭔 자식이 있어야지. 없는데. ‘아, 내가 알아서 자식 낳으라는 말이구나.’ 그래서 나온 자식이 저주 받은 자식 이스마엘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에요. 놀랍게도. 아브라함에 자식이 지옥 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복 받았다는 데 그 자식은 지옥 가 있어요. 이거 납득 됩니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니에요. 이상해요. 또 무슨 자식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면서 바꾸신 걸로 끝난 게 아니고, 바꿔지면서 어떻게 아브라함 안에 변화가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 변화가 죽었다고 알려진 자기 아내 태가 살아났어요. 살아나고, 또 그게 다시 닫혀 버려요. 딱 자식 한명만 낳고 끝났어요. 분명히 죽었는데 살았고, 닫혔는데 열리고, 도로 닫히고. 이게 뭐냐 하면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주고, ‘더는 없다. 입 다물어. 너는 안줘. 제한테만 가야돼.’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가도록 하는데서 하나님의 실수함이 빈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제발 천국 오지마세요’ 라고 나팔을 불어야 돼요. 진짜로 나팔 불 필요는 없지만, 복음은 못 알아듣도록 해야 됩니다. 권사님 막 웃으시는 데, 기도하시라 해도 안하고, 그래야 돼요.
어쨌든 간에 뭔가 가로막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저주가 먼저 만들어 지고. 빛과 어두움이 그런 거예요.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빛이 등장해야 어둠은 더욱 더 짙게 드러난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에서의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에는 우리가 손 댈 수 없게 만들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요한계시록 7장을 보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꼬리라 하는 것은 머리라 하는 것은 하나가 하나를 다 잡아 먹는 거예요.
모세가 기적을 할 때 지팡이를 집으라 할 때,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됐거든요. 그 뱀을 짚을 때, 뱀 머리를 집는 게 아니고 꼬리를 집어요. 머리는 누가 치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모세가 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동행하는 분이 머리를 쳐야 모세는 꼬리라도 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꼬리와 머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 돼 있어서 ‘너 천당가나? 좋겠네.’ 라는 말은 뭐냐, ‘나 지옥가. 조져놨어.’ 이 말하고 같은 말이에요. 그럼 우리는 천국갑니까? 지옥 갑니까?
당연히 우리는 지옥 가는 모양새로 주님만 머리이신 주님만 먼저 천국 가 있고, 그 다음에 지옥 가는 그것을 바카스 병마개 따듯 따 버리죠. 죄를 의로 따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뭐 간다.’ 가 아니라 주께서 ‘나 간다’를 죽여 버리시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이미 도착했다는 소식이 나를 구원해 버립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144,000 나와요.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 다 죽었다가 나온 사람들이에요. 왜 안 죽으면 안되느냐 하면, 이게 안 죽게 되면 ‘저 144,000에 넣어주세요’ 하면서 손들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어느 단체에서 143992명이라서 티오가 8명 남았는데, ‘보자~누가 돈 많이 내는 가 보자~선착순!’ 난리 납니다.
144,000이 요한계시록에 있다는 말은 모든 영화가 끝났다는 거예요. 모든 영화가 끝났어요. 목 베인 영혼만 구원받아요. 이미 죽었던 자만 144,000이라는 숫자에 이미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 숫자에 제시 된 것은 최종적 숫자기 때문에 미리 알아서 들어 갈수 있는 방법은 요한계시록에 다 끊어져 있습니다.
구원은 144,000은 하나님의 12 * 12 * 1000이니까, 12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죽은 데서 태어난 겁니다. 덮힌 데서 잠시 열렸다 도로 닫힌 거예요. 따라서 잠시 열리고 도로 닫히는 방법을 천 번이나 해버리면 거기에 모든 천국 가는 사람의 총합이 나오는 겁니다. 144,000.
그러면 우리는 할 것이 뭐냐, 내 뜻대로 하는 거예요. 막 사는 겁니다. 막 살면서 뚜껑 팍팍 열리는 거죠. 막 살게 되면 주님이 그것을 팍 뒤집어 버리십니다. 내 뜻대로. 만약에 뒤집어서 뒤집은 것이 나의 표입니다. 칼입니다.
주님이 주신 율법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를 난도질을 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이 따로 구상되지 않게 만들어요. 설사 잠깐, 이것이 나다, 내가 물 마신다 할지라도, 돌아서게 되면 ‘주께서 하신 거잖아요. 주께서 일 벌렸잖아요.’ 근데 마귀는 ‘네가 했잖아. 네가 했어.’ 자꾸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 투쟁, 그 투쟁이 하나의 계속해서 주님이 정상길로 인도하는 오면서 티격태격하는 주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준 좁은 길이에요. 내가 고생하는 길이 좁은 길이 아니고, 내가 맨 날 얻어터지는 길 그것이 천국 가는 좁은 길이고 거기에 가면 모든 성도는 머리가 되어 있고, 나머지는 전부다 꼬리가 되어 있는 것을 신명기 28장 13절 말씀이 주님 안에서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천국가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평소에 하루하루 과정이 마치 나에게만 의미 있다고 착각했는데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나타내는 데만 의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의도가 묵살 되더라도 도리어 거기에서 천국에서 주어진 새로운 의미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