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강-신 28장 25-35절(말씀과 저주)1709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25 - 35절입니다. 구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자가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괴창으로 너희를 치시리니 너희가 치유를 받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소경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그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김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기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 지나 네 손이 능이 없을 것이며
네 토지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것임이라.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게 미치리니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를 못할 심한 종기를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방금 ‘아멘’ 하셨습니까? 오늘의 운수가 이래 나왔는데, 오늘 토정비결 떼보니까 이래 나왔어요. ‘곱게 받겠습니다‘ 라는 말을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지요. 이게 얼른 보면 하나의 미래의 역사처럼 보이지만 미래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의 사건의 반복입니다. 왜 사건의 반복이냐 하면, 이 사건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말씀이 말씀대로 현실화 되는 그거뿐이에요.
우리가 죽든 망하든 그거 별 관심 없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니가 살아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니가 살아나는 게 진리가 아니고 말씀이 살아나는 게 진리란 말이죠.
이사야 4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말하는 자여, 외쳐라.” 그러니까 “어이!, 말해!”, “뭐요?”,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그러니까 “따라 해라” 이런 뜻이거든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이 서리라” 이것은 말씀으로는 우리가 따라 할 수 있어요. “Repeat after me!" 하면 따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로 따라하는 게 아니고, 아예 우리 인생을 이것을 증명하는 확인하는 인생으로 바꿔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육체는 풀이요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다 허무하다“라는 것을 반복을 시키지만 나중에 인생을 다 살고 돌이켜 보게 되면 이거는 반복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처음부터 굳어져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오늘도 애기 하나 봤습니다만, 참 걱정되죠. 태어나면서 자기는 자기 요구대로 다 할라고 엄마한테 아마 땡깡도 부리고, 투정도 하게 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어린 얘들이나,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눈에 보이는 작은 자기 인생이 자기에게 전부가 되어 버립니다. 전체를 모르고 일부만 보면서 그것 가지고 ’나는 구원 받겠다, 천당 가겠다, 지옥 가겠다, 나는 잘 살았다, 못 살았다‘ 기껏해야 그 안에서 찾는 거예요.
전체를 봐야하는데. 전체는 뭐냐 하면, ”니가 그렇게 인생을 요동친다 할지라도 그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화 되기 위해서 너를 사용했다. 왜, 니가 싫어? 그게 불만이야?“, ”아닙니다. 가라하면 가고, 까라하면 까야죠, 뭐.“ 그렇게 나오면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나의 믿음을 버리는 게 믿음이에요. 나의 믿음을 버리는 게. 더 이상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 게 믿음이에요. 왜냐면 내가 그동안 방해 했잖아요. 내가 내 위주로 산다는 그것이 주님의 펼치시는 말씀 중심의 세계를 계속해서 우리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그걸 훼방질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힘 빠질 만한데. 이제 뭐 연세가 돼도, 오늘 참석 안하셨습니다만, 연세가 돼도 계속 자기중심입니다. 연세가 돼도. 고집부리면서. ’과연 육체는 풀 맞구나, 그러니까 내가 자랑질 하고 싶은 그것도 다 헛되고 헛된 거구나.‘ 이걸 확인하면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내 인생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대로 갈 뿐입니다.‘ 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이렇게 누누이 말씀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우리는 우리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우리는 없앨 마음이 전혀 없지요. 그러면 제가 말을 바꿔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원대로, 우리소원대로, 우리 욕구대로, 욕망대로 세상이 내 중심대로 돌아가길 바라는 그거, 그거는 하나의 깔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깔판. 어떤 깔판이냐 하면,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의심스러워서 이야기 합니다. ”당신이 오실 자 맞습니까?“ 할 때에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내가 이 땅에 깔판을 깔러 왔다.“
깔판이 뭐냐 하면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을 깨끗이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이렇게 할 때, 11장에 보면 10장에도 나오지만 ”문둥병이 깨끗함을 얻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게 깔판이에요.
방금 우리가 신명기 28장을 봤잖아요. 차마 우리는 이런 지경이 되기가 겁나지요. 뭐 좋다고 우리가 이렇게 길게 읽다 보면, 길게 읽다 보니까 설교시간이 이 만큼 지나갔어요. 그 정도로 길게 읽은 그것이 주님께서 이것을 하나의 깔판으로 깔아줘야, 깔아줘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어요.
요가 하는데 그냥 딱딱한 데 하면 다치잖아요. 밑에 요가 깔창 있잖아요. 거기서 안 좋은 화학물질 나온다는 데. 어쨌든 간에 그걸 깔고 하잖아요. 그걸. 매트릭스 같은 그것을 깔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완전히 저주에 해당되는 상황으로 몰아 넣으셔서 그 몰아넣으신 저주, 절망적인 상황이죠,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로소 메시아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까 다시 마태복음 11장 다시 읽어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이 깨끗함을 얻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할 때에 우리는 나한테는 이런 일 없고, 남한테 이런 일 일어나면 그냥 관람하고 싶지요.
”아이고, 세상에 귀머거리가 들었대.“ 그러면 우리는 뭐 할 준비 하냐면 주님께 박수 칠 준비를 합니다. ”짝,짝,짝,짝, 주님 참 잘하셨어요.“ 그러면 주님이 휙 돌아보십니다. ”자, 그러면 니가 귀머거리 한 번 해 봐라. 나와!“ ”어데요~!“ ’X'표 하면서, 그 유명한 X표하면서 ”저는 안합니다, 저 개망신 당하기 싫습니다, 저 안합니다.“
문둥병이가 나았다니 하면서 박수 치잖아요. ”그러면 니가 한번 해볼래?, 니 문둥병 한번 되볼래?“ ”어데요!, 저는 예방주사 맞아서 문둥병 안 걸리도록 이미 사전 조치했습니다. 저 불러 내지 마세요. 저 조용히 살랍니다.“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천당 갈랍니다.“ 그렇게 하죠. 참 비겁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좀 남자답게 강건하다 이 말입니다. 자꾸 빼지 말고 주께서 불러 낼 때 자꾸 뒤쳐져 물러가지 말란 말이죠. 얘들 이렇게 학교에서 교사로서 가르쳐 보면 그날 날에, 오늘이 3일이잖아요. 3일에 3번인 아이들 긴장 됩니다. ”3번, 13번, 23번 나와봐!“ 이러거든요.
그냥 불렀다가는 학부형들에게 항의 들어오기 때문에 번호 맞춰서 부른단 말이죠. 무작위로 불러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소경 되서 주님에게 오니까 그 사람 자기 죄 때문이라고 그랬거든요. 자기 탓. 또 개인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거는 소경 되어야 한다.“ 깔판을 까는 거예요.
소경이 왜 됐는가. 신명기 28장에 본문에 의해서 소경 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거든요. 소경 뿐입니까, 심지어 종기까지. 개창이라 하는 종기와 괴혈병. 괴혈병은 우리가 비타민 C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데. 괴혈병, 치질, 종기, 경심증. 경심증은 가슴벌렁 거리는 거, 깜짝 놀라는 거, 정신이상되는거 말합니다. 하나 버릴게 없어요. 정말 주님 잔인하십니다.
이 세상은 정말 무정해요. 그래서 나온 게 ‘무정 부르스‘라는 거. 정말 무정해요. 나를 봐주지 않는 세상. 나에게 특혜 베풀지 않는 세상. 기도 열심히 한다고 피해가지 않는 주님의 저주. 물론 성도에게 저주는 없습니다만은. 주의 말씀 저주가 없다는 말은 이런 병이 안 생긴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조차 복인 줄 알아라’ 이런 뜻이에요.
‘나는 건강해야 되고 나는 안 다쳐야 되.’ 라는 그런 입장에서 기준과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내세우지 말라는 말이죠. 목사가 뭐 신학교 가고 난 뒤에 ”나는 목회 교인 2명만 있으면 되.“ 이런 사람 없어요.
성경에 분명히 ”두 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있으면 부르면 함께 있다“ 했거든요. 그러면 두 세 사람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거 할라고 신학교 공납금 수천만원 해가지고 그런 사람 없습니다. 자취하면서 돈 쓰고. 적어도 한 2천명 정도는 돼야 되고, 막상 나와 보니까 이 종교시장이 마땅치 않거든요.
쉽지 않거든요. 그러면 500명 정도는 해야 되는데, 이거는 500명도 안되더란 말이죠. 그러면 최소 생계비 나오는 게 50명 내지 100명은 돼야 하는데, 그걸 목표로 간절히 새벽 강단, 그것도 새벽 마루 강단을 꿇어앉아서 합니다. 그저 100내지 150명만..“주여, 제 마음 많이 낮춘깁니다, 주여.” 관심사가 “주여, 제가 깔판이 되게 하옵소서,
저주를 보여 주는 깔판이 되게 하옵소서.” 그거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 나와도 말씀이 목회해서 밥먹고 살 생각하지, “말씀이 내게 임하소서, 내가 왜 풀이며 내가 사는 게 왜 헛됩니까, 그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이렇게 간절히 통성기도하는 교회는 내가 못 봤습니다.
“주여 통째로 개창되게 해주시고 통째로 우리의 시체가 짐승의 밥이 되게 해주시고” 여기에 25절에 나오잖아요. 제가 말씀에 없는 소리 했습니까? “제발 북유럽에 놀러 갔다가 공중에 새에게 먹히게 하옵소서” 이런거, 이런거 놀러 가기 전에 그런 기도 안하잖아요.
여전도회에서 놀러 가기 전에 제일먼저 하는 의식이 뭡니까? 같이 동승하는 부목사나 담임목사가 출발하기 전에 기도하잖아요. “주여,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되게 해주시고, 무사히 귀환되게 하옵소서.” 무사히 귀환되게 해 달라 해가지고, 갈 때는 찬송 부르면서 가다가 올 때는 온갖 관광 춤 다 추고. 오는데.
무사히 오게 해 달라 해서, 어느 교회는 여전도회 8명이 죽었는데, 차 뒤집어 져가지고. 기도 안했겠어요? 기도 했어요. 했는데 8명이 죽었다니까요. 잘 죽인 거죠. 주께서는. 특히 30절에 보세요. “니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잘 것이고.” 사랑과 전쟁인가?
결혼식 할 때 목사님 주례 해가지고 행복하게 살라고 파뿌리가 양파뿌리 되라고, 무슨 뿌리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건 아주 본격적으로 게임 들어가기도 전에 약혼자 빼앗겨 버렸어요. “니 여자가“ 라고 했는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하고 동침을 해버린다 그 말이죠.
전원주택 짓겠다고 뭐 편백나무 해가지고 집을 지었는데, 여기 30절입니다. 집을 건축했는데, 그 집을 차압당해서 다른 사람이 그 집에 살고 있을 때. 지가 손수 편백나무 해가, 몸에 좋은 거 다 했는데. 여기 포도원을 심었는데 그 과실을 따지를 못하니까.
특히 31절은 아주 약을 올립니다. 소를 잡아가지고 했는데, 숯불까지 다 피워서 했는데, 소 스테이크 먹을 순간 갑자기 전화 와가지고 ”아빠, 사고 났어.“ 해가지고 펜션 주인이 다 먹어 버렸어요. 다른 사람이 아주 호식을 했어요. 호식을. 배 터지도록 먹었어요.
결국 저주란 말은 뭐냐 하면 너에게서 너가 손을 떼라는 말입니다. 니 인생에서 니 손을 떼라. ”니 중심의 필연을 포기해라, 예수님 중심의 필연이다“라는 말이죠. ‘내가 이런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이런 결과가 주어진다‘라는 자체가 이미 획일화 된 필연 적 조건입니다.
그런 필연적 조건이라는 것이 하나에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교회 충성했으니까 반드시 천국 가는 게 마땅하다‘ 는 그 헛된 망상, 그게 헛된 망상이에요. 왜? 그 원인 지점에 본인의 행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본인의 행함이.
자기의 행함으로 자기에게서 오는 저주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지금 잘 못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아예 인간에게 이런 기대를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주를 준다는 것은, 전에 지난 시간에도 읽어 보았지만 여러분 저주 대목 읽어 보니까 너무 구체적이지요.
이 구체적이라 하는 뜻은 ”한번 잘 해봐“ 이런 뜻이 아니고 ”반드시 내가 이스라엘 역사를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고 말겠다.“ 라는 뜻이에요. 저주로. ”같이, 나랑 같이 저주 받자.” 이게 제가 오늘 오전 설교할 때 뭐라 했습니까?, ’사랑‘ 이라켔죠. 사랑. “니가 니 힘으로 대충 살라하지 말고, 저주 속에서도 건짐을 받을 때 비로소 니는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 알게 되리라.” 이 말이죠.
다니엘 세 친구가 믿음 좋은 거 우리가 압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니엘 세 친구를 저주 속에 집어넣지요. 용광로 속, 풀무불 속에 집어 넣습니다. 참, 잔인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기 자녀를 풀무불 속에 집어넣고, 사랑하는 다니엘을 사랑하기에 며칠 간 굶어서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사자 굴에다가 집어넣는 하나님. 우리는 집어넣는 것까지만 압시다.
그 뒤에 뭐 헤헷 거리면서 ’그래도 다니엘 살아났잖아, 그래도 불속에서 나왔잖아.‘ 그런 것을 자꾸 예상하지 말고, 집어넣읍시다. 그것이 바로 다니엘과 다니엘 세 친구에게는 ’우연‘입니다. 우연. 이 우연을 다른 말로 하면 예상 못할 일이에요.
우리는 우리 챙기기 바쁘고 고집스럽기 때문에 항상 예측을 하고 예상하는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어요. ’이렇게 하게 되면 주께서 인생을 잘 이끌고 갈 것이다.‘ 근데 막상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이 고백하는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항상 예측 못하는 것이 내 인생을 그 쪽으로 몰아간다는 말이죠.
그 예측 못한 곳에 들어서고 보니까 이게 내 인생이 나를 증거 하는 인생이 아니고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에요. 강제로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인도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의논할 것 같으면 미리 예측이 가능한데 전혀 우리가 예측 못하고 예상 못한 일들이 우리에게 자꾸 발생됩니다. 예상 못할 일들이.
복음 알고 그렇게 고백하시는 분들이 꽤 많이 있어요. 십자가 마을에. 그런 분들에게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이겁니다. 뭐냐 하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 성도가 할 일은 딴 게 아니에요. 보고서 작성하는 겁니다. 보고서 작성.
“저 이렇게 인생 살았는데, 이렇게 내 위주로 살라 하다가, 주께서 그때 그날 개입했잖아요.” 그래서 “나는 주님의 ’죄인 중의 괴수‘인데 제가 이렇게 구원 받았습니다. 이 면류관도 확 벗어가지고 주님께서 받으시는 게 합당합니다.“ 라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내 인생이 아니었습니다”라는 보고서. “주께서 긍휼이 여겨서 인도 하셨습니다“라는 보고서.
하루하루 베개 베고 주무실 때에 ”오늘 하루도 내가 이끈 하루가 아니고 주께서 유발 시킨 하루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면서 보고서 쓰시는 거예요. 쓰면서 뭐냐 하면 ”나는 풀이고 나는 풀의 꽃 같은 것을 원했지만 주께서는 내 예상 밖에 원치 않는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내일도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일도 그렇게 살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이제부터 이름을 게바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 하시며 이름을 반석으로 지으니 교회가 니 터 위에 세워지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걸 보고 천주교는 “베드로 시체 로마에 있다고 그것 가지고 교황이 베드로 후계니까 이 교황이 주도하는 이 교회, 우리 천주교 조직이야 말로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중간 중개소다, 중간 집단이니까 우리한테 영생 받아야 구원 받는다.“ 이렇게 주장하고,
개신교는 또 뭐라고 착각들을 하느냐 하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위에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에 베드로 같은 고백을 해야 됩니다.“ 하고 베드로 고백 끄집어내고 난리를 치는데 그 본문의 뜻은 둘 다 아니에요.
예수님이 반석입니다. 베드로 죽이고 날마다 죽이고 그 위에 예수님이 반석으로서, 주님이. 왜냐하면 주님이 뱉은 말은 베드로가 못 지켜요. 내 뱉은 당사자가 그 말을 완수시켜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에요. 반석위에 터 지으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얼마나 기존의 조직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해서 그걸 출발점으로 삼으니까 해석을 자꾸 자기 정당성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저주를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 그럼 어떻게 적용시키는 가. 그 적용 시키는 방법을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집에 진공청소기 있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집에 가구나 이불 정리할 때는 서문시장에 가면 진공 팩 팔아요. 고걸 사가지고 이불을 그 안에 넣으시고 거기에 구멍이 나 있어요. 거기에다 청소기를 꼽아가지고 작동을 시켜 버리면 요게 쫄깃하게 냉동 떡국처럼 공기가 싹 빠지면서 부피가 쫙 줄어들어요.
성도의 인생이라는 것은 이렇게 쓸데없는 거 뽑는 작업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쫙 뽑아 버려요. 납작하게 됩니다. 저도 몰랐는데. 요걸 누가 이번에 어른 두 분이 오셨거든요. 감당 못할 우리집안에 갑이 오셨기 때문에 그것도 두 명이 오셨기 때문에 집안 청소를 깨끗이 정리정돈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데, 제 아내가 그걸 그렇게 뽑아 가지고 하니까 참 신기해요. 납작하게 진공 떡국처럼 그렇게 돼가지고 탁탁 포개니까 부피가 얼마 없어요. 저게 바로 성도의 삶이다. 부피를 줄이자. 교회도 부피를 줄이자. 쓸데없는 거 다 뽑아내자.
그것도 매일같이 쫙 쫙 뽑아내고 피만 남기자. 피의 기능만 남기고 우리 존재의 자랑은 다 뽑아 내 버리는 거예요. 내 피부 층을 뽑듯이. 그 이야기가 어디 나와 있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고, 누가복음 19장에 16절에 나오는데 그 말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오늘 이 본문 말씀을 깔판으로 까는 거예요. 저주라는 것이 ’이거 피하자’ 가 아니라 어차피 이거는 노리고 들어 온 거예요. 노리고. 너는 어차피 문둥병, 소경 되더라도 군말 하지 마라는 거죠. 그것이 원래 주께서 일하시는 깔판이기 때문에 ”왜 하필이면 저에게~“라는 불평 불만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9장 15절에 보면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이 각각 장사한 것을 알고자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를, ‘므나‘라 하는 것은 금은의 수량을 말합니다,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를 다섯 므나로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줄을 내가 무서워 함이라, 당신이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 하였느냐, 그리 하였으면 내가 와서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르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사람에게 주라‘ 하고“ 이렇게 되어있죠.
이 말씀의 수행자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이거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던진 말씀을 누가 수행하느냐, 누가 실천하느냐, 예수님이 완성을 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느냐 하면 열 므나, 다섯 므나 남긴 사람의 자리로 가서는 안돼요. 어디를 가느냐 하면 몽땅 빼앗긴 한 므나의 자리에 가게 되면 비로소 이 말이 이해가 되요. ”제가 주의 뜻으로 이렇게 재벌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없으니까 천만 다행이지만, ”주의 뜻으로 제가 우리 아들 사법고시 보냈습니다“ 고거 진공팩으로 확 뽑아 버려야 돼요.
”주여, 저는 제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저주도, 성경에 나온 모든 저주란 저주는 죄다 내 자리로, 내 자리로 출발점을 스타트를 그렇게 삼아 버려요. 삼아 버리면, 이 말씀이 날마다 우리에게 적용해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에 대한 감사만 절로 나올 겁니다.
”주여, 이 처럼 우리는 구원 받을 수도 없고 저주가 저한테 가장 합당하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주께서 이 말씀을 지켜서 ”네게 주어 질 저주를 네게 합당한 저주를 내가 가져갔느니라, 그리고 너는 내 덕으로 천국에 가서 이제는 내, 이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고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 자랑을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왜?.
지금 말씀을 줬으니까. 이제는 열 달란트 달라고 달란트니, 탤런트니, 뭐 재능을 발휘하세요, 꽃꽂이 탤런트, 피아노 탤런트, 그런 것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는 일체 지키지를 못 할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한 므나 남은 그 악하고 게으른 종의 심보가 바로 우리의 심보와 합치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주의 말씀 가운데 저주 받은 자를 집어넣는 이유는 그 저주가 이 땅에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겁니다. 이제 성경 볼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주셨고, 신명기 28장 주셨다는 점에서 이제는 저주를 볼 때마다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 내가 종기 나야 되는데 종기가 나았네? 주여, 정말 이러시면 안 됩니다. 종기가 온 천하에 욥처럼 온 천하에 나야 되는데 종기가 없습니까?“ 주께서 ”기다려 봐라, 내일 줄게.“ 그것도 너무 심하고, 내가. ”하여튼 종기 없음을 감사합니다.” 하면서 늘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기주의, 우리의 하는 행세, 우리의 본성, 주께서 주신 저주가 너무나 우리에게 합당함을 이제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따라서 알게 해 주신 것 감사하고 거기에서 이미 복으로 전환시킨 것도 감사하고 매사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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