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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내용(창28;7-10) 1708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6. 19:56
2017-08-06 14:57:40조회 : 18         
   복의 내용 17080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복의 내용(창세기 28:7-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bDLtcVI7zrI, Hit:1

 이근호17-08-06 15:39 
복의 내용 

2017년 8월 6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7-10 

(28: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28: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28: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복의 내용이 구미에 당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당기는 출처가 어딘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즉 ‘주의 이름’인지 아니라 ‘나의 이름’인지를 말합니다. 각 개인마다 ‘나의 이름’은 ‘나의 신체’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응집해 모아두는 추상적 결집개념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나의 신체는 ‘나의 이름’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영적, 혹은 정신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 정신적 존재는 외부와의 소통을 언어로 합니다. 신체하고는 다릅니다. 언어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정리해서 그것으로 ‘자기 이름’의 내용물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흔히 이런 작용이 바로 ‘위신과 체면’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경에 ‘복’에 관한 내용이 나열되어 있더라도 ‘누구를 위한 복’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당연히 복에 대해서 탐을 내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의 습성이 온통 ‘나 키우기’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복’은 인간의 이름을 키우기 위한 복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복입니다. 

즉 ‘복 수여자’는 필히 ‘복 제공자’와 연결 지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복 제공자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제공되는 것이 복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름 교체 작업’은 복의 구체화를 통해서 당연히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름 교체’가 없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이 ‘복 제공자’를 찾는 작업에 대해서 신명기 28장에 이미 힌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최종 모든 말씀 준수자가 바로 복 제공자입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말씀 준수자’=‘복 제공자’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복 제공자’가 되려면 ‘말씀 준수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이라는 것은 모든 말씀을 다 지킨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도저히 ‘말씀 준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어디까지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에 스톱이 되어 있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참으로 복을 잘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대해서 인간은 무지(無知)한 입장에 있습니다. 

여태껏 아무리 잘 지켜도 내일 말씀을 위배하면,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권리없습니다. 도리어 저주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 수여자’을 찾으려면, 실제적으로 말씀에 위배했음에도 복으로 주어지는 상황을 찾아봐야 합니다.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살펴야 합니다. 

신약에 도달하기 전에, 구약에서는, 과연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복 수여자라고 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찾는 작업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 살림하면 저절로 복이 주어지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땅은 ‘말씀 완성’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약속의 땅’이란 과연 누가 복에 합당한지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성전이 나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 성전의 기능이 바로 신명기 28장 나오는 내용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왕상 8:29-32) 

여기를 보게 되면,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복의 내용이, 저주받아 마땅한 상태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운데 서서 복을 저주를 바뀌어줍니까? 그분은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즉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이 이런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이유는, 이미 모든 말씀에 대해서 완벽하게 다 이루었다는 조건 때문입니다. 

즉 앞으로 어떤 계명과 말씀이 더 추가된다 할지라도 시간을 통합해서 모든 실효성 있는 말씀 성취를 행사하신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구약 때의 ‘주의 이름’은 성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책임지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주의 이름’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이름’을 걸고 말씀 지키기에 나서면 아니되는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저주받을 자’로 기정사실화 시킨 형편에서 인간은 자기 이름을 팽창하거나 드높이고자 하는 시도는 다 부질없는 헛짓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 이름’을 위한 복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한 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죄없는 편에 서서 복을 새삼스럽게 욕심내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 ‘주의 이름’이 제시하는 ‘복’은 ‘복된 소식’, ‘복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곧 십자가의 피입니다. 이는 곧 ‘죄가 없는 곳’에서 살면 ‘복’도 없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39:26에 보면,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주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구원이 완성되고 난 뒤에, 성도에 나타나는 마음의 현상은 오직 ‘부끄러움’ 밖에 없다는 겁니다. 부끄러워야 구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 이루었기에 그 앞에서 ‘자기 위신과 명예’를 위해 몸부림쳤던 자신의 헛발질을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16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복음을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스스로 가진 것으로 당당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 안에서 없어져야 할 ‘자기 이름의 몸부림’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08-06 23:17:32조회 : 13         
145강-신 28장 7-10절(복의 내용)170806-이 근호 목사이름 : 송민선 (IP:116.46.87.22)
145강-신 28장 7-10절(복의 내용)1708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기로 한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보통 성경책에 이 대목이 줄이 쫙 쳐있습니다. 성경이 이런 멋진 희망을 제공했다는 것이 그동안 교회 다닌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지요. 그래서 더 설교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겁니다. 이렇게 분명한데 여기서 무슨 토를 달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토를 달겠습니다.

여기서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라는 말씀 자체가 내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바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그렇다면 구약 내내 ‘이름 바꾸기’, ‘이름 교체하기’ 작업이 구약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자기 이름이 있어요. 그리고 자기 이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아주 대단합니다. 자기 이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인간은 조금도 포기 할 줄 모릅니다.

모압과 이스라엘이 만난 적이 있어요. 발람선지자가 있던 그 시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을 만났는데, 그 모압에 발락이라는 왕이 발람이라는 선지자에게 부탁하기를 저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좀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 저주를 하려고 하냐면 인간이 자기 이름을 지키는 데는 그렇게 곱게 지키는 게 아니에요. 비교해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내 이름이 과연 지킬 만 한 것인지를 다른 이름과 견주어서 거기서 파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저주를 퍼 붓는다든지 저 사람에 대해서 악담을 했는데 그들이 그대로 악담을 받고 저주를 받는다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승인받는 사람이 되고, 나의 이름은 내가 원했던 목표에 도달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늘 신명기 보면서 복과 그 뒤에 저주가 나올 텐데, 이 복이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내가 평소에 내 이름을 위해서 생각해 둔 그 복, 뭔지 잘 몰랐는데 은근히 잠재 된 그 복을 생각하며, ‘그래, 주님 바로 이거였습니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요. 이런 것을 주신다고 하니까 감사합니다.’ 하며 고마워하거든요. 이름 바꾸기를 거치지 않고, 이름도 안 바뀐 상태에서 이거 내가 원했던 거라는 겁니다.

여기 보면 ‘너를 대적하는 자가 일곱 길로 도망가고’ 라고 나오는 데, 골목에서 깡패 만나면 그 깡패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는 거죠. 그 다음에 ‘창고와 네 손으로...’는 촌에 농산물 창고 지어 놓으면 더 넣을 곳이 없을 정도로 풍년이 든다는 말입니다. 풍년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고 값도 되고, 풍년도 되고 해야겠죠. 그 뒤에 12절 보게 되면 ‘때를 따라 복을 주시되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아니한다...’ 하는데 대출 없이 아파트 세 채 사는 거죠.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대출 없이 아파트 사는 거예요. 그 다음에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 한다’는 말은 60명되는 학급에서 우리 아이가 1등 되고 40등은 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놀아도 40등 아니고 1등이에요. 

여기 또 조건이 붙어요. 13절 14절에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다 지키고 행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복을 받는 다는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14절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조건 없이, 무조건 우리 원하는 걸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성경말씀에 이런 복이라는 것이 나왔다는 말은 분명히 복은 있다는 거예요. 

복은 있는데 그 복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다 보니까, 이것이 말씀의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거예요. 말씀의 자물쇠를 풀어서 거기 나온 말씀을 지키게 되면 복을 받는 겁니다. 말씀을 한 번씩 지켜서 끄집어 낼 때 마다. 그렇다면 이 구약 성경에 있어서 이 본문말씀-방금 이야기한 약속은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화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보여주기 위해서 신명기 28장으로 성경은 끝내고 그 다음 그 뒷말은 없어야 되는데 뒤에 나온 신명기 28장 14절까지의 이야기가 15절부터 해서 28장 끝까지인 68절까지 앞부분보다 3배가 넘는 분량인데요. 앞에 주었던 복을 다 뒤집습니다. 줘 놓고 다 깽판치고,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버텨도 버텨도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복의 내용을 갖고 주인이 될 만한지 보자는 겁니다. 너도 누구도 주인이 될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복은 조건이 살아 있어요. 살아있는데 그 수용자가, 적합한 수용자가 없는 겁니다. 왕자가 파티 끝나고 난 뒤 12시 넘었는데, 여자 하이힐을 하나 발견했어요. 그 여자 하이힐 들고 그 여자가 왔던 방향으로 마을에 가서 이 하이힐이 맞는 임자, 굉장히 인상 깊었던 자신하고 춤춘 여인을 찾습니다.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닌 거예요. 신발은 살아있어요. 그리고 왕자가 줄 복은 있습니다. 그런데 괜히 헛물만 켜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은 이 복을 보고 이거는 딱 내꺼내라고 자기 것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말씀과 경쟁관계에 돌입됩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 네가 내놓을 거 있으면 다 내놔봐라. 네가 할 수 있는 거 다 내놔봐라. 다 내놔 보니까 그거 아니야~너는 합당치 않아~다음 분~이런 식으로 구약이 전개됩니다. 약만 살살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누구냐는 겁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 복의 수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우리가 묻게 되는데, 누구인지를 묻지 말고 누구의 이름으로 나타나시는 분이 이 복의 혜택을 받습니까? 라고 물어야 되요.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인데 그 주의 이름이 이미 어디서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성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갑자기 성전이야기 꺼내니까 오늘 내용과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지실 텐데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미국에 있는 중국집에 가면 포춘쿠키라는 게 있답니다. 행운의 과자 같은 건데요. 식사가 다 끝나고 난 뒤에 중국 사람들이 상술로 ‘이 과자 드셔보세요’ 하며 내 놓습니다. 그 과자를 뜯어보면 거기에 행운의 글 들이 쭉 나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 온 당신에게 이제부터 이런 행운이 찾아 올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 행운의 글귀는 과자 속에 그대로 있고, 그 과자와 하필 그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먹게 되는 나와의 극적인 만남에서 행운은 실현이 되는 거죠. 행운이라는 것이 이 과자의 소유자가 오기를 이 과자는 오랫동안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거죠. 이 과자를 집을 때 ‘ 아 그래,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났구나’ 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신명기의 모든 축복이 아까 제가 율법과 관련 돼 있다 했지요. 그러면 이 주인공을 찾아가는 방법은 주님께서 이미 힌트를 줬습니다. 율법이 어디로 완성되어 가는 지 그 율법의 경로가 어디에서 총집합이 되는 지를 봐야합니다. 제가 지금 율법이 한곳에 모이는 것을 이야기 했는데 좀 어렵게 말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는 장소가 어디냐 라고 물어도 괜찮아요. 

인간은 아무리 현재에 잘 살아도 미래가 남아있는 이상 복 받을 자인지 아닌지 불확실합니다. 자기 딴에 열심히 살았지만 앞으로 내일 되면 무슨 저지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미완료예요. ‘이 만큼 살았으니 복주세요’ 하면, ‘내일 가보고’ 내일 되면 ‘한달 뒤에 보자’ 한달 뒤에는 ‘그럼 죽고 난 뒤에 보자’ 이러면 결국은 이 땅에서는 혜택자인지 확정이 되질 않았어요. 

그러면 말씀에 이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다 지켰다는 것을 미리 구경하면 안 되겠습니까? 미리 그것을 파악하면 되지 않겠어요? 지금 그런 암시, 그런 징후를 구약성경에서 이미 보였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마지막 때에 오시긴 오시는데, 미리 앞당겨서 주의 이름이 걸치고 있어서 자기 백성을 만나는 장소를 제공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 계시는 성전에서 어떤 효과가 있는지 우리가 볼 필요가 있겠죠. 열왕기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열왕기상 8장 35절부터 나오는데, 이건 길더라도 기분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읽어 드리겠습니다. “(35절)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 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36절)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이렇게 신명기 28장의 축복을 제공하는 거예요. 신명기 28장에서 우리는 중립적이었습니다. 나는 착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은데 이제는 야무지게 말씀대로 살거라는 겁니다. 중성지대에 있었는데 성전이 나타났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신명기 28장의 복이라는 것을 따내려고 노력해 봐도 인간의 이름으로써는 끝났다는 것을 솔로몬이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의 행함으로 복 받을 생각은 아예 접어라, 그런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하면 성전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누가 계시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있단 말이지요. 그럼 주의 이름이 있으면 어떤 효과입니까? 이미 망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쫙 깔아 버립니다. 아무도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는데 이 성전에서 자기 죄를 자복하게 되면 여기에 기재되어 있는 복의 리스트가 너희 것이 된다라고 열왕기상 8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나온 것을 쭉 보게 되면 열왕기상 8장 37절에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이라고 나와 있어요. 열왕기상 8장 37절은 신명기 28장 21절~22절에 나왔던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 그 축복의 땅에 깜부기가 있고 한재가 있고 풍재가 있고 썩어 들어가고 재앙이 있고 진드기가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그 약속의 땅에 살만한 백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 땅이 아니고 구원 받는 사람인가 아닌가 한번 보자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들은 좋다고 들어갔지요.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는데 젖과 꿀은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었습니다. 나그네 인생인거죠. 영원한 곳은 하늘에 있는데 땅에서 전부다 결정 내려고 승부 내려고 한 겁니다. 여기 있다가 저기 가면 행복하겠지 그렇게 자꾸 생각하는 데요. 본인이 행복할 사람인지 한번 보란 말이죠. 

돈만 있으면 행복하겠지 하지만 돈만 있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가방 싸들고, 옷 싸들고, 스마트 폰 있어도 언제 맞아 죽을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밤에 창고 지어 놓고 가득한데 주님께서 오셔서 가져가시면 네 영혼 데려가시면 저것이 누구의 것이 되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신명기 28장을 준 것은 복은 받을 사람에게 가야하고 줄 수 있는 분이 줘야 하는데, 받을 사람은 주님 앞에 죄인이 되어야 하고 줄 수 있는 분은 우리가 지키지도 못한 것을 대신 지키신 분이 우리의 복의 수여자입니다. 그 복의 소식을 집대성 한 것을 ‘복’이라 하지 않고 ‘복음’ 이라 ‘기쁜 소식’이라 합니다. 

하나의 대상화 된 돈이라든지 부동산이라든지 그런 거 하지 말고 누가 주실 것인가 그 ‘누구’를 찾아야 되요. ‘무엇을’ 주실 지를 찾지 말고. 누가 와서 주실 것인가를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주시는 데 우리가 원하는 냉장고나 좋은 차나 이런 걸 주시는 것이 아니고 피를 주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를 주시는 데 그 물컹거리고 찐득한 걸 줘서 뭐합니까. 얼굴에 벌겋게 바르고 다니라는 건지. 그걸 어디에 써먹는 액체냔 말이죠. 주님은 죄를 용서하는 액체라고 하십니다. 

자꾸 이 땅에 집착을 하니까 혼인 잔치는 지금 음식 준비 다 됐는데 음식 상하려고 하는데 손님이 안 온다 말입니다. 어디는 벌써 144,000명 다 찼다는 데. 우리교회는 아직 차지도 않았어요. 혼인 잔치는 있는데 전부다 이 땅에서 자기 복 챙기려다 보니까 초청장을 찢어 버리는 거예요. 나는 밭을 샀는데, 소를 샀는데 봐야 되고, 자식 장가가는 데 가야 되고, 전부다 자기 이름과 못 끊어 졌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복을 줄때는 먼저 우리가 죄를 지은 원인을 밝히시는 데 그게 뭐냐 하면 내 죄 때문에 내 이름에 집착하다 보니까, 내 명예, 체면, 위신... 이런 걸 놓지를 못하는 겁니다. 결혼을 해도 주의 가정이고, 내 가정 아니고 전부다 주의 가정으로 바꿔야 하는데 끝까지 내 행복, 명예, 위신을 계속 쥐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을 주실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거 네가 쥐고 있어 봐야 내 피만 유발 한다’ 말씀하십니다. 쥐고 있는 것이 피 흘리는 요건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신명기 28장에 복과 저주는 놀랍게도 같은 말씀이에요. 그리고 인간에게는 복보다 저주가 합당해요. 그리고 주님한테는 저주보다 복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저주와 복을 자기 인생가운데 다 깔아 놓으셨어요. 예수 믿기만 하면 신명기 28장 다 뗐다는 거예요. 말은 좋은데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한다면 열왕기상에 성전에서 보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 46절에 보면 “범죄치 아니한 자가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 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이처럼 범죄 치 아니한 자가 없으니 이 세상은 전부다 저주와 어려움과 힘듦 속에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조금 좋아도 이게 언제 날아갈지, 조금 돈 모아도 무슨 사기사건 발생하면 돈 물어 줘야 하고, 음주 운전하면 다 물어줘야 하잖아요. 항상 불안불안 하단 말이죠. 

오늘 날씨가 굉장히 더워요. 더운 이유가 뭔지 저는 압니다. 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이 이렇게 더우면 가지맙시다. 하지만 덥기 때문에 천국을 주님을 사모합시다. 이 세상은 우리를 벌주는 곳이에요. 제발 미련 두지마라고 엉덩이 차는 곳입니다. 믿을 걸 믿어야죠. 믿을 게 없어요. 사랑한다고요? 욕심이에요. 제발 위장하고 땜빵하지 마세요. 다 자기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그 욕심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합니다. 욕심을 버렸다 하는 인간은 꿀밤을 세대 쯤 주고 싶어져요. 

욕심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충동은 내 것이 아니고 내 밑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욕심으로 점철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기도할 때 자기를 규제하지 말라했죠. 그러면 자기가 너무 힘들어져요. 요거 규제하면 내꺼 주겠지, 복주겠지 하는 그런 거래는 주님과 하는 게 아닙니다. 마귀하고 하는 거예요. 

죄인입니다. 그리고 성전 있습니다. 주님 이름 거기서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십자가 박아 넣으면 우리는 내 이름이 아니라 소급해서 주의 이름으로 살아온 것이 되는 겁니다. 뒤돌아보면 다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에 의해서 나는 못했지만 주님은 완성하셨잖아요, 다 이루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잖아요라는 고백을 하라고 우리는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복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이 귀한 복을 우리가 감추고 있어요. 마지막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에스겔 39장 26절을 보게 되면 구원을 받을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말합니다. 에스겔 39장 26절에서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하고 두렵게 할자 없을 때” 아까 신명기 28장에서 언급 된 복입니다. 구원이죠.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라”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해 주시고 ‘참 네가 생각해도 부끄럽지 않느냐‘ 하시는 거죠. 

기를 쓰고 잘난 인간 되려고 독자적으로 멋있는 인가되려고 행한 모든 종교적인 테크닉 발휘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웃기지 않느냐, 자꾸 누구한테 속아 넘어갔느냐, 다 헛수고 아니냐, 아무리 몸 부림 쳐도 부끄러운 자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어리석고 거치는 그 십자가 바라보며 그 십자가의 피 앞에서 내가 스스로 자기 위시를 했던 모든 짓이 참 기가 차는 일인 겁니다.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왜 그런 거 가지고 새가슴 되서 헌금 안 했으면, 전도 안 했으면 벌 받았을 거 아니냐하며, 간당간당하게 불안불안하게 사는 겁니까? 마음 푹 놓고 버티지 말고 무너지면 되는 데, 왜 자꾸 버티면서 살아 왔냐는 말입니다. 옆에서 보기 힘들어 죽겠습니다. 뭐 버틸게 있어야 버티지 아무 버틸 것도 없으면서 버틴다고 하니 말입니다. 

부끄러움을 품고 구원받고 난 뒤에 뉘우칩니다.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 회개가 되요. 주께서 다 이루 신 것도 모르고 내가 따로 뭔가를 하려고 한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마지막으로 찾아 볼 곳은 로마서 1장 16절입니다. 강의 시간이면 다 읽어 보겠지만 설교시간이기에 규제를 하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시죠? 완벽주의 그처럼 완벽주의가 없습니다. 내가 완벽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런 원칙주의였습니다. 내 손으로 영광 돌리겠다는, 나의 선악을 통해서 영광 돌리겠다는 그런 원칙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던 그 복음을, 주께서 찾아 오셨습니까? 본인이 원했습니까? 복 된 소식인 복음을 가지고 주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 저는 이 능력 생각할 때 마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 옛날 엄마들이 갓난아기를 업었던 포대기가 생각납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촌스러운 포대기. 주님이 포대기로 죄인을 등에 딱 업고 있고, 업혀서 백날 다리 흔들거려도 포대기에 감싸져 있어서 밑으로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죠. 

그 포대기를 단단히 조여 버리면 우리는 그 능력 위에 무상으로 올라 탄 셈이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 같이. 그 포대기가 복음입니다. 그냥 복음을 믿지 마세요. 복음을 믿어 버리면 내가 그 복음을 소유한 것이 됩니다. 복음은 우리가 어디에 써 먹을 용도가 아니고 복음이 우리를 옭아매지요. 우리는 그 복음의 단단한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도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느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놓고, 변명은 또 멋지게 포장해서 변명하는 그 모습, 주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 때문에 더 이상 복을 감추지 않는 복된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