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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수여자(신28;1-6) 17070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6. 19:55
2017-07-30 15:07:44조회 : 141         
   복 수여자 17073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복 수여자(신명기 28: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29vJ7kiHW5M, Hit:12
 이근호17-07-30 15:51 
복 수여자  

2017년 7월 30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1-6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 복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복으로 인하여 복 수여자가 될 자들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복으로 인하여 일어날 변화 자체를 복으로 간주하게 되면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복을 자기 것으로 영원토록 소유하려는 욕심을 노출시킨 바가 됩니다. 

인간들이 복을 원한다는 바로 그 점이 인간을 복은커녕 저주받아 합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의 소유권은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은 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와 더불어 나타납니다. 인간치고 복받기에 합당한 자는 없습니다. 

모두 저주받기에 합당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계속 반복하면서, 복이나 저주마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창조의 실제적 주인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온 천하에 드러나기 위한 환경으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이런 취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미 저주받기로 확정된’ 대상을 겨냥해서 율법을 줍니다

그 자가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는 인간 세계에서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실존합니다. 영적 존재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 있으면서 마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없는 존재’를 ‘있는 자’들이 대행하게 됩니다. 이 대행하는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들은 중성(中性)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즉 “나의 미래와 운명은 정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는냐에 따라 축복이든 저주든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저지당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강도를 탓하지 않습니다. 

소위 중립의 입장에 있다고 우길 수 있는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두고서 시비겁니다. “이 강도 맞는 사람을 어떻게 할거냐?”라고 말입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미 그들의 ‘중성적 입장’ 고수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실천을 훼방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이는 곧 율법의 실천이 인간 능력 밖의 문제임을 통보하는 계기가 됩니다. 기존의 율법적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으로 예수님이 주변 사람들을 시비거십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중립성이 침해받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에는 자신의 악마적 본심을 유감없이 나타나야 될 결정적 시기를 마주치게 됩니다. 

악마가 인간들로 하여금 ‘중성적, 중립적 가치’로 사고방식을 덮어씌우는 이유는, 구원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일방적 결정권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합니다. 로마서 9:11-13에 보면,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인간들이 관여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을 악마는 알고 인간들을 앞장 세워 반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점을 익히 아시고 그들의 방식을 통해서 도리어 그들의 실상을 공개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을 복의 그릇으로 여기고 싶어합니다. 결코 저주의 그릇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으신 그릇은, 그 내용물이 대해서 그 어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함한 그릇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릇이 준비되고 그 안에 내용을 기다리는 식이 아니라 복 자체가 그릇을 거기에 맞는 그릇을 생산해내는 겁니다. 즉 “이 그릇은 복에 부합하지 않기에 저주받아라”라든지 혹은 “이 그릇은 복에 부합하기에 복받는 그릇이다”는 결정을 복 자체가 내리는 겁니다. 

그릇이 눈치껏 복과 저주 사이에서 고를 입장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악마를 겨냥해서 주어진 근거는 바로 신명기 27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 앞에 서 있습니다. 이로서 율법은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특수한 집단 전체에 준 것이 됩니다. 집단은 율법 내용에 대해서 “아멘”만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에 대해서 “아멘”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전체는 축복산과 저주산, 양편으로 나뉘어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단의 본질을 하나로 묶는 센터는 축복산이 아니라 저주산이 에발산 밑에 있습니다. 이는 축복산에 있는 자들이나 저주산에 있는 자들이나 모두 동일하게 저주와 율법의 연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레위지파가 율법을 낭독하는데 오로지 ‘저주’에 관한 내용 뿐입니다. 축복에 관해서 “아멘”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만나기가 힘든 경우들입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말씀을 알아서 준수해라는 뜻이 아니라 ‘저주에 대한 아멘’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밀어넣으신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들이 축복을 좋아하고 그 축복을 오랫동안 소유하려는 의도를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복을 소유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율법 자체가 율법의 취지를 살리는 쪽으로 스스로 세상 판을 짜나간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겁니다. 이런 형편은 이스라엘 애굽에서 나올 때, 밤에 나온 민족이라는 점과 연관있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낮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낮에 벌렸던 자신들의 활동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겁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중립성에서 의인이 되는 식으로 자신들을 선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밤은 이와 반대로 인간의 행위에 연속성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절연(絶緣)’시킵니다. 

밤에는 인간은 잠자고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심으로 세상이 이어짐을 나타냅니다. 이 취지가 율법에 그대로 담겨 있기에 인간들은 율법 앞에서 자신이 애초부터 마귀적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8:17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에 우리 성도들은 철저하게 매여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과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죄인되게 드러내는 그 주님의 행함을 보고 주님과 더불어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구원은 예수님으로부터 결정났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8-05 13:55 
144강-신 28장 1-6절(복 수여자)1707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내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오늘 읽은 본문에서 누가 복을 받는가는 나와 있는데, 복 자체가 뭔가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수용자, 이스라엘 백성은 복의 수용자가 되지, 복 자체를 건드리거나 조종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복은 너희들이 모르고 있는데, 그 복을 감당할 수 있으면 너희들은 이스라엘로 생존할 것이고, 그 복을 감당 못 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복에 대해서 인간은 내가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복을 소유하게 되면 복된 사람이 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거는 복을 모르는 상태에서 복과 자기 자신을 그렇게 정립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고난이 복이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것도 소유하렵니까? 거지되는 것이 복이라면 그 거지됨을 아주 사모하실 작정이십니까? 아니죠. 복은, 그 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복 자체 내에서 생산해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복이 뭐냐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은, 복이 복을 감당할 사람과 이렇게 연결이 되도록, 복 자체가 감당할 것을 만들어내는 그 작업에 너희가 들어섰느니라. 그러면 주체가 뭐냐, 복 자체가 주체가 되고, 그들은 이제 복과 연관되어서 살아가면서 과연 내가 복에 의해서 합당한 사람인지,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 그거만 남아있어요. 

  

확인하는 일만 남아있는데, 나중에 그들이 멸망할 때 “아,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복을 감당 못할 저주받은 사람이이구나. 복을 감당 못하고 저주나 감당할 그런 대상일 수밖에 없구나.”라고, 그런 식으로 이게 정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말은 복을 받을 권리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없다면, 복이라는 말을 하나님이 하시고 있지 않느냐? 받을 사람도 없는데? 받을 만한 합당한 사람도 없는데 왜 거론하느냐? 라고 한다면,

이 복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복을 준 게 아니고, 복의 취지는 저주와 만남으로써 그 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반대쪽에 숨어있는 저주를 불러내는 요소로써 복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옥이 뭐냐, 지옥은 주님이 세우신 거예요. 왜 세우셨느냐, 복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지옥을 만드신 겁니다. 지옥이 없다면 복됨의 의미가 상실이 돼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저주받아야 되는데 너는 거기에 안 가는 거야.”라고 할 때 복의 의미가 있어요. “너는 지옥가도 마땅한데, 그런데 중간에 내가 개입해서 천국에서 빼돌렸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게 복을 감당할 수 있는 합당한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의 합당한 그릇을 다른 말로 이야기해야 돼요. 뭐로 해야 하느냐 하면 자비의 그릇, 은혜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 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되고, 긍휼의 그릇이에요. 긍휼의 그릇. 긍휼이라는 것은 불쌍히 여겨서 봐 준 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내가 어떠한 그릇이냐는 나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복이 와서 임의로 네가 긍휼의 그릇이면 긍휼의 그릇답게, 그리고 저주의 그릇이면 저주의 그릇답게, 그릇 만드시는 분은 따로 존재하죠. 

  

그럼 복을 그냥 주면 되지, 왜 저주를 언급해서 복이 와야 되는가, 그것은 이미 인간 세상이 저주아래 놓여있다는 그것을 감안해야 돼요. 전부 다 저주아래 놓여있습니다. 저주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복은 없어요. 그런데 저주아래 놓여있으면서도 복을 거론한다는 것은, 복을 바라고 기대하고 복 받기를 원한다는 그 자체가, 그게 저주받을 가장 궁극적인 이유가 되는 겁니다.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저주받은 그것은 모른척하면서 덮어버리고, 나 잘 되기를 바라는 그러한 욕심, 탐욕, 그 자체가 그야말로 저주의 정점을 찍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자칭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아니에요. 그것도 그냥 무신론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데 열심을 내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데 열심을 내는 자들이 저주의 정점을 찍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과 자기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바로 저주가 그런 형태로 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정말 어려워요. 뭐냐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할 때, 저주받을 자와 복 받을 자가 분류되어 있다면, 중간에 하나님의 어떤 작업도 필요가 없이 처음부터 최후심판을 내려서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라고 그렇게 하면 되는데, 율법은 왜 줬느냐 하는 겁니다. 율법은 왜 주셨는가 하는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옛날에 심방 받을 때 많이 했던 거예요. 신명기 28장 가지고 구역 다 돌 수 있습니다. 단 14절까지만. 왜? 15절부터는 무서워서 못해요. “네가 만일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오늘날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여” 이래 되어 있어요. 이 명령이 뭐냐 하면, 네가 이렇게 하면 복 받고 이렇게 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을 우리 인간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마귀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마귀는 이미 저주받기로 작정된 거예요. 저주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어떤 때 그게 가장 합당한 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만이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고난자라는 것이, 악마를 상대로 할 때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주받은 자가 “축복과 저주는 나 하기 나름입니다. 나한테 권리를 주세요.”라고 나올 게 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을 했을 때나 때려야지, 내가 잘못 안했는데 때리면 그거는 정의에 어긋납니다. 주님, 오늘도 저한테 시켜보고, 시켜보고 뭔가 잘못되었을 때, 그럴 때 나무라주세요.”라고 하는 그것이 악마가 이 세상을 다루는 원칙이 돼요. 이 땅을 중성으로 보는 거예요. 중성, 중립으로 보는 거예요. 이 땅이 처음부터 망가졌다고 보지 않고, 이 땅은 하기 나름이라는 식으로, 인간들 모두를 이데올로기로, 그런 정신으로 다 덮어씌운 거예요. 

  

그렇게 하다보면 누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뭘 하기도 전에,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라고 판단내리는 판단하는 자가 이상해져버려요. “주님 미쳤어요? 아니, 저주 짓을 해야 저주받지요? 저주 짓을 하기도 전에 저주받으라고, 이 땅에 에서로 태어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악마 쪽에서 반응을 하게 되면,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악마가 원래 그래. 악마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했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은 니가 태어난 니 운명을 추후에 니 행동으로 이걸 변화시키거나 조종할 수 있는 그런 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마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마는 좋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의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결정권이 이미 창세전부터 확정되었다는 그런 뜻이에요. 감히 하나님보고 콩 내놔라 팥 내놔라고 하지 말라는 말이죠. “내 인생 이렇게 고쳐주세요.”라고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만 이상해져버렸어요. 착해지려고 만반의 준비가 된 우리 인간만 이상한 존재가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중립을 좋아하고 중성을 좋아하잖아요. 

  

“자, 보자 좌로 갈지 우로 갈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한 번 판단해야지. 내가 선택을 해야 돼, 내가 선택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인간의 선택은 누가복음 10장에서 깨집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부터 보면 강도만난 사람이 나와요. 그 강도만난 사람 안에 놀라운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뭐냐 하면 주님은 강도를 탓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거예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사실은 곧 무엇으로 활용되느냐 하면, 누가 구원받을 자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최적화된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도만난 자의 그 피해 책임을 강도한테 넘겨야 되는데, 주님은 강도를 숨겨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 해코지 않은, 강도짓 하지 않은 지나가는 과객(지나가는 나그네)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강도만난 자의 책임을 물어버리는 겁니다. 강도짓 한 적 없는데, 나는 나쁜 짓 한 적이 없는데,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터무니없는 것, 이게 복음이에요. 뭘 잘못했어야 책임을 지고, 뭘 잘못했어야 지옥을 가죠.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앞서간 제사장과 레위인,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탈락되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율법에.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저주받은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를 중립지역에 놓는 거예요. “내가 지금 중성인데, 선도 악도 아닌데, 여기서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고, 율법을 못 지키면 악인이 될 때, 그때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신명기 28장전에 27장을 한 번 봅시다. 27장을 보면 분명히 여기에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산,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산이 있습니다. 문제는 언약궤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산은 두 개고 언약궤는 하나라면 그 하나를 어디에 놓겠습니까? 자, 우리 같으면 축복 산에 놓겠습니까? 저주 산에 놓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좋은 게 좋다고 축복 산에 놓을 거예요. 

  

저주 산, 에발산 밑에 언약궤를 놓으면서 그걸 센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축복을 외치는 자나 저주를 외치는 자나 전부 다 어느 한 곳에 집중을 해야 되는가? 바로 저주산 밑에 있는 언약궤와 접촉을 해야 돼요. 그럼 저주산은 저주를 선포하는 산이에요. 언약을 드러내는 데에는 저주보다 더 합당한 게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저주라는 배경을 깔고 율법이 전파될 때, 언약궤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속죄가 의미 있게 드러난다. 그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신명기 27장 15절을 한 번 봅시다. 지난 시간에는 랩도 아닌데 랩을 했는데, 오늘은 점잖게 하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6절에 보면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7절,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8절,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19절,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20절,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21절,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22절,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23절,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장모까지 왜 나와요? 24절,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암살 안중근이 큰일 났어요. 25절,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이렇게 했다고요. 

  

분명히 축복산 저주산이 있으면 우리는 뭘 기대를 하느냐 하면, 자, 저주를 이만큼 했으니까 저주만 아멘하지 말고, 이제는 축복도 아멘 할 만반의 준비를 딱 하고 있는데 끝. 저주로 끝나버려요. 저주밖에 없어요. 

  

자 여기서 또 중요한 게 있어요.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저주받는 것이 그렇게 싫고, 그렇게 나쁘다면 환경 자체를 저주를 안 받는 환경으로 바꾸어주면 될 텐데, 여기에 나오는 이런 경우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는 것을 보게 되면 이거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속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여기 21절에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라고 나온다고요. 끔찍한 일이죠. 야동에도 이런 것이 없겠다고 하는데, 만약에 무인도라고 칩시다. 짐승밖에 없다고 칩시다. 그런 온갖 상상을 할 수 있어요. 그런 상상을 주께서는 실제로 구성을 해버려요. “이래도 니가 저주받을 자가 아니야?”라고 구성을 해버려요. 

  

그리고 그것이 개개인의 관한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아멘”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율법은 개인에게 주신 법이 아닙니다. 집단에게 주신 거예요. 집단. 그 집단은 바로 기존의 인간들이 사는 세계와 절연, 단절된, 완전히 연결이 절단된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절단된 관계가 뭐냐, 이스라엘은 출애굽 할 때, 그때가 밤이었습니다. 시간의 절연이에요. 시간의 단절이었습니다. 

  

인간은 낮만 기억하는 낮의 존재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낮에 있었던 일을 연속해서 이어지게 하면서, 그것으로 자기를 둘둘 감는 자기의 역사요, 하나같이 흐르고 있는 자기만의 선과 악이 누적된 일기장으로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가위를 들고 와서 그걸 타박타박 끊어버려요. 

  

밤에 끊어버립니다. 인간은 지나간 내 인생 가운데서 악한일도 했지만 착한일도 했으니까, 악함과 착함의 양을 견주어서, 어느 양이 많은가를 우열(나음과 못함)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현재에 있는 동질성의 가치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가위로 끊어버리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가 기대한 삶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처넣은 상황, 시추에이션situation이 돼버려요. 

  

그 상황이, 율법을 통해서 니가 얼마나 저주스러운 존재냐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운 하나의 상황이 바로 율법과 더불어 동행해야 될 운명입니다. 그게. “이래도 니가 복을 감당한다고 생각 하냐? 니는 애초에 복을 감당할 입장이 못돼. 왜? 바로 너는 내가 전한 이 율법의 저주에 어긋난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많은 정도가 아니고 하나만 어겨도 모든 것을 다 어겼다는 말은 니가 거기에 대해서 저지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남이 저지른, 같은 동료가 저지른 그 처벌에 대해서, 니가 본의 아니게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되는 겁니다. 개인으로 아무리 착해도 소용이 없어요. 율법은 국가 단위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뭔가 대처를 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대처하는 것을 주님께서 그렇게 기대했던 바에요. 욥처럼. 뭔가 이렇게 대처를 하는 거예요. “내가 뭐가 잘못됐어? 내가 뭐가?”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율법을 가지고 변호하는 방식을 내놓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욕망을 규제하면서, 규제에 대한 욕망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욕망을 규제하면서, 그 규제에 대해서 욕망을 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나는 반드시 이런 짓은 안 해야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차 몰면서 과속하지 않는다. 내가 그 정도로 착해.”라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뭐만 기다리느냐 하면 ‘나 오늘 과속했을까? 안 했을까?’ 과속여부가 자기 자신의 새로운 자아상으로 내용을 담게 되는 거예요. 

  

욕망을 규제하는 그 규제를 욕망하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자기가 훌륭한지, 나는 이 정도로 지켰다는 것. 나는 이 정도로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 술 담배 하지 않았고, 원래 주량이 5병인데 2병 줄었다고 하는 이런 것. 그 자체를 욕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그걸로 끝나지 않아요. 그래놓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에 나서죠. 

  

그 점검이 뭐냐 하면 “나의 이런 삶이 행복할까? 즐거울까? 기쁠까?”라고 점검에 나섭니다. 우리 정석훈 목사님을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목사님, 복음은 아는데요. 즐겁지 않네요.”라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즐거움을 하나의 의무로 새롭게 자기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즐거워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법을 만들었어요.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벌 받고 있는데. 내가 손들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내 팔이 찌릿찌릿 아프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벌 잘 받는 의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군함도 이야기를 오전에 했습니다마는, 대한민국 백성들이 다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관료들이 나쁘죠. 근데 고생은 누가 하느냐, 백성들이 고생한다고요. 백성들이 다 착해요. 착한데, 관료들이 나빠서 일제한테 나라 팔아먹어서 고생한다는 겁니다. 근데 과연 백성들이 착할까요? 탄광에 들어가니까 전혀 착하지를 않아요.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에요. 

  

놀라운 사실은 600만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그 내부에서 독일을 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 독일 군에 포로 잡혀 가스실에 가면서도 독일을 원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누구를 원망하느냐, 같은 동료를 원망해요. “니는 왜 줄을 안 서고 물을 먼저 먹었어? 내가 배급받아야 되는데 니가 배급을 왜 받는데?”라고 동료를 원망하지, 절대 윗대가리 욕을 안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신체의 향락, 즐거움, 이것을 그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것이라도 하나 건지기 위해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나를 불편케 하고 나를 슬프게 한다면, 그거는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점점 더 하나가 되면 될수록 악마의 얼굴에 가깝다는 것. 악마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힘을 합해서 뭐 좋은 일을 해보자고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적이 있을 때나 힘을 합치죠. 그 적이 내부에,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는 나 빼놓고 다 적이 되는 겁니다. 부부싸움 하는데 누가 말리게 되면, 싸우던 둘이 한편이 되어 경찰한테 공격을 퍼붓습니다. 일단 경찰이 가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또 싸워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처음부터 어떤 인간도 본인이 즐거워야 하는 것과 자기의 행동하는 것과 이게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몰라요. 

  

그래서 ‘보자~’ ‘보자’를 오늘 너무 많이 하는데, “보자~ 복이 있는가 보자~ 오늘 말씀을 지키면 나한테 행복이 오겠지.”라고 이런 식으로 측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거는 이 본문을 가지고 목사들이 심방을 갈 때 이렇게 속이는 거고요. 그러면 뭐냐, 그거는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짊어지셨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나의 죄로 얼마나 기뻐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 지었을 때, 우리는 벌벌 떨어요. 왜? 내가 죄지었기 때문에 벌 받을 생각하니까, 그 미래가 얼마나 참혹합니까? 그런데 나로 하여금 죄 짓게 하신 그 분의 기쁜 마음이, 내가 지금 죄 짓는 현상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같이 경유해서 감사하고 기뻐해야 돼요. “나로 하여금 들통 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진작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이런 것. 

  

나는 얼추 이 정도 수준이 되면 유지할 줄 알았는데, 새로운 상황에 집어넣으니까, 그동안 20년 30년을 고이 간직했던 나의 근사함이 한 순간에 와장창 다 무너져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가? 주여, 제가 이것밖에 안 됩니까?” 주님은 “니가 그걸로 실망스럽냐? 아직도 멀었어. 나중에 죽을 때 보자. 얼마나 실망을 하는지.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어. 지금 내가 너한테 할 숙제가 얼마나 많은데, 니가 그것가지고 인생 끝내고 자살하려고 하지 마. 아직 멀었어. 니가 피운 번개탄도 꺼버리고 차 문 열어놓고, 목 맨 넥타이도 풀어버릴 거야.” 

  

우리가 쳐다봐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를 대신한다는 분이 나를 대신한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말 같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여튼 맞는 말이에요. 우리는 그 분을 위한 임시 아바타인데, 왜 그 아바타에다가 목숨을 겁니까? 이스라엘의 개인은 주님밖에 없고, 몽땅 그 나머지기는 주님에게 예속된 밤의 백성들이에요. 따박따박 매일같이 끊어져야 돼요. 

  

내일 살려주면 내일 사니까, 오늘 염려는 오늘만 하기로 합시다. 수련회? 오늘 밤에 우에 될지 몰라요. 사이트 다 끊어질지 모르고. 수련회 동영상 보겠다고 하는데 사이트 회사에서 고장이 나버리면 오늘 나처럼 방송도 안 되잖아요. 못 올립니다. 그렇더라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요. 

  

그런 주님의 처음부터 완벽하고 완전하신, 그 완전하심 그것에 동참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싱긋이 주님과 같이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욕심을 규제하려고 하다 보니 이제는 규제하는 방법에 탐을 내는,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미 책임 다 졌는데, 우리가 무슨 염려할 게 남아있겠습니까? 오늘 하루는 오늘 일로 끝내고, 늘 주님 앞에 맡기는 심정으로 내일의 끊어진 날을 건너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