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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체험 1707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16. 08:07
홍민희 (IP:210.♡.246.108)17-07-06 16:11 
가락-요한복음14장20절(체험)170705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그 20절 전에 19절을 보게되면 '조금있으면 세상이 나를 다시 보지 못할 터이요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요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구획이란 말이 있습니다. 영역을 둘로나눈 것을 구획이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되고, 예수님을 함께 있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 동시에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의 개념이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는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따로 세상을 떠남으로 떠남으로서 비로소 그것이 확인되겠지요. 같이 있을때는 둘다 살아있는걸로 보인다. 같이 있을때는 둘다 살아있잖아요. 살아있으면서 '내가 보이나? 안보이나?' ' 안보입니다.' '그럼 죽었다.' 그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같이 있을때는 같이 있으니까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 같은 인간인데 주님이 떠나면서 나는 떠난다고 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떠나는 동시에 살 사람은 나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살 사람이 된다는 말은 이쪽 영역에서는 전부다 살지 못하는 사람, 죽은 사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죽다 살았다 하는 그 토대가 무엇으로 정해지냐 하면은 이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흔히 이것을 영생이라 하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이것은 사나 죽으나 영생 얻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갔데 갔어 이제는 안보인데 예수님은 안보여 이제 갔어 한때 살았는데 갔어.' 이렇게 되버리면 그 사람이 어떤 아무리 숨을 쉬어도 죽은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갔어. 가버렸어. 안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입장이 그렇게되면 예수님이 가버린것이 뭐가 되었냐하면 이게 고아가 되거든요. 


집사님이 아까 질문했기때문에 할수 없이 어렵게 할수 밖에 없는데 '옛날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이 로마 유대인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십자가 지고 이제는 갔데. 제자들도 고기잡으러 가고 다 흩어졌데.' '그랬어?' 그럼 이것은 뭐가 되요? 이것은 과거가 되요. 과거 
그들은 어디에 살고? 현재에 살고 있고 현재가 되는 동시에 과거는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 옛날에 그런 분이 사람이 있었지. 한때 시끄러웠는데 이제 조용해.' 과거가 되잖아요. 


이 과거를 순수과거로 만들어 버리면 순수과거란 현재에 포함되지 않는것, 이것이 순수과거입니다. 영원히 과거로 남는거예요. 영원히. 보통 과거가 현재 되어버리면 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현재가 현재되기 위해서 밑에 층층이 과거가 누적이 되고 쌓이게 되어있어요. 그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올라올수 없잖아요. 그런데

현재로 전환되지 않는 현재로 나타나지 않는 그러한 과거가 있다면
이것은 현재에 의해서 현재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과거와는 다른 영역에 속해버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순수과거인데 순수과거는 어떤 뜻을 갖고 있냐하면은
이미 다 이미 과거에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미 그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할지라도
이미 의미와 핵심과 중심은 순수과거 그 사건이 이미 핵심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중심이 되어버려요. 


지금은 젊은 분들이나 현대인의 문제점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중심이 없습니다. 그냥 휩쓸려져 갑니다. 휩쓸려져 가고요. 제 4차 산업 이건 미래잖아요. 그럼 제 4차산업을 기대한다는 것은 현재도 후딱 날라가 버릴수 밖에 없는 현재입니다. 과거에 살았지만 과거도 날라갔어요. 지금은 현재가 있습니다만은 내일되면 오늘도 날라가 버려요. 그럼 그런사람이 묻는겁니다.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를 향하여 가죠?' '어휴 뭐 살만큼 살지 뭐, 갈때가지 가보지.' 이거거든요. 갈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그 말은 다른말로 하면 중심이 없어요. 중심이. 아무 중심이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마지막에 보면 모래위에 지은 집이란 말이있죠. 모래위에 지은 집이라는 예수님께서 그 말 한 이유가 마지막때의 기준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마지막때의 기준, 종말때의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열심히 산들 그것은 다 무너질 삶이 되는 거예요. 무너진.. 
그래서 중요한건 무엇이냐면 마지막때의 기준이 무었이냐 하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그건 마지막때 가 봐야 알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때 가보는것이 아니고, 이걸 이미 과거에 이미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뭐라고 한다고요? 저는 이것을 '순수과거'라 하는 겁니다. 


왜 과거인데 순수과거냐. 순수란 말을 왜 붙였느냐. 현재에 현재가 오게되면 취소가 되는 그런 과거가 아니고, 현재가 되든 앞으로 이천년이 되든간에 여전히 계속해서 손댈 수 없는 계속 그대로 남아있는 그 과거. 다 이루었다는 그 과거. 과거완료. 그것이 중심이 되는거예요. 그것이 중심이 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말고 그냥 예수믿으라 하면 되는 걸 왜 저렇거 복잡하게 하느냐 이렇게 저한테 반문하신다면,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중심이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놀랍게도 인간중심이예요. 사람중심이예요. 사람이 달라서 문제지만...어쨋든 사람중심이예요. 하늘에 있는 추상적인 신을 믿으라고 한적이 없어요.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완성이잖아요. 그럼 구약예언되고 완성되는 그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이미 하나님이 육신이 된거예요. 그 육신이란 말은 뭐냐하면 사람이 된거잖아요. 그걸 앞뒤줄여서 다 줄여서 딱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무슨 중심으로 일한다? 사람중심으로 일한다. 사람중심.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냐 그것을 기대하고 쳐다보는 중심이 아니고, 사람중심이예요. 사람중심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중심으로 신학을 펼친사람이 있어요. 오트란 사람이 있는데요. 신학자들한텐 유명한 사람인데 그게 뭐냐하면 '거룩이란 무엇인가' 책을 지은 사람있어요. 그 사람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세요. 주장은 이래요. 종교라는 것은 또 신앙이라는 것은 이 허하고 폐허히고 이 세상이 폐허, 폐허적이고 암울하고 허무하고, 이러한 지저분한 이 세상을 쳐다보는것이 신앙이 아니고 이 세상과 너무나 대비가 되는 이쪽 세상을 이야기 해요. 


그게 뭐냐면 거룩하고 찬란한것. 이것을 쳐다보는 것이 그게 바로 종교요, 종교의 본질이요, 신앙이요, 거룩이고 의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기독교계통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많은 신학자들이 아주 동의를 했습니다. 결국 신앙이라 하는 것은 이 죄많은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그리던 이게 중요해요 우리가 그리던 우리가 너무나 혹독하게 고생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뭐가 생기겠어요. 제발 이런 세상말고 더 좋은 세상을 자꾸 상상하게 되겠죠. 힘들면 힘들수록 그 쪽 세계를 지향하고 그 쪽 세계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의 모든 역경과 고생과 힘든것을 견뎌내는 것. 그걸 신앙생활로 본거예요. 참아야 하느니라 이런 것. 고난받아도 이게 순교냐 이렇게 생각하고 견디고, 어려워도 그 나라가 있기때문에 내가 이를 깨물고 믿음 생활 해야지 라고 하는 것이 이게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개혁주의에 개혁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 또 개혁주의 신앙을 하는 사람한테는 아주 원한것을 얻은거죠. C.S. 루이스 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들어본적 있어요? C.S. 루이스? 유식한 기독교인. 예 아주 지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상처럼 되어있어요. 지적인 그리스도인. 예수도 믿고 똑똑하기까지 하고 그것을 뇌섹남이라고 합니다. 뇌가 섹시한 남자라지요. 그렇게 똑똑한 C.S. 루이스 책들이 굉장히 많이 팔렸어요. 무조건 기도만 하라고 하니까 짜증나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뭔가 유식한 많이 들은게 있는 가운데 신앙생활 하게되면 더욱더 품격있는 신앙인이 되지 않을까에 대한 모델이 바로 C.S. 루이스인데 그 사람의 사상도 아까 이야기한 오토사상과 거의 흡사하다 보면되요. 


개혁주의 신앙에서 아주 그 사람들 심지어 그 사람에 대한 심포지움까지 열어요. 그 사람을 볻받자고.. 이렇게 하는데, 그것 기독교 아닙니다. 하나님 대단하시고 거룩하다 그게 기독교 아니예요. 성경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중심이예요 사람중심.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다. 너희들 아시다시피 그런데 내가 일방적으로, 하나인데 일방적으로 이렇게 세상과 두 토막을 내버리면 그때부터 나 있는 쪽과, 나 없는 쪽으로 나뉜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보다도 CF용어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로나민골드를 드신날과 드시지 않은 날이 확연히 차이나죠. 확연히 차이나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있는 쪽과 있지 않은 쪽이 확연히 차이 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냐 하면은 그런데 그때는 너희가 알리라 내가 하는 말을 알리라. 이 말을 다른말로 하면 지금은 너희가 아무리 이말 들어도 무슨 말인줄을 모를 것이다 이말입니다.지금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도 왜 지금은 모르냐? 오늘 강의의 핵심이예요. 예수님 말씀하시면 딱딱 알아들어야 하잖아요. 도대체 우리한테 뭐가 문제가 되어가지고, 무슨 요소가 주님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될까? 어떤 요소가 차이가 날까? 그걸 알아야해요. 너희는 알리라. 지금 제가 하는것이 요한복음 14장 20절 끝에 나옵니다. 너희는 알리라. 이말은 뭐냐하면 지금은 지금은 모른다는거예요. 


앞에 뭐가 붙냐하면 ‘그날에’ 그날에 너희는 알리라 되어있거든요. 그날에 너희는 알리라. 그러니까 지금은 모른다. 그러면 이 말을 누가 하냐면 예수님이 이야기 해요.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까? 떨어져 있습니까? 함께있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을때는 영생이고 예수님이 떨어져 있으면 예수님이 안보이는 곳에 있으면 그것은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이런취지로 이야기하는 그 취지 자체가 왜 자기한테 이런이야기 하는지를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걸..지금 함께 있잖아요. 함께 있는데 갑자기 지금은 아니고 그날에는 알리라. 그럼 지금은 왜 모르고 지금은 뭐 때문에 우리가 왜 모르게 되느냐예요. 지금은 그들이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제자들에게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되어있기때문에 제자들에게는 뭐가 없다? 그날이 없어요. 그날이 없습니다. 지금 자기 시간 이것이 인간은 자기 시간에서 못 벗어납니다. 자기 시간이 전부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왜 인간은 시간에서 못 벗어나냐하면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내가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같은 것을 뭐라하냐면 이것을 동질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동질성. 


그렇다면 제자들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동일하다면 그와같은 시간의식가지고 누굴 쳐다보고 있냐면 바로 예수님을 쳐다본단말이죠. 예수님은 지금의 예수나 과거의 예수나 얼마전의 예수나 지금의 예수나 미래의 예수나 동일한 예수일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본인이 동질성이 있기때문에 예수도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근데 이걸, 구획을 주님께서는 구획을 정해버려요. 구획을 정해버리면 예수님이 떠나버리면 예수님이 있던 자리에 뭐가 남아있느냐 하면 제자들이 상상했던 헛된 예수의 인식을 우리가 가졌다는 그 자리가 여기 여백으로 남게 됩니다. 


막상 그 사람이 가고 난 뒤에는 내가 생각하지 않은 예수님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그 분이였고, 막상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예수는 이게 존재하지 않는 예수였던 겁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예수를 함께 있다고 착각들을 한겁니다. 왜 그런 착각을 했는가 하면은 예수님 중심이여야 되는데 내 중심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중심있는 내가 저 예수가 예수인줄 나는 안다라고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한겁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예수님을 떠날때는 지금 문제가 뭐냐하면 그들과 함께있어서 구원하면 되는데 주님은 자꾸 거리를 유지할려 하고 떠날려고 하는 거예요. 


제자들 입장에서는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 잘지냈잖아요. 떠날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은 떠나야 오신다는 거예요. 떠나야.. 안떠나면 너희들의 착각하는 그 예수가 나인줄 계속 착각이 계속 되는 거예요. 그 착각하는 이유가 뭐냐하면은 과거현재미래 시간을 하고 있기때문에 어제의 예수나 오늘의 예수나 미래의 예수나 그렇게 될꺼라 생각하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각을 하는겁니다. 


순수과거란 말 했지요. 아무리 앞으로 시간이 역사가 오래된다 할지라도 그런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 한순간에 모든 것이 구분이 완료가되는 결정적 거기 그 시간으로 너희들이 시간자체가 바뀌어져야되요. 이게 바뀌어져야 내일죽으나 오늘죽으나 오늘 심장이 멈추거나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무 의미가..이게 왜냐면 이미 중심이 내가 원하는 내 시간적 중심이 아니고, 내가 안만든 중심, 주님이 만들어서 그 중심에 우리를 집어넣은 중심이 수입된다면 1년 더 사나 2년 더 사나 이미 구원받기는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그럴러면 정을 뗀다 하죠. 너희들이 나를 생각했던 그 정 있잖아요 정, 초코파이 정 이런거 이걸 떼야됩니다. 정이라는 것은 내 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굴 만나는 것은 그 사람속에 내가 진정 사랑하고 싶은 것이 나한테 발견될때까지만 사귀고 내가 아무리 상대방을 훑어 봐도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없을때는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이야기 해요. '우리 헤어져' 이렇게 '그럴러면 헤어져!'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안나오는 거거든. 이것은 결혼 10년 2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20년 살다가도 행여나 내년되면 나올까 싶어서 또 살아도 안나올때는 '우리 헤어져 성격안맞아' 헤어져야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결혼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이거예요. 결혼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특히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 죽기위해서 만나는 겁니다. 순수과거로 볼때에 동반자살이라 하죠.동반자살. 혼자 죽으니까 심심해서 같이 껴안고 죽겠다는 거예요. 어차피 인간은 죽어요. 죽을때 혼자 죽는것보다 같이 죽게되면 뭐가 나오냐 하면 자식이 나옵니다. 자식이 나와요. 자식이 생명이예요. 둘이 죽어야 자식 나오는 겁니다. 


동침이라는 것은 한몸되어서 같이 죽는 연습하고 있는거예요.
죽는 연습이예요.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연습이예요.
안죽고 살라면 사창가 가면 되요. 돈내고 하면 되요.
그러나 부모가 같이 한침대 눕고 같이 한방에 잔다고 하는 것은
우리둘이 죽고, 죽는 사이에서 새생명 남기고 우리는 장렬하게 그만 사라지자 이 애기예요.
그런 뜻이라니까요. 왜? 어차피 세상은 죽을려고 태어난거 거든요.
내가 너무 바르게 이야기 해서 문제입니까?
자식 낳았으면 우리는 은퇴해야되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은퇴해도 괜찮아요.
이게 자식이라는 생명,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식을 준다
태의 열매라 하나님의 복은 태의 열매라 되어있잖아요.
시편에 보면 나오잖아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식을 낳는 창세기 5장에도 나오고 아담이 몇살때 애 놓고 죽었다 하죠.
자식 놓는 이유는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안나온다는 그러한 은유를 이 땅에 완전히 깔아놓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 중심이 되셔서 하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떤일을 하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그런 모습으로 형상을 입은 우리 인간들이 그 일을 하게 된겁니다. 오늘 너무 욕심은 내지 않겠습니다. 오늘 강의 무지무지 어려운데요. 그래도 성급하게 하지않고 논리를 전개해 차분히 가겠습니다. 제가 아까 인간중심이라 했잖아요. 인간중심. 이거 중요한겁니다. 사람중심. 하나님은 저 높은곳데서 일하는게 아니고, 이땅에서 사람속에서 일을해요. 사람속에서 일을 해야 사람들은 자기가 은유인줄 모르고 하나의 비유거든요. 


보이지 않는, 하니의 상징. 뭔가 감추어져 있는 그 관계를 나타는 현상으로서 살아가는걸 모르고 자기가 자기 사는게 이게 전부인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전부인줄.. 그러면 주님께서 이땅에사람중심, 인간중심이기때문에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뛰어들었거든요. 합세가 된거예요. 합세가 되면서 하나님이 뭘 보여준게 있어요?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들 사는 그 모습과 같은 인간인데도 불과하고 예수님 사는 모습과 확연하게 차이 나겠어요? 안나겠어요? 예, 차이가 나죠. 그 차이나는 것을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이나는 것을.. 


그 차이가 어떤식으로 나느냐 하면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여기서 질문드리겠어요. 질문 3개 던져보겠습니다. 1. 선을 아는 나와 악을 아는 내가 같은가? 이 질문 무슨 뜻이냐하면 내가 선을 알때 악을 아는 나는 잠시 휴식중이냐? 이말입니다. 내가 선을 행할때 잠시 악을 행하는 나는 보류하다가 선이 딱 끝나는 그 순간에 이제는 내 차례야 하고 악을 저지르는 그렇게 순번제로 되어있느냐 하는 문제예요. 이런 질문들 안해보셨어요? 두 번째는, 지금 선과를 따먹은게 아니고 악과를 따먹은게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구요. 


제가 지금 질문드리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인간속에 선악과요소가 원칙이 들어왔을거냐? 들어왔을때 선과 악은 어떤관계로 이렇게 흩어지고 모이고 어떻게 활동하느냐 그걸 제가 질문던지는 겁니다. 선을 행할때 악은 stop하다가 선 끝나고 악을 행하는지, 악을 행할때는 선은 잠시 보류하다가 악이 끝나고 선을 행하는지 이런 식으로 지금 끊어져서 가는지?두번째 질문은 뭐냐하면은 선과 악이 어떻게 어떤식으로 통합되느냐? 하는 겁니다. 


선과를 따먹은게 아니고 악과를 따먹은게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선과악은 서로 대치관계예요. 대립이라구요. 선이 악에 포함되고 악이 선에 포함되게 되면 이건 하나로 모여질수 있는게아니라는 말이죠.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내몸은 몇개입니까? 내몸은 하나의 몸. 내몸이 하나인데 어떻게 선악이 이 안에서 서로 대치되는 두개의 성질이 하나로 같이 들어설수 있느냐 이겁니다. 


세번째가 뭐냐하면 선과 악 자체가 이 저주의 근거가 되었죠.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저주 받았잖아요. 죽었잖아요. 죽음이란 저주입니다. 죽음이라는 저주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느냐? 작은 제목: 선과악을 모른다. 나는 모른다해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선과악을 다 이루어서 벗어나느냐? 둘중에 하나입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난 그런거 몰라요. 몰라요 해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선과 악의 취지를 다 이루었다해서 벗어나느냐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 질문을 이 질문에 답변을 할려면 선악과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러면 선악적인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이 선악과를 만드신 분안에 이 해답이 이미 들어있다고 봐야되요. 그러면 하나님에게 이미 하나님에게 뭐가 있다? 선악과 요소가 있는겁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우리가 함께 했다 해서 선악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창세기 3장에 알고 있단 이말입니다. 그럼 방금 한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한 내용이 우리는 이렇게 이게 분열되고 갈등 일으키고 이렇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늘나라는 그렇게 갈등되고 분열일으키지 않고 분명 통일되어 있을거란 이말이죠. 통일되어 있을때 어떤 식으로 통일되어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이 그대로 육신으로 오신분이 누구다?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요소가 예수님으로 드러났다면 그러면 하나님 안에 뭐가 있다? 선악적인 요소가 있다 하니까 이걸 다르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 안에 뭐가 있다? 악이 있다는 뜻이예요. 하나님 안에 악이 있다. 악한 하나님? 생전 처음 들어봤죠? 시편이나 구약에 보세요.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다? 선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예요. 그리고 악은 우리한테 누굴 집어넣느냐하면 악마에게 해당되지, 하나님 앞에선 악이 해당되지 않죠. 


그런데 이 문제가 이천년동안 신학자들를 골치아프게 했어요. 악마는 악하죠. 근데 악마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잘만드는데 원래 천사를 잘 만드는데, 하나님이 한눈판 사이에 악마가 악을 저질러서 그렇게 악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어떤 책임이 있느냐면 왜 한눈 왜 파느냐 말이죠. 늘 감시를 잘하고 있지. 악마가 예수님을 대들기 위해서 갑자기 천사가 악한 천사가 되었다면 왜 그것을 주님께서는 그걸 왜 사전에 조치를 못하고 방비를 못해가지고 악이 유발되도록 그렇게 허용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건 너무 목사님이 현실성이 없고, 그저 상상하거나 그냥 논리만 따지게 되면 취미로 논리따질때 그런식으로 따진게 아닙니까?' 이렇게 하지만 선악과 따먹은 당사자 누구입니까? 우리문제예요. 이게 우리 문제라구요. 만약 이 문제가 해결 안되게 되면 우리는 뭐를 우리 안에서 자꾸 균열이 일어나요. 


예수 믿는것이 선한 일입니까? 예수믿는 일이 선한일이 되버리면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은 내 중심에서 내가 선한것중에 보니까 예수믿으라 하는 것이 있어가지고 그것을 발휘해버리니까 구태여 성령이 안와도 내 안에 있는 선을 내가 선하게 맘을 선하게 먹으니까 내가 구원받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자력구원이 되어버립니다. 자력구원이 되요. 그러면 그것은 여러분 아니라고 보죠. 아니라고 보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분이 어떤 선과악중에서 어떤 마음이 동원되어서 예수믿게 되었습니까? 둘다 아니예요? 그럼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호소합니까? 찾아왔어요? 안 찾아 왔어요? 분명히 찾아오지요. 찾아와가지고 그 다음에 뭐하십니까? 선악을 무시하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어떻게 이미 선악을 따먹단 말이죠. 이미 선악이 있단 말이죠. 선악적인 의식이 있단 말이죠. 질문한 내가 나쁘죠? 해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선악이라는 것을 만들때 하나님부터 출발하면 안되요. 항상 모든 출발은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부터..지금 자꾸 인간이 상상해가지고 예수님은 아들이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아들로 가게 되면 아들도 이해될것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 예수님 이야기부터 해야되요. 예수님 이야기를 뭐라하냐면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1장에서 내가 복음을 알았다 할 때 그 복음은 뭐냐하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거예요. 그 어떤 인간에게 배운게 아니예요. 


그렇다면 그 말은 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이 지상의 일이 아무리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도 지상에서 해석해야할 예수님의 일은 계속 줄곧 공생애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진행이 되는 겁니다. 그걸 제가 대구 강의에서 로봇팔이라고, 로봇팔로 되있어요. 로봇팔이라 했지요. 이걸 로봇팔이라고 너무 유치하게 했는데 그럼 고상하게 이야기 할께요. '성령의 방사' 성령의 방사가 뭐예요? 스파이더맨 할때 거미중 확~사방으로 퍼트리는 거죠. 성령께서 퍼트리는 위에서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방사해버리는것 방사. 방사라는 것은 불교에서 물고기 이렇게 방유하듯이. 성령을 확~그러니까 이 방사보다 차라리 로봇팔이 낫다니까요. 


로봇팔로 해가지고 전부다 이렇게 한꺼번에 다 장악해버리면 이 세상이 뭐가 되냐면 이 세상은 하나도의 공백이라는 누수없이 모두가 누구 세상이냐면 예수님 세상이 되고 그 중심은 뭐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곧 세상의 중심이고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니까 그걸 가지고 에베소서 1장끝에 보면 만물에 충만중에 충만이라. 예수그리스도가 아니계신곳이 없는거예요. 모든것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쳐다보고 알아낸게 아니고, 이 지상에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일, 그 제자들끼리 일어나는 모든 일 뿐만 아니고 오늘날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일 심지어 불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일도 그게 어디에 속하느냐? 이것이 주님의 일, 유일한 주님의 일. 정말 상상해서 생각한일 말고 이땅에서 일어난 주님의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길을 걷는다든지, 산을 올라가든지, 식사를 한다든지, 빨래를 한다든지, 이 모든 것은 무슨일이되요? ‘주의 일’이 됩니다. 주의 일이. 주의 일을 할때에 선악을 아는 사람은 뭐냐하면 이게 착한일일까? 나쁜일일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게 착한일이냐? 나쁜일이냐?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이게 주의 일로 보면 되요.

착한일이냐 나쁜일이냐는 따지는 것이고,
이 설겆이 하고 빨래하는것이 주의 일이 되버리면 이것은 믿음에 관한 일이예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요. 믿음이 없이는. 


그말은 뭐냐하면 막살아라는 말이되요. 절대로 이세상에는 막 사는 일이 있다? 없다? 막 사는 일이 있을수가 없어요. 전부다 주의 일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안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주께서 허락하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왜 지옥가느냐? 그날에 너희가 알리라에 해당되지 않고 너희가 끝까지 그들은 모르다가 지옥가서 아는 거예요. 내가 평소에 당구 300치는데 당구400치는게 주의 일인것을 몰랐고, 볼링치면서 스트라이크 한것도 주의 일인것을 몰랐던거예요. 모든 일이 주의 일인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것을 아까 방사라고 했죠. 


이것을 말로 옮기겠습니다. 팽창입니다. 팽창. 하나님께서 자신을 팽창할때는 뭘로 팽창하냐면 말로 팽창합니다. 언어로 팽창했습니다. 그 대표적인것이 무엇이냐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건 누구보고 이야기 했어요? 코끼리 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뱀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해바라기 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누구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바로 어덴동산에서 누구보고 이야기 했죠? 인간보고 했죠. 그래서 인간중심이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보고 이야기 했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무엇으로 되어있다? 말, 언어로, 말로 되어있어요. 그 말씀이 뭐가 되요? 육신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팽창한겁니다. 하나님이 알고 있는 그 내용이 팽창하면서 어디까지 팽창하느냐면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 하심 거기까지 팽창이 되면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십자가에서 뭐라했어요? 다 이룬거예요.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제자들은 제자들이 성령밖에는 모를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개체가 달라요. 


자기 키 얼마 몸무게 얼마 개체 있잖아요. 예수님도 저 개체가 따로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는 이만큼 거리가 띄어져 있습니다. 같이 손잡고 있는거 아니잖아요. 띄어져 있어요. 떨어져 있다면 예수님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고 그것을 합한 것을 사람들은 뭐라하냐면, 그 합한것을 세상이라 이야기 하고 그 이세상을 만들것은 누가했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이 오해인거예요. 이게 오해인거예요. 이게. 사람들은 아버지를 몰라요.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떻게? 포괄적으로, 절대적으로, 모든것의 모든 것. 이정도 알았으면 이정도 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설때 그래도 틀렸단 소리를 안들을거라고 지레짐작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 틀린겁니다. 그것 틀린거예요. 


예수님이 다시 이야기 하겠어요. 예수님이 하나의 몸으로 오셨잖아요. 그럼 거기에 뭐가 되어있어요? 그것이 전부다 하나님 뜻이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팽창 된거예요. 예수님은 중심이 되고, 그리고 예수와 관련된 제자들은 하나님의 팽창된겁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풀이 잡초가 피어있다. 그 잡초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하고 제자들하고 2m 떨어져 있는데 2m 사이에 잡초가 피어있습니다. 잔디가 있습니다. 그 잔디 누가 만든거예요? 하나님이 만든것이죠. 하나님이 왜 만들었습니까? 바로 말씀으로 만드신 거예요. 말씀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 저기 있고 나 여기있고 잔디있고 잔디 누가 만들었나 하나님, 나 있고 그걸 동그라미 치는 겁니다. 그 밥상 해놓고 그 파리들어오지말라고 덮는거 있잖아요. 요새 사람들 알아요? 파리가 있을때 밥상에 덮는 모기장 밥상 덮는것, 이렇게 덮어씌우면, 그 위에 덮어씌우면 그 위에 누가 계시다?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제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잘못이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그 예수님과 연관지어서 자기들이 있는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밥상보가 예수님이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면 제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아이고 우리놔두고 가시면 안되잖아요. 우리 놔두고 가시면 안되잖아요 했죠. 사도행전에 나오잖아요. 주님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기도했잖아요. 우리 놔두고 가시면 안됩니다 했을때에 주님께서 뭐라했습니까? 40일지나면 너희에게 뭐가 온다?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오게되면, 천사가 하는말이 왜 쳐다보느냐? 주께서 다시 오신다. 내가 너희와 세상끝날때까지 함께 있을것이라 마태복음 28장에 그러고 난뒤에 오순절날 뭘 보냈습니까? 성령을 보냈잖아요. 누가 보냈습니까? 예수님이 보내셨잖아요. 


그렇다면 그런일을 그런일이 있기전에 앞당겨서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을 봤을때 제자들이 지금 무슨 오해하고있다는것을 아시겠습니까? 아직도 이 제자들의 오해를 모르겠습니까? 제자들의 오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문제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사실은 하나님은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를 누가 아느냐. 예수님만 알아요. 예수님만 안다구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만 알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뜻은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다 예수님께 맡겼어요. 그 예수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다 팽창된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로서 뭐하냐 하면 수축시켜버렸어요. 수축시켜버리면 모든 하나님의 뜻은 이 안에 응축되있다. 응축이 되잖아요. 그리고 동시에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선악이라할때 악은 뭐냐하면은 예수님을 안믿는게 악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안 믿는게..예수님을 안믿는게 악이 되기 때문에 현재 제자들이 선악을 알고 있잖아요. 그럼 선악알때 이 선악 자체가 뭐가 된다? 이게 뭐냐? 악이되어버려요. 왜냐면 모르기 때문에. 뭘몰라?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 말고 하나님 따로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되는 것 같은데, 지금 제자들은 뭐냐하면 예수님이 아들인건 알아요. 아들이지만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따로 있다 이 말이죠. 저도 참 이것 설명할때 제일 어려워요.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 여기 있다면 내가 여기있고 2m앞에 아들있잖아요. 그럼 아버지는 어디있어요? 아버지는 이 전체를 포괄하는것을 아버지라 보잖아요. 이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있으면 합쳐서 아버지가 있다하면 이 자체가 틀리고, 지금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너희는 아버지를 몰라 아버지는 예수님만 알아요.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내가 여기있고가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데, 떨어져있으니까 나는 여기 있고 예수님은 저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고 가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 놔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렇게 나온거예요. 그런데 그날이 되어서 성령이 오게되니까 아무리 저 멀리 전도하고, 아프리카 가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벗어날수 없음을 그날에 너희가 그 다음에 알리라. 심지어 주님안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절벽에 떨어져서 죽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누구안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 있는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처음부터 친절하게 가르쳐 주면 될것인데 왜 하느냐 하면은 반드시 내가 뭐가 문제고, 뭐가 모르고 있고 뭐가 착각하고 있는 그 경과를 반드시 그 절차를 겪어야되요. 우리가...예 이것을 겪어야 된다고..이것을 겪지 않으면 이게 말로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 죽어야 되거든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기껏 우리가 이것밖에 몰랐습니다를 분명히 드러내야되요. 내가 아무리 지식으로 주의 말씀 잘 이해해도 나는 주안에 있도록 할 조치가 능력이 우리한테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사람이 목사님 질문있겠습니다. 그들은 몰랐는데 성령이 오고 난뒤에, 그들은 예수님과 따로 있었는데, 성령오고 난 뒤에 아! 주 안에 있게 되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알리라’ 라는 말이 무슨뜻이냐면 이게 순수과거가 되버리면 인간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리 흐르더라고 이미 그 순수과거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서 순수과거를 증거하기 위해 이땅에서 한시적인 그런 인간적인 시간에 있었던 거예요. 


전에는 따로 있었는데 이제부터 들어왔다가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시간 관념이고 제가 순수 과거란 말한 이유는 순수과거는 현재에 포함이 안되는 순수과거, 보통 과거는 현재가 되어버리면 밑에 오면서 과거로 변화되고 맙니다. 과거는 날라가고 현재는 과거를 대신하거든요. 절대로 그렇지 현재가 과거를 대신할수 없는, 그냥 영원한 과거로 남는 순수과거. 다 이루었다는 것. 과거 어느지점, 우리역사의 어느지점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있었던 어떤 순수과거. 


그리고 시간이 창조되면서 순수과거를 증거하게한 은유로서의 이땅에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 뭐냐? 복잡한 이유가 그 당시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 말을 못알아 듣는다 이 말이죠. 못알아듣고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못알아듣는가? 뭐냐하면은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예요. 판단도 내가 해야되고 믿어도 내가 믿고 항상 우리가 주체로 등장하거든요. 


사람이 자기가 중심이 될 때, 중심이 되면서 나타나는것을 뭐라하냐하면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해요. 영어로 하면 meaning, 우리말로 하면 의미라는 겁니다 의미. 어느 그저 나는 남자라는 그 프로그램있었죠. mbc에서 나도 남자다? 군에 가는 프로 뭐있습니까? 아! 진짜 사나이. 진짜 사나이 보면 거기 코미디언 몇명하고 연예인들 가가지고 입대를 했어요. 입대를 하는데, 박명수라는 개그맨이 나이가 제일 많은니까 임시적으로 분대장되어가지고, 신고를 하는 거예요. 


신고합니다. 나 박명수 외 6명은 입대를 신고합니다. 뭐 이렇게해야되는데, 이게 그 안되는거예요. 입대를 신고합니다 이렇게 해야하는데, 입대라 안하고, 뭐라고 이야기 했냐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입주' 왜 입주라 했냐면 평소에 군에 제대한지 오래되어가지고 항상 생각하는게 아파트입주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내가 살던 동네아니고 다른동네, 나 외 6명은 여기 부대 입주를 명받았습니다. 입주. 그 입주란 말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자기의 생활환경에서 나온 단어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중심으로,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쓰는 말은 사람말이예요? 하늘 말이예요? 사람말이예요. 왜냐 어디까지나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누구 중심이다? 사람중심이다. 사람중심인데 사람중심이란 말을했는데 사람들 사는 그 시제, 단어, 개념 흔히 말하는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 말이죠. 백날 분석해도 아무것도 안나오는 것. 그것 가지고 사용을 하는데, 그 사용하는 이유가 뭐냐 못알아 먹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가 자기 중심이 되고 말았어요. 의미가 이미 개념자체에 자기 의미가있고, 이게 뭐냐? 무엇으로 이어지느냐 내 중심으로 이어져요. 내 중심. 


나는 예수믿는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는다. 이게 누구 중심이예요? 내가 예수믿는데 옆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주님 어떻게 하면 주께 영광돌립니까? 이거 보세요. 이 말이 누구 중심이예요? 나 중심이잖아요.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가 잘될까? 이게 누구중심? 나중심이다 이 말이죠. 어떻게하면 내가 중보기도해서 저 사람을 꼬실까? 이게 전부 나 중심이단 말이죠. 나 중심이니까 거기다가 아무리 요한복음 14장을 설명해도 이미 구축이되어있어요. 내 중심으로. 이걸 성경공부해서 누가 구원받는다? 나 구원받을거야. 어디가는데? 내가 묻고 싶어요. 어디가실려고 하십니까? 


예수믿고 지금은 예수믿기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했는데 예수믿고 난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려구요 이러거든요. 그게 바로 엉터리예요. 그게..그게 엉터리라고요.. 우리는 순수과거 아래서는 야곱에 태어나기전부터 이미 야곱을 알고, 에서가 태어나기전에 에서는 미워하고 이미 정해져있어요. 그 우리는 내 시간을 버리고 순수시간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방사되어서 이제 방사알겠죠? 로봇팔 알았을때 그때 우리는 뭐냐? 내 중심이 아니고 누구중심? 드디어 하나님께서 생각했던 그 예수중심에서 우리는 그 안에 우리가 아는 거예요. 


한번 봅시다. 20절 그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내가 너희가 내 안에 그 다음에 너희가 알리라. 지금은? 너희가 안다? 모른다? 모른다. 전혀 지금 몰라요. 성령 보혜사가 안왔으니까. 19절에 봅시다. 좀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나를 보리니, 그 다음에 이는 내가 살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이는 내가 살았고 그 다음에 너희도? 너희도 살리라 되어있죠? 그러면 너희는 지금 뭐하다? 지금 죽어있다는 거예요. 지금 너희는 죽어 있다는거예요. 



지금 이런말해도 지금은 모르고 성령이 와서 다시 그때 요한복음 14장 내용을 다시 보게되면 '아~ 산다는걸, 이런걸 산다라고 하는구나. 예수님 중심이 될때 그것을 산다하는거고, 예수그리스도 아니면 아니되고, 그것은 죽음이 되요. 비록 그 지옥마저 하나님께서 손 댄 장소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모르면 그것은 저주받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를 알면 영생을 얻는것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 끝에 한번 봅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죠.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죠. 그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를때엔 진노에 있다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영생을 받겠습니까? 이게 오늘 강의한 내용 아는가 연습문제. 어떻습니까? 예수님 모르고 고기잡을때는 저주아래 있다가 예수 딱 믿는순간 영생얻는 거예요? 아니죠. 아닙니다. 


예수님중심이 되어버리면 소급해서, 뭐든지 소급해서 주께서 고기잡으라 해서 고기 잡았었고, 그때는 나를 모른다고 부인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씩 부인하게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게끔 하셨기때문에 그것도 주님께서 중심이 되도록 베드로 내가 배반하는게 아니고 주께서 중심되도록 베드로로 하여금 배반하도록 허용 하신거예요. 모든게..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것이 그리스도 중심일수 밖에 없어요. 찬양합니다. 그러지 말고 주님이 중심입니다. 이러면 되요. 10분 쉽시다.

 홍민희 (IP:210.♡.246.108)17-07-06 16:26 

가락-요한복음14장20절(체험)170705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하겠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알리라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예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모르는데 예수님이 계속 할일이 또 남아있는거죠. 근데 남아있는 일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성령이 오신다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헛갈리는 거예요.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성령이 왜 와야됩니까? 지금 주님이 함께 있잖아요. 그걸로 충분한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걸로.. 그런데 주님께서 떠나겠다 하니까 떠날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엄마가 아이 키우다가 엄마가 '얘야, 엄마는 앞으로 5년간 너와 떨어져야해.' 하면 애가 한 3살 4살 먹은애가 얼마나 울겠어요. '엄마, 나도 같이가.' '아니 내가 가지 아니하면 너에게 엄마의 영이 못와.' 이렇게 한다면 왜 그말을 구태여 해야되는지를 바로 이것은 제자들은 이해를 못해요. 떠난 이유도 모르고 성령이 와야하는 이유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누가 아느냐하면은 바로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내용이예요. 떠나야되고 성령 보혜사를 보내야 되고. 떠나야 되는 내용이다 이말입니다. 아들만 아는 내용이라 이말이죠. 이 사람들은 몰라요. 이 사람들은 모른다구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중심, 사람중심이죠. 다른말로 하면 아들중심이예요. 예수님 중심에서 성령이, 성령이 아들이 가고 성령이 오게되면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성령방사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밥상보 처럼, 성령이 이렇게 오게되면 아들중심이 되어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바가 이들을 함께 합류시킴으로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합류시켜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뒤에 나오지만 왜 아버지하고 아들 둘만 있으면 왜 완성이 안됩니까? 왜 자기 백성, 제자들이 있어야 완성이 되는 거죠?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은 있어요. 지금 있거든요. 근데 예수님이,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사랑이 될려면 예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있어야되요. 구약이 바로 왕제도이기때문에. 왕이 백성을 사랑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구약에 있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왕으로, 주라하는것은 왕입니다. 왕으로 이렇게 추대를 하게되있습니다. 추대할려면 그냥 아버지와 아들 둘만 추대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백성들이 동반해서 거기에 혜택을 입어야해요. 그 혜택입는 그 혜택입을려면 완벽한 혜택, 그야말로 아들이 의로운것처럼, 같이의롭게 되는 완벽한 혜택이 주어져야 됩니다. 그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 혜택을 뭘로 주어지냐하면 보혜사가 와서 주어져야되는 거예요. 보혜사가 와서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다 아는 겁니다. 그 다음 질문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면 왜 제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 ‘예수님이 주 시구나, 아 주님이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을 주로 잘 모셔야되겠다.’ 왜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노력해서 '예수님이 주님이래. 그러면 우리가 바르게 살자.' 왜 이렇게 해서 백성만드는 작업에 안나서냐 이말입니다. 왜 그게 안되죠?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이 와서 하잖아요. 성령이 오지말고 자기들이 이제 주님을 알았으니까 자진해서 열심히 해서 예수님을 잘 모시면 그게 백성다운 모습이 아니겠어요? 왜 그런 방식을 왜 하지 않으냐 이말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오게되게 되면 인간이 하는 모든것은 예수님이 하는것에 못 미치기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인간이 애쓰고 말씀지키고 노력해도, 예수님 한분이 하신 것, 그것을 해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알고 다른사람들은 이미 범죄했기때문에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과, 아버지를 모르고 자기가 지어내서 하는 그 하나님은 엉터리일수밖에 없거든요. 그만큼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그 관계를 이룰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을 봅시다. 문제는 이것이죠. '성령의 오심' 입니다. 이것이 뒤에 주욱 나옵니다. 성령의 오심. 성령의 오심입니다. 



자, 성령이 오시게 되면 23절 끝에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말을 지키리니,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그 다음에 그 다음 어디입니까? 거처를 함께 하실 것이죠. 우리가 저어게서 와서 거처를 함께 하신다. 저가 누구냐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이 오시게되면 성령님은 어떻게 오셨는가 하면 예수님이 다 이룬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한것이냐하면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모든 목적이 예수님 앞에 응축이 되요. 다 모아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이라 하냐면 ‘보편적 단독자’ 라 해요. 



단독자란 숫자로 하면 1이죠. 보편이란 무슨뜻입니까? 영어로 하면 all. 전부, 전부를 커버해서 하나로 응축이 되는 그분. 존재잖아요. 그분이 누구냐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그러면 보편적 단독자 이것을 구약에서는 무엇이라 하냐면 인자라고 해요. 인자. 그 느부갓네살왕이 그 동상이 금상이 있을때 뜨인돌이 와가지고 발을 치니까 동상이 완전 무너져있고,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그 앞에 돌이 어떻게 되요? 뭐가되요? 높다란 태산이 되죠. 태산이 뭐냐하면 모든걸 커버하는 거예요. all. 모든것을 커버하는 겁니다. 모든것을 커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이 우상을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제국들 모든 나라를 이 우상안에 다 응축을 시킨거예요.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말은 뭐냐하면은 여러분들이 알아야할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모든것이 여기에 응축이 되어 있어요. 말씀하나 풀면 요한계시록 창세기가 다 풀려나와야되요. 실타레처럼 다 풀려나와야되요. 응축이 되어있으니까. 응축이 된 이유가 이 말씀을 주신 분이 보편적 단독자이기때문에. 보편적 단독자 이니까 보편에서 갑자기 여기 있는 다양성에서 하나하나 끌어당겨서 어디로 이어져야한다? 최종적으로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따라서 성령이 오는 이유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착한일을 해서 만약에 주의 백성된다면 단독자가 몇명되요? 예수님도 단독자, 나도 나름 착한일한 단독자, 너도 착했으니까 너도 단독자, 이렇게 되면 이건 천국이 아니고 중구난방이 되어버려요. 그야말로 주님 보좌에 있는게 아니고 원형테이블에 앉아야되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합니까? 주님한테 반납하죠. 보편적 단독자에게 보편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독자에게 면류관드리면서 뭐라하냐고하면은 내가 나 된것은 주의 뜻입니다 하고 던지는 것이예요.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되는 그 거처가, 거처를 위해서 성령이 오신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성령부터 모든 천사부터 모든 주의 백성까지 모든 심지어 지옥간 사람까지 전부다 주의 이름을 찬미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게 거대담론이죠. 거대담론. 소소한 것이 아니고 전체를 다 포괄하는 거대담론이죠. 문제는 거기 성경의 내용인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목사님 성경의 내용이 그렇다는것은 동의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문제는 실제로 그렇습니까 입니다. 아까 우리 집사님 이야기 한것처럼 이제부터 체험되어야해요. 체험. 이제부터 체험을 해야되요. 성경내용은 그런데, 요 이야기 듣고 집에 갑니다. 집에가면 벌써 설겆이, 밥먹고 설겆이도 안해놓고 이만큼 쌓여있다구요. 이 보편적 단독자를 위해서 살기로 맘먹다가 짜증부터 나는 거예요. 오랜만에 나왔는데 알아서 설겆이좀 도와주면 안되나? 너는 뭐하냐? 티비나 보고있고, 먹을거나 찾고 있고, 막 잔소리부터 늘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내일도 또 적금만기된거 그거 계산하고 일상생활에 빠지게 되면 보편적 단독자가 없고, 중심이 누구 중심으로 바뀌었습니까? 벌써 몇분안지나 집에 가기 전에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되어가지고 그 다음에 내중심이 되면 뭐냐하면 그 다음 중요한 것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나의 거처’가 따로 생각이 된다니까. 나의 거처 '나 어떻게 사나? 그만두고 나오니까. 나 자식하고 어떻게 살지?' 자기 신세한탄부터 해가지고 자기 거처 생각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이런이야기 할때 제자들이 물어봅시다. 제자들이 위로받겠어요? 고민되겠어요? 둘중에 하나다. 마지막때에 거처를 함께 할때 위로가 되겠어요? 걱정이 되었겠어요? 걱정되지요. 주께서 또 무슨짓을 할지 상상이 안가거든요. 왜그러냐하면은 내가 너와 거처를 함께 해버리면 말로는 주님을 좋다 했는데 좋은분과 같이 살까?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거든요. 



제가 그 어제 대구강의에서 예를 잘못들었어요. 쌈마이웨이인가? 그 드라마 얘기하면서 반대로 이야기했는데  제 아내가 지접이야기해줬어요. 남녀가 서로 사귀다가 손을 놓는다는 그 대목 이야기 하면서 남자가 그동안 여자 꼬실려고 얼마나 투자했느냐 했는데 그 드라마는 그 반대랍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그렇게 투자했데요. 드라마를 봐야알지. 그냥 우연히 그냥 지나갔을뿐인데. 뭐가 걱정이 되냐하냐면 ‘사랑해’ ‘사랑해’ ‘그럼 같이 살자.’ 그 문제는 나중문제예요. 왜냐하면 좋아해서 사는건 좋은데 같이 사는 문제는 아니거든요. 같이 사는 것. 이것은 생각할게 많이 남아있어요. 



같이 살게되면 집은 누구이름으로 등기하냐 그 문제 있고, 서로 아침형인간 저녁형인간 같이 살면 그 문제 있고, 또 둘이 살면 괜찮은데 이쪽에 얽혀 있는 친척들 오고, 네거티브들 이쪽에 친척들 이렇게 왔을때 서로 빚쟁이 관계있으면 난리 문제가 큰거예요. 그리고 집을 같이 살때 제주도에 살거냐 아니면 서울살거냐 강원도 살거냐 그 문제도 또 문제 있어요. 그러니까 사귀되 따로 필요할때 만나고 그다음에 따로 떨어져 살자. 지금 이런 중요한 얘기에 연예인 얘기하면 안되지만 복음을 위해서 모든것을 다 향유할수 밖에 없어요. 김국진하고 강수지하고 사귄다고 해 놓고 벌써 주위에서 결혼해! 안해요. 왜 현명하니까. 그 결혼 왜하는데. 각자 돈벌이 있겠다. 결혼 왜합니까? 사귀기만 하면 되지요. 혼인신고 할필요 없잖아요. 



체험이 안되요. 체험이 '나 너와 함께 살께. 좋으냐?' '안좋아요. 안좋아요.' 왜냐 우리 살던 가락이 있어갖고요. 나는 내 노동으로 내가 돈벌어서 그래서 알뜰살뜰 이룬 아파트 이게 좋지, 나 이거 버리고 주와함께 살겠다. 미쳤나? 그럼 '그 아파트 나줘. 그럼 내꺼할께. 버릴거 같으면 나줘. 내가 살께.' 사람은 자기가 노동한것에 애착이 있어가지고, 주님께서 무슨 선물줘도 그것은 별로예요. 역시 내가 아끼고 살림사고, 쓸고 닦고 해가지고 세제 만들고 아토피 안되는 거 만들고 해서 이렇게 공들였던 그것이 나한테는 나의 거처로서 나는 족합니다. 



아까 집사님이 좋은이야기 했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체험이 안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주님께서 좋은 말해도 체험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체험이 안되요. 체험이. 이게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 체험이 안되니까 누구 중심입니까? 제자들은 자기 중심이죠. 자기중심이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뭐가 나온다? 자기의미가 나와요. 예수님을 믿으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오나? 이렇게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데요. 참고로 알아놓으세요. 자유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리주의 자유. 공리주의 자유라하는것은 뭐냐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선택할수 있는것.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이게 공리주의예요. 어느것이 더 맛있겠느냐? 있잖아요. 



두번째는 이것은 북한 김정은 자유. 무조건 일 저지르고 보는거예요. 무조건. 아무소리 안듣고 누가 부하가 무슨소리 했든 필요없이 누가 이야기 하든 무조건 일 저질러요. 하지말라고 하면 더 하고싶은거 있잖아요. 애들. 맹목적으로 일을 만들기. 이 자유. '내 자유다 왜' '아니 그렇게 하시면 남한테...밤 12시 넘었는데 라디오 크게 틀고 엠프 크게 틀면 시끄럽잖아요.' '내 자유인데 왜? 이 아파트 내 아파트야. 당신이 뭔데. 아파트 사는데 당신이 보태준거 있어? 내 아파트 내가 트는데 니가 왜?' ' 아니 시끄럽고...' '시끄러우면 니가 이사해야지. 이 아파트 니꺼야? 이게 시건방지게 돈도 안내놓고, 내가 내 아파트 내가 사가지고 내가 노력해서 촌에서 밭 다 팔아가지고 아파트 샀는데 내 아파트인데 니가 뭔데 너도 떠들지 그래. 너도 같이 볼륨 높여.' 지금 방금 이런예를 들었잖아요. 이것을 김정은이라고 했잖아요. 저는 이것을 김정은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ALL로봐요 ALL. 



모든 인간 현재 다 이렇게 살아요. 점잖게 이익이 되는지 이익이 되냐 안된냐 이것은 아주 순한 사람이고, 대부분은 일을 저지릅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심심해서해요. 그거 아니면 할게 없어요. 사업을 왜 하는줄 알아요? 이것 아니면 할게 없어요. 다른게 할게 없어요. 퇴직하고나서 제일 힘든게 할게 없다는게 제일 힘들어요. 하루에 우리나라 하루에 14000개가 문을 닫습니다. 자영업자. 그래도 또 해요. 할게 없으니까. 집에서 노는것보다 낫습니다. 



세번째 자유는 불교입니다. 이 자유는 어떤자유냐 아무것도 안하는 자유. 백수자유. 아무것도 안하는 자유. 나이 50이 되었는데 하는일은 뭐냐하면 섹소폰 불고, 낚시 하고, 한 평생을 가장이 돼서 한평생을 취미생활로 다 보낸사람이 있어요. 방송에서 봤어요. 어떤개그맨이모부라 하던데. 이 사람이 절대 하는 한가지 일이 있어요. 아내가 돈벌어 오게되면 우리 마누라 돈벌어왔다 해가지고 꽹과리 치는 일이예요. 위로해준다고. ‘여보 힘내세요. 내가 있잖아요.’ 그 장단 맞춰주는 일만 해요. 하루종일 그것만 딱 해요. 나머지는 자기 취미활동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마을의 통장입니다. 얼마나 할일 없으면..아무것도 안하는 자유. 



여러분 1번 2번 3번 확연히 다른것 아시죠? 그런데 이 자유 모두다 all이니까 all은 아까 뭐랬어요? all은 보편적이다. 보편적. 근데 모든 이 자유를 하는데 나름대로의 뭐가 있느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요. 왜 의미가 있느냐 하면 전부다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왜 자기 중심이냐 자기거처가 있어요. 자기 거처가. 따라서 지금 보편적 단독자가 예수님 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같으면 단독자 답게 세상을 획기적으로 이제는 전환되는 것만 남아있죠. 전환될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딴게 아니고 그 말에 해당되는 체험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무슨체험? 내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 중심인것을 다른말로 하면 십자가 중심인것을. 



순수과거 중심으로 나의 현재 과거 미래를 순수과거 속에다가 거처를 함께 하게 하는 체험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 만나기위해서 기도원에 갈까요? 어떻게 할까요? 멀리 갈까요? 아니면 성지순례할까요? 거처를 함께 할 때, 거처 전에 성령오기 전에 거처가 뭐냐하면 바로 나의 거처였던 거예요. 나의 내가 이만큼 휼륭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체험의 거처, 나한테 의미있는 거처. 



어떤 아가씨가 이사를 가는데 엄마가 이삿짐 보는데 이삿짐 가는게 좁아서 강아지는 좀 놔두고 가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발끈하면서 딴 건 다 버려도 이 강아지 만큼은 내가 안고 갈거야! 왜 강아지를 안고 갔을까요? 강아지가 빠져버리면 내가 그동안 쌓았던 내 거처가 없어요. 강아지와 함께 추억을 이루었던 그 거처거든요. 전에 직장에 갔다가 한달도 안되서 나왔잖아요. 전에 직장에 추억이 있습니까? 없지요. 미련없이 밀어버릴수 있는거예요. 그러나 계속 누적된 의미같으면 그 빛바랜 사진하나 버릴수가 없습니다. 



그 노래 있어요. 매기의 추억. 노래가 너무 구슬퍼요. 매기의 추억은 완전히 체험 덩어리예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거닐었던 그 밤송이 나무의 그 냄새와 그 때 날리던 그 꽃가루까지 전부다 기억이 나요. 여러분 그런 경험들 다들 있잖아요. 옛날 첫사랑과 함께 거닐었던 석촌호수가 가가지고 지금 롯데빌딩 들어서있습니다. 옛날에 어릴 때 있던 그 골목길 느티나무, 오랜된 그 하나하나에 손때가 묻었을거란 말이죠. 혹시 알아요? 그 나무 밑에 혹시 타임캡슐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엽기적 그녀 처럼 파헤치면 캡슐안에 우리 만났던게 있을거예요. 10년후에 여기서 우리가 만나자. 무엇이 되든 만나자. 있잖아요. 안나와요. 보통 10년뒤에 만나자고 하면 안나옵니다. 왜 안나오느냐? 출세해보세요 나오지 출세안했기때문에 안나오는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인간은 자기가 쌓아온 체험에서 본인의 능력으로 벗어날수 있다? 없다? 못벗어 납니다. 왜냐하면 자유이기 때문에, 이 자유를할 때 내 중심으로 자유했거든요. 짬뽕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이것은 누구한테 이익이예요? 나한테 이익이거든요. 내가 없으면 짬뽕도 짜장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체험은 뭐냐?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가 지금 죽는 마당에 짬뽕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하면 지금 죽는마당에 살고 싶지 짬뽕 짜장면이 의미있는게 아니예요. 왜? 그게 체험화 됬다니까. 우리가 있는 체험, 과거의 추억에서 우리가 못 벗어나요. 자아라는것 주체라는 것, 이건 이미 체험으로 꽉꽉 채워져 있어요. 이걸 어떻게 버립니까?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은 예수믿는 다는 것은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자기 추억담을 이야기 할 뿐이지, 성령이 주는 체험은 아닙니다. 내가 종교생활한 누적된 체험들이예요. 날 무시하지 말라고, 나 이정도로 믿음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잠깐 동영상 촬영하기 전 그런 얘기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복하게 되면 메시아가 온다고 기다리는 사람들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전천년주의, 성전, 적그리스도 나타나고 뭐 그런얘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메시아가 오는 때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믿으면 이걸 메시아닉주라 해요. 주란 말 유대인, 젠타일(gentile)이란말은 이방인이고, 주와 젠타일은 서로 반대개념이거든요. 메시아를 믿는 예수를 믿는 주가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되면 메시아가 올때가 가깝다라고 할 때, 그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느냐 하면은 자기들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성경에서 성경대로 이스라엘이 여기 있잖아. 여기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있으니까 성경이 맞다는 거예요. 그럼 그들은 복음이 뭐예요? 이스라엘 존재가 복음이예요. 



사도바울이 이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눈에 안보이는 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눈에 안보이는게 복음이잖아요.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든 이랬다고요.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교회 십자가 외엔 안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십자가 눈앞에 보이면 나는 어떻게 된다? 나는 죽고 내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지요. 그럼 내거처가 내거처입니까? 그리스도 거처예요? 지금 있는것이 다 누구 거처예요? 그리스도 거처이고 고린도후서에서 보면 이것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단 말이죠.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무슨 중심? 지금도 인간중심이예요. 지금도 성도 중심이예요. 똑같은 체험을 해도 이 체험이 의미가 다르고 내중심에서 했던 의미에서 예수님 중심의미로 바뀌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사람있어요. 손을 두두둑하는 사람있어요. 이게 누구체험이예요? 주님체험이라구요. 우두두둑~ 주님체험이라구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체험에서 못 벗어 납니다. 



자 그러면 주님과 거처가 함께 있을때에 내 체험이 있는한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공들였던 내 아파트에서 내 거처, 내 자식들하고 같이 살고 싶지. 부등식 기호에서 내자식과, 내 재산과, 내 통장과, 내 아파트 그리고 예수님 거처, (내쪽)이렇게 되요? (예수님쪽)이렇게 되요? 강조점이? 성경상 예수님 거처가 옳잖아요. 그런데 체험상은 우리의 체험상은 3초도 안걸려요. 후딱 (내쪽)이렇게 되요. 주택 또 넣어가지고 가슴 부풀어 가지고 언제쯤 아파트 구해서 갈 생각하고 있단말이죠. 주님거처 가지고 '아 좋아요. 주님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주님 만나면...' 성경에 나와있단말이죠. 주의 날이 가까워 왔으니 너는 마음을 조아려서 기다리라 이런 대목이 있잖아요. 로마서에 보면 나온다구요. 그럼 너해라 이러죠. 후딱 덮어버려요. 난 안봤습니다. 덮어버려요. 



그러니까 참 이걸 알게되면 그 당시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이말이죠. 지금 같이 있으면 되지. 가기는 왜 가고. 이 거처는 뭐냐 말예요. 새로운 거처가 온다니까. 여기서 말씀은 니가 니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뭐라하냐면 지금도 마음껏 주님 중심입니다. 제 중심 아니예요.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이말은 뭐냐? 절대로 나는 단절을, 다시 말해서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그 절차를 반드시 겪어야 해요. 제자들도. 이것을 겪지 아니하면 주님과 함께 할수가 없습니다. 잘난체 해가지고는 절대 구원 못받습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찬송가에 넣어볼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낭떠러지. 낭떠러지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베드로처럼 유턴해야되요. 갔던 길로 돌아와서 우리는 고기잡으로 가야되요. 우리가 아는 체험은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럼 ‘목사님 우린 아무도 구원못받겠네요?’ 하잖아요. 성령이 비로소 성령이 오심을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매일같이 바로 그 낭떠러지, 그 낭떠러지를 되풀이 하는데 그게 순수과거의 작용이라합니다. 



내가 알고있는 과거는 이미 옛날 내가 잘한다 못한다 하는 그 과거가 아니고 순수과거는 난입하고 허락없이 개입하고 뛰어들어요. 뛰어들면 순수과거는 뭐냐? 과거니까 다 이루어진거예요. 다 이루어진것과 난 이것 했으면 좋겠습니다의 대결상태. 대립상태가 되는거예요. 다 이루었다 하고,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고. 



자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가 왜 문제점이 되느냐하면 내 자식 내 통장, 내 아파트 이것 이렇게 되면 사람이 이것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것을 동질성 여기면서 동질성을 눈올때 눈사람 만들때 처음부터 눈사람이 큰게 아니죠. 요만큼 만들어가지고 굴리면 어떻게 됩니까? 굴리면 계속 커가지요. 이 동질성을 굴려요. 굴리게 되면 내 자식은 이렇게 앞으로 판사 의사가 될거라고 굴리고, 실제로 그런 자식들이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그 다음에 내 투자한것은 펀드 넣은것은 펀드가 너무 잘되어 가지고 60% 50% 막 때돈을 버는 거예요. 통장도 잘되고, 부동산 오르고, 그 다음 아파트 이사해서 보다 넓은 아파트 별장까지 한다. 현재 이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더 확장되고 확장되겠죠. 이걸 가지고 뭐라하냐 이걸 팽창이라 합니다. 팽창. 



뭘 팽창입니까? 팽창하먄 악이 되는거예요. 악. 그러면 팽창이 뭐되요? 수축이 되야되겠죠. 어디로 수축되냐하면 보편적 단독자로 수축이 되는 겁니다. 전에 있는 이 아파트, 펀드해서 수익나는 것, 그거 니 거처 아니고 예수님 거처예요. 그래서 돈남았다고 해서 그 돈 교회갔다가 내면 되요? 안되요? 안되지요. 왜 주님의 거처인데 지가 왜 지가 처분해요? 다 챙기세요. 챙길 돈도 없지만.. 챙기되 주님 절대 과거, 순수과거에서 주신예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갑자기 끝으로 복음으로 끝나죠. 



제가 주일 낮에 그런이야기를 했잖아요. 헌금하는게 의미가 없기때문에 넘치도록 할수가 있다. 의미가 없기때문에 넘치도록 할수있다. 의미가 없기때문에.. 주님께서 이미 거처를 마련했어요. 뭐가 문제냐면 내중심에 주님중심으로 안바뀌는게 문제예요. 그것만 바뀌면 되는거죠.  


①난 바뀌었는데 이러면 안되고, 이게 체험이 되어야해요. 체험이. 

체험이 되는 방법을 하나 이야기 하나, 이 이야기 하면 오늘 저녁에 또 잠못잔다... 하여튼 실천해 봅시다. 



펀드를 넣었는데 정말 100%되고, 주식을 했는데 갑자기 주식이 천만원 넣었는데 10억이 되었어요. 정말 기뻐요. 그래서 주님의 처소 감사합니다. 주님의 처소이기때문에 30배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짜 다 잘됐는데, 좋다 했는데, 아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거예요. 자 그 순간 보세요. 아들은 병원에 가니까 한달넘기기 힘들다 하는데 펀드는 지금 10배올랐어요. 그리고 자기 남편도 갑자기 승진했어요. 갑자기 새로 문재인대통령되서 장관으로 초청됬어요. 교수였다 장관됬어요. 그런데 자 아들이 멀쩡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막 하면서 주께서 주신 처소인줄 알았는데, 이것은 감사한데 아들이 죽는다 했을때에 아들이 죽으면 세가지 조건 가운데 두가지는 주님의 처소인데, 한가지는 여전히 나의 처소가 될때 여기서 모순이 벌어지죠. 



나는 도대체 내 중심일까? 주님 중심일까? 이런경우도 있고, 지금 이런이야기 했으니까 이런일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홍해 한번 하면 지나가면 두번다시 홍해 안나옵니다. 요단강 나오죠. 홍해 안나오거든요. 안좋은 일은 얘기해야 두번다시 안나오거든요. 아들은 서울 어디 나오고 펀드는 100배 오르고, 가정이 화목합니다. 가정하면서 드디어 주님의 처소, 역시 주님 중심으로 사니까 이런복을 받네 좋아했는데, 25년전에 지었던 죄를 그것을 어느 사람이 찾아와서 협박을 할때, 자 이것은 미리 여기있는 요소예요? 여기 없는 요소예요? 여기 없는 요소인데 나는 당신이 25년전에 여름에 한일을 알고 있다. 하고 찾아와가지고 사업을 하는데 돈이 모자라니까 2천만원만 주면 내 입 다물을께. 당신 남편 모르게 해줄게. 하고 옛날 빛바랜 사진 호텔에서 찍은 사진 내놓 했단 말이죠. 드라마 입니다. 드라마, 한국 드라마. 아침드라마예요. 



이런경우가 왔다던지 아니면 어떤 여자가 와가지고 내가 당신 언니인데, 언니가 바뀌어 가지고, 원래 딸이 아닌데 남의 딸이 된거예요. DNA해보니까 진짜 딸이고, 나는 가짜인데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났어.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자 이렇게 했을때 예상밖에 일이벌어졌잖아요. 예상밖에. 그렇죠? 예상밖에 일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all이죠. 보편성이죠. 체험되지 않는 새로운 내가 나로 버틸수 없는 체험. 


②나의 동질성을 가지고 천국가는것이 결국 실패로 끝날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앞당겨서 미리 알려주는 통보해주는 체험. 

그것이 최고의 체험입니다



이렇게 나의 25년 과거를 알때 과거가 와가지고 어떤 남자가 와가지고 나한테 돈달라고 협박하고 잘사는구만 여자가 그러면 이렇게 오천만원 떨어져라 하면 사실은 오천만원 더 뜯어내고 드라마 그런게 있어요. 이렇게 한번 당해봐야 '아 내 인생이 왜이렇게 된건가요.' 이것도 들어보니까 이것도 별로 맘에 안들지요. 인생이 이렇다면 인생 정말 괴롭지요. 그러면 이것도 탈락입니다. 안들은걸로 해주시고.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있는조건에서 뭉개지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데 단란한 가정인데 난데 없이 외부에서 쳐들어온 그 조건도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그럼 어떤 조건이 있어야 여러분 만족하겠습니까? 



이런거 하면 되요. 설겆이 하다가 예수믿는것. 최고입니다. 실제로 그래요. 실제로 설겆이 하다가 예수님 십자가 내대신 돌아가셨구나.. 아 죽음 너머에 있는 능력이 갈수도 없는 나를 건져 내셨구나. 그때부터 설겆이가 굉장히 가볍게 되요. 반들반들하게. 내가 설겆이 하는 것인지 내가 직장생활하는것인지 분간할수 없이 설겆이가 끝나버렸어요. 이러한 흉악한 비참한 경험을 안해도, 이미 이 사람은 구원이 된거예요. 그리고 이런 조건을 가볍게 갑자기 성령와서 하는 그것이 나는 좋겠습니다라고 선택할 문제는 아니고, 이 선택은 누가 하느냐하면 주님맘대로예요. 주님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내가 내중심으로 사는 이것이 바로 내가 지옥갈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깨닫게 될 때, 꼭 집에 불나고 바람나야되고 꼭 이래야 됩니까? 집에 뭐 펀드가 돈이 날라가고 이래야됩니까? 조용하게, 조용하게 될수가 있어요. 조용하게 되나 요란스럽게 되나 역시 중심만 바뀌어 버리면, 그게 나의 엄청난 체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엄청난 체험으로. 참 그래서 이렇게 암에 걸렸다 나은게 되버리면 간증하러 다니기 바쁘겠지만 조용하게 구원받으면요, 간증할것도 없어요. '장로님은 어떻게 예수 믿었습니까?' '나도 모르게 예수믿었어요.' '재미 하나도 없다.' '네 재미 없어요.' 네 그럴수 밖에 없어요. 



성경에 보면 삼손같은 사람 요란스럽죠. 뭐 사자를 잡아 찢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요란스러운 방법이고, 다양합니다. 보편적이란 다양합니다. 다양한 방법 다 다르기 때문에 남이 가진 체험 그걸 탐내지 마시고, 내게 고요하게 다가오는 그 체험 귀한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느순간에 부터 어느순간부터 이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가는 인생이란것을 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성령세례 받은사람입니다. 아까 뭐라했죠? 성령의 방사, 로봇팔이라고 했죠. 



자, 그러면 다시 정리해 봅시다. 거처가 어디라고요? 거처가 현재 아무것도 안하고 평소처럼 똑같은 생활해도 그것은 누구의 거처가되요? 성령의 거처가 되면서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다음 문제입니다. 


그럼 성전이 됬을 경우에 어떤현상이 일어나는가? 요것 빠지면 안되요. 

자 우리가 성령의 거처가 됬다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바로 제자들이 성령받기전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가 표출하게 되어있습니다. 

안에 들어왔잖아요. 성령들어왔잖아요. 뭐가 나가는게 있어야될게 아닙니까? 

그 나가는 것이 바로 제자들이 모델로 보여주고 그 제자들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이 모습을 본모습이 그래도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6장에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했던 것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거죠. 

성도가 되어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이 바깥으로 이게 

나는 이렇게 생각했드랬습니다가 바깥으로 나오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겁니다

나는 기도하면 응답받는줄 알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복음이 전달되는 거예요. 

나는 헌금하면 십일조 하면 복받는줄 알았습니다. 이런 엉터리를... 

이렇게 하면서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구원은 주님의 손에 달렸는데 내가 열심히 하면 그만큼 하늘나라 상받는줄 알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게 자꾸 흘러나오는 겁니다. 흘러나오면 그것이 바로 복음전파하고 성령이 지금 제대로 안에서 가동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렇다면 더 나가봅시다. 그럼 밖에 나온걸 조사를해보자. 조사를 해보면 이게 내중심이예요. 밖에 나온게, 밖에 튀어나온게, 내중심이고 내중심의 특징이 뭐냐하면 나는 살고싶다 입니다. 나는 살고 싶다. 이게바로 체험, 현재 우리가 흔히 하는 체험 덩어리예요. 모든 행동에는 안에 뭐가 깔려있는가? 나는 지금 죽기싫고, 나는 더 살고 싶어. 더 살고 싶어서가 밑에 쫘악 깔려들어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죠. 살고자 하는 죽음에서 오는 그 공포가 누구나 갖고 있는데, 그것을 바깥에 내 놓으면 성도고, 그 안에 꾹꾹 담고 눌르고 참고 위장하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조작해가면 이것은 성도가 아니죠. 왜냐하면 자기중심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⑤그래서 바깥에 내놓은 체험, 어떤체험이라 했습니까? 

내가 나를 살려고 이런 짓까지 해봤다 하는 그 체험이 바깥으로 계속,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럼 한 일년나오고 그만 나오겠습니까? 이년 나오고 그만 나오겠습니까? 

죽을때까지, 죽을때까지 계속 나와요. 죽을 때 까지 계속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이라는 것은요 반드시 밑에 감정선이 깔려있어요. 

감정선이 말로 나오기 때문에 다 표현이 안됩니다. 다 표현이 안되요



그래서 말을 많이 해서 말1, 말2, 말3해서 듣는 사람이 3개를 참고해가지고, 내가 무슨 뜻인지 알아서 기어라 이렇게 나옵니다. 정확한 단어, 내 감정을 표현할 정확한 단어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정확한게 없습니다. 말을 하기전에 그 감정과, 말을 내뱉은 후에 2초후의 감정이 달라요. '나 당신 좋아해요.' 그럼 상대방이 '아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그말이죠?' '아~!!아니예요. 취소 취소. 좋아한다가 아니고 너무 아낀다.' 그럼 '너무 아낀다?' 그 말이죠? '아~~!!아니야. 너무 사모한다.' 그럼 '사모한다?' '아~~~!!아니고 몰라. 사모한다 아낀다 그중에 당신 알아서 이해해.' 항상 말을 할때는 정확하게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말자체가 사물의 어떤 차이를 차이를 유발하기 때문에, 차이가 자꾸 쌓이게 되어있어요. 차이가. 


그뜻인가? 아니예요. 이 색깔이 뭐다? 푸르다. 아니 푸름직하다 그런뜻이야? 아니. 인간은 자기갖고 있는 말을 못하는 이유가 감정자체가 항상 시간마다 초마다 감정이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방금 말해놓고 말하고 5초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믿을걸 믿어야죠. 인간은 못 믿습니다. 우리가 체험할수 있는것은 인간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만 이용될 대상이지 믿을 대상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느끼는 그거예요. 



우리의 거처는 이처럼 요란스럽다는 거예요. 요란스러우면서 주님이 계시면 우리는 바깥으로 나 이런식으로 살려고 그만큼 체험들을 해왔습니다라는것을 내놓는데 그게 뭐냐하면 내가 나를 살리는 겁니다. 남을 살리는게 아니고 나를 살리죠. 그게 뭐냐면 자기중심적이죠. 자기 중심적이 되면서 내가 했던것은 나에게 의미로, 나에게 의미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게 1,2년 나오고 그만두는게 아니고, 언제까지 나온다 했습니까? 육신이 있는한, 이 육체가 있는 한 계속해서 이것이 죽을때까지 이것은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했습니까? 내가 율법에 흠이 없는 자이지만 내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나는 죄인중에 뭐라고 했습니까? 죄인중에 괴수라고 그랬죠. 그래서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인것을 몰라서 문제예요. 자기가 죄인인것을 인정을 안해서 문제라니까요. 죄를 지어서 문제가 아니고. 죄를 안짓고 싶어도 주님이 주신 말씀 딱 들이대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 죄 아닌게 없어요. 전부다 죄로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체험을 이렇게 할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나름대로 체험한다고 7번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이야기 했잖아요. 자 이야기 합니다. 봅시다. 인간은 뭘한다? 인간은 말을 내놓는다. 배운거 복습하는 거예요. 자기의 감정에서 나온 말이라 했지요. 그럼 이것은 무슨 중심? 내중심. 의미는 나에게 소환되는 의미. 그래서 나는 정당하다라고 소환되는 의미예요. 뭐라하냐하면 내가 7번 용서 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말을 예수님께 했지요. 지금 예수님 말씀 안했어요. 베드로가 먼저 말했어요. 그런데 그 말에 뭐가 포함되어 있냐하면 나는 이런식으로 계속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나는 살고싶다가 있는거예요. 어떻게? 정당하게. 



무려 7번이나 용서하면서 나는 그런식으로 정당함을 부여받으면서 지금 내모습 그대로 동질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하늘나라까지 만나면서 살고 싶다. 내거처 그대로 유지하면서 라고 되어있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답변이 정말 장난도 아니고 이러했어요. 70번에 7번하라했어요. 그러면 베드로가 살고 싶어서 자기 행함을 얘기할때는 베드로는 언제까지 하면되요? 490번까지 하게되면 그 다음은 용서 안해도 되요? 어떻습니까? 지금 그런뜻이예요? 이게? 



예수님보시기에 베드로가 뭐가 문제예요? 용서에다가 용서를 무엇으로 체험했습니까? 나는 용서하는 괜찮은 인간이라는 체험을 뽑아내려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무엇으로 바꿔야되요? 용서는 니가 용서하는것이 아니고, 예수님 내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용서가 주어지는것으로 바꾸고 싶은 거예요. 베드로는 용서를 했기 때문에 갭이 있어야하는데 그 갭을 주님께서는 490으로 끊은 거예요. 490번 해보지. 그럼 490번 다 하면 숙제 다 했는데~ 하면 그 다음 뭐라합니까? 7x7x7 또 숙제라는것이 또늘어날 거예요. 



베드로는 아무래도 그 갭, 그 절단, 낭떠러지를 본인이 인정을 해줘야되요. 내가 아무리 용서해도 구원 받지 못함을 인정해줘야 된다구요. 그러면 절대과거, 순수과거는 그렇게 7번용서하면 된다 하는 그것을  이미 절대과거에 보면 베드로가 그런 소리를 해야됩니다. 왜?! 베드로는 전도자이기때문에. 베드로가 하는 그짓. 7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는 그것이 바깥으로 복음이 들어온사람에게 반드시 필히 지금 너와 나 여러분 다함께 지금도 나올수 있는 체험이기 때문에.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윗집에서 시끄럽게 한다. 그럼 주여 몇번 용서해야합니까? 몇번째 떠들때 내가 올라가야합니까? 지금 세번까지 참았는데. 요게 바로 베드로가 미리 내놓은거예요. 왜냐하면 세번까지 하면 내가 이 아파트를 나의 거처로 삼고 나는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요게 내용이 들어있고 함축되어있는거예요. 함축되어있던거예요. 그런데 윗층에 주님계시다. 주님계시다. 그럼 할말없는거죠.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첫번째 떠들때 올라가세요. 올라가서 성질부리세요. 당신이러면 이 동네 못사니까 쫓아내버리겠다. 이런이야기를 할때 우리는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왜? 내 성질 그대로 바깥으로 표출했기 때문에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성질대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일을 어떻게 견줄수가 있겠습니까? 보편적 단독자도 아닌게 영원히 영생을 누리고자하는 그 자체가 악마의 욕심인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