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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틈 1706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5. 19:51

광주 강의(2017. 6. 23) 40-1 

마가복음 10장 28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을 때, 내가 예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요. 그래서 둘이 결합 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다면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데 꼭 나대지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할 때 베드로가 지금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본인이 주님에 의해 고침 받아야 할 대상이란 점을 감 잡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땅에 있는 사람이 천국 갈 때는 달라져야 하고 바뀌어야 합니다. 

바뀌는데 본인이 알아서 바뀌겠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바뀌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내가 나를 고치겠다.’는 의식이지요. 사실 교인들이 교회 올 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옵니다. “고칠 부분만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서 개과천선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요. 

만약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환자가 알아서 치료하면 의사가 필요 없잖아요. 의사에게는 항상 병든 자가 있어야 해요.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 ‘병든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비정상이고 병든 자란 사실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맞장구를 쳐줍니다.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자신만만하게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버리겠나이다.’라고 한 것은, ‘주님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것도 할 수 있겠어?”라고 묻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만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다 털고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세상에서 얽히고설킨 것이 많아요.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자식, 전토 이런 것들로 얽히고설킨 거예요. 이런 것들을 먼저 잘라내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베드로는 감히 하지를 못했어요. 그냥 이 몸 그대로 주님께 가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 생각은 그것이 아니고, ‘네가 평소에 얽힌 것들이 너로 하여금 천국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너에게 얽힌 것들을 잘라 보란 것입니다. 자르면 어떻습니까? 시원합니까, 아픕니까? 아프지요. 만약 예수님이 거론하신 항목들을 베드로가 다 잘랐다면 주님은 또 다른 항목을 제시하실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을 뽑는데 안경환 씨가 왔잖아요. 이분은 대학 교수니까 그냥 교수 생활을 하면 됩니다. 만약 어떤 분이 안경환 씨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대학 교수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나는 대학 교수인데, 옛날에 어떤 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인신고 했습니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지요. 

대통령은 이분이 강제로 혼인 신고한 것은 모르고 그를 법무부 장관 후보로 뽑았는데, 막상 뽑으니까 뒤에 이런 거추장스런 것이 있는 거예요. 이분이 장관 후보로 뽑히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주님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자기는 대학 교수이기에 대통령의 부름에 따르겠다고 나섰지요. 그런데 검정관이 뒷조사를 해보니까 여러 가지 거추장스런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할 때, 과연 이런 관계를 쳐낼 수 있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있겠습니까? 없지요. 

26-27절에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할 수 없다’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는 할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할 수 없는 이유를 여러 항목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들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신 거예요. ‘이런 것들을 버리면 100배나 받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모친 100명, 자매 100명, 형제 100명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혈육의 형제, 자매를 버리면 수도원에 100명의 형제, 자매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전토는 어떻게 됩니까? 수도원 전체가 내 것 됩니까?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전토를 버리면 금세에 100배를 받는다고 할 때,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소유로 본 거예요. 베드로 본인의 것이죠. 그러면 100배를 받는다고 할 때 내 것으로 100배를 받아야 해요. 수도원의 같은 형제 100명 필요 없어요. 수도원 땅이 아닌 내 이름으로 등기 된 땅이라야 해요. 내 것 버렸는데 그것이 씨앗이 되어 내 것이 100배가 되었다. 이건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주님이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내세도 결국 내가 받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나의 영생이 있습니까? 없어요. 하늘나라는 주님의 나라이지 내 나라는 아닙니다. 

과학 실험실에 배양액이 있어요. 배양액에 모종을 심으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요. 우리의 몸이 배양액에 담겨 영생을 얻습니다. 이 배양액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리고 배양액에 담기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과 피의 만남이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성립이 안 됩니다. 새언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하고, 죄인이 있어야 돼요. 

지금 제자들과 예수님이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언약의 구성 요소로 미리 만난 거예요. 예수님은 새언약을 아는데, 제자들은 몰라요. 베드로는 피 안에 잠긴다고 생각지 않고, 피 흘리는 예수님이 아닌 멀쩡한 예수님과 자신이 함께 있으면 천국이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과 똑같아요. 

교회 있고, 목사 있고, 내가 있어서 열심히 충성하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려면 달라져야 한다고 했죠. 그럼 내가 알아서 달라지면 될 것 아닙니까? 시키면 순종해서 제가 변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평소에 늘 교인들에게 뭔가를 지시만합니다. 본인이 믿는 예수님을 소개한 적은 없어요.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안 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니까 이것을 하세요.’라고 지시만 합니다. 이것을 교인들이 원하니까 목사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합니다. 지시를 하고 명령을 내리면 교인들은 스스로 고치고 바꾸면서 삽니다. 이것이 납득이 되고 서로 소통이 됩니다. 

술 끊으라고 해서 술 끊었고, 담배 끊으라고 해서 담배 끊었고, 십일조 하라고 해서 십일조 했고, 안식일 지키라고 해서 안식일 지켰고 모든 것을 본인이 해왔단 말이지요. 그리고 성경에 그런 명령들이 있으니까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본인이 잘 모르고 전문가인 목사가 있으니까 목사가 성경을 보고 필요한 것을 지시하면 나는 그 지시에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이런 것을 원하는 교인들이라면 저는 이렇게 설교하겠어요. ‘안개처럼 살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시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세요.’ 그러면 교인들의 반응은 어떻겠어요? ‘그렇게 살면 내가 죽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지금 교인들이 바라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채 영생을 보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심보를 알아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 내가 100배로 갚아 줄게.” 결국 문제는 산 채로 점점 큰 희망을 갖기를 원하는 죄인들의 심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을 죽어야 됩니다.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피는 예수님이 죽어서 흘리는 피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피죠. 그래서 예수님의 피 앞에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 규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새언약을 이루는 요소가 됩니다. 

베드로는 멀쩡한 상태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주님은 베드로를 죄인으로 바꿔야 돼요. 베드로는 자신이 부족한 죄인인줄 알지만 어디까지 가는 죄인인지 본인이 가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새언약에 부합되는 죄인 되기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인 만드는 작업에 예수님이 관여해야 됩니다. 

주님이 말씀을 줘서 말씀 앞에서 본인이 주님 말씀대로 행해보면 행할 수가 없지요. 우리나라 여자 스님이 감독해서 만든 영화 ‘산상수훈’이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어요. 영화 내용이 뭔가 하면, 기독교를 깔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기독교 2,000년 역사가 흘렀지만 아무도 풀어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감독(스님)이 불교의 방법으로 정답을 알았다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안 믿는 가운데도 산상수훈을 실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달리 표현하면, 새언약을 몰라도 산상수훈을 지킬 수 있는 묘책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언약적입니까? 전혀 언약적이 아니죠. 지금 불교는 있음에서 없음의 세계를 분석하고 있어요. 

그런데 복음은 주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에서 피어나요. 주님은 우리가 보기에 사라진 그 세계에서 나타나신 분이에요. 주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경로가 새언약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경로를 ‘언약’이라고 해요. 여기에 관여하신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언약도 모르고 산상수훈을 해석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나타났다가 사라진 분은 언약 관계에서 오신 분이기에 이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의하면 아들의 나라가 아니면 나라가 아닙니다. 저주 받아야 돼요. 이스라엘이 아니면 무조건 저주받아요. 왜냐하면 이스라엘만 아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아들로 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맏아들로 삼아서 맏아들과 아버지의 계약에 의해서 맏아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함인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부름 받은 것은 장차 예수님이 이루실 새언약에 대한 요건으로 부름 받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요일 이런 말을 했어요. ‘피를 뽑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고. 소라는 알맹이만 빼먹고 껍질은 버립니다. 소리 껍질이 알록달록한 것은 문제될 것 없어요. 우리 몸이 아픈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목사님, 제가 성도라고 하면서 마음이 기쁨이 없습니다. 혹시 지옥 백성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이런 말은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갈라지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상관이 없어요. 사람들이 베드로처럼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얽히고설킨 것이 많아요. 조카 결혼식 한다는데 부조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냥 형편대로 하면 되는데, “저들은 우리 결혼식에 얼마나 했지?” “안 왔다고.” “그러면 나도 안 간다.” 왜 이렇게 얽히고설킨 것이 많은지? 

주님은 우리의 얽히고설킨 것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차돈이 죽을 때 흰 피가 나왔다고 해요. 형제를 끊으면 어떤 피가 나옵니까? 흰 피가 나옵니까? 자매를 끊으면 파란 피가 나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무엇을 잘라도 그것은 새언약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너는 나를 죽이는 역할만 하면 되지 네가 무엇을 자르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정글 속을 걸을 때 칼로 나무를 자르면서 길을 만들어 나아가지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내, 남편, 자식을 칼로 자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죽여야 했습니다. 수요일 설교에서 말했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멈춰라.”고 하신 이유는 ‘이삭은 네가 관여할 번제가 아니고 내가 직접 관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죽이든, 아니면 이삭 대신 양을 죽이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필요한 절차입니다. 이삭을 양으로 바꿨다는 것은 양이 이삭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양은 양이 아니라 장차 오실 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라고 했지요. 

주께서 준비하시기에 우리가 준비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뭔가? 주님의 준비하심에 우리자신을 포함시키면 됩니다. 내 인생을 내가 다루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준비를 최적화 시킵니다. 주께서 준비하실 때는 특징이 있어요. 예측 불가입니다. 인간들이 자꾸 자신을 다루니까 주님은 내가 나에게 손을 떼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왜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리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죄를 안 짓겠다는 사람이 죄 의식이 강렬합니다. 천국은 죄 없는 자가 가잖아요. 만약에 천국에 죄 있는 자가 간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지요. 그러면 최소한 죄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 없는 상태에 본인이 본인을 가두어서 깨끗한 자가 되도록 힘쓰겠지요. ‘이정도 목표면 나는 깨끗한 자다.’ 라는 목표가 각자 있는데, 주님은 인간을 더 늘려버립니다. 결국은 다 포기하게 만들어요. “더 이상은 못 따라 가겠습니다.” “내가 그걸 노렸어.” 따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하니까, 주께서 “이래도 좇아  올래?”라고 하면서 인간의 목표치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십니다. 보험을 올리는 것과 똑같아요. 

주님이 내놓는 것은 새언약의 셋트를 위해서 틈을 냅니다. 틈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무엘하 13장을 보겠습니다. 11-12절에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그리고 15절에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기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다말을 사랑해서 동침하자고 한 지 얼마나 지나서 이렇게 미워한 것이지요? 금방이잖아요. 누이를 차지하고 싶어서 과자를 먹고 싶다는 핑계를 만들어 강제로 덮칠 때에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고 했지만, 강제로 강간을 했습니다. 

암논은 이복동생 다말을 사랑했어요. 13장 2절에 보면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고 했어요. 이렇게 사랑한 여동생을 강간한 후에는 즉시로 미워하고 버렸어요. ‘미워하는 미움이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했다’고 했어요.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랑이 다 있어요? 

이게 뭔가 하면, 사랑할 때는 틈(간격)이 있었어요. 그런데 동침한 후에는 간격이 사라졌어요. 자기 밖에 있던 것이 자기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이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는 강력하게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 있었는데, 이제 소유 대상이 없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암논은 결국 누이동생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본인의 욕망 대상을 사랑한 거예요. 

환상이 환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을 임시로 자기 누이동생으로 삼은 거예요. 그런데 누이동생을 차지하고 나니까 환상이 사라진 거예요. 그러니까 “너 때문에 내 꿈이 사라졌잖아.” 라고 하면서 누이동생을 미워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 가문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다윗 가문은 다윗 언약의 영향을 받습니다.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으로 오지요? 다윗의 자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때는 이 세상이 다윗 언약의 장을 형성합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면 예수님이 등장한 모든 세계가 다윗 언약에 준해서 자리를 배정받습니다. 

그러면 다윗으로 인해 형성된 모든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재현됩니다. 암논이 이런 죄악을 범하는데, 암논의 아버지는 다윗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죄가 암논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겁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면, 다른 사람들도 다윗의 자손의 관계로 재정립됩니다. 예수님의 새언약에 의해서. 

모든 것이 언약에 의해서 정리, 정돈 되어야 하거든요. 지금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 정리, 정돈 되는 거예요. 다윗 언약이 완성된 것을 새언약이라고 하니까. 새언약의 내용은 다윗 언약에 준해서 정리, 정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율법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치는 왕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왕가에서 오빠가 누이동생을 범하는 일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암논이 누이동생을 범하는 이 행위가 죄로 등장하려면 어떤 율법이 동원되어야 합니까? 없어요. 만약 암논이 다말과 동침한 후 그를 더욱 더 사랑해서 아내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축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옛날 모세 시대 때는 죄가 아닌 것이 새언약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죄냐 하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규정받아야 돼요. 규정할 때 주시는 말씀이 뭐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니면서 즉흥적으로 하신 말씀과 기적들이 율법적 기능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요. 성경에서는 세상의 의미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둘째는 인간 때문에 생긴 것이고, 셋째는 성경 속의 세상입니다. 성경 속의 세상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이것은 언약적으로 규명한 세상입니다. 예수님 오신 후의 세상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을 어둠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나머지 의미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연과학적 세상관 2)인문과학적 세상관입니다. 자연과학적 세상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세상은 운동과 정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관찰에서 나왔고, 관찰을 눈이 있기에 시작된 겁니다. 보는 것이 믿는 거예요. 보지 않고서는 믿을 것이 없어요. 

내가 믿었다는 말은 뭔가 봤다는 겁니다. 내가 보지 못했다면 남이 본 것도 포함됩니다. 만약 누가 UFO를 봤다면, 앞에서 내가 볼 것도 계산해야 됩니다. 인간의 공포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면, 지금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나를 박살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공포가 됩니다. 

내가 미처 당하지 않은 일을 뉴스 시간을 통해서 만납니다. 경기도 어떤 아파트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 아파트도 불이 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을 보면, 나도 운전 조심해야지.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내 것이 와장창 깨어질까봐 두려운 겁니다. 

목사들은 교인 한 사람 떠나면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설교 하면서도 ‘왜 안 나왔을까?’를 생각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 상처를 받아 안 나온 것인가? 교인들과 싸워서 안 나왔나? 온갖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늘 말썽만 일으키는 분이 오늘 안 나왔다면 오히려 안심이 되지요. 

눈으로 관찰을 하면서 운동과 정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에서 정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봤어요. 그런데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등장해서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지하는 것은 마찰력 때문이다.’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 뭔가 움직일 때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속도와 위치를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이런 공식을 이용해서 로켓이 달에까지 가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이것이 세상이에요. 

우리의 신체는 네 가지 힘이 있어요. 중력, 장력, 약력, 전자기력. 위장의 움직임은 중력에 해당되겠지요. 위에서 내려가야 하니까. 세포는 전자기력 때문에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핵의 플러스, 마이너스에 의해 움직이니까. 장력과 약력은 원자핵과 관련되어 있기에 실재적으로 잘 못 느낍니다. 

과학적으로 이런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2) 인문과학적 세상관이 왜 필요합니까? 

선을 보는데 “남자가 어떻더냐?” “남자의 혈압이 150까지 올라간단다.” 지금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잖아. “내 타입인가?” 이런 말이지요. 이것이 뭔가 하면, 의미입니다. 눈물을 왜 흘리는가? “눈물은 소금끼로 되어 있는데 --” 이렇게 설명하면 안 돼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세상을 과학으로만 생각지 말고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데 의미는 10분 후에 계속합시다. 

(2017. 7. 5. 08:34 녹취 마침)

 서경수 (IP:14.♡.77.183)17-07-14 08:51 
광주 강의(2017. 6. 23) 40-2 

세상에 대해서 과학은 움직이는 것과 정지한 것 둘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원동력은 힘인데, 그 힘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뭡니까? 120가지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과학 몰라서 자살합니까? 부자가 고민하는 것이 과학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잖아요. 과학은 인간의 눈, 코, 입 등의 신체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인간은 신체 외에 미지의 무엇이 있어요. 

이 미지의 무엇이 인간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것을 ‘의미의 세계’라고 합니다. 의미가 뭔가? 혼돈에서 분류가 되면 질서가 생겨요. 그 질서를 의미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문화입니다. 문화의 세계가 의미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전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내 몸을 움직여서 상대방과 부닥친다.’ 이렇게 됩니다. ‘상대방이 강하면 나는 반드시 진다.’ 야구는 뭔가? 투수는 공을 던지고 타자는 친다. 그럼 야구는 왜 합니까? 우리 편이 이겨야 합니다. 류현진이 5회까지 3대 1로 이기고 있으니까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이제 승리 투수 요건이 되었네.”라고 해요. 

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겨야 합니까? 이상하지요? 부자로 살고, 남들 보기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왜 자살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립니까?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체에서 의미를 도출하지 못하면 정신병이 됩니다. 그러면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신체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면 치유가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온다. 또는 종교를 갖는다. 이것은 키가 작아서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의미가 정리가 안 돼서 그래요. 쉽게 말하면 자신이 기대하는 욕망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나오고, 열심히 사회활동 해서 내 욕망에 합치되도록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부 잘해서 법학대학을 갔고, 최종 목표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에 떨어졌고, 이제 사법고시 제도가 폐지되었고, 로스쿨에 가야만 법조인이 되는데 로스쿨은 학비가 너무 비싸서 법조인이 되는 것은 포기하고 9급 공무원 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좋아서 찬치를 벌이는데 왜 이 사람은 만족하지 못합니까? 

자기 욕망에 부합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은 9급 공무원이 목표였고, 자기는  판사가 목표였는데 못하고 9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즐겁지 않은 거예요. 이런 욕망은 누가 집어넣어 준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나에게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서울 법대 들어갔으니까 그 머리로는 9급 공무원을 해서는 안 되고 판사나 검사가 되어야 해.’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부추겨요. 욕망과 현실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욕망을 이뤄 틈이 없어지면 욕망이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욕망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욕망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습니다. 

부부가 매일 싸우다가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은 살맛이 안 나요. 그래서 어떤 여자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먼저 죽거든 당신도 같이 순장해라.”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인간의 욕망 중에는 상대방마저 내 욕망을 위해 적당한 자리에 배치될 때 그 전체가 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은 이렇게 되어야 내 자식답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사윗감은 내가 고른다는 거예요. 세상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편리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은 과학이 아닌 의미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서로의 욕망이 부닥치면서 삽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이에요. 

이런 인간 세계를 하나님은 말씀의 세계로 정리합니다. 말씀의 세계는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세계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만약 주님을 위해 돈을 내놨다면, 돈은 과학적으로 따지면 노동의 대가니까, 내 땀과 수고를 내놓는 거지요. 

이것을 왜 예수님께 내놓지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욕망이 있는 거예요. 그 욕망은 나의 의미가 되겠지요. 예수를 믿으면서 믿는 이유가 있어요.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있어요. 그 의미와 목적은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사람이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미 의미와 욕망의 바다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그 모두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씀의 세계로 바뀌려면 그냥 바뀌지 않고 내 욕망, 내 의미에 의해서 살해당하신 분이 있어야 하고, 그분 앞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때 나의 의미는 예초부터 없었고 세상은 오직 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틈이 있을까요? 내 쪽에서 다가가면 내 욕망 때문에 항상 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나에게 주어지면 나는 완료의 일부로 가담된 상태입니다. 틈이 있으면 나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완료되면 틈이 없습니다. 이때는 완료된 덩어리의 일부로 내가 가담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내가 뭘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자기 의미를 위해 행동합니다. 그런데 뜻대로 안 되지요. 그러면 질문을 바꿔야 돼요. 질문을 바로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질문을 바로 해야 정답이 나와요. 엉뚱한 질문을 하면 정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똑바로 질문하는 것은 정답을 안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정답에 편입된 상태에서만 똑바로 질문할 수 있다고요. 바른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이 맞아요. 

신체에서 의미로 나아가는 것이 치유인데, 그 의미는 우리가 만든 의미가 아니고 주님의 완료된 상태에서 주어진 의미로 나아갈 때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따라서 이 신체가 내가 아는 천국에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어요. 내가 천국 가겠다는 것은 일방적인 나의 의미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가야지.’ 이것 부숴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물리치고 직접 이삭을 다루시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순종했다는 것이 순종이 아님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내가 주님께 순종했다는 것은 예초의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내가 뭘 할까요?”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물음입니다. “제가 독자를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에요. 내가 바치려고 했는데 나를 밀어내신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는 순종이고 그 순종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동원된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이미 주님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감사할 뿐이죠.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출몰했다가 곧장 사라지는데 이것은 나의 기억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기억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기억은 변동되고 한시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내가 나의 의식을 주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7장 14절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지요. 느끼는 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불평을 하면 지옥에 갈 것 같고, 조금만 기쁘면 천국 갈 것 같지요. 변덕스러움이 인간의 주특기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들의 욕망에 맞춰 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의 제자들 모습도 예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31절 봅시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처나 자식이나 남편을 바치면 100배나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는다.’라는 말을 하면 여기에서 인간은 경쟁에 나섭니다. 이것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내 인생을 책임 질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또 새롭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경쟁하고 싶어? 그러면 내가 기준을 제시할 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이것으로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나서다가 주춤하게 되지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나서려고 하겠지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도 주춤하면서 뒤로 처지면 내가 또 그 사람보다 더 뒤로 처져야지요. 주님이 말씀하신 뜻은 ‘이렇게 하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경쟁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피자가 한판 있는데, 3명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당히 3등분을 해서 불평 없이 한 조각씩 나눌까? 우선 먹는 순서를 정하고, 마지막 선택권을 가진 사람이 피자를 자르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마지막 남은 조각을 먹어야 하기에 최대한 정확히 3등분을 해야 본인이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배의 정의’라는 겁니다. 

문제는 소유가 곧바로 인간에게 의미로 전달되지 않아요. 인간은 의미 없이는 못 삽니다. 정확히 3등분을 해서 3명이 한 조각씩 나누면 균등하게 가질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균등은 틈을 막아버립니다. 틈을 막으면 숨이 막혀 못 살아요. 니체는 스스로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왜냐? 천국에 가면 할 일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서 가기 싫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는 피자를 공평하게 나누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더 많은 피자를 먹거나 먹을 수 있는 희망을 걸고 몸 바쳐 살아온 거예요. ‘네 아들 군에 입해해서 고생할 때 내 아들은 공익근무하면서 집에서 출퇴근 했다. 승리했네.’ 이렇게 무엇이든지 내가 남을 이기는 재미가 있어야 삶이 행복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하기에 그게 나에게 희망을 주는 의미가 됩니다. 내가 이미 달성한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왜 산에 오릅니까?’ 물으니까, ‘내려오기 위해서 올라간다.’고 해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왜냐? 그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왜 의미 있는가? 그건 몰라요.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본인이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몰라요. 그런데 왜 사는가? 경쟁 때문에 살아요. 경쟁해서 승리하면 보너스로 이겼다는 의미를 줘요. 그래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31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겼다는 것은 곧 망했다는 뜻이에요. 남에게 이겼다는 것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에게 졌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은 남에게 져서라도 기어이 성공하고 싶은 자는 망한 자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는 결국 이긴 자는 아무도 없고 다 망한 자밖에 없어요. 

에서와 야곱은 둘 다 망했어요. 이 두 사람의 행태가 언약적 요소가 됩니다. 언약이 필름이라면 그 필름을 확대한 것이 세상이에요. 에서와 야곱의 구분이 이 세상의 모든 구분을 만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싸우다가 다 망합니다. 그 싸움에 소위 승자가 되었다고 자부한 자(야곱)와 마주쳐 싸운 분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결국 야곱과 하나님이 싸운 거예요. 이 싸움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에서와 야곱의 싸움에 뛰어든 거예요. 틈을 만들기 위해서 뛰어든 거예요. 야곱은 형을 이겼기에 게임이 끝났다고 봤어요. 그런데 형의 군대가 몰려오니까 야곱은 형을 요리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 자리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했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야곱이 하나님과 싸운 거예요. 그래서 야곱의 이름은 ‘하나님과 싸운 자’입니다. 사람과 싸웠고, 또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싸운 적이 있는 그 내용에 새로운 내용에 맞는 외피로 등장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알맹이는 주님이 언약적으로 관리하고, 바깥은 까불다가 주님의 외피가 되고. 하나님과도 싸우고, 사람과도 싸우고. 왜 싸웠습니까? 내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야곱은 ‘속이는 자’란 의미입니다. 속이는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는 것이지요.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 ‘나중 된 자’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잘났다고 하기에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인데, 그 싫어하는 자리를 예수님은 자신이 출몰하는 맨홀 뚜껑으로 사용하셨어요. 그러기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같이 망하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복음의 생산] 머리말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처음부터 재수 없는 곳을 찾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재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해요. 교회에 가면서 ‘어떤 행운이 찾아올까?’ 이런 기대를 하면서 가면 안 되고, 어디를 가든지 ‘내가 진짜 망한 자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가 주님이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채찍 소리가 들리는 곳”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고, 기도로 무장하고, 말씀도 상시 복용하면서 신앙의 정상에 서려고 해요. 

재수 없는 곳에서 살려는 생각이 왜 안 들까요? 암논이 다말을 차지하고 버리는 이 노선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노선에 있어야 합니다. 암논은 내가 욕망하는 것을 이루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복 여동생을 취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욕망이 있는지 본인은 몰라요. 

사람은 욕망하면서 그 이유를 몰라요. 인간은 유령과 같이 살아요. 내 속에 귀신이 있어요. 이걸 과학적으로는 규명하지 못해요. 그래서 과학적인 세상은 실용적 목적 외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과학자가 행복합니까? 아니죠. 도박을 왜 합니까? 재미가 있어서 해요. 과학은 왜 합니까?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만들어서 먹는 것이 직업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직업이 다양한데, 이것은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겁니다. 어떤 직종에 종사해도 모두 농산물을 먹고 살아요. 예술, 과학, 문학을 하는 사람도 비가 안 오면 끝입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살하지 않고 술과 담배, 도박으로 욕망을 해소해요. 

술, 담배를 끊었다고 신자가 아니고 삶의 의미를 알아야 돼요. 삶의 의미도 모르면서 술, 담배 끊었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닙니다. 그동안 담배를 왜 피웠으며, 술은 왜 마셨는지 알아야 됩니다. 실패자로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한 일이에요. 술을 마시면 객기를 부리지요. 객기는 허풍이잖아요. 

허풍, 허세를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그래요. 예수 믿는다고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술은 안마시지만 부흥회는 가요. 왜 갑니까? 홧병 때문에 가요. 사람은 최후 승자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배양액에 식물의 씨앗을 뿌리듯이, 배양액은 예수님의 피고, 그곳에 담긴 씨앗은 우리 죄의 몸입니다. 이것이 합쳐져야 언약이 완성되고 새생명이 탄생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피 없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32-34절 봅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시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들은 모르지만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너희들이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다.’라는 것이고, 이것을 주님이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핍박하도록 주님께서 분위기를 몰아가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그럼 나는 잘못이 없네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려들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성도이고,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하시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지’ 이렇게 나오면 이 사람은 관심사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성도의 모든 일이 주님과 결부되어 있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주님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무가치한 일이 아니고 고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 의미이기 때문에 고귀했는데 이제 주님이 구성한 일이기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 좌절하는 것은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좌절하면 좌절로 끝나지 않아요. 그 후에 마귀와 결탁해서 실패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와서 주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단속하는 일에 전력을 다합니다. 

‘얼마나 헌금을 하면 실패한 것이 회복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목사들이 그동안 교인들을 속여 왔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당신들이 죄를 회개하면 당신의 소원을 주님이 들어주실 것입니다.”라는 소리를 설교시간에 늘 합니다. 거기에 적합한 성경이 욥의 이야기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았기에 나중에 많은 재산과 함께 아들 7명, 딸 3명을 받았잖아.’라고 합니다. 정말 욥기의 내용이 이런 것입니까? 욥이 나중에 더 큰 복을 받기 위해 고난 받기를 요구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끝에 있는 성공이 좋아서 욥의 고난을 자처하려 합니다. 

공부도 잘 못하는 고3 아들에게 갑자기 신학교에 가라고 떠밀면서 노리는 것이 있어요. 해피 앤딩을 노리는 거지요. ‘마지막을 생각하면 이 정도 고생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먼저 된 자가 승자다’라는 기존의 자기 의미에 빠져 있는 거지요.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준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이렇게 파탄이 나는구나.’ 희망을 기대했는데 주님 말씀을 들어보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끝에 보세요.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의 의미는,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할 때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후에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셔서 영생을 주셨고, 그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남은 인생을 우리가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실패하는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미 통장에 출연료 입금되었고, 그 후에 남은 인생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겁니다. 

이 연기는 어떤 역할입니까? 주인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아이를 쥐어박는 연기, 내 귀한 딸이 문제투성이 집안에 시집가는 연기, 남편이 늦게 귀가하고 말썽을 부리는 연기, 아침부터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연기, 심지어 우울증 걸리는 연기. 그러나 이 모두는 환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환상의 세상인데 이것이 진정한 현실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성공해야 구원 받는 줄 알았습니다. 다 꿈이고 주님이 만들어주신 무대인 것을 늘 깨달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