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IP:122.♡.183.206) | 17-06-29 23:50 |
대전-27강 사무엘상 8장 1절(부름)20170627-이 근호 목사
1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사무엘은 하나님의 신을 받았죠. 사무엘이 늙으매 그 뒤에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자식들이 사무엘 같지를 않아요.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아요. 이거는 성신의 효과가 자식에게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전달되지를 않아요. 아버지가 훌륭하다고 해서 자식이 훌륭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은 이미 혈육을 완전히 개무시 하고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혈육을 개무시 해요. 그런데 성신 받은 자는 사무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무엘은 성신 받았다, 이러면 안 되고 사무엘을 둘로 나누어야 해요. 사무엘은 혈육이 정상이다. 이게 정상이에요. 근데 그동안 일한 것은 성신의 덕분이죠.
성신의 덕분이니까 사무엘을 인간이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대단하다!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을 훌륭하다,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상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인간들이, 같은 쓰레기 속에서 좀 괜찮은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는 겁니다. 같은 쓰레기인데, 우리보다 좀 더 나은 쓰레기다 싶으면 이렇게 내놓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영웅이 등장한다면, 그 영웅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구원해 줄 어떤 영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역시 쓰레기니까, 인간이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인간이 요청한 그들을 받지를 않아요. 그게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에게 지도자를 주시옵소서! 사무엘 같은 지도자를 주시옵소서!”라고 그들이, 인간 쪽에서 먼저 요청한다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버리느냐 하면 같은 인간은 옆에 있기 때문에 주고받고, 주고받는 게 가능한데, 하나님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처분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쉽다고 해서 쪼르르 쫓아오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버거운 거예요.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거예요. 감당하기 힘들면 인간이 유지하고 있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할 때, 아쉬울 때 보험처럼 전화 한 통이면 쪼르르 와가지고 도와주고 이러면 좋겠는데, 인간이 요구한 영역밖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맘대로 찾아오면 찾아오고 가면 가고, 우리 인간 말을 안 들어요. 우리 인간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짜증스러운 거죠. 하나님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는 거죠. 하나님만 생각하면. 제물은 받아 챙겨놓고 막상 어려울 때는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안 도와준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부담이 되는 것은 귀찮은 거예요. 잘라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잘라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라낸다는 것은 곧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을 안 듣겠다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꾸려가겠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간섭받고, 누구한테 주시당하고, 누구한테 심판당하고, 하는 그런 것은 내 자유에 침해하는 걸로 생각해서, 아예 당신은 당신, 나는 나, 따로 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 아들들이 말을 안 들어요. 3절에 나와 있죠.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게 뭐냐 하면 원래부터 하나님이 도와주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멋져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철수하게 되면 인간본성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무엘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사무엘이 늙고 죽고 난 뒤에는 둘로 나누어져요.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생각이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게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있는 이유가 버겁고 힘든 이유가 있어요.
젊은 애들이 오토바이 타잖아요. 오토바이를 고를 때, 마법이 들어가 있는 오토바이로 잘못 골랐어요. 오토바이를 탔는데, 뭔가 귀신 들린 오토바이를 골랐다고 칩시다. 그럼 보통 오토바이는 뭐냐 하면 내가 타고 싶을 때 조종하면 가고 내가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데, 동화책이나 만화책에 이 마법 같은 오토바이가 있다면, 이거는 누가 주인인지 누가 오토바인지가 구분이 안 되고, 타고 싶을 때 꿈쩍도 않고, 내리고 싶을 때 못 내린다면 오토바이를 얼마나 팔고 싶겠어요? 내 돈 주고 내가 샀는데 오히려 내가 그 오토바이 종노릇하고 노예가 된다면 이런 낭패가 어디에 있겠어요?
제가 오토바이를 예로 든 이유가 모든 인간의 육체가 인간에게는 오토바이 같은 것입니다. 마법 걸린 오토바이에요. 인간이 자기육체를 골라잡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키가 얼마고, 우리 가정이 어떻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오토바이를 탔는데, 그 오토바이를 타면서 생겨난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아를 생각하면서 남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의 끓어오르는 욕구와 욕망과 우울함과 성질남, 화딱지...이런 것들은 성난 오토바이를 다루는 것처럼 우리가 주인노릇을 하지를 못해요. 평생 그렇게 끌려갑니다. 어른들이 옛날에 뭐 교수했느니, 뭐 인테리어기술자니, 뭐 고급공무원이니, 그렇게 했어도 나중에 치매 걸려 경계선 가까이 가보면요.
자존심만 있고, 몸은 개판이고, 몸은 안 따라주고, 자식들 앞에서는 품위유지하고 싶고, 돈은 없고, 지저분하게 살기는 싫고, 그러면서도 옛날 고전선비기질은 남아있고, “이리 오너라!”하는 기질은 남아있고, 돈은 하나도 없고. 부모자식 간에 돈 없으면 그거는 선비고 뭐고 없습니다. 돈은 꽉 쥐고 있어야 돼요. 돈이 없는 순간 천덕꾸러기기 됩니다. 뭐 아버지고 뭐고 없어요. 과거는 필요 없어요.
그러니 그 자괴감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자괴감이? 젊을 때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했습니다. 절제할 것 절제하고 자기관리 철저히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게, 나는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직생활 하면서 쓸데없는 뇌물 받지 않고, 자식들 보기에 아버지다운 모습으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아주 장렬하게 희생하듯이 그렇게 보여줬는데, 근데 지금은 지 몸도 하나 간수 못해가지고.....,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거는 너무 심하죠. <미친 오토바이>라고. 인간은 미친 오토바이에요. 그리고 오토바이를 내가 골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남자 되고 싶은데 여자 되고, 여자 되고 싶은데 남자 되고, 이렇게 골라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미친 오토바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자꾸 내 육체가 문제라고 하는데, 내 육체가 문제가 아니고, 이 자아가 문제에요. 자아가.
이 자아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육체뿐인데 육체에서 자아로 올 때, 우리는 곱게 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뭔가 관여하는 어두운 힘이 있어요. 어두운 힘. 암흑이죠. 어떤 어두운 힘이 있는데, 이 힘을 성경대로 하면 욕심, 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욕망. 욕심이 있습니다. 항상 정돈되어 있는데 찢어버리는 것. 정돈된 내 마음을 찢어버리는 것.
날씨가 구름이 좀 끼었다 하면 내가 아무리 견뎌도 우울해지는 거예요. 갑자기 슬퍼지는 것. 이유도 몰라요. 행복 하고 싶은데, 행복하기 위해서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는. 근본적으로 이 어두운 힘이 있다는 것이, 이게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하면 지금 형편에 내가 자족하면서 ‘이거는 행복이다. 내가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돼!’라고 마음먹더라도 그 마음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이정도면 만족해.’라고 하는데, 뭔가 그 순간에 ‘아니야. 뭐가 더 있을 거야.’라는 것에 마음이 휘감기게 돼요. 우리가. 자식이 와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엄마! 또 전교에서 1등 했어.”라고 해요.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엄마! 또 1등 했어.” “그래, 수고했다. 잘했다. 그러니까 내 자식이지.”라고 막 기뻐해야 하는데, 그 순간 딱 듣자마자 ‘기껏 이게 내 행복의 다야? 기쁨이 꼭 이런 것인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게 다일까? 뭔가 더 남아있을 것 같아요.
이걸 가지고 “욕망의 잉여”이라고 합니다. 여분의 것. 근데 그 여분의 것은 이미 아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지점에 도달되게 되면, 찔끔찔끔 줄 생각도 안 한 그 잉여부분이 딱 그 지점에 도달되게 되면 이게 나로 하여금 지금의 행복을 와장창 다 깨고 완전히 우울로 바꿔버려요. “엄마! 이번에 전교 1등 했어.” “그래. 수고했어. 참 기뻐.” 근데 이게 몇 시간 가지를 않아요. ‘글쎄, 이것이 다인가? 결국 내 사는 마지막 기쁨이 이걸로 끝인가? 아니야. 분명히 더 있을 거야.’
그럼 자식이 “엄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야. 안 좋아하기는 내가 왜 안 좋아해? 좋아하지.” “근데 별로인 것 같아?” “아니야. 잘했어. 수고했어. 다음에도 1등 빼앗기지 말고.” 그런데 이 미친 오토바이가 또 나라는 속도를 높이네. 나는 그걸 뒤따라가기 위해서 헉헉거리며 허겁지겁 숨이 막히고. 근데 이게 집에 있으나 교회가나 마찬가지에요. 신앙생활 한다고 이런 것을 못 이깁니다. 미친 오토바이가 교회에 간다고 멀쩡합니까? 안 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평생을 어떤 괴물한테 항상 당하고만 사는 존재가 돼요. 끌려가는. 끌려가고 당하고만 사는 것. 이걸 어렵게 말하면 일치를 원하지만 다시 잉여, 여분의 것, 나머지가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일치를 깨버리고 방해하고 또 끌어당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한테 많은 혜택을 입었잖아요. 입었기 때문에 사무엘한테 늘 감사하고 있어요.
근데 사무엘한테 혜택을 입었다는 그 단계, 계단이 있거든요. 그 단계에 딱 들어서니까, 그 다음부터는 사무엘의 그 자식은 적어도 사무엘보다는 우리에게 더 많은 여분의 것을 줘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더! 더! 더! 미친 오토바이입니다. 내가 오토바이를 다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다 헛방이라고,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종교생활, 신앙생활 다 헛방이에요. 아무 소용없어요. 뭐 신앙생활 한다고, 누가 뭐 도 닦았다고, 행복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한 구석에는 텅 빈 마음이 있어요. 낭만을 위해서, 뭔가 낭만을 위한 여분의 것이 또 있어요. 어딘가 모르게 텅 빈 그 구석에 의해서 항구의 외딴 다방에 앉아가지고 쌍화차 주문해서 마시고 있는 겁니다. 짙게 화장한 마담하고 쓸데없는 한담(閑談, 심심풀이로 이야기를 나눔. 또는 그러한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이 여분의 것 앞에서 우리가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항상 덜 떨어진 인간, 내 신체가 발휘하는 욕망에 비해서 나는 항상 뒤따라가는 거예요. 형이 자전거 타고 달리면 동생은 “형! 같이 가!”하고 뒤따라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누구의 동생인데, 그 놈의 형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사실. 미지의 X에요. 미지의 X.
평생을 그렇게 끌려가듯이 사는 거예요. 미지의 X에게. “형아!” 하고 같이 가자고 하는데, 형은 계속 앞장서 가요. 달그림자처럼. 따라가면 저만치 앞서가요.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종교라는 것이 소용없다고 했는데 그럼 성경은 왜 봅니까? 성경은 그 미지의 X가 있잖아요. 우리를 평생 괴롭히는 욕망. 욕망을 가운데 두고 하나님과 인간이 이렇게 대치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위에 계시면 가운데 X가 있고 아래에 인간이 있고.
근데 교회에 와서는 이 X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X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거예요. 이걸 중보자라고 보는 거예요. 중보자. 나의 모든 괴로움과 소망은 하나님 사이에 오신 중보자에게 기도하면 우리의 모든 행복과 행운이 주어진다. 중보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진짜 예수 그리스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왔어요. 제가 지금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죠. 진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쪽에서 왔다고요. 이걸 사무엘에서 보면, 사무엘에게는 성신이 되는 겁니다. 성신은 하나님 쪽에서 왔어요. 하나님 쪽에서 왔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 모든 것은 X한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예요. 여기 X를 메우기 위해서 인간이 신을 찾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우상 삼위일체. 우상 예수. 우상 하나님. 우상 성령.
인간이 자기 원하는 그 잉여를, 여분의 것을 메우고자, 신의 은혜와 은총으로 메우고자, 그래서 이제는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내가 처분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주인공으로 내가 유지하기 위해서, 미진한 것을 하나님에게 채움 받고자 찾는 그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입니다. 금송아지.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질문을 해봐야 해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난 뒤에 백성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부지런하게 움직였어요. 움직일 때, 그들은 미지의 X를 위해서 움직인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미친 오토바이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뭐라도 해야 해요. 뭐라도.
나이 60에 퇴직했다. 퇴직하고 난 뒤에 뭐라고 합니까? “이제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두 번 다시 일하나 봐라.”라고 이렇게 나오거든요. 김을수 집사님처럼. 월요일에 퇴직했거든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거예요. 이능우 집사님이 아무것도 안 한다고 주장하다가 3개월만인가, 6개월 만에 다시 들어갔어요. 아무것도 안한다? 인간은요, 절대로 아무것도 안 할 위인이 아니에요. 미지의 X가, 그 미친 오토바이가 인간을 가만두지 않는다니까요. “형님아! 어디가?” 하고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따라가게. 등산가고 놀러가고 백날 해봐야, 한 달 내내 가면 지겨워서 못해요.
뭔가 나의 나다움을 가족들에게, “이 아빠 안 죽었어.”라는 객기, 오기, “아빠 봐! 아빠 끝까지 옛날 아빠잖아. 지속되잖아? 그 동일성이. 그때 존경받았으면 여전히 존경받는 것이 유지돼야 돼. 포에버,FOREVER! 영원히!” 아빠가 뭔가 그게 하고 싶은 거예요. 한 6개월 이래 놀고. 딸이 바깥에 가서 말아먹고, 지 처갓집 말아먹고, 노래방해서 말아먹고, 하는 족족 말아먹고.
지난 1년 동안 1억 투자해서 망한 업체가 14,000개나 돼요. 1억 투자해서. 우리 동네에서 가게 세우면 말리고 싶어요. 안 되는 거 알아요. 분명히. 그런데 양품점하고 식당하고, 하거든요. 내 돈 같으면 말리는데 남의 돈이니까 그냥 있는데. 왜 하느냐,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집에서 놀면 뭐합니까? 각 집마다 미친 오토바이가 다 있는 거예요. 아내는 빨리 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하지. 나가서 뭐 할 건데? 탑골공원이나 그런 것은 서울에 있지, 대전에 그런 데가 있습니까?
우상은, 금송아지를 섬겼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섬긴 거예요. 자기 자신을. 여기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이미 내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이 바깥으로 발현되고 표현된 거예요. 미지의 X를 실체화시킨 겁니다. 미지의 X가 안 보이니까 답답한 거예요. 그러니까 미지의 X를 내 마음에 들도록 내가 손질하는 겁니다. 목각하는 것처럼. 쇠와 동과 나무를 깎아 만든 이런 것처럼. 그 깎아 만든 것이 퇴직하고 난 뒤에 파리바케트에요. 그게.
여기의 X, 우상은, 진짜 하나님은 내가 요청해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버거워요. 우리가 감당을 못한다니까요. 감당을. 가족끼리 살다가 촌에서 시어머니 한 번 와보세요. 감당이 안 되는 이유가 남편은 내가 골랐지만 시어머니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잖아요. 딸 셋 있고 방 두 개에서 사는데, 남편이 지 맘대로 결정해가지고, “어머니 내가 모신다.” 그것도 6남매 막내아들이 와서 그러니까 난리가 났잖아요. EBS에 나와요. 이주민의 고부갈등, 그런 게 나와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못 견뎌서 다시 예산인가로 내려갔어요.
그런데 그 남편은 아내한테 허락도 없이, 아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고 외국인이거든요. 아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했느냐? 그 남편, 아내, 그 미친 오토바이가, 어머니한테 효도하는 그게 미친 오토바이라니까요. 나는 자식으로서의 자기의 정당성, 뭔가 효도를 해야 하는데 미진해. 효도를 못했다는 그 아픔이 있는 거예요. 그걸 부모님을 모심으로써, 그 아픔을 메워줌으로써 나는 온전하게 되고, 나는 나답게 행복한 나, 나는 누구 앞에 큰소리 칠 수 있는 나, 내 인생은 내가 주인이다, 라고 이제는 외칠 수 있는 나를 만드는데,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 어머니는 뭐냐, 아들이 자기우상 섬기는데 재료로 끌어당긴 거예요. 빌미로 끌려 들어온 거예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무 탓하지 마세요. 인생 뭐 있어요? 인간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기존교회에서 행함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 각자 신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다 다르고 예수가 다 다르고 다 달라요. 각자 우상이니까.
그 우상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우상이고, 나하고 대화가 되는 우상이고, 내가 조절할 수 있고, 줬다, 뺏었다, 밀당 하는 우상을 원하는 거예요. 그럼 그 우상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면 되는가, 자기 행함을 집어넣으면 되죠. 어떻게? 십일조 받아 쳐 묵고, 주일성수 받아 쳐 묵고, 선교했다 하면 칭찬해주고, 봉사하면 이쁘다고 30배 복 주고. 그런 내용으로 채워진 예수를 사람들은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섬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예수 안에는 자기 잘남을 흔쾌히, 흔쾌히 받아줘 가지고 복주고자 이미 계약이 성립된 거예요. 계약이. 계약이 뭐냐 하면 일반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너와 나 계약할 때 내 행함 집어넣고 네 행함 집어넣고, 그렇게 계약하잖아요. 하나님도 계약을 그렇게 하는 줄 알아요.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 집어넣고, 하나님이 착하다, 복 줄게, 라는 약속 집어넣으면 그게 계약이 성립이 됩니까? 그렇게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아는 계약은요, 예수님의 피고 예수님의 찢긴 살이에요. 제가 알기에는 그래요. 피가 예수님이 자살해서 낸 피가 아닙니다. 우리가 떠밀어서, 밀쳐서 죽였던 피에요. 그게. 그 피 안에 뭐가 있느냐, 니들의 가짜 우상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 증거물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과 우리가 통하는 계약, 언약이라니까요. 십자가 복음이에요.
이렇게 복음을 전해도, “그래도 십일조 해야 안 됩니까?” 라고, “그래도 주일성수는 해야죠?”라고 자꾸 이런 식으로 엉뚱한 질문,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질문이라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자의식 범위를 못 벗어나요. 초등학교 1학년이 삼각함수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답답해서 하는 겁니다. 그 답답하다는 말은 내가 구축하고 있는 자의식의 퍼즐이 잘 안 맞는다는 거예요. 퍼즐이.
제가 오후설교에서 했죠. 계란껍질은 깨지라고 있는 거라고 했죠. 이 우상이 깨져야 돼요. 우상이. 우상이 깨져야 된다고요. 미친 오토바이로 끌려와놓고는 하나님보고 이거 처리하라는 거예요. 미친 오토바이로 끌려와서는. 우리 신체를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이게 럭비공 같아서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동그란 것 같으면 예상이 되겠는데, 럭비공은 같은 우리는 절대로 예상이 안 됩니다.
주일 낮에도 그런 예를 들었지만, 남편하고 처갓집에 가서 장모님을 섬길 때, 남편이 시키는 대로 다 해요. 엄마 앞에서는 친밀한 부부처럼 온갖 연기를 다 해놓고는, 이제 친정 문 나오면서부터 잔소리가 시작이 됩니다. 당신은 왜 일을 해치우는 식으로 왜 건성으로 하느냐는 겁니다. 뭐냐고 물으면, 그 말투가 뭐냐는 거예요. 말투가. 진정성 있게 해주라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보세요. 남자의 진정성하고 여자의 진정성하고 달라요. 왜? 신체가 다르기 때문에, 둘 다 미친 오토바이기 때문에, 같은 오토바이 아니에요. 남편은 최선을 다했는데, 아내는 자기의 뜻에 영 못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영원히 너는 너고 나는 나에요.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니하고 나하고 어떻게 한 몸이 됩니까? 나는 나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죠.
성경을 보는 이유는 바로, 우리는 자꾸 여기에서 신이라는 것이 우상인줄 몰라요. 그냥 신은 다 같은 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우상인줄 모르고. 그래서 자꾸 좇아가면서, 그 신을 향하여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쏟아내거든요. 그 행위가 신 앞에서 어떻게 돼요? 뭉쳐지고, 뭉쳐지고, 자꾸 뭉쳐지겠죠. 그래서 옆에 사람이 내가 이렇게 종교생활, 신앙생활 한 어떤 결과물을 비난하고 그러면 우리는 왈칵 화가 나버리는 거예요. 이런 신을 만드는데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것에 흠집을 내버리면 이거는 나 자신에 대한 공격이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우상을 깨지 못하기 때문에 방법이 있어요.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을 또 보냅니다. 보내게 되면, 이 덩치, 자신의 행위가 뭉쳐진 것에 하나님이 보낸 성신의 사람이 깔리게 만들어요. 피를 보게 만들어요. 피를 보게 만들어놓고, 그리고 그들이 한 모든 계획은 완전히 파멸시키고 무산시키고 맙니다. 완전히 다 깨트려버려요.
내가 만든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의 누에고치 안에서 포근하게 안고 자는 이 우상적인 현실상을, 주께서는 고난 받은 분을 침투를 시켜서 완전히 깨트려버립니다. 계란이 껍질을 깨듯이 깨질 때, 인간의 망상들이 다 깨지면서 시커먼 본래의 미친 오토바이에 올라타 있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죠.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없기 때문에 그때그때 성급하게 새롭게 조립되고 조작되는 겁니다. 그 현장에서 계속 조립되는 겁니다.
그럼 어제하고 오늘은 왜 고요한가? 오늘의 조립된 자아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어제의 자아가 오늘의 자아와 일치된다고 내가 재편집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재편집에. 그럼 그것이 자기한테는 어제하고 오늘이 동일하지만, 그것을 감시하는 눈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이웃과 가족과 친구, 타인의 시선들이에요. 남들은 알아요. 니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는데, 본인만이 몰라요. 본인만이.
자기는 한결같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절대로 한결같지 않아요. 가만히 따져보세요. 절대로 한결같지 않습니다. 갈수록 성질이 더 더러워져요. 갈수록 예민해지고 민감해지고 성질이 더러워져요. 졸혼이 왜 괜히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이라고 여길 때, 이거는 에로스 사랑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정으로 산다고 했죠. 앞에 하나 더 붙이세요. (우)정. 결국 부부는 우정으로 사는 겁니다. 우정인데, 이 우정이 무의미한 게 아니에요.
우정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랑을 하게 되면, 한쪽이 죽는다는 것은 차라리 나도 따라 죽겠다고 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 한 몸 된 의식이에요. 비장한 각오로. 하지만 우정은 상대방이 미리 부재하고 내 곁에 당신이 결손, 없다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살아요. 미리 각오하고.
“당신이 떠난 후에는 연금만 남는다.” 뭐 이런 식이죠. 우정은 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는 연금만 남는 것이죠. 당신이 떠난 빈자리에 연금만 주어지는 것이죠. 살아 있을 때, 빨리 빌딩이라도 자기 이름으로 옮겨놔야 해요. 왜냐하면 친구사이기 때문에.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수월치 않다면, 이 계획이 들통이 났다면, 졸혼이죠. 길게 살아봐야 소용없는.
이러한 우정의 관계가 부부뿐만이 아닙니다. 자식과의 관계에도 됩니다. 오늘 본문처럼. 자식을 볼 때, 처음에 애 낳을 때는 애가 없으면 못 살아요. 에로스죠. 하지만 나중에는 자식이 나를 떠난다는 것. 언젠가는 자기 색시만나고, 자기 남편 만나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부모하고 한 몸 된 것을 떠난다. 이것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죠. 그것을 부모는 각오를 해줘야 합니다. 각오를 해줘야 해요. 각자 자기들 미친 오토바이를 타고 가든 말든 해야 돼요.
이 각오를 했을 때는 저쪽에서 이쪽을 뜯어먹으려고 달라 든다 말이죠. 자식이 오게 되면 자식 앞에서 돈 있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따로 이것은 넘보지 못하도록 조치를 다 해줘야 해요. 어차피 인간은 남의 영혼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여력이 없어요. 남의 영혼. 아무리 자식한테 퍼줘도 자식은 그게 당연한 줄 알고 고마워할 줄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내 욕망도 다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보여주기 위해서, 사무엘이 떠난 후에는 본래 그들이 여망했고, 본래 미친 오토바이들이 부르릉~하면서 노렸던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제는 우리가 다룰 수 있고 우리가 처분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걸 사실은 사무엘 자식한테 요구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 사무엘 자식들은, 여기 3절에 보면 자식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행위를 따르지 않고 뒤에 뭐가 나오는데요,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급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뇌물을 받았다 이 말이거든요.
왜? 성신이 사무엘로 끝나버립니까? 그럼 아버지가 믿음이 있다면 자식들이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깁니까? 교회는 나와 주죠. 그래야 아버지가 갖고 있는 재산을 자기가 아주 공손하게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전혀 그거 아닙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유전적으로 전달된다든지, 상속될 수 있고, 세습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믿음이 자식한테 전달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버지 자체가 성신이 올 자격이 못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한테 만약에 성령이 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권한이지, 아버지의 권한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그 아버지의 자식인데요?” 이렇게 나서면 안 돼요.
그러면 아버지한테 믿음 주고 나한테는 믿음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 그게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줄 자 에게는 주고 안 줄 자 에게는 안 줍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이 싫은 거예요. 나는 살고 싶은데, 나는 구원받고 싶은데, 왜 남들한테 주는 믿음을 왜 나한테는 안주냐 이 말이죠. 그렇게 하면 내 인생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완전히 빼앗기잖아요. 근데 빼앗기면 되잖아요.
이게 지금 2000년 기독교의 제일 큰 문제입니다. 주도권을 주님한테 빼앗기는 것이 싫은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무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예수 믿으면서도 내 인생 주도권을 내가 꼭 쥐어야 내 마음이 편한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미 복음에서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마귀가 들어있는 거예요. 근데 그 이야기는 제발하지마세요. 제발. 그 말만큼은 제발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나는 내 관리가 철저하기 때문에, 마귀 안 오도록 성경보고 기도했기 때문에, 마귀가 나한테 올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너무 차분하고 바르게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한테 전적으로 복종이 되고, 주님이 주신 이 인생을 감사함으로 받기가 싫은 거예요. “이거 주님이 주셨지만, 아닙니다. 이걸로는 내가 성이 안 찹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으니까 더, 더 주시옵소서.”라고 이유 없이 주님의 조치에 대해서 강력한 거부의사를 보여주는데, 그 의사가 뭐냐 하면 이런 하나님보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교회 찾아가고, 그런 설교 찾고.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설교. 내가 잘한다, 잘한다, 라고 희망을 북돋아주는 설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복음. 그거는 저주 받을 복음인데, 저주 받는 그거는 나중문제고, 지금 당장 나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껍데기를 벗기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벗기지 말라고 담요에다가 솜이불 덮고 계속 겹친 데다 또 겹치고 겹치면서 자기 자신은, 미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자기 자신은 안 들키기를 원하는 겁니다. 원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힘이 더 센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덮은 솜이불 뜯어내고, 담요 뜯어내고, 다 뜯어내고,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니보고 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상하죠. 뭔가 해야 된다는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악마의 음성인데, 진짜 주님은 하라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어요. 그리고 찾아오시는 분은 주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오늘 첫째 강의의 진짜 제목입니다. “부름” 정월대보름 부럼 말고. 불러준다. 콜링,calling. 불러주시는 거예요. 불러주실 때, 어떻게 부르느냐, 죄인 된 자를 부르는 겁니다. 실패자를 불러주시는 거예요.
그게 에스겔에 보면 나오는데, 한 번 찾아봅시다. 제가 자신이 없는데요. 제가 점점 미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그래요. 하여튼 에스겔 13장 전체다가 뭐냐 하면, 그들은 내가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이야기에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재앙을 받고, 에스겔 14장 23절을 읽어보세요.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볼 때에 그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내릴 때에, 이것이 그 당시에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거든요.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섬겼어요. 적들이 왔을 때에 마르둑 신이 오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말할 것은 마르둑 신이라고 할 때, 이것을 여호와로 커버하는 거예요. 여호와로 이기고자, 요새 이야기로 하면, “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에요.
그런데 누가 이기느냐 하면 바로 마르둑 신, 바벨론 신이 이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완전히 여호와 믿는 것으로 멸망당해요. 그러면 그들은 여호와 믿음이 아님을 완전히 폭로 당한 게 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에스겔 16장 63절 보세요.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거든요. 다 행한 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구원해주고 이야기를 시작해요. 근데 우리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말을 건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복 주겠습니까? 저렇게 하시면 복주겠습니까?”라고 자꾸 우리가 말을 하는데, 주께서는 그런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세리처럼,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스스로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하신 자의 모습입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이 말이에요. “어쩔 수가 없었군요.” 내가 이 집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 키를 이 만큼 크게 한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이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이미 주도권은, 전에는 주도권을 주님께 억지로 주는 척 했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주도권이 주님한테 넘어간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넘어간 것에 대해서. 이제는 콩 내놔라, 팥 내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라 하는 것은 주께서 기도를 시작할 때만 기도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시작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개입이 돼야 기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것은 넋두리에 지나지 않고, 다 쓸데없는 말이에요. 쓸데없는 말. 주님의 일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거든요. 복음과 관련되어서 니가 결과적으로 구원되었다는 그 소식통을, 우리에게 전달하면서 그때부터 우리의 기도는 시작됩니다.
어떻게? “주께서 이렇게 피와 살로 새 언약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따로 이 욕망과 이 우울증을 회복하겠다고 쓸데없이 내 만족을 위해서 했던 이 것이 다 헛짓입니다.”라는 말로 진정성 있는 기도가 펼쳐지는 거예요. 이것도 부끄럽고, 저것도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모든 게 다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에서 자기를 칭찬해주고,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고, 위로해주고 하는 많은 사람들, 그게 위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그걸 간절히 구하지만, 만약에 주위 사람들이 다 칭찬해주게 되면 이제 그것도 시시해요.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그것도 짜증나요. 왜냐하면 없을 때는 그것을 마저 채워주면 굉장히 위로가 될 것 같은데, 두 번, 세 번 위로가 오게 되면 식상하다고 하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아내들이 남편들한테 경상도 남자들처럼 사랑한다고 말도 잘 안하고 무뚝뚝하게 하냐고 해서 “그래? 그럼 내가 사랑해 줄게.”라고 하면, “그만해라! 됐다. 이제는 사랑도 귀찮다.”라고 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미지의 X가 자꾸 나로 하여금, 인생이 자꾸 허해지고, 허한 곳으로 몰아세우기 때문에 그래요. 그때 되면 우리는 온갖 괜찮은 행함을 동원해가지고 빨리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빌고 헌금하는데,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정작 해봐야 이게 전부 누구 일이냐 하면 내 일이 되거든요. 내 일이.
그래서 오늘 본문 사무엘상 8장을 보면 너희들이 왕을 구하는 것이 누구의 일이다? 내 일이 아니고, 너희들이 각 이스라엘을 너희들 나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런 수작을 벌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차버린 게 된다 이 말이죠. 이제는 하나님한테 다룸 받기가 싫고, 내 나라기 때문에, 내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관리하고 우리들이 다루겠다는 거예요. 이게 마음이 편해요.
그러면, 우리 마음 편한 대로 한다면 절대로 예수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마음이 편한데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우상이고 가짜입니다.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정말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주님 앞에 노골적으로 다 노출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아무리 나에게 착한 일을 뒤집어씌워도, 절대로 나는 착한 존재가 원래부터 안 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는 제대로 건강검진 받아가지고 딱 실체를 알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인도하는 주의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기의 우상 앞에 절하지 않죠.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나를 날마다 인도하시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한 나는, 우상이 안 되지만,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을 끌어당기는 것은 백퍼센트 우상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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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89강 마태복음 23장 33절(선지자 체험)20170627-이 근호 목사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태복음 23장 이 자체를 목사들이 설교를 하는데 굉장히 버거워 해요. 왜냐하면 여기 33절에 독사의 새끼들아! 뱀들아! 할 때, 여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보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한다, 라는 그러한 감정을 그대로 실어서 설교를 해야 된다면, 독사의 새끼들이 뭘 주장했기에 주께서 이러한 과격한 표현들을 했는지를, 동일한 예수의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돼요.
근데 그 독사의 새끼들이 한 게 뭐냐 하면 율법 지키자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오버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이죠. 따라서 목사가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그야말로 이것은 율법 지키겠다는 그 행함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이게 나와 줘야 해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34절을 설교하지 않고 딱 지나가고 싶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욕 얻어먹으려고 교회 온 게 아니잖아요. 위로받으려고 오는데, 성경에서는 이게 욕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냥 눈 감고 안 본 척 슬쩍 넘어가버리면, 넘어가게 되면 교회는 그대로 유지되고 부흥될지 모르지만, 다 같이 지옥 가는 방향으로 방향이 바뀌어져요. 뱃머리 전체가 지옥 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요.
그래서 처음에 개척교회 하면서 한국교회 썩었다고 설교할 때, 이럴 때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게 돼요. 근데 교인들이 한 50명모이고 100쯤 모였다 싶으면 방향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려요. 조류가 바뀌었나?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본문은 이 34절부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라고 이렇게 하셨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선지자를 말씀하실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그 선지자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체험이 안 된다는 것.
사람이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는 자기가 체험한 것을 말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암웨이, 물건을 파는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어요. 이거는 뭐 장소, 시간가리지 않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떠든다고요. “암웨이 물건 좋습니다.”하고 줄줄 막 나오죠. 다단계 암웨이. 줄줄 막 나오는 거예요. 또 신비의 돌 있잖아요. 목욕탕에서 효험이 좋다고 하는 그 돌을 선전하는 사람들. 게르마늄, 이거 팔고 다니는 사람들 보세요. 이거는 뭐 기차 표 시간에 관계없이,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계속 선전해대요. 게르마늄 하나라도 팔아먹으려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걸 지금 체험하고 있거든요. 근데 게르마늄 팔고 있는 사람한테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이야기 못해요. 아니, 선지자들 치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이야기 못합니다. 교회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막 해대요. 열 시간도 모자랍니다.
복음의 체험을 하려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복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될 경우에만 복음이 줄줄 나와요. 천하를 잃어도 복음만 있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이 마음가짐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복움이 줄줄 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욥 같은 경우에는, 욥이 그렇게 말이 많은 이유가, 욥이 평소에 누구를 위해서 살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고난을 주니까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거예요.
욥기 제일 마지막 장에 보면 결국은 내가 너무 말이 많았다는 걸로 끝나요. “내가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욥이 체험한 것은 자기가 만든 현실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딱 가두어져있기 때문에 그저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는 울림이 있죠. 자기이야기 했다가 자기이야기로 바꾸고, 그걸 또 이야기하고, 또 바꾸고, 혼자 중얼중얼, 기도를 하나 철야를 하나 맨 자기체험, 자기이야기, 자기 한 맺힌 이야기.
나중에 껍질이 깨지고 보니까 자기가 이런 현상이 있는 이 자체가, 이게 바로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야 될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다 알죠. 그러면 입이 완전히 닫히죠. 로마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입을 닫아 잠그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율법을 준 것은.
근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을 가지고 입을 닫는 것이 아니고, 세칙과 규칙들을 계속 양산해냈습니다. 율법을 인간의 행함으로 보다 완벽하게 지키기. 이런 분위기로 전부다 몰아간 거예요. 나라 전체를, 요새 말로 하면 예배당 전체 분위기를 그런 분위기로 몰아세운 거예요. 주일 잘 지키려면 이렇게 하면 잘 지키는 겁니다. 드라만 본방은 보지 말고 녹화해놨다가 재방송 월요일에 보시고. 뭐 이런 식으로. 주일에는 경건한 책을 보고. 뭐 이런 것. 주일날에는 딴 것 하면 안 되고 심방을 해야 되고.
유대인들이 발달시킨 그것을 요즘도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다른 버전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럼 교인들이 물으니까, 성도라는 공식이 있어요. 성도라는 것은 거룩한 자. 그럼 성도가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도라는 행위를 보일 때에,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성도가 거룩하다는 말은 어떤 행동을 해야 되느냐, 거룩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된다. 그럼 거룩에 합당한 행동을 하려면 여기까지는 거룩이고, 여기서부터는 거룩이 아니라는 어떤 기준점을, 담장에 대나무 박아놓아서 표시해놓듯이 이걸 박아놔야 돼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거룩이고 이 바깥에 나가면 거룩이 아니다. 그 지침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 지침서가 처음에 교회 나올 때는 엉성하게 한 서너가지가 되다가, 그 다음에 신앙생활 오래해서 장로쯤 되면 촘촘히 박히죠. 촘촘히 박히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거예요. 어떤 꾀에 넘어가느냐 하면, 이 범위를 넘어가게 되면 벌벌 떠는 겁니다. 죄 지은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죄에 벌이 주어질까봐 무서운 거예요. 죄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신났어. 사람이 죄 지을때 제일 신나죠.
그런데 문제는 벌이 없다면 좋겠는데, 죄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벌을 요청하게 되어 있어요. 자, 이게 이번 강의에 상당히 어려운 대목인데요. 한 번 물어봅시다.
우주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주는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렇죠. 그럼 그 다음에 우주는 누가 운영하십니까? 하나님이 운영하죠.
근데 인간은 왜 지가 책임집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왜 자기가 책임지려고 나서냐 이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괴물이에요. 이상해요.
지금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운영하는 것하고 안 맞아요. 이게 맞는 것이 뭐냐 하면 코끼리나 코스모스는 맞아요. 민들레나 참새는 맞아요. 키우는 대로, 살려주는 대로 살면 그만이에요. 근데 인간에게 와서는 이게 안 맞아요. 인간에게 와서는. 만약에 저 코끼리보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면 따먹었겠어요? 안 따먹었겠어요? 안 따먹었어요. 저 늑대나 이리보고 따먹으라고 해도 안 따먹습니다. 사자보고 해도 안 따먹어요.
그런데 인간은 따먹었어요. 뱀 지가 따먹지, 왜 인간보고 따먹으라고 해놓고..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인간보고 따먹으라고 한 거예요. 뱀은 알아요. 나중에 하나님이 인간으로 온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뱀 지가 따먹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뱀하고 상대 안 하거든요. 인간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배치를 해놓은 거예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나타난 현상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숨은 겁니다. 두려워서 숨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었다고 닦달 내셨습니까? “이놈들 봐라! 내가 심어놓은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지?”라고 닦달 냈습니까? 선악을 따먹은 것 가지고 주께서 책임추궁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안 했죠. 니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러 오셨지. 창세기 3장 한 번 봅시다. 11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게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의 수준까지 내려오신 거예요. 아담이 벌벌 떨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담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찾아오신 거예요. 이 말은 “선악과를 따먹다니? 이놈!”하고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벌벌 떨고 있는 원인을,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레벨에 주께서는 그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이건 부름이에요. 아까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한 부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다음 작업에 나서기 위해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 다음 작업이 뭐냐 하면 뱀과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겁니다. 저주를 내리심으로써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상대할 의사는 없었고,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로서의 관계를 맺어서 창조를 완전하게 성취할 목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뱀과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 둘의 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개도 그렇고, 자식들도 그렇고, 지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레 겁먹고 벌벌 떨고 있잖아요.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생각의 폭, 개가 생각하는 생각의 폭, 자식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의 폭이 어디까지나 자기 일방적이에요.
주님께서는 딴 것을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법 없이 용서하시고 거기서 천국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써 천국을 만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자기 일에 자기가 책임질 때, 이게 진짜 인간 되는 줄 알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엉뚱한 생각을.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나의 기억보다 타인의 기억이 더 우선된다고요. 살아보세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들이 기억하는 나에 과연 내가 합치됐는가에 우선이 되는 거예요. 남들이. 모든 행동에 남들을 생각한다고요.
인간들이 있잖아요. 인간들이 있다면, 인간들이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인간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요. 그걸 가지고 인간성이라고 합니다. 이걸 좀 어려운 말로 인간의 보편성을 만들어내요. 이러한 보편성, 인간성이 뭘 하느냐 하면 그중에서 하나를 지도자로 추대하게 됩니다. 이 지도자 속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 지도자다움에 대해서 납득을 하고 동의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투표가 아닙니까? 다수의 투표를 민주주의라고 해요. 이 지도자가 납득이 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병고치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먹을 것을 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라 간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원했던 메시아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원했던 메시아. 공통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대 인간 속에서 인간성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뽑아내요.
그런데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했죠. 자아는 실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신체는 유일한 자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필요해서 만들어진 인간들의 신체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예수님을 위해서.
그런데 인간들은 마귀가 있어가지고,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도 신처럼 된다고 해서, 주님을 위한 신체를 가지고 마귀가 들어와 버리니까, 신체의 주인공을 따로 설정했는데, 그게 뭐냐 자아, 또는 나라고 따로 설정한 겁니다. 그럼 나는 뭐와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악마와 연관되어서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의 하수인.
여러분, 악마라고 해서 머리에 뿔나고 눈 찢어지고 하는 게 악마가 아니고, 내가 다룰 수 있는 예수가 아니면 예수가 아니라는 생각. 그러니까 십자가 없던지, 십자가를 훌쩍 지나가버린다든지, 십자가를 그냥 거쳐서 다른 것을 찾는다든지, 하여튼 십자가를 앞장세우지 않는 그런 메시아를 원할 때, 우리에게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들어서버리면 나는 걸레가 되고 나는 쓰레기가 되거든요. 십자가가 뭡니까? 너와 나 사이에는, 이거는 공통점이 없다는 거예요. 공통점 정도가 아니고 적대적 관계에요. 하나는 죽이는 자고 하나는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십자가거든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내용 한 번 볼까요?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너희라고 하니까 인간들의 모임이죠. 거기서 인간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면, 예수님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에나 그들에게 있는 공통점을 끄집어내보니까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 이게 보편적으로 한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지도자는,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누구보다도 율법에 충실한 사람, 율법을 잘 지켰다고 인정해준 사람이 그들의 영적지도자고 되는 겁니다. 뭐 어렵지 않죠? 이게 당연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고 했죠. 문제는 그들이 최고지도자라는 랍비, 그래서 예수님도 랍비라고 불렀어요. 누가, 누가 랍비답냐고 그들에게 시합을 붙인 거예요.
인간들의 공통성, 지도자, 랍비,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데 앞장서서 모델케이스로 움직이는 사람을, 그들은 그리워한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원해요. 세상은 썩어도 우리 목사만큼은 예수님 모습처럼 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을 모시는 사고방식이라니까요. 사두개인을 모신 사고방식이에요.
이 지도자를 숭상함으로 말미암아, 지도자의 성과에 같이 묻혀 가면, 앞장선 지도자 덕분에 그들은 수월하게 천국 갈 수 있는 여력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똑같은 사고방식은 열 두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죠. 선생님이여!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들과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진짜 지도자를 모셨는데, 그 지도자는 천국의 주인이고, 나중에는 우리도 예수님 밑에서 한 자리씩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같이 고난 받았으니까. 같이 이들로부터 핍박받았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의식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가 하면 뭔가 고난 받고 핍박받으면 자기가 진리 쪽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돼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 전에 교인들끼리 잡담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가 돈을 몇 백억 해먹었다는 것이 방송에 나와 가지고, 성락교회에서 돈 먹은 거, 그거 다시 게워내고 성락교회 돈으로 다시 전환하는 대책모임이 있었던 모양이죠. 근데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돈은 나보고 준 돈이니까 내가 꿀꺽해도 괜찮다는 거고, 대책회의에서는 그거는 교회 때문에 준 돈이니까 내놓으라고 한 거예요. 순복음 조용기 목사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앞으로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들을 보고 참 기가 찼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그런 거 보고 기가차지 마시고, 불쌍한 애들을 자기 자식으로 입양하고, 자기의 모든 월급을 어려운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악마를 주의해야 해요. 그런 악마를. 그러니까 인간들이 얼마나 복음이 없었으면, 우리교회 집사님들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나 복음이 없었으면 납득이 되는, 예수님 본받는 목사상像을 아직도 고대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다 쓰레기인데.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서 지셨어야 돼요. 십자가 진 사람이 둘, 셋 되면 안 됩니다. 지도자가 헷갈려요.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예수 이름 말고는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하고 왜 예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찾습니까? 예수만큼 괜찮다는 그것이 가장 위험한 존재에요. 그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도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골적으로 돈 밝히는 목사보다 예수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간, 그런 거룩하고 자기 것을 몽땅 다 내어준 그 목사가 가장 악마적인 목사에요. 가장 악마적인 목사. 그런 짓 하면서 나는 죄인이라고 하겠어요? 그런 소리 안 나오죠. 죄가 안 나오면 그거는 마귀자식이에요. 자기 죄가 안 나오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냐, 그것은 예수님 노선을 뒷조사를 해보면 돼요. 그러면 역대하 24장 22절의 그 말씀을 35절에 인용해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요아스 왕 때 바가랴, 라는 대제사장이 있어요. 한 번 찾아볼까요?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사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여호야다가 바가랴입니다. 20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여호야다가 아주 나라가 엉망이 되었을 때에, 못된 아달랴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잖아요. 쫓아내고, 어린 요아스가 8살 때 왕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릅니다. 위험해요. 권력이 인수가 안 되었을 때니까. 그럴 때 여호야다가 이노베이션,innovation혁명을, 혁신을 일으켜가지고, 권력을 줘가지고 잘했는데, 잘하다보니까 나라가 잘되었을 거잖아요. 그러다 여호야다가 늙으니까, 옛날 생각은 못하고, 하나님이 신이 임한 생각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 못하고, 이제는 뭐 내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겠다. 이래가지고 우상을 섬겨버렸어요.
우상을 섬길 때, 아마 우상 섬기는 여자를 자기 부인으로 데려왔던 모양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여성.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때 할 건데, 이스라엘 왕들이 이방나라 공주나 여인들을 데려오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나라 자체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체로 유지를 해야 될 때는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가지고 서로 인질로 삼는 거예요. 딸을 인질로 삼고, 저쪽은 이쪽 딸 인질로 삼아가지고, 여차해서 자기 딸이 죽으면 안 되니까. 강제평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이쁘다는 거예요. 이뻤다는 것. 이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천하의 왕도 남자거든요. 남자는 근본적인 생물학의 욕구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기 DNA를 퍼트리기 위해서는 보다 더 예쁜 사람에게 자기 DNA를 퍼트리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자아 이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아가 우선이 아니고 인간의 신체가 우선이죠. 인간의 신체를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그 욕구와 욕망이 예쁜 것을 찾게 되어 있다니까요. 예쁜 것을.
40, 50이 가까운 연예인들이 몇 살하고 결혼합니까? 20대를 넘본다니까요. 20대를. 40대 된 여자연예인은 뭘 넘봐요? 20대를 넘본다니까요. 젊고 예쁜 것을 누가 마다합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고요? 그거는 자아이야기고. 자아는 묻지 마세요. 신체발동이 그렇게 걸린다니까요. 남의 이야기할 것 없어요. 우리가 그만큼 재산이 있고, 인물이 되고, 연예인하게 되면 다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럴 형편이 지금 못돼서 그렇지. 형편을 원망합시다. 지도 밥 먹고 살기 힘든데 남까지 밥 먹여 줄 여력이, 돈이 없잖아요.
여기 역대하 24장 18절에 보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라고 했죠. 아까 우상을 뭐라고 했습니까? 납득이 되는 신이 우상이죠. 내가 다룰 수 있는,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 기도할 때마다 쪼르르 올라오는 것. 예. 뭘 도와줄까요? 하고, 헌금할 때마다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그런 신. 그런 예수. 여전히 주도권은 내 인생 내가 만들겠다고 할 때 저쪽 신이 허가를 해주는. 그런 점잖은 분. 아주 인자하시고. 어르신다운 분. 우리 동네 어르신 특징이 뭡니까? 아주 점잖죠. 그런 점잖은 분. KFC할아버지처럼. 점잖으신 인상의 할아버지. 그런 게 우상이에요.
특히 여기 아세라 목상 같은 여신은요, 빌면 소원 들어주는, 자식을 낳게 하는 우상이에요. 자식을 낳게 하는. 자식을 낳게 하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그냥 “자식을 놓습니다.”라고 하면 효과가 없잖아요. 그래서 자식을 놓을 수 있도록, 아세라 신의 계시가 효험이 있도록, 거기에 자식을 잘 놓을 수 있는 여자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여자 쪽에서는 남자사제들이 있어가지고, 그냥 집에 가지 마시고, 말로만 자식을 놓으면 안 되잖아요.
그게 여호와의 말씀이 권태로울 때, 인간은 자극을 원하잖아요. 근데 이 자극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 다 좋고 진리인 줄 아는데,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 재미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자기의 미지의 X를 그때그때마다 충족시키는 그 재미인 거예요. 소원 빌면 재깍 이루어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고, 그게 실적 있는 신앙생활 아니에요? 뭔가 손에 잡히는, 실적 있는.
그게 아까 이야기한 다단계 암웨이, 체험이 성사될 때 할 말이 있단 말이죠. 근데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도권이 주님한테 있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도 주도권을 가질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주도권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주도권을 갖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 안 둔다! 이런 관계라니까요. 십자가가. 이제부터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기만 해봐! 내가 다 부숴버릴 테니까. 그 가짜 현실을.” 이게 십자가와의 관계거든요.
처음에 자기가 잘못 한 것 있을 때는 내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게 몇 번 안 가서는 ‘나도 인간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질질 끌려가기만 할까?’ 자아는 모르지만 이 신체가 그걸 싫어해요. 내 신체가 그걸 싫어한다고요. 찬송가만 냅다 불러보세요. 처음에 1,2절에는 은혜가 되다가 3,4절에는 은혜가 확 떨어져요. ‘길기는 왜 그렇게 긴지. 목사님은 왜 긴 걸 해가지고. 벌써 3절 할 쯤엔 잠 오고 설교는 다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설교 듣는 사람은 좋아요. 쫙 땡겨 가지고 찬송, 기도 건너뛰고 설교만 들으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축도 듣지도 않아요. 설교만 듣고 끄면 그만이에요.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상을 섬기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까불죠. 아주 지가 최고니까. 왜 최고냐 하면 백성들이 자기를 따라오니까. 왕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도 있지만, 백성들이 그걸 섬기는 것을 윤허, 인정한 거예요. 백성이 뒤집어버리면 왕이 왕 노릇을 못합니다. 언제 칼 맞고 죽을지 몰라요.
쉽게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타인의 시선이 무섭다니까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타인의 기억 속에 있는 내 모습이 무섭지, 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예수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언제 내 소원 예수님이 들어줬습니까? 일가친척들이 다 도와줬지. 이거 종교생활 취미라니까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고. 미지를 잘 모르니까 보험하나 들어놓는다 치고 하나 떡 걸쳐놓게 되면, 물론 죽을 때는 보람상조가 오겠지만. 보람상조 그 다음에는 예수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사건이 터져버렸네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거예요. 개입했다는 거예요. 스가랴, 여호야다의 아들이 스가랴인데요. 스가랴에게 임했어요. 하나님의 신이 스가랴에게 임하니까, 스가랴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억지로라도 맞아 죽도록 했습니다. 돌로 쳐 죽였습니다. 역대하 24장 21절에,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자,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잖아요. 신이 임했다는 것은 우선 은혜를 받았다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는 앞으로 창창하게 잘 되는 것, 보다 건강하고, 보다 돈 많이 벌고, 보다 인기 얻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자기의 파워가 확장되고 유명해지는 것, 이게 은혜의 효과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아느냐 하면 사전에 우리 인간들이 기도하고 빌 때, 뭐 예수한테, 삼위일체한테 빌었지만, 사실은 산당에서 아세라한테 빌고 바알한테 비는 그 모습이에요. 자아는 신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이 자아는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늘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자아는 내 신체의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내 욕구가 시키는 대로 해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분명히 내 신체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돌아와서는 책임을 진다는 게 수상하다 이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으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왜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느냐 이 말이죠. 이게 비밀 아닙니까? 비밀.
하나님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없으면 내 마음대로 살면 되는데, 나는 교회 안 가고 절에 간다고 해요. 절에는 신이 없어요. 절에는 부처처럼 되는 것이지 신이 없잖아요. 신이 없는데 왜 그들은 양심이 있고 죄책감을 왜 느낍니까? 신이 없는데? 얼음판에 넘어지면 “아이고,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합니까? 교인들이 훈련되어서 “아이고, 주여!”라고 하죠. 차타고 갈 때 울렁거리면 “아이고, 주여!”라고 해요. 그것도 훈련이 안 된 사람은 “엄마야!” 이렇게 하지만. “주여!” 얼마나 훈련됐으면 제 2의 천성이 됐을까요? “주여!” 한단 말이죠.
현실을 이렇게 모아야 되는데, 현실을 알 때 우리가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살 수 있는데, 왜 내가 만든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그 구석이 또 있느냐 이 말이죠. 내가 모르는 게 왜 자꾸 나를 힘들게 만드느냐 말이죠. 내가 모르는 구석이. 뭐 기분이다, 하고 객기 부리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술을 쳐 먹고 집에 와서는 왜 자꾸 미안하다는 소리를 왜 하느냐는 말이죠. 지가 선택해서 술 먹었으면, 내가 술 먹었다고 이렇게 당당해야 하는데, “미안해 여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건 뭐냐 뭔가 켕기는 것이 있잖아요. 근데 그 켕기는 미지의 X는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켕기는 미지의 X,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당당하고 내가 신이라고 외치면서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끝까지 그렇게 살아야 되지, 자기밖에 몰랐으면 그렇게 살아야지,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고 나대고 왜 그러냐는 말이죠. 평소에 잘 도와주지, 꼭 돈 없으면서도 도와준다고 해요. 돈 있을 때는 지가 쓰다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주의가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기주의라는 말로 다 포괄되지 않는 다른 요소가 있어요. 인간에게는 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이 있어야 인간이 제도와 질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질서를 만들 때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그 원칙이 있을 때만 질서제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법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지키고자 할 거야, 라는 것을 기본으로 그냥 간주를 해줘야 법을 만들어요. 법 만들어놓고 안 지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인간은 일단 선하기 때문에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 라는 것으로 하고. 악은, 악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선한데 결심이 약해서 또는 너무 형편이 안 돼서 악을 저지른다, 라고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어 해요.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고요. 그러나 선이 백 개가 있더라도, 악이 한 개만 있다면 백 개가 다 헛수고입니다. 백 개 선한 것이 다 헛수고에요. 악한 이것이 백 개를 전부 다 못살게 굴어요. ‘니 착함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이게 남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내 안에 타자가 있어요. 그 타자가 나를 자꾸 쑤신다니까요.
다시 이야기를 정리해봅시다. 나는 내 맘대로 살아요. 분명히 내 맘대로 살게 되면 책임을 지지 말아야 돼요. 어떤 것이든지. 내 맘대로 살아놓고 책임감은 왜 느끼느냐 이 말이죠. ‘내가 제대로 했어?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누가 나에게 그런 책임감을 안겨줍니까? 누가?
이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스가랴가 딱 죽습니다. 죽기 전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역대하 24장 20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라고 이렇게 말씀을 했죠.
근데 이 말씀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죠.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이 있기 전에, 인간의 자아가 있기 전에, 신체가 있고,
신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이는 것도, 이것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죽여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은혜 받았다고 해서 잘 되고, “아, 당신은 신이 임했으니까 대박이다!” 이게 아니고, 신을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성령이 충만한 그 이유 때문에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처럼, 신을 받았기 때문에 죽을 때 죽어줘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신체를 주께서 거두어간다고 해서 자아가 뒤따라가면서 찔찔거리면 울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나 이전에 말씀이 먼저 있어요. 그 관계가 이어질 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부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약에 의하면 성령이에요. 성령은 나 이전에 이미 주도권을 장악하신 분이 계시고, 그 분의 영이 나한테 꽂힌 거예요. 뛰어든 겁니다. 나한테 뛰어드니까, 나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히 나의 선택이고, 나의 자유고, 나의 의지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나의 의지, 결심, 그리고 나의 선택에 의해서 행한 거예요. 이거는 부인할 수가 없어요. 분명합니다.
근데 이 선택, 결심, 의지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게 선행적 선택이 따로 있었어요. 선행적 선택을 다양하게 배정시키고, 뿌리고, 할당을 시키게 되면 각자 인간은 자기 결심과 자기 의지와 자기 선택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예정은 나의 선택이 만드는 겁니다. 예정은 자아가 만들어요. 내가 예정됐다는 것을 내가 만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만든 이 예정은 결국은 선행적 선택 밑에서 만들어진 예정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착각과 자기 최면에 계속 몰두하겠죠. 내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고 계속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뭐가 계속 굳어지게 됩니까? 자아가 점점 더 굳어지게 되겠죠. 언제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만약에 내가 죽으면 이런 소리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겠죠.
자, 욥의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욥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뭐냐 하는 거예요. 욥은 죽여 달라고 했어요. 근데 욥이 생각한 죽음은 지 목숨이 끊어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태어나기 전으로 환원되는 것을 죽음으로 봤는데, 하나님의 죽음은 뭐냐 하면 창조자가 욥 앞에 나타나는 것을 죽음으로 본 겁니다. 창조자가. 미리 땡겨서 죽음으로 본 거예요. 심판주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죽고 싶어도 도저히 죽을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됐다는 것을 알게 돼요.
내가 괴로우면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자살 왜 합니까? 좋아서 자살합니까? 괴로워서 자살하는 거예요. 주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괴로울 때, 내가 괴로운 거예요? 안 그러면 괴로움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괴로움이라는 것이 이미 상주해있었는데,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여겼죠. 남이 울고 있으면 그까짓 가지고 운다고 하는데, 막상 그 상황이 나에게 해당되는 상황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울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느냐 하면 울고 싶어서 우는 거예요. 아주 오랜만에 바른 소리하고 있죠.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죠. ‘아, 내가 울면 안 되는데...눈물이 왜 자꾸 나지?’ 눈물은 본인이 조작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미친 오토바이를 탔다니까요. 우리 신체를 관리하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그분이 울게 하면 우리는 울어야 돼요. 그분이 웃게 하면 우리는 웃어야 돼요.
선지자가 지금 그 관계 속에 주님하고 밀당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선지자는 자기 선택에 의해서 죽었어요.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요아스는 자기 선택에 의해서 선지자를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 둘이 한 짝, 한 세트가 되어서 장차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떤 식으로 오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감추어진 기원, 그라운드가, 감추어진 토대가 이 땅에 등장할 때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우리는 있지도 않은 자아를 만들어서 망상과 환상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내 신체를 내가 다룬다고요? 내 인생은 내가 살아서 꾸려나간다고요? 그 자아라는 게 어디에 있어요? 자기는 울고 싶을 때 울 건데, 자기가 울고 싶었는데, 자아가 울어놓고 나중에는 내가 울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울고 싶을 때 막 울 수 있어요? 지가 연기자에요? 지가 탤런트에요? 주어진 대로 인간은 울 때는 울 수밖에 없어요. 미워하는 것 할 수 없어요. 미워하세요.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전도서 3장에 내가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이 모든 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해요. 또 알라고도 하지 마세요. 타이밍을 맞출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막사세요. 울고 싶을 때 선택해서 우시고, 웃고 싶을 때 선택해서 웃으세요. 그 선택보다 선행적 선택에 의해서 나는 그 선택과 자유의지를 할당받고 배정받은 거예요. 개인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말은 다 헛말이에요.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가 이런저런 말 한다고 주께서 그 말 안 듣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가 체험된 것만 이야기하고 체험된 것만 바라게 되어 있어요. 체험된 것. 근데 선지자는 뭘 체험했습니까? 내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하는 것을 체험한 반면에, 요아스 왕은 “나는 왕이다.” 지금 이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이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것만 체험해서, 거기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고 불리한 것은 배척하니까, 오늘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를 죽인 거예요. 죽였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무엇의 유발자다? 하나님의 내용을 아는 자를, 하나님도 모르는, 영도 모르는 우리가 죽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다 그래요. 인간의 모든 보편성은 나도 신이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이미 배후의 악마로부터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식의 보편성이에요. 이게 보편성이라고요. 이런 인간의 보편성에게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면,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으로부터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습니까? 오고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자, 끝으로 하나만 더해봅시다. 그러면 선지자라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을 받은, 성령 받은 사람이죠. 그러면 이 선지자가 마지막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아까 새 언약이라고 했고, 그건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하나님 죽음. 아까 한 것을 다시 할게요. 인간이 목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 죽어도 무덤에서 다시 끄집어내요. 수목장 할까요? 화장할까요? 하는데, 어떤 사람은 화장하면 안 되고 매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진지하게 질문한 사람이 있어요. 매장을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무덤을 열 때 열릴 게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열릴 게. 상어한테 먹혀가지고 온 태평양 바다를 돌아다니면 천사가 그거 다 수집한다고 얼마나 바쁘겠어요. 부속품 다 챙긴다고. 그래서 아예 천사를 도와주는 입장에서 매장해놓으면 무덤이 열리니까, 열릴 때 도와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화장하지 말고 매장해야 된다는 거예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는 죽어도, 살아도, 이미 산 사람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살았잖아요. 죽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심판이 먼저 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나는 죄인이라고 할 때, 니가 의인이라고 한 말이 뭐냐 하면 바로 심판주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우리는 누구 앞에서 삽니까? 나를 생각하는 남들의 기억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의 영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보시기에.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죄인이죠. 그럼 그걸 세상에 나가서 그대로 보여주고 사세요. 그럼 주님 앞에서 죄인이 되게 되면, 죄인이라는 말은 자기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죠. 이런 것은 바로 죄가 되죠. 우리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신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다만 이익을 고려하되, 이걸 죄라고 알면 돼요. 자기이익, 자기 몸 편한 것, 이익은 어디서 생산되느냐 하면 남들이 기대하는 내 모습에서 생산돼요. 남들이 기대하는. “적어도 너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니 얼굴이 엉망이더라.” “니 완전히 폭삭 삭았더라.”라는 말을 들었다면 밤에 잠을 못자요. 가서 거울 보면서 내가 이렇게 빠졌나?
주님이 뭐라고 하면 귓등으로 듣지도 않아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런 말씀 들으면 잠이 와서 덮어버리는데, 남들이 얼굴 좀 빠졌다고 하면 사흘, 나흘 동안 온 정신을 거기에 신경 쓰고. 왜 그리 쪘냐고 하면 다이어트 한다고 레깅스 입고 온 폼은 다 재고, 요가하고. 이런 체험만 있는 거예요. 이런 체험만.
그래서 두 번째 강의 제목은 “선지자 체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목숨 끊어진 것이 죽음이 아니고, 주님 앞에서, 주님의 기억 앞에서 어떤 모습인가를 날마다 되새길 때에, 주여! 주님의 용서 때문에 살았다는 고백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