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714a히13장22절(형제)-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마지막 히브리서 끝부분 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이 마지막인데 22절부터 끝에 가서 보면 사람이름 나옵니다. 사람들이 거론되어 있어요. 편지니까. 히브리서1장에는 아무런 사람에 대해서 소개 없다가, 히브리서1장에서는 뭐냐 하면 마지막 때에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맨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하나님께서는 그냥 마냥 숨어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분명히 하나님 쪽에서 나타냈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을 못 붙잡는 사람은 어떨 수 없는 거죠. 맨날 하늘 쳐다본들 하나님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 이 땅에 자기 자신의 흔적을 남긴 거예요. 그것을 이스라엘한테는 뭘 남겨놨느냐, 바로 율법과 그리고 또 하나 더 있지요. 율법과 선지자로 나타났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선지자로 말미암아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칸영화제 같으면 카펫이라 볼 수 있지요. 카펫을 애들 놀라고 깔아놓은 게 아니고 그 위로 누가 밟고 온다는 겁니다. 그 위로. 영화배우들이 감독이 밟고 들어오잖아요. 누가 밟을까요? 하나님이 스스로 카펫을 깔고 하나님이 스스로 그 위에 밟는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은 히브리서에서 은연중에 계속 강조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걸 은연중에 강조한 것을 내가 달리 표현해보겠습니다. 말씀덩어리. 인간이라는 눈에 보이는 껍질이라면 하나의 만두의 외피라면 속은 말씀덩어리죠. 보통 손자나 애들 맘에 드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이고, 이쁜덩어리 하잖아요. 아이고, 사랑덩어리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말씀덩어리로 보고 선지자와 더불어서 선지자를 밟고 마지막 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성도라 하는 것은 옛날 선지자의 길을 남긴 똑같은 취지로서 말씀덩어리로 이 땅에 남겨두는 겁니다. 말씀덩어리라 하는 것은 말씀은 뭐냐 하면 내용이 되겠고요, 덩치 덩어리라 하는 것은 이것은 형식이 되겠습니다.
내용과 형식이 결합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복음이 표현되는 겁니다. 복음의 표현. 내용은 말씀 형식은 하나의 그릇이에요. 그릇에다가 말씀이 다가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생활의 태도, 이것이 뭐냐 하면 다 복음에 관한 복음의 표현으로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선지자를 통해서 옛날에는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그럽니까? “니가 건방지게 나한테 그런 소리하다니? 니나 나나 똑같은 인단이잖아.” 이렇게 사람들이 하겠지요. “니가 나보다 공부를 많이 했어? 니가 똑똑해? 니 어느 대학 나왔어?”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뭐냐 하면 말씀덩어리이기 때문에 나를 표현하는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말씀을 표현해온 겁니다. 그러다가 인제 마지막 때에 성도가 등장하면 성도가 옛날 선지자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본인이 본인을 무시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무시하면 안돼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서 나 인생 성공했다. 실패했다. 나 출세했다. 잘산다. 못산다. 그런 잣대로서 그런 평가를 자기한테 내리지 말라 말이죠. 말씀이 내가 가난하게 만들면 가난하게 되는 거고 말씀이 부하게 되면 부하게 만드는 거고, 중요한 것은 나의 표현이 아니고 복음의 표현입니다. 복음의 표현.
주님의 표현으로서 나타나게 되면 남들이 나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그렇게 휘둘릴 필요가 없다 말이죠. 휘둘릴 필요가 없어요. 이건 우리 집안 이야기인데 제가 결혼하기 전에 어디에 처음 소개 시켰느냐 하면 우리 집안에 장례식 할 때 성당 장례식 할 때 온 집안 다 모였을 때 고모 성당에서 장례식 할 때 그 때 제가 넌지시 들이밀어 봤어요. 이런 분하고 사귄다. 이렇게 하니까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우리 어머니죠. 위에서 스캔하는 거예요. 훑어보는 거예요.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어머니 경우는 훑어보지요. 그 스캔하는 거, 그 훑어보는 거, 거기에 우리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결혼하고 난 뒤에 제 아내 말은 “참 웃기더라.” 별 잘나지도 않았는데 되게 잘난 체 하더라. 이제는 식구가 돼가지고 아내한테 지금 봉양을 받는 입장에 있어요. 옆집에 있어서. 이제는 스캔 뜨는 입장이 아니고 제 아내 없이는 못사는 입장이 됐지요. 결국은 복음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오늘 제목이기도 하는데, ‘소중한 것’이에요.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소중한 것. 그런데 마음에 소중한 것이 들어있지 않으면 모든 변화가 다 나한테 걱정으로 압박을 줘요. 근심걱정으로 변화되어서 나한테 오는 겁니다.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으면 그게 걱정이 되어서 날아와요. 그래서 이 히브리서를 끝내면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보고 히브리서를 보면서 이걸 먼저 항상 생각해야 돼요.
“무엇이 신자가 아닌가?” 부터 시작해야 돼요. 우리는 자꾸 신자 되려는 그 선입감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무엇이 신자 아닌가?” 라고 출발해서 성경 속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신자가 나오잖아요. 이래야 신자라는구나! 라고 하고 다시 바깥에 나와야 돼요. 나와서 다시 물어야 돼요. 무엇이 신자 아닌가?
처음의 무엇이 신자 아닌가? 하고 두 번째 무엇이 신자 아닌가? 하고 같은 문장이지만 같은 뜻이 아닙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시작을 뭐냐 하면 “무엇이 신자가 아닌가?” 제가 답변을 일방적으로 내려 볼게요. 무엇이 신자가 아닌가 하면, 주일성수 안하는 것, 십일조 안하는 것, 성경 안보는 것, 교회 봉사에 태만히 하고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살지 않는 것, 이런 게 신자 아닐 거라고 해서 교회 다닙니다.
이미 교회 올 때부터 본인이 신자되겠다고 작심하고 마음먹는 순간 신자 아님이 같이 병행해서 같이 여기에서 정립이 돼요. 나처럼 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여기는 뭐냐 하면 사교단체지요. 교회라는 게. 이걸 소위 커뮤니티라고 하는데. 하나의 공동체. 사교단체에요. 사교단체해가지고 찬송하고 예배하고 있잖아요. 그거 그대로 흉내 내고 따라 붙이기 하는 거예요. 모방도 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뭘 하고.
그러다가 두 번째 뭐로 바뀌는가 하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요. 성령을 통해서 성경 속으로. 성령이 아니면 성경 속으로 못 들어가요. 들어가 보니까 거기서 무엇이 신자가 나옵니다. 이럴 때는 나는 마땅히 신자며 나같이 않은 것은 신자 아니다. ‘그것도 신자야? 나같이 돼야지.’ 이런 마음으로 그대로 걸으며 왔다가 막상 성령을 통해서 성경 안에 들어와 버리면 히브리서 안에 들어와 버리면 거기에 신자가 나와요. 신자가 나오는데 그 신자는 교회라는 그런 사교단체는 없어요. 지금 성경대로 나오는 그 인물이 교회에는 쳐다 볼래야 없어요. 왜? 다 사교단체에 놀러오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 성경 속의 신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살려고 오잖아요. 죽으려고 온 게 아니고. “주님, 저 죽여주옵소서.” 그게 소원이 돼가지고 오지를 않는다 이 말이지요. “주여, 도대체 언제 죽이십니까?” 이런 기도하려고 교회 온 게 아니고 “언제 살려주십니까?” 이것 때문에 온다고요. 언제 살려주십니까? 이번에 수술했는데 잘 빠지고 깨끗하게 해주시고 주여~~ 효과 보게 하옵소서.
이 커뮤니티.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 있다고 간주되는 사교단체에서 흉내 내기를 시작했다가 성령을 통해서 성경 속에 가보니까 성경 속의 인물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하고 전혀 관련성이 없어버려요. 그래서 세 번째로 나갑니다. 세 번째 결론은 뭐냐 하면 ‘신자 없다’ 입니다. 신자 없어요.
왜 신자 없느냐 처음에는 뭐냐 하면 내가 신자 되려고 교회 갔거든요. 들은 풍월은 있어서 신자 되어서 죽어서 좋은데 간다 하니까 신자 되려고 하다가 내가 되어야 할 신자는 애초부터 그런 거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신자 되려하는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신자 됨을 훼방하고 막았었어요.
예수 믿으면 신자다. 누가? 내가. 이게 바로 대표적인 엉터리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게 신자가 아니에요.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내가 믿고 안 믿고 상관없이 주님이 결정한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사후적으로 그게 믿어질 때 그게 신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신자 되고 안 되고는 처음에는 이게 나의 일인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게 내가 신자 되고 성경 공부하고 이런 일들이 이게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 주님의 일이 돼요.
그래서 교회 봉사 안한다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에서 “주께서 하게 하셨다.” 로 주체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 집안에 아내가 아니다. 가 아니라 저 남편하고 결혼해야지. 가 아니라 주께서 결혼하게 하셨다. 고 이렇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다고 신자가 아니고 “니 남편을 어떻게 생각해?” “자식을 어떻게 생각해?” 그 사이에서 나의 신자 됨이 풀풀 표현되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 관계만 신자가 아니라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과 태도가 다 신자 모양새를 내는데 거기서 뭐가 나온다? 복음이 나와요. 복음이란 예수님이 주체가 되는 걸 복음이라 해요. 그래서 내 행함은 안 되는 거예요. 행함은 내 행함이기 때문에 신자가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함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주체가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옛적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그 말이 선지자가 맨날 하나님만 연구했다는 말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 일상 삶을 살아갔어요. 생활했는데 행한 그 속에서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예수님을 그 시대에 모양으로 부분으로 모양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장차 메시아의 몫이다. 라는 것을 그 시대에 표현을 한 겁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좀 더 어렵게 설명할게요. 인간이 이리 있다면 인간을 둘러치는 아우라, 기운 같은 것. 성모 마리아 뒤에 둥그런 노란 거 있잖아요. 후광 비슷한 것. 베냐민 이란 사람이 표현한 아우라. 이 후광과 더불어서 여기서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아우라 어려우니까 시.공간이라 합시다. 시간과 공간이 어려우면 그냥 위상, 이 말이 어려우면 위치, 위치가 어려우면 자리, 이 자리가 어려우면 쟁반. 나는 위에 올려놓은 사과. 쟁반을 통째로 옮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지자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기드온 같은 경우에는 자기는 안하려하거든요.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본인이 하고 싶어 했다는 말은 이미 쟁반이 쟁반 때문에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선지자라는 새로운 위상이 나옵니다. 그럼 선지자가 단어잖아요. 선.지.자. 그럼 이 선지자가 단어만 아니고 오늘날 신자 또는 성도. 전부다 단어에요. 이 단어는 바로 쟁반을 표현하는 겁니다. 쟁반, 자리, 위치, 위상 이걸 표현하는 거예요.
따라서 제가 하는 이 말은 뭐냐 이런 뜻이에요. 나라고 하는 나는 없다. 입니다. 이게 되어야 신자에요. 나라고 하는 나는 없는 거예요. 남들이 불러주는 김아무개. 없어요. 물론 없는 대도 있는 척을 해줘야 그들과 대화가 되니까 “김 아무개요!” “예” 이렇게 하지요. “아민이!” “예” 호명했을 때 그 호명한 자의 앞에서 주체가 된다 말이죠.
알티씨? 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이데올로기의 세계. 이 가상의식의 세계에서는 나라는 것은 사회가 불러줘야 내가 인간취급 받는다. 아무도 안 불러주면 니가 자살하던지 굶어죽던지 아무도 안 불러주면 있으나 마나 이미 자기는 있더라도 사회에서 없는 존재는 죽은 존재입니다. 죽은 존재에요.
그래서 사람은 밥 없어도 못 살지만 외로워도 못 살아요. 노래는 외롭거나 슬퍼도 하니처럼 달려가지만 실제로서는 사람이 왜 일을 하는지 알아요? 외로워서 일을 해요. 배고파도 죽지만 권태롭고 심심하면 죽을 지경이에요. 뭘 해야 돼요. 테니스를 치던. 뭘 해야 된다고요. 끊임없이 해야 돼요. 그들과 어울려야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항상 미완료입니다. 내가 보고 하는 거예요. 내가 보고 하니까 내가 예상한 것이 지금이 아니고 내가 예상한 것이 내 미래에 있으니까 그 사이에 결핍이 생기겠지요. 결핍만큼 뭐가 생기느냐, 근심과 걱정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소중한 것이 없으면 나한테 걱정이 찾아오지요. 저게 될까? 안될까? 그 일의 계획이 될까 안 될까? 걱정되지요. 그러나 소중하다는 말은 내가 소중한 게 아니고 나로 새로운 나로 유발해 내는, 새로운 나로 만들어내는 이 시.공간, 아우라, 위상, 위치, 자리, 쟁반이 소중한 거예요. 이게 바로 평범한 인간을 선지자로 만든 주님의 위력입니다. 이게 주님의 위력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만드느냐? 아니요. 말씀덩어리로 만들어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죽여 버려요. 왜? 내가 있는 한 주님의 일에 방해되기 때문에. “나, 이것 해주세요.” 하는 자체가 주의 일을 방해해요. 그러니까 금요 철야기도 주님한테 방해하고 있는 중이지요. 주님한테 지금 데모하고 있는 중이에요.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옮겨달라고 서울광장에서 데모하고 있는 중이에요. 집단적으로.
내가 없는데 왜 나를 위한 기도라는 그게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내가 없는데 무슨 기도를. 이 집에 돼지, 소 키웁니까? 돼지 안 키우지요. 돼지 안 키우는데 교회가가지고 돼지우리 만들어주시옵소서. 주여! 돼지우리 우리 집에.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이 집에 내가 없는데 나를 위해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6장에서 기도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너라고 하는 것은 그냥 너가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그 관계에 포함된 We, 우리 안에 포함된 너라고 내가 지목해 줄 때 비로소 너는 주기도문을 이해하게 되고 주기도문에 합류가 되고 주기도문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되는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합시다.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없는데, 내가 생각한, 내가 의식하는 나는 없는데, 나의 충분한 아우라, 영역이 내가 속한 영역, 장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히브리서 제일 마지막에 봅시다.
히브리서를 마지막 설명하면서 제가 이렇게 뜸을 드립니다. 22절에 보게 되면, “형제들아!” 자, 형제라는 단어 나왔습니다. 방금 우리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자, 여기서 형제란, 내가 새롭게 사귀어야 될 사람이 형제가 아니고 나를 나 되게 만들었던 이 거대한 쟁반, 같은 쟁반에 이미 여기에 같이 존재하고 있는 자들이에요.
내가 사는 환경이 좁아서 미처 연락이 안됐을 뿐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들 그리스도 안에 은혜를 받은 사람끼리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걸 흔히 에베소서 이야기하면 교회가 되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못 만들어냅니까? 못 만들어내지요. 분명히 여러분들 못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질문 하나 던집니다. 교회를 부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교회 못 부수지요. 정답입니다. 교회 못 부수지요. 그러면 목사나 장로가 교회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걱정하려면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형제 아닌 게 형제인 척 하는 거. 말씀덩어리도 아니면서 말씀덩어리인척 하는 것. 제발 그런 거 좀 이렇게 색출해 내셨으면 좋겠어요.
교회를 못 부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교회는 어떻게 무너지고 부서지느냐, 일곱 교회가 다 촛대가 옮겨집니다. 일곱 교회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내가 만든 교회를 만들어버리면 돼요. 내가. 나라는 것도 내가 못 만들었지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내가 나서서 교회를 만들어버리면 그것은 기존교회를 가짜교회가 이렇게 펜스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처럼 가짜들이 그 교회의 커뮤니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겠지요. 그러면 그게 가짜 교회에요. 이 교회의 무너짐이에요.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가짜 교회를 무너뜨리는 설교를 해줘야 돼요. 그런데 어느 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회를 무너뜨리는 설교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진짜 교회는 아무리 무너뜨려도 말씀한 것처럼 안 무너질 거고 가짜 교회는 무너뜨리게 되면 가슴 덜컹 내려앉고 벌벌 떨 거고 벌벌 떤 쪽은 가라지고 “흩어지면 흩어지지 뭐. 집에 가서 혼자 예배드리지 뭐.”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안 무너진 교회고, 가게세가 어떠니 전기세 나오는데 십일조하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어가지고 관리비도 안 나오고. 이런 저런 걱정한다는 그 자체. 나이지리아 선교한다고 말은 걸어놨는데 선교헌금이 뭐 한 달에 20만원이 안 되가지고 500만원 필요한데 여러분! 뭐하십니까? 기도합시다. 이런 게 전부다 가짜에요. 가짜.
이건 내 계획이 아니고 성령께서 나한테 어제 밤 기도할 때 나한테 응답을 준 계획이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주의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버티는 것. 아까 제가 뭐라고 썼는가 하면 ‘사후적’이라고 썼지요. 사후적. 일이 끝나고 난 뒤에 교회라 하는 것은 이미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잖아요. 오셔서 노시지는 않았습니다. 교회를 만들었어요.
어떻게? 옛날 선지자에게 말씀으로 덩어리로 온 것처럼 신약 때 성령을 통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식하기를 어떻게 하느냐 그걸 사후적으로 알아요. 사후적으로 순서 정했지요.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신자 아닌가? 나같이 되어야 돼! 끄덕 끄덕 와가지고 신자라고 오다가 성경 속에 들어가니까 거기에 진짜 신자가 있고 막상 교회 모습 보니까 성경 속하고는 너무나 대비가 되면서 ‘아~ 이건 사교단체지 이건 교회가 아니구나! 느꼈을 때에 진짜 신자라 하는 것은 나는 신자가 아니다. 왜? 출발을 나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주님이 유일한 신자고요,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주님께서 유일한 신자고 아버지가 알아주는 사랑하는 자식이 아들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연줄로 해서 신자도 아닌 자를 주님의 능력이 임해서 신자 되게 한 그 그룹.
그 그룹은 뭐만 표현한다 했습니까? 복음만 표현한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런 논리적인 것은요, 들을 때는 논리가 되던데 돌아서면 엿가락이 엿가위로 다 잘라져요. 그래서 제가 반복합니다만, 항상 사후적이다 말이죠. 사후적.
사후적이니까 교회도 마찬가지로 사후적이어야 돼요. 교회도. 교회도 사후적이니까 같은 형제를 만날 때 의심을 해볼 수밖에 없어요. ‘저 사람이 자기 딴에는 은혜 받았는데 뭐 그건 지 생각이고 뭐 말씀이 복음이 나와야 그거지.’ 했을 때.
자, 복음이 나오면 그 사람은 형제다. 복음이 안 나오면 형제가 아니다. 이걸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 말이죠. 우선 복음이 안 나오는 사람은 누가 나오느냐 하면 나 또는 나의 행함이 나옵니다. 요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이렇게 행동한다.” 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나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거예요. 원인과 결과에다가 자기를 집어넣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런 행동을 안했으면 이런 결과가 안 나왔다고 우길 때 100% 신자 아닙니다. 요거 찾는 재미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교회까지 가지 마시고 가까운 이웃 사람들, 새로 이사 온 옆집 아줌마하고 이야기한다고요. “아줌마, 애가 왜 이리 이뻐요.” “내가 이리 키웠다고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내가 이렇게 신경 써서 그래요. 그런데 그 아줌마 교회 다녀요. “내가 얼마나 애을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했다구요.” 내 기도 열심히 해서 나온 결과 나왔다. 요게 신자 아닌 겁니다. 요건 자기표현이에요. 복음 표현 아닙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은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십자가가 들어있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배척당한 요소가 십자가입니다. 배척당하지 않으면 십자가라는 사건이 나타날 수가 없어요. 배척을 당한 거예요.
예수님을 누가 배척했다? 인간들이 배척했지요. 그러면 신자는 누가 나를 배척해야 돼요? 내가 나를 배척해야 돼요.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착해. 내가 너무 대견해.’ 아하! 이게 내가 지금의 나됨에 결과를 내 행동에다가 두는 이게 예수님을 배척할 수 있는 요소가 남까지 볼 거 없이 자기의 속에서 계속 배설물로 나오는 거예요. 배설물로.
그걸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그걸 배설물로 여긴 겁니다. 율법의 행함이라고 했어요. 율법의 행함. 율법의 행함이 계속 자기에게서 나오는 배설물입니다. 이 배설물이 빠져 나온다는 이 표현을 저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요, 요즘은 그런 집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가정마다 탕 약재 끓이는 도자기가 있지요. 약탕기가 있잖아요. 이거 하게 되면 저는 코를 막아요. 냄새가 지독해. 그런데 할머니하고 우리 어머니는 딱 해가지고 숯불에 피워가지고 한다고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삼베 조각을 가져와요. 요만한 작대기를 가져와요. 삼베 조각에 약재를 넣고 작대기로 감아 짜요. 삼베 직물 사이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약물이 떨어지거든요. 제가 어릴 때 그 기억이 생생히 나는데 저는 그걸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봤으면 좋겠어요.
세상 살아가면 갈수록 죽으면 좋지만, 아직 안 죽으니까 살아가면서 주께서 우리를 짜요. 짜게 되면 뭐가 나와요? 배설물이 나오는데 그 배설물이 뭐냐 하면 나 잘났다! 가 나와요. 나의 의가 나오고 나의 행동으로 이런 내가 됐다는 게 쫙 짜 나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알아야 남도 나하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게 눈에 확 띄어요. 눈에 확 들어온다고요. 내가 하는 행세 저 쪽도 하고 있구나! 그런데 나도 육신이 있는 한 그게 없을 수가 없어요. 계속 나와요. 자식 키운 자랑, 나이 들면 지 자랑 밖에 안하니까. 나오는데 자기는 성령에 의해서 이게 죄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신자가 아닌 사람은 그게 하나님의 의라고 착각하면서 튀어나올 때 도저히 형제라고 볼 수 없습니다. 형제가 아니니까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그냥 뭐 빼먹을 거 빼먹고 이용할 거 이용하면 돼요. 같이 시간 보내기 놀이 삼으면 되지 더 이상 깊은 의미를 두지 말고 그 쪽에 자기 몸을 기대지는 마세요. 괜히 하다가 실망하고 그 쪽도 나를 이용할 거니까.
그런데 형제를 만났다. 형제를 만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그 앞에서는 나를 안 내세워도 되는 Free, 어떤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냥 ‘편한 관계’지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가지고 ‘허물없는 관계’ 허물없는 관계가 되려면 전제가 있어요.
욕하려면 욕해라. 나 이런 행동하는데 욕하려면 욕해라. 그럼 형제 같으면 “욕할 거 뭐 있어. 나도 그런데.” 이리 되지요. 그 사이가 둘이 만남에서 철판을 까는 것이 아니고 철판을 던져 놓고 만나는 관계이기 때문에 죄와 죄의 만남이 아니고 죄와 죄의 만남에는 반드시 형제사이에는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십자가 말 안 끄집어내도 이미 거기에 십자가를 표현하는 하나의 쟁반. 아우라가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확인 또는 확인 절차가 돼요. 확인 절차.
삼일 전에 그렇게 만났다. 안돼요. 삼일 전이니까 안돼요. 오늘 또 확인 되어야 돼요. 한 달 뒤에 만난다. 또 확인 되어야 돼요. 주께서는 늘 만날 때마다 그렇게 확인하는 것은 “니 신자 맞아?” 이거 확인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음을 남을 통해서 파악하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있음을. ‘나, 나 혼자 미치는 줄 알았어. 나 혼자 착각이야. 엉터리 같은 복음을 빌미로 해서 남들 다 그리 안 믿는데 나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형제를 딱 만나는 순간 ‘나같이 미친 거 또 있네. 정말 미친 거야? 아니면 성경 속의 그 신자야?’
그 다음에 성경 속의 신자를 본다고요. 보게 되면 히브리서 마지막 디모데 나오거든요. 이제 디모데 나옵니다. 디모데가 1차 전도 때 터키 남쪽에 거기서 사도바울이 그를 만났지요. 그 다음부터는 2차전도 부터는 늘 함께 다니고 마지막 죽을 때까지 다녔거든요.
심지어 사도바울이 죽을 때 23절에 보면,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놓였다 하는 것은 감옥에서 놓였다 하는 뜻이에요. 유스드라 하는 그 동네에서 처음 만난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일본 사람이고, 엄마는 한국 사람이고 그렀듯이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엄마는 유대인이고. 그리고 외조모도 한국사람. 그러니까 유대인이란 말이지요. 어릴 때부터 이미 성경을 안 거예요. 그 이야기가 디모데전서에 나옵니다. 꾸준하게 사도바울하고 다녔는데 그 다닌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굉장히 많이 나오고 특히 사도 서신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 디모데가 나오는 것을 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저는 사도바울로 봅니다.
사도바울 아니면 디모데를 이렇게 언급할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다 사람들이 디모데가 누군지 안다는 전제하에 너희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디모데가 잡혔다는 소리 들었지? 이제 풀려났어. 이런 조로 이야기해서 편지에 기쁜 소식을 전하거든요. 사도바울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서체가 다르니 그런 이론을 해가지고 사도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는 그런 설이 우세해요.
그 다음에 24절에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같이 이달리야에서 있으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문안한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끝나거든요.
이 디모데가 왜 사도바울을 따라다닙니까? 취직했어요? 비서로 취직해서 한 달에 품삯 받고 일합니까? 전혀 그런 거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디모데를 자신의 형제 또는 자기의 제자 더 나아가서 자기의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아까 배운 거 해봅시다. 단어가 하나 나왔을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시. 공간 그 위치, 쟁반 그것과 관련지어야 돼요. 내가 생각하는 거하고 관련 지으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형제라는 이유 때문에 상대방을 우습게 볼 수 있어요. “나, 죄인이요.” “나, 죄인이요.” 형제 만났다. 그 다음부터는 만만하게 보고 성령의 아우라가 있는데 성령의 아우라를 헤치고 막 자기 원대로 함부로 다루려고 하는 그런 의식이 있습니다. 그럼 그 쪽이 신자가 아니에요. 그쪽이 신자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죄인인 건 맞아요. 못 난 거 다 맞아요. 맞는데, 못 난 것을 성도되게 하신 주님의 손길이 펜스(울타리) 주위에 완전히 펜스를 치고 있다 말이죠. 성령이잖아요. 그럼 펜스를 어딜 건방지게 우리가 그걸 그 철조망을 훼손하고 함부로 다가설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디모데를 제자라, 아들이라 이렇게 했을 때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함부로 한 게 아니고 반드시 뭐를 경유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로서 존재로서 대하는 겁니다. 아들로 대하고.
그러면 디모데에게 그냥 다가서지를 않고 뭐로 다가 서느냐, 오늘 히브리서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이걸 갔다가 쓰지요. 은혜를 가지고 다가서는 겁니다. 수박하는 친척이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왔다. 그럼 선물로 뭐 가지고 올라오겠어요? 수박은 무겁고 방울토마토 하는 친척이 촌에서 고모나 이모가 왔다. 특산물이 방울토마토다. 그러면 서울에 오는 친척은 뭘 가지고 오겠습니까? 방울토마토 가지고 오지요. 바로 형제에게 다가갈 것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예수 이름으로 만나는 겁니다. 형제들 사이에.
예수 이름으로 만나버리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의 잘잘못에 대해서 평가하거나 비방을 주거나 우습게보거나 얕잡아볼 수 있는 그게 전혀 안돼요. 은혜가 은혜를 앞장세우기 때문에. 은혜를 앞장세우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쪽은 용서 받은 자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고. 주님은 용서하는 자. 그러면 용서 받을 자를 이렇게 만나게 해준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사람만 현존해 있는 거예요? 현존은 현재 실존한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둘을 만나게 해줬다.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하면서 늘 이 이야기가 우리한테 풍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러면 의도적이 아니라면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를 누가 개입했습니까? 여기에 보면 천사가 개입했지요.
그러면 답이 딱 나왔네요. 성도와 성도의 만남, 신자와 신자의 만남은 반드시 누가 주선해야 된다? 천사라든지 성령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이 개입해야 돼요.
그래서 일반 사람의 만남은 그것은 왜 우리 둘이 만나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면서 서로 만나야 되는 반면에 성도의 만남은 항상 사후적이에요. 생각해보니까 주께서 만나게 하셨구나! 단 성도의 경우입니다. 성도. 성도와 성도 인척 하는 사람 말고. 말 잘 들어야 돼요. 신자하고 신자인척 말고. 신자와 신자의 만남은 사후적이라니까요. 만나보면 알아요. 아! 주께서 만나게 하셨구나! 주께서 하게 하셨구나!
자, 한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한다든지 그 집을 찾아갔다 합시다. 그 집을 찾아갔는데 제가 옛날에 강도사, 목사 되기 전에 있었던 실제 이야기에요. 부산 근처 기장에서. 그 땐 전도일이 심해가지고. 전도에 아주 열성 있어가지고. 너무 일찍 그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새벽5시에 간 적이 있어요. 그 영혼이 불쌍해서. 곧 주께서 재림하시면 저이 우이하나 싶어서. 지금에서 보니 좀 심했다 싶어요.
어떤 집을 찾아갔는데 자기는 주의 은혜라고 찾아갔는데 “왜 왔어요? 나 바쁜 거 안 보여요? 목사면 다예요? 목사면 꼭 만나줘야 됩니까? 목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라.” 이렇게 나왔을 때 자기는 막 기도 중에 얼굴이 떠올라가지고 지금 성령께서 사도행전10장을 생각해가지고 지금 천사가 나보고 만나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와보니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 자, 그 때는 어떻게 됩니까?
“사실은 기도 중에 당신을 봤습니다.” 이렇게 해야 될까요? 아니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문 닫고 나와야 돼요? 어떻게 합니까? 문 닫고 나와야 돼요. 왜냐 하면 사후적이기 때문에.
자, 잘 보세요. 내가 간다고 할 때 이것은 내 행동이 내가 원인임을 고집하는 거예요. 원인이라는 것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재정립을 해야 되는데 그 결과가 영 아니라는 결과를 내렸으면 내가 생각한 이 원인이 나의 착각이며 나의 오버에요. 내가 오버한 거예요. 내가 너무 저 사람 영혼을 사랑했다. 그것은 주님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그냥 나 혼자 생각을 너무 깊이 한 거예요. 그래야 이 정도 저 사람 영혼을 생각해줘야 그래야 내가 주의 목자답다고 내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장착하고 자기를 위선하고 기만하고 위장한 거예요. 그런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
기도하기 싫다는데 머리를 막 쥐어 잡고 주여! 주여!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본인은 손만 얹어지고 무슨 횡포를 당하나 싶어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데 이쪽 계시 받은 권사는 주여! 하고 있고요. 주여! 하는 건지 아니면 돈 내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되고.
자, 다른 경우를 봅시다. 그냥 무심코 만났어요. 무심코 저 쪽에서 “아이고, 안 그래도 목사님 만날 줄 알고...”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당신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 없는데. “아이고, 기다렸습니다.” 이리 나오더란 말이죠.
그 때는 뭐냐 하면 주께서 그렇게 만나도록 주선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아~ 내가 만나고 싶다 하는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나는 남들한테 남들의 그 움직임에 떨려가는 그러한 시다발이 종의 위치에 있구나!’ 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 세상이 아니고 하기 싫던 좋던 관계없이 일을 일으키게 되면 본의 아니게 거기에 맞춰 따라야 될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나는 작아지는 것. 이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갈수록 내가 작아지는 거예요.
작아지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사라지지요. 작아지고 사라져요. 작아지고 사라지게 되면 가정에 아무 문제도 없고 교회에 문제가 없어요. 교회의 모든 문제는 뭐냐, 내가 안 작아지고 내가 버틴다던지 더 커졌다고 착각한데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내가 이 개를 볼 때마다 생각나요. 이 개가 개의 주제파악이 되어야 될 텐데 오래 살면 완전히 사람행세 한다니까요. 나중에는 사람한테 기어올라 타지요. 이쁘다 이쁘다 하니 나중에는 기어 붙으려고 해요. 더 작아져야 돼요. 우리의 생각이 아주 작아지고, 작아지게 되면 나는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돼요. 나는 엷어져야 돼요. 바람불면 훅 날아가야 돼요. 에어컨 바람 쐬면 감기 걸려야 돼요. 링기루 맞아야 되고. 아주 약해야 되고 엷어져야 돼요.
그래야 내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될 때, 내 뒤에 그리스도가 크게 표현돼요. 내가 만약에 단단해 지고 두꺼워져 버리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해놓고 전부 다 지 신앙자랑, 지 지식 자랑 되어버린다고요.
그래서 여성이 남성보다 위대한 점이 바로 그런 점이에요. 남자는 개 코도 없는 게 직장 나가서 사회 나가서 실컷 터져놓고 그 분풀이를 집에 와서 그것도 술 먹고 와서 깽판부리고. 개 코도 없는 게 큰 소리 친다고요. 술 먹고 들어와 가지고 잘 것이지 잠자는 애를 깨워가지고 “아이고, 자슥아! 니 아들 아닌가” “그냥 자소. 그냥 자소” “아빠 또 술 먹었어?” 눈 비비고 깨고. “아이고, 내 아들 용돈! 용돈! 자 500원” “아빠 냄새” “아빠 한 잔 먹었어.” 아이고~~
허세와 허풍을 위장하기 위해서 술 먹어요. 나 말고 다른 나를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기 안 죽고 나도 존재감이 있는 나. 술을 빌어서 하는 거예요. 남자뿐만 아니고 아가씨도 마찬가지고. 자기의 존재감을 유지하려 하는 거예요. 자기를 작아지면 되는데. 자꾸 키우는 거예요. 세상이 자기 세상인줄 알고.
왜 자기 세상이 아닌가?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