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강-YouTube강의(주님의 약속)170704-이 근호 목사
제197강, 제목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의 약속한 바,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어느 인간도 “야! 주님이다.” 이렇게 알아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 근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약12Km된다는 겁니다. 그 베들레헴 근처 양치는 목자가 성경의 박사가 돼가지고 “이 근처 쯤 메시아 태어나는데.” 이렇게 해서 찾아내는 게 아니지요.
누가 강권해서 가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천사가 와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럴 때 그는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했지요. 그래서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강권해서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걸 알고 난 뒤에 추후 적으로 찬미가 되고 찬양이 되고 예수님 고백이 되는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자 탐색해서 찾아낸다는 자체가 그건 100%가짜 구원입니다. 천국 못 갑니다. 반드시 구원에서는 외부적인 도움 자가 있어야 돼요. 천사든, 성령이든. 도와주는 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은 본인의 노력과 본인의 관심사가 자기를 구원했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원인으로서 제시할 수 없어요. 열심이라든지 행함이라든지. 그래서 왠 은혜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성경에 그런 예가 많지요. 에스더 같은 경우에 자기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이야기하기 전에 에스더가 궁궐에 있으면서 바깥에 유대인들이 1년 지나면 완전히 몰살을 당해요.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성경 연구해서 알았습니까? 누가 와서 전해줬지요. 모르드개가 전해줬잖아요.
그것처럼 항상 택한 백성, 구원 받기로 작정한 사람은 주님께서 그냥 방치하는 법이 없어요. 끝부분에서 건진다던지 나이 90되어서 건지던지 어떻든 간에 반드시 데려가는데 공통점은 있어요. 자기가 애써서 구원되지 않았다는 그런 공통점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의 교회라 하는 것은 특정 교회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특정 교회가 주님의 구원 받는 교회라고 만약에 자부한다면, 그 특정 교회가 교회를 주님께서 만약에 부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를 들어 부순다는 말은 유황불에 부순다는 뜻이 아니고, 깡패로 부순다는 말이 아니고, 다 거듭났다고 여기고 30명 모였는데 나중에 1년도 안돼서 2명 남았다든지 3명 남았을 때에 그럼 앞에 나머지 28명이 한 고백이 뭐가 돼요?
다 주의 은혜로 했습니다. 라고 해서 왔는데 다 흩어졌을 때에 그럴 경우에도 주님의 교회는 여전하다. 라고 한결같이 고백하면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 말을 다시 한 번 모아서 정리해 보면, 교회에 나오더라도 예배드리더라도 교회에 연연하지 않겠지요? 다음 주일에 이 사람들이 다 사라진다 할지라도 구원이라는 것은 교회 때문에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활동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연연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그 교회의 목사가 설교할 때 그 교회에 연연하는 설교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전혀 안 나오겠지요. 교회에 연연하지 않는 조로 설교가 된다면 그러면 그 설교의 핵심은 뭐가 되겠어요? “교회는 우리가 관리하고 우리가 유지.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이 시간도 관리하십니다. 심지어 흩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가 깨어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깨지거나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보통 인간들에게는 그러한 주님의 조치가 나중에는 은혜롭지만 막상 인간들은 육정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있는 단체나 소속에 대해서 항상 거기에 대해서 안절부절하고 염려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시편13편4절을 읽어보겠어요. 시편13편4절에 보면 다윗이 그 원수한테 굉장히 시달릴 때에 하는 신앙고백이 나오는데요. 4절에 보면,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이리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약속 같으면 우리에게 “야, 약속이다. 됐지? 약속 잘 간직해. 나는 간다.” 이러면 간단할 것 같은데 시편13편 앞에 죽보고 뒤에 죽 보고 4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를 구원될 자에게 이렇게 마주치게 하고 만나게 하고 부딪치게 하고 엮이게 만들어요.
우리는 약속이라는 것이 딱 규격화 되어가지고 달랑 이건 믿습니다. 하면 약속 믿는 게 그게 굉장히 간편한 것 같지요.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 성경 믿습니다.” 끝났잖아요. 별 문제 없잖아요. 그런데 주의 원수를 왜 우리에게 붙여주십니까?
왜 붙여줘요? 딱 주님하고 나하고 “이거다!” “예, 믿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했으면 됐지 왜 주의 원수로 하여금 우리에게 찾아들게 만들고 왜 하느냐? 그것은 원수가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믿습니다. 하는 우리 내부에 이미 원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의 약속을 내가 믿어버리면 나는 건전한 내가 돼요. 괜찮은 나 되고, 하자 없고 별로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정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 돼버려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뭡니까? 믿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 내가 나의 결정에 의해서 나는 가뿐하게 구원됐다. 그런 근사하고 괜찮고 온전한 나를 다시 나에게 그걸 내가 갖고 싶은 거예요. 그런 나를 회수하고 싶은 거예요. 괜찮은 나를.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의 기대치, 욕구를 내가 충족한 게 됩니다. 그러니 주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보내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이 안 되지요.
내 적은 주님의 적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내 적이 주님의 적이고 나는 주와 한편이기를 우리가 소망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문제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 느낍니까? 잘 안 느끼고 싶지요.
내가 문제 있고 남은 문제 있는데 나는 문제없다고 싶다고 그렇게 우리가 소망인데 그게 아니고 주의 원수가 우리 속에 원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면, 약속은 주의 구원의 약속에 의해서 주님이 알아서 하지, 내가 결심 먹는다고 해서 내가 야무지게 ‘내가 믿음생활 잘해야지!’ 이리 한다고 해서 구원에 골인되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주의 원수가 찾아와서 작동을 해줘야 날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감사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교만치 아니하고 자만하지 아니하고 시건방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어제 믿었으니까 오늘 당연히 믿는 것처럼 그렇게 까불지 아니하고 어제 믿은 나를 내가 믿어버리면 이건 주님의 활동보다도 괜찮아진 나를 계속 붙들려고 하는 그런 나의 의지가 강한데, 그 의지 문제 있습니다.
주님의 의지로 구원받는데 갑자기 어느 날 주님의 의지가 나의 비장한 각오로 바뀌었어요. 소위 순교자 되고 싶은 열망, 오지에 가서 선교하면서 작렬하게 죽고 싶은 그러한 희망, 열정, 나에 대한 열정.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심어준 열정이라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성경 말씀을 다시금 봐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안의 공로만 드러나는 해석이 되어야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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