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 139강-큰 능력(신26;5-11( 1706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26. 21:12
2017-06-25 14:57:16조회 : 41         
   큰 능력 2017062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큰 능력(신명기 26:5-1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2Whd9YFrE_k, Hit:1
 이근호17-06-25 15:42 
강한 능력 

2017년 6월 25일                  본문 말씀: 신명기 26:5-11 

(26: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26: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26: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26: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26: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26: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애굽이라는 나라는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탈출, 혹은 구원이라는 개념도 달라집니다. 단순히 특정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면 오늘날에 잘 사는 나라로 이민가는 것이 곧 구원인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또한 못사는 형편에서 잘사는 인생이 구원이라면, 모든 부자는 다 구원받은 증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능력과 기적을 동반해서 나타나셨다는 말은 그만큼 구원될 자들이 애굽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을 압박하고 구박한 것은, 자기 나라에게 나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가지 말라고 구박한 겁니다. 

이는 곧 이 잘사는 애굽 나라말고 팔자 고칠 동네가 없다는 자신감이기도 하고 바로왕의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어딜 감히 내 밑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다하다니 괘씸한 것들!”라는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히브인들 당사자들이 애굽 밖으로 나갈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생각이지 히브리인들의 중지(衆智)가 아닙니다. 즉 바로왕이나 히브리인들이 마음들을 한결같습니다. “이곳 없이는 나도 없다”입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해서 “나는 이 나라의 산물이다. 따라서 나라와 나는 하나이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려고 합니다. 

나올 마음도 없고, 나오고 싶지도 않는 자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완고함이 충돌합니다. ‘사이좋게 벗어남’이라는 공식은 구원에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이 세상, 곧 ‘애굽의 산물’이기에 그들이 기대한 ‘큰 권능’이라든지,‘큰 기적’은 곧 ‘큰 횡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애굽과 분리시키는 이유는,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레위인’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레위인이 없는 집단과 레위인이 있는 집단과의 분류입니다. 레위인의 존재가 구원의 핵이요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은 ‘산 자’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더 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행위들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 요건이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세계를 벗어던질 수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현실의 일부로서 실천성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남긴 것들의 집합이 그 때의 유일한 그들의 현실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현실을 벗어난다는 것은 본인이 그 현실 속에서 죽은 자가 되어 손을 떼지 않는 한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정 구원의 훼방은 본인이 감당하겠다고 나서는데 있습니다. 즉 이는 레위인들의 실존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움직이는데 동력을 주는 엔진부위는 레위인들이 벌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는 ‘죽은 행위의 반복’입니다. 애굽에서의 반복되는 행위는 그 세상에 대한 충성심입니다. 이 충성심을 위해서 반복해서 맹세, 맹세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복이 본인의 습관이 되고 습성이 됩니다. 누가 함부로 자기 습관을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습관은 제2의 천성입니다. 

그것이 곧 ‘지금의 나’가 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나의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는 ‘큰 권능 큰 능력’이란 인간들이 기대하는 ‘큰 생존대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알지 못하는 죽음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형국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진리가 기다리는 그 죽음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레위인들의 매일같이 하게 되는 ‘죽음에 관한 행위’가 실제 이스라엘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 줄까요? 여전히 애굽적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자체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 구원이 멈추지 않고 질주할 수 있게 할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의 실제화’로서 인간들이 애착을 갖는 그 생존차원에서 ‘망함’을 삽입하는 것으로 제사를 현실화로 번역하게 됩니다. 

룻기 4: 4에 보면,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 실질적으로 성사되려면 인간들이 기대하는 생존의 요건 전부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즉 애굽에서 살다가 이제는 안심놓고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모시고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모든 시도가 도중에 무참하게 깨져야 합니다. 마치 기차에 올라타서 평안히 목적지로 간다고 여기다가 어느새 본인이 예상 못한 철로 위를 달리는 황당함과 같은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동은 본인의 절제력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자신들에게 선택하는 의식과 그것을 실행하는 의지가 구비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늘 외부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율적으로 선택행위를 주입시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이나 이스라엘이나 이런 의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애굽 사람들에게 없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위에 출-애굽의 정신을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애굽 나라에서 탈출은 단회적이지만 이스라엘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탈출을 두고두고 반복되어야 하는 겁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스라엘 가정이 그들의 선택에 의하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땅을 포기하고 모압땅으로 살기 위해 갑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것으로 전부를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이런 ‘생존의 실패’를 재료로 하여 현실 속으로 삽입됩니다. 유력한 인물은 보아스가 잃어버린 엘리멜렉의 토지를 되돌려줍니다. 

자기 돈을 희사하면서까지 자기 토지가 아닌 엘리멜렉의 땅 되게 합니다. 이로서 이 엘리멜렉은 새로운 노선으로 등장합니다. 즉 ‘내 것이 아닌 노선에서 나는 달리 산다’는 원칙이 수립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생존하려는 모든 삶의 조건이 부끄럽게 됩니다. 즉 애굽에서의 구원에 이런 큰 힘이 투입되는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지경을 충분히 들추어내는 작업과 병행되는 것이 바로 참된 구원작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피 앞에서 저희들의 입을 닫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17-06-26 13:32 
139강-신 26장 5-11절(큰 능력)1706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6장 5-11절입니다. 구약성경 301페이지입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 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출애굽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출애굽, 애굽에서 나왔다. 애굽에서 나왔던, 경과했던 그러한 과정이 신약에 오게 되면 세상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애굽이라는 것을 우리가 단순히 하나의 큰 나라, 그런 걸로 생각하면 안 돼요. 만약에 애굽에서 나온 것이 그냥 큰 나라에서 빠져나온 것이라면, 요즘 같으면 이민가면 되죠.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빠져나가듯이, 못 사는 나라에서 탈출해서, 시리아의 전쟁에서 벗어나서 유럽으로 난민 돼서 나간 것처럼. 

  

근데 그걸 마치 출애굽과 비교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을 몰라서 그래요. 땅에서부터 탈출이 되어야 합니다. 땅에서부터. 땅에서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탈출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이동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민 가는 것을 출애굽이라고 여기는 것뿐만 아니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전도가 뭐냐 하면, 전도라는 것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옮겨질 때 전도가 되어야죠. 교회 갔다가 절에 가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가 되려면 그 사람이 실질적으로 땅에서부터 구원을 받아야 돼요. 북한말 중에서 일없다는 것이 있잖아요. 일없다(우리말로 괜찮다 상관없다),라는 말. 땅에서 나 일없어. 상관없어. 땅에서 뭔들(뭘 해도 괜찮다. 좋다)!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들 그거 나 일없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렇게 돼야 그게 구원이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니라는 존재는 아직 이 땅에 있잖아? 라고 이렇게 반격을 해오죠. 이 땅에 있잖아? 니 눈에는 땅에 있는 걸로 보이느냐? 주님의 성령 안에 있으면 그게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니 눈이 잘못되었어. 성령을 안 받은 눈이기 때문에 땅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 안에 있어!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겠죠. 뭐 좋은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겠지만.
 

  

오늘 본문이 뭐냐 하면 애굽에서 학대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은 학대하는 자에요. 그런데 여기서 복잡해지는 것이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을 학대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가라고 학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구원에 있어서 복잡하고 어렵게 돼요.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 이래서 학대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가지 말라고 학대한 거예요. 니 나가봤자 이 세상 사람이야.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은 없어. 정신 차려 이 바보야! 이 세상밖에 없어. 나가면 고생만 해! 

  

왜 그러냐 하면 니가 평생 살아왔던 행세와 니가 가졌던 노하우, 니가 생계를 책임지려고 했던 모든 기술, 용접이고 영어회화고 간에,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더 지독한 이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세상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하는데, 충성심의 발로는요, 반복해서 맹세, 맹세, 맹세하는 거예요. “다시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용서해주옵소서.” 이런 것 있잖아요. 회사에서 뭔가 일이 잘못됐다. “나가시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사장님 이번만 봐주세요.” 그게 맹세에요. 그럴 때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이고. 

  

자기를 살리는 소속감 속에서 떠나버리면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이라는 성질이 뭐냐, 더는 갈 곳이 없다. 이걸 확정짓는 세력이 바로 애굽입니다. 더는 갈 곳이 없다. 이 땅 아니면 더는 살 곳이 없다는 것을 확정짓는 그 분위기. 그게 그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도 우리에게 애굽입니다.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합당치 않다고 할 때에, 거기에 대한 제자들이나 주위사람들의 반응은, 그럼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이 애굽에서 탈출이라는 이 개념을 알려면, 애굽을 먼저 알아야 되고요, 애굽을 알게 되면 거기서 탈출한다는 것이 오늘날 신약시대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애굽에서의 탈출은, 사실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면 이거는 생각조차 못하는 겁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애굽이라는 그 창고를 에코echo, 메아리치는 거예요. 나는 하고 싶고, 갖고 싶고, 이러는 것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그 천장을 음파가 치고 그걸 내가 되돌려 받는 입장인 겁니다. 잘 살고 싶고, 잘 먹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고. 여러분, 예쁘게 돈은 쓸 수가 있는데 돈 벌 때는 예쁘게 안 돼요. 예쁘게 돈을 못 벌어요. 그게 우리입니다. 이미 체질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그것만이 행복이라고 우리가 자부하고 있어요. 우리가. 세상을 멀찍이 관찰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못 빠져나와요. 세상을 못 빠져나온다? 그런데 분명히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빠져나왔잖아요? 이렇게 주장하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그 뒤에 애굽에서 보게 되면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애굽의 엿가락이 늘어난 거예요. 애굽이 확장된 거예요. 애굽이라는 장소에서 사는 애굽 말고, 그 속성, 알갱이, 젤 같은 것. 그 속성만 더 잡아당겨서, 애굽을 확장하기 위해서 주께서 더 잡아당긴 거죠. 빠져나온 인간이 그 애굽 같은 속성을 가지고 빠져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애굽에서 살아온 인간성, 애굽에서 구축된 이 성질과 성격, 이거는 어디에 써먹을 건데요? 애굽이 아니면 써먹을 데가 없어요. 그래서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제2의 애굽, 제3의 애굽을 그 현장에서 계속 만들어 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에 가도 다 과외 한다고 안 합니까? 한국에서 했던 그 치맛바람이 브라질을 가든, 뉴질랜드를 가든, 자기들 딴에는 괜찮은 교육제도가 있다는 그 나라들도 한국 사람들이 가서 과외하게 되면 그 주변에 있는 외국사람들도 다 과외하고 학원 다니고, 다 그렇게 해요. 참 좋은 것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못 빠져나왔어요.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제2의 빌리지Village, 한국의 정착촌을 만드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전략이 무엇이냐, 여기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말씀이 나오는데요. 8절에 보면 “여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를 얼른 보면 크다, 위엄이 있다, 이적, 기사 같은 말인데, 예상 못한 놀라운 사건이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애굽에 사는 사람이라고 탓하지 않고, 니가 사는 것을 지금 정당하다고 치고, 만약에 니 소원이 뭐냐? 어떤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느냐? 라고 묻게 되면, 큰 것을 원해요. 지금보다 더 큰 것. 대단히 큰 것. 엄청나게 큰 것. 큰 힘.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힘이 모자라서 하는 그것을 중간에 주께서 큰 힘을 주시면 비로소 내가 얻고자 하는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크다고 하고 대단한 기적으로 봅니다. 

  

그런데 막상 신명기 이전에 출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냈을 때는 인간들이 기대하는 큰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뭘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 11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 지니라” 여기에 레위인이 나오죠. 

  

레위인은 죽음을 관장하는 사람들이에요. 반복해서 죽음을 이야기할 사람들이에요. 제가 아까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에서 반복해서 충성하고 맹세한다고 했죠. 그저 내가 속해 있는 나라만 잘 되기를 바란다. 이게 정치 아닙니까? 사드반대하고, 사드찬성하고.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납득이 되는 세상은 이 세상 밖에 없는데, 이 세상은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이 나라 건드리면 내가 힘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레위인이라는 존재가 필요치 않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레위인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레위인이 없는 구원이 있느냐? 없어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이 주신 아가페 칼을 빼버리면 우리는 죽어요. 이 말은 뭐냐, 그 칼이 꽂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을 누리는 겁니다. 그 칼이 꽂혀있기에. 

  

근데 그 칼은 칼이에요. 나를 살려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날마다 반복해서 죽이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를 반복해서 죽이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상상도 못한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겁니다. 그럼 맨날 칼에 찔러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그걸 레위인이 대신해요. 레위인이. 

  

대신 죽어주는 일을 하는 자가 레위인이라니까요. 레위인 빼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곡식 거두고. 그러나 레위인이 산다는 것은 죽음과 관련성이, 연관이 되어야 돼요. 계속해서 양을 잡고, 소 잡고, 염소 잡으므로 “우리는 이래 산다. 우리는 이래 살아. 너희들은 곡식 농사지으며 살지? 나는 이렇게 살아. 그게 레위인이에요. 

  

그럼 목사님, 우리가 레위인처럼 살아야 됩니까? 라고 하면, 레위인이 없습니다. 레위인은 이미 작업 끝나고 전부 다 마감했어요. 오후 두시에 야구하러 가는데, 평소처럼 오후 6시에 야구하는 줄 알고 갔는데 다 끝났어요. 가봐야 야구선수들 없어요. 오늘 신약에 있는 성도 입장이 뭐냐 하면 구약 말씀대로 지켜가지고 내가 레위인처럼 살라고 가보면 이미 끝났어요. 그걸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는 레위인이 해야 할 작업이 이미 완료가 되고 말았어요. 완료되고 말았습니다. 그 완료된 자리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 보이고 딴 건 다 안 보여요. 그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아무도 레위인의 일을 제대로 못했다. 아무도 레위인의 짓을 제대로 못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신약의 마지막 때의 성도는 이미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다시 애굽이 무엇인가를 재구성하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애굽이 무엇인가?나는 왜 그렇게 애굽을 좋아하고 애굽에 치밀한가? 무엇이 나에게 공포를 안겨다 주는가? 그거는 내 속에 있는 애굽적 요소 때문에 내가 모든 일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겁을 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낮에 옛날 박사교회에 있었을 때 성도가 오랜만에 왔어요. 보면 박사교회에 있던 성도는 아무도 없거든요. 한 분 있어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분이 인천 사시는데 포항에다가 애를 보냈답니다. 그래서 일을 저질러버리라고 했어요. 일을 저질러버리세요. 만약에 일을 저질러버리지 않으면 공포가 계속 남아있어요. 일은 일대로 안 되고 그것 안 한다고 공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내가 나를 단도리해서 해서 살았다는 인상을 계속해서 지워나가시는 겁니다. ‘내가 몸을 움츠리고 조심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지금 밥이나 먹고 산다.’라는 그런 인상을 져버리면 영원한 애굽인입니다. 영원한 애굽인, 의지의 애굽인.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계란은 영원히 계란 되라고 껍질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계란의 의미는 껍질 깨고 닭 되라고 나온 겁니다. 닭 되라고 나오는 거예요. 껍질이라는 것은 깨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에서 계란을 가지고 나와서 광야에서 다 깨버립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살던 버릇이 있기 때문에, “아휴 , 안 돼요. 나는 죽어요.”라고 하면, 그러면 “죽어라!”는 거예요. 껍질이 없으면 죽어요. 그래야 살아요. 나를 둘러 싼 껍질이 뭐냐, 그게 애굽적 사고방식이고 애굽적 의식입니다. 그걸 신약에 죄라고 이야기해요. “세상에! 무슨 죈데? 착한 사람이 많은데?”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것.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카톡으로 보냈는데, “내가 예수 믿어도 이렇게 슬퍼하고, 기쁨이 없으니까 제가 신자가 아니죠?”라고 그렇게 질문을 하길래, 내가 신자냐, 신자가 아니냐는 자기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로 결정됩니다. 본인 좀 놔두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우리가 못한 것을 해내셔가지고,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벌써 빼냈다는 것을 이미 통보해주시는 분이잖아요. 통보해주시는 분. 통보라고 하는 것은 합격되고 난 뒤에 통보하는 거예요. 시험 치지도 않았는데 이미 합격증이 날라 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랴부랴 뭐만 찾으면 되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레위인을 찾으면 돼요. 그게 레위인과 함께 있는 겁니다. 레위인 찾으면 내 중심이 아니고 레위인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레위인 중의 레위인, 마지막 최종 레위인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날마다 우리의 죽음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묵시적으로 한 번 죽었고, 우리는 아직도 역사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결국 반복해서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직도 세상 사람으로, 세상의 근성과 그 성질을 계속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 근성을. 

  

‘나는 이제 정신 차려야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지.’라고 이렇게 한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니를 알아?” “저는 나이가 서른다섯입니다.” “그럼 마흔다섯은 아니잖아?” 그럼 35에서 45까지 새롭게 경험해야 될 세상 것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아직도. 

  

나는 뭐 80이니까 내일 모레.....,라고 하시는데, 아닙니다. 지금 어지간하면 100이 돼요. 자식들 불효자 다 만들어놓고 가요. 자식들 불효자 다 만들어놓고 갑니다. 아이고! 지긋지긋하다! 고개 젓게 만들어요. 자동적으로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지 않다는 것을, 본인이 안 지켜도 결국 다 지키게 만듭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자기는 82이고 부모는 100이라고. 기가 찰 일이 아닙니까? 

  

따라서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실천에 의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 “자, 천국이다. 기다려라.” 이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실천하기 위해 니가 얼마나 애굽적이며 애굽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애굽에서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꽃보다 아름다워. 그 정도 애굽 친화적입니다. 애굽 친화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 의지로 달성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레위인 중심으로 보게 되면 그걸 선행적 선택이라고 해요. 선행적 선택이 시간이 아직도 흐르고 있는 이쪽에 오게 되면, 나의 선택으로 이게 표현이 돼요. 표현이. 선행적 선택이, 감추어진 선택이, 수시로 나의 선택의 형식으로 이게 발현이 된다니까요. 우리는 계속 선택해요. 자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우리는 뭐든지 선택해요. 급행을 탈까? 402번 탈까? 우리는 수시로 선택한다고요. 

  

이 선택의 반복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습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신 차리고 걷지 않습니다. ‘자, 오른발 했으니까 왼발차례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습관화되어서 자동적으로 나오죠. 자동적으로 나온 것을 그 뒤에 가서는 내가 선택해서 오른발, 왼발 내딛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우깁니다.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줘요. 주께서 그렇게 하셔요. 고민거리를 주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 함으로, 거기에 뭐가 딸려 나오는가, 아직도 우리가 얼마나 애굽에 깊숙이 박혀있고,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니고, 애굽에서 구원될 마음조차 우리가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주님의 예인작업에, 본인의 작업에 본인이 참여하시는 거예요. “역시 나 혼자 건지기를 잘했구나!”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애굽의 강한 손, 강한 능력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평가할 수가 있는가, 이게 마지막에 어려운 건데요. 룻기 4장 4절을 보겠습니다. 강하다고 했으니까, 여러분, 뭐가 강한지를 이 말씀에서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강한지를 한번 보세요.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 

  

이게 무슨 대목이냐 하면 보아스 라는 유력한, 돈 많은 남자가 룻이라는 이방 여인, 히잡 뒤집어 쓴 인도네시아 여인이라고 보면 돼요. 그 여인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희생을 합니다. 희생을 하게 되면, 옛날에는 재산이 땅이었거든요. 부동산. 그 땅이 누구 것이 되느냐 하면 보아스 본인 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인도네시아 여인 쪽 땅이 된다니까요. 뭐 이거는 아무 이익도 없는데 그냥 낭비한 것이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원래 나오미 가족 중에 엘리멜렉이라는 가족이 있었는데, 여기 남자 세 명이고 여자가 하나에요. 엘리멜레과 두 아들, 여자는 나오미. 이렇게 해서 애굽에 내려가는데, 여자 하나 빼고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는데, 거기에 이질적인, 이방적인 요소가 들어와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항상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난데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와가지고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어버려요. 부끄럽게. 우리가 뭘 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손 털게 만들어버려요. 

  

이방 여인 룻이 들어와서, 나오미가 땅 팔고 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재산은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 재산을, 남자 하나 잘 꿰차가지고,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요? 자기가 해야 할 일도 아닌데 당신을 위해서, 당신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아낌없이 내가 희생하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순서 지켜가지고, 권리를 무를 다른 사람이 있는데, 순번이 두 번째 순서에요. 두 번째 순서 기다려서 희생을 하고 룻과 혼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 엘리멜렉 가문을 이어버려요. 보아스 자기 가문이 아니고. 나쁜 짓해서 죽은 자식 가문을 이어버린다고요. 

  

구원이란 뭐냐 하면 노선 바꾸기에요. 내 이름, 내 자존심, 내 위신으로 가득 차있는 그런 흐름에서, 나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선으로 갈아타기 하는 것. 이게 구원이에요. 이걸 제가 이렇게 설명해요. 나의 기억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기억에 함몰되는 것. 주님의 기억에 의해서 섞여버리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조종 받는 상태. 내게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런 노선으로 갈아타는 거예요. 선이 달라요. 선이. 

  

그게 인간이 아무리 해도 못하는 거예요.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기 때문에, 이게 큰 기사요, 기적이요, 권능이 되는 겁니다. 동일한 나에요. 나는 달라진 게 없어요. 나는 똑같아요. 애굽적이에요. 세상 좋고, 세상한테 맹세하고, 충성심을 다하는데, 바닥의 노선이 그런 식으로, 밥 세끼 먹고 똑같은 식인데, 가는 방향이 어느 쪽이냐 하면 그리스도 쪽으로 이미 가도록 방향이 그렇게 바꿔진 거예요. 

  

그래서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다가 복음 알고 난 뒤에는 가면 갈수록 대화가 안 돼요. 당론이 형성이 안 돼요. 대화가 안 되면서 뚝뚝 떨어져나가요. 그러면 누가 답답하냐면 우리가 답답해요. 친구야! 하고 불러도 저들이 자꾸 떨어져나가요. 그러면 누가 애간장이 타냐 하면 우리가 애간장이 타요. 왜냐하면 애굽의 즐거움은 그들이 없이는 즐겁지 않기 때문에. 80, 90이 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대한 그 집착과 충성심과 맹세, 변함이 없어요. 태극기 들고 나간 사람들이 다 70대에요. 6.25때 목숨 바친 이 나라를 누가 건드리냐? 해서 다 들고 나오죠. 첫째는 그들이 할 일이 없다는 거고. 두 번째는 기본생활비가 나라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세 번째 지하철이 공짜라는 사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거기서 아직도 세상적으로 자기의 존재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그런 식으로 구성해내는 것.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아, 이게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뭐 돌아서면 5분도 안 가지만. 노선이 달라서 내가 의도하지 않는 구원으로 질질 끌려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큰 권능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큰 돈 번다든지, 로또 당첨된다든지, 땅값 오른다든지, 그게 큰 게 아니고, 그건 애굽의 확장이고, 

  

진정한 큰 권능은 내가 도저히 안 달라지는데, 나도 고집이라면 한고집하는 사람인데, 그 고집이 애굽 덩어리로써 주 앞에, 십자가 앞에 나를 나타나게 하는 그 땡기는 힘이, 그게 큰 권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주시는, 너무나 은밀하고 조용하게 벌어지는 이 큰 권능을 우리는 곡해했습니다. 남들 가진 것을 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원망했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바닥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