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강-고후 7장 9-12절(뜻대로 하는 근심)1705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7장 9-12절입니다. 신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7:9-12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사도바울이 먼저 쓴 편지인 고린도전서에 의해서 고린도교회에 일방적으로 개입을 합니다. 사도의 개입은 사도이기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개입이지요. 그 계시가 없었더라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없으면 회개도 없을 것이고 회개도 없으면 그것은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는데 살아있는 주님께서 가만있지 않고 수시로 들쑤십니다. 요청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우리 인생에다가 푹푹 쑤시지요. 침놓는다고 보면 됩니다. 계속 침을 놔주는 거예요. 따끔하지요. 아픕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지요.
그 뒤에 또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것이 내가 의도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그런데 그 근심이 있는 자라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성도이며 제 코스를 제대로 찾아서 구원받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근심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근심이 갑자기 두 종류가 되었습니다. 10절에 나온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근심 앞에 ‘세상근심’ 그냥 근심이 아니고 세상근심이라는 것이 딱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근심에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난 뒤의 분류라는 말이지요. “근심은 없어서는 안 되는데, 근심은 있는데 네가 생각 좀 해봐라. 그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인지,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근심인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 성경말씀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아니하면 그냥 근심이에요. 그냥 근심으로 나와 버리면 어떤 오류가 남느냐? ‘내가 왜 걱정하고 있지? 살다보니 걱정하는구나.’라고 정리가 된다면 그것은 사망에, 지옥에 이르는 근심일 뿐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계기가 되어서 근심이 되어버리면, ‘이 근심은 뭐지? 아, 이 근심은 지금 방향이 제대로 천국으로 맞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심’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실제로 천국이 있다는 결정적 증거물로 주께서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성경 속에 있잖아요. 이것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어떤 식으로 구체화되는가? 이것은 성도의 덩어리, 성도가 사는 그 덩어리가 말씀이 말씀으로, 단지 문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확실한 실제입니다, 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성도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세상근심은 내가 나를 살리는데서 오는 근심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내가 근심하고 싶지도 않은데 근심의 주체가 저쪽 하늘에 있어요. 주님이 걱정을 하는 겁니다.
‘저거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물이 좀 시원치 않네. 미흡하네. 내가 이땅에 확실하게 천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 그렇다면 저 인간에게 내가 말씀의 침을 놔야 되겠다. 말씀을 링거 놓듯이 주사 놔서 그 안에 말씀을 집어넣어야 되겠다.’ 하는 순간 그 성도는 말씀이 들어오고 난 뒤에 ‘뭐지 이 근심은? 내가 왜 돈도 안 되는 이 근심을 하지? 나에게 생존에 유리하지도 않은 이 근심을 왜 해야 되는가?’
아, 그동안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에 집중하다가 내 인생을 내가 다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내가 나를 다룰 대상이 아니고 따로 주님이 나를 다루는데 다루는 목적이 뭐냐? 주님 살아계시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말씀의 내용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좁은 길과 넓은 길, 딱 두 종류의 길밖에 없습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서 이끌림을 받는 길이 좁은 길이고 그 끝은 영생입니다.
영생 가는 길에 왜 근심합니까, 라고 하는데 주님이 가셨던 그 영생의 길에 주님도 고민했고 근심했고 그리고 간곡하게 아버지에게 수시로 늘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 그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들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가 따로 있고 그 아버지와 정보를 주고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그 근심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었는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주님의 근심은 아버지를 아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근심인데 이 땅에 아버지와 관계가 끊어진 이 땅 보통 사람들은 그 예수님이 하는 근심에 뛰어들 수도 없고 왜 근심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평소에 자기근심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목사님! 교회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 받으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습니까?”라고 만약 저에게 묻는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근심이 아니고 평소에 하던 근심의 연장선에서 그냥 교회 나온 거예요. 광주강의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교회에까지 나왔는데, 천국을 가야 되는데, 교회에까지 나왔다가 다시 자기 집으로 가버려요.
그러면 교회 와서 천국까지 들어가지를 못하고 교회 놀이하다가 그냥 가버려요. 그러면 교회에서 하는 모든 근심은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처럼 사망에 이르는 근심을 교회 안에서 기도라는 형식으로 줄창 하고 있었던 겁니다.
교회와서 주님의 뜻을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어떻습니까, 를 물어야 되는데 교회에서 하는 기도 내용도 “주여, 내가 세상 이렇게는 못삽니다. 뭔가 보상해주세요. 망가진 지난 내 청춘 돌려받게 해주시옵소서. 더는 못삽니다.” 이런 식으로 불평불만하면서 세상근심을 교회에까지 그대로 가져와요.
목사는 또 위로한답시고 되도 않는 위로를 하는데 이걸 아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도는 주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의해서 증거물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무엇의 증거물이냐 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돼요.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에 의해서 아들이 되었다면 성도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한 도구로서 쓰이고 있느냐에 까지 모든 이야기가 확장되어야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을 부리는 배후의 주체존재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알아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게 10절에 보면 나와요. 여러분은 안보입니까, 저는 보이는데.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세상근심은 사망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불신자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망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을 의미하는 거예요.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지옥에 들어갈 악마가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굉장히 외롭게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왜 근심하는지를 몰라요. 인간이 근심하고 싶어서 사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아무리 재산을 수천억 가졌어도 아침 눈만 뜨면 근심이 시작되는 거예요.
재산이 많건 적건 상관없습니다. 몸이 건강하거나 아니거나 관계가 없어요. 사람은 심심할 틈이 없이 근심해요. 커피 한 잔을 타도 ‘이거 맛있겠나, 안 맛있겠나.’ 인간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그 배후에 있는 존재를 증거 하는 하나의 매개체라 그런 겁니다. 매개체라 하는 것은 수시로 정보를 공급받게 되어 있어요.
공급받는데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그 뒤에 나오는 말이 “후회할 것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공급받는 모든 정보가 실은 하나님께서 안받아주는 쓸데없는, 소용없는 정보를 전하는 증거물로서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당신은 왜 삽니까?” “나는 이래서 산다.”하는 그것은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거고요, 진짜 이야기는 “내가 둘러싼 이 환경과 세상이라는 것이 이런 세상이라는 것을 나를 통해서 지금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환경과 부합이 될 때 나는 살았다고 그렇게 알고들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세상과 부합되면. 무슨 말이냐 하면, 남이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는 남이 인정해줘야 돼요. 남이 뭡니까? 나 빼놓고 다 남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바깥 환경, 주변에 둘러싸여 사는데 그 둘러싸여 있는 그 내용, 속성과 본질을 그 중의 일부로 살아가는 내가 맘껏 “이 세상은 이렇습니다.” 하고 발산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속한 세상은 지금 이 따위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하루하루 일과를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우리 어릴 때는 유치원도 좀 산다 하는 사람들, 방앗간이나 과수원하는 사람들이나 애 유치원에 보냈고 술도가 하는 사람이나 보냈지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유치원에 못 갔습니다. 나도 전에 유치원에 다닌 적이 없어요.
좀 산다 하는 사람은 계성유치원, 대구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들만 다닌다는 계성유치원……, 계성유치원출신들 내가 알아요. 일류유치원이지요. 그러면 나는 유치원 다닌 적도 없고 그 사람은 계성유치원에 들어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릴 때 내가 속해 있던 사회의 계급, 형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집은 그런 걱정 안했는데 어떤 집에서 “나 유치원 보내줘.” 할 때 엄마가 “집에 돈 없어서 너는 계성유치원에 못 간다.” 하면 그 애는 이제 근심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딱 그거지요.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내가 대변해주고 있는 매개체로서 우리는 그 순간마다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그게 다 후회스럽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다 소용없고 그게 다 사망에 이르는 짓거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우리한테 성경말씀으로 개입하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느냐? 사도는 처음과 끝을 다 알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마감되는지를, 그 처음과 끝을 다 알아요. 소시지가 있다면 사도바울은 소시지의 처음과 끝이 다 묶여 있다는 것을 아는데 우리는 인생 수십 년 살아봐야 소시지의 한 토막밖에 몰라요. 인생 50, 60, 70, 80살 살다가 그걸로 끝이에요.
대체 무슨 사태인지도 몰라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 어떤 사태인지도 모르고 그냥 죽어요. 그런데 내가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변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소시지의 속성은 여전히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소시지의 속성이 뭐냐? 창세기 2장 3장에 보면, 인간은 사망에 이른다, 죽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살다 죽을 수도 있지, 라고 하는데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이란 개념이 숨 끊어진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선악과 따먹는 그 순간 목이 막 답답하고 그랬어야지요. 아담은 오래도 살았어요.
사망이라는 개념은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사망이라는 그 개념이 어떤 개념인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의 매개체에요. 반면에 가인은 말씀에 입각한 하나님의 지옥에 어떤 자들이 가느냐를 보여주는 매개체로서 가인이 있는 겁니다. 아담의 자손인 아벨은 그 반대가 되고요.
그래서 아무리 이 땅에서 생생하게 산다 할지라도 나이가 들면 자기가 표현한 모든 것이 뭉개져요.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방주연의 당신의 마음.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으니까 이것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결국 실제는 뭐냐? 그냥 모래에요.
모래가 올라가는 데가 있고 내려가는 데가 있고 그게 인물이 되고 스타일이 어쩌고 하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나만의 개성, 나만의 표현, 이것은 내 얼굴이야 했던 그 내 얼굴이, 나이가 들면, 넉넉하게 잡아서 한 90이 넘으면 네 얼굴 내 얼굴이 없이 다 같이 뭉개져가지고, 납작하게 되어가지고 똑같아요.
97세 된 동창생들끼리 사진 찍어 보세요. 누가 누군지 분간 못합니다. 다 닳아졌어요. 그래서 누가 누군지 표시가 안돼요. 해변의 모래알처럼.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오고, 젊을 때 보톡스 맞고 한 그것 다 뭉개져서 소용도 없어요. 그것을 가지고 사물화라 합니다. 인간은 물체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쯤 되면, 그렇게 사물화되게 되면 인간은 어디에 주목을 하느냐? 사물화된 육체를 버리고 정신적으로……, 나만의 사물화를 우기다가 이게 소용이 없거든요. 그래서 어디로 도피하느냐 하면, 나만의 정신세계로 도망을 쳐요. 그런데 그 나만의 정신세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정당성에서 나옵니다.
자기정당성에서 나오는데 그 자기정당성이라는 것은 그동안 남들이 나를 이런 식으로 봐줬다는 것들 중에서 괜찮은 것만 뽑아서 편집해서 모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남들은 왜 나를 그런 식으로 측정하는가? 로마서에 그게 나오는데요. 약간 어려운 이야기 할게요.
로마서에 의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개념을 알려면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로마의 법은 건축사나 토지개간 하는 사람들이 측정하는 개념이에요. 땅을 측정하는 거예요. 홍수한번 났다 하면 네 땅 내 땅이 없어지잖아요. 그 때는 측량기사가 와서 측정을 해주는 겁니다.
측정하게 되면 구획이 되고 경계가 생기면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었고 이 경계까지는 네 것이었다,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로마도 그렇고 인류문명의 최초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문명도 그렇습니다. 거기서 최초로 수학이 나왔고 문자가 나왔는데 그걸 가지고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자기 소유의 정당성을 위한 밑천이고 바탕이에요. 법이라는 것이 증빙서류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래서 현재 내가 주장하는 권리는 옳고 맞다,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려면 법이 있어야 되고 그 법은 나 혼자 주장하면 안되고 그 사회가 그 법에 의해서 나에게 인정을 해줘야 돼요.
방금 그 이야기는 한마디로 뭐냐 하면, ‘이 세상의 법에 의해서 남들이 나를 정당하다고 인정해줬어. 나는 비록 늙어 죽지만 한평생 살아온 것은 이 법에 입각해서 정당하니 죽어도 나는 안심해. 왜? 나는 착하기 때문에 죽어도 천국이 나를 부르러 온다. 나는 천국에 합격이다.’라고 사람들은 매일같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거기서 나온 거예요. 법에 준해서 의롭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이 쓸데없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과 관련된 말이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왜 세상의 법에 의해서 인간이 자기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법은 인간들의 생존, 자기 사는 문제와 결부되어서 법이 왔다면 하나님의 법은 네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아들인가와 관련되어서 법이 모세한테 본격적으로 주어졌어요. 그 법에 의해서 주께서 일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그냥 근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하나님의 법이 동원돼요. 너는 지금 나는 정당하고 나 잘났다, 하거든요. 쉽게 말해서 인간들이 근심하는 이유가 딴 게 아니에요. 약간 배고파서 근심하는 것도 있고 애가 아파서 근심하는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근심의 바탕에 뭐가 있느냐?
그동안 내가 남들 앞에 정당한 존재로서, 참된 인간으로서 칭찬 받아왔는데 이번 일을 통해서 이 칭찬이 누락이 되고 삭제가 되고 “저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봤는데 인간 완전 말종이네. 쓰레기 아냐?” 이런 소리 들을 까봐 근심하는 거예요. “김집사 기도 많이 하더니 부자 되었다며? 그런데 소식 들어봤나? 부자가 되었는데 한 달 만에 부도가 났다네.”
이렇게 구시렁거리게 된다면, 왜 부도가 나서는 안 되는가? 내가 부자 될 만큼 정당한데 부도가 나버리면 “기도 그렇게 해도 소용없는 것이 무슨 다른 나쁜 짓을 한 모양이라.”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남들이 인정해 줄 때 내가 그 정당함을 가질 기회가 없잖아요.
교회 잘 나가다가 시집가면 교회 안 나가는 이유가 뭡니까? 그 집안이 불도가 심하거든요. 불도가 심해도 교회는 나오면 되는데 왜 못나오는 겁니까? 인간은 그 환경의 매개체라니까요. “네가 이 집안사람 되었으면 이제 교회 버리고 부처 섬겨야지” 그게 네가 정당하다는 거예요.
그 정당함을 유지하려며 교회 나가지 말고, 만약에 그 정당함이 맘에 안들면 이혼하면 되고, 그러면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종교문제로 이혼하지는 않거든요.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현재 이 순간에 남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나를 정당하게 보겠는가, 그것과 관련되어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씨 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다 그래요. 자기의입니다. 성경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에 열심 냈다는 로마서 10장 3절의 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이전에 이미 근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근심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
복음을 거부하는 쪽으로 근심하고 있는 거예요. 홀로 의롭게 되고자 하기에 근심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오는 모든 정보가 “그러니까 나는 정당하단 말이야. 이 세상 사람들아!” 그걸 외치고 싶어서 꾸준히 정보를 모으는 거예요. 혹시 내가 모아놓고 나를 의롭게 하는 그 정보가 뭔가 혼란이 일어나고 차질이 일어날까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 나오다가 왜 안 나옵니까? 부끄럽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끄럽다는 말은, 전에는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나왔는데 어떤 순간부터 어떤 사건이 터져서 남들이 내 가치를 폄하하면서 “그럴 줄 몰랐어.”라는 이 소리를 듣고 그 다음부터 교회 안나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평소에 “나 어때? 나 어때?” 이거 얻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이게 자기 의고 이게 하나의 측량, 로마에 있었던 측량기사로서 이 땅에서 내 것, 내 의, 내 소유, 내가 가진 것, 내가 노동한 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확보해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온 겁니다.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 되어서 자기고소를 한 거예요.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고소를 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는데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은 자기고소가 안돼요.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 저 어때요?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십일조 하는데 점점 더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요? 저 괜찮지요?”
평소에 세상에서 악마의 매개체노릇 하던 그 개 같은 버릇을 교회까지 그대로 가져와서 말씀가지고 그대로 하는 거예요. 자기의를 위해서.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뭐냐? 전도서 2장 15절, 16절에 보게 되면……, 이 본문은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는 본문인데 다시 읽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전도자 솔로몬이 하는 말이, 내가 남보다 뛰어나고, 많이 알고, 많이 착하고, 많이 가졌고, 이것이 하나님의 복인 줄 알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결국은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도서 전체의 내용이에요. 교회 가서 바르게 사나 안사나 일어날 일은 누구나 예측 못하고 망가지기는 누구도 똑같이 이 땅에서 망가지는 거예요.
자기얼굴이 민둥산이 되고 뭉개지는 것은 마찬가지고 뭉개지는 속도가 착하거나 예수 믿는다고 좀 더 늦게 된다든지 그런 것 없이 다 똑같아요. 그야말로 페이퍼로 확 밀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벗어나면 되지 않습니까, 제 말 듣고 이렇게들 생각할 거예요.
‘아, 세상근심은 멸망의 길이니까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나오면 되겠네.’ 말은 쉽게 해요. 하지만 풀이라는 것은 뭐냐? 풀로 붙인 우표를 다시 떼보세요. 붙어 있던 종이까지 다 찢어집니다.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다고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곱디고운 세상이 아닙니다.
우두둑, 하면 다 같이 떨어져요. 같이 붙어 있어서 그래요. 이 풀이라는 것이 뗀다고 곱게 떨어진다면 애초부터 붙이지도 않았어요. 떼어내도 붙어 있던 그 풀도 같이 붙어 나오는 거예요. 그걸 억지로 떼 낸다 치면, 그 안에 그동안 세상과 인간이 어떻게 얼마나 단단하게 붙어 있으면 이것이 자기 능력이나 자기 기도로 떼 지지를 않아요.
자기헌신과 순종으로 세상과 떨어지지 않는데 대체 뭐가 들었기에 이게 떨어지지 않는지. 붙어 있으면 떨어지지요. 하지만 만약 돌출된 것이면 이것은 떨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피부에 파스 붙어 있으면 파스 떼 내면 되지요. 물론 털은 몇 가닥 떨어지겠지만.
하지만 피부자체가 불룩 솟아오른 것이면 문제가 다릅니다. 혹을 떼는 수술을 왜 못하느냐 하면, 그 혹을 떼 내면 다 죽어요. 세상의 일부로서 불룩 돌출되었기 때문에, 튀어나왔기 때문에 돌출된 것은 융합체, 연합체입니다. 연합되어 있는데 뭘 떼 냅니까? 못 뗍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구원은 그것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네가 내 말 들어서 구원받을 위인들이 아니라는 거지요. 지난 광주강의에서, 부자가 얼마나 천국가지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했어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제가 언급한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언급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했어요. 사람은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를 알아야 돼요. 그것은 누가 보여주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보여줬습니다.
시편 95편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안식이란 모든 근심이 끊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딱 떠오를 거예요. 그러면 주의 모든 말씀은 안식법 안에 다 함축되어 있겠네요, 라고 떠오르겠지요.
다 떠오른다고 치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다른 법이 필요 없어요. 안식일 법만 지키면 안식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다른 법은 다 취소되어도 안식법 만큼은 남아 있다는 것이 이사야에도 나오고, 그래서 제 7일일 안식교는 그렇게 길길이 뛰고 있는 거예요. 그 이단들은.
예수 믿는 것 가지고는 모자라고 안식일 법을 보태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골로새서에, 갈라디아서에 안식일을 인하여 복음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안식교 그 사람들은 그게 들리지를 않아요. 이상구 박사 같은 사람 귀에는 그런 것이 안 들려요. 돼지고기나 먹지 말라고 하지 다른 것이 뭐가 있어요.
안식법을 주시고 안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이 말을 여러분이 제대로 좀 알아들으세요. 안식법은 주님이 알아서 다 지키도록 해주신다는 이야기에요. 주께서 법을 주실 때는 주님이 알아서 법대로 다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해주시는 대로 순하게 받아 챙길 위인들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중립이 아니고 이미 아담의 대표자, 하나하나가 아담이기 때문에 이미 아담은 빈 아담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안식일을 지키겠습니다, 하고 나서는데 그 나서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라는 말이지요.
“안식법을 누가 지키나?” “제가 지키겠나이다.” 손들고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안식일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레위기 16장 3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는 큰 안식일인즉 너는 스스로 괴롭게 할찌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본적으로 이거 하나만 알면 돼요. 안식일이라는 것은 뭐냐? 노동을 금지하는 날.
노동을 금지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노동을 금지하면 좋다, 할 것이 아니고 왜 사람들은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가? 세상근심이 있기 때문에 노동 안하고는 못배기지요. 뭔가 해야 돼요. 하지 않으면 인간은 미래를 보장 못합니다. 그러면 노동을 왜 하는가? 자기표현하기 위해서 노동해요.
누구한테? 남으로부터 시작해서 남 뒤에 있는 하나님 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기표현이 그쳤다는 거예요. 살아 있을 내내 자기표현 합니다. 팔십 되어서 오라고 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간다고 해라. 내가 수월할 때 간다 해라. 날 부르러 오거든 내가 아직 할 일 많아 못 간다고 해라.
계속해서 자기표현이에요. 자기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요. 계속해서 자기표현을 합니다. 그게 언제 그치느냐? 호스 뽑을 때.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하지요. “뽑자” “아직 뽑지 맙시다.” “에이 뽑자.” “그래 뽑자.” 쑥 뽑아 버리면 끝!
인간의 자기표현이 얼마나 지독한지 숨 쉬는 것은 몰라도 침대 옆의 화면에 그래프로 나타납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게 제 2의 자아에요. 나중에 인공지능 나오면 뇌 자체도 바꿔치기 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알파고가 와서 두뇌를 바꿔치기 할 거예요.
사는 이유가 뭐냐? 왜 삽니까? 내가 나 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 뽐내려면 노동해야지요. 그런데 주님이 안식일은 뭐냐? 노동하지 말라. 왜 노동하면 안 되는가요? 안식의 나라, 천국은 주님의 노동만 나타내고 나머지는 다 제거하는 나라거든요.
주님만 홀로 했습니다, 를 표현하는 나라가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분이 어젯밤에 카톡으로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태승철 목사님은 왜 십자가마을에 안 들어오지요?”라고 질문자체가 좀 엉뚱해요. 주일 아침에 바쁜데 태승철이 누군지 한 스무 개쯤 봤어요. 유대교인이에요. 도닦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에 순종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자기교회가 없고 방송설교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답변을 할 예정입니다. 이것저것 들어봐도 괜찮습니까, 하는 조로 질문하기에 “일단 모아놓고 분별은 본인이 알아서 하시면 되는 겁니다.” 혹시 모르거든 참고로 저에게 묻든지.
그걸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결국 자기표현이에요. 목사나 교인이나, 집사나 장로나.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나 열심히 지금 천당 가려고 노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그거 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자, 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케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 근심 안에서, 뜻대로 순종하려고 시도하는 그 가운데서 뭐가 폭로되느냐 하면, 자기표현으로 평소에 하던 그 더러운 행세가 완전히 폭로되고 노출된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이렇게 노동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 그 평소에 하던 수법이 노출된 거예요. 안식일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주께서 알아서 다 하게 되면 나는 가만있으면 되겠는데, 주께서 “가만있어라. 왜? 너는 나의 매개체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중립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가고, 내가 어떻게 하면 밥 먹고 사느냐에 몰두하고 있잖아요. 그게 하나님 하시는 일의 좋은 재료가 돼요. 아까 양장로님이 저에게 물었어요.
“목사님, 주보 설교요약의 문장 하나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사망에 이르는 근심은 그 근심 자체가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라 하지 말고 생명에 이르는 근심이라도 해줘야 문맥상 맞지 않습니까?”라고 해서 여기에 대해서 설교시간에 설명한다고 약속을 했어요.
우리가 사망의 근심을 고를까, 생명의 근심을 고를까, 그것을 고를 제 3의 관찰자로서의 중립의 자리에 있지 않아요. 우리는 눈만 뜨면 성경에서 뭐라고 하든 관계없이, 듣지도 않고 그냥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 우리의 주특기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의 표현을 금지하거나 중지하지를 않아요.
왜? 풀이 붙어 있거든요. 세상이 붙어 있다고요. 살아온 행세에요. 그 습관이 있거든요. 그 습관을 우리 힘으로 떼 내지를 못해요. 떼 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자기위주냐 하면, 저는 변호사 하는 사람한테 묻고 싶어요.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중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변호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중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면서 머리는 왜 깎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머리 깎는 문제. 내가 보기에 머리 깎는 그것이 돈 버는 밑천이거든요. 머리를 깎아줘야 중이라는 티를 내잖아요.
머리깎는 것은 남에게 내가 전문종교인이라는 것을, 어떤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는 광고효과, 역시 자아표현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수상하다는 거예요. 중들이 머리를 깎는 것은 그 행위가 돈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머리를 깎는 거예요. 그게 장사밑천이 되니까.
그 다음에 변호사에게 묻고 싶은 것은, 분명히 범죄를 현장에서 했으면 현장에서 붙잡으면 되는데 미란다원칙을 고지를 하라는 거예요. 미란다원칙을 고지하지 않으면 법정에서 죄인으로 안 되고 무죄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그게 이해가 안돼요. 미란다고지가 뭐냐 하면,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이 하는 모든 진술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를 형사가 수갑채우는 데, 그 바쁜 가운데서 이걸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막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사람이 죽었잖아요. 이걸 하나 안하나 현장에 범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법과 범죄의 현장이 따로 노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눈감고 아웅하는 짓입니까?
주님은 어떻게 일을 하느냐?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와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듣고 싶은 그 다음이야기는 뭐냐 하면, “주님이여, 그 강도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소서.” 이게 제일 먼저 나와야 돼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은 그 옆을 그냥 지나가고……, 그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뭐냐? 범죄현장이 일어나게 한 유발자, 못된 강도를 체포해야 이 땅의 정의가 실현될 것이 아닙니까? 정의가 하수같이, 강같이 흐를 것이 아닙니까? 아모스의 말씀 나오잖아요.
강도 체포하는 이야기를 왜 안 해요?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 사람들만 된 통으로 욕을 얻어먹게 되었어요. 안도와줬다고요. 그들이 죽였습니까? 강도가 죽였지요. 강도가 다치게 했지 자기들이 다치게 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책임소재를 강도한테 돌려야지 왜 안도와준 것에 대해서 책임소재를 돌리는 이유가 뭐냐는 그 말입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서 착한 일 하나 안하나 모든 인간은 이미 후회하는 근심에 빠져 있어서 못 빠져나와요. 피부가 돌출된 것처럼 이 세상과 따로 뗄 수가 없어요. 세상 악마를 증명해주는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고소를 해버려요. 자기가 스스로 범죄인 되어버립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깔끔하게 일은 마무리 되었어요. 이제 하나님의 아들마저 이 세상에서 범죄인으로 고요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고요한데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끄집어냅니다.
끄집어내고 그 아들에게 이제부터 구원받을 자와 구원하지 않을 자를 누가 결정하는가, 아들에게 다 일임해버렸습니다. 아들에게 일임했기에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되는 그것이 이제는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느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된 사람은 뭐냐 하면, 뭔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론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론적으로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요. 이 말이 너무 중요한데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알게 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지, 무슨 일이 일어났지 지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세상의 돌출부였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의 돌출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찾아온 거예요. 성도에게 주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내가 이 땅에서 가졌던 근심을 너도 같이 한 번 느껴봐라.” “왜 그런데요?” “너는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는 일의 연속성에 네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살아서 일을 하는데 이미 주님과 한패 먹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구원받으려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함몰해서, 옛날에 내가 원치 않았는데 세상이 나를 한패 먹은 것처럼 이제는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주님과 한패가 되어서, 세상에 나갔을 때에 남들은 자기 살 궁리 하는데 우리는 나의 노동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노동이 엔진처럼 가동되어서 하루하루가 주님 증거 하라고, 주께서 알아서 다 의롭게 했다고 그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근심에 참여하게 되면 차원이 달라요. 사랑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사랑이고 봉사요 희생으로 다가가게 되어 있어요. 혼자 도 닦는 것이 아니고, 뭘 도와드릴까요, 하는 식으로 남들을 보지요. 전에는 타인은 나의 지배의 대상이었어요.
내가 저 인간의 기를 꺾어버려야지, 하는 지배의 대상이지만 이제 타인은 나의 봉사의 대상이에요. 애 낳았다. “뭐 해줄까? 기저귀 갈아줄까.” 결혼했다. “오늘 아침에 뭐 해줄까? 당신을 위해서 뭘 하지?”
서로서로 봉사의 대상이에요. 저 기를 꺾으려고 하지 말고, 지배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내 표현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만 표현하는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했잖아요. 어떻게? 주님은 이미 아들로서 관계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이미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이 된 입장에서는 이제는 남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정신의 표현형으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미래가 아슬아슬하고 내일이 불안하고, 이래도 근심, 저래도 근심, 성경말씀 잘 지켜서 미래에 형편 펴보려고, 자신을 잘난 인간 만들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게 다 쓸데없고 후회되는 짓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