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38강-참된 내용(고후7;12-16) 1706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7. 17:56
2017-06-04 12:41:53조회 : 122         
   참된 내용 1706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참된 내용(고린도후서 7:12-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x8VZG8v2Pk, Hit:6
 이근호17-06-04 13:29 
참된 내용 

2017년 6월 4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7:12-16 

(7: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7: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7: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7: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7: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사도는 지금 일방적안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도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사도는 “너희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해야 한다”는 점을 일방적으로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7:6에 나오는 ‘비천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비천함은 생존차원에서 비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 즉 십자가 앞에서의 비천함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살아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아닙니다. 죽기 전에 미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점을 감안해서 사도는 고린도교회에다 편지를 보낸 겁니다. 비천한 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필히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라는 겁니다. 당연히 은혜 없이는 천국 없습니다. 

사도가 전에 고린도교회에 준 편지, 곧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인들을 비천한 자로 규정하기 위함이요 여기에 대해서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다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연락책인 디도를 통해서 에베소에서 사도는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고린도교회를 다스린다는 사실에 두고서 사도 일행이 감사하다는 내용입니다. 

일종의 ‘업드려 절받기’ 식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하나님의 일에 부합되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수상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하나님에 의해서 땅으로 추방이 됩니다. 그런데 그 추방된 동네가 저주를 뿜어내는 곳입니다. 아담의 입장에서는 그 저주로 인해 평생 사는데 불편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진리보다 불편함이 더 실질적으로 닿습니다. 당연히 이 불편함을 제거하는 태도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불편함이 야기해서 나오는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뭐가 잘못되었기에 인생을 힘들게 살아야합니까?”입니다. 즉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의 불편함을 당연하고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제거하려는 불편함은 창세기 4장에서 더 세밀하게 알려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인간의 불편함은 필연적이다 는 겁니다. 가인에게 있어 불편함이란 동생에게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받으시고 자신은 제물은 받지 아니했습니다. 

불편함이 생기면 제거하는 것이 인간으로 본성이기에 가인은 몰래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지만 땅이 하늘에 대고 고자질해 버립니다. 이제 가인의 마음은 공개되었습니다. 가인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이 가인의 마음을 덮친 결과로 동생을 죽인 겁니다. 

인간은 악마의 호구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아바타입니다. 악마가 조종하는대로 인간은 살아야 합니다. 결코 독자적인 존재하는 자들이 인간이 아닙니다. 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가인은 자신의 불편함에 대해서 그 탓을 외부로 돌립니다. 즉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불의함과 정의로움을 구분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인간의 기준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의 불편함을 두고서 외부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외부가 ‘동생 아벨의 모습’으로 등장된 것입니다. 그로 인한 불편함을 제거해버린 가인은 자신의 행위가 자기로서는 정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질을 바로 악이 가인을 올라타서 조종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불편함을 제거하는 그 어떤 행동도 마땅하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악마의 속성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가인에게 얻어맞아 죽는 것을 방치하시고, 뿐만아니라 가인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으시고 번창케 하므로서 모든 인류를 가인의 속성 안에 두십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성립될 뿐입니다. 이 본성이 혈육을 타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마지막이 될 때까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어떤 원칙과 법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정당성입니다. 즉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그 어떤 행위도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시고, 성령님이 오시고 난 뒤, 성령받은 성도의 마음 속은 비로소 그 실상을 노출시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선보다 악이 우세를 점한 채 악을 늘 생산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자기 잘남을 추방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재미로 살아가게 됩니다. 악을 저지르는 재미로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는 이런 자신을 향해 “오호라 곤란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사태를 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작업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는 두 번의 결혼생활을 하게 됨을 알려줍니다. 첫 번째 결혼은 율법과의 결혼입니다. 

남편 되는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법대로 살지 못하는 쉬지 않고 저주가 주어지게 됩니다. 신명기 28:15부터 나오는 그 저주를, 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는 다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도에게 두 번째 남편입니다. 이 남편은 성도라는 존재가 얼마나 비천하고 ‘쓸데없는 자’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사도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실험쥐 안에 형광물질을 집어넣고 추적기로 추적하듯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작업 원칙을 싣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법 앞에서 서게 합니다. 

그리고 그 원망을 하나님에게 쏟게 만듭니다. 로마서 3: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니라” 율법 외의 한 의는 정죄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 주어진 성도에게 두 번째 남편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옛 남편인 율법 앞에 서서 자기 잘남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자라는 것을 아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아는 자만이 행복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들게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 탓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따짐이요 원망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6-05 18:42 
239강-고후 7장 12-16절(참된 내용)1706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7장 12-16절입니다. 신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7:12-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그냥 읽어서는 하나도 몰라요. 흔히 하는 말로, 대체 뭐라는 거야? 우리가 대화를 걸지 않았는데 사도바울이 대화를 먼저 걸어왔습니다. 누구한테? 고린도교회한테 대화를 먼저 걸어왔어요. 대화를 걸어오면서 이런 투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이런 훌륭한 마음을 가졌다는 거예요. 

  

어떤 훌륭한 마음을 가졌느냐 하면, “사도님, 우리가 지금 제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닙니까, 그걸 판정받아야 되는데 그걸 판정받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의 편지를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의 편지를 받고 보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여기서 그 편지는 고린도전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고린도전서, “먼저 쓴 그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있군요.’ 라는 소식을 듣고 내(사도)가 같이 있는 팀 디도와 함께 얼마나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지 모른다. 너무 우리가 기쁘다. 그래서 내가 첫 번째 편지에서 너희를 책망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너희들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시는지를 뽑아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나갔다. 그러데 지금은 너희로 인하여 위로를 받는다. 고맙다. 친구들아!” 그런 내용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일방적으로 다가간 겁니다. 고린도교회가 진짜 내 신앙이 좋은지 나쁜지 확인하기 위해서 사도에게 편지를 하고 궁금해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고 사도입장에서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기를 굉장히 간곡히 기다렸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같은 인간이지만 고린도교회 다니는 인간들만큼은 사람들 앞에서, 저 어때요, 라는 식으로는 제발 살지 말고 주님 복음 앞에서, 저 어때요,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를 학수고대했다는 겁니다. 어차피 인생이라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애써도 자기 자신을 몰라요. 

  

미리 당겨서 알아야 돼요. 미리 당겨서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다. 미리 당기는 방법은 뭐냐? 사도로부터 우리한테 편지가 전달되면 미리 알 수 있지요. 왜냐하면 사도의 편지는 예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설 것이잖아요.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이지요. 

  

나중에 죽어서 설 거 미리 당겨서 서버리면 진짜 내가 누군지를 그 때 알게 되잖아요. 일방적으로 지금 사도가 고린도교회가 망해도 전적으로 망한 것은 아니구나, 하고 잠시 위로받았다는 그 이야기가 두 번째 편지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전달되게 되면……, 지금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가 있어요. 

  

에베소에 있으면서 디도를 통해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편지를 주고받는 겁니다. 성경에 안 나와 있지만 세 번째 편지도 있어요. 사도가 편지를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뭘 하느냐 하면,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너희들이 훌륭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위로받을 사도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비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을 여전히 은혜로 천국보내기 위해서 그들 위에 덮쳐서 작용하고 있구나, 그 하나님의 손길에 위로받는 겁니다. 그게 6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이게 정답이에요. 

  

너희들, 비천한 자에요. 참 꼴깝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한 인간입니다. 찬송가에 그게 나오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하나님께서는 쓸데없는 자를 위로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위로에 대해서 스스로 위로를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해놓고 그 자기가 해놓은 것에 대해서 위로 받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은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 비천한 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교회를 기분좋게 하는 말이 아니고 왕창 심적 부담을 주는 겁니다. 

  

내가 칭찬했다고 해서 까불거리지 말고 그 비천한 모습을 제발 유지를 해 주라는 거예요. 사도가 원하는 것은, 우리 잘났지요, 그런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비천한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졌습니다, 그런 고백,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사도라 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하면서 그동안 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만 일방적으로 뽑는 식으로 고린도교회나 에베소에 있는 사도바울이나 다 같이 위로받자고 나오는 그 이유가 있어요. 12절에 그게 나옵니다. 

  

여기도 상당히 어려워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다음 말부터가 어려워요.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이 대목입니다. 사도가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이 내용의 진위를 알려면 우리는 창세기 3장으로 가야 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의 처음 형편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이 이 땅에 살면서 한마디로 말해서 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여러분이 답변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를 하나 내겠어요. 사람이 사는 것이 불편하면 뭐가 나올까요? 

  

사람이 사는 것이 엉망진창이고 불편하다면 반드시 튀어나오는 것이 있어요. 뭐가 튀어나올까요? 자기를 피해자로 보는 겁니다. 세상은 더럽고 나는 깨끗한데 더러운 세상 때문에 내가 불의를 당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왜 어려운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비천한 자에게서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게 나오면 비천한 자가 아니에요. 정당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쓸데없는 자가 아니에요. 남은 쓸데없어도 나는 가치 있다고 우기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이 12절에 쓴 편지내용을 우리가 무슨 말인지 모르게 돼요. 자기가 잘난체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불편하고 난 뒤에 인간들은 자기정당성, 자기를 피해자처럼 생각하는 근성이 발휘되는 것이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자기가 만약 세상에서 피해자의식이 들게 되면, 내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할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불편하게 살 레벨이 아닌데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드니 분명히 누구에겐가 억울함을 당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뭔가 억울하다는 거예요. 억울하면 나에게 불의를 행한 자를 찾아서 공격을 하겠지요. 공격하다 보면 어디까지 오느냐? 교회까지 와요. 

  

교회는 뭐냐? 하나님 앞에 따지러 오는 뎁니다. 하나님한테 따지러 오고 화풀이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부터 시작했어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이러한 공식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믿는 것은 처음에는 따지기 위해서 믿다가 나중에는 하나님 걸리면 죽여 버린다, 거기까지 나가는 본성을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줄기차게 물려받은 겁니다. 

  

이거 모르면 우리는 비천한 자 아닙니다. 비천한 자 되지 아니하면 위로하시는 하나님도 몰라요. 성경을 백독 천 독해도 교회를 4십년, 5십년 백날 다녀 봐도 ‘걸리기만 해봐라. 하나님은 내손으로 죽여 버린다.’는 그런 생각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하지 아니하면 신앙생활 헛수고 한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설교하면서 그런 소리 했잖아요. 제발 믿음 좀 버리라고. 안 믿으면 구원 받는데 믿어서 구원 못 받는 거예요. 믿는다는 것은 자기는 자꾸 잘했다고 하는 거예요. 남은 안 믿지만 나는 예수 믿으니까 나는 잘했다고 하는 거예요. 믿음이 자기구원을 방해해요. 

  

믿어봤자 가짜인데 그걸 자꾸 앞장세운다니까요. 그렇게 잘 믿으면 산을 옮겨봐라, 하면 그것은 또 옮기지도 않아. 산에 놀러갈 생각이나 하지 산을 옮길 생각도 안 해요. 그러면서도 믿는다고. 믿으니까 어쩌라고? 믿으니까 내 인생 책임지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하니까 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겁니다. 

  

왜 너는 불편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또 몰라요. 창세기 3장으로 안돌아갔으니까.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지 자기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요. 과수원에서 사과나무는 봤지만 선악과는 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딱 잡아떼요. 아담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아담의 그 본성, 그 성질을 고스란히 인수인계 받아놓고도 인수인계 받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사드 도입할 때 추가적으로 들여온 것은 왜 말을 안했느냐 하는 거지요. 인수인계가 뭔가 잘못됐어요. 아담이 남인 줄로 알고 있어요. 아담은 따로 있고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알고 있다니까요. 아담이 불편하면 우리도 불편해요. 분명히 창세기 3장에서 언급했습니다. 

  

네가 인생을 불편하게 사는 것은 저주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왜 저주받아야 되는가? 생명나무 근처에도 안 갔으니까 영생이 없는 곳이니 저주는 당연한 것이다. 네가 사는 동네는 어떤 원칙이 가동되느냐 하면, 저주가 계속해서 발생되고 생산되는 원칙, 조건이 꽉 짜인, 낭비 없이 생산되는 그런 세계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나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는데 아담이 선악과 따먹어놓고 고생은 왜 우리가 해야 됩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알고 싶어?”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 기다려봐.”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창세기 4장입니다. 

  

악이 딱 엎드려 있다가 악이 가인을 덮쳐요. 그러면 가인은 악마의 호구가 되는 겁니다. 악마의 아바타가 돼요.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질문이 뭐냐? 우리는 지금 사는 것이 불편하다. 왜 불편한가? 저주받아서 그렇다. 나는 아무 한 것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저주받아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악마로 하여금 덮치게 만듭니다. 인간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요소는 내가 알아서 제거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인을 누가 불편하게 했느냐? 동생 아벨이 불편하게 했어요. 왜 사이좋던 동생이 갑자기 불편한 존재가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된 내가 불편한 거예요. 

  

그런데 동생의 제사를 받고 내 제사를 안 받는 그것이 왜 불편한가? 거기에 대해서 가인은 영문을 모르겠어요. 우리는 인생을 힘들게 살면서 왜 힘들게 사는지 영문을 몰라요. 영문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은 혼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교에 보면, 무쏘의 뿔로 홀로가라는 말이 있거든요. 법화경인가에 보면 나와요. 들이 받으라는 그 말이거든요. 정답이 없어서 온 사방천지가 발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개한테 물을 뿌려 보세요. 개가 가만히 있는가. 개가 물 턴다고 흔들어대면 주위 사람들 다 물벼락 맞지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불편하니 불편한 그 요소를 발산하게 됩니다. 발산할 때 악마가 뒤집어씌운 그것을 발산하게 되어 있어요. 가인은 영문도 모르는 채 악마가 그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일본에서 의사들이 개발한 것이 있어요. 

  

형광물질을 귀속에 집어넣어서 글루코스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추적하는 추적기를 개발했답니다. 글루코스는 당인데 당의 증가와 감소가 원활하지 않을 때 그것을 당뇨라 하거든요. 당 속의 글루코스의 사슬을 추적할 수 있는 추적기가 있다면 의사들은 당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그것만 추적하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가인에 덮씌워진 마귀의 요소를 형광물질을 통해서 추적기로 추적만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러면 가인 입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듭니까?” “네가 동생을 죽였잖아.” “나는 몰래 죽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를 제거하되 그것을 몰래 해요. 모든 행동을 몰래 해요. 몰래 해놓고 외부로는 입을 딱 다물어버리거든요. 몰래 하고 입 닫고. 이게 언제 걸리는가 하면 청문회할 때나 걸리지요. 우리 같으면 청문회할 기회도 없고 청문회 나오라고 할 사람도 없잖아요. 

  

저보고 국무총리 하라고 할 사람도 없거니와 저는 위장전입 한 적이 없습니다. 하여간 모든 인간은 몰래 해놓고 그 ‘몰래’를 감추는 방식으로 모든 행동들이 정렬되어서 차례차례 나옵니다.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가만있어, 가만있어. 들키면 안 돼.’ 이거거든요. 

  

내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남의 사정을 보지 않고 공격을 해댔고……, 그것도 내 불편함이 이유에요. 상대방사정은 알아주지도 않아요.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욕하고, 공격하고, 태클 걸고, 악플 달고, 하지만 그게 들켜버리면 나에게 보복이 오기 때문에, 불편하기에 몰래 하기는 해놓고 음, 하고 시치미 떼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제가 뭐 어때요?’ 하는 겁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일 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자질 잘하는 이 땅. 땅이 고자질을 잘해요. “네가 동생을 죽였잖아요.” 누가요? 땅이, 땅이 하늘로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그것까지는 가인이 몰랐지요. 땅이 고자질을 할줄은 몰랐어요. 하나님으로부터 그 땅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을 저주하도록 하는 장치가 계속 가동되는 겁니다. 

  

여자가 임신하고 해산할 때 고통을 당한다고 하거든요. 이것은 맞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 해산할 때 고통당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인간 말고도 있다고 하면 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 인간만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애기 낳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왜 이런 불편함을 내가 감수해야 되는가? 

  

아기 낳으면서 남편을 막 욕한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 남편과 결혼하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결국 또 하나님이라. 결국 하나님. 결국 모든 책임자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때문에 내가 불편한 거예요. 그게 무슨 고백이냐 하면, 바로 마귀가 하는 고백이거든요. 

  

귀신이 뒤집어 씌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귀 뒤집어쓰게 해놓고 그걸 계속 추적하는 겁니다. 그게 아담의 용도에요. 우리 인간의 용도가 그런 용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쓸데없는 자라고 하지만 가만 보면 다 쓸데가 있어요. 죄를 생산하고 악을 만드는데 쓸데 있어요. 

  

선도 악이고 악도 악이에요. 선악이 몽땅 다 악이에요. 선악과는 어디에 쓰려고? 그것은 악을 짓는데 쓰게 되어 있어요. 어디에 쓰느냐? 자기의 불편함에 대해서 따지고 반발하고 반항하는데 나의 모든 윤리와 도덕이 동원되고 거기에 양심까지 다 합쳐서 “이정도로 착하게 사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신에게 반발하는 용도로 쓰이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찬가지에요. “나는 불의를 당했습니다. 나는 착한데 그 나쁜 놈들이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착한데.”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피해자, 가해자, 그런 것 따지지 마라. 나는 너에게 그런 소리 들으려고 편지한 것이 아니다. 불의한 자, 정당한 자, 이제는 그러한 인식자체가 우리 주님 십자가 앞에서 노출되어서 ‘내가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살았구나. 나는 정당한데 남이 나빴다고 하는 그런 나쁜 마음을 내놓는 그 정도로 나는 비천한 존재고 진짜 쓸데없는 존재’라는 고백을 할 때 그 위로가 내가 듣고 싶었던 위로”라고 사도가 말하는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들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가인을 추방시켜 버려요. 하나님께서 동생 죽였다고 해서 가인을 사형시키지 않습니다. 계속 살려놔요. 왜? 가인이 예뻐서가 아니라 가인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악마의 속성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새끼를 번식시키기 위해서. 

  

두 번째 가인, 세 번째 가인을 온 천지에 새끼 까듯이 완전히 깔아버려요. 어느 누구도 가인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가인 천지에요. 아벨은 죽었어요. 아벨 자식은 없습니다. 죽었는데 무슨 자식을 낳아요? 자식이 없어요. 온 세상에 가인천지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세계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세계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당하는 그 불편함의 범주, 그 내용이 더 깊어졌고 그 내용이 더 뚜렷해졌지요. 그 이유가 뚜렷해진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은, “불편하다.” “왜 불편합니까?” “네가 저주받아야 돼.” “저주를 왜 받습니까?” “이유 알려줘?” 

  

마귀와 더불어, 악마와 더불어 사니까 저주는 뻔하게 늘 다가와야 되고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고 악마의 호구로서, 종으로서 살아가면서 우리 내부의 현장은 “억울합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런 고생을 할 존재는 아닙니다. 내가 선악적 사고방식으로 보기에 나는 착한데 남들이 나빠서 그 나쁜 놈이 내 인생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불평과 핑계가 계속해서 나오는 수밖에 없어요. 

  

창세기 4장에서 세상 끝나는 것 아니거든요. 4장, 5장, 계속 이어집니다. 그 이어지는 내용은 뭐냐 하면, 네가 그런 소리 하는 것 때문에, 나는 피해자라고 우기는 그 우김 때문에 진정한 피해자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때 그 때마다 새롭게 발췌되어 나오는 방식이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죽 이어지는 것이 인간세계입니다. 

  

인간세계라는 것은 뭐냐? 각자 독자적으로 자기만 착하고, 남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 착한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요소들로 깔려 있기에 나는 구원되어야 되고 저거는 지옥가도 괜찮고, 그런 것이 범람되어 있는 세상에 우리가 어느 날, 1천 9백 몇 년도에, 주민등록번호 앞부분에 나오지요,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에 오기까지 그 악마의 요소가 들어 있는데, 그 다음 그 내부에 장착되는 요소가 뭐냐? 그게 법이라는 겁니다. 율법. 주께서는 율법을 우리 내면에까지 심어 줘버려요. 우리 안에 법이 들어와 버려요. 

  

우리 안에 법이 들어와 버리면 그 때부터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법을 내가 비교를 하게 되는 겁니다. 비교를 하면서 그 법을 가지고 자기를 우수한 존재로, 이런 불편함과 고생을 안 해도 되는 존재로 우리 속에서 누가 다루는가 하면, 마귀가 다루게 되어 있어요. 

  

이상한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로마서 7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자기내부를 까보니까, 성령 받은 사도바울, 구원받은 사도바울이 자기 내부를 깨보니까 자기는 선을 하고 싶어도 자기 안에 악이 들어 있어서 꼼짝도 못해요. 

  

사도가 전에는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몸도 아프고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생존하는 것이 힘들었던 그것이 성령 받은 사도의 입장에서는 사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선을 행하고 싶어도 내가 악으로 사로잡히는 이것이 오호라 곤고한 사람,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 힘든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내가 가는 곳마다 죄를 생산하고 죄를 지어야 된다는 이것이 자기에게 너무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령 안 받았으면 사는 게 힘들다고 남은 전부 다 죽으라고 할 거예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지금 살고죽고 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주님의 의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근본토대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자기를 가해자로 보지 않고 자기를 자꾸 피해자로 보는 거예요. 내가 죄 지은 것보다 더 많은 벌이 내게 주어져서 힘들게 살아간다는 그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 단독의지거든요. 단독의지라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형광물질을 집어넣어서 추적하는 주님의 하시는 일의 도구라는 것,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이게 쥐 실험에서 그렇게 한 거예요. 쥐에다 형광물질을 집어넣어서 글리코스의 이동을 추적하듯이 주님이 추적하시는 분이고, 우리 안에 율법을 집어넣어서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가 추적해 보는 겁니다. 

  

제가 말을 이렇게 하니까 여러분이 어려워하는 느낌이 들어서 신명기 28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심방 가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대목입니다. 여러분에게 심방을 갔다고 치고 제가 이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문장 끝에 같은 단어가 나올 때는 그냥 장단을 맞춰서 랩으로 하는 것이 최고에요. “네가 성읍에서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이런 식으로 저주라는 단어를 계속 쓰는 거예요. 어디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며. 왜? 추적기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뭘 보고? 우리의 몸을 보고. 우리의 몸에다 율법을 집어넣고 그 법이 계속해서 저주를 유발시키는 유발요인으로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겁니다. “네가 법을 어겨놓고도 복을 받을 생각을 해? 이런 염치없는.” 네가 법을 알고도 못 지켰으면 그것은 당연히 저주받아야지요.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복음은 제켜두고 은밀한 영역에서, 들키면 안 되는 영역에서 주님하고 거래를 진행 중입니다. 주님한테 거래하고 있어요. ‘주님, 잘못은 좀 했지만 헌금 받으시고 봐주시기를’ 자꾸 주님하고 거래를 하려는 거예요. 어딜 주님과 거래를 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우리 속에 있는 마귀 좋으라고 거래를 하겠어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그냥 마우스에요. 컴퓨터 앞에 있는 그 마우스도 되고 쥐새끼 그 마우스도 되고, 그냥 가지고 노는 마우스라니까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이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했다고 해서 그가 지옥 갔습니까? 

  

그런 소리 나온다는 것은 천국 갈 사람이기 때문에만 나오는 이야기에요. 돈 없다고 짜증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대로 지키고 싶지만 못 지키게 된다는 이것 때문에 화가 난다는 그 말입니다. 내 손으로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자유 아닙니까? 

  

내 죄를 내 손으로 처리하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 손으로 내 죄를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은 내게 주어진 불편함을 내가 삭제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 자격자가 못된다는 겁니다. 내가 인생을 어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원상회복해 주세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나님에게 대들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안다는 것이 자기로부터의 자유 아닙니까? “에이 씨!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이게 자유 아니에요? 이걸 왜 고쳐야 됩니까? 어차피 마우스인데요. 마우스 바뀐다고 해서 컴퓨터 잘 다루는 사람 아니잖아요. 마우스는 그냥 달려있는 물건이에요. 주님한테 달린 채 주님이 쓰고자 하는 대로 쓰이면 되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인생이? 인생이 고민거리가 뭐가 있어요? 그냥 마우스처럼 딸깍딸깍, 그렇게 쓰면 되잖아요. 마우스 끈이 떨어졌는가? 컴퓨터 따로 놀고 마우스 따로 놀면 그것은 고장난 마우스지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곤고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로마서 7장 1절에 나옵니다.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성도는 두 번 결혼해야 된다는 거지요. 한 번은 필히 법과 결혼해야 돼요. 법과 결혼하게 되면 법이 남편이고 인간은 아내가 되는 겁니다. 법이 주가 되면 우리는 그 법을 못 지키는 한 계속해서 저주받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몽둥이를 들고 있는 남편에게 매일 같이 얻어맞아야 되고 폭력을 당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불편하지요. 저주가 주어졌는데 안 불편할 수가 있겠어요? 신명기 28장에 심방 갈 때는 절대로 안 나오는 구절, 이 가정에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고, 이런 식으로 심방을 할 수가 없잖아요. “고 3입니까? 보나마나 떨어졌습니다.” 이런 심방을 할 수 없잖아요. 

  

그러나 성경에는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이 성경이 우리 맘속에 들어오거든요. 교회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것은 내 속에 이 저주가 일어나면서도 ‘나는 항상 피해자야. 내 인생이 이렇게 벌을 받을 필요는 없어.’ 해놓고는 입을 닫고 “하나님, 나는 이정도로 착합니다.” 하는 그 티를 내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효과가 잘 없잖아요. 효과가 없으면 금요철야까지 합니다. 따지기 위해서. “왜 저에게 이런 벌을”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것도 안 되면 새벽기도, 그것도 안 되면 아예 교회 안 나오지요. 효과 없더라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결혼을 두 번해야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돼요. 무조건 저주입니다. 남편이 무조건 몽둥이로 치는 거예요. 철도 없는 열네 살에 시집간 거예요. 사탕 준다고 가자고 했는데 가보니 시집 와 있는 거예요. 몽둥이로 매일 패는 거예요.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하고, 십계명도 제대로 못 지키고, “똑바로 못해? 못하면 저주야. 들어가도 저주, 나와도 저주받아.”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결혼을 한 번 더해요.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우리가 이렇게 얻어맞고 있으니까 가정폭력이잖아요. 가정폭력 112신고 받고 경찰이 왔어요. 얻어 맞아서 엉망이 된 아줌마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데려가서 살림 차리고 결혼하는 거예요. 그 순경이. 

  

전 남편이 때려도 우리가 말을 못한 이유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예요. 맞을 짓을 해서 맞는데 법대로 하면 그 본성자체가 그 남편의 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실컷 매일 얻어맞는데 그 지구대 순경이 아줌마가 죽겠다 싶어서 그 아줌마 빼내서 둘이 그 앞집에서 살림을 차렸네. 

  

비유 멋지지요? 살림을 차렸는데 이미 못 지키는 것을 뻔히 알기에 매일같이 용서만 해요. 이 남편은 반대라.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아니고 “이 비천한 자, 이 쓸데없는 자, 내가 거둬야지 누가 거두겠나.” 이렇게 맨 날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을 입혀준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두 번 결혼 이야기에요. 왜 그래야 되는지, 왜 독자적으로 예수 믿고 나 혼자 바르게 살겠다는 그게 입을 다물 이야기고, 왜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로마서 7장에 보면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남편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남편은 선해요. 율법은 선한데 얻어 맞아야 될 이유가 내 속에 마귀가 나로 하여금 맨날 나의 정당성, 자기 의, 이렇게 우긴다고 해서 그렇게 얻어맞은 거예요. 이렇게 로마서 7장에 분명하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문제가 그 다음입니다. 이미 순경하고 결혼했잖아요. 결혼을 했으면 이제는 남편한데 감사해야 될 텐데 이제 좀 안 맞으니 자기가 착해서 안 맞는지 알고 앞집에 사는 남편하고 따진다? “야, 너 나와. 너 그 때 왜 때렸어?” 여러분, 따지지 마세요. 

  

이미 구원받았으면 십자가를 바라봐야 될 것인데 이제 구원받았다고 “나 이제 말씀 지킨다. 이제는 하나님의 십계명 다 지킬 줄 알고 사도바울의 권면 잘 지킨다.” 이렇게 자랑질 하려고 또 나와요. 이제는 누가 때리냐 하면, 순경이 때려요. 이게 미쳤나? 죽은 남편을 왜 찾아갑니까? 이미 새 남편이 있는데. 

  

왜 자꾸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말씀 보면서 구원받은 자기 자신을 왜 정당화시키는가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 불쌍해서 구원해 줬는데 구원 받아놓고 이제 자기가 잘나서 예수 믿고, 잘나서 복 받고, 잘나서 천당 가는 줄 알고, 왜 그렇게 자기주제파악도 못하고 그런 행세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간단히 이런 말입니다. “저 예수 믿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 믿기 전처럼 생활이 불편합니까?” 그거 따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절에 갔다가 힘들었는데 이제 예수 믿으니까 형편이 나아져야 되는데 왜 나아지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과 똑같은 소리입니다. 

  

자신이 마우스에요. 자기는 남편이 아니고 아내 입장이에요. 나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미 운명이 확정되어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우리의 모든 모습들이 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자기를 피해자로 보는데 거기에 대한 인간의 대처가 죄악 된 본성적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장에 죄악 된 본성이 나오는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모세가 하나님에게 부름받기 전에 자기 딴에 바르게 한다고 했는데 들켰어요. 

  

애굽 사람 죽인 것이 들켰거든요. 몰래 죽였어요. 자기는 착한 일을 하는 독립투사니까. 안중근 의사니까 몰래 죽인 거예요. 그런데 들통이 났습니다. 대처가 뭐냐? 피하는 거예요. 피하기, 참 비겁한 거예요.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도 그 피하기를 했어요.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사도바울이 편지를 했습니다. 

  

“비천한 자가 받은 위로를 같이 받자.” 이런 내용의 편지가 왔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숨지 말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씀 앞에, 이 복음 앞에 나오라는 겁니다. 전에는 너희가 법 앞에 나와서 잘난체를 하고, 나 억울합니다, 이렇게 했는데 이제 복음 앞에 나오게 되면, 나오게 되면, 나오게 되면, ‘아, 내가 이 정도로 비천하고 쓸데없는 자’인 것을 날마다 확인해야 돼요. 

  

그런데 복음 전하게 되면요, 복음만 달랑 챙기고 복음 앞에 나서지를 않아요. 피해버려요. 더러워서, 수준 안 맞아서 못 놀겠네, 하고 숨어들어가 버리는데 그것은 모세가 독자적으로 자기 잘났다 하는 것밖에 안돼요. 우리가 잘났다, 하는 그것은 옛날에 마귀 아바타 되었을 때의 그 행색과 똑같은 겁니다. 

  

그냥 숨어버리고 안 들키면 만사 자기 잘남이 유지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우리는 이 쓸데없는 자, 이걸 자랑하고자 세상에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게 쓸데없는 자로 나서야 돼요. 당당하게 쓸데없는 자로, 비천한 자로. 고린도교회는 이게 안 되어서 숨어버립니다. 숨으니까 요구하지도 않는 대화를 사도 쪽에서 편지를 보내서 요청했어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그 쪽에서 “내가 너희 보니 너무 훌륭하다. 너희가 위로 받으니까 나도 좋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버립니다. 사실은 이 효과가 얼마 가지도 않아요. ‘미쳤나? 우리가 요구도 안했는데 왜 저러나?’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어떤 기대를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전한 고린도전서 편지를 통해서 복음 앞에 자기를 내세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는 겁니다. 어차피 고린도교회나 우리교회나 마우스에요. 주께서 형광물질 집어넣어 놓은 겁니다. 

  

전에는 법이 들어갔지만 지금은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삽입되어 있어요. 주님은 십자가만 드러내는 쪽으로 추적기를 가지고 가동시킵니다. 십자가 앞에 나오라는 말이지요. 나오게 되면 “하나님이여, 제 인생 왜 이렇게 불편하게 살아갑니까? 왜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런 소리는 안 할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로마서 3장 21절에 나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 외. 정리해봅시다. 우리 안에는 아담적인 요소가 있어서 모든 말씀을 들으면 이게 법으로 바뀌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 

  

그러면 그 다음차례. 나는 이 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존재하고 뭔가 요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요소가 우리 안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 일어나요. 그런데 율법 외에 한 의가 와버리면 나중에 죽을 때까지 충성하다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율법 외 한 의’ 앞에 죽기 전에 먼저 서 버리면 ‘아, 뭘 해도 우리가 비천한 자요, 뭘 해도 우리가 쓸데없는 자구나.’ 하는 것을 미리 당겨서 알아버리면 그 다음부터 법을 지켜서 정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외의 한 의, 주님의 십자가용서로 우리가 하나님의 다뤄지는 사람으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의인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법 앞에 자기를 세우지 마시고요. 우리는 법 앞에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는 양심이 있어서 항상 법을 의식하는데 의식할 때, 십자가 앞에 나와, 하는 호소로, 신호라고 아시고 법을 가지고 비천한자로 나서게 되면 모든 것이 행복해요. 사람이 왜 불행한지 알아요? 

  

죄를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고집이 세서 불행한 거예요. 그러나 죄를 알게 되면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감사가 되고 그것이 행복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기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속성 어디 가겠습니까? 가인의 그 속성 여전히 우리 안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가인이 속성 앞에 진정한 피해자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피해자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을 구원하시는 목적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