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의 의미
2017년 6월 11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8:1-5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8: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서기 49년에 고린도지역은 흉년이 들었습니다. 농지를 통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잉여생산물이 모자라니 내일 일에 대해서 난감할 겁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가뭄에 시달린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예루살렘 지역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형편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야고보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지금의 터키, 그리스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예루살렘 교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흉년 때문에 가난한 그리스 지역 교인들이 넘치는 연보를 내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정리합니다.
어떻게 이런 논리에 도달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연보’는 교회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관련 있었던 겁니다. ‘교회 잘되기’ 위해서 연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복음이 복음답게 오늘도 현존하는 징후에서 연보가 시행되는 겁니다.
이 관계를 알기 위해서 먼저 ‘복음’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주의 이름’입니다. 세상에서는 먼저 물체나 사물이나 사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있음’과 부합되도록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먼저 ‘주의 이름’이 먼저 있고 이 이름에 부합되는 자를 이 지상에서 골라냅니다. ‘골라내는’ 이유는 그 고르는 작업 속에서 비로소 창제 전에 숨겨진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해내시는 기능이 본질과 본체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지옥가는 것도 주의 이름의 솜씨에 사람이 영생가는 것도 주의 이름의 솜씨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따라서 이 ‘고르는 작업’이 없이는 이 지상의 ‘주의 이름’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전제, 십일조, 예물, 헌물을 드려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참된 이스라엘이 드러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천국이란 오로지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요 복음’으로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십일조 및 율법을 주신 것은 이 ‘거저 주시는 복음’이 인간의 태생적인 범죄로 인하여 가리워져 있었던 겁니다. 이 방해물의 존재는 하나님에 대한 헌금과 헌물과 연보를 통해서 노출되게 됩니다.
야곱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깔려있는 진짜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된 분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십일조’는 야곱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 내부에서 야곱의 거짓됨을 날마다 드러내게 하시는 ‘이스라엘’이 하게 되는데 그 십일조의 끝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이 곧 십일조입니다. 창세기 14:20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서 십일조를 바팁니다.
그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오신 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님만 받지 그 외에 어떤 것도 안 받습니다. 이미 ‘뭘해도 죄다’고 다 들통 난 마당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안 받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교회와 관련된 자가 아니라 복음과 관련된 채 움직이는 존재가 됨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달리 말해서 ‘주의 이름’에 합당한 자로 ‘주의 이름’으로 의해서 조성된 존재가 자기 자신임을 아는 겁니다. 이 ‘주의 이름’이 드러나는 방식은 바로 ‘주의 이름’이 무엇에 가로 막혀 있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자기 이름’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이름의 명예’를 가장 내밀한 곳에 두고서는 그것을 지켜주는 생을 살게 됩니다.
이게 소위 ‘성공’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기 이름’을 성공적인 존재를 탈바꾸기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성공을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헌금하기’, ‘어려운 가운데 연보하기’입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했다가 망하게 되는 그 절차를 그대로 답습하게 됩니다.
백화점에 와서 원하는 매장에 가려면 원치 않는 매장을 거쳐서 가야하듯이, ‘그저 주신 영생의 복음’에 이르기 위해 인간들은 망해야 하는 교회를 마주쳐야 합니다. 거기서 복음에 위배되는 본인의 잠복되어 있는 ‘비(非)-복음적 성향’을 노출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공짜로 구원받았으니 성의를 표해야 한다. 사가지 없이 굴면 안 된다”성향들입니다. 하지만 헌금을 통해서 우리는 비교 대상들이 달라지게 됩니다. 헌금을 다들 적게 내는 곳에서는 낭비처럼 느껴지고, 다른 많은 액수를 하는데서는 자신이 인색하게 자기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식으로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인생을 어떻게든 성공작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악마의 심보를 보여주는 중입니다. 헌금은 어쩔 수 없이 악입니다. 따라서 헌금을 하는 악을 저질려야 합니다. 그것도 정기적으로 하는 악을 저질르려고 하고 나아가서 내가 낸 헌금을 교회가 제대로 쓰고 있는 지 감시하는 악도 저질러야 합니다. 이런 악 중에 가장 악할한 악의 바로 ‘자기 이름의 가치를 고스라이 드러내는 일과 헌금을 연관시키는 일니다. 어떤 한국 사람이 2017년 5월 19일 날 독일 뮌헨에서 고백한 글입니다.
“스위스에서 비자도 거절되고 독일어 실력도 부족했기에 일단 독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거죠. 그런데 생각보다 초기 비용도 많이 들고 시작부터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저를 격려해주고 실제로 재정적인 도움도 너무 많이 주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떠나기 전에 100만원이 모자랄 때 100만원이 들어왔고, 당장 스위스에 상고할 재판진행비로 700유로가 필요할 때 700유로를 받았고, 2주간 머물 집세가 없을 때 그 2주간의 집세를 받았고, 또 마침 두달 간 살 집의 보증금 800유로가 구멍 났을 때 100만원이 들어왔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 때 쌀과 식료품도 보내주시고 또 그리고 얼마 전 모든 집 계약을 미치자 통장 잔액이 0이 가까운 약 100유로가 남았습니다. 6월 월세와 부동산 수수료를 5월 18일까지 입금해야 했는데 처가에서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그래도 대략 1000유로가 모자랐는데 어제 확인해보니 딱 그만큼이 정말로 5월 17일부로 정확하게 들어왔습니다.”
왜 이런 고백이 악랄한가 하며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로 드러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공사례로서 외부로 전파될 의향을 갖고 있고 이것과 ‘주의 이름’의 본질과 연관시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실패’를 목표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실패할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지 아니하면 정신병자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불어 닥친 가난은 곧 자신들에게 합당한 처지라는 사실을 알고, 연보를 통해서 자신의 위상을 고백한 겁니다. 헌금 내고 나머지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근원적으로 주님이 차단시키신 조치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 소식’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신 분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0강-고후 8장 1-5절(연보)1706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8장 1-5절입니다. 신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8:1-5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서기 49년도에 그리스지역, 이 고린도지역에 큰 가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지역이 상당히 힘들었고, 농사짓는 시대기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축적되는 곡물, 남아도는 곡물 같은 것이 없어요. 그러면 다음해까지 비축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가난한 거지요.
예루살렘 교회, 지금의 팔레스타인, 현재 이스라엘 동네에도 역시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가 안디옥의 사도바울에게 부탁을 했어요.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 그 동네인데 거기 있는 사도바울에게 부탁을 해서, 예루살렘 교인들이 살기가 어려워졌으니까 형편 되거든 좀 도와달라고 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던 사도바울이 그리스 그쪽동네에 1차전도, 2차전도 하면서 늘 그것을 이야기했어요.
사도바울이 모금을 하니까 그리스 교인들이 자기들도 어려운 가운데서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서 모금이 많이 되었고 서기 56년경 3차전도 마치고 난 뒤에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전달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 체포가 되어서 로마로 압송되게 되지요.
그 때 가뭄이 들었는데도 남의 동네 걱정해서 헌금한 그 이야기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납득되지 않는 내용이 나와요. 2절에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가난이 없었으면 연보가 안 나왔을 것인데 가난, 그것도 심한 가난이 있었기에 연보가 많이 나왔다고 사도바울은 성경에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본문 보면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연보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연보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연보는 논쟁거리가 되지를 못해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연보를 하겠다는 그 마음씨에 대해서 주님이나 복음쪽, 하나님은 좋게 보지 않습니다. “네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연보하느냐, 인간들아!” 수색에 나서요. 노량진경찰서 형사과 동원됩니다.
“왜 연보하는데? 이것들이 이상해. 복음 모르는 것 아니야? 구원 못 받은 것 아니야? 구원받았는데 왜 연보를 하지? 영생 얻었는데 왜 연보를 해? 왜 헌금하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본문이 모든 사도바울의 말씀이 복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연보하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무슨 수작이야,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구제하고 십일조 했다 했잖아요. 지옥 갔어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은 하나하나 다 구분해서 십일조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옥 갔습니다.
저희 아비 악마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십일조 그렇게 하라고. 마태복음 6장에서는 주님께서는 아주 심하게 이야기합니다. 구제하고 있는 바리새인을 보고 하는 말이, 무슨 조항을 첨가시켰는가? “구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어?” 시비 걸 것을 해야지 이것은……. “오른손에 구제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했어? 알게 했지?” 이렇게 시비 걸고 닦달내고 달려듭니다.
구제 헛방이라는 겁니다. 네가 받을 상은 끝났다, 상 없다는 거예요. 구제를 하려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헌금할 때 다 깁스 하고 와야 돼요. 깁스해도 소용도 없어요. 내가 알아차려요.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쪽 뇌고 왼쪽이 하는 것은 오른쪽 뇌가 한다는 겁니다.
오른 뇌와 왼쪽 뇌 사이에 뇌량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명을 하면서 다 전달된다는 겁니다. 가운데를 막는 수술을 해서 헌금하는 그 순간은 반병신이 되어야 돼요. 병신 만들어서 서로 모르게 해야 돼요. 구원받았는데 왜 헌금하느냐, 그 마음씨에 뭔가 수상한 것이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헌금을 하게 되면 하면 할수록 헌금에 대한 비교대상이 점점 늘어나고 깊어집니다. 교회 올 때마다 5천원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 천 원씩 하는데 혼자 5천 원씩 해서 너무 낭비가 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천원만 해도 되는 교회인데 왜 내가 5천 원씩 하느냐는 말이에요.
그런데 자기는 5천 원씩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만원씩 헌금해요. 그러면 스스로 자기가 너무 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짜니까 내 인생도 짠 인생이 되지. 인상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상한선이 있어요. 너무 헌금을 과도하게 하게 되면 좀 과도하다는 생각, 분에 넘친다는 생각이 들면 헌금 돌려막기에 들어갑니다.
지난번에 tv에서 아프리카 기아들 살리는데 3만원 후원했으니까 내가 평소 한 달 치하는 헌금액수에서 그걸 빼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올 때의 기름 값을 계산합니다. 중동의 산지 형편에 따라서 기름 값이 오르거나 내릴 수가 있어요. 또 주유소 잘 못 들어가서 좀 비싸게 넣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날 치 헌금에서 확 까요.
돌려막기 하는 겁니다. 헌금의 한계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우리 안에 신자 아닌 요소가 잠복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돈 한 푼 안 받고 영생을 줬거든요. 천국을 줬다는 말이지요. 그게 복음인데 우리 머리로는 알아요. 생각으로는 아는데 우리 속에 우리의 구원을 훼방질하고 구원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요소가 이렇게 합니다.
“네가 공짜로 구원을 받았으면 사람이 싸가지가 있어야지. 입 딱 씻고 네가 염치가 있어야지.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받았으면 티라도 좀 내야지. 네가 공짜로 누구한테 뭘 받으면 그냥 지나가나? 티라도 내야지.” 그게 화근입니다. 이게 화근이에요. 헌금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으면 교회가 존재하는 이것이 마치 내 헌금 낸 어떤 성과라고 연결시켜 버립니다.
목사들이 주로 그렇게 하지요. “헌금하세요.” 그러면 교인들이 “헌금은 왜 해야 됩니까?” “헌금 안하면 교회가 문 닫습니다. 망합니다.” 그러면 복음 아는 똑똑한 교인은 묻지요. “교회가 망하다니요? 목사님이 교회 책임자입니까? 주님이 책임자입니까? 주님이 자기 몸인 교회를 망하는 교회로 만들었겠어요? 교회는 주님이 머리라면서요?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했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망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아, 이 땅에서 주님도 능력이 없구나. 주님도 참 별 볼일 없네. 하청업자 능력 따라서 교회가 되고 안 되고, 그렇게 되는 거구나.”
그러면 목사가 ‘아차, 말을 또 잘못했구나.’ 해서 “교회가 있어야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러면 또 똑똑한 교인이 물어요. “복음전파의 책임자는 주님 아니에요? 주님이 책임자인줄 알고 있는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보내지 아니하면 누가 전파하리요’ 주께서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 보낼 자를 알아서 보내는데?”
그러면 주님의 결재가 내려져야 되거든요. 옛날 선지자들 경우는 천상회의 참석시켜서 보낸다고요. 그러면 주님이 책임자에요. 그런데 구약의 거짓선지자의 공통점이 있어요.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보내지도 않았는데 전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아는 교인들도 별로 없지만, “목사님, 잘됐습니다. 이참에 본인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목사 노릇한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목사님은 들통 낸 거지요? 짝짝짝! 잘됐습니다.”
헌금이 안 나온다는 것을 통해서 나는 사기꾼이요, 라고 공개가 되어버린 겁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생수를 5억 원어치 팔아먹었는데 그 안에 게르마늄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경찰이 조사를 해보니 안에 게르마늄이 없어요. 현대판 봉이 김 선달 노릇 한 겁니다.
교회는 복음이 있어야 하는데 복음이 없이도 천국 간다고 팔아먹었으니까 이게 바로 현대판 봉이 김 선달이에요. 봉이 김 선달에게는 돈만 날렸지만 지금은 영혼까지 날릴 판이에요. 한국 외에 있는 한국교회가 1만 4천개인데 그중에 1천5백 개가 LA에 있습니다. 뉴저지나 뉴욕에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그 가운데 복음 이야기하는 교회 몇 개 되겠어요? 고린도후서 8장, 이것가지고 복음과 관련시키는 교회가 몇 군데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한테 십일조 하고 성전세 내고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제는 말한다.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헌금하게 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이 망해야 그 망하는 현장에 비로소 진짜 이스라엘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스라엘은 헌금을 함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온몸으로 체험했는가?
이스라엘이든 하나님의 나라든 돈 없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한 거예요. 교회든 성당이든 절간이든 뭐든 돈 없이 되는 것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득하게 한 겁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교회를 살리고 주님이 교회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돈 되는 교인들이 모일 때 그 교회에 돈이 쌓이고 모이고 교회가 커진다는 것을 오늘날뿐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온 몸으로 체험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지자시대에는 빈부계층의 갈등이 심했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선지자들이 계속 파견되었고. 그 자세한 이야기는 수련회 첫 시간에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수련회 첫 시간에 선지자들에 대해서 이야기 다 할 거예요.
선지자가 천상회의에서 보낸,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들이 왔을 때 그들이 외친 것은 딱 하나입니다. 네가 이스라엘이냐, 그러면 이스라엘을 놓아버리라는 말이지요. 네가 인간이냐, 그러면 인간을 놓아버려야 돼요. 우리는 인생을 성공하면 안돼요. 우리는 실패를 목표로 해서 살아야 됩니다.
요새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 선생님들을 충분히 이해해요. 학교에 있는 애들이 전부 정신병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정신병자를 가르치려니까 선생님부터 정신병자가 되어야 돼요. 애들이 정신병인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그 집구석의 어른들이 다 정신병자들이에요. 오늘날 세상이 전부 다 정신병자에요.
정신병자들인 애들을 선생님이 인간답게 가르치려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교사가 보너스도 있고 한다지만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선생님들이 옛날 학창시절 생각하게 되면, 내가 지금 이러려고 교사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이것은 개판입니다.
그 정신병이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전부 다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요.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난 것 남한테 꿀릴 것 없이 남에게 자랑질 할 만한 내 인생 내가 성공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제가 정신병자라고 하느냐? 성경을 보세요. 인간은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잠복되어 있는 실패를 외부에 발산하라고 인생을 살게 하는 거예요.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실패자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실패자 되라고 만들어놓고 우리는 무슨 괴물이 들어왔는지 실패한 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려요. 사람이 억지를 부리면 정신병 걸립니다. 뭐든지 억지로 하면 정신병 걸려요.
정신병이 전부다 억지에서 나온 거예요. 욕심에서, 억지에서 나온 겁니다. 인생, 실패를 목표로 하면 돼요. 가훈을 정하세요. 제가 정해드립니다. “오늘도 실패하자.” 행복 안할 날이 없어요. 행복이 절로 옵니다. 저절로 행복이 안 올라야 안 올수가 없어요. 오늘도 행복하자, 하니 아버지가 택시드라이버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불행이, 이런 거요. 아침에 기도하는 거예요. “주여, 오늘도 실패하게 하여 주옵소서.” 왜 실패를 해야 되느냐 하면, 가장 나다운 것은 복음과 상관없이 마귀와 상관있는 것이 가장 나다운 거예요. 그러면 나다운 것을 오늘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천사 같은 것은 내 본성에 안 맞아요.
누구 보고, 천사입니다, 하면 부담 느껴요. 어울리지도 않는 천사 짓을 또 해야 되니까. 이게 힘들어서 못살지요. 제가 안양이냐 가락이나 강의하면서 늘 이야기해요. 제발 죄를 지으라 하는데 왜 죄를 안 지으십니까, 제가 막 화가 나서 이야기를 해요. 그냥 죄짓고 살면 되는데 그게 여러분에게 딱 맞아요. 죄짓고 사는 게 딱 맞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어울리지도 않는 천사 소꿉놀이를 하고 있으니까 점점 자기가 정신병자가 되는 거예요. 상견례를 하고 나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몰라요. 애가 하나라서 천만 다행이지 둘 셋씩 있어서 상견례하면 그 압박감, 뻔히 다 아는데 점잖 빼는 그 꼴 하고는, 같잖지도 않아요. 어험, 으로부터 시작하는 양반인사부터 나오고……. 상견례 하고 나서 집에 오면 옷 벗어서 다 던져버려요. 답답해서 못살겠어요.
평소에 잘 살다가 사돈에게서 전화만 오면 온 집안이 긴장이 확 돼버려요. 쉿, 쉿, TV크고, 쉿! 시집장가 안 보내봤으니 모르겠지요. 그러니까 구원받는 게 이상한 일이에요. 지금 죄밖에 안 나오고 죄만 짓고 그게 우리한테 어울리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복음으로 구원했어요.
구원하니까 내 몸이 그 구원에 대해서 낯설어요. 전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몸이 “무슨 소리에요?” 이러고 있어요. 어떤 행세를 하고 있느냐? 구원되어서는 안 될 죄악의 요소가 나오는 그것이 예의범절이고, 천사 짓이고, 은혜 받았으니 값은 해야지, 성의를 봐서라도 이정도 헌금은 해줘야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겠지, 라는 인간적인, 극히 동양윤리적인 것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섞여 나오는가? 헌금이라는 것, 연보가 나와요. 우리가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러면 복음이 뭐냐? 세상 모든 것은 존재가 있고 그 이름을 짓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제 6일에 짐승을 다 만들어놓고 아담보고 이름 지으라고 했어요. 세상원칙은 존재가 먼저 있고 이름을 짓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이름부터 먼저 있고 그 이름에 부합되는 존재, 피조물만 남겨지는 방식을 통해서 복음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그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미 창세전에 예정했습니다.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형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워하기로, 지옥보내기로 작정을 한 거예요.
주님의 계획안에 이미 주의 이름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다 확정되어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지만 사실은 주의 이름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과 에서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주의 이름입니까? 아니요. 에서가 주의 이름입니까? 아니요. 주의 이름이 먼저 있다면서요? 예, 먼저 있는데 그 먼저 있는 이름은 우리 인간들 중에서 어떤 피조물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이름에 부합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놓고 그중에서 주의 이름에 부합되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 작업의 과정 속에서 주의 이름의 실체와 본질이 나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배제하는 방식으로. 모든 인간은 자기 명예와 자기 이름을 걸고 살잖아요. 그러니 자기이름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지어준 가문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주례 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를 들면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성경에 나오는 대로 부모를 떠나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겁니다. 부모를 떠나서. 초창기에 주례 할 때는 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제발 부모를 떠나서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옛날에는 시집간다는 겁니다. 시집가기 위해서 혼인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들만의 새로운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지요. 시집가는 것이 아니에요. 미련 같은 것을 두면 안돼요. 부모로서 자식들이 결혼했으면 너무 미련 같은 것을 두지 말아야 되는데 “우리 집에 들어오너라.” 하거든요. 아버지가 이상해.
이제 허락하마, 2층 청소 다 해놨으니 들어오라고 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예수님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보고 마치 우리 집에 시집오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기존의 이 존재, 하나님이 만들어준 이 존재를 하나님이 책임지고 키워줘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것이 우리네 생각이에요.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고 사람들 모여서 교회 했으면, 신이시여, 예수여, 삼위일체여, 성부성자성령이여, 하나님을 위해서 세운 교회니까 우리를 팍팍 밀어주고 키워주고 도와주고 성장하도록 후원해줘야 옳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빙자한 봉이 김 선달이라니까요. 거기에 게르마늄 없어요. 사기꾼이에요.
따로 나오는 거예요. 교회를 만들어놓고 교회를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와요. 교회를 만들어놓고 교회가 망해야 그 뒤쪽에 교회 때문에 밑에 깔려 있는 진짜 이스라엘, 진짜교회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매장이 저쪽에 있다면 이쪽 매장을 우선 지나가야 되잖아요. 교회를 지나가서 그 다음에, 나는 별 볼일 없습니다, 하고 복음에 접촉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에 접촉되는 거예요. 앞에 복음이 되어버리면 교회에서 호객행위 합니다. “오이소, 오이소, 우리교회는 복음 전합니다.”
이름 자체도 아예 행복교회, 성공하는 교회, 축복교회, 잘되는 교회……. 교회가 그런 식으로 창녀처럼 호객행위를 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자기밖에 모르기에 자기고통이 우선이에요. 그러나 복음 안에는 누구의 고통이 있느냐? 주님의 고통, 하나님의 고통이 있어요.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통은 생각도 안하고 있어요. 자기 한 맺힌 것, 자기 억울한 것, 자기 인생 실패한 것 빨리 보상받기 위해서 행복한 교회……, 지금 보편적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특정교회, 칠곡이라는 그 장소는 이야기를 안 하겠습니다만, 칠곡 톨게이트 근처 한 700미터쯤에 행복한 교회라고 있어요.
축복교회, 번영교회, 긍정적 이미지를 간판으로 내건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그런 교회 말고 진짜 교회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데 진짜 교회는 없습니다. 죄인들끼리 모인 곳이 무슨 진짜 교회겠습니까?
그래서 교회 나오면 헌금을 해야 돼요. 왜? 망하기 위해서 헌금해야 됩니다. 망하기 위해서 헌금해야 되고, 그 다음에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헌금을 하는데 정기적으로 하는 그것이 더 망하는 깊은 늪에 빠지는 코스입니다. 그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깊이 빠지는 방법은 헌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감시하고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보다 더 진짜 죄짓는, 헌금하는 죄를 노골적으로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제가 페이스 북에서 찾아냈어요. 이런 악랄한 짓을 하는구나, 했는데 그 악랄한 짓을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한국 사람이 2017년 5월 19일 날 독일 뮌헨에서 고백한 글입니다. 제목은 바꿔야 돼요. 뮌헨에서 만난 귀신이라고. 이름은 진규선. 이름에 괄호 치는 것도 짜증나요.
“스위스에서 비자도 거절되고 독일어 실력도 부족했기에 일단 독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거죠. 그런데 생각보다 초기 비용도 많이 들고 시작부터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저를 격려해주고 실제로 재정적인 도움도 너무 많이 주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떠나기 전에 100만원이 모자랄 때 100만원이 들어왔고, 당장 스위스에 상고할 재판진행비로 700유로가 필요할 때 700유로를 받았고, 2주간 머물 집세가 없을 때 그 2주간의 집세를 받았고, 또 마침 두닭 간 살 집의 보증금 800유로가 구멍 났을 때 100만원이 들어왔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 때 쌀과 식료품도 보내주시고 또 그리고 얼마 전 모든 집 계약을 미치자 통장 잔액이 0이 가까운 약 100유로가 남았습니다. 6월 월세오하 부동산 수수료를 5월 18일까지 입금해야 했는데 처가에서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그래도 대략 1000유로가 모자랐는데 어제 확인해보니 딱 그만큼이 정말로 5월 17일부로 정확하게 들어왔습니다.”
이게 바로 자기의 잠재되고 잠복되어 있던 자기의 본성이 귀신의 도움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난 거예요.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이름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페이스 북에 올린다는 것은 마지막에 결국 뭐냐? 나는 주의 종이라는 겁니다. 나를 도와주는 것은 곧 주님을 도와주는 것이니 주의 이름으로 잘 도와주셨습니다, 하는 거예요.
결론으로 말하면 이것은 딱 두자입니다. ‘성공’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모든 사람에게 이미 깊숙하게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잠복되어 있는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일단은 즉흥적으로 헌금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게 효과 있네. 만원 헌금했는데 30만원의 예상 밖의 돈이 들어왔다. 성경말씀에 빈틈이 없구나.’
왜? 3십 배, 6십 배, 백배를 준다고 하니까 괜찮은 투자다 싶어서 다음부터는 정기적으로 하는 겁니다. 헌금하는 그것도 죄일뿐더러 더 나쁜 죄는 그것을 정기적으로 하는 것. 정기적으로 한다는 말은 일종의 세금이 되는 거예요. 세금은 내고 난 뒤에 자기 정당화가 되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내가 낸 돈이 어디에 잘 쓰이는지를 점검하는 거예요. 선교헌금 하고 난 뒤에 그 돈을 떼먹는지, 목사들이 그걸로 호텔에 가서 고스톱 치는지 감시하는 것. 그런데 가장 악랄한 것은 아까 읽어준 그 경우가 가장 악랄한 거예요. 결국은 뭔가 줘놓고 받아 챙기겠다는 어떤 아지트 같은 것은 것이 아직도 내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주여, 다른 것은 다 실패하더라도 나의 아지트 같은 이 자존심, 최후까지 남은 이 자존심만큼은 성부성자성령께서 지켜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그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당부합니다. 1단계 밟으시고, 2단계, 3단계, 4단계, 다 밟으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헌금 하세요, 그런 뜻이에요.
그냥 이야기하나 에둘러서 이야기하나 결국 똑 같네. 왜 우리 속의 괴물이 헌금하는 짓을 하게 만드는가? 아직도 오늘 본문에 담긴 이 비밀은 안풀렸습니다. 가난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넘치는 헌금을 내게 했는가의 그 과정은 아직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 드리기 전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야곱은 창세전에 본래 복을 받는 장자로 태어났는데 막상 이 땅에 태어날 때는 둘째아들로 태어나요. 장자같으면 그 알고리즘, 논리단계를 단출하게 해서 장자로 튀어나오게 하면 될 것을 둘째로 태어나게 합니다.
둘째로 태어나놓고 장자를 추월해서 둘째가 장자 되고 첫째인 에서는 저주받게 돼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야곱이 장자의 상속을 속여서 취하고 형으로부터 도망을 칩니다. 야곱은 죽음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 중인데 밤에 잠을 자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거기는 천사가 이동하는 통로에요. 야곱 자기가 올라가는 통로가 아닙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천사전용에스컬레이터라니까요. 천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마하나임, 군대처럼 왔어요. 천사가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그리고는 꿈에서 깼는데 이 말을 듣고 야곱은 완전히 오해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이 야곱을 사람처럼 취급하고 귀한 존재로 간주하고 나와 손잡고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펼친다고 완전히 오해했습니다. 그 오해의 근거가 뭐냐? 내가 다시 이 벧엘, 벧엘은 하나님의 문이거든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그것이 벧엘 인데, 이 문이 있는 이곳에 다시 온다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이야기해요.
십일조를 야곱이 어디서 배웠겠어요. 창세기 14장에 보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거든요. 아들도 없고, 딸도 없고, 지상적 존재가 아닌 존재인 멜기세덱이에요. 자기도 할아버지처럼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인정하고 구원시켜주는 존재인줄로 착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죽여 버립니다. 야곱이 죽지 아니하면 야곱이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는, 야곱이 착각하고 있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한다는 개인구원, 이 착각에 의해서 숨이 막히도록 깔려 있는 그 분, 이스라엘이 나오지를 않아요. 주께서는 그 야곱을 없애버립니다. 죽여 버립니다.
야곱을 죽이면 뭐도 죽느냐 하면, 야곱이 드리겠다는 야곱의 모든 과거의 자기를 위한 자기시나리오, 인생이지요, 자기 나름대로의 괜찮은 소설, 작품,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그 모든 드라마, 그것도 그 순간 같이 날라 가버립니다. 야곱을 주님께서는 죽이고 야곱 안에서 뭘 끄집어내는가? 이스라엘을 끄집어냅니다.
십일조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십일조를 하게 하는가? 십일조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일조를 내고 있는 이, 벌벌 떨면서 헌금하는 이것을 찰칵 찍어야 돼요. 돈 내는 것이 너무 아까워요. 내 노동의 집약체니까. 이것을 사진 찍어야 돼요. 이런 이 모습, 이 모습이 진짜 값없이 용서하고 값없이 구원하는, 진짜 오시는 분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가로막고 있는가? “하나님, 헌금했잖아요. 십일조 했잖아요. 따라서 나머지는 제 것입니다.” 하는 거예요. 주님은, “오잉? 애초에 네 것이라는 것이 다 있었어? 그런 것도 있었어? 누가 너에게 내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인식시키고 누가 바람을 잡았는지 모르지?” 그게 너를 죽이게 했다는 겁니다.
“이것까지는 내 것이다. 헌금은 했으니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처분가능성이라 하는데, “이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합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안 주면 안 받으면 되고. 줄 것은 주되 구태여 받을 생각은 안합니다.”
영생 받았다고 예의는 갖춰야 되니까요. “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주님은 절대로 손대지 마세요. 이것은 제겁니다. 줬잖아요. 세금 줬잖아요. 이것은 제겁니다. 나머지인 이 제 것을 가지고 인생을 성공작으로 제가 만들 거예요. 그래서 헌금 잘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렸다는 것, 그 티를 내는 나의 독자적인 아름다운 영광은 내가 뽐내겠습니다.”라는 이것이 헌금을 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들키지 아니하는 악마의 얼굴입니다.
그런 것 다 하나씩 키워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찐빵 안의 앙꼬 같아요. 밀가루는 날라 가도 그 앙꼬는 죽을 때까지 계속 있어요. 주님께서는 야곱을 죽여 버리고 이스라엘에 야곱의 신체를 덧입혀 버립니다. 야곱이 죽었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브니엘에서 나옵니다.
내가 죽었는데 주님이 나를 살려줬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기 전에는 야곱이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돼요. 내가 주인공이 되면 내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찬미하고 나를 경배하는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계속 유지가 돼요. 공들여 살아온 내 인생, 평생 나는 내 인생을 이만큼이나마 올려놓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공들였느냐.
그리고 하나님은 외부인이 됩니다. 내가 주님께 이렇게 헌신하니 정작 내가 챙기려고 하는 내 인생의 소설은 성공작으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천국 가는 백성의 자세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헌금 하면서 비교대상 된다고요.
헌금을 이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의 헌금, 부자는 얼마나 헌금하고 가난한 사람은 얼마나 하고, 자꾸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게 헌금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그런 소리 있잖아요. 그런 소리 듣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은 주의해야 돼요.
그것도 죄가 됩니다. 그것이 비록 부자로서 꾸며지는 드라마는 아니더라도 돈 없이도 주님 잘 섬겼다는 새로운 김수현 작 드라마가 시작되는 수가 있어요. 돈 없고 가난해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념 하나로 버텨서 구원받았다는 그것. 제가 장담합니다. 백 프로 지옥 갑니다.
진짜 성령 받은 성도가 하는 헌금은? 헌금 하세요. 하는 가운데 비교대상이 어려운 가운데 헌금하는 것, 또는 부자가 십의 3조하는 것이 비교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비교대상으로 등장해야 돼요. 예수님은 본인 자체가 십일조에요.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지만 그 모든 십일조를 받아 챙긴 그 멜기세덱이 그 몸 자체를 십일조 그만! 그 선언을 하면서 바칩니다. 그것을 새언약이라고 해요.
새언약시대에는 더 이상 인간이 바칠 것이 없어요. 바치면 십일조를 모독하고 그것은 복음 안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 마지막 때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 죄인한테 한 푼도 안 받아요. 단 한 한 푼도. 교회라는 주식회사에서는 받을지 몰라도 주님은, 복음은 안 받습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하라니까요. 그러니까 헌금하는 죄를 지어야 된다니까요. 왜? 그렇지 않으면 자기 집구석이 하나의 교회가 되어버린다니까요. 주님이 주셔서 이만큼 살림을 잘 일궈놓았다는 거죠. 맨날 지하방에 살다가 7월에 아파트에 한 번 살아보자. 주여, 이때까지 주께서 도와줘서 은혜로……, 말은 잘해요. 들은 구석은 있어서 은혜니 뭐니 온갖 말을 주워 삼키면서 ‘이제 살았다. 드디어 습기 찬 지하에서 빠져나와서 남향의 햇빛 드는 집으로.’
어떤 사람의 소원이 뭐냐? 남쪽에서 햇빛이 드는 집을 갖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아직도 그 소원을 못 이뤘습니다만. 그런 아파트가 갖고 싶다. 어떻게? 알맞게 헌금을 해서. 알맞게 헌금해서 교회가 교회 아닌 것은 좋아요. 교회 아닌 것은 좋은데 자기가 공들여서 쌓아온 자기집구석은 새로운 교회로 등장하는 겁니다.
새로운 교회로. 거기서 주인공이 누구냐? 누가 영광 받느냐? 그 집구석을 일구기 위해서 애썼던 내가 영광을 받으니까 그게 죽을 야곱의 모습 아닙니까? 이제 마지막 이 본문에 답을 내야 돼요. 가난이란 가난하지 않을 때도 본인이 지질이 궁상으로 못사는 실패자로, 이 고린도교회는 십자가 앞에서 알게 된 겁니다.
엘리야시대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어요. 현재 한국에 1년여 동안 비가 잘 안와요. 아직 2년 6개월 남았습니다. 가난이 성공을 원하는 나에게 들이닥칠 액운이 아니라 나 자체가 가난이 어떠니, 비가 오니 안 오니, 토를 달 자격이 못 된다는 것. 가난의 순간 나는 그 가난에 부합되는, 가난도 나에게는 복이 되는 그 정도로 나는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실패자인데 가난을 통해서 실패자임을 더욱 확인시켜 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따라서 여기서 내가 연보를 한다, 헌금을 한다, 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등록된 사람은 이제는 가난과 더불어서 모든 작용이 내가 주체가 되어서 행하는 모습은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예루살렘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이 사도를 통해서 들려왔다는 그 자체가 우연이 아니고 이제는 예루살렘을 생각할 것이 아니고 내가 과연 신자가 맞느냐, 내가 과연 성도인가, 내가 정말 값없이, 아무 대가도 없이 영생을 얻을 그 정도로 나는 죄인인 것이 맞나?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 연보를 해 보는 겁니다. 해보면 할 때마다 아까워요. 아깝지요. 잘 쓰이는지도 감시하고 싶지요. 그러나 그럴 권리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뭘 해도, 연보를 넘치게 하더라도 그게 죄가 된다는 그 사실을 통보하는 자체가, 너는 영원한 천국과 연관된 사람이지 지상에서 보이는 교회와 관련된 사람이 아닌 것을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마음으로 그들은 연보를 했기에 뒤에 나오기를, 네가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중 하나가 가난이라는 은혜가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연보를 유도하게 했다는 것, 그래서 그 모든 영광은 너희가 아니라 주님이 받으셔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당부하는데 헌금을 정기적으로 하시되 정기적으로 할 때마자 정기적으로 한다고 여기지 마시고 즉흥적으로 한다고 생각하고 정기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줄 것 주고나면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지독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하지만 십자가 앞에 내세울 때에 그 못된 성질, 못된 야곱 같은 인간도 십자가로 미리 죽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미 죽은자로서 헌금하고, 죽은 자로서, 죄인으로서 이 땅에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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