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35강-거룩(고후7;1) 1705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14. 18:36
2017-05-14 12:46:19 조회 : 23         
   거룩 170514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거룩(고린도후서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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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7-05-14 13:33 

거룩 

2017년 5월 13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7:1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나 ‘거룩’의 개념에 대해서 인간들은 ‘개인 구원’, 혹은 ‘개인 거룩’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좋아보이거든요. 갖고 있으면 괜찮아 보이는 신의 선물로 여깁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기에 하나님의 거룩이 과연 자기에게 합당한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세상 이해는 본인의 정신세계의 범위의 확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릴 때는 부모와 함께 있는 가정이 아이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의 이해가 퍼져가면서 자아를 채우는 내용의 범위도 깊어집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누구나 훌라후프 모양의 자아를 위한 테두리가 따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 경계선 안에 갇혀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1:4에 보면, 거기에 애굽 나라의 바로왕이 나옵니다.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찐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통해서 보여주신 이 세상은 실상은, 이미 ‘삼켜져 버린 세상’이라는 겁니다. ‘삼킴’이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의미가 아니라 다같이 집단적인 운명 속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삼킴’을 당하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이렇듯 삼킴을 당한 인간들은 너나 할 것없이 자신의 세상 이해가 넓혀지고 깊어지면질수록 산다는 것이 고통이라는 점을 압니다. 사실 인간들이 설치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본인이 느끼는 고통의 강도를 표현한 겁니다. 아무리 가져도 결핍감은 가시지 않고, 아무리 식구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도 외로움은 가시지 않습니다. 

이미 삼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는 악마가 가르치고 시킨 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려고 합니다. 종교나 진보된 문명을 통해서 탈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탈출방식마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5: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악마가 시키는 대로 이 땅에 거룩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의 출발점은 순전히 ‘자기 구원’입니다. 개인 구원 의지로 중무장되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겁니다. 즉 ‘구원욕구+말씀 순종=거룩’라는 공식을 사수하는 겁니다. 

이런 식에 충실한 자가 누가복음 18:11에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런데 이 현장을 최후 재판 현장으로 바꾸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바리새인은 지옥 가기로 확정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천국가게 된 겁니까? 누가복음 18:12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 세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출발점이 인간들의 개인구원욕구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의도나 기대가 조금도 섞여들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천국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데 그 근거는 바로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들로부터 배척받았고 그 배후에는 악마의 삼킴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은 인간의 협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인간의 협의에 의해서 배척당한 세계입니다. 이는 천국 앞에서 인간 세계는 모두가 의견일치를 보이는 공통 성격에 잠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구상하는 나라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이 ‘거룩한 나라’는 거룩한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나라를 거룩하게 되는 요인은 백성들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찾아오신 분에 의해서 판정납니다. 즉 숨겨진 거룩한 분이 이 인간 세상을 찾아오시므로서 인간들은 참으로 낯선 거룩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보아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거룩으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미 인간들에게 ‘개인구원’에 입각해서 나름대로 자기를 거룩한 존재를 전환시킬 방도들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계에서는 ‘칼빈주의 문화관’으로 통합니다. ‘칼빈주의 문화관’이란, 교회만 거룩하고 교회 안에서 거룩할 게 아니라 거듭난 신자들로 통해서 이 세상 자체가 거룩한 문화로 범람하도록 성도가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말합니다. 
즉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리해서 창조적 활동의 직무를 맡았으니 창세기 1:28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쪽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땅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은 성도로 인하여 달라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온누리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퍼질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게 악마의 지시사항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신세계는 이미 알 수 없는 자율적 협의체 안에서 움직이는 성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가 알 수도 없는 이유에 의해서 단일 인체라는 경계선을 형성하고 그 경계선(몸체) 안의 활동을 ‘생명활동’이라고 우기듯이, 사회도 이와 같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면서 알 수도 없는 자연스러움에 의견결합체를 형성합니다. 물론 각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개별적 범주는 각기 다르지만 말입니다. 서로 의견이 일치되는 요소는 서로를 결합시켜 질서사회를 구성하는 요인이 됩니다. 
여기서 문자가 나오고, 개념이 나오고 더 나아가서 단일화를 시도하는 이념이 나옵니다. 이 이념에 입각해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거룩’을 시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유일한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질서에 뛰어드신 겁니다. 이름이란 원래 실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은 이름을 짓게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2:19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실체는 없고 이름부터 먼저 앞장 세우신 분이 나타났으니 그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에 의해서 성도에게 찾아오면, 성도가 다져놓은 모든 거룩과 자기 의는 다 깨어집니다. 그리고 그 깨어진 틈 사이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분출됩니다. 이것을 실천적으로 묘사하면 이러합니다. “성도는 가려가며 사람 사귀어야 한다”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처럼 자기 의가 갈라진 사람끼리만 대화가 되고, 그들이 바로 집단으로 구원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 안에 피만 찾으시는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희생으로 구원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고린도후서 7:1 
고린도후서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본문에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면 거룩이 되는 겁니다.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는데 곱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방해물이 있어요. 방해물이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 인간 자기 자신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비 오듯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그래서 그냥 떨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어떤 변화 같은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비를 머금은 구름이 비가 되어서 땅에 떨어지면 그냥 우두둑 온 산하에 들판에 떨어지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지상에 떨어질 때는 지상에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변개시키고 변경시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고 엉터리, 가짜 거룩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어요. 일종의 황사현상, 가짜의 황사현상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직, 오직 하나님의 거룩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그 거룩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이 이 땅에 와서 거룩만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 실정은 거룩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 인간들은 결국 거룩만을 추구하지 않아요. 
뭐냐? 건강만, 모든 관심사가 건강만! 황사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다 근거가 뭐냐 하면, 건강해야 될 텐데, 라는 것입니다. “황사 때문에 걱정이야.” 그걸 압축해 보면 “건강만!” 황사가 거룩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중국황사가 오든 일본황사가 오든 간에 거룩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거룩만 고집하는 하나님의 뜻에 방해되는 것이 뭐냐? 나라는 존재, 자아의식,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충돌되고 반항하고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잘못된 현상이 뭐냐? 나의 거룩입니다.

교회 2천년 역사가운데서 아직도 못 고치고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뭐냐? 

자신의 거룩을 고집하고 그걸 추구한다는 거예요. 나의 거룩. “구원받는데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거룩하면 구원받습니다.” “누가요?” “내가요.” 항상 내가 들어가요. 구약성경에는 개인거룩이라는 것이 없어요. 구약성경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거룩한 백성이고 거룩한 민족이지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개인구원도 없고 개인거룩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만 보게 되면 구약을 보든 신약을 보든 ‘더러운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만 홀라당 구원받겠다.’ 하는 이러한 자아의식이 강렬하게 튀어나오다 보니, 성경전체를 “나는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 됩니까?”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이 되는 겁니다. 
해석을 그런 식으로 줄곧 해 온 거예요. 변화도 없고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고 한 사람도 본적이 없어요. 집단거룩을. 개인이 거룩이 모여서 집단거룩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거룩이 오히려 집단거룩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간다고요? 누가 넣어줘요?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거기에 개인거룩의 모델이 나옵니다. 개인거룩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모델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인데요. 그 사람이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토색하거나 간음하거나 불의하지 않는 나를 만들어서 감사합니다.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날 지켜주니 이런 나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는 그런 나입니다.”라고 기도하니 순회 재판하는 우리 주님이 의사봉 들고 두드립니다. “여기 지옥 한 마리!” 하고 지옥 보내버리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고 나는 이런 존재입니다, 하는데 “지옥가라.” 하십니다. 이 인간은 지옥도 천국도 지금 모르는 사람이에요. 얼마나 지옥이 뭔지도 모르고 천국도 몰랐으면 내 구원부터 시동을 걸려고 하겠어요? 

바리새인 보고 “너는 지옥 간다.”고 판결했을 때에 영문을 몰랐을 겁니다. 영문도 모르고 지옥가요. 지옥 가는 사람 특징이 지옥 가는 이유를 몰라요. 왜 지옥 가는지를 몰라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았는데, 태생적으로 살았는데 지옥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옆에 누가 있어야지 그 이유를 아는가? 천국 가는 어떤 한 사람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천국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성전에서 또 한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는 세리가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을 때 “땅! 땅! 땅! 너는 천국!” 하고 판결을 해버립니다. 주님이 재판관이니까, 주님이 심판 주니까. 창주조가 심판주가 되니까 그런 판결을 했는데 그게 최종합격입니다. 
더 이상 2차, 3차 면접도 없어요. 최종합격이에요. 제가 이 대목을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사례를 먼저 말씀하셨는가? 만약에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해서 “너는 천국 가.”라고 했다면 그걸 보고 바리새인들이 커닝했을 거예요. 
‘아, 저러면 천국 가는구나.’하고 자기도 따라 했을 거예요. 마치 흥부가, 흥부가, 흥부가, 흥부가 제비다리 고쳐서 복 받았다 하니까 놀부도 강제로 제비다리 부러뜨려놓고 고쳐서 복 받으려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개인위주가 되면 결과도 개인에 원인을 두게 되어 있어요. 어떤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개인이 나서서 억지로 그 결과를 유발하려고 합니다. 만들어내려고 해요. 

내가 천국 간다는 결과는 내가 원인이 될 경우에만 내게 부합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하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안 믿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설쳐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 행함으로 된 거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천국 간 그 죄인은 자기 자신의 어떠한 행위도 어떤 결과를 달라고 요청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원천적으로 나는 내 행위를 통해서 어떤 결과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내 세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달렸거든요.
그러니까 그 믿음이 있는 그 죄수보고 주님께서 지옥 보낼 리가 없지요. 너 같은 인간이 천국에 딱이라는 거예요. 너 같은 인간이 천국에 딱 합당한 인간이에요. 어떤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자기가 조그마한 원인도 거기에 삽입하지 않기에. 그것을 자기를 부인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주님이 하는 일이 순하게 거침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주님의 일은 인간들의 시도와 마주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주의 일은 주의 일답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 인간과의 마주침, 인간의 자기밖에 모르는 그것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주의 일은 진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충돌이 없는 천국은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처음부터 에덴동산 만들지 말고 천국 만들면 안 됩니까? 왜 에덴동산은 만들고 선악과 심어놓고 생명과 심어놓고, 왜 그런 귀찮은 일들을 하셨겠어요? 처음부터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만들면 될 것을. 지옥 보낼 사람은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낼 사람은 천국에 보내면 될 것을 왜 구약이라는 것, 에덴동산이라는 것, 지금은 없습니다만 없어져야 될 그 에덴동산이 이 땅에 먼저 만들어져야 될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일은 악마와, 죄와 충돌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정이 없으면 결과가 없습니다. 과정 없는 결과가 없어요. 그 과정에 피조물인 인간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온 것은 뭐냐? 사람에게 또는 악마에게 치였던 분만이 이 땅에 유일하게 주님이 되신다는 겁니다. 
주님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예수님의 나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나라 되기 전의 절차, 과정으로서 인간에게 훼손될 수밖에 없는 설치물들을 에덴동산에 두었고, 그것이 하나의 유인책이 되어서 악마는 자기본성을 드러냈고, 그 악마로 하여금 인간들의 마음을 몽땅 다 장악하게 만들었고, 인간은 거기에 빨려 들었고요. 

선악과 심어놓았는데 선악과가 흉측한 나무가 아니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짝이 없어요. 50년, 60년 탐 안냈다고 해서 이게 비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50년 그 다음날 또 탐을 낼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주께서는 깔아놓으셨어요. 
“충돌해라. 그리고 인간의 시작의 실패를 해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네가 관여하지 마라. 온전한 은혜와 긍휼과 선물로만 형성된 것이 천국이다. 그 온전한 것, 긍휼,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너는 실패자로 그 앞에 서야 되고 나타나야 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시작, 이 거룩의 시작은 뭐냐? 나의 거룩부터 그 거룩의 대참사를 일으켜야 돼요. 류현진이 4회말 10대 빵만 참사가 아니고 대참사, 인간이 자기에게 기대한 모든 것이 대참사로 이어져야 돼요. 그게 하나의 과정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대왕카스테라를 만드는데 계란으로 만든다고 선전은 해놓고 계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식용유를 얼마를 붓는다느니 그래가지고 여기저기서 문을 닫게 된 거예요. 

대왕카스테라를 먹어 봤거든요. 맛만 있어요. 뭘 넣든지 간에. 그런데 순수하게 계란만 넣지 않았다고 하는데 배고픈데 맛만 있으면 되지 그런 것을 왜 따지는데요. 그러나 주님은 따집니다. 반드시 깨져야 돼요. 내가 깨어지기 위해서는 깨어질 거리, 깨어질 수 있는 그 대상의 시작이 되어야 돼요. 
나의 거룩, 나의 구원부터 시작이 되어야 됩니다. 이 땅에서. 설교가 이상하게 흘러가지요. 분명히 이것 아니다 하면서도 아니다, 부터 시작돼야 돼요. 철저하게 자신의 거룩을 챙겨야 됩니다. 자신의 거룩을 챙기는 그 배후에 악마가 있어요. 악마는 오늘 본문가지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개인구원을 염두에 둔 사람은 “여러분, 구원받고 싶지요?” “예” “말씀대로……” 말씀이라 할 때 여기에 쌍시옷을 강하게 해요. “……말씀대로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딱 열면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나오거든요. “자신을 날마다 깨끗케 해야 되는데 육과 영과, (나중에 혼까지 들어가요, 육과 영과 혼의 삼분설이지요.) 육과 영과 혼을 깨끗케 하시면 여러분은 나중에 거룩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깨끗케 하세요.” 배후의 악마가 사주해서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 교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그 다음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목사님, 자신의 육과 영, 혼까지 깨끗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분명히 목사한테 물을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이렇게 하지요. “교회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와서 교회법을 지키고 목사 말에 순종하게 하는 이유는 다 여러분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장 말씀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여려가지 준비된 프로그램들이 있으니 거기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뭡니까?” 
이야기를 죽 들어보면, 제자훈련, 기도훈련, 천주교 같으면 피정스케줄등 여러 가지 있지만 결국 이거예요. 시간 바쳐 봉사하고 돈 내라는 겁니다. 딱 그거에요. 돈 내고 시간 바치고. 시간 바쳐 봉사 못하면 돈으로 그것을 쳐서 내고. 그게 거룩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시작을 그렇게 해야 돼요. 서울 의존교회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만, 1970년대부터인가 미국에서 좀비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충격 받았습니다. 사람이 죽었으면 가만 누워있지 설치기는 왜 설치느냐는 말이지요. 
좀비 영화가 왜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줬느냐 하면, 좀비는 사람을 단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여서 무서운 것 같으면 전에 갱영화도 많았어요. 좀비 영화의 특징은 사람을 삼킨다는 거예요. 그냥 칼로 죽이고 목졸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삼키는 거예요. 누가 와서 여러분을 찔러 죽이는 것이 무섭습니까, 여러분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 무섭습니까? 

삼킨다는 내용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이에요. 창세기 4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고 어느날 바로왕이 잠을 자는데 꿈에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하게 생긴 다른 일곱 암수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라고 되어 있어요. 삼킨다고요. 
이 세상에는 죽이는 것은 없어요. 죽은 것은 있지만 죽이는 것은 없어요. 죽음이라는 상태는 있지만 인간에게는 죽인다는 것은 없어요. 죽음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삼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왕이 꾸었던 꿈은 이 세상의 실상을 보여주는데요. 이 세상의 인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저주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세계를 삼켰다고 보는 겁니다. 

이 삼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요셉의 지혜를 받는 것 밖에 없어요.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약속을 말합니다. 이미 한쪽이 한쪽에 의해서 삼킴을 당한 이상은 밑에 눌려있는 삼킴 당한 쪽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 자체가 삼킴 당한 결과적 표현상을 말해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악마의 일의 뭐냐? 영과 혼과 육에서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그 일, 그래서 구원받고자 하는 그 시도가 악마의 일이에요. 이미 삼킴을 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너무나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우선은 편히 쉬고 싶은 거예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안식’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말만 들어도 기분 좋지 않습니까? 안식.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납니까? 뜨듯한 찜질방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잠옷 입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 목마르면 단술 먹어가면서. 서울 사람은 단술이라고 하면 모르지요. 감주지요. 감주도 먹고 삶은 달걀도 먹으면서 누워있는 그것, 얼마나 안식입니까? 편히 쉬겠다는 거예요. 
여호와의 증인의 파수대에 나오는 그 골프장, 호수가 있는 그곳, 그곳에 누가 가는가, 내가 간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악마를 보내서 인생을 힘들게 만들고 힘들면서 인간은 삼킴을 받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이유도 몰라요. 내가 왜 고생하지? 고생하니까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희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절로 나오는 희망이 뭐냐? 
악마가 심어준 희망이 나오는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이 다 악마가 제공한 겁니다. 그래야 삼킴 당한 현상이 증명이 되니까, 삼킴 당한 이 실정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니까요. 이야기 어렵게 할 것이 없지요? 

예수님 자체가 거룩한 분이에요. 거룩이 이 땅에 올 때에 그냥 거룩하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거룩을 종이 뿌리듯이 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 현실 속에 오셔서 거룩을 나타내요. 그러니까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여주는 거룩이 납득이 안돼요. 저게 무슨 거룩이냐는 말이지요. 저게 무슨 천국이냐는 말이지요. 
납득이 안 되는데. 납득이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적인 고통을 면제하고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그것을 천국행으로, 천국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정되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놀리듯이 이야기했어요.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고.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못하면, 이라고 한 그 바리새인의 아비가 악마에요. 악마의 제일 큰 하수인이 천국가려고 시도하는데 너희는 그 뒤 못따라가서 아주 환장을 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고생하니까 나름대로 고생의 그 이유를 찾아요.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신에게 벌을 받아서 고생한다. 
그러면 이 고생을 덜 하는 방법은 뭐냐? 신의 말씀에 순종해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될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고 정신세계에요. 전부다 그 밑바닥에는 개인구원, 개인 거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미 삼킨바 된 입장에서는 몸부림치면 칠수록 늪 같아서 더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신앙생활 하면 악마에게 쫓긴다고. “더 해야지 더! 더 낮춰야지 그것도 낮춘 거야? 기도 더 해야지. 꼴랑 두시간 반 해놓고 그게 기도야? 세시간은 넘어서야지. 밥먹고 하는 기도는 나도 하겠다. 금식해야지. 40일 했다고? 한 백이십일은 해야지. 십일조 했다고 손 털래? 십의 2조, 십의 3조 해야지.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티를 내야지. 이 싸가지 없는 인간아! 십분의 일만 내고 입 싹 닦고. 다른 사람 봐라. 십의 3조를 해서 30배 얻었잖아. 너는 뭐하는데? 너만 생각하나? 자식도 생각해야지.” 
자꾸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성경 봐라. 효도하라고 했잖아. 이것은 약속 있는 첫 번째 계명인데 오래 살고 네가 잘된다. 뭐하냐? 언제까지 지하방에 살래? 효도 안했잖아.” 갑자기 효도한다고 찾아가니까 “한 달에 한번 가서 되겠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야지.” 마귀가 인간을 갖고 놀아요. 

언제까지 그렇게 시달리렵니까? 언제까지 그 사기에 당할 거예요? 꼭 사기당한 인간이 사기를 친다니까요. 이 세상에 주님이 왔을 때 현실 속에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내 환경 속에 두르고 있는 이 현실이 어떤 현실인지 알아야 돼요. 
주님께서 왜 튕겨나가셨는지, 주님께서 왜 피살된 채 저주받아서 나간 현실인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아카시아 꽃 피는 세상이 뭐가 문제인데 이것이 주님 보기에는 문제꺼리가 되고 우리에게 왜 해결책이 없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육과 영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육과 영의 개념을 자기 맘대로 지어냈는데 모든 인간의 개념은 언어에서 나왔거든요. 그 언어는 상형문자에서 나왔습니다. 그 상형문자는 음성에서 나온 겁니다. 그 상형문자는 어디서 나왔는가? 
서로 동일한 요소를 찾다보니까 사회가 형성되고, 그 사회에서 소통하기 위해서 서로 주고받았고, 그것이 상형문자-문자-개념-이념, 그 이념이 바로 정신세계입니다. 이렇게 죽죽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이 뭐냐? 육과 영이라는 모든 용어들이에요. 
이 모든 단어, 용어들이 뭘 품고 있느냐? 정신세계를 품고 있어요. 이념을 품고 있어요. 정신세계와 이념은 좀 다른데요. 정신세계라 하는 것은 물질 말고 추상적인 것을 정신세계라 한다면 이념은 뭐냐? 그것을 한곳에 모으는 것을 이념, 영어로는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그것을 한곳에 모아두는 거예요.
사람은 여러개의 정신세계를 갖고 있으면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안돼요. 안정화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한곳에 모으게 되어 있어요. 모든 정신을 한곳에 모으게 되어 있습니다. 애들 공부 못하면 뭐라고 합니까?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 하잖아요. 정신이 어디에 팔려 있으면 다른 곳에는 신경을 못 쓰잖아요.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묶음이에요. 하나로 묶여 있다는 그것이 이념이라는 말이지요. 그 이념은 악마가 꽉 쥐고 있는 겁니다. 이미 인간을 삼켰어요. 당신이 무슨 근거로 자신 있게 그렇게 이야기하느냐고 한다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이념에 묶여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이념은 추구하는 것이 있어요. 내가 정당화되는 거예요. 자기의. 자기가 거룩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두 살 경부터 정신세계가 생산되면서 이것이 점점 더 커져요. 인간의 신체가 커가면서 정신세계도 함께 커가요. 커간다는 그것을 세상에 뭐라고 하느냐, 생명현상, 생명작용이라 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몰라요. 제가 보기에 살아 있다는 것은 정신세계가 크는 만큼 경계선, 테두리를 치는 그 범위 안을 그들이 말하기를 생명이라고 합니다. 

과학에서 세포라 하는 것은 단백질로 만들었고, 단백질은 2십여종의 아미노산으로 결합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셀프어셈블리라고 해요. 자동적으로 결합이 된다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3차원구조를 이루면서 단백질을 만드는데 그 아미노산은 어디서 나오는가? 
아미노산은 dna에서 rna작용에 의해서 나온다. 그것은 어떻게 되느냐? 분자구조에서 스스로 융합된 것이다. 그것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원자구조에 의해서 그렇다. 원자구조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거기는 아원자가 나와요. 거기는 무수한 입자들이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충돌하고 분산되고 마주치고, 대 혼란이에요. 그걸 학자들은 교란이라고 해요. 양자입자들의 교란상태에서 점점 자체적으로 규칙이 생긴다. 원자수준의 규칙이 분자수준으로 올라오고, 분자수준으로 올라오면 그것이 아미노산수준이고, 아미노산에서 올라오면 단백질수준으로, 거기서 올라오면 세포수준으로, 세포수준에서 더 올라가면 배아수준이고, 배아수준에서 올라오게 되면 나름대로의 자체적인 질서 때문에 간이면 간, 팔이면 팔, 신장, 허파,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자체적인 질서가 만들어져서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과학적인 설명을 들으니 뭐가 생각납니까? 인간의 사회라는 것도 자체적인 규칙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공통적인 요소들이 자체적인 질서를 연결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공통적인 질서가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과학자들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게 왜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다, 이게 두 살 때. 네 살 때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다. 아홉 살이 되면,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지요. 놀다가 재미없으면 차버리고 또 다른 것을 사달라고 하면서 점점 더 그 범위가 넓어지거든요. 
넓어지다가 나중에는 대통령출마까지 하지요. 넓어지면서 뭘 당기느냐 하면, 자기하고 같은 요소들끼리 당기는 겁니다. 그것을 사회질서라고 해요. 이래서는 여러분이 이해를 못하겠구나. 1945년도에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뒤부터는 미국이 경제성장을 하게 됩니다.
부모세대는 전쟁한다고 고생고생 했어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통에 고생만 했다. 그런데 너희는 다 해주는데 공부도 안하나?” 이렇게 잔소리를 해대니까 그 애들이 나가서 반항끼로 나온 음악이 록큰롤인데 그 시조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는 거예요. 젊은 애들은 그걸 하나의 문화로 보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알 수 없는 자기들끼리의 질서, 그것이 그 애들의 경계선 안에 있는 문화가 되는 겁니다. 어른들은 “네가 고상한 음악을 들어야지. 클래식을 들어야지.” 하는데 클래식도 마찬가지에요. 중세클래식은 단율로 되어 있어요. 그것이 점차 화성이 돼요. 
그 다음에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나와서 그 시대, 유행에 맞는 문화를 건설합니다. 항상 범위가 넓은 사람들은 소위 바흐나 헨델, 바로크음악 쪽에 있는 사람들은 고전주의,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낭만주의는 슈베르트, 브람스, 그들에게 하는 소리가 “이것도 음악이냐! 적어도 헨델이나 바흐정도, 고상한 것을 해야지. 어떻게 기교가 많은 모차르트를 듣느냐?” 하거든요. 
찬송가책 뒷부분에 나오는 찬송들은 부흥회 때 부르는 것들이에요. 대중가요에서 나온 거예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이런 것들. 앞부분은 헨델이 나와요.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놀던 범위 안에서 스스로 거룩하기 위해서 그 시대의 문화에 흠뻑 젖어드는 거예요. 

이 문화로서 자기의 거룩됨을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문화의 도움을 받아서 괜찮은 문화 속에 있으니까 나는 괜찮은 거룩한 사람이 되니 주님 보시기에 천국 간다. 그렇게 자부하는 겁니다.

제가 총신에서 누누이 들었던 이야기가 뭐냐 하면, 칼빈주의 문화관이라 하는 거예요. 

문화가 두 개가 있다는 거예요. 세속문화가 있고 칼빈주의 문화가 있는데 칼빈주의 문화관의 근거는 뭐냐? 창세기 1장 28절,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그 명령에 따르라는 겁니다. 기존교인들은 교회부흥만 이루었지만 새사람된 젊은이들은…… 반항끼이지요. 록큰롤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기존 음악 안 듣고 다른 음악 듣듯이, 록큰롤 듣듯이 이제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기독교생활을 해보겠다는 그것이 칼빈주의 문화관입니다. 이제는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철폐하고 교회 밖의 문화를 갱신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 속된 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꾸기 위해서 하나의 전사로 나선다는 거예요. 
그게 자기들끼리 정신세계가 소통되는 거예요. 칼빈주의 문화관에서 경제적인 개혁이 있어요. 경제적인 개혁이란 기분문화를 펼치는 이런 것이 있어요. 소위 세속음악, ‘안동역 앞에서’ 그런 노래 좀 부르지 말고, 트로트 부르지 말고 가스펠송만 부르고, 그렇게 함으로서 ‘내가 이 정도로 거룩하구나.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구나. 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금 본받고 있구나.’ 
자기가 자기에게 쇠뇌를 시키고 현혹하는 그 짓을 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복음을 알고 보니 문화자체가 세속이에요. 어떤 문화도 괜찮은 문화는 없어요. 모든 문화는 왜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인가? 자신의 거룩을 위한 하나의 재료꺼리가 되기에. 나의 거룩을 절대로 포기 못하게 만들고 당당하게 더 확보하는 재료로 삼기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끝까지 자기 구원, 자기 거룩을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면 안돼요. 포기 안할 거예요. 왜? 타고난 것이니까. 이것은 고칠 수가 없어요. 인간은 교회 백날 다녀도 안 바뀝니다. 자기구원, 자기 거룩이 바뀔 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보고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했어요. 실체가 먼저 있고 이름은 나중인데 하나님의 이름만큼은 이 땅에 실체가 없어요. 구약에 주의 이름이 먼저 옵니다. 주의 이름이 와서 세상 모든 것을 뒤집어 놓습니다. 다 찢어버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삼킴을 당했기 때문에 안에서 턱턱 숨이 막혀 있어요. 빠져나갈 출구가 없습니다. 완전히 덮어 씌우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구멍이 없으니 덥기는 하지요. 빠져나갈 구멍은 없지요. 그러면 자체적으로 거룩, 자기의를 만들어요.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그 말씀을 자신의 실천력, 행함을 결합해서 나름 거룩, 나름 의로움, 나름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기를, 나름 경건하기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율법 자체가 명령으로 되어 있거든요. 거룩하라, 거룩하라, 하니까 예, 예, 오케이, 예스, 하면서 거룩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것이 누구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계기인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거룩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외부에서 이걸 찢어주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참외나 수박 먹을 때 안에서 알아서 나옵니까? 칼로 쪼개줘야 먹을 것이 나오잖아요. 외부에서 균열을 일으켜야 돼요. 균열을 일으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보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 심판이 온 거예요. 갈라짐이 있는 거예요. 
균열이 있어요. 아까 누가복음 18장 이야기를 했듯이, 똑같은 인간인데, 같은 옷 입고 세끼 밥 먹는데 한쪽은 지옥으로 판결내리고 한쪽은 천국으로 판결내리는 거예요. 누가요? 주의 이름이. 그 기능을 하는 주의 이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거룩이나 구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갈라짐, 절개를 당한 거기서 분출하고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철저하게 자기구원, 자기거룩 챙기세요. 이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심어준 우리의 고칠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에 본성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성질 어떤 성질이라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평생동안 내 성격에 맞는, 자기가 쳐놓은 그 경계선,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끼리만 의견이 그렇게 잘 맞아요. 안양모임에 전에는 남자들 몇이 참석했거든요. 알아서 다 떠나버려요. 테두리가 남자들이 끼면 안 어울리는 테두리라 다 가버렸어요. 
인간은 자기 테두리가 있다고요. 원자에서 분자로 가면 세포수준에서 인간되거든요. 인간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이것이 정신세계까지 가지요. 자기와 소통이 되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어셈블리, 결합이 되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떤 폐쇄된 사회를 이뤄요. 그러면 그것을 그냥 밀고 나가야 돼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거룩은 뭐냐? 사람 알아보고 사귀라는 뜻이에요.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게 거룩의 현실싸움입니다. 성도는 쪼개지지 않은 사람은 사귀지 마세요그게 지난시간에 했던 거예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사귀느냐 하는 그 이야기에요. 
틈에서 뭐가 나와야 된다니까요. 제가 에일리언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낮설교에 했지요. 외계인이 인간의 몸을 통해서 나옵니다. 데이비드, 월트라는 인공지능이 창조주행세 하지요. 나는 내 구원, 내 거룩에 대해서 포기 못해요. 이것이 나의 평생 자존심이니까. 그리고 내 친구들도 나한테 이익이 되고 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만 모았는데 이게 절개가 되고 균열이 일어나더라는 말이지요. 이게 쪼개지는 거예요. 쪼개지고 그 틈바구니에 “너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살해당했잖아.” 그게 외계 물체처럼 나올 때 그렇게 나온 사람끼리의 모임, 그것이 지상의 교회입니다. 
이게 바로 거룩한 집단구원이에요. 이게 구약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이상향입니다. 동일한 언약을 주고 그 언약 앞에서 다 같이 제사에 합류해서 회개하는 집단.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누가 인도하느냐? 주의 이름이 인도하는데 이름은 실체가 없어요. 실체 없는 분이 실체 있는 인간들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겠다는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지요. 모였는데 교회 주인이 없어요. 목사도 만날 자기 배째기 바빠요. 날 보지 말고 내 배안에서 뭐가 나오느냐는 겁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이 죄 때문에 희생당한 어떤 분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그래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 할 수 있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든 가스펠송을 부르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연예인들이 은혜 받고 난 뒤에 주 앞에 맹세들을 하지요. 이제부터 세속노래 부르지 않고 오직 찬송만 부른다고.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뜨니까, 이 문화세계에서 뜨니까 그 다음부터는 온갖 노래 다 불러요. 심지어 찬불가 비슷한 것도 부르고 다 불러요. 
암 걸렸을 때 살려만 주면 오직 가스펠송만 부르고 주의 복음만 전하겠다고 해놓고는 나중에는 아무노래나 다 부르고 그래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찢어질 일만 남았어요. 날마다 주께서 손을 집어넣어서 수술하실 거예요. 끄집어낼 거예요. 네 분자수준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에 없는 것, 낯선 것, 삼킴을 당했는데 오히려 마귀마저 삼켜버린 그 능력,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이미 빼냈다는 것, 이것이 살아 있는 현실화된 거룩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와 함께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은 현상으로 나타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구원받겠다고 설쳐대 봤자 마귀는 웃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게 마귀 짓인 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더 착하고, 비교해서 앞서가고, 비교해서 신앙 더 좋고, 그 신앙게임이 악마의 게임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날마다 우리를 쪼개서 십자가만 끄집어내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