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36강-기쁨의 넘침 1705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22. 19:47
2017-05-21 12:42:42조회 : 64         
   기쁨의 넘침 17052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기쁨의 넘침(고린도후서 7:2-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aLqL4TpIdsk, Hit:3
 이근호17-05-21 13:26 
기쁨의 넘침 

2017년 5월 21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7:2-4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7: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7: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위로할 목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합니다. 그것이 이미 이 시대 자체가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의 특징은, 인간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 진위 여부를 통해서 실험하고 실습을 통해서 받아들일거야 여부를 결정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도리어 말씀이 인간 속에 들어와 과연 인간들이 말씀에 순종할 능력이 있는지를 구약 때에 이미 점검을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해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인가를 검토했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멸망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냐 아니냐의 여부는 인간이 살펴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뒤가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의 구원방식은 더 이상 인간의 의견이나 그들의 솜씨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와 있듯이,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우선 ‘초청받은 자의 탈락’이 선행됩니다. 초청받은 자들이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임금님의 혼인 잔치를 거절했습니다. 

임금님의 조치는 간편했습니다. 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아무나 오게 하라는 겁니다. 그 ‘아무나’만이 천국 백성입니다. 그 외는 아닙니다. 이렇게 구원된 자들에게 있어 이 ‘아무나 원리’를 결코 평생 잊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종교적 역량으로는 말씀을 지킬 수 없느냐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깨닫게 되는 기간
이 남아 있게 됩니다.

여기서 말씀이 투입됩니다.
구원의 실상을 가지고 투입됩니다.
이 투입으로 인하여 성도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마치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들판의 목자에게 하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원리에 부합됩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2- 
14) 

여기에 보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들판에 목자가 양치는 것이 그토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직업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모두 목부가 되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기뻐하시겠다고 결정지은 자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표적으로 제시되는 겁니다. 즉 참으로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기쁨을 가지시고 다가오셨다는 사실은 이 지상에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확정되는 겁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의 기쁨이란, 인간이 먼저 자기 기쁨을 제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기쁨구성’을 받아야 합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기쁨을 챙기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인간들이 기쁨 구성은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에 준해서 발생되는 겁니다. 즉 “나는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한 인생을 꾸려나가겠다”는 그 인생관에 맞게 기쁨과 슬픔을 가름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되는 ‘나’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42에 보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네 인생이란 주님의 안목에서 보면, ‘썩을 것’입니다.
‘썩을 것이 되라’고 이 땅에 출생시키신 겁니다
.
그러나 인간들이 이 사실을 거부하고 억지로 ‘안 썩는 쪽으로’ 자신을 정립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한다’는 식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책임자라는 겁니다.
자신의 중점 업무는 내가 원하는 인생으로 나를 제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모래알(진훍)로 구성된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결국 모래알이 되어 흩어질 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 내부의 고집 충돌합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수시로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나이 들게 되면 거울 보는 것도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줍니다.
젊은이들처럼 꾸며보지만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음에 대해서 한탄스럽고 슬픔니다.
점차 옷이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라 관에 어울리는 얼굴로 변모합니다. 

이래서는 기쁨이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로마서 1:16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9:33에서는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이러합니다.
인간의 모든 수치는 육에서 육이 계속 이어지는 기관에서 뚜렷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즉 육에 대한 집착이 심하면 심할수록 수치도 더욱더 강해집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금지가 있고 그래서 박탈감과 좌절감을 겪는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율법이 주는 질타가 있습니다. 

이 질타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매번 구차한 변명과 핑계만 난무할 뿐입니다.
이는 곧 내부적으로 수치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신앙이란 실험하고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일단 하나님께서 맡겼다가 도로 찾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자신에게서 자신이 손을 떼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차피 ‘썩을 것’을 쥐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살리려 하면 잘못된 기준점을 계속 붙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자기에게 실망스럽게 돌아갑니다.
사랑의 대상조차 막상 만나보면 자기가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상상한대로 기쁨의 대상을 제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성을 무시하는 짓입니다.
공무집행방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 자랑스러워하려는 시도가 좌절되고 박탈되면
그로 인해 일방적인 통치성에 무한한 기쁨을 느낄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이 자신을 통치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5-22 17:18 

237강-고후 7장 2-4절(기쁨의 넘침)1705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7장 2-4절입니다. 신약성경 292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7:2-4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 대화가 평범한 대화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에는 그 뒷배경에, 너희들이 모르고 있는 세상이 이미 왔다는 사실, 특수한 국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현실이 현실이 아니고 이 땅이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누구나 그렇게 지어낼 수가 있어요. 마지막 때, 미자막 때.
그러나 사도바울이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볼 때 마지막 때에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에게 줬던 그 약속이 과연 약속대로 약속받은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말은 더 이상 기대할 민족은 이 땅에 없다는 거지요. 

남은 것은 이제 심판만 남아 있습니다.
심판만 남아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고 내가 속해 있는 이 마지막 때라는 국면에
어울리고 합치되는, 합한 그런 사람을 사도바울은 지금 찾고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혹은 사람을 위로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하등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손해 볼 일도 없고요. 싫으면 말고, 하는 식이에요.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습니다.
내가 이 마지막 때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등장했다는 거지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이 마지막 때에 천국 가는 사람은,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초청받고 택함 받은 사람, 불러냄을 당한 사람,
그 사람만 가는 것은 마지막 때라서 비로소 생기는 현상이에요. 

그 전까지는, 구약때는 말씀을 주고 그것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가지고 축복을 주든지 저주를 주든지 했습니다. 그런 시대가 이 마지막 때 이전의 시대라면 이제 주님께서는 그런 실험, 실습을 이스라엘 나라를 가지고 다 해 봤습니다. 이게 인간 능력으로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악마의 담요 같은 것이 있어요. 

권세라는 이름의 담요가 있어요. 그 담요가 덮이기만 한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내부까지 침투가 되어 있어요.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더 강력한 어떤 의지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이게 실패로 끝나는구나,를 느낄 수밖에 없는 현상이 우리 내부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 생각도 없을 때는 바르게 사는 사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여겼는데 막상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말씀을 적용시켜 보니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감당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지켜야 되는데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그만 내 입에서 이 핑계 저 핑계와 지저분한 변명이 다 나옵니다. 

지키려고 했는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못 지켰습니다, 하는 구차한 자기합리화 같은 것이 막 터져 나오면서 못 지키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는 사실을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걸 알게 된 것은 이미 사도바울이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이 사실을 몰라요. 쉽게 말씀드리면 구원이 되고 나서 그 다음 이야기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요, 이미 주께서 구원을 시켜놓고 그 다음에 보게 하시는 겁니다. 

“자 어떠하냐? 네가 구원받은 입장에서 보니까 네가 감당 못할 말씀이지? 그렇지? 처음부터 너는 안 되었었어. 너는 말씀에 관심조차 없었어. 그런데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죄용서 해주고 구원을 시켜 놓으니까 비로소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되는 지경, 그런 국면 속에 살았구나.’”라는 것이 마지막 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때의 특징을 이렇게 아주 멋지게 이야기했어요. 어떤 임금이 자기 백성한테 아들의 잔치가 있으니 오라고 초청장을 보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 안 갔어요. 성질난 임금이 아무나 오라고 했어요. 거기 참석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아무나’나에요. 그냥 왔어요. 경상도 말로 ‘기양’ 왔어요. 

그냥 온 거예요. 어디에? 천국, 혼인 잔치에 그냥 온 겁니다. 뻘쭘하니 바보 같아요.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이걸 계속 유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 이런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것이 마음 낮추기인데요. 오늘 본문 끝에 기쁨이 나온다고요. 이 기쁨은 마음을 낮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이에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그냥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때부터 기쁨의 근거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구원의 깊이를 더해주니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음이 이미 기쁨의 원천이 되고 말았어요.
만약 우리가 이걸 잊어버리고 덮어버리면
기쁨의 샘터를 마치 뚜껑으로 덮어버리고 깔고 앉는 것이 돼버려요. 

그리고는 다른 기쁨을 자꾸 찾아다니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질이 못돼서가 아니라 시대국면을 이해 못해서 그래요.
이 현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현실인지를 우리는 전혀 감을 못 잡아서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라니까요. 이 마지막 때에 어울리는 모델이 있어요. 

마지막 때라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그 모델이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입니다.
10년 전인가 신학교에 가서 강의한 것이 기억이 나는데요.
졸업한지 한 십년 지났는가 다시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모델이 뭐냐? 여러분이 신학교를 다녔는데
졸업하고 난 뒤에, 나는 이런 목사가 되고 싶다, 하는 모델이 무엇입니까, 라고 제가 물었어요. 

그렇게 묻고, 


“만약 여러분이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목회자가 

지금 현재 큰 교회 목사, 좋은 차 굴리는 목사, 

숫자 많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라면 

여러분은 지금 성경에서 이미 이탈한 겁니다.

 

성경에서 모델은 스데반집사에요. 

여러분이 신학교에 들어왔으면 스데반집사를 모델로 삼았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집사처럼 살지 않는 목회자는 

아무리 교회가 크고 월급을 많이 받더라도 그것은 삯군목자

라고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야 됩니다.” 

  
그렇게 강의를 했는데 그 때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려서 지금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가 평범한 대화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평범한 대화를 원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누굴 만나면 나를 기쁘게 해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을 기쁘게 하거나 인간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지금 진리를 전하는 겁니다. 

진리는 뭐냐? 

사태의 추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은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가고 이렇게 끝납니다.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걸 증거 하는데 증거 하면서 사도바울은, 

나처럼 모든 것을 탈탈 털린 사람, 털렸다 해서 강도 만나서 재산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을 탈탈 털린 사람, 또는 배설물로 다 빼앗긴 그런 사람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마지막 때라는 국면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모든 것, 자기가 귀하다고 여기는 다 빼앗겼어요. 이게 결국 뭐냐? 감사하고 고맙다는 이야기지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2절에 보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아니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불의의 내용이 뭐냐 하면,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고 해롭게 하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데서 포기했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 나는 이렇게 살 거야, 라는 그 순간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자로 들어와 버려요. 

요새 2, 30대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내가 산다는 거예요. 

“엄마 간섭하지 마. 아빠도 간섭하지 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간다.”하는 겁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어떻게 대꾸했습니까? 대꾸 할 것도 없지요. 은근 자랑스럽기도 한데 그런데 자기인생 자기가 산다는 그 꼬라지를 보니 영 마음에는 안 들고, 큰 소리는 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은 일단 흐뭇하다마는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으로 보이고 늘 놀러 다니는 것 같으니까 어른 된 입장에서 ‘저래가지고 나중에 부모한테 손이나 내밀지 않을까’ 걱정이 슬그머니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은 뭐냐? 나는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에 기대지도 않습니다. 왜? 이 마지막 때에 천국 가는 사람은 거저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인생을 맡기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주님께 인생을 털어버린 거예요. 빼앗겨 버리는 겁니다. 

내 인생 나도 몰라, 이런 식이라니까요. 

그동안 내 인생 다듬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고, 역경이여 오라, 힘듦이여 오라, 내가 견디리라, 

내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리라, 이렇게 했는데 그것도 힘들어 못하겠어. 

이제 그냥 주세요. 달라는 분에게 인생을 그냥 주세요. 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요. 

주고 난 뒤에 내 인생 다시 소환시키지 마세요. 줬는데 무슨 미련을 갖습니까?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놔둬버리지, 

내 인생 주님 품안에서 잘 자라는가 보자, 이러지 마세요. 

그냥 빼앗기세요.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인생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태반이니까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그런 부담으로 많이 다가왔던 거예요. 그래서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정죄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사도바울은 지금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는데 뭐도 사도바울이 알고 있느냐 하면, 

‘주님 찾아와서 내가 지금 이런 인생을 산다. 주님에게 나는 다 빼앗겼다.’라는 편한 이야기조차도 듣는 사람에게는 

‘우리를 고발하고 우리를 욕되게 하고 우리를 몰아세우고 우리를 밀치는 부담되는 이야기를 당신이 하고 있다.’

라는 투로 듣는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이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러분에게 부담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마지막 때에는 마지막 때의 주의 일이 따로 있고 그 주의 일을 증거 한다는 거예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가 아니라 그냥 진리를 증거 하는 겁니다. 

4절에 보면,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는 거예요. 

기쁨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 본문 보는 사람이 “나도, 나도, 나에게도 그 기쁨 좀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기뻐했다는데 나는 같이 예수 믿는데 왜 안 기쁘지?’ 이렇게 나오기 십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미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다 드린 입장에서는 

이 기쁨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이 기쁨의 일조차 주님의 일이라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내가 기뻐할 생각하지 말고 

주님만 기뻐하게 되면 주님의 기쁨을 경유해서 주님의 기쁨으로서 그것이 내 기쁨으로 전환되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내가 기쁘니까 주님도 따라서 기쁘겠지, 이렇게 방향을 잡지 말고, 

나를 경유해서 주님 앞에 기쁨을 드릴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내가 기뻐하고 주님이 기뻐해버리는 방식이라면 여기에 드럼 놔두고 기타치고 그래야 돼요. 

인위적으로 기타치고 드럼도 치고 가스펠송 가수들도 불러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기쁨을 유도해서 

“이 기쁨을 주여, 받으옵소서.” 이래 되어야 되는데 그게 몇 분 갑니까?  

그런 행사 하게 되면 몇 시간 안가요. 그게 끝나면 허탈과 허무가 또 찾아옵니다. 요새는 랩까지 등장해요. 기독교랲을 한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좋아하느냐 하면,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끝까지 이 귀한 내 인생 내가 책임 안지면 누가 지겠느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철딱서니가 없는 거예요. 

  

이게 젊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나이 60, 70, 80도 마찬가지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기쁨은 내가 기뻐해서 “주님, 저 기쁘니까 이 기쁨 받으소서.” 이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 그게 옳다면 교회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굿을 하든지 여기서 뭘 해야 돼요. 

  

기독교 굿 아시지요? “내게 강 같은 평화……” 톤 빠르게 해서 부르면서 하는 것. 느릿하게 하면 왜 기쁨이 안생기고 손뼉치고 빠르게 하면 신경을 자극하면 그것이 기쁨이 되는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태어날 때에 하늘에서 기뻐했기 때문에 천사가 찾아간다고 되어 있어요. 

막상 하늘의 기쁨을 받은 구원받은 성도입장에서는 영문도 몰라요. 

나같은 것을 왜 기뻐하는지. 일단 기쁨 챙기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기쁨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한 것도 없이 일단 기쁨이 와요. 

기쁨이 오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그 기쁨을 파먹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나는 음식이 팥빙수거든요. 

얼음 간 것 듬뿍 담고 그 위에 온갖 것 뿌리고 치고 얹고 하지요. 물론 넉넉하게 팥을 얹는다고요. 

그러면 이 팥이 얼음 속으로 점점 흘러서 스며서 아래쪽까지 가지요. 그러면 파먹기만 하면 돼요. 단팥 맛을. 

이 마지막 때의 성도는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파먹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무엇을? 주님의 기쁨을, 주님의 기뻐하심을 파먹기만 하면 돼요. 

인식의 발상이 달라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느냐, 이렇게 시작하면 끝나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는 교회도 필요 없어요. 마지막 때는 성령의 기쁨만 있으면 돼요. 이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 교회 다니니까 기쁘다는 말이 없어요. 사도행전에서는 기쁨이 그 당시 임시적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8절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성령이 와서 기뻐했는데, 주님의 기쁨을 파먹어서 이렇게 기뻐했는데, 이 본문 보면서 오늘날 교회들은 뭘 하느냐 하면, 여기서 기쁨이란 쇼를 벌이면 주께서 영광 받는 줄로 알고 있어요. “소유를 팔아”가 나오니까 재산을 교회에 갖다 바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목사 혼자나 기쁘지, 목사나 장로들이나 기쁘지 다른 사람은 안 기뻐요. 

주님은 기쁘지 않습니다. 뭘 바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든지 기쁨을 얻는 것은, 내 인생은 내가 또 알아서 책임진다는 그 버릇, 옛날 구약 때 이스라엘이 했던 그 버릇이 또 나와 버린 거예요.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실험하고 실습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험하고 실습하는 것은 악마가 뒤에서 사주해서 그래요. 

“믿음이 있는지 시험해봐라.” 자꾸 시험해보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 속임수의 유혹을 매일같이 받습니다. ‘요새 믿음 너무 없는 거 같아. 시험해볼까? 기도 한 두 시간 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해볼까?’ 자꾸 마귀가 옆에서 들쑤셔서 자꾸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얼추 합격했다 싶으면 마귀가 가만있지 않아요. 더 센 기준을 가지고 들이댑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점점 더 우울해져요. 우울해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기준점이 계속 이동해야 되는데 기준점이 이동하지 않고 젊을 때의 기준점을 그대로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점에 입각해서 그 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왜 내가 이렇게 서글프고 초라하냐? 그래서 자진해서 슬퍼요. 심심해서 슬프다니까요. 할 짓 없어서 슬퍼요. 취미가 뭡니까? 고독. 고독이 취미라. 나중에 연세가 많으면 슬퍼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려요. 기준점도 같이 옮겨줘야 되거든요. 

옛날 기준, 젊을 때 기준 그대로 유지해서 그 때만큼 못된다고 결핍을 느껴서 우울해 버리면 

그렇게 되면 사실은 자식들이 힘들어요. 

젊었을 때야 훌륭한 부모, 똑똑한 부모, 역시 모범적인 부모, 스승다운 부모, 배울 것이 많은 부모지만 

나이 90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식이 안 찾아온다고 한다면 이것은 본인이 본인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내가 다 해줬는데, 내가 얼마나 해줬는데 지가 안 찾아와?’ 왜 자신의 기준점을 안 옮깁니까? 

자식들은 고집 센 부모라고 그 좋던 이미지 다 깨버리고요. 지금 움찔할 분들 한 둘이 아닙니다. 

기준점을 자꾸 이동시키세요. 기준점을 알려드릴까요? 인간의 기준점이 뭐라고요? 

인간은 모래알에서 새겨진 그 윤곽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2장에 준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흙에서 만들어졌어요. 

흙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기 쉽게 해서 모래 위에 올록볼록 들어가고 나온 그 음양, 윤곽, 그것이 인간의 얼굴입니다. 

방주연이가 부른 노랫말에도 있어요.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아~ 아~. 
마지막 한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인간은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날 뿐이지 실은 모래알갱이의 뭉치에요. 

연세 많으면 옷이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관이 어울려요. 

거울 보면 내 얼굴은 관에 딱 맞겠다. 오늘 너무 심한 말을 하는데. 어떤 옷도 안어울리니까. 

원천이 변해요. 원천이 변하면 매일 우리는 같이 변하는 거예요. 그런데 변해야 돼요.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우리 인생은 주님의 하시는 일을 증빙하기 위해서 썩을 것으로 이 땅에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어떤 방송에서 “할아버지 참 오래 사십니다.” 하는데 오래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오래 죽는 거예요. 

오래 죽는다는 것을 두고 위로한답시고 오래 산다고 하는데 그것은 오래 죽는 거예요. 

진짜 사는 것은 죽어야 그게 영생이 되는 거예요. 개념이 바뀌어야 돼요. 

개념이 안 바뀌니까 젊은 사람 탓할 것도 없어요. 나이 많아도,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 

나이 81세 된 할머니인데 악기를 열 가지 배운다는 거예요. 끝까지 내 인생 책임지겠다고. 어떤 사람은 74세인데 산악자전거하고 있어요. 그걸 자랑삼아 tv에 나오는 거예요. 나이 들면 집에 있는 것이 최고 좋습니다. 지하철이 공짜라는 그것이 나는 제일 불만이에요. 노인들 돌아다닌다고 해서 소비가 증진되지 않거든요. 대구지하철 적자만 늘어나지요. 

문재인한테 부탁하는 것은 딱 한가지에요. 제발 노인들 할인제도 해주지 말고 차비 다 받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우리를 썩을 것으로 심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확인만 하면 돼요. 

아, 정답이네. 그것이 정답일 것 같으면 더 이상 고집부리면 안돼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고집을 부리면 안돼요.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몰라요. 사람이 불신앙이 되면 지금 벌이고 있는 주님이 하는 일에 방해물이 돼요. 

마귀지요. 마귀의 앞잡이지요. 그것을 공무집행방해라고 합니다. 

공적으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의 불신앙이 방해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우리는 극렬하게 반발하고 반항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억한 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만듭니까?”  

뭘 어쨌다고? “이러시면 안 되지요.” 뭘 어쨌다고? 

썩을 것을 썩게 하는데 뭘 거기에 반항을 하고 몸부림을 치느냐는 말이지요. 정말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성경을 순종하라고까지 요구하지는 않습니다만 성경을 알기는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성경 백날 보니 뭐합니까?  

확인을 좀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떤 마을에 성경을 다 외우는 분이 있다는데 저는 본적이 없거든요. 역사적으로 없어요. 그런데 다 외운다는 거예요. 한 명도 아니고 90이 넘은 노인 다섯 명이 의자에 앉아서 “에스겔 3장이요” 하는 순간 그 다섯 명이 “시작!” 하더니 에스겔 3장을 죽 외운다는 거예요. 

보지 않고는 못 믿겠어요. 제가 도마 같아요. 도대체 그 동네가 어느 동네인지, 어떻게 성경을 다 외운다는 것인지 도저히 못 믿겠어요. 그래서 혹시 제가 그 분을 만나게 되면 테스트할 성경본문을 미리 정해놓았습니다. 역대상 1장입니다. 이 본문은 아나운서들도 보고도 읽기도 힘들어요. 이름들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데 이걸 어떻게 외우는지, 그것도 다섯 명이 제창하듯이 다 외운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섯 명이 합창하듯이 성경 다 외워야 구원받습니까? 우리를 이미 구원시킨 것은 주께서, 내가 내 인생 책임지기 위해서 뭘 할 거냐 하는 그것을 뚝 끊으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무슨 일을 시작했는가, 마감을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그 시나리오가 나와 있어요.  

그 시나리오가 뭐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부활이 나의 일이 아니에요. 부활이 나의 일이 아니면 죽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발목잡고 거부하거나 반항하거나 앙탈부리지 마세요. 

내가 늙어죽는다는 것이 내 일도 아니고 내가 거부할 일도 아니에요. 

순순히 내 인생에서 손을 놓으세요. 그게 기쁨입니다. 

내가 기뻐해서 주께 드릴생각 하지 마세요. 기쁨은 뭐냐? 놓기만 하면 돼요. 

내 인생에서 내가 손만 떼면 돼요. 이것도 못합니까? 

사실은 제가 젤로 하기 힘든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도 못해요?   

오늘 손님이 좀 와야 되는데. 손님이 오든 말든. 

손님이 있어도 나는 관에 맞는 얼굴이 되고 손님이 적게 와도, 손님이 적게 오면 아마 신경 더 써서 더 빨리 늙을 거예요, 

손님이 적게 온다 해도 모래알로 분해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식이 찾아올 건데. 

안 찾아와도 나는 그냥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죽음으로……, 말을 바꿔야 돼요. 삶으로, 영생으로 가고 있어요.  

죽음에서 영생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능력으로 이 기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여러번 제가 이야기합니다만, 제발 종교로부터 탈피하세요. 

종교생활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기쁨으로 살면 되지 종교생활해서 뭐하려고? 

스펙하나 걸친다고 취직이 잘됩니까, 아님 하늘나라에서 봐주기를 해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종교란에 뭐 쓰라고 하면 ‘무교’ 하세요. ‘종교 없음’ 

종교생활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다음부터 마귀의 표적이 돼요. 

“제대로 신앙생활 안할래?” 이런 식으로 자꾸 윽박지르면서 들어온다니까요. 자기 스스로 

자 그 다음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기쁨이라는 것이 어떻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되는가? 

창세기 2장에 보면……, 어려운 문제인데 나름 쉽게 하려고 애를 써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하나님도 기뻐했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거든요. 

아담도 기뻐했고 하와는 말할 것도 없지요.  

내가 누구로부터 나왔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기뻐했지요. 전부 다 기쁨밖에 없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수치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성경대로 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은 뭐냐? 수치스럽지 않으면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로마서 1장의 말씀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네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판정을 줬으면 사람한테 꿇리지 말라는 말이지요. 사람 앞에서 부들부들 떨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자식 앞에서 못난 아비라고 벌벌 떨지 마시고 부모 앞에서 못난 자식이라고 벌벌 떨지 마세요. 

여러분 남들 앞에 벌벌 떤다는 말은, 

기준점이 기쁨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기준이 삽입된 것이 아니고 

내가 평소에 내 인생을 내가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따로 뭔가 정립해놓은 그 엉터리 같은 기준 때문에 

자기가 자기 늪에 빠진 거예요. 

불안과 초조에 빠진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과 짐승의 다른 점이 뭐냐? 

인간에게는 금지와 박탈과 좌절이 있다. 이게 짐승과 다른 점이라는 거예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금지와 박탈과 좌절이 있다. 금지와 좌절과 박탈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금지된 것은 싫어하고 인간은 박탈되는 것은 싫어하고 인간은 좌절을 싫어한다는 거예요.  

누가? 내가. 누구를? 나를. 네가 뭔데 네가 너를 왜 싫어하는데? 그럴 권한이 있어요?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썩어질 것을 심어놓았는데 뭔가 다른 망상이 들어서 안 썩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근사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왜 그런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립니까? 

이제부터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창세기 3장에서 그 수치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참 어려운 거예요. 

아담이 수치스럽다고 수건 가지고 자기 두뇌를 둘둘 감았습니까? “아 내 머리 때문에 수치스럽다.” 이런 것이 있습니까? 대머리입니까? 아담과 하와과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머리 부분을 감쌌느냐 그 말입니다.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머리 부분은 수치스러운 부분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손 발을 둘둘 감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발에 감았습니까? 아니지요. 하체를 둘둘 감은 거예요. 모든 수치스러움은 인간의 생식기부분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생식기가 하는 기능이 뭐냐? 자손을 번식시키는 거예요.   

육에서 계속 육을 낳고 육이 육되게 하는 기관이 생식기관입니다. 이 부분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거예요. 

그렇다면 두뇌를 수건으로 감지 않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감지 않았다는 그 말은 뭐냐? 

인간의 두뇌는 이성적이거든요. 인간의 수치의 근원은 이성적인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렵더라도 이것을 알아야 돼요. 내가 아이큐가 낮고 공부를 못해서 부끄럽다, 가 진짜 부끄러움의 원천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부끄러운가? 부끄러움은 인간이 이성으로 판단을 못하는 욕정에서 나온 거예요. 

욕구, 욕정, 욕망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욕망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못 다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지배하거나 관할, 관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데 

악마는 나 보고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책임져야 된다고 윽박지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모든 인간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이성적으로 성경을 다 외우고 성경을 다 지켰다고 우겨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에 관한 것이고 네 속에 있는 욕망은 성경 다 지킨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착한 일 하는 그곳에 더욱 더 새로운 나쁜 짓이 거기서 생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전시적인 가치에요. 

남한테 나 잘났다는 것을 자랑질 하는 것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착한 일 해놓아 보세요. 나쁜 짓은 몇 개해도 된다는 여유, 종자돈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면 그동안 기쁨이라는 것이 뭐냐? 

나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남들에게 자랑질 할 수 있는 것들의 수집이고 모음이었어요. 남에게 자랑질 하고 싶은 것들, 나 자식 잘 키웠다, 나 돈 얼마 있다, 이번에 나 장로 되었다, 집사 되었다, 우리 교인 몇 명이다, 

이렇게 남에게 자랑질 하고 싶은 것들, 사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두뇌를, 머리를 감아야 돼요.  

그러나 정작 자기의 근원적인 욕망은 인간이 가려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에. 

하체를 가리게 된 것은 

딴 것은 다 해결되지만 하체부분에서 나오는 자식생산의 욕구에 대해서는 인간의 손을 떠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인간은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 육에서 영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수치를 가리려 들기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개념을 다 바꿔놓았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 

그 사랑이라는 개념이 평소에 세상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데 

그 사랑개념을 예수님에게 갖다 붙여버립니다.  

나는 메시아를 사랑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개념은 내가 만들어낸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젊을 때의 첫사랑의 경험이 있잖아요. 

그립지요. 첫사랑을 tv는 사랑을 싣고, 거기 나와서 만났다 칩시다. 따라라라 따라라~, 만났다 칩시다. 

보는 순간 얼마나 당황할지 모르지요. 굉장히 당황하겠지요. 

“아니야. 너 아니야. 그 때 그 사람 아니야. 내가 생각한 존재 아니야. 나는 지금의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 때 그 네가 되어달란 말이야. 지금의 너는 아니야.” “왜 그래? 내가 그 때 그 나야.” “아니야. 네가 아니야.” 

그러면 인간은 누구를 사랑했느냐?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를 계속 갖고 있는 겁니다. 당황스러워요. 주님도 마찬가지에요. 주님 만나도 당황스럽겠지요. 내가 그리던 그 모습이 아니니까.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주님인지 몰랐어요. 

인간의 타고난 욕망은 육의 욕망이에요. 썩어질 욕망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평소에 내가 내 인생 책임지기 위해서 모든 개념을 자기 편리한 대로 다 바꿔놓았어요. 

내가 노래 부르면 그것이 찬양이다. 내가 기뻐하면 기쁨이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이고 내가 믿으면 믿음이고 내가 소망하면 소망이다. 

그거 전부 다 이제는 잊으세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그거 달고 다녀봐야 소리만 요란해요. 쩔그럭거리는 훈장처럼 소리만 시끄러워요. 그거 다 떼세요. 

그거 다 떼고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개념을 줄 때 

그 개념은 나로 하여금 내가 썩어가고 있고 내가 따로 마련하고 저장해놓을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음을 

날마다 일깨워줄 때 나오는 그 기쁨, 그 기쁨이 주님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서 나오는 그 기쁨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내 인생을 또 내가 책임지려고 고민고민 했구나. 

인생 내 것이 아닌데도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하지?’라고 깨닫게 될 때 나오는 기쁨. 

주님 앞에 드려놨는데 주님 앞에 있는 나를 또 불러내요. 

불러내다가 깨질 때 나오는 그 기쁨. ‘아, 내가 이럴 필요가 없잖아.’   

나에 대해서 내가 관리할 필요가 없는데 

또 내가 남 앞에 자랑질 하려고,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또 소환하고 불러내는 거예요. 그것은 뭉개져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늘이 무너지면 다 소용없는 것이다. 이렇게들 보통 좌절하잖아요. 

그런데 이미 하늘은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아까 인간이라는 것은 금지와 박탈과 좌절의 영역이 있다고 했지요. 짐승은 밥이나 먹고 살면 그만인데 

인간은 금지와 박탈과 좌절의 영역이 주어지면서 하나님의 법이 거기에 매치가 돼요. 

하나님께서는 금지와 좌절과 박탈을 우리에게 반복시킵니다. 

반복시키는 이유가 쓸데없는 고민 좀 그만 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뭔가 자기 자신에게 금지와 좌절과 박탈이 반복될 때 우리는 속이 다 시원해요. 

안 해도 되는 짓을 쓸데없이 했다는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이 절정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주님은 자기 기쁨을 위해서 자기아들을 내어줬습니다. 

기쁨은 뭐냐? 자기 아들을 내어주는 것이 기쁨이에요. 

우리는 뭘 내줬습니까? 우리자신을 주앞에 내줘야 돼요.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손 털 때, 내 자신에 대해서 모든 권리를 포기할 때, 나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줄 때, 

그게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내용 없는 형식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해요. 

죽음은 모든 기억이 다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다 소용없는 거예요. 옛날 기억, 지금에는 다 날라 갔어요.  

래서 내용없는 형식, 비어있는 껍데기, 비어있는 비닐봉지, 

그냥 얇은 비닐봉지처럼 주님의 기쁨만 가득차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

예수님 태어날 때 두 목자가 그런 경험을 한 거예요.   

물론 목자가 계속 기뻐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나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을 때, 너희들은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했을 때, 

그 순간만이라도 자기의 비어있는 형식, 죽어있기 때문에 느끼는 기쁨, 

내가 이미 죽은 자라는 인식에서 오는 기쁨, 

더 이상 내용을 더 보태거나 채울 필요가 없다는 편안함, 존재의 가벼움.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비워내야 될, 토해야 될, 계속 우리가 토해서 내놓아야 될 것들을 계속 주시는 겁니다. 

금지와 좌절과 박탈을 통해서 네가 갖고 있는 것은 그 때 그 때마다 다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고집 센 부인처럼. 보너스 받으면 “내 놔. 비자금도 내놔.” 아내에게 빼앗길 때의 그 기쁨, 그게 남편의 기쁨이잖아요. 

숨겨놓지도 못해. 다 빼앗겼어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까지. “화상통화로 죽 비춰봐.” 

이 모든 것을 다 박탈할 때 이게 바로 통치성이고, 

이 주님의 통치성이 될 때 이미 그 사람은 천국에 입성한 사람입니다. 

주님에게 통치 받아서 모든 것이 압수당한 그 기쁨, 매일같이 여러분이 당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은 주님의 통치인데 우리는 통치 없이 홀로 내가 나를 관리하려고 

은근히 힘들게 나의 죽은 관을 질질 끌듯이 무거운 짐을 끌고 왔습니다. 

이제는 그 끈, 나의 사슬을 성령을 통해서 잘라버리고 

나로 하여금 나를 떠나보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