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2a 울산강의-레위기 4장 : 산 제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3장을 안 하고 4장 속죄제, 속건제를 하겠습니다. 왜 3장을 안 하고 4장 하느냐 하면, 속죄제, 속건제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드리고 화목제 드리고. 순서가 그렇게 돼있고, 레위기에서는 번제는 소제와 같은 거죠. 전부 다 태우니까. 3장에 화목제 나오고 4장에 속죄제 나오고 그 다음에 5장 13절부터 속건제에 나오고 그렇습니다.
제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말하기니까 여러분은 복잡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하나님 섬기기 힘들다. 하나로 끝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복잡하냐? 원래 제사가 하나에요. 번제 하나인데 최초의 제사도 번제뿐입니다. 가인의 제사도 번제고 가인은 곡물로 드렸지만 다 드린 거죠. 아벨도 마찬가지고. 번제가 세분화된다 할까요? 속죄제, 속건제는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지면서 세분화됩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모세가 시내 산에 가기 전까지는 전부 번제밖에 없어요. 번제 또는 화목제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고 난 뒤부터는 구체적인 죄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걸 어기고, 저걸 어기고, 과하게 어길 때마다, 번제 드려도 속죄제 드려도 돼요. 계명이 추가적으로 주어지면 그 계명에 따라서 제사도 덩달아 투입이 됩니다. 그러면 번제를 무효화시키는 게 아니고 번제의 내용이 더욱 더 깊어지지요. 번제의 내용은 제사 드려서 죄 용서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말은 굉장히 쉬운데 가당키나 한 일이냐, 그걸 믿으란 말이냐, 할 정도로 너무나 파격적이에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받게 되면 오는 과정에 우리에게 있는 죄가 제사에 포함이 돼버리면 죄를 품은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죄가 의로 바뀌는 거예요. 인간의 생각은 그거에요. 죄를 지은 당사자가 그 분량만큼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면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해서 상쇄되어서 죄를 20 짓고, 착한 일을 30 하면 30-20=10에서 10만큼은 10이라는 선이 남아있으니까 그 사람이 죽을 때 장사해서 이익 남겼구나. 네가 나쁜 짓도 했지만 착한 일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나쁜 일은 착한 일로 퉁 치고 나머지 10으로 천국 가라. 이게 우리네 계산법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계산법은 그렇게 돼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선악 사고방식에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기 때문에 손 장갑과 마찬가지입니다. 짝이 하나 있으면 안 되거든요. 선이 있다는 말은, 악이 아닌 게 선이고 악은 선이 아닌 게 악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선과 악을 나란히 병행할 수 있는 문제인데 선악 자체를 안 받겠다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이 나란히 있겠다는 의식 자체가 통째로 악이 돼요. 어차피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악이 돼요. 어차피 저주에서 못 벗어나면 악이 되고 아무리 착해서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으면 영생 얻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은 열심히 노력해서 가져가라는 게 아니라 어디를 논박하는 식이에요? 네가 인간이냐? 너희는 안 돼. 이런 뜻이에요. 네가 인간으로서 생명나무를 생각해? 그럴 권리나 그런 자격은 애초부터 없어.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으면 영생은 없는 겁니다. 이 두 가지 말을 합치면 인간이란 이유 때문에 영생은 없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인간이냐? 그러면 영생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왜? 인간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이 못 먹으면 우리도 못 먹는 겁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돼야 돼요.
교회에서 영생 준다는데 나는 이해가 안 돼요. 하나님이 안 주겠다는데 교회가 무슨 힘으로 교회가 무슨 비선실세입니까? 지가 왜 영생을 줘요? 최진실이면 몰라도 최순실이잖아요. 줄 분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어요. 착한 일 남기면 천국 간다고, 보너스까지 챙겨준다고. 사기입니다.
죄가 의로 변하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은 그냥 죄만 지으면 되는 거예요. 이걸 사자성어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복음이에요. 착한 일이라고 해봐야 선악을 안다는 죄에서 나온 착한 일이기 때문에 그 착한 일은 내가 선악을 알기 때문에 지은 착한 일이기 때문에 그 착함은 선악체계로 도로 회수당해서 선악체계 안에 갇히게 만들어요.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게 창세기 3장 이야기에요. 아무리 착하고 순종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예수 믿고 뭘 해도 그것은 다 죄에서 나온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 자체가 죄인이에요. 죄인이 예수 믿는 것을 하나님께선 죄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주님 쪽에서 내려오는 게 있어요. 하나님은 의를 찾아 온 게 아니에요. 죄인을 찾으러 왔습니다. 왜 죄를 찾으러 오시느냐? 죄가 있어야 의가 생산되는 재료가 돼요. 이걸 원자재라 해요. 원자재가 죄에요. 마지막에 의가 나오는데 여기에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에 걸려들어야 됩니다.
죄인을 주님께서 건사하시고 거두시게 되면 공정과정에 재료로 들어가요. 하나님의 의 만드는 공장이거든요.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제사가 마련돼 있고, 죄인이기 때문에 제사에 제물이 동원돼요. 흠 없는 제물이 동원돼요. 흠 없다는 말은, 야생종은 안 됩니다. 산에서 키운 건 안 되고 집에서 키운 것 중에서 상처 난 건 안 되고, 흠 없는 것으로 제물로 할 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속죄제 같은 경우 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는 제사장이 수송아지에 안수하고 일반 회중이 범죄 해서 속죄제 드릴 때는 회중을 대표해서 장로가 안수를 합니다. 그리고 족장들이 죄 지었을 때는 역시 제사장이 안수를 합니다. 안수 하게 되면 그것으로 죄가 제물로 이전 되면서 여기서 빠이빠이 해야 됩니다. 아들 키워서 스무 살 되면 논산훈련소에 보낼 때 입영열차 타고 새벽에 가잖아요. <이등병의 편지>에 보면 나오지요. 이렇게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이제는 자기 자식 아닙니다. 나라에 바친 자식이에요. 울고 머리 깎고 하지요.
제물이 제사에 가게 됩니다. 공장이라고 했지요. 공장이니까 분쇄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 작살을 내버립니다. 다 태우는 것을 번제라 합니다. 그런데 기름 태우는 것은 달라요. 이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도 다 태워요. 고기는 번제에서는 고기를 못 먹어요. 다 태우니까. 속죄제에서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 수 있는 고기도 따로 있어요.
장소가 성소거든요. 50*20미터짜리 성소. 동쪽에 문 있고, 불 피우는 제단, 대수대야 비슷한 바다, 그 다음에 천막을 4중으로 해서 비가 와도 괜찮아요. 또 여기에 휘장이라는 게 있어요. 문은 없고 커튼이 쳐져있어요. 커튼에는 종려나무와 천사들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쪽에 테이블이 있는데 빵이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있고, 여기엔 조명시설이 갖춰져 있는데 일곱 촛대가 은은하게 비추고 있고 또 그 앞에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대제사장의 속죄제에선 성소에 수송아지를 잡아서 피를 일곱 번 뿌리고, 일곱 번 바르고, 일곱 번 쏟아버리고 하는데 지성소에는 7월 10일 외에는 못 들어가요. 지성소는 성소와 커튼으로 구분돼있어요. 여기서 제물이 이렇게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돼있어요. 그런데 대제사장이 잘못했을 땐 그렇게 하고 일반 회중들이나 족장들의 경우에는 성소까지 안 가고 제단에서 처리해버립니다. 이럴 때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이 먹게 됩니다. 제사장 자기 봉급이 돼요. 현찰 거래하는 게 아니고 현물로 해서 제사장이 먹게 돼요.
이런 과정에서 아무리 성경 읽고 신앙생활 50년 해도 여전히 남는 게 있어요. 어떻게 제사 지냈는데 죄가 없어지느냐? 믿자, 믿습니다, 백날 해도 본인이 그걸 이해가 안 되면 주님도 그 수작에 안 넘어가거든요. “믿습니다.” “뭘 믿는데?” “그냥요.” 이게 말이 되겠어요. “제물 바치면 우리 죄가 용서되는 걸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능한데?” “그냥 믿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이건 하나에 무당 주술 같은 거죠.
피 찍어 발랐는데 용서됐다. 하나님이 물었을 거예요. “왜 그게 가능하냐?” 우리는, “하나님이 한다고 약속했잖아요.” “약속해도 네가 납득이 돼야 되지. 이해를 하고 믿어야지.” “아닙니다. 저는 겸손해서 그냥 믿습니다.” “겸손한 건지, 관심 없는 건지 분명히 하라. 너, 관심 없지? 챙길 것 챙겼으니까 끝났다는 식이지? 솔직히 이야기해봐. 어떻게 죄가 의 되는지는 관심 하나도 없고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당 가면 끝났지. 그런 마음이지?” 이렇게 닦달하면 어떻게 하렵니까? 자꾸 하나님이 이용할 생각 마세요.
분쇄기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면, “양아, 네가 알아서 해라. 난 집에 간다.” 이러면 안 돼요. 우리는 양이 가는 코스 따라 가야 됩니다. 그러면 양이 여기서 난도질당해 피 흘리고 내장, 기름 태우고 할 때 그 양의 죽음이 아니에요. 산산조각 나고 해체된 우리의 모습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죄가 의 되는지 궁금해요?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없는 백성인데 새로 만들어진 그들을 위해서 제사로 의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을 예수님 피 또는 제사의 피로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 용서받을 사람은 아예 없습니다. 레위기 자체가 없는 인간을 새로 만드는 작업까지 합류가 돼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표시 돼있냐 하면, 제물의 성결과 관련돼있어요. 조사해보면 대부분이 수컷으로 돼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수컷이 아니에요. 암컷이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레위기 4장이잖아요. 3장은 나중에 하고. 속죄제 하는데 제사장 제물이 수송아지에요. 회중들 통째로 수송아지입니다. 족장들 제물은 숫염소에요. 수컷입니다. 번제도 마찬가지고. 레위기 1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도 수양이거든요. 화목제는 수컷, 암컷 관계없이 다 돼요. 민수기에서도 수양의 비율이 많아지는데 레위기 앞에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십계명 받기 전에 아브라함 때에도 제사가 있었는데 그때는 속죄제, 속건제는 없다 했지요.
왜냐하면 속건제, 속죄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법령이 늘어나고 증가하면서 거기에 따라서 같이 늘어나는 그 죄에 맞추어서 더욱 더 세밀하고 조밀하게 세분화된 제사 제도가 번제에서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어서 번제 안에 품고 있던 속죄제, 속건제로 보면 돼요. 사람 신체가 있는데 신체 안에 췌장, 간, 위 있듯이 번제라는 덩어리를 해부해보니까 그 안에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로 세분화된다 이 말입니다. 전체 덩어리는 번제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분화시킨 이유가 뭐냐? 제물 바쳤으니까 볼 일 보세요. 나는 농사짓겠습니다. 이렇게 관심 없이 소에 양에 안수했으면 알아서 의가 나온다 했으니까 나는 믿습니다, 하고 결과를 맡기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세탁소 옷 맡기면 나중에 찾아오던지, 배달해주잖아요. 세탁소 뜨거운데 있어야 됩니까? 맡겨주면 다 알아서 할 건데 나중에 배달만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십계명부터 해서 자잘한 이웃관계, 이웃을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혼방 옷을 입지 마라, 난간을 세워라, 누굴 맡길 때는 어떻게 하고, 노인은 도와주고 하는 그렇게 세세한 항목들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키는 게 아니에요. 네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세분화되고 어떤 죄가 죽을 때까지 계속 나오기에 선과 악의 양으로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대신 희생제물이 필요한가를 회상하듯이 후차적으로 주님의 희생제물의 의미를 더 깊이,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를 풍성하게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믿었으니까 주께 영광 돌려서 하나님 형상 본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믿었으면 십자가가 얼마나 큰 용서인가를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세세한 계명들을 투입해요. 술 취하지 말라, 분을 품되 해 지도록 하지 마라,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점점 더 죄가 많아지고 예민해지는 거예요. 섬세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죄란 개울가에 징검다리 건너는 것 같아. 이걸 건드리면 죄고, 안 건드리면 죄 아니고 착한 일이고. 개울가에 징검다리가 있는데 이렇게 건너가면 죄고, 이렇게 건너가면 의가 되고,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간은 중립이고. 이런 것을 설정해놓고 죄는 피하고, 술 먹고 마누라 개 패듯이 패는 건 죄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마누라한테 생일이라고 목도리 사주고 소원대로 스페인여행 가주면 남편 된 도리로 희생한다고 보는 거예요.
이것도 문제지만 더 문제가 때리지도 않고 선물도 안 주면 중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중간은 없어요. 교인들이 맨날 목사한테 묻기를,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간은 괜찮지요?” 자꾸 중립지역을 만들고 그걸 확인받으려 합니다. 성경에 그런 게 없으니까. “빨간불인데 바빠서 건넜습니다. 목사님, 이게 죄입니까?” 가만있어보자, 예레미야 보자. 예레미야 아무리 봐도 빨간불, 파란불 나오질 않네.
심지어 “목사님, 담배 피워도 죄입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담배이야기 안 나와요. 네 신체에 연기 피우지 말라든지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안 나와요. 잠언에도 안 나와요. 하나님의 성전이니까 담배연기 들어가면 성령이 에취, 에취 하면서 하나님이 알레르기 일으켜서 담배피우면 내 몸이 허옇게 되니까 성령께서 답답해서 못 참겠다고 성령이 충만하다가 갑자기 튀어나가 버리면, 그래서 담배피우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이 참 지난 이천 년 동안 성당과 교회, 지금도 계속 되고 있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증거가 뭐냐? 나이 60 넘으면 기억도 안 나고요, 차 열쇠에 집에 놔두고 찾고요, 머리, 어깨, 무릎, 팔 다 쑤시고요, 60 돼서 성경 공부하니, 참. 계단도 못 올라오는데. 뒤늦게 연금 받고 살 나이에 성경공부 참석하니까 잠만 오는데. 기초도 안 돼 있고.
인간이 주저앉아요. 관절이 나빠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자기가 중립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다 죄였던 겁니다. 죄 아닌 구석이 없습니다. 촘촘히 다 깔렸어요. 마치 보일러 배선 깔아놓은 같아. 평생을 살아가면서 죄 안 지은 순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죄 지은 순간이에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어떤 일을 해도 먹든지 마시든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았거든요. 자기의 의와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자존감과 자기의 명예와 그리고 여분이 있으면 자기 가족의 명예, 자기 가문, 더 여분이 있으면 자기 교회의 영광,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더 있으면 안중근이나 이봉창처럼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그 전부가 내가 여기 있음을 근거로 한 그걸 핵으로 잡고 나머지는 둘러싼 동심원들이에요. 모든 먹고 마시는 것이 그 가운데 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꼭 종기 같아. 자꾸 커져. 근지러워서 긁으면 더 커져요. 고약 붙이든지 해서 빼내야 돼요. 종기 나을 때 보면 한라산 분화구 같잖아요. 뻥하고 붕 뜨지요. 주께선 그걸 원하는 거예요. 뭐냐? 없음. 없음의 자리가 구원의 자리에요.
유월절 어린양을 먹으란 말은, 우리 큰 아들은 이번에 양 때문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라는 게 아니고 큰 아들이 있었던 자리 자체를 완전히 빈 공간으로 만들어서 그 자리에 어린양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아들 되는 겁니다. 그 장자는 더 이상 자기 이름으로는 살 수 없어요. 어린양의 이름으로 장자가 살아야 되기에 그 장자는 1년에 세 번씩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성전에 있는 곳에 와서 제사장한테 세미나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오질 않아요. 가까운 높은 산에 갑니다. 거기에 산당이 있어요. 산당에는 제사장들이 있어요.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 이방종교의 성직자들이 거기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그때마다 점을 쳐주고 행운을 안겨주는 거예요. 성전을 안 가고 산당 가는 이유가, 날마다 홈이 파여야 되는데 그건 싫고 멀쩡하게 있는 나는 올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산당에 있는 성직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와서 정성을 다해 빌면 5월에 귀인을 만날 것이다. 7월엔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다 부강한 나라가 됐어요.
그러나 성전에서는 피가 남발하고 그 광경 자체가 부정적이에요. 나를 긍정해주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 죄를 덧입은 양과 소, 염소들이 분쇄기에 난도질당하니까 그걸 보면 내가 양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제단에서 완전히 불태워지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그게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처참한 거지.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장을 가까이하지 않지요.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십일조를 안 낸다는 뜻이에요. 자주 가야 헌금도 하는데 자주 안 가니까 헌금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목사들이 교인 하나 빠지면 이것도 걱정되지만 목사들이 정작 걱정되는 것은 교인들이 몇 번 빠지면 돈이 안 나와. 이런 소리하면 사이다 같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낼까? 걱정 되는 거예요.
구약 보세요. 십일조를 내지 않으니까 제사장들이 직업이 없어.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사설 점쟁이로 취직하는 거예요. 숙식제공에 유니폼 받고 하는 일이 그 단체와 조직을 위해서 빌어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원목이고 교목, 군목들이에요.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복음 전하면 잘릴라고.
다시 생각해봅시다. 최초의 제사는 번제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번제로 드리라 해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연대에 속한 이야기가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의 아들들이 생일에 잘 챙겨 먹었어요. 생일마다 친구, 형제들 불러서 파티를 열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욥은, 예를 들어서 큰 아들이 생일잔치를 벌였다면 욥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큰 아들이 파티 한다고 정신이 해이해져서 하나님 싫어하는 죄짓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와요.
욥 시대에는 아브라함 시대거든요. 그때는 계명이 없어요. 계명이 없는데 어떻게 죄를 아느냐? 그건 욥기에 나옵니다.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는 것은 범죄고, 가진 사람이 너무 설치는 것도 범죄고, 여러 가지 범죄조항이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 1장에서 욥이 자식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잖아요. 누가 봐도 욥은 부자란 말이죠. 그 부자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행여 자식들이 범죄 할까 염려되어 까불 때마다 제사 드렸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봐도 욥은 그 당시 선악체제에 의하면 욥에게는 벌이 있겠어요? 벌이 없겠지요.
그런데 욥이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제사 드렸잖아요. 제가 가난한 자한테 요구한다든지, 욥기 나와요. 내가 이웃집 처자한테 마음을 뒀다면 제가 이런 고난과 벌을 받아도 아무 군소리 안 하겠는데, 내가 남을 탐내는 정도가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줬단 말이죠. 아무리 봐도 선악체제에 입각해서 내가 이런 벌을 받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너는 생각 안 나지만 죄 지은 게 있으니까 이런 벌을 받을 거야. 이렇게 닦달 내니까 욥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욥이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물론 욥기를 보는 우리는 알아요. 욥은 아무 죄 없고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 했다는 걸 알잖아요. 보통 내기처럼 돈 걸고 내기한 게 아니고 욥의 목숨 내놓고 내기한 거예요. 욥의 신앙을 놓고 한 거예요. 하나님과 사탄은 즐기는데 욥은 죽을 판이라. 그런데 그 내기에 중요한 게 있어요. 내기를 걸고 그 내기에 사탄이 말려듦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욥의 인생, 지상까지 흔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번제가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번제가 그 시대의 현실을 구성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당시 욥을 중심으로 일어나야 될 사건, 사건들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면 범죄로 모입니다. 누가 저지른 범죄냐 하면, 욥기 마지막에 보면, 친구를 위하여 욥이 번제를 드리게 돼요. 그 효과로 욥의 세 친구가 용서를 받게 돼요. 이게 어렵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고난 받을 때 욥도 동의하고 본인들도 동의한 자기가 아는 한 욥에 대해서 말다툼을 시작한 거예요. 말다툼이 42장까지 이어지는 게 욥기입니다. 말다툼할 때 욥의 친구들은 아무리 해도 자기 죄를 알지 못해요. 그리고 덩달아 욥도 아무리 고생해도 자기 죄를 알지 못합니다.
결국 죄라는 것은, 이게 어려운 게, 죄를 지어서 죄를 아는 게 아니고 그건 선악체제라는 한계, 생명나무 못 따먹는 범주 안에서 그 인식의 틀 안에서 엉터리 같은 오류 많은 죄지만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될 새로운 피조물의 죄는, 인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죄를 몰라요.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용서의 장치, 용서의 생산 기능과 제사라는 모습으로 제공이 되면 의미 주어진 용서체제를 체제답게 옹호하기 위해서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죄가 발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은 그겁니다. 순서가 죄 짓고 죄 지은 우리를 후차적으로 용서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는다. 아담의 후손들이 알고 있는 건 다 그런 겁니다. 심지어 그것이 이천 년 교회 조직신학까지 확정적인 진리처럼 돼있어요. 아담이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십자가도 필요 없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죄 짓는 걸 보고, 하나님께서 마귀에 속하면 안 되지. 그럼 천국은 누가 차지하지? 천국 사람 되기 위해서 내가 뭘 준비하지? 마귀에 속했으니까 자기 힘으론 안 되고, 내가 아들을 보내서 대신 피 흘리게 해서 그 피를 믿기만 하면 용서해줘서 천국백성 채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이 터지고 난 뒤에 허겁지겁 후차적인 아이디어로 끄집어낸 게 십자가라서 십자가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개신교도 개혁주의 신학도, 장로교, 침례교도 전부 그런 식이에요. 그럴 거라면 내쫓지 말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복잡하게 뭘 보내요. 그냥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쓰러질 때 주께서 독생자가 와서 내 피를 마셔봐. 이렇게 구원하면 되잖아요. 아브라함, 이삭 왜 보냅니까? 처음부터 예수님 오셔서 건지면 되지.
그게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너희가 독약을 먹었구나. 가만있어 봐라. 내가 해독주스를 만들어야지. 이랬을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단 한 명의 아담의 자손들은 구원 못 받습니다. 단 한 명도 천국 못 가요. 천국 간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경우에만 천국 가는 거예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삭은 아예 없는 존재고. 없던 존재가 천사 셋 나타나서 이름 먼저 지어놓고 이름에 맞춘, 세상에 월계수양복점이 따로 없어. 양복부터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 만들어버렸어. 세상에 이걸 누가 믿습니까? 성령세례 안 받으면 못 믿어요.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할 인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앞당겨서 능력이 와서 아브라함 때 만들어지고 모세 때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21세기 지금 우리가 만들어지고. 성령이 임했단 말은, 옛사람은 죽었다는 것.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을 소유해서 사는 게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는 없고, 그리스도를 삽니다, 이걸 보여주는 껍데기가 우리에요. 내 안에 새로운 발전기가 장착된 거예요. 엔진이 가동돼요. 껍데기는 경운기인데 안에는 벤츠 엔진이에요. 경운기가 시속 200 나와. 이상해. 너무 빨라서 휴거해버려요. 우리가 펄쩍펄쩍 뛴다고 휴거되는 게 아니고 엔진이 달라서 그래요. 성령이란 엔진을 달았어요.
성령 안에 십자가 완성이 들어있거든요. 십자가 완성을 증거하고, 갈라디아서 6장 말씀처럼 오직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게 없나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를 원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이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받아야 그게 가능해요.
그러면 성도가 하는 일은 내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죄를 지어줘야 돼요. 죄 지은 내가 용서받는 게 아니고 이미 용서받은 내가 있기에 그 다음부터 용서가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는 그 용서받은 인간의 이름으로 죄를 지으니까 말씀 전체 통째로 죄니까 죄 아닌 게 없네. 전부 다 죄에요. 심지어 미장원 나오면서 머리 잘 된 것 좋아하는 것도 죄라. 오늘 머리 왜 이리 잘 됐는지 몰라. 그 순간 이 머리는 누구 머리다? 내 머리다.
항상 우리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 것으로 돌아와요. 내 소유로 돌아와요. 어느 한 순간도 잠시잠간,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소량의 순간이라고. 소량의 순간이 지나버리면 다시 내 것이 돼버려요. 예수 믿고 은혜 받았다. 누가? 내가. 갑자기 나로 돌아가요. 나 무시하지 마라. 방금 5초 전에 은혜 받았어.
은혜 받았다는 말은 범사에 감사하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감사할 것만 있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죄 짓기 위해서 세상에 나서야 되고 그 지은 죄를 이미 한 번의 용서로 끝냈다는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런 죄 때문에 내가 헌금한다고 용서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선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오직 십자가 피로만 되는 이유가 바로 내 힘으로는 내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만약에 구원받았으면, 교인이 천 명에서 20명 됐는데 석 달 지나니까 달랑 자기 마누라와 두 명 남았어요. 둘이 좋아서 “여보, 우리 너무 기쁘지, 그지?” 이렇게 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혹시 20명에서 30명 되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30명 되도록 내가 얼마나 설교 잘하고 심방 잘하고 새벽마다 제단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자랑질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걸 감안해서 계속 내보낼 겁니다. 그것도 돈 되는 사람부터 내보내고 나중엔 돈 안 되는 청년들만 남고. 헌금 천원 내고 사천 원짜리 점심 먹고.
그러면 주께서 바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십자가만 자랑거리다. 목회 성공이 아니고 그 사람한데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빌딩 네 채 세워서 부자 되는 방법으로 구원하는 방법이 있어요. 한 달에 수입 5억 들어오니까 얼마나 고민거리겠어요. 하지만 그 고생해야 되고 이쪽 편한 것은 편한 것이고. 남 편한 것 부러워하지 마시고 5억 들어오는 것을 너무 기피하지 마세요. “나는 안 줘도 됩니다.” 그러지 마세요. 주면 받아야지 할 수 없어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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