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13-14절(살고 보자)170117b-이 근호 목사
자, 이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시간,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적으로 있던 개인의 시간이 날라 가 버리고 단체의, 다수의 시간에 종속됩니다. 다수의 시간에, 누가 전화 왔는데? 자, 개인이 있으면 개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 ‘시- 공간’을 의식하면서 거기서 자기를 느끼거든요.
그런데 열두 제자 플러스(+) 예수님 이렇게 돼 버리면, 이 열두 제자와 예수님. 이 집단은 예수님의 시간관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개인적인 시공간은, 이것은 접어야 돼요. 일체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공간이라 하는 것은 뭔 뜻이겠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다시 말해서, 사적인 시간을 가지고 너희의 미래나 구원관에 대해서, 그것 가지고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지금은, 지금 구원 받았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내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이게 개인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그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올 때까지 저 사람을 살려둔다 할지라도, 너는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이렇게 돼요.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또 사적인 시간관을 가동시켜 버려요. “자, 구원 받았는데 5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데 예수님의 시공간에서는 이미 죽었어요.
그게 로마서 6장 1절(부터)에 나오지요. 로마서 6장 1절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거기에 연합해서” 연합 했잖아요 연합. 누가 누구한테 연합합니까? 우리한테 예수님이 연합한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우리가 연합 된 거죠. 왜? 사건은, 언약 사건은 우리한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언약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왜냐하면 언약의, 유일하게 완성자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갔잖아요.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다 이루시고 ‘아버지~’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누가 누구한테 붙어야 됩니까? 내 것을 가지고 주님한테 붙어야 되죠. 주님이 나한테 붙으면 안 되잖아요. 누가 있을까? 주님이 나한테 붙으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적으로 성경, 설교를 듣고 지적으로 성경을 보니까 신학을 하다 보니까 특히 신학 교수도 하다 보니까 “자, 이렇게 구원 받는 수(數)가, 이렇게 쉽구나. 예수 믿으면 구원 받겠구나.” 이렇게 하고 난 뒤에, 전혀 자기의 시공간은 그대로에요. 그대로. “자, 나는 구원 받았는데 내 딸도 구원 시켜주면 고맙겠다. 우리 남편도 구원 받으면 좋겠다.” 자꾸 이게 비선실세처럼 자꾸 빽을 쓰려고 하는데 주님한테, “주님이여, 어떻게 해주세요.”
천주교는 아주 노골적으로 마리아한테 빽을 쓰고요. 예수 엄마니까, 여전히 자기 시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 천주교 같은 경우에 어떻게 되냐 하면은, 만약에 지금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 친척이 자기 딸이, 아들이 만약에 예수를 안 믿는다 하면, 죽고 난 뒤에도 딸이 사고로 뭐 세월호에 빠져 죽든, 물에 빠져 죽으면, 엄마가 성당에 가서 미사 하면, 그것을 패자부활전 해서, 연옥 해서, 거기서 다시 한 번, 이미 탈락됐는데 시험, 자녀 된 사람들 시험지 문제 하나 더 내주는 거예요.
그게 천주교 이야기인데, 이 천주교 이야기가 어디에 또 나오느냐 하면 바로, 7년 전 환난, 7년 후 환난의 이론에 그대로 나와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이게,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무엇도 모르고 까불다가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선배니까 옛날 선배니까 봐주자 해서 재림 이후에 한 번 더 시험문제를 내서, 그때는 그냥 예수 믿으라 하지 않아요.
몽둥이 가지고 패서 “너 이래도, 이렇게 마귀한테 시달려도 이렇게 고난 받아도, 니가 예수 안 믿을래?” 하면 “믿을게요! 믿을게요!” 이렇게 강제로 다 믿게 해서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안 그래요? 요한계시록 보면 그렇게 설명 안합니까? 그런 설명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전부다 어디에 있습니까?
“나 어떻게 돼요?” 개인 구원이죠. 개인 구원. “나 어떻게 돼요?” “이 멀쩡한 나, 그냥 버려두지 마옵소서!” 이거에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이게 종교. 그게 바로 종교에요. 기독교의 단어를 아무리 집어넣어도 그것은 종교고 종교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종교는 인간을 존중하지만, 복음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다.’고요.
예수님이 그냥 낚싯대로 “너 올라와” 이러면 “주께서 저를 낚싯대로 건져 주세요”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떠날 때 어떻게 떠났습니까?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졌지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어디로 갔다? 다 제 갈 길로 갔잖아요. 아무도 자진해서 예수님 좋아라하고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본 모습이에요. 그게 본 모습이라고요.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찾아갈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나타나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물으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냥 “나사렛 예수다” 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에요. 그럼 예수님 믿을 때 사도바울은 뭘 믿어야 돼요? 거기다가 무슨 용어를 집어넣어야 돼요?
“나를 인하여 핍박 받은 분” 또는 “내가 핍박했던 분으로서의 주님이 나를 구원 한 겁니다.” 그럼 나는, 구원 받았다는 나는 뭐가 돼요? 이제부터 뭘 알아야 됩니까? 도대체 내 속에 들어 있는 이 육적인 어떤 면면들이, 성경 말씀에 준해서 볼 때, 주님에게 핍박적인 요소로서 지금 죽을 때까지 발산되느냐? 그것을 마음껏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누구에게 영광이 됩니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내가 뭐 잘못됐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목회가 죄에요. 목회가. 설교한 게 죄고, 복음 전한 게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헌금한 게 죄, 십일조 한 게 죄고 십일조 빼먹은 것도 죄고 한 것도 죄고, 기도한 게 죄고 안한 게 죄고, 선교사로 간 게 죄고 안간 게 죄고, 촛불 집회 한 게 죄고 참석 안한 것도 죄고.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이야기입니까?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서 “그래 나 죄인이다. ‘죄’다!” 세상에 이런 배포가, 이게 하늘이 주신 축복이 아니면, 세상에 어디서 그런 축복을 받습니까? 이걸 참, 말로 다 설명할 길이 없네. 진짜 좋은데, 참 남들한테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러다가 또 욕 얻어먹고, 가짜 가지고 와서. 그럼 제자들은 이런 말을 할 때 “이제 주님과 우리는 하나라고 했다고” 이렇게 착각을 한 거예요.
“이야~ 우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따라가길 잘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랬잖아요.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갔나이다.” 특별대우 해달라는 이야기에요. 참, 참 이게 철이 없는 건지?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주님하고 자기하고 지금 하나인줄 알고 있어요. 지금 뭐, 아까 성부하고 성자 사이의 관계 1번이라 했지요? 1번은 어디서 완성됩니까? 십자가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 시점에 1번이 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지요? 왜? 십자가를 안 졌으니까! 십자가를 안 졌으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뭐를 겁냈어요? 그 당시 유대인의 권력, 유대인의 권세를 겁낸 거예요. 그 당시의 경찰이 겁난 거예요. 경찰이. “저 사람 저주 한다. 이제 예수라는 사람 저주 한다.” 이 말을 왜 했습니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 빼놓고, 모든 이것이, 지금도 우리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한마디로 말해서 ‘살고 싶다’ 오늘 제목이다. 잘 나왔다. 왜 기도와 헌금이, 전부 선교사 이 모든 것이 왜? 주 앞에 죄가 되냐 하면은, 그 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존재의 그 바닥에는, 아랫목에는, 살고 싶은 거예요.
이왕 사는 거, 근사하고 살고 싶어. 근사하게, 교양 있게, 멋있게. 주님 보시기에 안 부끄러울 정도로. 로마서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중간에 매개물이 있어요. 중간 매개체가 있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수치를 안 당한 거예요. “십자가 걷어치우고 나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말씀 한번 지켜볼까? 뭐 전에는 성령 못 받아서 못 지켰는데 이제는 이 말씀을 슬슬 지킬 수 있겠어. 한번 지켜보자.” 이게 지켜 질 수가 있습니까?
감독들에게 하신 말씀 한번 지켜볼래요? 집사는 이래야 된다 한번 지켜 볼랍니까? “차라리 안 믿으면 낫지 못 지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도권이 개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옵니다. 단체로. 단체로 와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관성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늘 이렇게 주께 지시를 받은 것은, 주님의 1번 관계, 성부 성자 관계가, 그 관계가 제자와 베드로와 사도 요한 관계로서 계속해서 확산되고 확대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함이, 주 안에서.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번역하면 “나도 말씀 보니까 나도 못난 인간이고,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니까, 우리 둘 다 주님만 바라보자!” 이래서 그게 1번 관계, 성부 성자 관계가 언약 관계가 그대로 엮어지는 겁니다.
“너는 창세기 다섯 장, 성경 몇 장 읽었어? 석장 읽었어? 두 장 읽었어? 내가 더 낫다.” 이런 관계가 아니에요. “너는 올해 몇 명 전도했어? 다섯 명? 난 두 명”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헌금 얼마 하는데? 교회 어렵다 하는데 밥값도 안 나와. 천 원 해서 점심 값도 안 되겠다. 이거하고 나는 이백 만원” 이런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에요. 서열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남 비교하는 재미로 살거든요. 그 재미가 있는 거 알아요. 그리고 이것은 죽을 때까지 안 없어지는 것도 우리가 인정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할 것은 이것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왜? 우리는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옳지 않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어요. 항상 주님은 항상 옳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힘으로 옳지 않은 것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제거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옳기 때문에.
내가 단독적으로, 독자적으로 옳기 때문에 이러면 안돼요. 이러면 우리는 자기가,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됩니다. 예수 믿는 나를, 나를 믿게 되요. 예수 믿는 ‘나’가 멋있어서 내가 나를 나 앞에 경배하게 됩니다. 안 그럴 줄 압니까? 보세요. 얼마나 소위 교회라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경배하고 있는지.
이번 수련회 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수련회를 참석한 사람은 압니다. 10m와 3m, 이거 들어봤어요? 아직까지 안 들어봤어요? 10m에서 볼 때는 분명히 성도 같은데, 3m에서 보니까 10m에서 성도로 보이게끔 3m에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조작이라 해요. 조작. 가짜에요. 남들 보이라고, 주님은 관계없고, 주님은 뭐 관계없고. 남들에게 신자로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그래서 여기에 뭐 목사님의 사모도 계시지만, 목사의 사모 치고 정신병자 아니면 이거는 큰 기적을 받은 거예요. 목사의 사모는 일단 믿음이 없어요. 두 번째로는 복음도 몰라요. 그런데 전부다 “이야~ 목사님, 저렇게 훌륭한 목사의 사모는 얼마나 훌륭하겠나?” “미쳤나? 훌륭하게? 안 훌륭해!” 그래도 훌륭한 채 해야 돼. 10m에서는. 정신병 돼. 정신병. 그것도 한해 두해지, 계속 가게 되면 정신병이 점점 더 도집니다.
최순실이 따로 없어요. 진짜 머리가 깨질 거예요. 거기다가 자식까지 어긋나 보세요. 그러면 자식까지 수습한다고, 이중, 삼중으로 위선자가 되는 거예요. 누구 좋다고 사모했는지 알 수가? 그러니까 사모의 철칙은 뭐냐? 사모는 꼭 직업을 가져라. 교회가 죽이 되 든, 밥이 되는 나는 모르겠고, 다 잊어버리고 밖에 나가 일만하고, 집에 오면 따뜻한 목사님이 밥 해 놓고, 설거지 다하고 나면 잠만 디비 자고, 아침에 또 출근하고, 그것만 하세요.
딴 것은 아무것도 하지마라. 그게 사는 길이지. 그게 숨 쉬고 사는 길이에요 숨쉬고. 작은 교회 목사는 미치지요. 작은 교회 목사는 약간 덜 미치지만 큰 교회 목사 사모는, 작은 교회 사모도 약간 정신이 혼란스럽지만, 큰 교회 목사는 완전히 마귀입니다. 완전 마귀, 마귀에요. 이게 마귀든지 죽든지. 아프거나 죽거나 라는 말이 있잖아요. 둘 다 최악이에요.
그래서 제가 서경수 사모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그것을 가지고 교회 깡패라 해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다 해야 돼요. 그게 정신 차리는 거예요. 일체 사모 티를 내면 안돼요. 그 교회에서 제일 불신자 티를 내시면 그게 사는 길이에요. 불신자 티, 그게 사는 길이에요. 이번 수련회 아홉 번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부부는 서로 약간은 나빠야 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아홉 번째 강의 제목이 그거에요. ‘죄인 유지’ 죄인으로 유지해야 돼요. 그게 성도의 길입니다. 죄인으로 유지해야 돼요. 자, 그다음에 어려운 문제가 뭐냐 하면은, 그러면 개인은 없고 열두 집단이라면, 주께서 열두 집단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18절에 나옵니다.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너희죠? 너희. 2인칭 복수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대상으로 지칭됩니다. 문맥이 같은 문맥이니까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내게 뭘 든다?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것은 하나의 연극이에요. 성경에 미리 예언된 역할을 주께서 할당을 하는 겁니다. 너는 이런 역할, 너는 저런 역할 하라는 거예요.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없고, 할당 받은 거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수련회 때 뭘 말했던 가요? 담요 이야기를 했지요? 담요. 여덟 번째 강의인지, 담요 이야기 했잖아요. 자리 이야기 했지요. 담요.
어릴 때 고모들이 TV보면서 자기만 추우니깐 자기만 달랑 덮기 위해서 담요를 가지고 와서 자기만 덮어요. 담요는 한 장이에요. 담요는 동일한 담요가 한 장인데, 고모 세 명이 딱 앉아서 TV 보는 거예요. 여기에 삼촌과 조카는 서늘한 냉방에 그냥 놔두고, 자기가 담요 가지고 왔다고. 어렸을 때니까, 어렸을 때는 다 이랬다. 한 담요에 한 위상, 한 자리를 공유하게 된 겁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고 한 구원에, 한 관계에, 한 1번 관계에 성부, 성자 관계에 다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담요의 사적인 영역을 장악하지 마세요. 이것은 내 나와바리라고 이렇게 가위 가지고 오리지 마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그리스도 안에 부부는 어떻게 사나? 주 안에서 부부에요. 주 안에서.
그래서 “나는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교회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했지요” 에베소서 5장에. 주 안에서. 그리고 부모 자식도 주 안이에요. 주 안에. 한 담요에 다 같이 죄인인데, 예수님 덕분에 구원 받은 정도가 아니고 역할을 받은 거예요. “난 아빠 역할 너는 자식 역할, 당신은 남편역할 나는 아내 역할” 역할을 받은 거예요. 역할을, 기능을. 어떤 기능?
“너는 네 자리에서 죄를 드러내고, 나는 내 자리에서 죄를 드러내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죄를 드러내고, 엘리야는 엘리야의 죄를 드러내고, 베드로는 베드로의 죄를 드러내고, 사도 요한은 사도 요한의 죄를 드러내고. 이렇게 사는 게 참 쉽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정답인데, 실제 살게 되면, 이게 단체가 아니고 항상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을 때까지 개인이 나와요.
이것을 가지고 주체성이다. 또는 자아성이다 라고 합니다. 주체성은 자기중심이다 이 말이죠. “나는 이렇게 구원 받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이렇게 했다.”고 하는 거. 조직신학은 거기에 맞춰서 조직신학이 막 퍼부어집니다. 구원의 서정 이런 거. 전부다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앞에 뭐가 들어가 있습니까? 앞에 개인 구원이 다 포진되어서 그런 거예요. 신학교 때 많이 배웠지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지금 요한복음 13장에 가룟 유다의 마귀 이야기. 성경이 응해서 발꿈치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개인 구원 같으면, 우리는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마귀의, 지옥 갈 사람의 이야기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매직으로 무엇을 지우느냐 하면은 가룟 유다 이야기는 지워도 무방해요
왜? 내 이야기가 아니니까. 저한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이제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이제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그 구절을 매직 갖고 와서 지워버리지 왜? 이것은 땠고, 그 다음 또 지키면 그것도 지워도 괜찮아.
왜? 이미 자기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못 지킨 건 남고, 지킨 것은 다 지워버리지. 그러면 그 말씀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네가 돌아서면 맨날 거기가 되는 거예요. 5천원, 6천원. 길에 5천원 떨어졌는데 나는 그것을 주인 갖다 주고 오면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갑자기 로또에 맞아가지고 큰 돈 들어왔을 때, 1번 기분 더러웠다. 2번 기분 좋았다. 몇 번 입니까?
분명히 기분 좋잖아요? 그럼 기분 좋으면 시편 4편 7절에 어긋난다고요. 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포도주와 곡식이 넘치는 것 보다 더 크다고 했거든요. 40억이 내 마음에 들어온 기쁨보다, 나는 있는 40억 날라 가도 주의 구원이 더 기쁩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그거 되고 싶지요? 하고 싶은데, 막상 40억이 없는 채로 되겠다하는 것과 막상 들어왔는데 불나서 다 날린 거 하고 기분이 달라요. 영 달라요.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것보다 구원이 기쁘다 하는 것을 이론상 아는데, 막상 소 키우는 사람이 병들어서 외양간 소 다 죽이고 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 소가 내 소가 아니고 주의 소였다 하는, 그런 것을 하려면 반드시 십자가에 경유해야 돼요
자, 그러면 가룟 유다 이야기는 나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정답에서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이겁니다. 이유 없는 폭력이 와요. 우리한테, 우리 인생에. 이게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이것을 알아요.
‘이유 없는 폭력’ 아까 제목을 또 뭐라고 했나? ‘살고 보자’ 이게 ‘살고 보자’ 보다 더 나은 것 같다. 이걸로 할래. 이유 없는 폭력입니다. 우리가, 내가 뭔가 헌금을 해야 되는데 헌금을 빼 먹는 다는지, 예배시간을 늦게 갔다든지, 그래서 내가 이번 주에 뭐 하는 일이 꼬이고, 문제가 되면 그것은 이유가 있잖아요. 내가 스스로 “내가 정신을 차려야겠다. 아직 멀었어. 난 멀었어. 주님 사랑해야지. 이러면 안 돼. 내가 왜 세상 눈치를 봐.” 뭔가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이게 얻어맞아도 당황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것은, 이유가 없다니까요. 교회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박아서 허리뼈가 나간다. 그것도 새벽기도 가는데. 옛날에 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복음 전하는데 몸에 가시가 있다. 세 번이나 빼달라는데 끄덕도 없다. 이유 없이 가시가 들어온, 사도 바울에게 가시가 들어 온 거예요. 이유 없이. 그리고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어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만약에 그것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뭐라 했나? “주께서는 큰돈은 안 보내줘도 일용할 양식은 주겠지?” 하거든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세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데 굶었어요? 안 굶었어요? 굶었지요? 뭐 사도 바울도, 주기도문도 안하죠? 일용할 양식도 안줘요. 일용할 양식도.
그리고 터키 전도할 때 맞아 죽었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죽인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질질 끌어가서 성 밖에 내놨는데 안 죽고 살아나왔다고요. 도적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네? 이 무슨 이런 폭력이 다 있습니까? 내가 잘못해서 이러하게 되면 “내 쪽에서 정신을 차려야 돼!
그래, 주께서 깨닫게 해 주셨어.” 뭐 있는데 아무 이유가 없다니까. 그리고 이유를 캐내려 해도 이유를 캐낼 수 없어요. 이런 답답할 수가 있습니까? 개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 왔을 때, 뭐냐 이 말입니다. 그 경우가 구약에 나옵니다. 그게 바로 욥입니다. 그게 바로 욥이에요. 욥은 끝까지 자기의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너는 몰라도 돼! 너는 몰라야 돼. 네가 사적 구원, 개인적 구원에 네가 집착한다면 너는 아직도 멀었어.” 이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냥 활용 한 거, 역할을 맡긴 건데 역할 맡긴 것을, 역할 맡기는 원인은 주님한테 있는데 우리는 어떤 내가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은 내가 이렇게 얻어맞을 이유가 있어서 얻어맞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바친다든지 갑자기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든지 안 그러면 선서해서 선교사로 자처해서 나간다든지 교회 청소를 자기 열심히 자기가 알아서 한다든지, 예를 들어서 운전할 때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분명히 했어요. 했는데, 앞 차는 봐주고 내 차는 걸려서 5만원 끊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또 운전할 때 “주여, 그때 내가 너무 형식으로 너무 건성으로 해서 미안합니다. 이제부터 진지하게 주여, 이제 걸리든 안 걸리든 주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제 걸려도 좋습니다.” 했는데 또 걸렸어. 분명히 걸려도 좋습니다. 했는데 걸렸다고. 좀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내가 걸리겠습니다. 라고
이 정도 양보를 했으면 “그래, 아이고 착하구나. 내가! 네가, 네가 너무나 마음 씀씀이가 하도 고와서, 그래! 이번에는 빼줄게! 과속에서!” 뭐 이렇게 돼야 이렇게 주고받는, 하청업자가 뭔가, 뭔가 주고받는 그러한 재미가 나는데, 이거는 또 걸린 게 아니고, 이번에는 걸리고 그 다음에 빵꾸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Kris Kristofferson 이 불렀던 노래 Why me Lord 주여, 왜 하필이면 나에게? 목소리 쫙 깔아놓고 부르는 노래 있거든요. Why me Lord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있어요.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러면 여기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너는 왜 안 되는데? 그러한 불상사에서 왜 너를 빼달라고 하는지 너, 근거를 대봐라. 너, 무슨 권리로 빼달라고 하느냐?”
“왜 남들처럼?” “남들도 고생 많이 하고 있어 남들 하지 마!” “왜 남들 가정처럼?” “남들 가정 지금 지옥이야. 너는 지금 멀리서 10m에서 보니까 행복해 보여. 그 집에서 한번 깊숙이 살아봐라.” “아이고 댁의 남편은 착하고” “니 그러면 한번 살아볼래? 우리 남편 착한지? 나라서, 나라서 이렇게 살아주지.” 이유 없는 고난이 들어 닥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 해도 개인 구원의 요소를 본인이 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것은 내가 죄인, 저주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 라고 하지만 “헤헤헤, 항상 나는 구원 받았지롱”이 항상 담겨 있어요. 주님께 “무조건 은혜로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만 “역시, 나는 구원 받았어!”
이게 항상 자기 구원이 항상 있어요. 그리고 항상 있다는 말은, 그 다음에 항상 뭘 본다? 내가 구원 받은 그 증거물을 수집하는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깐 내 기도는 응답이 되고, 그러니깐 내 헌신을 주께서 감동을 하지. 나 때문에 네가 구원 받았어.” 이런 식으로 자기한테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계속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환난이 왔을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그 원인과 결과에, 그 더러운 버릇은 그때부터 일시적으로 그게 파괴가 돼버립니다. 이게 이론상 내 구원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구원 받았다 이론은 멋들어져요. 뭐 맨날 들은 소리니까. 하는데 이게 진정성 있게 실감이 나려면, 실감 나려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면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겁나야 돼요.
갑자기 저 3층에서 누가 목수 일 하다가 망치가 떨어져도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하필 타이밍이. 올 때, 기도 좀 짧게 했으면 그 타이밍을 빗겨 갈 수 있는데 괜히 그 타이밍에 와서, 1초만 해도 피할 수 있는데 딱, 그 타이밍이 망치 맞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망치 맞고 난 뒤에 Why me Lord 이렇게 “주여, 왜 하필이면 나..” 나라는 말을 못하지요? 왜?
저번에 써먹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 소리를 한다고 해서 안 맞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에이~ 나 몰라. 나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막 살 거야 정말 이제, 막 살아도 얻어맞고 안 막살아도 얻어맞는데 난 못하겠어! 난 못하겠어!” 라고 큰 소리 치지만 “그래도 행동은 조심히 해야 돼. 지켜보고 계시니까!” 또 인간에게 돌아온다고요. 뭘 놓친 거예요?
계속해서 개인 구원으로 와버리면 나라는, 내가 역시 구원 받을 만해서 구원 받았다는 속에, 뭐가? 무슨 요소가 누락 돼버립니까? 답변 또, 한번 히트치지요? 답변해서. 가룟 유다의 요소가 빠져버려요. 가룟 유다의 요소가. 가룟 유다의 요소를 우리가 매직으로 지우면 안돼요.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식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이렇게 사랑해줘도 배반해.” 이게 남 이야기 하듯이 하면 안돼요. 가룟 유다도 열두 제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 포함해서 1번이 뭐가 돼요? 1번이 2번이 되는 거예요. 가룟 유다 요소가. 그럼 2번이, 사도 죽고 난 뒤에 성경 가지고 그 다음에 어디로 옵니까? 3번으로 우리한테 오지요?
“다 이루었다” 속에 있죠? “다 이루었다” 속에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가룟 유다의 배신이 포함된 내용을 가지고 “다 이루었다”를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가룟 유다는 남의 이야기로 제쳐 버리고, 가룟 유다 빼고 괜찮은 열한 제자와 전승과 그들의 약간 실수지만 그 다음에 예수님과 그것이 우리의 관계로 들어오기를 원해요.
그리고 바리새인 이야기를 하면 남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이 바리새인 나쁜 사람들,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느냐” 하지만, 바리새인 요소가 빠져버리면 우리는 정말 진정 구원 받았는지 의심해야 됩니다. “너희 중에 바리새인 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그러면 그 말씀이 나한테, 내안에 장착 되어서 유효하려면, 마태복음 5장 내용이 유효하려면, 우리가 계속해서 어떤 점이 바리새인 같은 요소인 것을 매일 삶 속에서 그게 나와야 돼요? 안 나와야 돼요? 나와야 되죠. 나오니까, 그게 뭐가 됩니까? 죄가 되죠? 그게 패널 이에요. 패널. 팬넬 경상도 영어로 팬넬, 그 패널 이라니까요.
여러분, 만약에 우리 목사님께서 만약에 사도 바울이라 합시다. 사도 바울이라 하는데, 우리한테 복음을 전한다 합시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어찌 너희를 꾀더냐?” 하면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이야기 쭉 하거든요.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막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예수님 믿게 됐다. 이렇게 배설물로 여겼다.” 이렇게 하실 때, 듣는 사람이 그 사도 바울의 말을 듣겠어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것을 보겠습니까?
듣는 사람이? 아울러 다 보겠지요? “저 사람이 도대체 어느 학교 나왔는데? 저, 언제 공부를 저렇게 했지? 저, 부모님은 뭐하시고? 결혼은 했나?” 뭐 이런 거. “자녀는 몇 명이지? 저 사람 성격은 어떻지? 얼굴은 왜 또 저렇게 생겼어? 말하는 건 힘이 있는데 얼굴 생김새는 영 아니고” 뭐 이런 거 나오지요? 성경에.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사적인 관심사가 나올 때, 사도 바울이 사람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죽였습니까? 안 죽였습니까? 사도 바울이. 엄청 죽였지요? 왜 죽였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그러면 사도 바울이 자기 딴에는 복음 안다고 할 때, 자기는 사람을 그렇게 죽여 놓고, 이게 그 죽은 사람에게 일일이 가서 “제가 그때 몰라서 죽였습니다.”고 일일이 사과 했어요? 안했어요?
사과 왜 합니까? 아까 뭐라 했지요? 책임지지 말라고 했지요? 뻔뻔스럽잖아요. 뻔뻔스럽죠?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 영화잖아요. 밀양에서 피아노 치는 애를 유괴해서 죽여 놓고, 뒤늦게 그 여자가 미친 듯이 기도하면서 은혜 받았다고 자청 10m에서 은혜 받아놓고 교도소에 가서 전도 하니까, 그 전도 받는 사람이 “아줌마, 제가 먼저 예수 믿었는데요?”
이렇게 하니까 애 죽인 복수를 “니 지옥 가는데 내가 너를 구원해줬다”로 그것을 스스로 자기한테 보상을 하려 했는데, 그 자기 애를 유괴해 죽인 그 범인이 먼저 하는 말이 “아줌마, 나 벌써 예수 믿었어요. 복음 받았어요.” 이렇게 하니까, 여자가 아주 돌아버리는 거예요. 복수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거예요. 자기 계획대로 안 된 거예요.
그래서 김추자 노래판을 틀어놓잖아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그 노래를 틀어놓는다고요.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게 뭐부터 출발했습니까? 내 구원부터 출발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모든 교인들이 대부분의 교인이 뭐냐? 자기 구원 받으려고 교회 가는 거예요. 전도연하고 똑같아. 전도연. 네?
목사는 지 교회 잘되려고, 잘되기 위해서 성경 설교하는 거예요. 이 전도연하고 똑같은 거예요. 결국. 만일 자기 교회 목회하는데, 부목사가 들어왔어. 설교를 너무 잘해. 어떻게 합니까? 당회장이 그때는 조용히 부르지도 않아요. 종용히 불러요. 칭찬을 넋 놓고 해요. “너 참 신학교에서 열심히 잘 배웠다. 그런데 장로들이 안 좋아한다.”
예수를, 복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이거는 내 나와바리라는, 내 나와바리. 네? 조폭이 내 영토에요. 개가 오줌 싼 곳이에요 이게. 전봇대. “내 나와바리에 왜? 내 나와바리에 왜 들어와? 내 나와바리에” 너는 네 밥벌이 하고, 나는 내 밥벌이 하자는 거예요. 그동안 수천 번 설교해도 그것을, 그 내막은 “살고 싶다”를 빙빙 돌려서 이야기 한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이것을 만약 목사, 당회장 목사한테 이야기 하면 “그래, 나 죄인이다.” 하고 “뭐, 뭐 나도 뭐 내가 예수가? 네 말이 맞지만 뭐, 안 그런 목사 어디에 있나?” 이렇게 나오죠?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하는 그 부목사를 용서하지 않고 짓밟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게요? 오늘 마지막 문제, 누군지 압니까? 아, 이거 맞추면 뭐 주고 싶다.
“이게 어디서?”하면서 대드는 사람이 있는데 세 자입니다. 세 자. 끝에 ‘님’자 붙어있고. 누굽니까? 네, 누구에요? ‘사모님’ 네, 사모님은 복음이고 뭐고 없어요. 내 남편 왜 건드리나? 내 남편. 자기 남편을 주 안에서 섬기는 게 아니에요. 자기 남편 어려우면 자기 자식을 못 키웁니다. 아이들을 못 키워요.
그러니 아까 했잖아요. 교회에서, 교회라는 것은 죄인들의 연필심 같은 필통이라 했지요? 이번 수련회 때. 뾰쪽뾰쪽한 사람들. 단일 면적당 에너지를 많이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이 끝은 아주 강렬하게 뾰쪽해집니다. 물리학에서. 이게 면적이 좁을수록 잘 뚫고나가요. 뭉뚝뭉뚝하면 안 되고 압력이 그만큼 세지니까. 교인들은 심 같아.
“아이고, 목사님 복음 좋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새로운 자매가 와서 “아 목사님 설교 너무 잘해. 목사님 같은 주의 종 없어요.”하다가 나중에 온 일주일 뒤에 온 자매보고 “아이고, 너 머리 이쁘게 나왔다.” 그 소리 했다고 삐져서 교회 안 나와. 특히 젊은 애들이 교회 안 나올 때는 삼각관계, 연애할 때. 10m에서 신앙인 척 해줘야 3m에서 신앙 좋다고 믿음 있다 하는, 그 연애관계, 이런 것도 문제야.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 왔을 때는, 자기 자식 건드리면, 아까 나왔잖아요. 내 자식 때렸다고, 누가 때렸다고 하더라? 누가 이야기 했는데, 내 자식 패가지고 뭐? 누구한테 들었는데? 몇 시간 전에 들었는데? 이야기 안했나? 못 참았다. 이야기 했잖아요? 목사가 내 자식 때려가지고 나 보는데 때려가지고, 누가 이야기 안 들었어요? 어떤 정답이 안 나와요. 시치미가. 3m에서 그만 덮어놔 버렸나?
가룟 유다의 요소가 그때, 아~ 이게 바로 가룟 유다가 내 안에 이게 잠복되어 있던 거예요. 이것을 들추어 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인간을 주께서 십자가로 피 흘려줬으니까, 뭐 갖다 버릴 목숨이라도, 갖다 버릴 목숨을 주께서는 대신 그것을 처리해주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으로 해주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감사도 몇 초 가지도 않지만, 한 몇 분도 가지 않아요. 어쨌든 간에 그 몇 초 가든 안 가든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서는 뭐가 있다? 시간의 진척 이런 게 언제라는 게 없어요. 어떤 성질과 성격이, 인간이 예상 못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던 놀라운, 어떤 번쩍이는 번갯불 같은 그런 요소가 들어있으면 주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 성령이 있기 때문에. 성령 아니면 이런 일이 없어요. “내가 가룟 유다, 바로 내가 가룟 유다입니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죽어 주셨다니.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거예요. 일루리곤에 가서 나중에, 사울 되었을 때 그때 내가 예수님을 몰라서 댁의 아들을 물에 빠져 죽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지금까지 나 된 것은 뭐다? 내가 한 모든 짓이 무슨 짓이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라 했어요. 이 뻔뻔스러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왜 모르냐 하면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교인들하고 비교해서 그래요. 말씀, 복음 앞에서 비교해야 될 텐데, 이 성경 말씀과 비교하는 게 아니고 남하고 비교해 놓고, 그 다음에 성경 말씀 중에서 괜찮은 거 뽑아가지고 자기가 그걸 실천에 옮김으로서 더 실력 있는 신앙인으로 장착하는 거예요.
“너 어느 정도 거룩해? 어느 정도 거룩 하라는 말씀대로 너 얼마나 순종했어?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더 본받았어? 에베소서 5장에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 했는데, 네가 지금 어둠에 속하지 않고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으라고 했는데, 너 얼마나 살았어? 주께서 용서했으니 서로 용서하라고 했는데 얼마나 용서했어?”
남하고 비교하기 시작해요. 남하고. 그렇게 돼버리면, 그것은 점점 더 연필심이 돼버립니다. 연필심이 되면 될수록 그 다음부터는, 목사가 그 사람한테는 대하기가 힘들어져요. 삐딱하게 잘못 오해해버리면 “내가 이 교회에 갖다 부운 돈이 얼만데, 나보다도 얼마 안 바친 저 사람을 해?”이러면 교회가 드디어 분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권사 투표 뭐 장로 투표하면 우르르 나가잖아요. 자기들 계 떨어졌다고. 촌에, 촌에 그런 게 많아요.
네, 그 다음에 봅시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는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내 떡을 먹는 자”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면 이게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 시편에 나오는 시편이 22편인가 뭐 하여튼 나오거든요. 이게 시편 이야기인데, 이 “내 떡을 먹는 자”라는 말은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다윗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뭐하는 사람이죠? 간음했고 또 뭐했습니까? 살인했지요? 그것도 비겁하게 했지요? 비겁하게. 자기가 죽여 놓고, 사주해 놓고,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자기가 해놓고. 그건 최순실이 다했다. 이런 식. 미루는 것처럼. 아주 비겁한 거예요. 그런데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윗의 자손에서 뭐가 나와요? 메시야가 나오지요? 죄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죄 속에서만 의가 나오고, 죄 속에서만 영생이 나오고, 죄 속에서만 구원이 나와요. 그래서 구원이 나오는, 구원이 나온다. 주님이 증언했다는 말은, 그 순간에는 나는 졸지에, 순간적으로 뭐가 됐다? 다윗 같이 그런 더러운 인간이 되었다는 것. 그 순간.
나를 더러운 인간 만들어놓고, 개 같은 인간 만들어놓고 주님 홀로 의인이 돼버리는, 의인이 되는 하나의 세팅이 돼. 세팅. 세트가 돼요. 그게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십자가만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우리의 행함은 모든 것은 죄로 만들어놓고 그리스도만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하는데 여기서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이게 참 어려워요. 전에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카드 10장 가지고, 카드 10장과 책상 위에서 약간의 피라미드를 놓는다 합시다. 그러면 카드 10장과 밑에는 몇 장이냐 하면, 4장을 놓아요. 4장을. 4장을 이렇게 세워요. 그다음에 3장을 이렇게 세우지요.
3장을 이렇게 세우고 그다음에 2장, 2장 세우고 그 다음에 1장. 책상 위에 10장 맞지요? 자, 뭐를 빼면 되겠어요? 뭐를 빼면 와르르 무너지겠습니까? 뭐 하나, 아무거나 빼도 바로 무너지겠지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 카드를, 패를 여기서 빼 버린 거예요. 빼버리면 우리 같으면 12명이잖아요. 그러면 한명 제끼고 뭐하면 됩니까?
11명 가지고 하면 되는데, 주께서는 이 가룟 유다를 뺌으로써 이 제자 공동체가 와르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목자를 치니, 목자를 누가 쳤습니까? 가룟 유다가 배신해서 목자를 치게 하니, 나머지 열한 제자가 와르르 걸음아 나 살리라고 다 도망갔죠? 제자들만 도망간 게 아니에요. 마가라는 자는 벌거벗고 도망갔다고 되어 있어요.
벌거벗고. 얼마나 급했던지, 그러면 그들에게 평소에 열두 제자의 결속력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열둘이 아니고 각각 “나만 잘하면 되지, 나만 잘하면 되지!” 사적 구원, 사적 욕망에 의해서 예수님을 개인적 자격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터 보려고 했던 자들이 열두 명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은 같은 사람이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개인이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으면 “나만 구원 받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옆구리에 난데없는 뭐가 들어오느냐? 훅이 들어와요. 어퍼컷과 훅이 들어옵니다. 훅이 확 들어오거든요. 누가 보냈느냐 주께서 보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유를 모르니까, 이유가 없으면 뭐도 없다? 대책도 없어요.
뭐 십일조 떼먹었다는 지, 뭐 게을리 했으면 그 다음에 그것을 보충하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 이유가 없어요. 욥하고 똑같아요. 아무 Why me Lord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완전히 개망신 당하는 거. 개망신. 네? 그냥 개망신 당한 거예요. 성격이 못 되서도 아니고 딱 타이밍이, 이상하게 타이밍이 아다리가 딱, 딱 다가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인생 가운데서, ‘내가 저 남편 말고 다른 남편 만났으면 이러지는 않았다.’하는 생각 안 들던가요? ‘내가 저 여자 아니고 다른 여자 만나면 이러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 안 들던 가요? ‘내가 하필 다른 교회도 있는데, 왜 하필 거기 왔을까?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런, 이게 부정적으로 후회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 순간 나는 사적으로 주님과 일대일로 구원 받겠다는 의도로, 주님을 그런 식으로, 내가 주님을 새롭게 구상 한 거예요.
가짜 주님을 그렇게 구상 한 거예요. 그럼 뭐냐? 이 세상의 모든 깡패가 나의 옆구리를 친다 할지라도 “주께서 보내셔서 쳤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북한, 북한에 있는 사람이 한국에 신앙 좋다고 온다고요? 돈 보고 오는 거예요. 북한이라는 환경은 신앙생활하기 멋져요. 네, 일찍 죽을 수가 있기 때문에. ‘와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북한 신앙생활 못하고 온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남한 자본주의가 이야기하는 교회 생활이, 가만히 보니까 돈도 되지, 교회도 즐겁게 찬양도 하지, 가족끼리 손잡고 옆구리에 찬송가 끼고, 요즘은 찬송가 아니지 스마트폰 갖고 다니지만. 성가대 노래, 가운 입고 노래 부르지, 파이프 오르간 하지 “와 좋겠다! 나도 저런데서 신앙생활 해보면 좋겠다.”
주께서 가장 적합한 곳에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을 선망해서 온다는 것은, 그것은 극동방송 때문에 그래요. 극동방송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있는 자리는 최고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야죠. 얼마나 좋아요. 김정은 보내줬지요. 아바이 동무들 전부 다 호시탐탐 신자 잡아넣으려고, 신고하려고 버티고 있지요.
그 보안관들이 내부 안을 다 살피지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환난과, 자진해서 환난과 핍박을 주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솔솔 나올만한데, 그렇지 않잖아요. 그것은 북한의 극동방송의 문제고, 또 옌벤. 그놈의 옌벤. 옌벤 사람들 문제야. 목사들 문제야 또. 탈북자 도와주는 목사들이 문제라. 여기는 순교자로 치부하는데 그게 무슨 순교자에요?
복음을 위해서 순교자지. 어떻게 교회, 교회 건수 올리는 여행사하면서 무슨 순교자입니까? 시간 아직 2분 남았는데 지금 계속 하면 모르겠다. 그냥 사세요! 주께서 알아서 라이트 훅, 레프트 훅, 있는 훅 다 날려주십니다. 그럴 때 “아, 사적 구원이 아니고 그냥 창세 전에 집단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구원 받기 위해서 해주셨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거, 그거 오래갈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가봐야, 오래가는 사람은 한 3분? 돌아서게 되면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리려고 바르게 살아야지!” 또 이렇게 돼요 또. 다음에 라이트 훅을 맞기 전까지는 또. “다음에 두 번 다시, 이런 벌 받으면 나만 손해지” 또 이런 꼼수가 또 자기중심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설교자는 매일같이 복음만 전해야 돼요! 매일같이! “이만큼 신학 아는데?” 하지 말고 매일같이 복음을 전하고, 자기의 죄, 목사는 죄인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기 죄를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래서 저는 설교하는 목사가, 설교하는 이게 죄입니다.” 이렇게 증거 하게 되면, 교인들이 “저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목사님 본인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주 안에서 공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영광은 주께 돌리죠. 그러다가 다른 교회 가면, 다른 교회 가든 말든 그거는 주께서 인사이동 시키는데 내가 왜 또 관여합니까? “아, 저거 얼마짜리인데.. 저거 한 달에 오십 만 원 짜리 나가 버리면, 올해 예산 반이 날라 가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가 주께서 그렇게 가게 함으로써, 얼마나 우리는 복음, 복음 하지만, 외양간의 소 잃기 싫어하는, 살고 싶다는 본능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이용해 먹은, 가룟 유다 같은 인간임을 또다시 거기서 들추어 내주는 하나님의 멋진 찬스! 그게 뭐냐?
“성경의 응하게 하려 함이라” 때가 되매 가룟 유다는 팔아먹어야 됩니다. 그 타이밍은 1번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확정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하늘에서의 뜻이 다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그 의미를 우리가 이제 알았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확정된 사실인 것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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