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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살고 보자 1701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7. 19:17
2017-01-18 00:21:17조회 : 364         
살고 보자 17011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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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직 (IP:116.♡.113.129)17-01-20 08:52 
가락-요한복음13장13-14절(살고 보자)170117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3-14절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3-14)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한마디로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렵다 하면 어떻게 하지? 걱정되는데, ‘대칭성’이라 하는데,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계시겠지요. 하나님 아버지. 이 관계, 이 관계를 그대로 물에 비친 듯이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과 관계. 이것이 그대로 확장 됩니다. 이 관계가,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가. 


그러면, 아까 그 간증해 주신 그것을 연상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었지요?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다 이루었지요. 그러면 대칭성에다 집어넣어보면,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으니까 아버지가 영광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그 관계를 그대로 예수님과 제자들한테 장착해 버리면, 제자들이 영광을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받지요? 


뭐 율법은 뭐에요? 이야기 할 것 없는데, 이거 하나로 끝나버렸네. 다 이루었다. 무엇을 통해서? 십자가 피로서. 영광이 되잖아요. 뭐 지킬게 뭐가 있어? 없는데. 오늘 강의 이렇게 끝날까요? 이것을 대칭성이라 해요. 물이 비쳤을 때에, 내 얼굴을 이렇게 비취면 흔적이 나오듯이, 주님이, 주님의 관계. 그러니까 성령께서 주신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그대로 연속 시킨 겁니다. 


제자들과 관계에서 연속 시킨 거예요. 그리고 아직 멀었어요. 제자들과 그 다음에 세상이 있잖아요, 세상. 세상이 있잖아요. 세상의 이 관계를,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 ➀
그다음에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 ➁
제자들과 세상관계에서 ➂
➀, ➁, ➂이 모두 다 동일한 관계 속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러한 이것이 대칭성인데, 물에 얼굴이 비치듯이, 수면에 비치듯이. 그렇게 되게 되면, 그러면 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그 자리에 집어넣었느냐 하면은, 이게 뭐냐 하면, 유일한 질서가 돼요.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가 유일한 질서가 됩니다. 천국을,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천국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천국을 이렇게 표현 했어요. 천국 = 아들의 나라 


이것은 아시죠? 아들의 나라. 천국을 아들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은 천국 안에 내용이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내용이 그 본질이 천국이 된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아들의 나라가 되는데, 아들의 나라의 그 절차가 있어요. 아들의 나라가 되는 그 알고리즘 algorithm이라 하는데, 


알고리즘이라 하는 것은, 컴퓨터에서 명령어들의 순서. 명령어의 순서도를 알고리즘이라 합니다. 이렇게 명령하고, 그 다음에 이것을 명령하고, 이것을 명령하고, 이것을 명령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을, 아들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 명령이 필요하겠죠? 컴퓨터에다 “뭘 하세요” 하면 딱 나오듯이. 그 순서가 있잖아요, 순서가. 


그 순서 중에 필히 거쳐야 할 순서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살아계신다고 주가 아니에요. 주가 되려면 반드시 순서가 있어요. 그 순서가 바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됩니다.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가 뭐다? 유일한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라 했지요. 


그러면 세상은 뭐가 돼야? 자동적으로 질서겠어요? 무질서겠어요? 자동적으로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세상은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무질서에는 무질서를 유발하는 그 힘이 있을 것이고, 예수님한테는 아버지의 성령의 힘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 무질서를 무질서라 하는 그 힘을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밝히는 그게 뭐냐? 악마가 통치하는, 악마가 통치하는 세계. 통치하는 세계겠지요. 


보통 악마라 하면, 뭐 녹색 얼굴을 하고, 뭐 이렇게 날개를 퍼덕거리잖아요. 그런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악마가 뭐냐를 궁구하려면, 악마를 단독적으로 해서는 악마가 뭔지 몰라요. 예수님과 이렇게 같이 놓여 져야 악마를 알아요. 그러면 악마의 정체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인간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이게 바로 악마의 주장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다.” 


보통 우리가 “악마가 흉측하게 생겼다. 인상 더럽다.” 이렇게 하니까 인상 안 더럽고 착한 사람, 동안이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점수를 자꾸 좋게 주려고 해요. “세상에, 성품도 착해라. 이거 뭐 교양도 있어.” 이렇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보고 뭐라고 했느냐? 너희 아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라 했지요. 악마. 악마라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과격한 말을 우리가 동의를 해야 돼요. 왜 동의를 해야 되는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아버지와 예수님의 그 관계가 1번이라면,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가 2번이고, 2번은 뭐냐 하면은 바로 열두 사도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포함되고, 성경책을 썼던 사도들이에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1번이고 2번이고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3번 있죠? 3번이 뭐냐? 사도들이 편지할 때, 제일 앞에 고린도전서나 로마서 제일 앞에 뭐가 나옵니까? 


“그리스도의 종, 나 사도 바울” 이렇게 돼있죠? 그리스도의 종. 그게 뭐냐? 1번이 연속 되어 있는 2번. 2번이 이제는 편지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누구한테? 오늘날 자기 백성이 될 사람에게 3번을 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1번, 2번을 전할 때 그냥 전하면 안 되죠? 여기에 아까 알고리즘이라 했지요? 


명령어, 절차, 순서. 필히 나오지요? 그 순서, 절차가 필히 나올 때, 그 순서, 절차를 어디서 공급합니까? 이쯤 되면 딱딱 나와야 되는데, 아까 처음에 1번 예수님께서 아들의 나라를 만들 때, 예수님을 그렇게 주가 되게 하시는 그 반대의 힘이 어디서 나왔어요? 이 세상에서 나왔고, 악마에게서 나왔지요. 그러면 1번이 나올 때, 악마가 관여했고 세상이 관여했다면, 2번은 말할 것도 없지요? 


여기 16절 한번 보세요. 16절. 13장 16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13장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13:16) 


예, 됐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너희들이 아무리 고생, 고생한다 할지라도, 너희들을 노리고 세상이 너희를 핍박한 게 아니고, 나를 노리고 세상이 핍박한다는 겁니다. 나를 노리고. 이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나와요. 15장 18절 한번 볼까요? 이번에는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복음 15장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8)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그 다음에 뭡니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라는 이 자리, 위치, 위상. 이것을 우리가 확정할 수 있습니까?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라 할 때, “아! 나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내가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을 주께서 인정해줍니까? 


아니에요. 이게 왜냐하면 1번이 와야 돼요 이게. 결과적으로 1번이 와야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이 나오는 거예요. 내 쪽에서 “이러한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제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에서, 지구에서 마음껏 떠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다 했어요. 나는 그냥 무심코 이야기 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예수님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슈퍼맨이라 했거든요. 슈퍼맨이 지구를 왔다 갔다 했잖아요. 그렇지요? 슈퍼맨. 슈퍼맨은 능력이 많아서, 슈퍼맨은 어느 별에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왔다 갔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하니까, “나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 참 멋있겠다!” 이렇게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우리가 요청한다고, 우리가 기대한다고 되어지는 게 아니에요. 


항상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은 1번이 쥐고 있어요. 1번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파생되는 현상이 요한복음 13장 16절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애초부터 성경에서는 이런 요구는 안받아줍니다. 받아주지를 않지요. 


왜냐하면, 시작이 내가 하나님하고 출발 하는 게 이것이 1번이 아니기 때문에. 1번은 따로 있잖아요, 1번이 아까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하고 아버지의 관계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관계를, 더욱 더 빛내기 위해서. 빛낸다는 말을 이것을 성경대로 하면, 성경용어로 하면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뭐 쉽게 말해서 그 관계를 빛내기 위해서, 또 다른 말로 돋보이기 위해서, 또 다른 말로 하면 주가 주 되게 하기 위해서. 


1번은 물론 성령께서 실시하지만, 성령께서 1번 관계를 이렇게 실시를 하는 그 여파로, 그 결과로, 그 열매로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발생되는 겁니다.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철거해야 돼요? 뭐를 철수해야 됩니까? 포기해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는 그 요구사항은 아끼지 말고, 그것을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회수해야, 거두어 들여야 돼요. 


“아!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구나.” 이 세상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이 말이에요. 그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이 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고자 하려고 한지 알아요? 그것은 바로 본인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아야 되겠고 눈앞에 있는 것은 모세 율법밖에 없으니까, 모세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나는 구원 받아야 되겠고 신약 성경이 앞에 있으니까, 사도 바울의 명령도 많고 사도행전도 있고 요한계시록도 있으니까, 요한 계시록을 될 수 있는 대로 완벽하게끔 지켜서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환난을 좀 수월하게 좀 통과해서 십 사만 사천 명에 골인해 보겠다.” 이것을 아까 것과 매치하면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뭐가 잘못 되었나? 이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그게 왜 잘못 되었을까요? 


십자가 사건 근처에서 유발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을 남의 일로 여긴 거예요. 이게 우리들의 평소의 마음가짐이, 십자가 밑에 이렇게 달라붙어 있다고 생각안하고, 나는 십자가 그 알고리즘, 그 과정 말고 그냥 십자가와 예수님만 달랑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를 달랑 믿는 그것도 뭐가 되냐 하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은, 뭐가 되겠어요? 행함이 되겠지요? 누가 그랬어요? 이 좋은 말. 다른 사람 정답하고, 정답이 아주 수상한, 수상해요. 그게 행함이 되는 거예요. 행함이. 모든 행함을 왜 하나님이 거부하느냐 하면은, 이런 행함이 유발된 그 동기, 동인이 본인의 구원론, 구원관이 있기 때문에. 본인의 구원 욕구에, 구원 의지로부터 이게 스타트가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게 출발점이 되었어요.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출발점을 했습니까? 대칭성 할 때, 출발점이 뭐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그 관계. 1번 관계가 이렇게 확대되고 파생되고 유동성이 퍼진다. 분명히 이야기 했건만. 우리는, 나는 있고, 구원을 받아야 되겠고. “아! 1번 이거 아이디어 괜찮네! 1번을 내가 믿어야지!” 이렇게 되면 그 믿음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바로 행함이 되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그건 지 마음대로 믿음이죠. 성경에서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조건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포기했다는 것을, 그것을 안에 내용이 들어 있어야 돼요. 나의 어떤 행위도, 나는 내 구원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이 이미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 안에 내가, 나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을 아울러 거기에 담아 놨어요. 


이 보자기 속에, 십자가라는 보자기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 믿고 천당 가려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헌금해서 복 받으려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다 집어  넣는 거예요. “왜 헌금 하고, 왜 선교사 되려고 하고, 왜 기도 열심히 철야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다 나 좋아라고 하는 겁니다.” 라는 것을 거기다가 다 집어넣는 거예요. 다 집어넣고, “바로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희생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렇게 실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어떤 인간도 “구원 해주세요!” 라고 내밀 수 있는 자격자가 이 땅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왜? 구원은 예수님과 아버지로부터 새로 출발하기 때문에, 이 밑에는 “입 다물어! 군소리 하지 마!” 군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례 요한도 왔을 때 뭐냐 하면은, 심판을 이야기 했지요. 회개하라. 심판을 이야기 했지, 구원을 이야기 한 게 아니에요. 


그래, 구원을 평소에 가르쳤던 바리새인들이 나오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있어요. “이게 어디?” 이렇게 했지요. “니들이, 니들이 뭐? 왜 왔는데? 니들이 여기 왜 왔는데? 어이구 잘났어요. 어이구 잘났어요. 그럼 이 돌멩이, 돌멩이. 너희들이 구원 받을 거면, 이 돌멩이도 구원 받겠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모든 것은 다 찍혀 버리는 거예요. 이사야처럼 다 찍혀버려요.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거든요. 자기를 부인하라. 자, 13장 계속 들여다봅시다. 자, 처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대칭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수면에 자기 얼굴이 비치듯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 세상이라는 그 어두운 수면에 비취게 되게 되면 거기에서 1번 관계가 2번 관계와 3번 관계로 계속 이어진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는 죽으니까, 늙어 죽으니까. 그들이 그냥 늙어 죽는 게 아니고 성경책을 남기고 죽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3번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안 잊어버리겠지만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하자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모든 율법을 누구한테 다 주지요? 모든 율법을 예수님이 다 가지고 오지요? 


다 가지고 혼자 그것을 쥐고, 마치 진주의 논개처럼 일본 장수 끌어안고. 모든 인간에게 정죄할 자기 백성들을 정죄할, 저주할 율법을 혼자 쥐고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고,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장렬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장렬하게.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을 사전에 알았던 사람 누가 있었습니까? 사전에 알았던 사람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지요.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갔으니까. 아무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사실을, 이 놀라운 폭발적인, 놀라운 하나의 폭죽 같은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눈치 못 챘는데, 어떤 경우에만 눈치 채게 되겠어요? 예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아! 이게 율법을 행함으로 의가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뭔가 꼼지락 거려야 될 문제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의 하신 일의 그 혜택을 무상으로 받아서 구원 받는 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처음에 대칭성이고. 두 번째 어려운 것은, 첫 번째는 ‘대칭성’ 두 번째는 뭐냐? ‘패널’ 패널이라는 것은, 제가 패널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 키워드를 쓴 것은 뭐냐 하면은, 이게 ‘경계선’ 구실 때문에, 역할 때문에 그래요. 패널 집을 지으려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철판, 약간 얇은 게 있고, 그 안에 스티로폼 집어넣잖아요. (판넬~ 판넬~) 내가 너무 영어를 썼나? 영어로는 패널 이라고 하지요? 판넬이 영어로 뭡니까? 보통 패널이라고 하잖아요. 패널. 


스티로폼을 집어 놓고 취합 하는 거 있지요. 자, 이렇게 했을 때, 아이스크림도 이런 게 있지요? 과자 사이에 아이스크림 집어 놓고 파는 거 있잖아요. 그것처럼 그런 게 있을 때,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 세계와 이 어두운 세상 사이에, 멀리서 보면 이게 하나의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게 되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패널처럼, 판넬처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있어서, 예수님 쪽에서 주신 것은 의고, 인간 쪽에서 제자들이 받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죄고,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 의 앞에서 항상 뭐가 되냐 하면은,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뭐를 하느냐 하면은, 이제는 죄를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구원 받아서 착하게 사는 게 아니고, 착하게 사는 것은 조폭들의 표어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죄를 이제 드러내게 됩니다. 죄를, 계속해서. 죄를 왜 드러내는가? 본인 구원 받으려고? 아니,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럼 왜 드러내나? 이게, 이 세상과 이세상이, 주님의 세상에 무슨 역할을 해야 하면은 패널, 경계선 역할을 해야 돼요. 경계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의 세계와 이 어두운 세계 사이에 예수님이 유일하게 뭐가 되냐 하면은 이게 맴브레인 membrane ‘막’이 되요 ‘막’ 세포막 같이 ‘막’ 있죠? 세포막. 막을 형성한다고요. 예수님의 증거는 딴 게 아니에요. 본인이 ‘막’이에요. 그럼 ‘막’인데 그 ‘막’을 통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전화 통화) 아, 문이 잠겨있다고요. 네, 문열어주세요. 안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렇게 또 늦게 오시는 분이 있으면 또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계속해서 자기한테 관심을 둬요. “나 어떻게 됩니까? 나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 천당 갈 겁니까? 지옥 갑니까?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됩니까?” 이게, 성경에는 사적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개인구원이 없어요. 어서 오세요. 좀 일찍 오셨으면, 


네, 늦게 오셨어도 다행입니다. 한분 늦게 왔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야죠.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 14절. 다시 하는 이유가 있어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줬어요. 발을 씻어 주니까 “너희들이 내가 스승이라서 발을 씻어주는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어 줘라” 라고 이야기한 그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있었던 그 관계가 점점 더 세상 쪽에서 세상 쪽으로 침범해 들어가는 겁니다. 확대되어, 확산되어 들어가지요. 들어가는데 이 세상은 혼돈이고 무질서에요. 어두움이라 했으니까. 그러면 어두우면 뭐가 있어야 되냐 하면 어두움은 뭐가 있어야 돼요? 질서가 있어야 되겠죠. 질서가. 그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가 있기 위해서 뭔가 칸막이가 쳐져야 돼요. 칸막이가. 


하나의 예를 들면, 북 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 거기 유명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부들이 골치 아픈 게 남풍이 계속 부는 거예요. 남풍이. 옛날 고대 수천 년부터 어떤 수백 년, 수천 년부터 어떤 신화가 있느냐 하면은, 가자미하고 그리고 홍어하고 오징어하고 옛날 신화에 세 종류의 고기가 있는데, 남풍이라는 괴물이 오니까 이것들이 물고 뜯고 이렇게 해서, 지기는 졌지만 힘들게 남풍이 함부로 가자미하고 홍어하고 오징어에 대해서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는 그런 전설 아닌 전설 같은 게 있어요. 신화가 있단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냐면 남풍이 계속, 폭풍이 불게 되면 고기를 못 잡잖아요. 그런데 이 대 자연은, 이 신은, 못 잡는데 그나마도 오징어하고 가자미하고 홍어를 잡을 그때만큼은 좀 파도가 잔잔해 지도록 이렇게 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신화가 생기는데 신화가 뭔가 하느냐면 무질서 가운데서 무엇을 하느냐? 


질서를 유발하고 이 질서의 틈을 통해서 자기의 먹고 살 길을 여기서 찾는 겁니다. 옛날 고대인들이. 그러면 이 무질서 가운데 질서가 있는데, 질서의 특징이 뭐냐? 항상 대칭성이에요. 대칭성. “어디서 어디까지 마디. 그 다음부터 여기서는 고기 잡는 것. 그 다음은 고기 잡으면 안 돼! 이것은 신이 노해서, 자연이 노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아메리카 인디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도 이렇게 무질서와 질서 가운데서 질서는 누구 좋아하는 질서다?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한 질서. 숨 좀 트는, 나도 숨 좀 쉬자 하는 그 틈을 통해서 밥 먹고 살듯이, 이 혼돈의 세계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겁니다. 한번 정리해봅시다. 무질서에서 뭐가 된다 했습니까? 질서가 주어지지요? 


그런데 이 생각을 두 종류가, 첫째는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고?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인간들도. 그러니까 인간들부터 먼저 이야기 합시다. 인간들이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 잡기 위해서 인간들이 한 게 뭡니까? 이 질서를 잡기 위해서 근거를 준 것이 바로 모세 율법이고,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의 메시야의 나라다. 장차 메시야가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것이다.” 라고 나름대로의 무질서 가운데서 질서를 유발 했지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에 투하 됐습니까? 낙하산 타고 어디에 투하됐습니까? 무질서에 투하 된 거예요? 질서에 투하 된 거예요? 무질서에 오셔서 어두움에 속한, 갈릴리에 오셔서 어디로 진격했습니까? 네? 예루살렘 유다 지역으로 진격했지요? 그렇잖아요. 그렇게 진격할 때 예수님이 그냥 왔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통해서 왔습니까? 성령 받았지요? 성령이 무슨 관계냐 하면 아버지와 누구의 관계? 아들의 관계죠. 


모든 일점일획 모든 율법을 다 짊어지시고, 유다의 질서라고 우기는 그곳에 가셨잖아요. 동방박사가 처음에 들린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이지요. 예루살렘에 들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베들레헴에 갔잖아요. 이게 의도가 있어요. 바로 예루살렘으로 별이 인도하면 되는데, 한번 ‘통~’ 띄고 갔다 이 말이죠. 한번 거친 곳이 어디에요? 


만약에 한번 거치지 않았으면, 예수님하고 동방박사와 아주 조용히 만났어요. 분위기 좋았지요. 조용히 만나고 드릴 것 드리고 조용히 갔는데, 한번 별이 갑자기 끊어지고 예루살렘에 멈추고 베들레헴에 감으로 말미암아 누가 발작을 일으켰습니까? 예루살렘 총 비상계엄이 일어났지요? 


예루살렘은 나름대로의 질서에 잡힌 국가에요. 거기 왕이 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기에서 메시야가 태어난 장소를 누가 이야기 합니까? 그때 율법박사들이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유다 나라는 어떻게 실세를 잡았다? 하나님의 모세의 율법, 성경 말씀 가지고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메시야로 올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거지요? 


마치 요한계시록 보고 예수님 재림 준비하는 그 단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면 요한 계시록의 14만 됩니다. 하는 그 단체와 똑같은 거예요. 성경 말씀으로 완전히 포진을 한 거예요. 그런데 한번 ‘팡~’ 띄고 가버렸다. 가버렸으니 어떻게 됩니까? 베들레헴 애들 “두 살 아래로 다 죽여라.”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그 죽었던 애들을 대변해서 그것을 라헬, 라헬. 라헬은 누구의 본처냐 하면은, 야곱의 본처고 야곱은 이름이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에는 직접 못 다가가요. 한번 겉에 있는 이스라엘을 ‘붕~’ 띄고 난 뒤, 이스라엘을 가야 돼요. 그리고 그 가는 과정 속에서 두 살 아래의 애들은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선취에서, 미리 취해서 예수님 이름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될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욥기에 보면 욥이 고난 받았었지만 나중에 욥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놓치면 안돼요. 욥의 아들 10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욥은 죽을 뻔 했지만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욥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를 완전히 불쏘시개로 사용을 합니까? 자식 열 명. 자식 열 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벌려요. 중요한 포인트 하나 주기 위해서, 다른 것은 목숨도 파리 목숨도 아니라니까. 그냥 죽여요. 그냥 죽여요. 자식이 열 명 다 죽어버려요. 자식 열 명이 죽고 지는 복 받고, 보통 아버지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복하겠어요? 행복하겠습니까? “아이고, 아버지가 이렇게 복 받기 위해서 니들 열 명이 죽었구나.” 아마 매일 추석날 매일 찾아가서 음복 할걸? 술 뿌리고 음복 할걸? 반 총장처럼 고향에 가서 엎드려가지고 ‘아이고, 아이고’ 할걸요?  


성경 전체가 개인의 이익이라든지 개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책이 아니에요. 어떤 연극을 벌리는 거예요. 어떤 연극을 벌리는데, 그 연극이 뭐냐?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역할을 부여, 역할 부여 하는 거예요. 역할을.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개인구원은 없다는 거예요.  


개인 구원이라는 것은 아예 없어요. 개인 구원이 없는데 거기다가 “구원 받으시겠습니까? 실례지만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몇 년도에?” 개인 구원 자체가 없는데? 또 조직신학에서는 구원론이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구원 자체가 없는데 무슨 구원론이 있어요? 성경은 하나만 이야기해요.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물론 창조론도 없고요. 성경은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이지, 그 외에는 없어요. 심판론도 없고. “당신은 이렇게 하면 심판 받습니다.” 하는 것 자체가 뭐가 빠졌어요? 그 이야기가 뭐 빠진 게 있는데? “당신은 이렇게 했으니까 지옥 갑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복음의 내용이 빠진 채 겁주고 있는 거예요.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아, 그럼 어떡해?” 이렇게 되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심판주다.” 이거하고 “당신은 이렇게 하니까 지옥 갑니다.” 하고 이게 뉘앙스가 달라요. 뉘앙스가. “예수님은 이런 심판하실 분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할 때는, 지금 겁주는 게 아니고, 협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아, 예수님이 그만한 권한이 있구나!” 이것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럼, 나는요?”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예수님은 창세 전에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십니다.” 이렇게 아주 담백하게, 덤덤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듣고 교인이 “목사님! 그러면 저는 어떻게 돼요? 저는 만약에 창세 전에 사랑 못 받으면 저는 어떻게 돼요?” 목사는 지금 예수님을 증거 했는데 본인은 지금 본인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마귀가 주는 질서 속에는 개인적인 어떤 여망이나 희망 같은 게 집결화 되어서 유대인이 “질서를,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습니다. 지키려면 내가 롤 모델입니다.” 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자기가 지도자급으로 등장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어디에 투하했습니까? 결국 어디로 진격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 할 때가 언제입니까? 그게? 예수님이 죽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뭐냐? 성전 부정이었어요. 


유대인들도 침작해서 어지간하면 봐주려고 했다니까요. 어지간하면.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도저히 안 되겠다 하는 게 언제냐 하면은, 성전에서 횡포부릴 때. 그때 더는 못 참는다 해서 죽여 버린 겁니다. 예수님은 결국은 누구 손에 죽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 했습니까? 그들의 아비가? 악마잖아요. 악마. 


그러면 악마는, 악마의 일은 딱 나오잖아요. 악마의 일은 뭐하는 것이다? 뭐하는 것이다? 질서 잡는 모든 조직이, 질서 잡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모든 조직에, 가정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조용히 해! 손님 앞에서 떠들면 안 돼!” 이거 뭐하는 겁니까? 우리 가정에 폐쇄적 자기 조직을 엄마가 와서 사로잡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것을 용납 안 해 이런 거.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교단에서는 용납 안 해. 이런 게 다 뭐에요? 


무질서 가운데 질서 잡는 행위에요. 그러면 무질서라고 그냥 방치할까요? 애들 그냥 신발 아무데나 던지고, 밥 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집구석인지 이건 뭐 지옥인지 분간 안 되고, 쓰레기 가만히 놔두고 어떻게 할까요? 그것을 치워야 되지 않습니까? 정리정돈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밥 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파리 날라오고 이러면 되겠어요? 정리 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마귀한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안하고 싶어도, 이것이(종이컵) 엎어져있다. 엎어져있다. 나는 성질이 바로 세워야 돼요. 이게 보기 좋으니까. 이게 좋아요? 이게 좋습니까? 이게 좋단 말이죠. 좋으니까, 이 성질이 어디 가겠어요? 이 성질이 예수 믿고, 교회가고 어디 가서도 이 성질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보고 뭐하려고 합니까? 자기 마음을 질서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딱 정돈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답게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이게 타고난 본성인데 어떻게 합니까? 타고난 본성인데. 이것을 누가 말려요? 말릴 수가 없는데. 예수님 믿고 갈수록 더, 더 착하고 지금보다 더 착하고 5년 믿었으면 6년째 되면 더 착하고, 신년 설교에서 “여러분, 작년에도 착해서 복 받았으면, 이번에는 더욱 착해서, 착한 그만큼 보너스를 받아야죠.” 뭐 이런 식으로, 계속 쿠폰 이런 거, 쿠폰도 모아야죠. 


계속 착해지라고 하는 게, 이게 목사가 누구든지 그렇게 하잖아요. 올해는 뭐 개판으로 삽시다. 뭐 이런 설교는 뭐, 대구에 있는 어느 교회만 하지. 다른 교회는 있을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착해야 복을 달라고 해도 염치가 없지요. 기도 한번 해야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도 은근히 노릴 수가 있지. 개뿔 기도도 안 해놓고 응답 달라고 하는, 세상에 이런 낯 짝 두꺼운 게 어디 있어요. 헌금이라도 몇 프로 해놔야 “우리 애가 이번에 고3인데, 어떻게 점수 좋게..” 뭔가 요구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이제 예수님께서 1번 성부와 성자의 관계 1번 그 관계로만, 이 세상을 찾아오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이 악마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악마의 통치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왜? 스스로 의인이 되고 싶은 속성은, 이미 인간이 망가졌기 때문에 다른 속성은 우리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착하고, 그 다음에는 더 착하고 더 착해져서, 착한 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더 본받는다는 의식을 우리가 지울 수 없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구절들을 끄집어내라면 수두룩하게 끄집어내죠. “너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빛과 소금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라” 디도서에 나오지요? “참 백성이 되게 함이라. 선한 일을 하는 참 백성이 되게 하심이라(딛2:14)” 거기 있잖아요. 


또 요한복음 5장에 하나님께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자는 영생의 부활로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5:28-29).” 성경 구절을 뽑으라면 수두룩하게 뽑혀 나옵니다. 디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준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심이라” 나오지요? 그러면 그 대목을 딱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 예수 믿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선한 일을 하게 해서, 온 어두운 세상에다가 빛과 소금의 백성으로 살면 된다.’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누가요? 누가 그렇게 합니까? 누가? 내가? 내가 하는 순간 1번 2번 3번 다 날라 가버립니다. 그 순간. 선한 것의 구절을 어디서 뽑아 내냐 하면은 패널 속에서 패널. 아까 패널 이야기까지는 했습니까? 제가? 들었어요? 패널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패널 이야기. 못 들었지요. 다시 해야 돼. 


자, 1번이 뭐냐 하면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1번이죠. 1번이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1번 관계를 그대로 집어넣는다 했지요. 이게 2번이고, 그 다음에 제자들이 늙어 죽고 성경책만 썼으니까 나머지는 뭡니까? 성경보고 구원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3번은 제자 이후에 제자들과 백성들 사이에 3번. 1번의 관계를 그대로 세 번째 과정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1번 2번 3번 


1번 2번 3번 관계가, 수면에 자기 얼굴이 보이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대칭성’ 오늘 몇 번하는지 모르겠네. 댓 번 하는 것 같네. ‘대칭성’ 두 번째, 대칭성 말고 그 다음에 이야기 한 것이 패널 이야기에요. 패널. 패널은 뭐냐 하면은, 얇은 양철판에다가 안에 스티로폼 넣어서 집 짓는 것을 패널이죠? 패널. 패널이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주 되시니까 예수님의 세계와 그리고 이 세상. 이 세상 사이에, 제자들은 멀리서 보면 선(line)이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 패널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은 ‘의’고 자기는 무엇이고? ‘죄’고. 죄와 의 사이에서 예수님의 희생의 관계, 희생의 의미, 율법의 완성만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는 본격적으로, 이제 죄가 무엇이냐를 점점 더 알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에 도움 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사도 바울의 또는 사도들의 명령과 지시. 이런 것들이죠. 


“아내가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네? 그리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잘 들어 놓으세요. “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그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이유가, 어느 레벨에서 십자가를 졌나? 어느 레벨에서?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정도 되지 않으면 전부다 뭐다?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가 된다. 


그리고 어떤 누구한테 도와 줬는데, 마침 그 도와준 그 거처지에 오게 되면 사람들이 뭘 생각합니까? 내가 뭘 도와 줬다는 게 생각나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주일날 설교 했는데 무슨 순간이라 했던가요? 바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버리는 순간이 온 거에요. 그러면 도와줘놓고 뭐가 돼요? 도와 준 것 을 통해서 ‘내가 아, 죄인이구나!’를 깨닫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알아버렸어!’ 알아버렸단 말이죠. 


그리고 교인 한 10명 한 댓 명되는데, 어느 교회처럼 댓 명되는데, 그 중에 새로운 교인이 여기에 들어왔다 이 말이죠. 이명직 목사님 이야기한, 제가 소개한 이명직 목사 네, 네 나중에 인사 땡기세요. 새로운 교회에 들어왔다 이 말이죠. 들어왔는데 딱 보자마자 기준에 ‘아~ 굉장히 아무 준 것도 없는데 굉장히 밉다. 아니, 인상 보니 미워. 인상 보니 밉다.’ 


그러면 이것은 산상설교 어디에 어긋납니까? 그건 살인죄에 해당되는 살인죄에요. 그리고 어떤 할머니가 교회 왔는데, 할머니가 와서 “내가 소원이 있는데, 이것만 해주면 내 자녀를 신학교에 보내겠습니다.” 이렇게 무심코 냈는데 그것은 산상설교에 “맹세하지 말라”의 “맹세하지 말라”에 걸려들었어. “맹세하지 말라”에. 그리고 TV보다가 최순실 말 들어보니까 “남을 비판하지 말라”에 걸려들었어. 


전도 한답시고 막 복음 전했는데, 이게 안 먹히는 거야. 약이 올랐어. 그래서 억지로 하니깐 그것은 어디에 걸려들었나 하면은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는 말에 걸려들었어.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그 대목이 뭐냐 하면은 “성령을 주겠다”에요 성령을. 성령을 주겠다하는데 마치 그때 글자가 안보여서 성령을 못보고, 그냥 구하면 주실 줄 알고 이렇게 착각해서, 뭐든지 열심히 구하면 소원대로 될 줄 알고 했는데, 


나중에 누가복음 보니까,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했는데, 성령 안구하고 딴 거 다 구했어. 그러면 그것은 뭡니까? 자기 아쉬움을 통해서 드러난 새롭게, 새롭게 개발된, 오늘 제목 개발이라 해야겠다. ‘죄 개발’ 새롭게 개발된 죄를 발견하는 거죠. 이미, 그러면 그것은 뭡니까? 이미 개인 구원은 없어요. 왜? 구원이라 하는 것은 관계 속에 들어가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것을 무슨 관계냐? 언약의 관계라 합니다. 언약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관계를 예수님이 단독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그 다음에 뭘 주느냐?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뭘 주어야 됩니까? 


성령을 줘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 같이 보혜사가 오게 되면 너희도 나와 뭐가된다?”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 둘만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고 났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구원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때 그들은 이미, 그때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여기에 이 관계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의 말씀.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그들 속에 활동 했다 했습니다. 이미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이번에 수련회 했잖아요.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뭐만 남는다 했습니까? 


이미아씨 와야 아는데,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뭐만 남는다 했습니까? 성질과 성깔만 남지요. 성질과 성깔은 시간과 환경이기 때문에 무한 반복이 되지요. 무한 반복. 스톱이 되요. 아브라함 같으면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아브라함이 한 그 죄가, 그 죄인으로 스톱이 되면서, 그 엘리야와 모세가 했던 그것이 스톱이 됩니다. 


그러면 엘리야,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만약에 한자리에 만났다? 그러면 엘리야, 모세가 예수님한테 부탁할건 딱 하나밖에 없죠. 뭘 부탁해야 합니까? 엘리야와 모세하고 예수님 변화산에서 만났을 때 엘리야, 모세하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이 딱 하나밖에 없지요. 뭡니까? “예수님 언제 내 죄 때문에, 내 죄 해결해 주실 겁니까? 언제 나 때문에 별세하실 겁니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죠. 죽음에 대해서. 그게 구원이에요, 구원. 


구원은 우리가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아예 구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이 확정되고 난 뒤에 예수님 중심으로 주가 되시는 구원이기 때문에, 확정되고 난 뒤에 거기에 성령을 보내줘 버리면, 내가 내 구원을 기대했던, 사적인 개인적인 구원을 기대했던 이 자체가 바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마저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왔기 때문에. 


죄를 알고 착한 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죄를 안다는 자체가 1번 관계 안에 계속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패널 이에요. 죄. 예수님의 의 때문에 성령은 의를 계속 주게 되면, 우리는 계속 없던 죄까지 늘어나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성령이 역사하면 역사할수록 우리는 점 점 더 뭐가 됩니까? 죄가 되가는 거예요. 죄. 


죄가 더욱 더 많아지는 겁니다. 그러니 죄가 많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자기에 대해서,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까요? 안질까요? 질 필요가 없으니까. 이게 성령 안에서 자유 아닙니까? 자기가 막 모든, 하는 행위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책임지고 나선다면, 구원 받은 것은 그것은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왜?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일단 구원 챙기고 플러스, 책임지면 천당 보내주고, 제대로 못 지면 너는 지옥 보낸다. 아직 계속해서 여지가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구원 못 받은 정도가 아니고 갑자기 개인 구원 문제로 와 닿아요. 개인 구원 문제로. 


예수 믿었는데 또 착해야 되나? 어느 정도 착해야 되는데? 마태복음 5장까지는 너무 심하고, 그럼 다른 거 지킬 것 먼저 지키고, 그 다음에 나중에 나이 많아서 믿음이 좋다고 할 때, 그때 도전하느냐? 이런 문제에 해매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엉뚱한 나의 사적 구원의 그 영토 안에서 계속 헤매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있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 사고방식으로 모든 인간을 통제했고, 다스렸고 통치 한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하는 말이 “나처럼 돼봐라 나처럼!” 나처럼 되게 되면, 하나님이 잘 믿는 거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거꾸로 누구에게로 갔습니까? 세리와 창기한테 가버리지요. 하고 하신 말씀이 “이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갈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유대인 방법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아예 개요,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한테 가서 또 이방인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갔지요. 가면서 꼭 이야기 했어요.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몰랐다.” 또 바리새인들은 뭐냐?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했지요.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이 “이 죄인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순회 재판을 벌리는 겁니다. 순회 재판. 원래 재판장이 없을 때 돌아다니면서 판결 내리는 거 하면서 “이 세리가 의인이다. 이 세리가 의인이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예수님은 1번 아버지와 아들의 자기 관계만 고집하고, 일체 이 땅에 있는 인간의 어떤 인간의 관계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예, 10분 쉽시다.

 이명직 (IP:211.♡.99.42)17-01-21 13:23 
가락-요한복음13장13-14절(살고 보자)170117b-이 근호 목사 


자, 이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시간,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적으로 있던 개인의 시간이 날라 가 버리고 단체의, 다수의 시간에 종속됩니다. 다수의 시간에, 누가 전화 왔는데? 자, 개인이 있으면 개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 ‘시- 공간’을 의식하면서 거기서 자기를 느끼거든요. 


그런데 열두 제자 플러스(+) 예수님 이렇게 돼 버리면, 이 열두 제자와 예수님. 이 집단은 예수님의 시간관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개인적인 시공간은, 이것은 접어야 돼요. 일체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공간이라 하는 것은 뭔 뜻이겠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다시 말해서, 사적인 시간을 가지고 너희의 미래나 구원관에 대해서, 그것 가지고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지금은, 지금 구원 받았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내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이게 개인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그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올 때까지 저 사람을 살려둔다 할지라도, 너는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이렇게 돼요.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또 사적인 시간관을 가동시켜 버려요. “자, 구원 받았는데 5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데 예수님의 시공간에서는 이미 죽었어요. 


그게 로마서 6장 1절(부터)에 나오지요. 로마서 6장 1절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거기에 연합해서” 연합 했잖아요 연합. 누가 누구한테 연합합니까? 우리한테 예수님이 연합한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우리가 연합 된 거죠. 왜? 사건은, 언약 사건은 우리한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언약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왜냐하면 언약의, 유일하게 완성자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갔잖아요.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다 이루시고 ‘아버지~’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누가 누구한테 붙어야 됩니까? 내 것을 가지고 주님한테 붙어야 되죠. 주님이 나한테 붙으면 안 되잖아요. 누가 있을까? 주님이 나한테 붙으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적으로 성경, 설교를 듣고 지적으로 성경을 보니까 신학을 하다 보니까 특히 신학 교수도 하다 보니까 “자, 이렇게 구원 받는 수(數)가, 이렇게 쉽구나. 예수 믿으면 구원 받겠구나.” 이렇게 하고 난 뒤에, 전혀 자기의 시공간은 그대로에요. 그대로. “자, 나는 구원 받았는데 내 딸도 구원 시켜주면 고맙겠다. 우리 남편도 구원 받으면 좋겠다.” 자꾸 이게 비선실세처럼 자꾸 빽을 쓰려고 하는데 주님한테, “주님이여, 어떻게 해주세요.” 


천주교는 아주 노골적으로 마리아한테 빽을 쓰고요. 예수 엄마니까, 여전히 자기 시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 천주교 같은 경우에 어떻게 되냐 하면은, 만약에 지금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 친척이 자기 딸이, 아들이 만약에 예수를 안 믿는다 하면, 죽고 난 뒤에도 딸이 사고로 뭐 세월호에 빠져 죽든, 물에 빠져 죽으면, 엄마가 성당에 가서 미사 하면, 그것을 패자부활전 해서, 연옥 해서, 거기서 다시 한 번, 이미 탈락됐는데 시험, 자녀 된 사람들 시험지 문제 하나 더 내주는 거예요. 


그게 천주교 이야기인데, 이 천주교 이야기가 어디에 또 나오느냐 하면 바로, 7년 전 환난, 7년 후 환난의 이론에 그대로 나와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이게,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무엇도 모르고 까불다가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선배니까 옛날 선배니까 봐주자 해서 재림 이후에 한 번 더 시험문제를 내서, 그때는 그냥 예수 믿으라 하지 않아요. 


몽둥이 가지고 패서 “너 이래도, 이렇게 마귀한테 시달려도 이렇게 고난 받아도, 니가 예수 안 믿을래?” 하면 “믿을게요! 믿을게요!” 이렇게 강제로 다 믿게 해서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안 그래요? 요한계시록 보면 그렇게 설명 안합니까? 그런 설명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전부다 어디에 있습니까? 


“나 어떻게 돼요?” 개인 구원이죠. 개인 구원. “나 어떻게 돼요?” “이 멀쩡한 나, 그냥 버려두지 마옵소서!” 이거에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이게 종교. 그게 바로 종교에요. 기독교의 단어를 아무리 집어넣어도 그것은 종교고 종교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종교는 인간을 존중하지만, 복음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다.’고요. 


예수님이 그냥 낚싯대로 “너 올라와” 이러면 “주께서 저를 낚싯대로 건져 주세요”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떠날 때 어떻게 떠났습니까?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졌지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어디로 갔다? 다 제 갈 길로 갔잖아요. 아무도 자진해서 예수님 좋아라하고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본 모습이에요. 그게 본 모습이라고요.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찾아갈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나타나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물으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냥 “나사렛 예수다” 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에요. 그럼 예수님 믿을 때 사도바울은 뭘 믿어야 돼요? 거기다가 무슨 용어를 집어넣어야 돼요? 


“나를 인하여 핍박 받은 분” 또는 “내가 핍박했던 분으로서의 주님이 나를 구원 한 겁니다.” 그럼 나는, 구원 받았다는 나는 뭐가 돼요? 이제부터 뭘 알아야 됩니까? 도대체 내 속에 들어 있는 이 육적인 어떤 면면들이, 성경 말씀에 준해서 볼 때, 주님에게 핍박적인 요소로서 지금 죽을 때까지 발산되느냐? 그것을 마음껏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누구에게 영광이 됩니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내가 뭐 잘못됐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목회가 죄에요. 목회가. 설교한 게 죄고, 복음 전한 게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헌금한 게 죄, 십일조 한 게 죄고 십일조 빼먹은 것도 죄고 한 것도 죄고, 기도한 게 죄고 안한 게 죄고, 선교사로 간 게 죄고 안간 게 죄고, 촛불 집회 한 게 죄고 참석 안한 것도 죄고.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이야기입니까?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서 “그래 나 죄인이다. ‘죄’다!” 세상에 이런 배포가, 이게 하늘이 주신 축복이 아니면, 세상에 어디서 그런 축복을 받습니까? 이걸 참, 말로 다 설명할 길이 없네. 진짜 좋은데, 참 남들한테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러다가 또 욕 얻어먹고, 가짜 가지고 와서. 그럼 제자들은 이런 말을 할 때 “이제 주님과 우리는 하나라고 했다고” 이렇게 착각을 한 거예요. 


“이야~ 우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따라가길 잘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랬잖아요.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갔나이다.” 특별대우 해달라는 이야기에요. 참, 참 이게 철이 없는 건지?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주님하고 자기하고 지금 하나인줄 알고 있어요. 지금 뭐, 아까 성부하고 성자 사이의 관계 1번이라 했지요? 1번은 어디서 완성됩니까? 십자가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 시점에 1번이 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지요? 왜? 십자가를 안 졌으니까! 십자가를 안 졌으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뭐를 겁냈어요? 그 당시 유대인의 권력, 유대인의 권세를 겁낸 거예요. 그 당시의 경찰이 겁난 거예요. 경찰이. “저 사람 저주 한다. 이제 예수라는 사람 저주 한다.” 이 말을 왜 했습니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 빼놓고, 모든 이것이, 지금도 우리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한마디로 말해서 ‘살고 싶다’ 오늘 제목이다. 잘 나왔다. 왜 기도와 헌금이, 전부 선교사 이 모든 것이 왜? 주 앞에 죄가 되냐 하면은, 그 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존재의 그 바닥에는, 아랫목에는, 살고 싶은 거예요. 


이왕 사는 거, 근사하고 살고 싶어. 근사하게, 교양 있게, 멋있게. 주님 보시기에 안 부끄러울 정도로. 로마서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중간에 매개물이 있어요. 중간 매개체가 있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수치를 안 당한 거예요. “십자가 걷어치우고 나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말씀 한번 지켜볼까? 뭐 전에는 성령 못 받아서 못 지켰는데 이제는 이 말씀을 슬슬 지킬 수 있겠어. 한번 지켜보자.” 이게 지켜 질 수가 있습니까? 


감독들에게 하신 말씀 한번 지켜볼래요? 집사는 이래야 된다 한번 지켜 볼랍니까? “차라리 안 믿으면 낫지 못 지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도권이 개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옵니다. 단체로. 단체로 와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관성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늘 이렇게 주께 지시를 받은 것은, 주님의 1번 관계, 성부 성자 관계가, 그 관계가 제자와 베드로와 사도 요한 관계로서 계속해서 확산되고 확대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함이, 주 안에서.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번역하면 “나도 말씀 보니까 나도 못난 인간이고,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니까, 우리 둘 다 주님만 바라보자!” 이래서 그게 1번 관계, 성부 성자 관계가 언약 관계가 그대로 엮어지는 겁니다. 


“너는 창세기 다섯 장, 성경 몇 장 읽었어? 석장 읽었어? 두 장 읽었어? 내가 더 낫다.” 이런 관계가 아니에요. “너는 올해 몇 명 전도했어? 다섯 명? 난 두 명”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헌금 얼마 하는데? 교회 어렵다 하는데 밥값도 안 나와. 천 원 해서 점심 값도 안 되겠다. 이거하고 나는 이백 만원” 이런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에요. 서열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남 비교하는 재미로 살거든요. 그 재미가 있는 거 알아요. 그리고 이것은 죽을 때까지 안 없어지는 것도 우리가 인정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할 것은 이것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왜? 우리는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옳지 않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어요. 항상 주님은 항상 옳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힘으로 옳지 않은 것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제거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옳기 때문에. 


내가 단독적으로, 독자적으로 옳기 때문에 이러면 안돼요. 이러면 우리는 자기가,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됩니다. 예수 믿는 나를, 나를 믿게 되요. 예수 믿는 ‘나’가 멋있어서 내가 나를 나 앞에 경배하게 됩니다. 안 그럴 줄 압니까? 보세요. 얼마나 소위 교회라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경배하고 있는지. 


이번 수련회 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수련회를 참석한 사람은 압니다. 10m와 3m, 이거 들어봤어요? 아직까지 안 들어봤어요? 10m에서 볼 때는 분명히 성도 같은데, 3m에서 보니까 10m에서 성도로 보이게끔 3m에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조작이라 해요. 조작. 가짜에요. 남들 보이라고, 주님은 관계없고, 주님은 뭐 관계없고. 남들에게 신자로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그래서 여기에 뭐 목사님의 사모도 계시지만, 목사의 사모 치고 정신병자 아니면 이거는 큰 기적을 받은 거예요. 목사의 사모는 일단 믿음이 없어요. 두 번째로는 복음도 몰라요. 그런데 전부다 “이야~ 목사님, 저렇게 훌륭한 목사의 사모는 얼마나 훌륭하겠나?” “미쳤나? 훌륭하게? 안 훌륭해!” 그래도 훌륭한 채 해야 돼. 10m에서는. 정신병 돼. 정신병. 그것도 한해 두해지, 계속 가게 되면 정신병이 점점 더 도집니다. 


최순실이 따로 없어요. 진짜 머리가 깨질 거예요. 거기다가 자식까지 어긋나 보세요. 그러면 자식까지 수습한다고, 이중, 삼중으로 위선자가 되는 거예요. 누구 좋다고 사모했는지 알 수가? 그러니까 사모의 철칙은 뭐냐? 사모는 꼭 직업을 가져라. 교회가 죽이 되 든, 밥이 되는 나는 모르겠고, 다 잊어버리고 밖에 나가 일만하고, 집에 오면 따뜻한 목사님이 밥 해 놓고, 설거지 다하고 나면 잠만 디비 자고, 아침에 또 출근하고, 그것만 하세요. 


딴 것은 아무것도 하지마라. 그게 사는 길이지. 그게 숨 쉬고 사는 길이에요 숨쉬고. 작은 교회 목사는 미치지요. 작은 교회 목사는 약간 덜 미치지만 큰 교회 목사 사모는, 작은 교회 사모도 약간 정신이 혼란스럽지만, 큰 교회 목사는 완전히 마귀입니다. 완전 마귀, 마귀에요. 이게 마귀든지 죽든지. 아프거나 죽거나 라는 말이 있잖아요. 둘 다 최악이에요. 


그래서 제가 서경수 사모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그것을 가지고 교회 깡패라 해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다 해야 돼요. 그게 정신 차리는 거예요. 일체 사모 티를 내면 안돼요. 그 교회에서 제일 불신자 티를 내시면 그게 사는 길이에요. 불신자 티, 그게 사는 길이에요. 이번 수련회 아홉 번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부부는 서로 약간은 나빠야 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아홉 번째 강의 제목이 그거에요. ‘죄인 유지’ 죄인으로 유지해야 돼요. 그게 성도의 길입니다. 죄인으로 유지해야 돼요. 자, 그다음에 어려운 문제가 뭐냐 하면은, 그러면 개인은 없고 열두 집단이라면, 주께서 열두 집단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18절에 나옵니다.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너희죠? 너희. 2인칭 복수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대상으로 지칭됩니다. 문맥이 같은 문맥이니까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내게 뭘 든다?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것은 하나의 연극이에요. 성경에 미리 예언된 역할을 주께서 할당을 하는 겁니다. 너는 이런 역할, 너는 저런 역할 하라는 거예요.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없고, 할당 받은 거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수련회 때 뭘 말했던 가요? 담요 이야기를 했지요? 담요. 여덟 번째 강의인지, 담요 이야기 했잖아요. 자리 이야기 했지요. 담요. 


어릴 때 고모들이 TV보면서 자기만 추우니깐 자기만 달랑 덮기 위해서 담요를 가지고 와서 자기만 덮어요. 담요는 한 장이에요. 담요는 동일한 담요가 한 장인데, 고모 세 명이 딱 앉아서 TV 보는 거예요. 여기에 삼촌과 조카는 서늘한 냉방에 그냥 놔두고, 자기가 담요 가지고 왔다고. 어렸을 때니까, 어렸을 때는 다 이랬다. 한 담요에 한 위상, 한 자리를 공유하게 된 겁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고 한 구원에, 한 관계에, 한 1번 관계에 성부, 성자 관계에 다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담요의 사적인 영역을 장악하지 마세요. 이것은 내 나와바리라고 이렇게 가위 가지고 오리지 마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그리스도 안에 부부는 어떻게 사나? 주 안에서 부부에요. 주 안에서. 


그래서 “나는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교회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했지요” 에베소서 5장에. 주 안에서. 그리고 부모 자식도 주 안이에요. 주 안에. 한 담요에 다 같이 죄인인데, 예수님 덕분에 구원 받은 정도가 아니고 역할을 받은 거예요. “난 아빠 역할 너는 자식  역할, 당신은 남편역할 나는 아내 역할” 역할을 받은 거예요. 역할을, 기능을. 어떤 기능? 


“너는 네 자리에서 죄를 드러내고, 나는 내 자리에서 죄를 드러내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죄를 드러내고, 엘리야는 엘리야의 죄를 드러내고, 베드로는 베드로의 죄를 드러내고, 사도 요한은 사도 요한의 죄를 드러내고. 이렇게 사는 게 참 쉽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정답인데, 실제 살게 되면, 이게 단체가 아니고 항상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을 때까지 개인이 나와요. 


이것을 가지고 주체성이다. 또는 자아성이다 라고 합니다. 주체성은 자기중심이다 이 말이죠. “나는 이렇게 구원 받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이렇게 했다.”고 하는 거. 조직신학은 거기에 맞춰서 조직신학이 막 퍼부어집니다. 구원의 서정 이런 거. 전부다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앞에 뭐가 들어가 있습니까? 앞에 개인 구원이 다 포진되어서 그런 거예요. 신학교 때 많이 배웠지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지금 요한복음 13장에 가룟 유다의 마귀 이야기. 성경이 응해서 발꿈치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개인 구원 같으면, 우리는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마귀의, 지옥 갈 사람의 이야기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매직으로 무엇을 지우느냐 하면은 가룟 유다 이야기는 지워도 무방해요 


왜? 내 이야기가 아니니까. 저한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이제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이제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그 구절을 매직 갖고 와서 지워버리지 왜? 이것은 땠고, 그 다음 또 지키면 그것도 지워도 괜찮아. 


왜? 이미 자기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못 지킨 건 남고, 지킨 것은 다 지워버리지. 그러면 그 말씀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네가 돌아서면 맨날 거기가 되는 거예요. 5천원, 6천원. 길에 5천원 떨어졌는데 나는 그것을 주인 갖다 주고 오면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갑자기 로또에 맞아가지고 큰 돈 들어왔을 때, 1번 기분 더러웠다. 2번 기분 좋았다. 몇 번 입니까? 


분명히 기분 좋잖아요? 그럼 기분 좋으면 시편 4편 7절에 어긋난다고요. 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포도주와 곡식이 넘치는 것 보다 더 크다고 했거든요. 40억이 내 마음에 들어온 기쁨보다, 나는 있는 40억 날라 가도 주의 구원이 더 기쁩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그거 되고 싶지요? 하고 싶은데, 막상 40억이 없는 채로 되겠다하는 것과 막상 들어왔는데 불나서 다 날린 거 하고 기분이 달라요. 영 달라요.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것보다 구원이 기쁘다 하는 것을 이론상 아는데, 막상 소 키우는 사람이 병들어서 외양간 소 다 죽이고 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 소가 내 소가 아니고 주의 소였다 하는, 그런 것을 하려면 반드시 십자가에 경유해야 돼요 


자, 그러면 가룟 유다 이야기는 나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정답에서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이겁니다. 이유 없는 폭력이 와요. 우리한테, 우리 인생에. 이게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이것을 알아요. 


‘이유 없는 폭력’ 아까 제목을 또 뭐라고 했나? ‘살고 보자’ 이게 ‘살고 보자’ 보다 더 나은 것 같다. 이걸로 할래. 이유 없는 폭력입니다. 우리가, 내가 뭔가 헌금을 해야 되는데 헌금을 빼 먹는 다는지, 예배시간을 늦게 갔다든지, 그래서 내가 이번 주에 뭐 하는 일이 꼬이고, 문제가 되면 그것은 이유가 있잖아요. 내가 스스로 “내가 정신을 차려야겠다. 아직 멀었어. 난 멀었어. 주님 사랑해야지. 이러면 안 돼. 내가 왜 세상 눈치를 봐.” 뭔가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이게 얻어맞아도 당황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것은, 이유가 없다니까요. 교회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박아서 허리뼈가 나간다. 그것도 새벽기도 가는데. 옛날에 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복음 전하는데 몸에 가시가 있다. 세 번이나 빼달라는데 끄덕도 없다. 이유 없이 가시가 들어온, 사도 바울에게 가시가 들어 온 거예요. 이유 없이. 그리고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어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만약에 그것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뭐라 했나? “주께서는 큰돈은 안 보내줘도 일용할 양식은 주겠지?” 하거든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세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데 굶었어요? 안 굶었어요? 굶었지요? 뭐 사도 바울도, 주기도문도 안하죠? 일용할 양식도 안줘요. 일용할 양식도. 


그리고 터키 전도할 때 맞아 죽었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죽인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질질 끌어가서 성 밖에 내놨는데 안 죽고 살아나왔다고요. 도적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네? 이 무슨 이런 폭력이 다 있습니까? 내가 잘못해서 이러하게 되면 “내 쪽에서 정신을 차려야 돼! 


그래, 주께서 깨닫게 해 주셨어.” 뭐 있는데 아무 이유가 없다니까. 그리고 이유를 캐내려 해도 이유를 캐낼 수 없어요. 이런 답답할 수가 있습니까? 개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 왔을 때, 뭐냐 이 말입니다. 그 경우가 구약에 나옵니다. 그게 바로 욥입니다. 그게 바로 욥이에요. 욥은 끝까지 자기의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너는 몰라도 돼! 너는 몰라야 돼. 네가 사적 구원, 개인적 구원에 네가 집착한다면 너는 아직도 멀었어.” 이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냥 활용 한 거, 역할을 맡긴 건데 역할 맡긴 것을, 역할 맡기는 원인은 주님한테 있는데 우리는 어떤 내가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은 내가 이렇게 얻어맞을 이유가 있어서 얻어맞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바친다든지 갑자기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든지 안 그러면 선서해서 선교사로 자처해서 나간다든지 교회 청소를 자기 열심히 자기가 알아서 한다든지, 예를 들어서 운전할 때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분명히 했어요. 했는데, 앞 차는 봐주고 내 차는 걸려서 5만원 끊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또 운전할 때 “주여, 그때 내가 너무 형식으로 너무 건성으로 해서 미안합니다. 이제부터 진지하게 주여, 이제 걸리든 안 걸리든 주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제 걸려도 좋습니다.” 했는데 또 걸렸어. 분명히 걸려도 좋습니다. 했는데 걸렸다고. 좀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내가 걸리겠습니다. 라고 


이 정도 양보를 했으면 “그래, 아이고 착하구나. 내가! 네가, 네가 너무나 마음 씀씀이가 하도 고와서, 그래! 이번에는 빼줄게! 과속에서!” 뭐 이렇게 돼야 이렇게 주고받는, 하청업자가 뭔가, 뭔가 주고받는 그러한 재미가 나는데, 이거는 또 걸린 게 아니고, 이번에는 걸리고 그 다음에 빵꾸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Kris Kristofferson 이 불렀던 노래 Why me Lord 주여, 왜 하필이면 나에게? 목소리 쫙 깔아놓고 부르는 노래 있거든요. Why me Lord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있어요.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러면 여기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너는 왜 안 되는데? 그러한 불상사에서 왜 너를 빼달라고 하는지 너, 근거를 대봐라. 너, 무슨 권리로 빼달라고 하느냐?” 


“왜 남들처럼?” “남들도 고생 많이 하고 있어 남들 하지 마!” “왜 남들 가정처럼?” “남들 가정 지금 지옥이야. 너는 지금 멀리서 10m에서 보니까 행복해 보여. 그 집에서 한번 깊숙이 살아봐라.” “아이고 댁의 남편은 착하고” “니 그러면 한번 살아볼래? 우리 남편 착한지? 나라서, 나라서 이렇게 살아주지.” 이유 없는 고난이 들어 닥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 해도 개인 구원의 요소를 본인이 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것은 내가 죄인, 저주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 라고 하지만 “헤헤헤, 항상 나는 구원 받았지롱”이 항상 담겨 있어요. 주님께 “무조건 은혜로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만 “역시, 나는 구원 받았어!” 


이게 항상 자기 구원이 항상 있어요. 그리고 항상 있다는 말은, 그 다음에 항상 뭘 본다? 내가 구원 받은 그 증거물을 수집하는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깐 내 기도는 응답이 되고, 그러니깐 내 헌신을 주께서 감동을 하지. 나 때문에 네가 구원 받았어.” 이런 식으로 자기한테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계속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환난이 왔을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그 원인과 결과에, 그 더러운 버릇은 그때부터 일시적으로 그게 파괴가 돼버립니다. 이게 이론상 내 구원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구원 받았다 이론은 멋들어져요. 뭐 맨날 들은 소리니까. 하는데 이게 진정성 있게 실감이 나려면, 실감 나려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면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겁나야 돼요. 


갑자기 저 3층에서 누가 목수 일 하다가 망치가 떨어져도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하필 타이밍이. 올 때, 기도 좀 짧게 했으면 그 타이밍을 빗겨 갈 수 있는데 괜히 그 타이밍에 와서, 1초만 해도 피할 수 있는데 딱, 그 타이밍이 망치 맞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망치 맞고 난 뒤에 Why me Lord 이렇게 “주여, 왜 하필이면 나..” 나라는 말을 못하지요? 왜? 


저번에 써먹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 소리를 한다고 해서 안 맞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에이~ 나 몰라. 나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막 살 거야 정말 이제, 막 살아도 얻어맞고 안 막살아도 얻어맞는데 난 못하겠어! 난 못하겠어!” 라고 큰 소리 치지만 “그래도 행동은 조심히 해야 돼. 지켜보고 계시니까!” 또 인간에게 돌아온다고요. 뭘 놓친 거예요? 


계속해서 개인 구원으로 와버리면 나라는, 내가 역시 구원 받을 만해서 구원 받았다는 속에, 뭐가? 무슨 요소가 누락 돼버립니까? 답변 또, 한번 히트치지요? 답변해서. 가룟 유다의 요소가 빠져버려요. 가룟 유다의 요소가. 가룟 유다의 요소를 우리가 매직으로 지우면 안돼요.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식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이렇게 사랑해줘도 배반해.” 이게 남 이야기 하듯이 하면 안돼요. 가룟 유다도 열두 제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 포함해서 1번이 뭐가 돼요? 1번이 2번이 되는 거예요. 가룟 유다 요소가. 그럼 2번이, 사도 죽고 난 뒤에 성경 가지고 그 다음에 어디로 옵니까? 3번으로 우리한테 오지요? 


“다 이루었다” 속에 있죠? “다 이루었다” 속에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가룟 유다의 배신이 포함된 내용을 가지고 “다 이루었다”를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가룟 유다는 남의 이야기로 제쳐 버리고, 가룟 유다 빼고 괜찮은 열한 제자와 전승과 그들의 약간 실수지만 그 다음에 예수님과 그것이 우리의 관계로 들어오기를 원해요. 


그리고 바리새인 이야기를 하면 남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이 바리새인 나쁜 사람들,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느냐” 하지만, 바리새인 요소가 빠져버리면 우리는 정말 진정 구원 받았는지 의심해야 됩니다. “너희 중에 바리새인 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그러면 그 말씀이 나한테, 내안에 장착 되어서 유효하려면, 마태복음 5장 내용이 유효하려면, 우리가 계속해서 어떤 점이 바리새인 같은 요소인 것을 매일 삶 속에서 그게 나와야 돼요? 안 나와야 돼요? 나와야 되죠. 나오니까, 그게 뭐가 됩니까? 죄가 되죠? 그게 패널 이에요. 패널. 팬넬 경상도 영어로 팬넬, 그 패널 이라니까요. 


여러분, 만약에 우리 목사님께서 만약에 사도 바울이라 합시다. 사도 바울이라 하는데, 우리한테 복음을 전한다 합시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어찌 너희를 꾀더냐?” 하면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이야기 쭉 하거든요.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막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예수님 믿게 됐다. 이렇게 배설물로 여겼다.” 이렇게 하실 때, 듣는 사람이 그 사도 바울의 말을 듣겠어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것을 보겠습니까? 


듣는 사람이? 아울러 다 보겠지요? “저 사람이 도대체 어느 학교 나왔는데? 저, 언제 공부를 저렇게 했지? 저, 부모님은 뭐하시고? 결혼은 했나?” 뭐 이런 거. “자녀는 몇 명이지? 저 사람 성격은 어떻지? 얼굴은 왜 또 저렇게 생겼어? 말하는 건 힘이 있는데 얼굴 생김새는 영 아니고” 뭐 이런 거 나오지요? 성경에.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사적인 관심사가 나올 때, 사도 바울이 사람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죽였습니까? 안 죽였습니까? 사도 바울이. 엄청 죽였지요? 왜 죽였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그러면 사도 바울이 자기 딴에는 복음 안다고 할 때, 자기는 사람을 그렇게 죽여 놓고, 이게 그 죽은 사람에게 일일이 가서 “제가 그때 몰라서 죽였습니다.”고 일일이 사과 했어요? 안했어요? 


사과 왜 합니까? 아까 뭐라 했지요? 책임지지 말라고 했지요? 뻔뻔스럽잖아요. 뻔뻔스럽죠?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 영화잖아요. 밀양에서 피아노 치는 애를 유괴해서 죽여 놓고, 뒤늦게 그 여자가 미친 듯이 기도하면서 은혜 받았다고 자청 10m에서 은혜 받아놓고 교도소에 가서 전도 하니까, 그 전도 받는 사람이 “아줌마, 제가 먼저 예수 믿었는데요?” 


이렇게 하니까 애 죽인 복수를 “니 지옥 가는데 내가 너를 구원해줬다”로 그것을 스스로 자기한테 보상을 하려 했는데, 그 자기 애를 유괴해 죽인 그 범인이 먼저 하는 말이 “아줌마, 나 벌써 예수 믿었어요. 복음 받았어요.” 이렇게 하니까, 여자가 아주 돌아버리는 거예요. 복수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거예요. 자기 계획대로 안 된 거예요. 


그래서 김추자 노래판을 틀어놓잖아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그 노래를 틀어놓는다고요.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게 뭐부터 출발했습니까? 내 구원부터 출발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모든 교인들이 대부분의 교인이 뭐냐? 자기 구원 받으려고 교회 가는 거예요. 전도연하고 똑같아. 전도연. 네? 


목사는 지 교회 잘되려고, 잘되기 위해서 성경 설교하는 거예요. 이 전도연하고 똑같은 거예요. 결국. 만일 자기 교회 목회하는데, 부목사가 들어왔어. 설교를 너무 잘해. 어떻게 합니까? 당회장이 그때는 조용히 부르지도 않아요. 종용히 불러요. 칭찬을 넋 놓고 해요. “너 참 신학교에서 열심히 잘 배웠다. 그런데 장로들이 안 좋아한다.” 


예수를, 복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이거는 내 나와바리라는, 내 나와바리. 네? 조폭이 내 영토에요. 개가 오줌 싼 곳이에요 이게. 전봇대. “내 나와바리에 왜? 내 나와바리에 왜 들어와? 내 나와바리에” 너는 네 밥벌이 하고, 나는 내 밥벌이 하자는 거예요. 그동안 수천 번 설교해도 그것을, 그 내막은 “살고 싶다”를 빙빙 돌려서 이야기 한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이것을 만약 목사, 당회장 목사한테 이야기 하면 “그래, 나 죄인이다.” 하고 “뭐, 뭐 나도 뭐 내가 예수가? 네 말이 맞지만 뭐, 안 그런 목사 어디에 있나?” 이렇게 나오죠?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하는 그 부목사를 용서하지 않고 짓밟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게요? 오늘 마지막 문제, 누군지 압니까? 아, 이거 맞추면 뭐 주고 싶다. 


“이게 어디서?”하면서 대드는 사람이 있는데 세 자입니다. 세 자. 끝에 ‘님’자 붙어있고. 누굽니까? 네, 누구에요? ‘사모님’ 네, 사모님은 복음이고 뭐고 없어요. 내 남편 왜 건드리나? 내 남편. 자기 남편을 주 안에서 섬기는 게 아니에요. 자기 남편 어려우면 자기 자식을 못 키웁니다. 아이들을 못 키워요. 


그러니 아까 했잖아요. 교회에서, 교회라는 것은 죄인들의 연필심 같은 필통이라 했지요? 이번 수련회 때. 뾰쪽뾰쪽한 사람들. 단일 면적당 에너지를 많이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이 끝은 아주 강렬하게 뾰쪽해집니다. 물리학에서. 이게 면적이 좁을수록 잘 뚫고나가요. 뭉뚝뭉뚝하면 안 되고 압력이 그만큼 세지니까. 교인들은 심 같아. 


“아이고, 목사님 복음 좋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새로운 자매가 와서 “아 목사님 설교 너무 잘해. 목사님 같은 주의 종 없어요.”하다가 나중에 온 일주일 뒤에 온 자매보고 “아이고, 너 머리 이쁘게 나왔다.” 그 소리 했다고 삐져서 교회 안 나와. 특히 젊은 애들이 교회 안 나올 때는 삼각관계, 연애할 때. 10m에서 신앙인 척 해줘야 3m에서 신앙 좋다고 믿음 있다 하는, 그 연애관계, 이런 것도 문제야.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 왔을 때는, 자기 자식 건드리면, 아까 나왔잖아요. 내 자식 때렸다고, 누가 때렸다고 하더라? 누가 이야기 했는데, 내 자식 패가지고 뭐? 누구한테 들었는데? 몇 시간 전에 들었는데? 이야기 안했나? 못 참았다. 이야기 했잖아요? 목사가 내 자식 때려가지고 나 보는데 때려가지고, 누가 이야기 안 들었어요? 어떤 정답이 안 나와요. 시치미가. 3m에서 그만 덮어놔 버렸나? 


가룟 유다의 요소가 그때, 아~ 이게 바로 가룟 유다가 내 안에 이게 잠복되어 있던 거예요. 이것을 들추어 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인간을 주께서 십자가로 피 흘려줬으니까, 뭐 갖다 버릴 목숨이라도, 갖다 버릴 목숨을 주께서는 대신 그것을 처리해주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으로 해주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감사도 몇 초 가지도 않지만, 한 몇 분도 가지 않아요. 어쨌든 간에 그 몇 초 가든 안 가든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서는 뭐가 있다? 시간의 진척 이런 게 언제라는 게 없어요. 어떤 성질과 성격이, 인간이 예상 못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던 놀라운, 어떤 번쩍이는 번갯불 같은 그런 요소가 들어있으면 주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 성령이 있기 때문에. 성령 아니면 이런 일이 없어요. “내가 가룟 유다, 바로 내가 가룟 유다입니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죽어 주셨다니.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거예요. 일루리곤에 가서 나중에, 사울 되었을 때 그때 내가 예수님을 몰라서 댁의 아들을 물에 빠져 죽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지금까지 나 된 것은 뭐다? 내가 한 모든 짓이 무슨 짓이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라 했어요. 이 뻔뻔스러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왜 모르냐 하면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교인들하고 비교해서 그래요. 말씀, 복음 앞에서 비교해야 될 텐데, 이 성경 말씀과 비교하는 게 아니고 남하고 비교해 놓고, 그 다음에 성경 말씀 중에서 괜찮은 거 뽑아가지고 자기가 그걸 실천에 옮김으로서 더 실력 있는 신앙인으로 장착하는 거예요. 


“너 어느 정도 거룩해? 어느 정도 거룩 하라는 말씀대로 너 얼마나 순종했어?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더 본받았어? 에베소서 5장에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 했는데, 네가 지금 어둠에 속하지 않고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으라고 했는데, 너 얼마나 살았어? 주께서 용서했으니 서로 용서하라고 했는데 얼마나 용서했어?” 


남하고 비교하기 시작해요. 남하고. 그렇게 돼버리면, 그것은 점점 더 연필심이 돼버립니다. 연필심이 되면 될수록 그 다음부터는, 목사가 그 사람한테는 대하기가 힘들어져요. 삐딱하게 잘못 오해해버리면 “내가 이 교회에 갖다 부운 돈이 얼만데, 나보다도 얼마 안 바친 저 사람을 해?”이러면 교회가 드디어 분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권사 투표 뭐 장로 투표하면 우르르 나가잖아요. 자기들 계 떨어졌다고. 촌에, 촌에 그런 게 많아요. 


네, 그 다음에 봅시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는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내 떡을 먹는 자”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면 이게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 시편에 나오는 시편이 22편인가 뭐 하여튼 나오거든요. 이게 시편 이야기인데, 이 “내 떡을 먹는 자”라는 말은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다윗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뭐하는 사람이죠? 간음했고 또 뭐했습니까? 살인했지요? 그것도 비겁하게 했지요? 비겁하게. 자기가 죽여 놓고, 사주해 놓고,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자기가 해놓고. 그건 최순실이 다했다. 이런 식. 미루는 것처럼. 아주 비겁한 거예요. 그런데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윗의 자손에서 뭐가 나와요? 메시야가 나오지요? 죄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죄 속에서만 의가 나오고, 죄 속에서만 영생이 나오고, 죄 속에서만 구원이 나와요. 그래서 구원이 나오는, 구원이 나온다. 주님이 증언했다는 말은, 그 순간에는 나는 졸지에, 순간적으로 뭐가 됐다? 다윗 같이 그런 더러운 인간이 되었다는 것. 그 순간. 


나를 더러운 인간 만들어놓고, 개 같은 인간 만들어놓고 주님 홀로 의인이 돼버리는, 의인이 되는 하나의 세팅이 돼. 세팅. 세트가 돼요. 그게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십자가만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우리의 행함은 모든 것은 죄로 만들어놓고 그리스도만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하는데 여기서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이게 참 어려워요. 전에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카드 10장 가지고, 카드 10장과 책상 위에서 약간의 피라미드를 놓는다 합시다. 그러면 카드 10장과 밑에는 몇 장이냐 하면, 4장을 놓아요. 4장을. 4장을 이렇게 세워요. 그다음에 3장을 이렇게 세우지요. 


3장을 이렇게 세우고 그다음에 2장, 2장 세우고 그 다음에 1장. 책상 위에 10장 맞지요? 자, 뭐를 빼면 되겠어요? 뭐를 빼면 와르르 무너지겠습니까? 뭐 하나, 아무거나 빼도 바로 무너지겠지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 카드를, 패를 여기서 빼 버린 거예요. 빼버리면 우리 같으면 12명이잖아요. 그러면 한명 제끼고 뭐하면 됩니까? 


11명 가지고 하면 되는데, 주께서는 이 가룟 유다를 뺌으로써 이 제자 공동체가 와르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목자를 치니, 목자를 누가 쳤습니까? 가룟 유다가 배신해서 목자를 치게 하니, 나머지 열한 제자가 와르르 걸음아 나 살리라고 다 도망갔죠? 제자들만 도망간 게 아니에요. 마가라는 자는 벌거벗고 도망갔다고 되어 있어요. 


벌거벗고. 얼마나 급했던지, 그러면 그들에게 평소에 열두 제자의 결속력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열둘이 아니고 각각 “나만 잘하면 되지, 나만 잘하면 되지!” 사적 구원, 사적 욕망에 의해서 예수님을 개인적 자격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터 보려고 했던 자들이 열두 명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은 같은 사람이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개인이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으면 “나만 구원 받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옆구리에 난데없는 뭐가 들어오느냐? 훅이 들어와요. 어퍼컷과 훅이 들어옵니다. 훅이 확 들어오거든요. 누가 보냈느냐 주께서 보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유를 모르니까, 이유가 없으면 뭐도 없다? 대책도 없어요. 


뭐 십일조 떼먹었다는 지, 뭐 게을리 했으면 그 다음에 그것을 보충하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 이유가 없어요. 욥하고 똑같아요. 아무 Why me Lord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완전히 개망신 당하는 거. 개망신. 네? 그냥 개망신 당한 거예요. 성격이 못 되서도 아니고 딱 타이밍이, 이상하게 타이밍이 아다리가 딱, 딱 다가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인생 가운데서, ‘내가 저 남편 말고 다른 남편 만났으면 이러지는 않았다.’하는 생각 안 들던가요? ‘내가 저 여자 아니고 다른 여자 만나면 이러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 안 들던 가요? ‘내가 하필 다른 교회도 있는데, 왜 하필 거기 왔을까?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런, 이게 부정적으로 후회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 순간 나는 사적으로 주님과 일대일로 구원 받겠다는 의도로, 주님을 그런 식으로, 내가 주님을 새롭게 구상 한 거예요. 


가짜 주님을 그렇게 구상 한 거예요. 그럼 뭐냐? 이 세상의 모든 깡패가 나의 옆구리를 친다 할지라도 “주께서 보내셔서 쳤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북한, 북한에 있는 사람이 한국에 신앙 좋다고 온다고요? 돈 보고 오는 거예요. 북한이라는 환경은 신앙생활하기 멋져요. 네, 일찍 죽을 수가 있기 때문에. ‘와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북한 신앙생활 못하고 온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남한 자본주의가 이야기하는 교회 생활이, 가만히 보니까 돈도 되지, 교회도 즐겁게 찬양도 하지, 가족끼리 손잡고 옆구리에 찬송가 끼고, 요즘은 찬송가 아니지 스마트폰 갖고 다니지만. 성가대 노래, 가운 입고 노래 부르지, 파이프 오르간 하지 “와 좋겠다! 나도 저런데서 신앙생활 해보면 좋겠다.” 


주께서 가장 적합한 곳에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을 선망해서 온다는 것은, 그것은 극동방송 때문에 그래요. 극동방송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있는 자리는 최고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야죠. 얼마나 좋아요. 김정은 보내줬지요. 아바이 동무들 전부 다 호시탐탐 신자 잡아넣으려고, 신고하려고 버티고 있지요. 


그 보안관들이 내부 안을 다 살피지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환난과, 자진해서 환난과 핍박을 주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솔솔 나올만한데, 그렇지 않잖아요. 그것은 북한의 극동방송의 문제고, 또 옌벤. 그놈의 옌벤. 옌벤 사람들 문제야. 목사들 문제야 또. 탈북자 도와주는 목사들이 문제라. 여기는 순교자로 치부하는데 그게 무슨 순교자에요? 


복음을 위해서 순교자지. 어떻게 교회, 교회 건수 올리는 여행사하면서 무슨 순교자입니까? 시간 아직 2분 남았는데 지금 계속 하면 모르겠다. 그냥 사세요! 주께서 알아서 라이트 훅, 레프트 훅, 있는 훅 다 날려주십니다. 그럴 때 “아, 사적 구원이 아니고 그냥 창세 전에 집단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구원 받기 위해서 해주셨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거, 그거 오래갈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가봐야, 오래가는 사람은 한 3분? 돌아서게 되면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리려고 바르게 살아야지!” 또 이렇게 돼요 또. 다음에 라이트 훅을 맞기 전까지는 또. “다음에 두 번 다시, 이런 벌 받으면 나만 손해지” 또 이런 꼼수가 또 자기중심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설교자는 매일같이 복음만 전해야 돼요! 매일같이! “이만큼 신학 아는데?” 하지 말고 매일같이 복음을 전하고, 자기의 죄, 목사는 죄인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기 죄를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래서 저는 설교하는 목사가, 설교하는 이게 죄입니다.” 이렇게 증거 하게 되면, 교인들이 “저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목사님 본인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주 안에서 공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영광은 주께 돌리죠. 그러다가 다른 교회 가면, 다른 교회 가든 말든 그거는 주께서 인사이동 시키는데 내가 왜 또 관여합니까? “아, 저거 얼마짜리인데.. 저거 한 달에 오십 만 원 짜리 나가 버리면, 올해 예산 반이 날라 가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가 주께서 그렇게 가게 함으로써, 얼마나 우리는 복음, 복음 하지만, 외양간의 소 잃기 싫어하는, 살고 싶다는 본능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이용해 먹은, 가룟 유다 같은 인간임을 또다시 거기서 들추어 내주는 하나님의 멋진 찬스! 그게 뭐냐? 


“성경의 응하게 하려 함이라” 때가 되매 가룟 유다는 팔아먹어야 됩니다. 그 타이밍은 1번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확정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하늘에서의 뜻이 다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그 의미를 우리가 이제 알았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확정된 사실인 것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