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유튜브강의-교양의한계,위험한 토대 1701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20. 12:31
2017-01-18 00:17:11조회 : 53         
유튜브(178강, 179강) 교양의 한계, 위험한 토대 17011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178강          음성           동영상

 

179강          음성           동영상

 공은주 (IP:119.♡.152.148)17-01-20 10:55 
178강-YouTube강의(교양의 한계)170117-이 근호 목사 

178강, 제목은 ‘교양의 한계’입니다. 일반사회에서 그 사람을 평가할 때에 교양 있다 하면 굉장히 큰 치하가 되는 겁니다. 모든 조직에서도 사람은 교양 있게 노력하고 살아야 됩니다. 누구 하나 교양 없이 무식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양한다는 것은 특히 현대사회에서 기본의 양식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양은 타고난 게 아니고 교육받고 양육 받고 가정교육을 통해서 훈련받게 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교양을 피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는 교양이 이처럼 자기한테는 유리하게 작용하는데 만약에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하고 우리하고 만난다면 교양이라는 것이 그렇게 인정받고 좋은 점수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예수님에게 통하겠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마태복음16장에서 부자청년이라는 사람이 돈만 부자가 아니라 상당히 교양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관리에 대해서 철저에 철저를 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대화 나누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났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는 계속 근심되겠다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뭐를 지키겠다는 겁니까? 뭐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까? 평생 동안 자기가 갖추어왔던 교양이라는 것, 훌륭함의 인격, 그런 것을 다시 원상태에서 시작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만큼 쌓아놓은 그것을 그냥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부자청년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오실 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바로 그 유대나라의 대표적 교양 층을 장악했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백성들이 유대나라라는 그 공동체에서 규모 있게, 질서 있게 살려면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 전부다 모범적인 모습들을 그들이 갖추어 있었고 또 그들은 자기가 생각했던 그 교양레벨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부했습니다. 이 유대나라에서 자기보다 교양 있고 인격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없다는 거죠. 그렇게 자부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애비는 악마다. 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파격적으로 이야기했어요. 평가를 했다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한 교양하는 최고의 교양을 보여주었던 그 층이 예수님만나고 난 뒤에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으면 예수님의 발언에 들어있는 그 취지를 우리가 오늘날 몰라서는 안 되겠지요. 알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사회나 지금의 사회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사람이 최고의 가치 있는, 최고로 사람에게 대우받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하면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교양 있는 사람 같으면 우리가 우리의 안목으로 봤을 때, 교양 있어서 상당히 인격적으로 품위 있다고 보는데 그러면 그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과 차이가 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겠지요. 

그냥 ‘아, 저 사람 교양 있다.’ 친하게 지내면 나도 품위 있겠다.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지요. 적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한 교양하는 그런 사람들, 교양이라면 남한테 뒤지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극단적인 발언을 하셨는가. 

그것은 유대나라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유대 나라던 인간들이 모인 집단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폐쇄적이 돼요. 우리조직, 우리단체, 우리집단,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 이렇게 자동적으로 폐쇄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나 조직은 폐쇄적이 아니라 이것은 항상 재조정되어야 재배열되어야 되고 늘 무너지고 새롭게 정립되어야 되고 그걸 열린 구조라고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우리끼리가 아니라 항상 주님 앞에서 말씀으로 지적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그러한 식으로 예수님을 보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 오시기 전에 주로 했던 분들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선지자 미가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그 조직체가 갖고 있던 그 패악, 나쁜 관행 이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이야기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가3장9절에 보면,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다는 말이에요.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한테 임하지 않는 그러한 멋진 단체, 멋진 조직체를 우리가 구성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외적으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했던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그 선지자가 말했던 그 대상이 되는 조직체를 이렇게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가정이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교회라고 생각해 보고 어떤 동호회라고 생각해 보세요. 항상 그 동호회가 대외적으로 열리겠어요? 아니면 닫혀서 우리끼리가 빈번하겠습니까? 

어떤 가정이든 어떤 조직체든 단체가 되게 되면 그 조직 단체자체를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겠지요. 그 단체를 지킨다고 얼마나 돈을 회비를 냈으며 지킨다고 얼마나 노력을 했습니까. 그 노력이 아깝고 그 돈이 아까워 서라도 그 조직체를 그렇게 말씀 앞에 내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교회 예배당 짓는데 교인들이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교인가 몇백명 모일 때까지 얼마나 그들은 심방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철야 많이 하고 이단 아닌 체 얼마나 했겠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문이 어때서. 우리 가족이 화목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어디 직장가면 일찍 오라고 하는 거예요. 자꾸. 총각, 처녀 가족들은 밤늦게 다니지 말고 일찍 오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일찍 와야 아빠, 엄마가 자식 키운 보람을 갖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폐쇄적 집단이 되고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폐쇄적 집단과 단체를 위해서 그들은 그 단체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주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 앞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목적이 아니고
이 단체가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서,
이 조직이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 노력을 다하다보니까 그 소위 지도자급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절,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이런 미가3장10절, 11절 말씀. 

이런 말씀이 왜 이렇게 등장하겠어요? 이게 그 당시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떤 조직을 하나 회사를 꾸린다면 이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권력이라는 것이 그 맛에 권력을 가지잖아요. 그 맛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서. 

미가2장3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재앙 내리기를 계획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양의 한계’라는 제목의 뜻이 뭐냐 하면 항상 이게 

교양을 쥐려고 하지 말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늘 개방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제가 뭘 또 사수하려고 했습니까?” 내가 주님보다 하나님보다 뭘 또 더 귀하게 여겨서 요거 내 자식, 내 부모, 내 가정, 내 조직체, 내 교회, 내 교단, 내 회사, 내가 만든 동호회, 취미단체, 내가 만든 밴드, 이거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주의 말씀을 본의 아니게 가리는 그런 본성을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항상 뭔가 주의해야 돼요. 내가 내 조직을 사랑한다 할 때, ‘아! 차~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적을 외면하고 또 내가 만든 내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구나!’ 그걸 다시 한 번 그 못된 버릇이 나왔던, 지적받아야 될 버릇이 나왔던, 그 하나의 상황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공은주 (IP:119.♡.152.148)17-01-20 10:57 
179강-YouTube강의(위험한 토대)170117-이 근호 목사 

179강, ‘위험한 토대’입니다. 성경에서는 토대를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을 토대와 구원받지 못할 토대. 마지막 심판 때 본질이 다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드러난다면 그러면 우리는 내 토대가 어떤지를 아직 모르고 있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토대 오기까지 수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토대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양식으로 이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일단 우리를 심판하는 절차를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고 그 심판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은 구원이 된 사람이고, 그 심판에 대해서 납득을 못하고 그 심판기준에 대해서 거부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늘 성경 말씀을 봐야 된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의 토대 점검을 수시로 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 제목이 ‘위험한 토대’다 말이죠. 그럼 위험한 토대니까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살면서 날마다 자기의 기초, 자기의 든든함을 기초공사를 늘 다지고 다지는데 기초공사 다질 때, 그 다지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다지느냐 하면, 대외적으로 나는 적어도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라는 고 방식에 그 형식을 갖추고 토대를 갖추게 됩니다. 

누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했을 때, “나 이 정도야.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 나 이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어. 이 정도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무가치한 게 아니야.” 라는 식으로 대외적으로 마음에 반발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남을 안 만나도 남을 만났다 쳤을 때, 혹시 순식간에 남한테 들킬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를 사전에 염두에 두고 그것을 예상해서 항상 자기 생활에 다짐에 철저를 기하는 거죠. 

그러면 그것은 누구한테 들킨다는 말입니까? 남한테 들키는 거잖아요. 남한테. 하나님이 아니고 남한테. 그러면 그 남한테 들킬 때 남이 나한테 들이미는 기준이 뭐냐, 그것은 내가 평소에 내가 갖고 있는 기준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내 모습이 부끄러울 때는 남도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냐. 남이 가는 기준과 내 기준이 이 인간상에서는 똑같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살아가요. 그러니 평소에 살아가면서 늘 의식하는 것은 집밖에 나갈 때는 집밖에 다니는 그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 의식하지요. 

집안에 있을 때나 외출할 생각이 없을 때는 편한 복장을 합니다. 그런데 밖에 나갈 때는 남들이 이미 거기에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내 치장을 다시 해야 되고 화장도 다시 해야 되겠지요. 

이리 생각하니까 우리의 평생 동안 24시간 매일 일상이 딱 그거지요. 뭐 그거 외에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일상적이다 보니까 그게 당연하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가지고 한 번도 하나님 앞에 나설 때 내 토대는 건전한가, 옳은가는 평소에 남들하고 사귀는 게 너무나 일상화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딱 끼어 들어서 너의 토대가 뭐냐를 묻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이 없어요. 감각이 없어요. 

성경에서는 도둑같이 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둑같이 오게 됐을 때에 대외적으로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인상 받는다고 해서 도둑같이 오시는 주님 앞에서 통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교회 갈 때 목사들부터 장로들부터 교인들이 칭찬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주님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똑같은 기준이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 말씀을 가지고 기준 되는  토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17장 17절을 보게 되면, 열왕기상17장 자체가 사르밧 이라는 그 지역에 한 과부가 살고 있지요. 사르밧이라는 그 지역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걸 사르밧 과부라고 하는데. 그 과부가 누굴 만나는가 하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자, 우리가 엘리야가 없는 입장에서는 그냥 남들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상이지요. 그게 평소에 우리가 습관처럼 된 거예요. 사는 게 전부 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로 우리와 똑같아요. 

그런데 사르밧 과부가 누굴 만나는가, 엘리야를 만납니다. 엘리야를 만났는데 그 엘리야한테 대접을 해줘요. 엘리야가 대접을 해달라해서 해주는데. 대접할 지경에 사르밧 과부는 사는 게 무척 어려워서 마지막 기름과 마지막 밀가루 떡 먹고 그날 밤으로 죽으려고 한 찰라에 엘리야가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는 토대가 무엇인지 잘 안 밝혀지지요. 

열왕기상17장 19절 보겠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를 만나서 대접을 받았어요. 대접받을 때는 몰랐지요. 계속해서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넘쳐나고 기름통에 기름이 넘치는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선지자 대접을 잘하니까 이런 복을 받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지요. 사르밧 과부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토대는 선지자한테 잘 대접하면 되겠다. 요걸로 끝이었어요. 그게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이 사르밧 과부한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병이 위중하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엘리야한테 이야기합니다. 18절에 보면 엘리야한테 따집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건 뭐냐 하면 “그래, 나 죄 많은 여인 맞습니다. 그래서 그거 알려주려고 일부러 와서 내 아들 죽였습니까? 내가 그렇게 대접했는데.” 지금 항의하는 거예요. “아이고, 내 아들 죽여서 감사합니다.” 이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 사르밧 과부의 기본 삶의 태도가 뭡니까? 선지자한테는 요새 말로는 목사님한테는 잘 대우해준다. 이것이 하나님 믿는 백성으로 마땅하다. 요 정도에 그치는 거죠. 그런데 그 정도 그치는 것이 갑자기 화로 분노로 변했어요. 

왜 분노가 일어났지요? 사랑하는 가족 그것도 그냥 가족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선지자가 왔다간 다음에 죽었잖아요. 쉽게 말해서 절에 가다가 교회 오고 난 뒤에 아들이 죽은 거와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 잘 믿으려고 했는데 아들 죽고, 예수 잘 믿고 천당 가려고 했는데 아들이 죽은 거예요. 따질 수밖에 없지요. 이게 뭐냐 토대 갈아치우기입니다. 우리의 기본 본질 갈아치우기에요.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고 그 다음에 20절 보세요.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니까 아들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났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 원하는 요구는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 우리의 토대가.
이 말은 우리가
매일같이 주께서 엘리야처럼 찾아와서 우리에게 살게 하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그 인식이
우리의 토대로서 갖추어지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교회 와서 남들한테 칭찬받는다. 집사에서 장로 됐다. 이런 게 토대가 아니고 어느 교회 200만원 바쳤다. 이게 토대가 아니고 먼 어려운데 가서 파키스탄 가서 선교했다. 이게 토대가 아닙니다. 

토대는 뭐냐 하면, 나의 토대는 선교사를 하던, 헌금을 하던, 찬양을 하던 간에 찬양해도 죽어 마땅하고 선교해도 죽어 마땅하고 헌금해도 죽어 마땅하고 애 잘 키워도 죽어도 마땅한데 주께서 은혜로 오늘 하루도 살게 하셨으니까 살았다는 것이 매일의 토대로서 이렇게 갈아치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세상 나와 보세요.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그걸 전부다 토대로 안고 다 살고 만나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나는 죽어 마땅한데 오늘 저 사람 만나게 했구나!’ 이게 달라요. ‘주께서 저 사람 보내서 만나게 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주의 일하라고 저 사람 만나고 주의 일하라고 오늘도 시장가게 하셨구나! 왜? 죽어 마땅한데 이런 일을 하라고 애 공부 안한다고 나무란 그 일하라고 죽어야 될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항상 토대가 십자가 죄인으로 언제든지 죽여도 저는 할 말 없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것도 주의 뜻인데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항상 새롭게 리필 되어야 돼요. 갈아치우고. 커피 마시지만 또 리필 하듯이. 늘 갈아치워야 될 그게 토대다 말이죠.  그렇지 않은 토대는 늘 위험한 토대고 지금 구름타고 오신다면 지옥 갈 사람은 결단 나는 토대입니다. 세상 본받지 맙시다.
  ◁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