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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기도.믿음아닌것 1301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20. 11:00
2013-01-19 16:20:29조회 : 1941         
유튜브 강의 (8강, 9강) 기도, 믿음 아닌 것 121101이름 : 관리자 (IP:119.18.69.144)

제 8강       음성      동영상

제 9강     음성      동영상

 관리자 (IP:119.♡.69.144)13-01-19 16:20 
8강-YouTube강의(기도)121101-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8강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기도하는 그 자유만큼은 구태여 하나님한테 허락 맡거나 검사 맡을 필요가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예를 들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한테 허락 맡을 일이 없잖아요. 그러니 기도라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 내부에서 발산되는 것이고, 그리고 폭발하는 것이고, 그리고 토해내는 것인데, 그런 기도까지 성경말씀에 규정해서 ‘이건 기도다. 기도 아니다.’ 그렇게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 상당히 우리 사람으로서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만큼은 우리 인간들이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시고 응답은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응답 안 하고, 합당한 것은 응답한다. 그렇게들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를 10가지한다면, 그 중에 하나는 응답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런데 성경에 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시비 걸고 나오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 보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 이건 누가 봐도 굉장히 가상스럽고 대견하고 착하고 선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칭찬을 해주면 좋겠는데, 칭찬을 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기도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은 그건 예수님이 용납 못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도 충분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유대인이 아닌 입장에서 이방인이죠. 그러니 이방인들이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런 식으로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타박을 이미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예수님의 지적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고 외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도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고 기도도 규제를 받는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면 예수님이 원하는 기도,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가 어떤 것이냐, 그것이 뭔가 성경적으로 정립이 돼야 되겠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난 뒤에 나오는 8절부터 우선 보게 되면,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버지가 아신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구하는 것만,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 기도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 말고 따로 아버지와 통하시면서 기도하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이야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또는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자기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그 기도하신 기도의 내용에 의하면, 우리가 기도해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계속 공급하고 제공해 왔다는 것을, 그 다음에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고 알고 그것을 고백하는 입장에서 기도를 해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기도하게 되면, 이거 제시해서 ‘하나님 이거 기도합니다. 여러 개 중에서 하나라도 들어주옵소서. 응답해 주옵소서.’ 이렇게 윽박지를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 먼저 아버지를 아시고 아버지에게 합당한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내용을 우리가 뭔가 눈치 채서 그 기도에 대한 내용이 응답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 응답 그대로 지금 주어진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기도하는 자체가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기도해도 응답이냐?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여기에 흔히들 ‘주기도문’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이 주기도문의 내용은 3가지 내용으로 돼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 두 번째는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노동의 대가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는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이렇게 한꺼번에 묶어서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내용은, 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이름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기도할 때, 기도의 의도, 기도의 그 노림수, 기도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기대치, 그것과 우리의 영광, 우리의 자존심 향상, 우리가 남한테 과시하는 것, 우리가 스스로 잘 된다고 여기는 것, 우리가 소망이라고 생각하면서 품었던 것, 그런 것들이 우리 이름을 이 세상에서 빛내는 것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미 눈치를 채시고, 그런 식으로 살지 않기를, 존재하지 않기를 아버지께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우리자신의 과시나 영광 이런 것은 참된 성도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받혀서 그것은 응답될 수가 없죠.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은 날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소망에 대해서 실망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우리 이름이 와장창 늘 부서지고 뭉개지는 그러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생각한 내 이름의 자존심이 높아지고 영광이 높아지는 그것을 예수님은 그냥 보지 아니하시고 기도를 기어이 해서 아버지께 기도의 응답을 따내서 그것을 저지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만약 그러한 체험이나 그런 현상이 없다면 그것은 천국 백성이 아니고 지옥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의 기도 내용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 했습니다. 일용한 양식이라 하는 것은 이틀 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우리가 오늘까지 살 수 있습니다.‘하는 그런 고백을 의미하는 겁니다. 오늘 살 수 있다면, 오늘까지 살았다는 것은 주께서 오늘까지만 살게 필요한 조치들은, 영양분이나 양식은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제공된 것이다, 라는 고백을 기도에 담으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용할 양식을 준 걸 봐서 오늘도 또 하루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군요.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아버지께 기도한 기도내용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내일까지 더 살고 싶어 하는 그거마저도 우리한테는 욕심이 되고 탐욕이 되고 죄가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리라’ 하는 그런 것은 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옳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한다.’ ‘죽기도 한다.’를 우리가 용납해야 돼요. 주의 뜻이면 저는 살 수 있습니다, 만 고집부리지 말고 주의 뜻이면 언제라도 죽고 사는 권한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 권한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기도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기도 때문에 오늘도 하루치를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 그게 참된 기도에 대한 보답이 되고 응답이 된다 이 말입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 이유가 우리의 죄가 어떻게 용서 받았는가를,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이 땅에 살아갈 때,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 돌리는 그러한 바탕이 되는 겁니다. 무엇을 했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았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 가 아니라 오늘도 나의 죄는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 예수님의 공로가 그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우리는 이 죄지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 죄가 우리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 제거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성도로서 이 땅에 잠시 나타났다가 이제는 나이 들면 또 사라지고 죽게 되면 또 사라지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런 기도 하시면서 결국은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이 기도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한 이 기도 때문에 제가 목숨을 걸게 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이 기도로 인하여 저를 죽이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돼요.‘ 이 기도할 테니까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기도내용대로 죽을 때까지만 살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서 ‘제 아이가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제 아들 예수 믿는데 제 목숨을 걸게 하옵소서.‘ 이렇게 돼야 돼요. ’저는 더 이상 안 살아도 되니까 제 아들은 예수 믿게 하옵소서.‘ 라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가 살아야 될 존재 이유가 기도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고백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기도는 다 이방인들의 헛된 기도고 마귀가 시킨 기도입니다. 


 이한례 



9강-YouTube강의(믿음 아닌 것)121101-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아홉 번째 강의 제목은 무엇이 신앙이 아닌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들 무엇이 신앙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 지금은 내가 이만큼, 이만큼, 이만큼 가졌는데 그동안 하나님 믿는 것은 빠뜨렸다든지, 교회 가는 것은 그동안 내가 안했으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이것들도 내 것이고, 거기다가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교회 다니기, 예수 믿기, 하나님 섬기기‘라는 그 항목을 하나 더 첨가시켜 버리면, 현재 내가 가진 것에다가 추가적으로 들어온 신앙까지 보태면, 그 다음에 나의 자질이 완벽해 지지 않겠는가, 해서 교회 와서 ’목사님, 무엇이 신앙입니까? 그 신앙을 알게 되면 제가 알아서 그 신앙생활까지 내 것에다 편입시키고 싶습니다.‘라는 의도로 ’무엇이 신앙입니까?‘라고 묻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살아나시고 죽으시고 승천하신 그 현장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냐 하면, 신앙이 없는 이방인들 나라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지금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여호와를 잘 섬기고 있고 모세 율법으로 충만한 그 나라에 예수님께서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신을 믿고 여호와 믿는 것은, 그건 신앙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다 그게 바탕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래서 너희들은 신앙이 아니니라. 이래서 너희들은 천국의 본 자손이 될 수 없느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소위 신앙 교육의 담당자라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퍽이나 착한 사람이거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거나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어요. 예수님과 정작 만났던 사람들의 인상에서 예수님은 착하다, 너그럽다, 자비롭다, 사랑이 많다, 그런 인상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뭔가 예수님을 연상하려고 한다면, 항상 너그럽고 착하고 훌륭하고 순하고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합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종합하고 구성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습니다. 훌륭하니까 우리를 구원하지 안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죠. 그런데 막상 그 당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참 나쁘다. 악하다. 귀신 들렸다. 저 사람은 아마 마귀대장에 의해서 조정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인상이 더 강렬했습니다. 따라서 뭔가 우리가 예수님 생각하는 게 큰 오해가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가상적으로 따로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참된 예수님이라고 이렇게 섬기고 싶은 충동이 우리 내부에서 이끌어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상을 만나고 예수님의 키를 보고 몸무게 보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절대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저지했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한 장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때로는 인기 있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았는데 그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호응을 가졌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무려 남자만 5천 명을 먹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처럼 비췬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른 이유가 뭐냐? 너희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잖아?’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정작 너희가 먹을 떡은 내 살과 내 피를 먹어야 되지, 너희가 전에 먹었던 오병이어는 그건 너희에게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민중들이 도무지 그들이 기대하지 않는 예수님의 발언이고 그렇게 될 때 예수님에게서 전혀 예상 못한 면이 나올 때 그들은 두말없이 예수님을 떠나서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셔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까지 자기 자리로 돌려보냈을까요?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기적을 일으킨 그 모든 것이 모여 모여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가장 약한 사람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에 대한 대우였고 뜻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제발 약하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약하게! 
  

그런데 오병이어 떡을 먹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 그들의 노림수는 뭐냐, 예수 믿고 난 뒤에 지금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는 거, 거기 몰두하고 그걸 내다보고 그들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다니기 전보다 교회 다닌 후가 훨씬 자기 파워라든지 자기 세력이라든지 자기 가진 재산이라든지 그게 늘어나고 흔히 말하는 축복 받았기에 이제는 여유 있게 살아가고 큰 소리치고 살아가고 싶은 그런 소망, 그런 희망을 품고 예수 믿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예수는 그건 다른 예수고 마귀가 조작해 낸 날조한 예수입니다. 정작 예수는 예수님이 일으킨 모든 기적들이 모여서 오히려 예수님을 약하고, 약하고 약하게 만들었어요. 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아들을 대우했을까요? 그것은 뭐냐,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약해져도 괜찮습니다. 왜, 아버지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아버지는 말씀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기 때문에, 그 말씀의 능력이 예수님 자신이 충분히 약해져도 상관없는 겁니다. 아버지의 능력은 자신의 약함을 이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로 약했느냐 하면 자진해서 죽으실 정도로 약했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 보고 ‘당신이 가진 솜씨를 발휘해서 여기서 벗어나라’고 그렇게 충동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못 박히고 그냥 창 찔리고 그냥 돌아가셨어요. 죽었습니다. 완벽하게 죽었습니다. 정말 자기 목숨 잃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 보고 ‘모든 소설은 끝났다. 이제 예수님 이야기는 여기서 종결된다.’고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제자들도 물론 다 갔습니다. 제자들도 마지막까지 예수님께 어떤 기적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죽는 마지막에 9회 말 어떤 역전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역전 없었습니다.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말 예수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이시고, 아니 예수님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가짜라면, 어디를 초점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걸 아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대하신 분이 있다면 오직 아들 되신 예수님만 기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아버지의 능력으로 살아나셔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이 믿음과 이렇게 약해져도 된다는 이 믿음은 어떤 인간도 이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거나 답습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믿는다, 믿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 천국과 끊어진 사람이고 단절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우편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자신이 갖고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을 선물로 포장해서 성령의 힘으로 자기 구원받을 자에게만 그것을 은사로 주는 그러한 권한을 가진 자리가 하나님 오른편 주의 자리입니다. 그런 권한이 오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룻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라고 하시면서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음에 넘기어야 될 이유가 바로 우리 예수님의 생명이 또 우리 안에 이렇게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음에 넘기는 그런 사태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약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약해지는 것은 그건 하나의 교만이고 또 하나의 자기 의가 되니까 그러면 안 되고, 성령께서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나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전혀 희망이 없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이
자꾸만 우리 성도에게만 몰려오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날마다 죽고 주의 은혜로 날마다 살 때, 우리는 모든 내 삶의 영광과 공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만 돌릴 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