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강-YouTube강의(교양의 한계)170117-이 근호 목사
178강, 제목은 ‘교양의 한계’입니다. 일반사회에서 그 사람을 평가할 때에 교양 있다 하면 굉장히 큰 치하가 되는 겁니다. 모든 조직에서도 사람은 교양 있게 노력하고 살아야 됩니다. 누구 하나 교양 없이 무식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양한다는 것은 특히 현대사회에서 기본의 양식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양은 타고난 게 아니고 교육받고 양육 받고 가정교육을 통해서 훈련받게 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교양을 피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는 교양이 이처럼 자기한테는 유리하게 작용하는데 만약에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하고 우리하고 만난다면 교양이라는 것이 그렇게 인정받고 좋은 점수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예수님에게 통하겠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마태복음16장에서 부자청년이라는 사람이 돈만 부자가 아니라 상당히 교양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관리에 대해서 철저에 철저를 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대화 나누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났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는 계속 근심되겠다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뭐를 지키겠다는 겁니까? 뭐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까? 평생 동안 자기가 갖추어왔던 교양이라는 것, 훌륭함의 인격, 그런 것을 다시 원상태에서 시작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만큼 쌓아놓은 그것을 그냥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부자청년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오실 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바로 그 유대나라의 대표적 교양 층을 장악했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백성들이 유대나라라는 그 공동체에서 규모 있게, 질서 있게 살려면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 전부다 모범적인 모습들을 그들이 갖추어 있었고 또 그들은 자기가 생각했던 그 교양레벨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부했습니다. 이 유대나라에서 자기보다 교양 있고 인격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없다는 거죠. 그렇게 자부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애비는 악마다. 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파격적으로 이야기했어요. 평가를 했다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한 교양하는 최고의 교양을 보여주었던 그 층이 예수님만나고 난 뒤에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으면 예수님의 발언에 들어있는 그 취지를 우리가 오늘날 몰라서는 안 되겠지요. 알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사회나 지금의 사회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사람이 최고의 가치 있는, 최고로 사람에게 대우받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하면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교양 있는 사람 같으면 우리가 우리의 안목으로 봤을 때, 교양 있어서 상당히 인격적으로 품위 있다고 보는데 그러면 그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과 차이가 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겠지요.
그냥 ‘아, 저 사람 교양 있다.’ 친하게 지내면 나도 품위 있겠다.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지요. 적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한 교양하는 그런 사람들, 교양이라면 남한테 뒤지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극단적인 발언을 하셨는가.
그것은 유대나라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유대 나라던 인간들이 모인 집단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폐쇄적이 돼요. 우리조직, 우리단체, 우리집단,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 이렇게 자동적으로 폐쇄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나 조직은 폐쇄적이 아니라 이것은 항상 재조정되어야 재배열되어야 되고 늘 무너지고 새롭게 정립되어야 되고 그걸 열린 구조라고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우리끼리가 아니라 항상 주님 앞에서 말씀으로 지적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그러한 식으로 예수님을 보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 오시기 전에 주로 했던 분들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선지자 미가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그 조직체가 갖고 있던 그 패악, 나쁜 관행 이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이야기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가3장9절에 보면,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다는 말이에요.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한테 임하지 않는 그러한 멋진 단체, 멋진 조직체를 우리가 구성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외적으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했던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그 선지자가 말했던 그 대상이 되는 조직체를 이렇게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가정이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교회라고 생각해 보고 어떤 동호회라고 생각해 보세요. 항상 그 동호회가 대외적으로 열리겠어요? 아니면 닫혀서 우리끼리가 빈번하겠습니까?
어떤 가정이든 어떤 조직체든 단체가 되게 되면 그 조직 단체자체를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겠지요. 그 단체를 지킨다고 얼마나 돈을 회비를 냈으며 지킨다고 얼마나 노력을 했습니까. 그 노력이 아깝고 그 돈이 아까워 서라도 그 조직체를 그렇게 말씀 앞에 내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교회 예배당 짓는데 교인들이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교인가 몇백명 모일 때까지 얼마나 그들은 심방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철야 많이 하고 이단 아닌 체 얼마나 했겠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문이 어때서. 우리 가족이 화목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어디 직장가면 일찍 오라고 하는 거예요. 자꾸. 총각, 처녀 가족들은 밤늦게 다니지 말고 일찍 오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일찍 와야 아빠, 엄마가 자식 키운 보람을 갖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폐쇄적 집단이 되고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폐쇄적 집단과 단체를 위해서 그들은 그 단체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주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 앞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목적이 아니고 이 단체가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서, 이 조직이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 노력을 다하다보니까 그 소위 지도자급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절,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이런 미가3장10절, 11절 말씀.
이런 말씀이 왜 이렇게 등장하겠어요? 이게 그 당시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떤 조직을 하나 회사를 꾸린다면 이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권력이라는 것이 그 맛에 권력을 가지잖아요. 그 맛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서.
미가2장3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재앙 내리기를 계획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양의 한계’라는 제목의 뜻이 뭐냐 하면 항상 이게
교양을 쥐려고 하지 말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늘 개방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제가 뭘 또 사수하려고 했습니까?” 내가 주님보다 하나님보다 뭘 또 더 귀하게 여겨서 요거 내 자식, 내 부모, 내 가정, 내 조직체, 내 교회, 내 교단, 내 회사, 내가 만든 동호회, 취미단체, 내가 만든 밴드, 이거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주의 말씀을 본의 아니게 가리는 그런 본성을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항상 뭔가 주의해야 돼요. 내가 내 조직을 사랑한다 할 때, ‘아! 차~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적을 외면하고 또 내가 만든 내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구나!’ 그걸 다시 한 번 그 못된 버릇이 나왔던, 지적받아야 될 버릇이 나왔던, 그 하나의 상황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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