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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강의 -말씀으로 짠 현실 1701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9. 02:31
2017-01-14 00:25:21조회 : 300         
말씀으로 짠 현실 170113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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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70113a히13장1절(말씀으로 짠 현실)-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1절부터 하겠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이것이 현실 만들기에 있어서, 현실에 있어서 사람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현실은 이미 만들어져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보통 이 말씀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그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이 말씀을 지킨다. 이리 되잖아요. 구름이 없는 쨍쨍 내리쬐는 맑은 하늘에 축축한 소낙비가 내리는 것은 상당히 힘들지요. 구름이 없을 때는. 그렇지요? 구름이 하나도 없고 그냥 햇빛이 쨍쨍한데 비 올 리가 없지요.

 

그런데 만약에 목욕탕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축축하지요. 목욕탕이 왜 축축해요? 목욕탕 바깥은 햇빛이 쨍쨍한데, 목욕탕 안은 왜 축축하지요? 습기가 가득 차 있잖아요. 이미 습기가 있는 곳에 특히 사우나탕에 들어갈 때 보면 축축하다 말이죠. 이미 습기가 차 있는 방에 몸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축축해지는 거죠.

 

우리가 히브리서13장을 방금 봤지만,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그 다음에 천사들을 대접했다. 그 다음에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고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한다. 이렇게 죽 나올 때, 대반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명령을 우리한테 했으니까, 쨍쨍한 하늘에 우리가 있는데, 습기도 없는 하늘에 우리가 있는데 말씀이 들어오면 내가 이 말씀을 지킨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손님대접하고, 천사대접하고. 그런데 이러한 발상자체가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봐야 돼요. 이렇게 되면.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완성으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계명으로, 

오늘 방금 읽었던 계명이 전부 다 합치면 십계명 안에 다 들어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미 목욕탕 그 사우나처럼 이미 계명 되었어요. 

현실은 사람이 지킨다고 새삼스럽게 현실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계명으로 말씀으로 다 짜져 있는 거예요.

 

짜졌는데 우리가 이 방에 들어가니까 

이미 준비되어있는 이 상황의 원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니가 지금 있는 그 위치가 어느 동네인 줄 아느냐를 묻는 겁니다. 

니가 지금 어떤 동네에 살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다가 이걸 지키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든 이 동네에 말씀으로 된 이 세상은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내가 지켰다! 하는 내가 잘났다! 하는 새로운 동네가 새롭게 구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걸 처치해야 되겠지요. 더 난처한 손님을 보내버립니다. 계돈 모아서 여행가는 친한 친구는 대접이 되는데 만약에 새로운 낯선 친구가 왔다. 낯선 친구가 오게 되면 어떻게 돼요? 대접도 한계가 있지 저것까지 대접해야 되나? 임신한 고양이까지 대접해야 됩니까? 임신한 고양이 대접하면 임신한 곰 나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그렇게 성경을 많이 보고 교회 수십년 다녀도 성경이 뭘 이야기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아요. 원칙이 이겁니다. 이 원칙만 알아도 오늘 강의 끝났어요. 왜냐 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요, 그 다음부터는 죄가 나와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받게 되면 의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천상천하유아독존 불교와 같은 사고방식입니까? 예수님을 몰랐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뭐냐, 롤 모델이 되는 겁니다. 롤 모델 알지요? 내가 닮고 싶은 어떤 영웅 같은 것. 예수님이 롤 모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지적합니까? 죄가 지적하지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나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 칩시다. 그런데 그 죄에 규모, 그 깊이가 주님이 죄인이라고 하는 그 깊이에 다입니까? 아니면 조금입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그 죄인이라는 그것에 대해서 내가 예수 믿고 죄인이라고 했다고 해서 주님이 나를 생각하는 걸 내가 전부다 알았다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아, 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죄인이구나! 이 술 끊으면 되지.’ 그러면 술을 많이 먹어서 죄인 됐다고 한다면 술 끊으면 갑자기 졸지에 뭐가 됩니까? 술 끊은 의인되지요. 술 끊은 의인은 구원받습니까? 구원이 안 되지요. 이 땅에는 의인이 없어요. ‘아, 예수님처럼 훌륭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구원됩니까? 여기서 다시 또 지난 수련회 강의가 또 생각나네. 구멍 난 스타킹가지고 전체를 덮을 수가 없어요. 스타킹 이렇게 그냥 놔두면 구멍 났는지 안 났는지 몰라요. 그런데 신어보면 여기 저기 뚫렸어요. 남자가 만약에 스타킹 신는다면 남자는 그냥 신어요. 바지 밑에. 여자는 용납이 안 되잖아요. 치마입고. 아, 이렇게 구멍 난 줄 몰랐단 말이지요.

 

막상 내가 내 잘난체하려고 장착한 이 윤리 도덕가지고 주께 맞닥뜨리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특히 20대 30대 젊어서. 자기는 최선을 다하여 하늘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이야기하면 연세 많은 부모들은 웃지요. 저게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회사 들어가기 전에는 민주화운동하고 누구 물러가라 했지요. 만약에 취직한다. 취직하면 촛불 들고 나올 시간도 없어요. 해외출장 가있어요. 자기 밥벌이하기 바빠요. 자기 밥벌이하는 게 진정 납니까? 아니면 안중근의사처럼 자기를 비우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선진민주화를 위해서 외치는 것이 진정 자기 모습일까요? 그냥 밥벌이하는 거예요. 그냥.

 

이게 강요된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현재를 강요하는 겁니다. 

이걸 히스테리라고 합니다. 현재를 강요하는 겁니다. 

현재. 현재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게 히스테리 증상이에요. 

이건15세도 그렇고, 25세도 마찬가지고. 시집갈 때 딴따따 할 때 얼마나 이 모습이 내 모습이야. 

그런데 시집가고 난 뒤에 15년 지나서 이 모습도 그 때 그때마다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안 돼. 이게 난데. 이거 전부다 달라지면 안 돼. 이걸 버티는 겁니다. 

뭘 버틴다? 현재를 버티는 겁니다. 현재함을 꽉 쥐고 있는 거예요.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이 꾸준히 갈 거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누가 아느냐, 나이 많은 70대 할머니도 알아요. 

그래서 할머니들은 방법이 뭐냐, 

자기를 현재 죽이는 방법 중의 하나가 사진 안 찍습니다. 귀신 나올까 싶어서. 

아~~ 사진 찍지 마라. 찍지 마. 지금 내 머리에는 20년 전의 내가 이미 고정이 되어있어요. 

꽉 붙들고 있다고요. 이것이 해체되고 파괴되고 허물어지고 이것은 내가 용납을 안 해. 

이런 성질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사라지는 유령처럼, 자기가 만든 유령에 갇혀 살면서도 나름대로 히브리서13장 형제사랑을 계속하고, 계속할게요. 

니가 누군데? 몰라 하여튼. 손님 대접을 잊지 않고. 잊지 않을게요. 

이래가지고 지 잘난 맛에다가 성경 말씀을 보태가지고 

나는 히브리서13장까지 다 지켜낸 대단한 예수님을 닮은 롤 모델처럼 그렇게 우기는 

그 즐거움이 아마 히스테리 발작으로 나타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히 신앙생활 오래한 권사들이나 장로들, 목사들. 복음가지고 쑤시면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요번 수련회에 이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연필심이라고 했지요. 단위면적당 작을수록 강력한 에너지가 주어지게 되면 이게 점점 더 그걸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자기 자신 안에 수축이 된다했지요. 응축이 됩니다. 단단해져요. 요게 뭐냐 하면 인간은 원래 악마의 앞잡이였습니다.

 

처음부터 악마는 이런 존재였어요. 하나님 앞에서 지 할 소리 다 하는 게 악마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가 이야기하지 악마는 그런 이야기할 줄 몰라요. “욥이 잘나서 그런 줄 압니까? 복을 주니 그렇지요.” 라고 하나님 앞에서 할 소리 안할 소리 구분도 안하고 그저 자기만 챙기겠다는 것이 악마의 수작입니다.

 

그런데 점점 나이 들면 우리는 누굴 닮았어요? 악마를 닮았어요. 점점 닮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바지를 벗기게 되면 어디로 다 모입니까? 발밑에 모이지요. 그게 흘러내리는 거죠. 인간의 육체는 결국은 시간의 중력에 의해서 줄줄줄 내려와 가지고 한 곳에 다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 흘러내리면 뭐가 드러납니까? 자기 벌거벗은 몸에다 신경 쓸 건데 그래도 어디에 관심 쓰느냐 옛날에 줄곧 수십년동안 입고 온 그 옷에 내가 신경 쓰게 되어있습니다. 흘러내리는 자아지만.

 

말씀이라 하는 것은 뭐냐, 니가 말씀 지키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름 없는 하늘에다가 비오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거죠. 이미 목욕탕에 들어가면 축축하게 이미 말씀으로, 현실은 주님이 만들지 내가 새삼스럽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계명으로 다 장착되어 있고 다 만들어져있어요.

 

그러면 왜 만드는가, 니가 그 말씀에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그 사우나에 들어가서. 사우나에 들어가 보니까 형제사랑하기를 할 때, 그러면 우리는 그 앞에서 뭐가 됩니까? 형제사랑하기가 완전히 도배되어있는데 내가 그 사각형 사우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발악할 거예요. 저는 촌에서는 나름대로의 정 많다고 소문났습니다. 촌에서도 내가 이장한 사람입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정말 주께서 계속해서 요구하는 그 레벨이 예수 그리스도의 레벨이 아니면 그건 형제사랑이 아니에요. 누가 예수님의 레벨을 합니까? 공자입니까? 맹자입니까? 누가합니까? 부처가 했어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고 했는데 그런 이웃사랑을 누가해요? 사람은 자기가 중심이 되니까 “아이고, 뭐~ 성경 말씀을 우이 다 지키노? 약간만 지켜놓고도 최선을 다했다고 나중에 무슨 한 소리해야지. 내 수고한 것은 점수주세요.” 이렇게 자꾸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 자아는 나중에 주님 앞에 바지가랭이에요. 

나중에. 흘러내리는 자아라니까요.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줄줄 흘러내려가지고 

흘러내리는 자아를 잊어버려야 되는데 

우리는 끝까지 이 흘러버린 맥없이 주저앉은 쓰레기같이 되어버린 

이 자아에다가 아주 집착을 하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13장 1절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아,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또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 본받으라고 거룩하라고 이 말씀 주셨구나!’ 이렇게 또 덤벼들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묻지요.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믿기는 믿는데 13장 1절과 4절 못 지키면 지옥 갑니까?”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주저주저하는 거예요. 땀을 삐질 흘리면서. 땀을 삐질 흘리면서는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어요. 똑똑이한테 걸려가지고.

 

뭐냐 하면 히브리서 13장 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한다면 그럼 앞에 히브리서7장에 내려가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은 무슨 말이 되어버려요? 피는 왜 흘립니까? 피는 용서하는 피죠. 히브리서10장에서 그 피가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왔지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이미 용서받은 자가 됐지요. 요번에 수련회에서 골로새서에 의하면 우리가 화목제물 받는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화목제물이라 했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의 고난을 어디에 채운다? 내게 다 채운다 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 자체를 화목제물화 시킨 거예요. 화목제물화. 머리는 예수님이고. 지체는 사도바울이고. 그 전체가 이 땅에 등장한 화목제물이에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초라하고 이해 못하게 오듯이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성령 받아도 믿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비율로 따져서. 거의 없었어요. 골로새서에 사람 등장하는 거 보세요. 별로 안 되잖아요. 인간 자체가 화목제물화 됐다. 하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장 혜리의 노래를 또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하는 노래했지요.

 

주님은 

바지가랭이 내리고 남아있는 벌거벗은 몸을 주님의 화목제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동안 누가 막았어요? 이놈의 바지를 쳐올리니까 이걸 누가 지킨다? 

그동안 내가 바지가랭이 지킨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이 현실이 주님의 현실이에요? 자기 현실이에요? 예수님을 롤 모델로 삼아가지고 나도 얼추 예수처럼 닮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순간에 와서 우리가 성경공부 많이 하고 수십년 믿은 거 다시 다 전부 다 버리고 새로 정비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말씀으로 만든 곳에 우리가 그냥 벌거벗은 몸만 들어섰을 뿐이에요. 

이제 우리한테 부딪히는 것은 니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우리는 피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고 이미 예수님의 용서가 우리의 속까지 들어온 것도 받고, 

왜 용서가 들어와야 되는가, 

배경자체가 이러한 계명들이, 간음한 자는 심판받는다는 이 사각형 사우나실 또는 보일러실 하여튼 그러한 갇혀있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다시 한 번 보는 겁니다.

 

히브리서13장20절 봅시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사람들이 이 대목을 보면서 생각해요. ‘나는 구원 받았구나!’ 이리 생각해요. 

나는 구원 받은 게 아니고 나는 주와 함께 있다. 다르지요. 다릅니다. ‘나는 주와 함께 있구나!’ 

그러면 13장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는 주님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계명으로 만든 이 현실에 현실성을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그게 필요한 말씀이 갈라디아서2장20절 말씀입니다. 누가 한 번 외워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나를 13장 1절에 집어넣어버리세요. “야~~ 우리는 심판받아도 마땅하네.” 이리 되는 거예요. 내가 수련회하면서 간음 안 해본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산상설교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마음 속으로 간음한 자. 남을 살인하지 않은 자 손 들어 보세요. 아무도 들을 수가 없어요.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교회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 믿고 이제는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미워하지 않는 게 촛불집회 나가고 있어요. 부딪친 상황이 내가 새롭게 만든 현실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현실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는 지 잘난 채로 살아가요. 주님, 예수 믿고 이제는 오! 성경에 히브리서13장 있네. 예수 믿었으니까 값을 한다고 이것을 지키겠다. 이렇게 하다가 부딪치고 다가오는 모든 상황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을 롤모델 삼을 자격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도 내가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창세전부터 주께서 집어넣어줬어요. 제가 어느 글에 이런 댓글을 썼어요. 이강진 성도님의 글 ‘착한 오지랖’이라는 글에 댓글을 썼어요. “더 이상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마세요. 왜냐 하면 뒤돌아보면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임의로 만든 주님의 것입니다. 마치 구원받은 강도가 강도짓을 해야 하는 그것 외에는 달리 구원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젊은 애들 톤으로 하면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요!”

 

왜냐 하면 뒤돌아보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임의로 만든 인생이기 때문에. 아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기억나지요. 그 다음은 마치 구원받은 강도가 강도짓을 해야 하는 그것 외에는 달리 구원될 길이 없는 것처럼. “아이고! 내가 진작 예수님 믿었으면 강도짓 안했을 건데.” 그런 식으로 다시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마요! 왜? 그 인생은 뭐냐, 흘러내리는 바지가랭이입니다.

 

우리는 하루 살면 매일같이 흘러내려요. 나중에는 우리 인생은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인생에 대해서 너무 미련과 애착이 히스테리적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요. 아까워 죽겠는 거예요. 흘러가는 그 현재를 가지고 지금의 나인 것처럼 강요를 하고 있어요. 집착을 하고 있다 말이죠. 주님은 벗기려하는데 우리는 바지가랭이를 쥐고 있는 거예요. 가짜를. 잘 지킬게요. 말씀대로 살게요.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러면 말씀대로 살면 니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속의 죽음의 잔을 마실래? 제자들은 마실 사람 없어요. 마실 사람 없지만 필히 너로 하여금 마시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이 고생했다는 뜻이 아니고요, 본인이 만든 인생을 안 살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지금의 나는 나이어야 돼!’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우리는 거기에 준해서 미리 상을 그리게 되잖아요. 그 미래를 우리 식대로 보장해 주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 이것은 성도는 요번 수련회하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마지막 시간에 

모든 내용을 잊어버리세요. 하지만, 잊어버릴 때 뭘 알 수 있느냐, 

지금 내 인생에 뭔가 꿈틀거리면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무엇을 놓치는가 하면 

주님 쪽에서 나를 주님의 나라에 합당한, 주의 천국에 합당한 인간으로 만드는 그 작업의 

그 속삭임과 그 작은 진동을 우리는 놓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주님의 성령에 의한 리듬이에요. 리듬. 

성령 안에서의 음악. 또는 무중력 상태에서의 댄스. 성령안의 떨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말로 설명하게 되면 또 내가 예상하는 또 내 미래상이 되어버려요. 

내가 말로 설명하고 예상한 그것을 자꾸 그게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미세한 진동을 일으켜요. 

한 걸음, 두 걸음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매사가 내가 예상한 대로 조금씩, 조금씩 틀어진다 할까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조용한 성령 안에서의 댄스를 춤을 우리는 개 무시하고 우악스럽게 현재 내가 나 임을 아주 집착해가지고 우리는 주님 앞에서 깡패 짓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한테 막 지시하고 그러는 거예요. “이만큼 내가 형제를 대접하고 천사를 대접했는데 지금 내 인생을 내 원대로 안 해줍니까?” 이런 식으로. 주님 앞에 불평불만이 얼마나 많습니까? 보통 갱년기가 찾아오지요. 찾아오잖아요. 내가 요청한 게 아니잖아요. 주문한 게 아니잖아요. 택배기사, 대리기사 부른 게 아니잖아요. 찾아오는 거죠. 오라 했습니까? 그게 바로 1절에 ‘부지중에’입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이건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은 알아서 관리 하신다. 그래서 이 흘러내리는 바지가랭이를 저는 이렇게 하지요.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 자아를 길거리에 흘리고 다닌다. 이건 이제 서론 격이고요, 진도 나가야 되겠지요.

 

자, 그러면 십계명을 말씀으로 현실을 만든 다는데, 그러면 그 말씀이 현실을 이렇게 만들어버릴 때,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인간이기를 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현실을 계속 이끌어나가는가.

 

적어보겠습니다. 구원받았으면 죄가 나와야지 의가 나오는 것은 구원 안 받았다는 뜻이에요. 왜냐 하면 구원받았다 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지요. 그러면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은 우리의 자랑을 시킵니까?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자랑 시키겠습니까? 주님 자신을 자랑하겠지요.

 

그러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고 주께서는 그것을 피로 용서함으로서 의인되게 하는 그런 과정에 있잖아요. 

이게 새 언약 관계입니다. 

요번 수련회할 때 왜 피냐 하는 것이 밝혀졌지요. 

왜 피였습니까? 피라는 게 어디서 나왔지요? 

율법과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갖다 바치는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하는, 

하나님이 우리 주려고 하는 제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성자가 성부에게 바치는 제사. 

그 제사를 드리는 그 결과가 그 제사 드림에서 나온 게 파생된 게 피거든요.

 

그 피를 냄비에 사발에 담아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뿌려버린다 말이죠. 죽음의 사자할 때, 마중 나온 게 뭡니까? 어린 양의 피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은 계명으로 만든 그러한 사우나 방이라 합시다. 축축한 사우나방. 그 말씀은 어떤 지향점이 있어요. 완성에 있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13장20절에 보면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영원한 뭡니까? 언약의 피잖아요. 언약의 피.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전체 내용이 뭐냐, 새 언약 이야기에요. 새 언약.

 

그러니까 성도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자들이 생긴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는 맹세대로. 또는 히브리서7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안양공부니까 수련회 마친지 얼마 안 되니까 수련회 내용을 그대로 복습하는 즐거움을 가집시다.

 

시간이 정지되면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성질나오지요. 성질의 특징이 뭡니까? 

시간이 정지되었으니까 성질의 특징은 무한 반복된다 했지요. 

왜? 시간이 정지되었으니까. 변화되는 시간이 없으니까 무한 반복되지요. 

저는 그걸 쉽게 무한 리필이라고 했는데. 

그 무한 반복되는 두 가지 성질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는 지옥이라 했고, 하나는 천국이지요.

 

천국, 지옥 설명하면서 시지포스 신화를 이야기했잖아요. 돌멩이를 산등성이에 올려놓으니까 올리자마자 죽 내려가고 또 밀고 내려가지요. 이게 무한 반복이지요. 무한 반복은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똑같은 되풀이니까 의미 없잖아요.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영원한 저주에요. 어떤 사람에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교회 몇 년 다니고 장로, 집사, 목사 아무 의미 없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영원한 저주에요. 그리고 반면에 주를 사랑하게 된 사람한테는 이건 행복이란 커피 잔을 마셨는데 방금 행복했는데 돌아서면 또 행복 차가 와요. 그 행복을 마셨는데 또 행복이라. 태국 갔다 와서 커피 갈아서 마셨는데 또, 또 태국 커피라. 계속 커피의 그 추억을 되새기는 거예요. 이건 축복의 무한 리필.

 

그러니까 이 땅에서 날씨 춥고 어떤 수모, 몸이 아프고 갱년기 찾아오고 어떤 수모가 있더라도 천국에 비하면 족히 비할 수가 없다. 장차 올 영광에 비하면 이 땅에 사는 고난은 비할 필요도 없다. 비할 쨉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뭐가 불만입니까? 무한 리필이 불만이에요? 뭐예요? 맞아요. 히스테리입니다. 이 복음을 알고 교회의 모습들을 보니까 이게 동호회도 아니고 친목단체도 아니고 종교놀이터도 아니고 왜 갔는지 몰라요. 왜? 혹시 괜찮은 총각 있는가 싶어서? 총각 소개하고, 취직하고 남는 돈 있으면 20% 이익해서 돈이나 사기 쳐 먹던지 사기 당하던지. 심심해서 취향 맞는 사람, 또는 취미 맞는 사람은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하러 가는 건지. 그게 자기들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말씀의 사우나 현실이 아니고, 가서 안 다닌 사람보다 착하다는 거예요. 그것도 십자가 앞에서. 아~ 무섭지요. 십자가 앞에서요. 지금 누가 죽어있는데요. 그 앞에서. 예수님 죽고 있는데 니 소주 먹나, 백주 먹나. 그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 앞에서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관련성이 끊어졌어요. 이게 바로 저주 아닙니까? 처음부터 끊어져 있는 것.

 

교회는 말합니다. 구원받았으면 착하세요. 왜? 거룩하라 했으니까. 


구원 받았으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에요. 

착하고 자시고 할 자아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와 함께 못 박아 죽었습니다. 

날마다 죽을 때마다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온유와 자비와 화평과 양선이에요.

 

이게 안 죽게 되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갈라디아서5장19절에 제가 읽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많기도 많다. 이게 한꺼번에 나와요.

 

요번 수련회 때 이 말씀을 빼먹었지만 수요일 날 말씀드렸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했잖아요. 

십계명에서 우상숭배는 일계명입니다. 탐심은 십계명이에요. 일계명이 십계명하고 같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일계명 십계명 사이에 모든 계명 속에 모든 계명은 안에 서로 내통해요. 

우상숭배자가 간음하고 간음한 자가 탐심하고 다 그래요.

 

왜 간음이냐, 탐심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간음자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가 우상 숭배자에요. 

십계명을 응축해버리면 그것을 신약에 가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십계명은 한 마디로 뭐냐, 

주님을 사랑 안하는 게 십계명 어기는 거예요. 

그게. 한 계명 한 계명 어기는 게 아니고 주님의 존재 의미, 주님의 가치를 주님의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을 때에 

잠자고 있던 탐심이 나오면서 그게 우상숭배 되는 겁니다.

 

뭐 캐나다를 가든 유럽을 가든 미국을 가든 “야, 나 미국 간다.” “주님이여, 나 미국 갔다 올 때까지 주님 미안합니다. 안녕히 잘 주무시고 나는 미국 가서 즐기고 오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주께서 미국가게 하셨구나!’ 이러면 주도권을 계속해서 누가 쥐고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잖아요. 그런데 미국 갔다 와서 신앙생활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뭘 잊어버렸어요? 주 사랑을 잊어버렸지요. 그러면 미국을 가나 어디를 가나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고 탐심이 되고 간음이 되고 살인이 되고 거짓 증거가 되고 도둑질이 되는 거예요. 십계명 자체가.

 

그래서 십계명 자체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너희를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 하나님이 이리 나와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십계명의 모든 취지는 뭐냐 애굽에서 천국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게 요번 수련회에서 단일현실이라 했지요. 그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그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거기에서 벗어나게 한 그 사랑. 그 사랑을 놓쳐버리면 십계명 한 계명 어겨도 열 계명 다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십계명은 두 경우로 축소된다 했지요.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게 또 한 계명으로 좁혀지지요. 한 계명이 뭡니까? 로마서13장8절~10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정리하게 되면 이리돼요.

 

나이가 좀 들게 되면 꼭 밥 먹고 오후시간에 자게 돼요. 

자연적으로. 요번 수련회 때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자연을 이기리오. 아무도 못 이깁니다. 

자기 자신의 비 완벽에 대해서 자기를 탓하는 것도 히스테리현상입니다

원래 인간은 망가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예수 믿고 망가진 것을 즐겨야 돼요.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고. 예수 믿고 죄가 더 나와야 돼요. 

왜? 이게 구원 받은 즐거움으로 딴 게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 안에 그 중에 다 사랑이 들어있으니까 

어떻든 간에 하여튼 갱년기 오고 잠이 올 때 그것도 감사하라 이 말이죠. 

그동안 얼마나 정신 차려서 듣는 것이 자기 의처럼 여겼습니까? 

그런데 그 때는 5년 전의 동질성이고 

이제 슬슬 바지가랭이가 다 내려왔어요. 

올려도 내려가고, 올려도 내려가고. 깨어라 해도 잠 오고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또 자아와 함께 내려가거든요. 

우리가 그동안 버틴 거죠. 

버틸 능력도 없으면서 억지로 나는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처음부터 무너졌어. 애초부터 죽은 인간인데. 

아! 나는 무너지면 안 돼! 절대로 무너지면 안 돼! 무너지면 나 지옥 가는 거야! 

마귀가 장난질 쳐도 아주 가지고 놀아요. 마귀가 가지, 가지로 가지고 놉니다.

 

이제는 마귀 꼬임에 그만 속아 넘어가세요. 얼마나 교회 가서 많이 속아왔었습니까? “여러분, 당신이 그 따위로 하니까 가정 집안이 저주를 받지요.” 이 말에 공갈성 협박에 얼마나 부들 부들 벌벌 떨면서 왔습니까?

 

구원받았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우리를 대상으로서 마음껏 죽을 때까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인간도 구원된다. 세리와 창기도 구원된다. 탕자도 구원된다. 

이 감사를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그런데 더욱더 반가운 소식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렇게 살아가는데 예수 믿는다고 우기고 목사, 장로라고 우기면서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려고 그걸 자랑질하는 사람을 볼 때 ‘아! 예수님 죽인 유대교를 내가 이 세대에서 또 만나다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교회의 대세는 뭐냐, 예수 믿었으면 이제는 나쁜 행실 끊고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대로 니 선을 보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라. 그 쪽으로 달리는 거예요.

 

달리면 뒤에서 지옥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달리려면 자아 자신을 포기 못해야 되겠지요. 나이 많을수록 졸고 있으면 지가 자기를 마구 채찍해요. “마귀야 물러가라! 말씀의 씨앗을 먹는 마귀는 물러가고.” 목사는 탕! 탕! “깨어나세요! 깨어나세요! 도둑같이 오는데 이렇게 자다가 나중에 기름도 준비 안하고 어떻게 합니까?” 둘 다 지옥행이에요. 둘 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웃기는 짓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걸 한 번 정돈해보겠습니다. 조금만 하고 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뭐냐 하면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다음에 개인 윤리로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주님의 사랑이 임한 사람은 개인윤리의 영향과 한계를 이걸 파헤쳐서 

오직 사랑밖에 없군요. 주님께서 우리를 그것도 우리가 사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게 맞군요. 이 사랑이 옳군요.

 

이 옳은 것을 되풀이하기 위해서는 뭡니까? 

지속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내가 했다는 그 의도 뭐로 바꾼다? 의도 내 거룩도 예수 믿고 했다는 그 착함도 

뭐로 바꾼다? 죄로 바꾸는 작업을 주께서 고맙게 해주십니다. 감사히 해주십니다.

 

서너 명이 있는데서 자기가 착한 짓을 했다. 대단해 보이지요. 그런데 정말 밑반찬 천 가지 하는 아줌마 만나면 남편 사랑하는 것이 그야말로 주께 하듯 하는 것처럼 우리 눈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만나버리면 내가 남편한테 한 그것은 곧장 죄가 되고 말지요.

 

우리 십자가마을에 이 미아 성도님이 쓴 글이 100점 만점에 100점이에요. 완벽하게 잘 썼잖아요. 그런데 그 댓글에 보세요. 정답지인데 그 정답지보다 더 정답지는 수련회에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깨지기 바빠서. 이 새로운 정답지는 언제 가지지? 이렇게 했지요. 그러니까 유구무언이란 말이 맞아요. 욥기의 마지막에. 그렇다고 해서 이 미아 성도님이 잘못된 게 아니고 그런 죄는 누가 지어줘야 돼요. 요약해서 정리해주시는 그 죄는 누가 이 미아 성도님이 담당이에요.

 

죄 지어주고 우리는 염치없이 얍삽하게 이미아 성도님이 글을 올려놓을 건데. 그거 보면서 또 핥아먹고 이런 내용이네. 또 아는. 심지어 강사까지 거기에 가가지고 내가 무슨 이야기했지? 미아씨 올라올 건데. 그 때 봐야지.

 

이 모든 것이 주께서 니가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니는 죽었고 내가 살려내고, 

그 다음날 되면 니는 죽었고 살려내고. 

이것을 뭐냐 하면 ‘시간의 마디’라 하는 겁니다. 

시간에는 딱딱 마디가 있어요. 1,2,3,4,5,6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 어떻게 돼요? 안식일. 또 1부터 시작하지요.

 

심지어 이방나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기, 계절, 이 절(節)이 무슨 뜻이에요? 마디에요. 그런데 현대인은 뭡니까? 현대는 마디가 없어요. 그냥 달려가요. 놀러갈 때도 시간, 분 쪼개가지고 철저하게 계획 잡아 가지요. 날려 보내는 시간은 없습니다. 현대에는. 왜? 그 시간에 남들은 앞서갈까 봐 걱정이 돼가지고.

 

옛날에 농부들은 조선시대, 로마시대 이리 보면 365일 가운데서 180일 반 틈을 놀아요. 조선시대도 마찬가지고. 로마시대도 마찬가지고. 옛날에 겨울에는 그냥 놀았어요. 놀고 여름에는 바짝 일했고. 현대 기술문명이 들어와 가지고 노는 게 어디 있습니까? 옛날 애들 방학 때는 놀았잖아요. 요새 방학 때는 어디 가는가 하면 학원가는 거예요. 학원 집중. 학원가야 될 날이에요. 옛날에는 좋은 점이 나이 50넘어서 갱년기 아프고 이러면 죽었어요. 병도 몰라요. 갱년기라는 병이 어디 있어요? 갱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당뇨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어디 진찰하는 게 어디 있어요? 늙으면 죽으면 되지요. 밥 먹고 하면 되지요.

 

현대인들은 죽어가는 인간을 억지로 지금 정기검진 받게 해가지고 100세까지 살게 만들었어요. 반짝 젊을 때 한창 이쁘거나 약간 시들어 갈쯤에 환갑 지나고 이틀 뒤에 죽으면 왔다! 인데. 이것은 자기 본색 다 드러내고 주사 턱에 맞고 여기, 저기에 맞고 먹고 아줌마 불러다가 기 치료 받고 이래가지고 90까지 100살까지 살면 얼마나 사람이 추잡합니까? 70넘고 할 일이 없네. 그저 자식이나 초정해가지고 까불면 유산 안 준다 해가지고 애들 괴롭히기나 하고.

 

나이 들어보면 연필심같이 응축되어 있는 악마의 모습을 나이 들면 그대로 다 보여줘요. 

악마의 모습.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백날 해놓고 보약사라 하면 또 약 지어 와가지고 약 다 사고. 

바지가랭이는 벌써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드러낼 것 다 드러내고 말았어요.

 

오늘 히브리서13장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미 우리 속에 그리스도 성령이 임하고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되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남는 게 죄 짓는 일만 남았지요. 그 죄 짓는 일이라 하면 뭔가 계명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 계명이 이 계명이에요. ‘이런 죄를 안 지어야지.’ 가 아니라 ‘아! 이런 죄를 내가 죄인 줄 모르고 사는데 이런 것들이 죄가 되는구나!’

 

손님한테 대접했다. 뭐가 FM입니까? 커피 한 잔이 FM이에요? 커피 말고 떡을 내어놔야 FM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이건 대접했으니까 이제는 매직으로 나한테는 대접이 주특기니까 히브리서13장을 나한테서 찢어버릴까요?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살아있는 말씀이에요.

 

왜냐? 바지가랭이 내려가도 우리 몸은 누가 관리한다? 주께서 자기가 관리해서 이 말씀이 이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 계속 난데없는 사태와 상황들이 계속 부딪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부딪치는 동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돌릴 때.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 딴 사랑이 더 커질 때. 그런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주님하다가도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갑자기 그 상황에 내 마음이 홱 돌아가 가지고 내 바지가랭이 다시 올려가지고 내 이 자아가 고양이 한 번 도와줄까. 이렇게 또 오지랖 넓은 착각 오지랖이 발동된다고요.

 

발생되니까 흐뭇하거든요. 뿌듯하고. 그 순간 뭘 잠시 한 5분 동안 놓쳐버렸어요? 갑자기 자기가 죄인으로 주를 증거 해야 될 것이 의인으로 증거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미가 수컷을 보내가지고 확 가게 하니까 내가 싫다고 하는 오히려 가해자임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 반복되지요.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8.127)

 

안양20170113b히13장1절(말씀으로 짠 현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교재를 나눠드렸죠? 두 번째 시간은 녹취하기 아주 좋을 겁니다. 교재 나눠드렸으니까, 교재에 나와 있는 그대로 할 테니까요. 이 글은 이강진 성도님이 우리교회에 올린 글인데, 글을 이렇게 읽어보게 되면 이 사람이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글을 공개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을 공개하고 온갖 욕설을 다 들을 각오를 하고 내놓기 때문에, 특히 십자가마을 같은 경우에는 그렇거든요. “나는 욕 얻어먹어도 좋습니다.”하는 그러한 기쁨으로 글을 썼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제목을 이 사람 글 중에 뽑아내서 <착한 오지랖>으로, 이 글 속에 있는 단어가 있어서 그걸 끄집어내었어요. 그리고 이미아씨가 쓴 글도 우리교회에 제목을 달아서 올렸어요. <지옥의 아랫목>이라고. 그것도 이미아씨 글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지옥의 아랫목>이라고 아주 잘 썼어요. 저는 존재의 틈, 우리고모들이 담요 덮은 이야기, 남자들은 왜 안 덮어주고 딱 자기들끼리만 덮어요. 

  

자, 일명 착한 오지랖, 이해인의 수녀가 쓴 <종이에 손을 베고>라는 제목인데, 이해인이라는 유명한 수녀죠.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종이에 손을 베었다. 종이가 나의 손을 살짝 스쳐간 것뿐인데도 피가 난다.” 이 가벼운 종이를 내가 함부로 대했다는 그 말인데, 베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2016년을 보내면서, 얼마나 사람들을 종이처럼 우습게보고 함부로 대했던가, 이제는 내가 그 사람들한테 베일 차례다. 따라서 나는 베이더라도 오히려 베이는 그것을 통해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나로 인하여 마음을 베인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이런 취지입니다. 

  

이강진 성도님한테 어떤 분이 이해인의 시 한편을 카톡으로 보내왔는데, 교재를 보면 “이 시 한편을 감사의 글Text message로 읽어야 하나? 아님 이해인의 시poem로 읽어야 하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영어로 Text message로 읽어야 하나, 아니면 poem으로 읽어야 하나, 라고 자기가 이렇게 정해놓고, 그 다음에 보면 뭘 또 정했느냐 하면 감사의 글로 읽으면 그냥 ‘읽기’고 이해인의 시로 읽으면 ‘읽어내기’다. 이렇게 구분을 했어요. 

  

이게 좀 난해하죠. 제가 쉽게 구분을 해드리면, 읽기라고 하는 것은 이 글은 나한테 필요한 구절만 뽑아서 내가 교훈 얻을 것만 얻어내면 읽기가 되고, 읽어내기란 이해인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 긁어내는 것, 내 생각을 잠시 버리고 그 사람이 하는 생각으로, 그 사람 속으로 잠시 이전하는 것, 이게 읽어내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이 둘을 구분했어요. 뭐 이건 이영춘 권사님은 전문이고 잘 알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자기가 읽기와 읽어내기, 만약에 읽기라고 했을 때는 그냥 내 삶을 돌아보자고 이렇게 되지만, 읽어내기라고 한다면 과연 내가 이해인 수녀의 그 주장에 동의 할 수 있느냐를 문제 삼으면서 그 다음의 글을 길게 쭉 쓴 거예요. 이제 이해인을 분석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넘어갑시다. 2페이지에 보면 “그래서 나의 무심한 말에 상처 받은 자가 없었는지 먼저 반성하면서 또 반성을 한다. 그리고 자기로 인해 마음을 베인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 여기서 모순이 있다는 거예요. 

  

반성을, 그냥 순수하게 반성한다?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었을까? 나는 미처 몰랐는데...반성한다.” 이러고 있는데, 반성을 좀 깊이 해보려고 하는데, 분명하게, 명확하게,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더 깊이 있게 반성해보려고 하니까 여기서 갑자기 모순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모순 부분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2페이지 위에서 열네 번째 줄에 “나로 인하여 마음을 베인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고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 한다. 용서를 구하는데 무슨 반성을 조건으로 하느냐 말이다. 정확히는 반성이란 용서를 받은 후에 나오는 회개의 한 현상일 뿐이다. 현상은 주체가 아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깊이 있게 들어가면 우리가 공부할거리가 나오죠. 공부할거리가. 조건보고 반성을 하게 되면, 그 조건이 채워지게 되면 반성을 안 하게 되죠.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잘못한 것이 있을 때만 나쁜 사람이 되고, 잘못한 것이 없으면 나는 중립이 되든지 착한 사람이 되든지 그렇게 된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만약에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따먹으면 죄인이 아니죠. 창세기 3장 말고 창세기 2장에서. 

  

2장에서 안 따먹으면 죄인이 아니고 따먹어서 죄인 되었으니까, 안 따먹고 있으면 뭐 의인은 아니잖아요. 그냥 무죄. 여러분 무죄하고 의인하고 다르다고 했죠? 죄가 없는 것 하고 적극적으로 “아이고, 착하다.”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착하다고 못하잖아요. 그냥 무죄, 중립상태잖아요. 아담은 의인이 아니고 무죄상태죠. 근데 요게 창세기 2장입니다. 

  

근데 이강진씨가 보기에 우리는 창세기 2장이 아니고 3장을 넘어왔잖아요. 3장을 넘어왔으면 이 무죄상태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무죄상태가. 그러면 이해인이라는 이 수녀가, 본인이라는 존재위치의 그 상황은 창세기 3장 이후도 아니고 엉뚱하게 창세기 2장을 염두 해두고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이 말이죠. “반성은 지적받는 내용뿐이다.” 지적 안 받으면 반성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여전히 나는 지적만 안 받으면 나는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겁니다. “반성은 내가 행하는 게 아니라 주께 지적당하면서 거저 주어지는 용서라는 하나의 현상이다. 주님의 사랑(십자가 피)이 이런 현상을 만드시고 있는 것이다.” 자, 한 번 봅시다.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 피로 먼저 사랑을 했잖아요. 주님이 사랑을 먼저 십자가 피로 했습니다. 주께서 피를 흘렸다면 나는 뭘 해도 죄인이 맞지요. 왜냐하면 그걸 알고 십자가 피를 흘렸으니까. 

  

십자가를 앞에 본다는 말은 앞으로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해도 피 없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들의 다양성이라고 이래 보는 거예요. 우리 성도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거는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렇게 안 되죠. “반성 안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우리 집 강아지도 반성을 한다. 멀찍이 서성대거나 숨거나 하면 분명 말썽을 부려 놓은 게 있다.” 여기 개 키운 사람은 알죠? “다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용서를 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규율, 규칙, 윤리도덕, 양심 등을 법으로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강진 성도님이 볼 때 이해인 수녀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율법을 계속해서 본인이 착안하고 만들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한 개인이, 이해인 수녀가 잘했다는 문제만이 아니고, 이것을 계속 퍼 날라서 온 사람에게 전파한다는 말은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인의 주장에 지금 동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납득이 되고 설득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문제 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강진씨가 참 잘 쓴 것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웃동네 총각을 혼자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나서 죽은 아랫동네 처녀가 있다.” 저 같으면 이래 안 해요. 이웃동네 처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아랫동네 총각이 있다고 할 텐데, 이 사람은 바꿔서 했어요. 총각이 있는데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가 있다. 이럴 때 이 총각이 반성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처녀는 총각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죽었으니 말이다. 나로 인해 상사병이 난 뭇 처녀들에게 총각은 반성과 함께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나?” 

  

그 죽은 처녀가 혼자였다면 “아이고, 나 때문에 죽었구나.”라고 반성을 하겠는데, 그런 여자들이 그 후에 25명, 그 다음에 50명, 이거 뭐 이병헌도 아니고 장동건도 아니고, 계속 생기게 되면 “신이시여, 저는 왜 이렇게 잘생겼습니까?” 이게 자랑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마다 반성을 어떻게 해요? 주신 이 꽃미남을 어떻게 해요? 일부러 성형수술해서 추남으로 만들까요? 

  

“이 시poem에서 반성을 살펴보면 ‘반성하는 나’와 ‘반성한 나’ 그리고 ‘계속 반성할 나’가 설정되고 있다.” 이걸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제가 평을 이렇게 했어요. 자, 4페이지 한 번 봅시다. 만약 내가 A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나는 A라고 생각 한다" 여기 반성이라는 것은 나쁜 짓 한 것 말고 스스로 논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한 것을 반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A라고 생각 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하게 되고 이는 다음과 같이 반성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나를 A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반성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나를 A라고 생각하는 그 나를 생각하고 검토 한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나를 A라고 생각하는 그런 나를 또 생각하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되면 무한히 이어지겠죠. 그렇잖아요? 

  

보통 사람은 뭐냐 하면, 이해인 같으면 두 번 가겠고, 수녀 아닌 사람은 수녀가 아니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는 거예요. “아휴! 작년 16년에는 나 때문에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 내가 반성할게.” 그러면서 한 번으로 끝나버리죠. “나는 너한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줬는데 내가 그 소식을 뒤늦게 알고 내가 반성합니다. 됐제?” 이걸로 끝나버려요. 되기는 뭐가 돼요? 보통 한 번인데, 왜 한 번이냐, 살기 바빠서 더는 생각 못하지만, 이게 해인사 중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계속 생각하겠죠. “그런 반성하는 나를 무한으로 없애야 돼.” 또 이렇게 나오겠죠. 

  

어쨌든 저쨌든 간에 제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무한으로 끝없이 간다는 겁니다. 끝없이. 만약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잘못을 했다, 그럼 보통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잊어버리세요.” 그럼 우리는 “예. 잊어버리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 후에, 한 5일 뒤에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그러면 대번에 뭡니까? 잊어버렸다는 그것과 안 좋은 일과, 원인과 결과로 엮는데 도사에요. 우리가 엮는데 도사에요. 

  

‘이거 분명히 내가 반성을 했는데? 내가 반성을 덜 했나? 내가 맨입으로 반성했나? 꿇어앉아서 기도할 것을 가지고 그냥 반성한다고 했나? 그냥 대충 때웠나? 참, 주님 그것까지 다 과외하시네. 참 힘들다. 힘들어서 못살겠다. 주님께서 그것까지 다 갈궈서 반성 제대로 안 했다고 이런 보복을 하시나?’ 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그때 내가 잘못했는데 말로만 미안하고 잘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3년 전 일이라면, 지금 1월에 일 생기면 “3년 전에 일 생겼을 때, 그때 제대로 안 했나?” 또 이래 한다니까요. 

  

(질문)“목사님.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 죽였잖아요? 그 후에 나서 반성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그게 좀 헷갈리거든요?” 예, 그 이야기 해줄게요. 그거는 반성할 필요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 강도짓을 할 때 강도짓 하는 것 외에는 달리 구원 할 길이 없는 거예요. 강도짓 한 것도 주의 뜻인데요. 그래서 제가 아까 평을 쓴 것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더 이상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질문)“그럼 바뀐 거네요?” 그렇죠. 주체, 객체가 꼭 나와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질문)“이해인의 주체를 안 받겠다는 말이네요?” 인간의 회개를 왜 받습니까? 하나님이 안 받죠. (질문)“아니, 이해인의 주체가 바뀌지 않고...” 이해인은 쓰레기인데 왜 거기다 신경을 써요. 쓰레기에다가? 

  

이해인만 쓰레기가 아니고 어떤 원인을 자꾸 찾는 것이 쓰레기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A형 O형 찾지 말고, 자꾸 뭔가 지금 결과에 대해서 원인을 찾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수습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좀 더 봅시다. 3페이지 한 번 봅시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견뎌봅시다. “반성하는 나가 반성한 나로 또 앞으로도 반성해야 할 나로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런 반성을 치워버리면 나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부처의 연기법과 똑같다.” 부처의 무슨 법이다? 연기법, 모든 것은 인연으로 되어 있다. 인연이다 이 말이죠. 불교죠. 

  

“그럼 이해인 수녀는 무슨 마음으로 이 시를 쓰는 걸까? 자기 의로움이다. 즉 착한 사람 되기이다. 나는 이렇게까지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늘 나를 돌아보고 내가 알지는 못했지만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까지 나는 반성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잘난 자기를 증거 한 거예요. 십자가를 가리는 마귀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착한 오지랖이다.” 착한 오지랖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 이쁜 존재를 자기행복의 바탕으로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봐! 예수 믿고 이렇게 거룩할 수 있잖아?” 그걸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되면 너희도 된다는 거예요. 그게 천주교에서 말하는 전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착하고 싶죠? 착해서 행복 하고 싶죠? 나처럼 하면 됩니다.” 이게 과연 천주교만 그럴까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또 봅시다. “이런 자기의 착한 존재를 읽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성은 그냥 변신하는 자아일 뿐이다. 이렇게 반성하는데도 용서를 안 해주네? 우씨~하는 나도 만들어 낸다. 나의 행위를 앞장세운 내 의가 항상 먼저 나온다. 이 순간 반성하는 나는 착한 나로 변신한다. 이게 우리 인간의 한계이다. 죽어서도 못 벗어나는 존재의 구조이다. 그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떤가? 이해인 수녀나 나나 똑같다는 거다. 평생 이런 자기 존재 자랑만 하며 사는 자이다.” 이래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넘어갑시다.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이 나와요. “본래 너는 잘못된 존재임(죄인)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이 지적은 둘째 아담이 첫 아담에게서 일으키시는 사건이다.” 상당히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둘째 아담이 첫 아담에게서 일으키시는 사건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해인 이 사람은 자기를 모르는 거예요. 근데 이강진 이 분은 뭘 압니까? 내가 이해인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짓을 하면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 죄인이라는 것은 이해인보다 내가 머리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이 뭐냐, 둘째 아담이 첫째 아담보고 지적질 하는 사건이다 이 말이죠. 성령의 역사죠. 

  

이해인은 자기 자신의 잘남을 증거 하지만, 자기 잘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겠다는 것이 천주교 이해인 쪽이고, 다른 쪽은 뭐냐 하면 절대로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 하겠다는 거예요. 3페이지 맨 밑에 보면 “이 사건이 주님의 대신 죽으심이다.” 이게 중요해요.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이래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대신 죽으심이죠.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을 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가 성령 받지 않아도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해인 수녀는 오늘도 반성했다고 하잖아요.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는 반성하면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번 수련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성하면서 기어이 반성 잘하는 재주꾼으로 살고자 하는 거예요. 근데 이번 수련회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이미 너는 죽었고”잖아요. 사람은 “죽었고”는 듣기 싫어하고 살아서 잘할게요. 계속 살아서 잘하겠다는 것으로 나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순종할게요. 말씀대로 거룩 할게요. 주의 형상 본받을게요. 자꾸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고”를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근데 이강진씨는 뭐냐 하면 이미 주님은 죽으심이라는 말이죠. 혼자 죽었어요? 우리를 껴안고 죽었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함께” 죽었어요. (질문)“그럼 목사님. 이해인 수녀가 거짓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럼 당연하죠. 그건 말할 것도 없죠. 쓰레기라니까요. 원래 지옥이라는 쓰레기통은 쓰레기를 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지옥이 있기 때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지옥에 들어갈 사람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앞잡이고 그런 거죠. (질문)“목사님. 소크라테스 지옥 갔고, 공자도 지옥 갔고...”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세요? 자꾸 그런 것에 미련 두는 것이 수상하네요? 미련두지 마세요.

  

기본 자체가 쓰레기인데,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기는 쓰레기 아니라고 하는데 쓰레기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서 그렇지요. 지옥은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이 왜 있어요? 쓰레기 담으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한 거예요. 쓰레기에다 이의를 달면 안 돼요. 다만 성도는 뭐냐, 왜 쓰레기인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차이점이에요. 우리 옛사람을 벗는 이유를 아는 거예요. 아, 이 땅을 빨리 떠나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겁니다. 얼쩡대지 말고. 

  

제가 이번 수련회 하면서 노동자문제이야기 했죠? 저는 전부 다 비-계약직으로 하고 싶다고. 그럼 다른 사람은 잘 되고 우리는 죽잖아요? 그래 죽어라. 죽으면 되잖아요. 뭐 살 권리가 있습니까? 노동자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하고 살 권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누가 권리를 줬습니까? 마귀가 준 거예요. 마귀가. 마귀가 권리를 준 거예요. 

  

생명은 주님한테 달렸지만, 살겠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누가 준 겁니까? 마귀가 가르쳐 준 거예요. 살면서 주의 은혜인지를 모르고 지가 착해서 사는 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오늘 밤에 데려가셔도, 도깨비가 와서 데려가든,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것이 주께서 힘주셔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질문)“그럼, 목사님. 만약에요 이해인한테 가서 이것을 보여주면서 이런 사건을 주님이 일으켰다고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이해인 수녀가요? 그거는 개신교의 교리고, 착한 사람이니까 이단 소리 안 하고,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고, 우리 천주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천주교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렇게 대답하겠죠. 그 사람들은 천주교 역사를 믿기 때문에. 그리고 개신교는 이단들이에요.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가져오느냐고 하면서 돌아서서 화 낼 수도 있고 그렇죠. 

  

(질문)“근데 목사님. 만약에 안 먹히면요?” 당연히 안 먹히죠. 잘 들어보세요. 그 사람은, 수녀의 자리는 주체+권력이죠. 이 권력은 천주교거거든요. 천주교에서 호명하면 수녀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이번 수련회 때 한 공식이잖아요. (질문)“근데 목사님. 이해인 수녀가 성령을 받으면 그 권력의 자리에 주님이 올 수가 있잖아요?” 성령 받으면 자기뿐만 아니고 모든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고백하겠죠. (질문)“그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가서 이야기해줄 수도 있죠?” 이야기해줄 수도 있죠. 이야기해주지 말라고 한 뜻은 아니고, 다만 그 사람만 지목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거 남한테 멀리까지 갈 것이 없이 본인부터 지목하세요. 

  

자, 또 교재 봅시다. “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용서(살리심)가 이루어지고” 이강진씨의 뜻이 뭐냐, 용서가 미리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회개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미리 이루어졌고, 왜 이 용서가 죽음을 통해서만 용서가 주어지는 이유를, 죄 지어가면서, 내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아가면서 점점 더 주님께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거만 된다는 이 말이죠.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대가 됐다 이 말입니다. “예수를 챙겼죠? 이제는 착하게 사세요.” 이게 이해인하고 다를 바가 뭐냐 이 말이죠. 이 쓰레기하고, 이 이단하고, 쓰레기인 줄 알면 다행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 이 말이죠. 제가 왜 이걸 복사를 했는지 알겠습니까? 이강진 이 분은 이 글을 쓰는데 수 십 년 걸린 것 같아요. 이 글을 우리교회에 올린다는 말은 심사받을 각오를 하고 올린 거예요. 지적받으면 지적받겠다는 뜻으로 올린 거예요. 

  

자, 또 보면 “그래서 주님에게는 법(선악)이 사랑이 된다. 왜? 그 법으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 죽으심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율법으로, 말씀으로 이렇게 주어지는 겁니다. 니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 니가 손님을 대접할 때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느냐? 차 두 잔? 더 해야지? 근데 부부싸움 하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대접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다음에 오라고 하겠죠. 그럼 그 손님이 천사라면 어떻게 해요? 천사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 평생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는 즐거움을 주신다니까요. 제가 서성덕씨가 쓴 수련회 소감에 댓글을 달았죠. 수련회 소감이 세 개나 올라왔잖아요. 그 중간에 서성덕씨가 쓴 글이 있어요. 거기에 댓글을 이렇게 달았어요. 누가누가 잘하나로만 통하는 이 지옥의 경쟁마당에서 원없이 패배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된다 말이죠. 지는 즐거움이. 안 그러면 마귀에게 놀아나요. 히스테리 발작 일으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4페이지 맨 위에 “그 분의 죽음만이 오직 선악의 완성이고 법의 완성이고 용서이고 사랑이다. 율법을 아는 것이 곧 주께 범한 죄를 알게 된다. 죄를 아는 것이 은혜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기부인이다.” 그 다음이 중요해요. 이걸 설명해봐야 되겠어요. “샘이 물을 내는가? 물이 나는가?” 샘이 물을 냅니까?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옵니까? 그렇죠.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오죠. 

  

그러면 주님의 용서가, 은혜가, 내가 믿어야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가 죄인인 나를 통해서 더욱더 은혜 되게 하시는 겁니까? 사랑되게 했죠. 우리는 갈수록 뭐가 되어야 해요? 쓰레기가 되어야 되죠. 이게 즐거운 사람은 성도고, 이게 즐겁지 않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물을 내는 존재이던 물이 나는 존재이던 주체의 존재가 아니라 물이 나오는 기능이 주어지면서 샘이라 이름 지어진다.” 

  

그럼 샘은 뭐냐, 내가 성도라는 것은, 내가 의인이라는 것은 주께서 나에게 용서를 끄집어냈을 때 내가 나왔던 그 뒷자리를 보면서, 나는 분명히 죄인인데 주께서는 나를 뭐로 해준다? 의인으로 해주는 거예요. 의인으로 해주고 그것을 천국이라고, 니가 죄인으로 나왔던 그 뒷자리가 천국 되게 하시는 겁니다. 

  

애가 오줌을 싸거든요. 애만 오줌을 싸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싸지만. 애가 오줌 싼 기저귀를 갈면서 엄마가 화를 냅니까? 안 그러면 기쁩니까? “아이구, 요 예쁜 것!” 하면서 토닥토닥 엉덩이 한 번 쳐주고 분 한 번 발라주잖아요. 즐겁잖아요. 스스로 못하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그래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참, 나올 때 너무나 부모 의존적이고, 그리고 어린아이의 특징이 선악을 몰라요. 꼭 창세기 2장 같아. 나중에 크면서 맴매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선악의 분별성이 있으면서 애의 자유분방함은 다 사라지죠. 그렇게 되면 애를 또 낳고 싶어요. 이 애가 싫어요. 새로운 애를 낳아서 천국을 잠시 맛보고 싶죠. 

  

샘이라고 이름 지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도라고 이름 지어진다는 거예요. 성도라고. 그래서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죠. 교재를 보면,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자기의 선악간 판단이 왜 잘못인지, 또 그 잘못이 왜 밝혀지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주가 주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로 이런 일을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도권이 누구한테 넘어갔습니까? 이미 주님한테 넘어갔죠. 

  

“주님이 스스로 언약하시고 스스로 일하시고 스스로 언약을 이루시고 스스로 영광 받으신다. 거기에 우리 인간이 한자리 할 주체는 없다.” 뭐가 없다? 주체가 없어요. 주인공 역할은 없고, 주체에서 뭐로 바뀝니까? 우리는 지체로 바뀌죠. 지체지 주체가 아니에요. 이번 수련회에서는 뭐가 되느냐, 우리는 한 담요를 같이 덮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거기서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련회에서 기능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은유니, 비유니, 갈라디아서 4장에서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은유에요. “결국 이 시poem에서 반성하는 나라는 존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능이 아니라 반성하는 나 즉 착한 나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썼어요. 자기 그동안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한 문장에 담아서 심사해달라는 식으로 이렇게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또 덕담을 해야죠. 수련회 소감 하나씩 쓸 때마다 덕담을 쓰듯이 해야죠. 이미아 욕하지 말고, 나만 욕하지 말고 여러분들도 쓰려면 쓰시던지요. 댓글 쓴다고 누가 말릴 사람 있습니까? 목사님만 덕담하듯이 댓글 쓰십니까? 자기만 어른입니까? 이런 생각 하시는데, 어른이고 뭐고 본인이 다 쓰세요. 그렇게 모함하지 말고. 

  

제 댓글을 보면, 샘이 물을 내나? 아니면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오는가? 라는 의문은 기존의 현실 세상에서 발을 뺄만한 중요한 계기가 될 만한 명제입니다. 기존의 현실이라는 단일현실에서 발을 뺀 사람이냐, 아니면 계속 거기에 눌러 앉고 있는 사람이냐, 그걸 결정적하는 질문이 뭐냐, 샘이 물을 내나? 아니면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오는가? 그 질문입니다. 내가 남편하고 사느냐? 아니면 주께서 남편을 보내서 나를 살게 하시느냐? 뭐 이런 거죠. 항상 주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상담을 해왔어요. 멀리 미국에서 상담을 해왔는데, 남편이 10년 동안 돈을 안 번다는 거예요. 10년 동안. 그래서 계속해서 교회도 안 나가고 목사님 설교만 보고 있는데, 그저 이혼할까요? 이렇게 해요. 거기에 답변하는데 한 2초 걸렸어요. 2초. 남편보고 이혼하자고 말하세요. 차이가 있어요. 1.이혼할까요? 2.이혼하자고 말하세요. 2번, 이거는 사랑이 돼요. 1번은 미움이 되는 겁니다. 남편에게 대화를 한다는 것은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혼하자고 말한다고 해가지고 이게 이혼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근데 이 분은 10년 동안 돈을 안 벌었으니까, 여자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 곧 폭발할 지경이에요. 폭발할 지경일 때는 사랑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미움이 돼버려요. 이혼할까요? 말까요? 라는 말 그 전에 어떤 생각이 있었겠어요? ‘저거 비행기 타고 가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보상금이나 많이 타게.’ 십년 동안 돈을 안 벌었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돈을 챙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깡패한테 맞아 죽으면 보상금도 안 나오는데, 재벌 3세한테 맞아 죽으면 보상금도 많이 나오기나 할 텐데.’ 온갖 생각을 안 하겠어요? 그 사람이 했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덧붙이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할까요? 라는 말은 제발 좀 죽어줬으면 하는 다른 면이에요. 근데 이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면 이거는 죄 짓는 거죠. 죄 짓는 사람이 하나님한테 기도하면서, 나한테 상담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앞뒤가. 미워하면서도 내가 얻을 것은 얻어야 하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굉장히 나쁜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되잖아요. 그 사랑방법이 뭐냐 하면 우리 이혼하자고 말을 건네는 거예요. 왜? 말을 안 건네면 계속 미워하니까. 말을 안 건네면, ‘내가 인간성 있어서 참아주지, 다른 사람 같으면 니는 벌써 헤어졌어.’ 십년 동안 돈 한 푼 안 가져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혼하자고 말하세요. 따라서 이혼하자고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자신이 주님 앞에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혼하는 이유가 뭐냐? 이혼하는 이유가? 첫째, 생활이 어렵다. 생활이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남편은 안 벌었지만 자기는 돈 잘 벌었거든요. 돈 잘 법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누가 이야기하기를. 돈 잘 버는 거예요. 근데 남편이 돈을 안 버니까 미운 거예요. 자기만 앵벌이 노릇했으니까. 완전히 이용당하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두 번째는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그리고 뭐가 있느냐 하면 지금도 좋다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조건이 유부녀라는 이유 때문에 그 좋은 혼처가 막히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사람도 있고, 더 놀라운 사실은 젊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돈 되고 젊고. SES의 바다가 9살 연하하고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좋아서 입이 째져가지고. 젊은 한국 사람도 있고 외국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자, 제가 이렇게 했어요. 그렇다면 주께서 주신 상황이네요.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받을 제 2의 행복의 시간을 주시기 위한 계기가 주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계획을 다 세우고 나니까 남편하고 이혼만 하면 돈 되고 젊고, 다 됐죠. 좋아한다고 하니까 자기가 그 남자를 쥐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지고. 사실은 다 희망사항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갖추어놓고, 다 정리해놓고, 그 다음에 이혼하자고 이야기했어요.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잘났고, 니는 못났다가 아니라, 나도 너하고 같은 못난 입장에서 이혼하자고 하니까, 이게 주님이 주신 사랑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근데 꾹 참고 살면 누가 갑이 되고 을이 되느냐 하면, 내가 여전히 가정에서 갑이 되는 거예요. “내가 니 많이 봐줘서 산거야!” 그런데 만약에 이혼하게 되면 딸아이가 나중에 결혼할 때 결손가정이 될까봐 그게 또 아쉽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갖 것을 다 생각하는 거예요. 돈 걱정은 안 해요. 자기가 다 벌었으니까. 자기는 벌고 남편은 쓰기만 했으니까. 돈 걱정은 안하는데 다른 걱정을 하려고 하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많고, 물론 자기가 이혼하면 외롭게 살 텐데,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빨리 이혼하고 나에게로 오세요. 누나님!” 누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이 자꾸 생기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매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시간이 다 되가는데, 이것도 실생활 복음적용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다 정리해놓고, 결국은 나는 뭐 주의 뜻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이혼을 요구하는 그런 정립이 됐으면 이혼하자고 말을 하세요. “나도 별 볼 일 없는 여인입니다.”라는 정리를 해서 이혼하라고 말을 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남편 쪽에서 진짜 이혼을 해주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생각이 들죠. 지금 나를 좋아하는 한국남자든, 외국남자든 오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내가 말을 잘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가지고 이혼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남편에게 이혼하게끔 이미 사전조치가 다 되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 이혼해.”라고 남편에게서 말이 나온다면, 그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끄집어낼만한 계기가 없어서 그렇지, 평소에도 자기가 남자기 때문에, 너무 미안하기 때문에, 내가 여자의 행복을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 너무나 큰 자괴감으로, 짐으로 있었는데 아내가 그렇게 해주니까, 그렇게 해주자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처음부터, 진즉에 서로가 이혼하자는 말이 나왔으면 서로에게 좋을 뻔 했는데, 서로 체면 차리고,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래서는 되겠느냐? 이런 되도 않는 마귀가 쳐놓은 위신 때문에 깔끔하게 못 헤어진 거죠. 

  

그래서 제가 말했죠. 진즉에 이혼해야 할 것을 한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래도 이혼하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딸을 생각해서 이혼은 뭐... 안 하죠.”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죠. 이건 평소에 사실은 자기 욕망이 따로 챙겨져 있는데, 그 죄를 교묘하게 감추는 방법으로 어떤 적을 만들어요. 박근혜라든지, 우병우라든지, 최순실이라든지...적을 만들어서 평소에 불만 있던 것을 전부 다 거기에다가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속을 확 풀어요. 속을 확 풀어서 “이 쳐죽일 인간들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갑이 되고 적들은 을이 돼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이유를 아시겠죠. 

  

자, 또 그 다음 댓글을 봅시다. 이 복음이, 말씀이 하나의 사우나라니까요. 우리는 사우나실에 들어있어요. 매일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선과 악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듯이 갇힌 사태를 이해하는 길은,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조차도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위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 위에 보면 악마가 인간에게 다가와 선과 악 사이에 딜레마를 주고 도망쳐버렸죠. 도망친 그 자리에 인간은 선과 악의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악이 나를 사로잡아오는 거예요. 그렇죠? 모든 인간은 그걸 숨기고 있지만 그렇잖아요? 가면을 썼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위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과 악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그 순환에서 빼주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돼요. “즉 자기 인생에서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겁니다.” 이러한 사태에서 이해하는 길은, 빠져나오는 길은, 이런 딜레마조차도 자기 인생에서 책임지지 않는 거예요. 

  

마치 성도님이 다음과 같은 예를 든 것처럼 말입니다. "이웃동네 총각을 혼자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나서 죽은 아랫동네 처녀가 있다. 이럴 때 이 시의 내용처럼 적용을 해 본다면 그 총각은 무슨 반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처녀는 총각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죽었으니 말이다. 나로 인해 상사병이 난 뭇 처녀들에게 총각은 반성과 함께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나?" 

  

그렇다면 자살한 이웃처녀를 나라고 보자 이 말이죠. 그리고 자살한 이웃처녀가 흠모한 이웃총각을 나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가 붙잡고 있는 현재의 잘난 나 때문에 누가 괴로워요? 내가 스스로 바보같이, 등신같이 괴로워하는 겁니다. 그걸 못 지켜 줄까봐. 내가 생각하는 주님이 주신 아름다운 그 모습을 내가 못 지키고, 또 잘못해서 또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처럼 못해서 또 나를 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책임을 누가 져요? 본인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하니까, 이걸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마귀가? 

  

더 이상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마요. 마세요가 아니라 마요. 왜냐하면 뒤돌아보면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임의로 만든 주님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은유니까. 마치 구원받은 강도가 강도짓을 해야 하는 그것 외에는 달리 구원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지막 한 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육체에 속한 자가 있고, 성령에 속한 자가 있는데 한 번 찾아볼까요? 갈라디아서 4장 29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있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누구의 자식이냐 성령의 자식이죠. 그럼 책임은 누가 집니까? 성령이 알아서 지겠죠. 성령으로 난 자식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진다는 것은, 이건 성령을 따라 난 자식이 아니고 육체를 따라 난 자식이에요. 왜? 육체는 육체 외에 믿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본인이 본인의 어머니에요. 

  

성령을 따라 난 자식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의 뭐다? 우리의 마덜Mother이죠. 우리의 어머니라. 자식은 어머니의 관리 하에 있고 책임 하에 있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았다, 강도짓 안 했으면? 안 했으면 구원 못 받죠. 그러면 내가 강도짓 한 것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이 한 둘입니까? 

  

사도바울은 몇 명 죽였어요? 한두 명 죽인 줄 알아요? 스데반 집사님은 누가 죽였습니까? 사도바울이 죽인 것하고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책임자니까. 책임자가 깡패 시켜서 죽였잖아요. 돌 들고 선동해서. 그러면 사도바울이 매일같이 양심에 가책이 돼서 아무 일도 못했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된 거예요. 

  

우리는 이걸 안다고 해서 앞으로 깨끗하고 괜찮은 미래를 생각하는데, 미래를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는 구원받았으면 이 말씀의 사우나탕, 이 제목 외에는 달리 적당한 것이 없는데, 이 말씀의 사우나탕에서 또 무슨 이웃집하고 다투고, 세금문제, 차문제, 부부싸움, 부딪치는 일들이 계속 생겨날 거예요. 그럴 때, 이해인 수녀가 안 되면 되는 겁니다. 

  

반성 필요 없고, 아휴! 나라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어. 나는 내 체면을 위해서 살고, 위신과 체면을 양보할 생각이 없고, 나는 남한테 갑질하고 싶고, 그렇게 성질 떽떽 부리고, 그렇게 자기 딴에는 착하다고 하지만 그 착한 것 다 갉아먹고, 이것이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자신의 기능의 발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구조 안에서, 폐쇄된 구조 안에서, 갇힌 구조 안에서 성도를 통해서 언약의 피만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 지킬 때에 현실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주의 말씀으로 이렇게 장착, 구성해놓으시고, 마련해놓으신 것을 알게 해주시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