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 - 구조의 조건
07,01,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왜 헛되다고 하시는가?
오늘은 교재 1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전도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세상이 헛되다" 라고 하는 정도는 알고 있는데, 하지만 이 세상이 헛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인데,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이 재미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왜 헛되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결론을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그 완성이 이 세상에 스며들면 의미가 되는데, 이 의미가 전도서에서 허무하다고, 그렇게 이미 결론을 지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미 허무하다고 결론이 났으면, 우리는 허무한 것을 아쉬워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완성의 조건이 바로 이 세상이 허무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 세상이 허무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완성된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천국이 따로 마련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기에 이 세상을 우리의 고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세상을 허무하다고 하면 하나님에게 상당히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허무한 세상을 왜 만드셨는지? 이왕 만들려고 하면 좋게 만드시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왜 삐쳤나?"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것은 아니지만, 너무 부정적이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창세기 3장을 보면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고생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고생을 기본 베이스로 깔아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는 고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결론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집어넣은 의미를 무시하는 태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런 고생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힘들 때는 기도하고 좋을 때는 찬양하라" 라고, 그것이 야고보서 5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야고보서 5장이 맞지요?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가 볼 때는 이 세상이 허무하지 않는데, 전도서는 허무하다고 하니 뭔가 격차가 생긴다는 겁니다. 우리는 뭔가 완성되지 않은 것을 완성이라고 여기고, 반면에 진짜 완성된 그 의미는 허무하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공감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무엇이 허무해? 이만하면 살만 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두 개의 구조, 그리고 격차 !!
이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격차' 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주님이 이 세상을 다녀가시면서 보았던 그 의미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의미와는 격차가 난다는 말이죠. 그 격차가 곧 '죄' 라는 것인데, '비거룩' 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오늘 강의할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두 개의 구조를 생각해보겠는데, 먼저 완성된 구조인데, 이것은 천국이죠. 그리고 이 사이를 갈라지게 해서 격차, 차이가 나는 것, 벌어진 것, 그리고 두 번째 구조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의 구조인데, 인간들의 세상보기,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 격차를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전도서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고 하니, 천국의 완성된 구조는 어떠한 것이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지, 그것을 이 격차를 통해서 그 양쪽을 모두 알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제공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을 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인데, 반면에 성경말씀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만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그게 전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어떻게 되던 말던 간에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말씀을 본 사람은 이것이 완성이 아니라 완성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 세상은 미완성 구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완성되지 못한 구조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완성된 구조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익히 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게 미완성이니 그것을 두 글자로 하면 허무가 되는데, 그 허무를 안다는 것은 완성된 의미가 이미 스며들어있는 사람이란 겁니다.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은데, "당신이 성도가 맞습니까?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했을 때, 그 답변이 전도서적인 내용이 나온다면 성도라는 말이죠. "세상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됩니다" 라고 한다면 말이죠.
* A :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B :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됩니다.
* A : 아니,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습니까?
* B : 이게 전도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A : 그러면 그것을 믿습니까?
* B : 성경말씀이니 당연히 믿습니다.
* A : 허무한데 왜 믿습니까?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 B :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기쁩니다.
* A : 왜 그렇습니까?
* B : 허무하다는 그 미완성을 알면, 완성된 세계가 따로 있음도 알게 됩니다.
* A : 정말 그렇습니까?
* B : 미완성에 세계에 소망을 두지 않기에, 좌절할 이유도 전혀 없어집니다.
그러니 자기가 그 미완성에 최종적인 의미나 목적과 목표를 두지 않는데,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실패했다고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어차피 이 세상은 미완성인데, 그런 미완성의 세상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느냐는 겁니다. 미완성의 완성을 기대한 것인가요? 만약에 이 세상을 행복의 완성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격차가 없다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완성된 세계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완성의 의미가 담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말은 좀 복잡해도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그런데 지금부터가 문제인데 말이죠. 완성은 일단 칠판에서 지우겠는데, 격차도 지우고 말이죠. 왜 지우는고 하니, 전도서를 보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 나오는데, 하지만 우리가 늘 전도서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는 것이 바빠서, 그리고 TV에 재미있는 프로도 많고 말이죠. 특히 요즘은 박근혜 게이트 때문에 전도서와 같은 것은 그만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 의미를 말이죠.
그래서 완성을 지우고 격차를 지우면,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꾸려나가면서 얼마나 행복한 세상을 이룰지, 그것만 남는다는 겁니다. 사실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살다보면 전도서도 기억나지 않고 십자가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저 무탈하게 살았으면 한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에 과연 어떤 모순점이 없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행복한 세상, 그런 구조를 이루는데 있어서 미흡함이나 모자람이 없겠느냐는 말이죠.
손해를 지우면서, 자기만의 구조를 !!
여기서 모순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을 전도서가 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어떤 모순점인고 하니, 우리가 이 세상이 다들 살고 있는데, 자기 자신도 살고 있고 말이죠. 이것이 전체구조인데, 그러면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으면, 새끼 구조, 즉 작은 구조를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구조를 만들려고 하면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모두 삭제를 해버리는데, 버릴 것은 버리고 집어넣을 것은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버릴 것은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 쓰레기와 같은 것인데, 계속해서 두면 냄새만 나고 도움이 되지 않으니 버린다는 겁니다.
요즘 금융상품이 많이 나와있는데, 보험이나 펀드상품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그것을 다 가입합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것만을 골라서 선택적으로 가입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다 빼고 말이죠.
그것을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데, 즉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데, 여기서 생기는 것이 바로 '질서' 라는 겁니다. 이 질서가 구조를 만드는데, 그러면 이 질서는 일종의 횡포가 되는데, 대외적으로 말이죠. 바깥을 향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날씨도 더운데 에어컨을 한 대 넣으시죠?" 라고 하면, "집에 있어서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요구사항에 대해서 거부를 하게 것인데, 거부하는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다듬어놓은 질서자체가 자기 몸에 맞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몸에 착착 들어 붙는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을 작은 구조인데, 그러면 큰 구조를 이야기하면,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만 전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땅을 사놓았던 것, 청약저축에 들었던 것, 주식에 투자했던 것, 그런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인민군이라도 내려와서 남한을 점령하게 되면, 그런 것은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때는 싸게라도 재빨리 팔아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냅다 튀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도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없는 자들은 그냥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나름대로는 자기에게 맞는 질서체제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자기를 둘러싼 큰 구조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30살까지 예비군을 군대로 모집한다는 통보가 오면, 자기 자식은 미국에 유학을 간다고 하면 뺀다는 말이죠.
큰 질서에 종속된 작은 질서 !!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고 하니, 자기가 만든 작은 질서가 큰 질서 안에 종속되어있다는 겁니다. 다들 새해가 되면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회의원들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자기가 구축한 작은 질서가 행복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외부적인 질서에 종속되어있으니, 그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고 하니, 대통령을 하나 잘 뽑아서 나라가 안정되는 것을 믿고, 경제적으로 더 좋아져서 자기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을, 그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고, 그런 것을 소망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구조그림을 다 지우고, 달랑 인간만 그려보겠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 인간에게서 평소에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아까 말한 구조고 뭐고 다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자기가 편하게 원하는 것 같지만, 하지만 사실은 그게 우리가 방금 지워버린 것, 거기에 둘러 쌓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작은 구조, 즉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는데, 그런 자기만의 공간이 있는데, 그게 큰 질서 아래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던 것, 이 전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완성이 아니라 미완성 속에 국가가 있고 민족이 있고 정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소박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살림, 즉 작은 아파트에 작은 침대와 작은 옷장, 그리고 작은 싱크대와 같은 것을 소유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게 큰 구조에서부터 너무 불안 불안하다는 말이죠.
요즘처럼 정치적으로 이렇게 흔들려서 대통령이 그만 탄핵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리고 그때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사드 때문에 중국에서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죠.
캐나다는 너무 추워요 !!
자기는 행복하고 싶은데, 그런데 바깥의 것이 안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체제가 말이죠. 그래서 "어서 팔고 뉴질랜드로 이사를 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뉴질랜드에서 받아주어야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덴마크나 핀란드는 너무 춥고 말이죠.
혹시 캐나다로 이민을 고려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제가 팁을 하나 드리겠는데, 4월부터 10월까지는 살만한데, 그 다음부터는 거기도 추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캐나다에 계신 집사님이 사진을 보내주셨는데, 붐부터 가을까지는 천국일지 몰라도, 겨울에는 무려 영하 25도까지 내려간다는 겁니다. 미국의 시카고도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역시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말이죠.
물론 뉴질랜드도 참 좋아 보이는데, 그런데 소비재가 없다는 겁니다. 무엇을 하나 만들려고 해도 부속이 없는데, 그런 것을 만드는 공장이 없으니 말이죠. 독일에 어린 손녀가 살고 있는데,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여기 우리나라에서 보내줄 때가 더 많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마트처럼 온갖 것들이 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왜 주님과 결론이 다른가?
이게 무엇인고 하니까, 미완성이라는 것인데, 전도서에 의하면 말이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그 안에 있으면서도 전혀 헛되지 않은데, 토굴 속에서 나름대로 살만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이미 결론을 다 내렸는데, 미완성이라고, 허무하다고 말이죠. 그런데 정작 우리는 허무하지 않으니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중간에서 뭔가가 틀어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게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악마의 얼굴이라는 겁니다.
이 악마의 권력이 미완성을 나름 완성으로 바꾸고 말았는데, 스스로 "행복하다, 행복하다" 라고 하면서 자기 체면을 건다는 말이죠. 성경은 "허무하다, 허무하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족하다, 족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허무함이 없이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렇게 왜곡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힘인데, 그런 마귀의 생각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와 있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렇게 주님은 미완성이라고 하고 우리는 족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중간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주님이 내린 결론과, 우리가 평생을 살아서 내린 결론이 서로 맞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떠나갔는데, 그런데 우리는 눌러앉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정작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 아들이지만 애굽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런데 모세를 따르는 자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뭔가 다른데, 바로 그 다른 점을 포착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로또복권에 당첨되고 하는 것이 아닌데, 의미의 문제라는 겁니다. 즉 "내가 왜 사는가?" 라고 하는, 그 의미의 문제라는 말이죠.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 !!
아까 우리 장로님께서 강의를 시작하기 이전에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즉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하겠다는 것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을 왜 무시하느냐고 한다는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하시는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십자가 마을과 같은 곳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주장에 대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반응을 하니, 그래서 반발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대상이 지금의 우리가 아닙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구약의 간단한 이 차이점,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성경전체에 대해서 잘못되게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자기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나' 라는 것, '우리' 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닌데, 즉 아브람과 아브라함을 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누가 개입되어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겁니다.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닌데, 아브람은 노력한 적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가지고 직접 여기에 파고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이것이 침투인데, 그러니 우리 인생에 주님께서 직접 침투하셔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자기가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되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서로 반대가 된다는 말이죠. 왜 반대가 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침투해서 들어오실 때 무엇을 가지고 들어오시는고 하니까, 희생, 혹은 제사,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을 가지고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가지고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십자가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러니 그런 하나님을 믿게 되면, 비록 내가 이 땅에서는 이렇게 고생을 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호강한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독교 방송을 들어보면 목사들이 모두들 그렇게 설교를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들이 이렇게 행동하시면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여서 구원하십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출발점이 무엇인고 하니, 현재에 있는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식의 반복이란 겁니다. 그런 방식을 발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기독교 방송의 이단성 !!
기독교 방송에 나오는 목사들 중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해도 구원되지 않습니다" 라고 설교하는 사람은 없지 싶은데, 물론 저도 극동방송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조금의 문제가 생겼었는데, 제가 만약에 기독교 방송에 나간다고 하면, 과연 기독교 방송이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 그것부터 따지고 싶다는 겁니다.
기독교 방송이 과연 복음적인지, 아니면 오히려 적그스도적인지, 그것부터 먼저 떠져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독교 방송에서 저를 초청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물론 요즘은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가져다 바치고 설교를 하지만 말이죠.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이 저를 초청해서 설교를 들으려고 하니까, 당회장 목사가 솔직히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근호 목사는 감당이 안 된다" 말이죠. 그런데 제가 성경에 없는 내용을 설교합니까? 그러니 목사들이 아는데, 그들은 진리를 원하고 복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교회가 융성하고 번성하기를 원하는데,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런 자기 교회를 아까 자기 질서체제라고 했는데, 자기가 여기에 있고 자기가 만든 교회가 여기에 있다면, 이것이 커지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은데, 만약에 이것이 완성이라고 하면, 즉 이미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 들어있다고 하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복음을 아는 목사가 가서 "여러분, 이 교회도 헛되고 헛됩니다" 라고 하면, 당연히 그것을 반기고 좋아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헛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다 헛되지만 자기 교회만큼은 헛되지 않다" 라는 것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것은 일종의 자폐증 환자라는 겁니다.
모두가 자폐증 환자 !!
자폐증이라는 것은 스스로 폐쇄가 되어서 살아가는 일종의 정신병인데,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자폐증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행복한고 하니까, 그것은 자폐증 환자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정신이 멀쩡했다면, 가지고 있는 돈을 벌써 큰아들에게 다 주었을 텐데, 그런데 큰아들이 와도 잘 모르니까 돈도 주지 않고 꿍치고 있다는 말이죠. 반면에 장모님은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도 정신이 멀쩡한데, 연세가 90이 넘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간병인을 쓰려고 하면 돈을 아낀다고 거부하는데, 그래서 딸들이 와서 간호를 한다고 생고생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나름대로 행복하고, 또한 질서체제가 잡혀있는데, 이것을 어려운 말로 '수축' 이라고 하는데, 즉 죄인으로서 딱딱하게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돌맹이처럼 굳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면 갈수록 딱딱하고 딴딴하게 되는데, 이것을 저는 '마귀의 얼굴' 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돈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이가 90이 넘어도 마지막으로 쥐는 것은 돈밖에 없다는 말이죠.
오늘 마침 아내가 이 자리에 없어서 제가 마음놓고 이런 진리를 내뱉는데(ㅋㅋ), 물론 있어도 할 수 없지만 말이죠. 어차피 우리는 버린 몸인데, 누가 뭐라도 해도 우리는 성경말씀이 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기 아내라서 봐주고, 또한 자기 자식이라서 봐주고,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헛되고 헛되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데, 행복한데 왜 헛되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는 말이죠. 지금 박근혜가 문제라서 그렇지, 자기는 아직까지 견딜만하다는 겁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장사가 잘 되는 집은 잘 되는데, 물론 그게 오래가면 아무리 장사가 잘 되는 집도 그 여파가 덮치는데 말이죠.
요즘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그런데 공무원들이나 교사는 신이 난다는 겁니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월급이 또박또박 나오니 말이죠. 오히려 남들이 힘들다고 하니 고소한 맛도 나고, 그렇게 남들이 못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행복만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공정(工程), 아브람을 새롭게 제조하는 과정 !!
아무튼 하나님은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주님이 개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놀라운 힘으로 개입하시면, 우리는 당연히 "주여, 놀라운 그 능력을 저에게 주옵소서" 라고 하겠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픔과 희생과 제사와 죽음을 가지고 개입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는 멀쩡한데 주님이 죽으셔서 그 멀쩡한 자기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신 주님과 함께 아브람을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브람을 죽여버리는 그 작업이, 그 죽음의 자리에서 아브람을 새롭게 제조하는 과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공정(工程)'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물건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나' 라는 주체를 없애고 죽여버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죽어야하는 '나'를 재료로 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공정 안에, 그게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허무하다' 라고 할 때는, 그게 "너의 미완성을 내가 완성으로, 그렇게 새로운 의미를 주입시켜주겠다" 라는 겁니다.
왜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도 자기 아들을 그렇게 갓바위에 바쳐야 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하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의미를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준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5페이지에 나오는데, 찾아보겠습니다.
** 그래서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시고, 그 십자가 죽음사건을 반복하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작업은 이것의 반복입니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과 예수님 !!
여기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누가 개입을 한다고 합니까? 성령님께서 개입을 하신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면 성령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듣고 하는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도 모르면서 성령님에 대해서만 엄청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성령을 받게 되면 아브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아브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오히려 아브람에 대해서 책망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과정에 성령님이 개입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실상을 말한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며,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은 왜 가셔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시지 않으면 성령님은 오시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슨 리턴매치도 아니고 말이죠. 두 분이 같이 계시면 될텐데, 그게 아니라 왜 한 분이 가야 한 분이 오느냐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현장을 떠나야 성령님이 오시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떠나지 않으면 성령님은 오시지 않는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실상이라고 하는데,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전체구조와 관련성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구조를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먼저 사도행전 17장을 보겠는데, 30절에서 32절입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여기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라고 하는데, 그러니 뉘앙스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께 허물함을 당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손을 봐줘도 당연한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으셨다는 말이죠.
이것들을 확 패버릴까?
이것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전도의 내용인데, 흔히 전도지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이, 이것들을 그냥 확 패버릴까?" 라고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패도 되는데, 그런데 꾹 참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정하신 사람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봐서, "언제 작살을 내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와 역사는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멀쩡한 세상을 왜 심판하시지? 그 증거를 대보세요"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게 바로 증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그게 이해가 됩니까? 될 리가 없는데, 이 세상이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이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이 세상이 그렇게 악한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즉 "이래서 악하고, 이해서 나쁘다. 이게 증거다"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셨다. 그것이 증거다" 라고 하니, 그러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세상이 이래서 나쁘고, 저래서 악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인데, 구약에서는 지적을 하게 되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니가 이래서 잘못이다"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라는 것이 되는데,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미 끝나버렸다는 겁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유일하게 하나님은 만난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죠. 그분이 아버지 앞에서 무엇을 받았는고 하니, 저주를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합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에 합류했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마저도 저주를 받았다고 하면, 모든 것이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미 끝난 문제인데,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비윤리적인 것을 참고 견뎌야 !!
여기서 우리는 비윤리적인 것을 견뎌야 하는데,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것을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만약에 자기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짓을 했다고 하면, 하지만 그것을 잘못이라고 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운전을 하면서 그만 욕을 했는데, 그래서 자기 머리를 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욕을 하다니?"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남에게 욕을 했으니 당연히 나쁜 짓인데, 그러니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깨달아서 반성하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것은 신약적이 아니고 구약적이 되어버리는데, 즉 "앞으로 잘할게요.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평소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런 시간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우리가 복음을 외치고 있지만, 우리의 실질적인 행동은 복음적이 아니라 윤리적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만약에 자기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고 하면, 이것 때문에 어떤 생각이 납니까? "이것 때문에 자식놈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되는데, 부모가 되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까? 들지 않습니까? 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수능시험이 다가오고 하면, 고3 수험생을 둔 부모들은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을 한다는 겁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값도 심하게 깍지 않고 말이죠.
이게 바로 윤리적으로 사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직도 구약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새삼스럽게 윤리를 따질 입장에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것은 이미 의미가 종결되었다는 것인데, 우리가 해마다 고아원을 방문하고, 그리고 자기 간을 떼 주고 해도,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은 이상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윤리와 도덕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큰 소리를 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게 믿음의 증거라는 말이죠.
이렇게 보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찾기 힘드는데,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무엇입니까? 대표자가 이미 아버지 앞에 나서서 자기가 속해있는 이 질서체계, 이 구조가 그 성질을 발각을 당하고, 거기에 처벌까지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통 채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죠.
강의를 새로 다시 !!
강의를 새로 하겠는데, 나이가 많아서 자꾸만 잊어버리니 말이죠. 아까 여기에 국가라는 구조가 있고, 그리고 그 안에 작은 구조가 있는데, 거기에는 한 평생 살아온 자기 인생이 있다는 겁니다. 이 구조 안에서는 질서가 잡혀있는데, 그리고 이 질서는 어떤 질서인고 하니, 이 질서 때문에 자기가 굉장히 행복하다는 것이죠. 고생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나름 평생을 착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식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마치 토굴 속에 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구조자체를 미완성으로 보시는데,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그 미완성의 특징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자기는 행복한데, 그런데 왜 헛되다고 하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죽고 싶은데,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헛되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과 우리 뭔가 중간에 틀어지고 말았는데, 누군가가 와서 훼방을 놓았다는 겁니다. 주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어떤 주체가 있는데, 그것을 밝혀내 보자는 말이죠.
천국이, 그 천국이 아니기에 !!
처음에 제가 '격차'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즉 완성된 나라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격차와 완성된 나라를 지웠는데, 그러니 지금 우리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산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격차가 다시 오게 되면, 그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연장선으로서의 천국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이 아닌 아직도 아브람을 유지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에서 헛되다고 하면서 이브람을 침투해 들어오면, 아브람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반발을 하겠습니까? 강력하게 반발을 하는데, "나는 이 정도이니, 나는 이 정도에 스스로 만족하니, 더 이상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이 바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발인데, 성경에서 그렇게 찾지 못했던 말이죠. 그들이 왜 극렬하게 예수님을 반대했느냐는 겁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주동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느냐는 말이죠. 그들은 지도자층에 있었는데, 엘리트들인데, 그러니 나름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것을 그만 뒤흔들어버리니, 그들은 이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오히려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들은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촛불집회에서 사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말이죠.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씀이 바깥에서 있는 질서, 즉 완성에서 나온 것인 줄을 모르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시킨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우리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면 주님이 우리나라를 행복한 나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여기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구약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신약은 그렇지가 않은데, 신약은 완성이라는 겁니다.
이 완성에서는 개인이 비윤리적일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공포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물만 마셔도 비윤리적인데, 또한 숨을 쉬는 것도 비윤리적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가 글을 쓰는 것도 저주를 받을 짓이란 말이죠. 그렇게 되어야 마귀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경건을 요구한다 !!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적인 부분에 도착했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는 경건을 요구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2,000년 동안 깊숙하게 숨겨놓고 우리를 다루었던 방법인데, 즉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거룩하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부합될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팔정도'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등등, 그러니 들어보면 불교가 기존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경건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계속해서 거룩과 경건에 쫓기도록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만들어야 자기 수하가 되는데, 그래서 윤리와 도덕과 경건에 종속이 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 똘마니가 된다는 말이죠.
'바르게 살기 운동' 이라고 하면 관변단체의 냄새가 나는데, 혹시 최태민이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저는 그런 사람을 보면 묻고 싶은데,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물어보면, 결국 마지막으로 나오는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다는 말이죠. 누가 행복해야 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우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인데, 그게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마귀는 우리에게 이것을 덤탱이를 씌워서 꼼짝도 못하도록, 그렇게 우리는 마귀에게 당하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사골국과 악마의 아바타 !!
오늘 강의제목을 이것을 정했는데, '사골국' 이라고 말이죠. 물론 너무 독특해서 바뀔 가능성도 있는데 말이죠(ㅋㅋ). 왜 사골국인고 하니, 소뼈를 푹 삶게 되면 소뼈는 보이지 않는데, 국물이 우윳빛으로 다 덮혀서 말이죠. 그렇게 이 세상 전부가 악마의 이미지인데, 그것이 곧 경건이고 거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깡패세계에서도 착해야 한다는 겁니다.
북한의 치안법이 얼마나 윤리적인지 모르는데, 즉 뿌연 경건의 우윳빛이 위를 가리고 있는데, 하지만 정작 그 안에는 뼈다귀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악마는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바깥을 뿌옇게 만드는데, 그렇게 윤리적이고 경건하게 해서, "누가 누가 잘하나? 착하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렇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그러니 우리가 바로 마귀의 아바타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늘 쫓기니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행동을 잘못하게 되면 내 자식에게 저주가 임하니, 자식을 봐서라도 내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살게 되면, 그러면 그 복이 내 자식에게도 돌아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불교인데, 그런 것이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 습관화가 되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마치 사골국물이 뿌옇게 우려 나오듯이, 그렇게 우려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역시 지금도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사님, 제가 이런 이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기도를 더 할까요? 헌금을 더 할까요?" 라고 하면, 저는 그만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데, 완전히 농심이라는 겁니다. "아무 먼저, 형님 먼저!" 라고 하듯이 말이죠.
왜 옛날에 그런 광고가 있었잖아요? 동생이 "형님은 식구가 많아서 더 필요합니다" 라고 하면서 볏단을 가져다주면, 그러면 형님은 "동생은 새로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나보다 더 필요하다" 라고 하면서 또 볏단을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그게 농심라면이 첫 번째 나올 때의 표지그림인데, 이게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무엇이 삭제가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짜로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그 십자가라는 증거가, 즉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해도 망하도록 되어있고, 그것은 이미 결정이 되었다" 라고 하는 완성된 의미를, 마귀는 그것만 가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복음만 들리지 않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을 들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떻게 됩니까? 또 다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으로 무장되어있는데, "그래, 착해야 한다. 복음을 아니까 더 착해야 한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역사와 묵시 !!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한 것을 여기 잠깐 다시 하면, 강도들이 달린 십자가가 여기에 이렇게 두 개가 놓여있는데, 하나는 구원을 받은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을 받지 못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한 쪽은 묵시적이고, 다른 한 쪽은 역사적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이런 말 자체가 어려운데, 역사적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게 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한다" 라는 것은 과거에 속하고, 또한 "이런 결과가 나온다" 라는 것은 미래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현재의 결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현재라는 것은 이렇게 뾰족하게 되어있는데, 즉 현재라고 하는 순간 이것은 이미 과거와 미래로 갈라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현재라고 여기는데 돌아서면 벌써 과거로 가버리고, 또 다시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역사적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 라고 하는, 즉 "내가 착한 일을 하면 자식에게 행운이 오고, 내가 나쁜 일을 하면 주변에 나쁜 일이 생긴다" 라고 하는, 그것이 역사적 안목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 당신이 나를 건져주면, 내가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잘 믿어주겠습니다" 라는 것이 어느 한 쪽의 강도인데,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는 몰라도 말이죠.
그런데 묵시는 무엇인고 하니, 역사와 관계가 없는데,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강도가 되도록, 이미 그 코스로 가도록, 그렇게 완성된 의미에서 강도가 되게 했기 때문에, 자기가 강도가 된 것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에 완료된 것이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강도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예수님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인데, 즉 자기의 행복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자기는 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둘 가운데서의 관계성, 그렇게 의미가 서로 관통하는 튜브와 같은, 자기와 주님의 튜브, 그것을 다른 말로 '유튜브' 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즉 '나'와 '너'의 튜브라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 연관성이 있는데, 예수님이 원인이고 우리는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서 역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묵시라고 한다는 말이죠. 묵시 자체가 완료이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적 용어로는 달리 어떻게 이 묵시를 표현할 수가 없는데, "묵시는 이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역사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단어는 그것을 뜯어보면 역사적 인식이 되어있어서, 묵시를 어떻게 그런 단어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하면, 그게 곧장 역사로 바뀌고 만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완성했습니다" 라고 밀어 넣으면, "그 완성한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라고 하는 순간 그만 역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실례지만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파가 "실례지만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묻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묵시적 용어를 역사로 다 바꾼다는 겁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마저도 역사로 바꾸어서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원파라는 마귀집단을 통해서 묵시를 역사로 만든다는 겁니다.
구원파는 그러하다고 치고, 그러면 기존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아예 역사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 채워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 서정에는 시간적 요소가 들어간다는 말이죠.
개혁주의 신학에 보면 이것이 나오는데, 그래서 신학교에서 모두들 이것을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개혁주의 신학이 이단인 이유에 대해서 10가지를 대었는데, 물론 그들은 그것을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과거의 동결 !!
아직까지 제가 주님이 가셔야만 성령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준비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려운 대목을 다시 해보겠는데, 시간은 뾰족하기 때문에 현재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그게 과거로 변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과거의 어디로 가는고 하니, 여기에 구조가 있는데, 이것을 아까 질서라고 했는데 말이죠. 자기의 과거 중에서 괜찮은 과거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여기 구조 안에서 그만 동결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왜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가 되어서 냉동을 시켜놓으면, 백 년 뒤에 해동을 시켜서 세포를 활성화시키면 다시 살 수 있는, 요즘 그런 시도를 실제로 한다는 겁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서는 2억을 주면 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이 필요한 사람은 젊어서부터 열심히 저축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 과거가 괜찮다 싶으면 그게 찬란한 역사로서 동결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질서는 더욱 더 고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괜찮은 과거는 상당히 윤리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똘마니들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우리는 감을 좀 잡아야 하는데, 우리는 유대인들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고, "이 나쁜 유대인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0만이 죽어도 당연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우리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계속해서 쫓기고 있는 입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마귀의 아바타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죠. 행복을 추구하는 자체가 그만 불행이 찾아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구조의 조건 !!
여기서 오늘 강의제목을 정하겠는데, 그게 '구조의 조건' 이라고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가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자기 튜브만을 위해서 갖추는 구조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바로 그것은 악마가 넣어준 것인데, 그것이 곧 "당신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니가 선을 많이 쌓게 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그 혜택이 돌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니가 세상의 축복은 축복대로 받아 챙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악마의 아바타로서, 마치 사골국의 국물처럼 뿌옇게 떠오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질서의 바다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왜 예수님은 떠나야만 하는가?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왜 예수님은 떠나야만 하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떠나야 한다는 것은 주님이 보따리를 싸서 알아서 가시는 것이 아닌데, 누가 떠밀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떠밀어줍니까? 사단이 떠밀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이렇게 바닷물이 있는데, 그런데 그게 모여서 사람의 형태로 변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충격적이지 않겠습니까? 왜 사골국물 속에는 뿌옇게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뼈가 들어있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까지는 이 세상은 인간의 세상인데, 그러니 인간의 구조가 전부라는 겁니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하는데, 그게 전부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 갑자기 이 뿌옇던 물이 그만 악마로 변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악마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를 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여기 안에 속해있는데, 인간들 눈에는 뿌연 국물만 보이지 뼈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너나 나나 모두 같은 인간인데, 그러니 인간끼리 모여서 단결하자" 라고 하는데, 그것만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현실을 모르니 자기 구조 안에서 자기 행복만 추구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 어떻게 됩니까? 가만히 있던 이 구조전체가 이상하게도 '너'와 '나' 할 것도 없이, 오직 무엇만 공격한다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을 공격하는데, 그렇게 공격할 때 그 핑계가 무엇인고 하니,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말이죠.
그러면 어리석지 않고 미련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이라고 했는데, 즉 "우리는 율법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착하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착함과 윤리와 도덕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자기 주체파악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착함과 경건과 윤리와 도덕을 누구와 비교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기를, "나는 착해서 행복하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것으로 만족해하는데, 그런데 왜 누구와 비교를 하느냐는 겁니다.
밑반찬을 1,000가지나 만드는 착한 아내 !!
옛날에 TV에 그런 내용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체육교사를 하다가 몸이 아파서 그만 두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암이었다는 겁니다. 그때 아내가 40대 중반이었는데, 그러면 다시 시집을 갈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런데 그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남편을 위해서 밑반찬을 무려 1,000가지나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보통 여자들이 밑반찬을 5가지 만드는 것은, 이 여자에 비하면 비경건이라는 겁니다.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밑반찬을 무려 1,000가지나 만드는 여자에게는 가까이 갑니까? 가지 않습니까? 말은 대단하다고 하면서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까이 가면 자기가 그만 비윤리적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그 구조를 철폐해야하는 부담이 생긴다는 말이죠.
자기는 그동안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행복을 누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옆집에 밑반찬을 무려 1,000가지나 만드는 여자가 이사를 오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이 알게 되면 자기에게 뭐라고 하겠느냐는 말이죠.
"옆집 아줌마는 남편을 위해서 밑반찬을 1,000가지나 만든다고 하는데, 당신은 나에게 라면도 제대로 끓여주지 않고,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고?" 라고 하게 되면, 자기는 행복하게 될 조건의 구조가 그만 깨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지금이라도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더라도 그게 마땅한 것이 되고 마는데, 그게 자기에는 손해가 된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지금 사람들이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행복할 만해서 행복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나름 움켜쥐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사골국물이라는 겁니다. 마귀에게 우리가 그렇게 배웠다는 말이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그러했는데, 그러니 여기에는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아픔이 들어올 여자가 없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십자가를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치워버린다는 말이죠.
지금도 행복한데 왜 굳이 십자가를 알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옆집에 누가 이사를 왔습니까? 밑반찬을 1,000가지나 만드는 아주머니가 이사를 왔는데, 그러니 그 아주머니가 이사를 가든지 해달라는 말이죠. 그때부터 남편들의 잔소리가 늘어나면서 "나는 내 아내가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줄 알았는데, 개코다. 1,000가지는 아니더라도 10가지는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여자하고 살아라 !!
그렇게 되면 여자들이 하는 말이 있는데, 핵심은 피해가면서도 지지 않으려고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좋으면 그 여자하고 살아라" 라고 하는데(ㅋㅋ), 그러면 남편은 아내를 달래면서, "내 뜻은 그것이 아니고, 당신이 고맙기는 고마운데, 그래도 조금만 더 챙겨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자는 더 화가 나서 "오늘 저녁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집에 보일러 기름을 넣어주는 곳이 '청산 주유소' 라고 와촌으로 가는데 보면 있는데, 옛날부터 단골인데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남자가 기름을 넣어주는데 그만 싱글벙글한다는 겁니다. 누가 그 이유를 묻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자기 아내가 처음으로 친정을 갔는데, 그게 자기는 그렇게 좋다는 겁니다.
아무튼 마귀에게 길들여진 인간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를 않는데, 아브라함도 생각하지 않고 이삭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누구만 생각합니까? 오직 자기 자신,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나마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하는,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이미 악마가 집어 넣어준 생각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니가 지금 행복하게 사는 조건은, 니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착하게 살면 행복하지만, 악하게 살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고 지옥으로 가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세뇌를 받은 것이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데, 이게 바로 구조의 조건이란 말이죠. 우리가 사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십자가가 빠져버린 미완성이란 말이죠. 즉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가 오래 살아도 헛되고, 행복해도 헛되고, 공부를 많이 해도 헛되고, 가난해도 헛되고, 일찍 죽어도 헛되고, 어떻게 살아도 헛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그러니 헛되다는 것이 바로 사골국물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가마솥 안에 있는 인간은 그 어떤 식으로 살아도, 그게 완성된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전도서에서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제 마무리를 !!
이제 마무리를 해야하겠는데, 성령이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마귀로부터 빠져 나오고 난 뒤에 성령께서 오실 때는, 마귀가 이미 여기에 상주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성령이 와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실 때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상황 그대로 오시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 있어야 하는지, 먼저 그것을 알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밀려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래서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난 뒤에 성령께서 찾아오시게 되면, 그것은 개인의 구원이나 영달을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이 전체 구조에 대해서 한꺼번에 찾아오시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 속에서 꾸준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에 의해서 구원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어떻게 구원이 되는 겁니까?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치겠는데 말이죠.
예수님은 보쌈꾼 !!
그러니 구원이란 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강의제목을 바꾸고 싶은데, 이제는 참아야 하겠지요(ㅋㅋ). 우리의 구원은 납치를 당한 것인데, 예수님에게 말이죠. 그것을 전문용어로 '보쌈' 이라고 하는데, 그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남의 집에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갔으니 도둑인데, 마지막에 주님이 어떻게 오십니까?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이죠. 도둑이라는 것은 초청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원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죠. 미련하고 어리석은, 전혀 우리의 행복과는 무관한, 예수님은 그런 소리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초청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제로 들어와서는 TV나 냉장고와 같은 세간을 꽁꽁 묶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묶인 세간인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꼼짝도 할 수 없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만 도둑의 보따리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두지 속에, 즉 뒤주와 같은 것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뒤주' 라고 하니 비운의 세도세자가 생각하는데,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나중에 그 뒤주를 열고서 나오니까, 아버지 영조가 다시 사도세자를 집어넣고 그만 새끼로 뒤주를 꽁꽁 묶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결국 굶어죽고 마는데 말이죠.
그렇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자기가 윤리적으로 하지 않으면, 자기도 저주를 받고 미래도 지옥에 가고, 그리고 자식들도 역시 저주를 받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제2의 천성이고 그만 습성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꾸준하게 우리는 마귀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는데, "착해야 돼. 더 착해야 돼!"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착함도 밑반찬을 1,000가지나 만드는 여자가 오면 밀려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내가 당신 때문에 덜 착한 것이 되니, 저리 꺼지세요"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밀쳐낸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를 쫓아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데, 자기가 잘나서 교회가 이렇게 부흥이 되었는데, 거기에 그만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밀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사골국물이라는 겁니다. 그게 보이지 않는 악마의 아바타인데, 악마의 분신들이라는 말이죠.
물론 우리도 그런 품성을 이미 습득해 있는데, 그래서 설교를 들어도 "오늘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겠지"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납치를 할 때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그만 뒤주에 담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착해야 복을 받지.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자식들이 잘 되겠지. 자식들은 그것도 모를 거야" 라고 하는데, 뒤주 안에서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납치를 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아직도 뒤주 안에서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해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뒤주 안을 어떻게 하십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시면서, 전도서라는 작대기를 쑤셔 넣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인데, 물론 우리 인간들은 나름 자기는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웃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 행복이라는 구조의 조건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는 겁니다.
아하, 성령께서 일부터 이런 사태를 만드셨구나 !!
그러면 그런 것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비록 우리가 어떤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주제파악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령께서 일부러 그런 사태를 만들었다고 여긴다고 하면,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나의 행복만 추구한 인간인데, 그게 그만 티가 나고 말았어" 라고 하도록, 그리고 우리가 그런 짓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순간 순간 그런 일들을 일으키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성령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능력인데, 그것은 뒤주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그리고 보자기에 싸서 크레인으로 끌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 안에서 자기 자랑밖에 하지를 않는데,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크레인으로 끌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끄르륵, 끄르륵" 라고 하면서 강제로 납치해서 올라가는 소리가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과 제사의 능력인데, 물론 그런 소리가 항상은 아니고 가끔 들리는데, 그러면 "아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존재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크레인에 매달려서 납치가 아니면 구원이 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인데, 그러면서도 바깥에서 들리는 십자가의 희생소리를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14 오후 11시에 마침.
이제 뉴스를 보는 것도 좀 절제하려고 했는데, 갈등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