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 - 넘어오심
07,03,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면 전도서 전체의 내용을 알 수가 있는데, 이 전도서에는 10가지가 없고 8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난다는 하동의 화개장터에 가면, 거기는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여기 교재 24페이지 이하에 나오는, 전도서에는 없는 것 10가지를 하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성경말씀과 신앙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죠.
첫째로, '하나님의 지시가 없다' !!
그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첫째로 "전도서에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다" 라는 겁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시를 하고 우리는 순종하고, 그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인데, 그런데 전도서에는 그런 지시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지시가 없을까요? 그것은 간단한데, 지시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능력도 없을뿐더러,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지시할 능력도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의 김정은이 자기 부하에게 지시를 하면 따르는데, 그러면 그게 순종인가요? 아니면 부하가 김정은을 이용한 것인가요? 당연히 이용한 것인데, 인간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자식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말이죠.
그냥 다들 듣는 척을 하는데, 왜냐하면 들어주면 뭔가 떨어지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노림수가 있는데, 즉 "너는 갑질을 해라. 나는 을질을 하겠다" 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 것을 챙기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순종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사랑'의 관계만이 !
그런데 스스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경우는, 성경에서는 그게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 이라는 겁니다. 이 경우에는 아예 지시를 하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제발 나를 좀 다루어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즉 "당신이 저를 이용해주신다면, 저는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라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아침에 저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는 니가 없으면 못살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용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좀 아리송한데, "나를 버리지 말라" 라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버리지 말라달라는 것인데, 물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지만 말이죠(ㅋㅋ).
아무튼 사랑은 혼자 살지 않겠다는 것인데, "당신 때문에 내 인생에 의미가 있고, 당신 때문에 살겠습니다" 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사랑은 지시와 복종의 관계가 아닌데, 지시가 있던지 없던지 간에 창조주를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 있으면 자기에게 어떤 수난과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하게 이용하지 않는 관계라는 말이죠.
부부관계 !!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부부관계' 라는 겁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부부사이가 아니고, 남편은 아내에게 "나는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라고 나오는 자만이 남편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데, 즉 "이 여자야, 나는 남편이고 너는 아내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남자, 그것을 성경은 남자가 아니라 남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이 신세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구세대와도 다르지만 말이죠.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것이 먼저 전제되고 난 다음에, 아내는 그러한 남편에게 복종을 하게 되는데, 어떤 식으로 복종을 합니까? 교회가 주님에게 하듯이 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가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앞에서는 분명히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놓고 말이죠.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생각한 교회는 무엇인가요? 혼자 살지 않은 집단인데, 즉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하면서 살지 않는 자들의 모임,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박사모' 라는 것이 있는데,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이라고, 일종의 팬클럽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사랑' 이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세상에서의 사랑인데, 그런데 여기에 성경의 용어를 집어넣으면 종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거의 종교집단인데, 아무튼 이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사랑이라는 것은 "당신만 살 수 있다면 내 목숨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라는, 그런 의미이고, 그런 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다시 물어보겠는데, 주님이 그렇게 교회를 사랑했다고 하면, 그러면 교회는 주님을 이용하겠습니까? 사랑하겠습니까? 사랑의 관계라고 하면 절대로 교회가 주님을 이용하지 않는데,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벌써 시작된 천국 !!
이것은 죽어서 천국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시작된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는데, "태양은 왜 도는가?" 라고, 그런 과학적인 질문들을 던져본다는 말이죠.
동양에서는 자연을 이용할 생각만 했지, 따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번개가 치면 "왜 번개가 치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진노구나" 라고 했다는 말이죠.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번개가 왜 치는지를 발견했는데, 번개는 음극과 양극의 부딪침에서 온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곧 과학인데, "사과가 왜 떨어질까?" 라는 것이, 그게 동양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사과가 떨어지면 고맙게 먹으면 되는 것이지, 그런 것을 왜 따지느냐고 한다는 말이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사과와 지구 사이에서 당기는 힘 때문인데, 그게 중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동양에서는 이런 과학이 발달할 수 없는데, 자연의 푸근함 속에서 살 때까지 살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동양에서 발달한 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인데, 즉 "저 인간을 어떻게 통치하고, 저 인간에게는 어떻게 세금을 떼먹을 것인가?" 라고 말이죠. 관료가 되어서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렇게 난이나 치면서 풍류를 즐기면서 살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왕과 국가 !!
그러나 서양은 그게 아닌데,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연구를 했다는 말이죠. 물론 동양과 서양이 같이 시작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관개사업' 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물을 다룬다는 겁니다. 특히 농사를 지을 때는 물을 잘 다루어야 하는데, 그래야 곡식을 많이 수확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런 관개사업은 힘을 합쳐야 가능한 것인데, 그때 오야붕이 누구인고 하니까, 바로 '왕'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가 성립된다는 말이죠.
다들 고인돌을 아시죠? 아무나 고인돌이 되는 것이 아닌데, 그 지역의 추장이나 족장 정도는 되어야 고인돌을 세운다는 겁니다. 이들은 각 개인이 할 수 없는 것을, 전체적으로 힘을 모아서 할 수 있도록 하는 자들인데, 그런 부족들이 합쳐지면 국가가 되면서, 그 위에 왕이라는 최고의 자리가 생기게 되는데, 그 왕이라는 자리가 안정이 되어야 나라가 안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농경시대에서 농사라는 것이 항상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을 조지게 되면 그만 남의 나라를 넘보게 되고, 그러면 깡패와 같은 집단인 군대를 키워야하고,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많은 돈이 드는데, 그런 일을 왕이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국가는 전쟁을 하는 조직체인데, 틈만 나면 쳐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곡식만 탈취하는 것이 아닌데, 소금이라든지, 철, 구리, 모피, 면화, 후추 등등, 그리고 징기스칸의 경우에는 좋은 목초지를 찾아서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곧 깡패의 역사이고 전쟁의 역사인데, 남이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보고 있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쳐들어가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려야 속이 시원한데, 그것을 고대의 왕들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왕이 없으면 국가가 안정성이 없는데, 그래서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슬슬 왕을 찾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왕이 있으면 국가가 왕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런데 왕이 중심이 되면 그때부터 지시가 내려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전도서에는 지시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런데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지시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왕은 참으로 마음씨가 너무나 좋아. 아무 것도 시키지 않으니 말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전도서에서는 그게 아니라, "너희들은 지시를 해봐야 따를 수 있는 있는 능력이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제가 왕을 언급하면서 지시가 없다는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시는데, 그러니 인간 대 인간에 있어서 누가 지시를 해도 억지로 그 순간만 때우면 그만인데, 지시를 받는 척을 해서 이익만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적으로 휘어잡을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여보, 플리즈 !!
그래서 자식에게 지시를 하더라도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지시를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지시를 할 때,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냥 부탁하는 마음으로, "여보, 플리즈!"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당신은 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라고 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격다짐을 하면 안 되는데, 그게 계속해서 쌓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밟으면 죽고 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달라 들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신의 지시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보고 스스로 질문을 해보라는 것인데, "왜 나는 지시를 받아도 소용이 없는가?" 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면 계속해서 질문을 해보는데, "해는 어떻게 뜨고 지는가? 또 달은 어떻게 뜨고 지는가? 그리고 바닷물을 왜 밀려오고 또 빠져나가는가?" 라고 말이죠.
그렇게 과학적인 질문을 계속해서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스톱이 되는고 하니, "그런데 내가 왜 알아야 하지? 해가 어디서 뜨고 지는지를 왜 알아야 하지? 밀물과 썰물을 왜 알아야 하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저기 서산에 가면 바닷물이 빠지고 나면 꼬막을 캐는데, 그런데 그 꼬막이 정말 맛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질문을 거기서 멈추면 안 되고, "왜 꼬막이 나에게 맛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맛이 있으면 행복하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비겁하게 거기서 질문이 더 나가지를 않는데, 즉 "내가 왜 행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웃음꽃이 피기 위해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내가 웃음꽃이 왜 피어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울음의 바다는 왜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나는 천국에 가야하고, 지옥에 가면 안 된다" 라고 하는데, 왜 자기는 지옥에 가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과연 거기에 대한 정당성이 있느냐는 말이죠.
사람들이 겁이 나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데, 그러니 교회에 다니던 다니지 않던 간에 모두들 무척 비겁하다는 겁니다. 진리를 알려면 계속해서 질문을 해야하는데, "왜? 왜? 왜?" 라고 하면서 말이죠. 갈 때까지 계속해서 가는 것인데, 그러면 그 질문의 끝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질문의 끝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라고 했는데, 그는 거기서 스톱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고 하면, 그런데 그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 두려워한다는 말이죠. "나는 왜 행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겁이 나지 않는데, 이것이 같은 질문인데, 즉 "나는 왜 불행하면 안 되는가?" 라는 겁니다. 남들은 다 불행하더라도 자기는 불행하면 왜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불행을 주는 것도 신의 자유인데, 그런데 왜 자기만 빼달라고 신에게 윽박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이것이 인생이다 !!
과거에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TV프로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팔자가 더러운 사람들을 다 모아놓았는데, 물론 실화라는 겁니다. 아이는 병에 걸려있고, 남편은 도박을 빠져있고, 자기는 공장에 다니다가 손가락이 잘려서 장애자가 되고 말이죠. 이게 기본인데,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이 프로그램에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는, 자기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아이를 자기 마누라에게 맞기고, 또 자기는 바깥에 나가서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가끔 집에 와서는 돈을 달라고 하면서 행패를 부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남편은 내치면 되는데, 받아준다는 말이죠. 거기에다가 그 남자의 시어머니가 와서 이 며느리의 머리를 쥐어뜯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혼한 자기 딸의 아이를 이 며느리에게 맡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며느리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자식과,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낳은 자식과, 시누이의 자식까지도 키우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 키워서 결혼을 시키는데, 그러니 인간 속에는 천사의 본능이 있다는 말이죠. 압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점점 더 천사가 된다는 겁니다.
주로 그런 여자들이 어디에 갑니까? 절에 많이 가는데, 자기가 고생을 하면 나중에 그게 자식에게는 복이 온다고 믿기에 말이죠. 그것을 믿고 버틴다는 겁니다. 자기는 천사가 되고, 주변 사람들은 그만 악마가 된다는 말이죠. 원래 악마지만,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자들이 주로 당하고 마는데, 그러면 저는 그런 여자들에게 묻고 싶은데, "당신은 왜 착해야 하는가?" 라고 말이죠. 악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대보라는 겁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수천 번을 이야기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악합니까? 선합니까? 악한데, 그런데 왜 자꾸만 천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프로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말이죠.
너는 무조건 선해야 한다 !!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미처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악마의 본성을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여자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괴물들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에 붙들려 있는데, 즉 "너는 무조건 선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선하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강의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말이죠. '선하다' 라는 것은, 이것은 궁극적인 선을 말하는데, 즉 "그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경지인데, 그것이 곧 악마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악마가 천사와 싸운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즉 "니만 신이냐?" 라는 겁니다. 신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라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하는 것이 곧 선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은 신만이 가능하고 피조물은 안 되는데, 피조물을 신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기분이 나쁜데, 그래서 마귀는 미카엘 천사와 싸웠고, 그리고 에덴동산에 들어왔다는 말이죠.
선악을 알면 신처럼 된다 !!
그 악마가 신에게 들이댈 때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아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와 함께' 라고 하는데, 이미 악마가 개입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가 자꾸만 어디에 주목을 합니까? "따먹어라. 따먹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악마가 아담과 하와에게 부추긴 게 있는데, 즉 "선악을 알면 너희가 신처럼 된다" 라는 겁니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래서 결국은 따먹고 말았는데, 그때부터 인간은 선과 악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독자적으로 자기의 영역을 따로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그것이 정당화가 되는데, 즉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 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런 악마적 인식을 품고, 거기에 아예 자기만의 아지트를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라고 단언을 했는데, 그 사람을 데려다가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 그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너는 피조물이야 !!
그러면 "나는 천국에 가야하고, 왜 지옥에 가면 안 되는가? 왜 눈물의 바다가 되면 안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이 전도서에는 이미 인간을 피조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피조물의 독자적인 의미 때문에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닌데, 피조물은 창조주의 의지 때문에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이죠.
창조주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자재들이 피조물인데, 그러니 우리가 지옥을 가던, 이 세상에서 평생을 눈물을 흘리던 간에,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구약성경 욥기에 나오는데, 이 욥기를 보면 욥이 얼마나 많은 질문들을 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자 나중에는 하나님도 욥이 하나님에게 질문한 그 이상으로 욥에게 질문을 해대시는데, 즉 "북두칠성을 만들 때 니가 있었는가? 염소가 새끼를 낳을 때 니가 있었는가?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니가 아는가?"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질문을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껏 질문을 하세요 !!
그러니 질문의 자격자가 질문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질문할 권리가 없는데, 질문을 하던 찾아오던 간에 저쪽에서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담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담은 숨기에 바빴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그만 비겁하게 멈추고 만다고 했는데,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기를 비난할 수 없는 경지에 놓여있기에, 질문을 하더라도 누구 좋아라고 한다는 겁니까? "나만이 전부다" 라는 것에 멈추고, 거기에 아예 벙커를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지를 않는데, 멈추고 만다는 겁니다. "나는 행복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왜 행복해야 하는지는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해서,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즉 "모든 질문의 끝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라는 것에 대해서, 서양의 2,500년 역사가 침묵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모든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인간의 행복을 외쳤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아니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최초로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건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누구인고 하니까,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라는 겁니다. 그러니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라는 말이죠.
프로이트, 왜 행복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과학을 하고 문학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겁니까? "관찰하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한다. 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왜 행복해야 하는가?" 라는 것은 묻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행복하고 싶어서 행복한 것이니,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하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진 사람이 곧 프로이트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다고? 왜 행복한데? 왜 불행하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더욱 더 연구를 해보았는데,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분위기를 보니 저만 궁금한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여기서 프로이트는 둘로 나누었는데, 인간이 사는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행복이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고, 절에 다니고, 인문학 강좌에 참석하고 하는 것이, 결국은 다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겁니까?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한다는 말이죠. 이사를 가면 휴지를 사들고 가는데, 그 휴지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잘 풀리는 집'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잘 풀려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행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의식과 무의식 !!
이것을 프로이트는 '의식' 이라고 했는데, 이 의식 속에서는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프로이트는 의식을 넘어서 '무의식'의 영역까지 확장을 시켰는데, 이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죽음에 쫓기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에 말이죠. 그러면 이 둘을 합치게 되면, 왜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는고 하니, 뒤에서 뭔가 따라오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잡아먹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히브리서 2장을 보겠는데, 14절과 15절입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이렇게 혈육에 속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육이 바탕이 되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말씀을 모르게 되면, 자기 자신과 자식을 위해서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여기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까 아담에게 누가 찾아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셨는데,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고 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게 되는데, 즉 창세 전의 비밀을 모르게 된다는 말이죠.
너희가 악마를 알아? 사망을 알아?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말씀을 보여주시는데, 그 비밀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는 너와 너의 가족이 행복하면 그것이 전부인 줄로 알지만, 그것이 아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2장 14절을 보여주시는데,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사망이 나오고 마귀도 나오는데,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질문해서 알 수 있는 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들고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서, "너희가 악마를 알아? 사망을 알아?"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즉 "이것을 모르면 진리를 몰라" 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더욱 더 무서운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프로이트는 "죽음에 쫓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물론 프로이트는 히브리서 2장 15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공부한 정신분석학에 의해서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원래 이 양반이 정신과 의사였는데 말이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꾸만 도망을 치듯이 한다는 겁니다. 이 행복을 다른 말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희망, 비전, 혹은 목적, 그렇다는 말이죠. 사람이 목표가 있다는 것은, 물론 심심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뒤에서 뭔가가 따라오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도망을 치는데, 그러니 누가 쫓아온다는 겁니까? 죽음이 쫓아온다는 말이죠.
죽음의 본능과 웃음꽃 !!
이것을 '죽음의 본능' 이라고 하는데, 즉 "밑에는 죽음의 본능, 위에는 웃음꽃!",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둥근데, 그런데 지구 안에는 외핵과 내핵이 있어서 그야말로 용광로라는 겁니다. 그게 지각을 뚫고 올라오면 화산폭발이 되고, 또한 지진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지구의 내부는 용광로가 되어서 펄펄 끓고 있는데, 그런데 그 지표면은 봄이라는 말이죠. 물론 오늘은 조금 싸늘한데, 봄이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산으로 들로 예쁘게 차려입고 손에 손을 잡고 놀러 가는데, 그런데 정작 그 밑은 펄펄 끓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이 바로 이러한데, 의식은 가족들끼리 웃음꽃이 피고 있는데, "생일 축하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하는 것조차도 쫓아오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잊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게 여기 저기 구멍을 뚫고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것을 '우울증' 이라고 하는데, 돈도 있고 자식도 있고 다 있는데, 그런데 왠지 우울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원인을 모른다는 말이죠. 살만큼 살았는데 허무하다고 한다면, 그 허무에서 오는 우울증, 혹은 공황장애, 그것을 달리 말하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프로이트도 역시 비겁해 !!
프로이트가 이렇게 죽음을 이야기했는데, 무엇을 말하지 못했는고 하니, 그러니 계속해서 질문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프로이트는 "죽음에 쫓긴다" 라는 것에서 멈추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프로이트도 역시 비겁한데, 왜 죽음에 쫓기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프로이트는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평소에 사람들이 점잖을 빼고 교양이 있게 살지만, 술만 한 잔 들어가면 그만 개가 되고 마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원래 개가 자기의 본래 모습인데, 그동안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닌 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 평소에 얌전한 남편이라도 술만 마시면 마구 큰 소리를 치고 하는데, 그것을 여자 쪽에서 평소에 얌전한 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 사람인지 아닌지, 그게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을 보일 때,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서, 평소에 남편이 아무리 자기에게 잘해주어도, 그게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불안 불안하다는 겁니다.
물론 남자 쪽에서 "평소에 잘 해주잖아" 라고 하는데, 평소에 잘해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평소에는 아무리 잘해주어도 또 뭔가 일이 생기면 성질이 폭발하고, 그러면 여자 쪽에서는 "왜 지난번처럼 또 때리려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점점 더 커진다는 겁니다.
차마 마귀를 말하지 못하는 프로이트 !!
프로이트는 인간이 죽음에 쫓긴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러면 왜 쫓기는지, 그 이유도 알아야만 한다는 말이죠.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듯이, 왜 죽음을 무서워하느냐는 겁니다. 일생에 매여서 종노릇을 하도록 만드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라는 말이죠.
프로이트가 의사인데, 넓게 보면 과학자라는 겁니다. 그는 사람이 일생에 매여서 종노릇을 하게 된다고 까지는 언급을 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마귀 이야기는 차마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마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과학의 세계에서는 반칙이라는 겁니다.
과학은 실험을 해서 언제나 눈에 보이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마귀를 보고 "이리 오너라" 라고 한다고 해서 오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증명이 되지 않으니 이론적으로 성립이 될 수가 없고, 그러면 과학의 세계에서는 전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과학까지만 믿어야 합니까? 과학을 넘어서야 합니까?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죽기를 무서워하도록 했고, 그러면 우리는 그때그때마다 땜질하는 식으로 행복을 향해서 희망과 비전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50억을 벌었다고 멈추는 게 아니라, 60억까지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제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데, 살아있을 동안에 벌써 천국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조금 전에 벌써 천국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 무엇으로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역시 젊은 사람이 나은데, 그게 바로 '사랑' 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질문을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질문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직도 건방지기 때문에 그러한데, 욥이 하나님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자기가 질문을 했지만, 나중에는 입을 닫고 그냥 재만 뒤집어쓴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인데, 순종이고 뭐고 할 것도 없는데, 그냥 용서라는 말이죠.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니가 죄를 짓는 것이 센지, 나의 용서가 센지, 한 번 붙어보자" 라는 겁니다. 용서가 더 강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라고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런 주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고전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그러니 행복이 종착역이 아닌데, 그러니 자꾸만 '행복하기 위해서'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나는 왜 이렇게 슬프지? 행복해야 하는데"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불행하면 안 됩니까? 그래서 전도서에는 지시가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아시는데, 그래서 "허무해라. 허무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미 범죄한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죠.
두 번째로, '만남이 없다' !!
이제 두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만남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만남이 없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서 부부로 사는 것은 온전한 만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한 몸이 되지 못하는 만남은 제대로 된 만남이 아닌데, 아무리 가까이 잠을 자도 간격이 있다는 말이죠.
'동상이몽' 이라는 말이 있듯이, 같이 잠을 자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겁니다. 그렇게 간격이 벌어져있는데, 진정한 한 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의 모습인데,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만남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를 만나서 친하게 지내라"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서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제대로 이야기해준다는 겁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5명이라고 해도, 또한 한 집에 같이 산다고 해도 만남은 없다는 말이죠. 빌라를 통 채로 구입해서, 1층에는 다리가 아픈 부모님이 살고, 2층에는 첫째가 살고, 3층에는 둘째가 살고 해도, 몇 개월이 가지 못해서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물론 자식들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달고 온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큰며느리, 둘째 며느리, 그리고 사위도 있고 말이죠. 물론 가끔씩 마당에서 같이 삼겹살을 구워먹고 할 때는 좋은데, 그런데 돈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산으로 빌딩이라도 남기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아무리 가까이 살아도 자식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데, 물론 부부간에도 그렇고 말이죠. 젊은 사람들은 이것을 아는데, 그래서 결혼에 대해서 주저하게 된다는 겁니다. 겁이 나서 말이죠. 사서 상처를 받을 일을 왜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결혼을 하면 좋은 것도 있지만, 하지만 좋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의 상처가 있다고 하면, 그 좋은 것이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말이죠.
물론 젊은 사람들은 이것을 이론적으로 아는데, 그래서 따지고 또 따져보다가,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한다는 겁니다.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데,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대 있음에 나는 죽어도 좋아!" 라고,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다들 그런 마음가짐으로 결혼을 한 줄 아는데(ㅋㅋ), 아닌가요?
세 번째로, '눈물이 없다' !!
이제 세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눈물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되고, 슬픔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우리는 슬퍼요" 라고 하면, 하나님은 "이것들이 어디서 질질 짜고 있노? 무엇을 잘했다고 짜노? 울지마!"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했던 행실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해" 라고 하는데, 이게 운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전도서에는 신의 지시가 없고, 만남이 없고, 눈물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남들에게 "나를 사랑해주오. 나를 행복하게 해주오" 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을 요청할 자격이 전혀 되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네 번째로, '약속이나 보상이 없다' !!
이제 네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약속이나 보상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이것을 하면 이것을 해주겠다"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너희가 무엇을 잘했다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가? 까불지마!" 라는 겁니다.
다섯 번째로, '신앙이 없다' !!
이제 다섯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이게 놀라운 것인데 "신앙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신앙 따위는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인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희의 신앙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아는데, 너희들이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속아넘어갈 내가 아니다. 너는 원래 너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그런데 나에게 아부를 한다고 해서 내 입이 벌어지는 일은 없어. 나는 너를 너무나 잘 알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받습니까? 받지 않는데, 바로 그런 입장에서 전도서를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 받으소서!" 라고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즉 "나는 너를 안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피'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피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포장을 잘해서 "여기 곶감입니다. 받으소서!" 라고 한다고 해서, "그래, 알았다. 내가 잘 먹을게" 라고 하는 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곶감을 곶감 그대로 두면 안 되고, 그것을 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피가 아니라면 결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번제인데, 즉 "모두 다 태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바친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받으신다는 말이죠.
'상한 심령'만 가지고 오너라 !!
시편 51편에 나오듯이 주님은 '상한 심령'만 받으시는데, 그게 바로 제사라는 겁니다. 즉 "주여, 제가 드려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만 받으신다는 말이죠. "주여, 이 신앙을 받으소서"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앞에 놓여있는 못난 놈의 모습인데, 그것을 어제 오후 시간에 '수로보니게 여인'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나는 개에게는 자녀의 음식을 줄 수 없다" 라고 하니, 수로보니게 여인이 "저는 자녀가 아닙니다. 개입니다. 자식이 먹다가 버린 음식은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라도 좀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우리도 개가 되는 축복을 !!
이렇게 자기가 주워먹을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인한다는 것, 이게 바로 전도서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냥 주시면 "어휴, 고맙습니다" 라고 할 정도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 그게 기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미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이 되었기에 찾아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전도서의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면, 우리는 졸지에 개가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참 행복은 누릴 자격이 없고, 개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가 산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집도 있고 세간도 있고 자식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누가 주신 겁니까? 주님이 주신 것인데, 거기에 피가 묻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피와 관련되어서 주어진 냉장고이고 TV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에게 드릴 때, 냉장고를 드리면 안 되고 피를 드려야 하고, TV를 드리면 안 되고 피를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냉장고는 빼고 피만 따로 드리면 됩니까? 그것은 아니고, 냉장고나 전자레인지나 TV나, 그런 모든 것에는 다 주님의 피가, 주님의 희생이, 주님의 사랑이 스며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 속에 우리가 둘러 쌓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여섯 번째로, '기적이 없다' !!
이제 여섯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기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얼마나 기적을 기다리는지 모르는데,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우리 인간은 이것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스톱입니다. 이제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는데,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새벽마다 되풀이가 되고 있는데,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말이죠.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옷을 껴입고 나오는데, 새벽기도는 본당이 아닌 교육관에서 하는데, 그러니 더 춥다는 말이죠.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서, 물론 방석은 깔고 하는데 말이죠.
평소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나오면 문제가 생긴 것인데,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할 도리는 다 하겠지만, 나머지는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때는 반드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갓바위가 따로 없는데, 그곳이 바로 갓바위라는 겁니다.
우리의 출생은, 곧 '돌발사태' !!
하지만 전도서에는 일체의 기적이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이미 기적의 시작인데, 우리가 출생한 것이 곧 '돌발사태' 라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이것으로 했으면 하는데,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안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전에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것도 지금의 이 모습으로 말이죠. 우리가 언제 이렇게 맞춘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순풍순풍 태어났는데, '툭' 하고 던져진 존재라는 말이죠. 강제로 밀림을 당해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군가가 만든 것인데,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부모를 이용해서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의 출생은 돌발사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새끼 거북이가 어미 거북이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소도 주인을 아는데,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잊어버렸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그러니 정말로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슬금슬금 이방민족의 신을 찾아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망가진 인간의 방향을 돌리는데, 어떻게 돌리십니까? 즉 "흑인의 피부를 누가 희게 하겠는가?"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서 !!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이미 악마에 의해서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신을 찾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되지 않는 것을 되게 하시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그것이 곧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인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데리고 가시는데, 이렇게 친절하신 분은 없다는 겁니다. 마치 정수기 회사에서 와서 필터도 갈아주고 청소도 해주듯이, 그렇게 해주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러니 전도서에는 기적이 없는데, 우리가 태어나고 찾아와 주시는데, '이것이 인생이다' 라고 할 정도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도, 그것 하나 하나가 감사의 여정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곧 기적이란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주님이 만들어주신 인생을 모독하는 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도 여러분은 아직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것의 주인공의 수준은 아니니까 가만히 있는데, 만약에 그런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면, 아마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지 싶다는 겁니다. "뭐 원망하지 말라고? 당신 같으면 원망하지 않겠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지금 제 사업이 그만 부도가 났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결을 해주세요" 라고 하려고 새벽시간에 힘들게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데 목사가 "무엇이 잘났다고 원망을 합니까?" 라고 해버리면, 다시는 그 교회는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원형을 찾아가는 것이, 곧 기적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람이 원형을 찾아가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죠. 진짜 자기 모습은 사랑의 관계인데, 즉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 따로 있고, 자기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본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신랑이 되신 예수님과 신부가 된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그러면 신랑이 누리는 그 나라가 곧 우리의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기적이라는 말이죠. 더 이상의 기적은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라고 하신다면, 우선 자기의 주제파악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믿는다고 하지를 말고,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다 버려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찾아오셔서 구원이 되는 것이지, 가인처럼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일곱 번째로, '진리는 없다' !!
교재를 훌쩍 넘어가서, 29페이지에 가면, 이제 일곱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진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조금 어안이 벙벙하지요? 전도서를 보고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니가 그것을 알아서 뭐 할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괴물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천사가 되나? 진리를 알 필요가 없어"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이 진리인데, 우리가 질문을 던지고 말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허무하게 사는 것이 곧 진리인데, 헛되고 헛된 것이 진리라는 말이죠. 헛된 것을 벗어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그래, 이게 내 팔자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너무 서러운데,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들이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말이죠. 이렇게 전도서에서는 우리의 팔자가 더러운데, 하지만 예수님의 팔자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겁니다.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억울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렇지요? 오히려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죄도 짓지를 않고 그 모든 벌은 자기가 대신해서 다 받는다고 하면, 재판에서 그것처럼 억울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사시고, 그것을 다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할 말조차도 없는 인생 !!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데, 그런 희한한 분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한다는 겁니까? 할 말조차도 없는 인생을 살아주어야, 그게 곧 신앙생활이란 겁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종알거리느냐는 말이죠.
결혼을 할 때 서로 격차가 너무 나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고아와 같은 아가씨를 재벌가의 며느리로 맞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물론 처음에는 "아버님 어머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그 은혜가 그만 삭감이 되어서, 나중에는 고마운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재벌가의 며느리 행세를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시어머니는 잊은 적이 없는데,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뭐라고 합니까? "이런 근본도 없는 것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 아들이 그만 어디에 홀려서 너와 결혼을 했지만, 이제 와서 우리 집안의 며느리라고 함부로 까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차이가 너무 나게 되면 바닥에는 항상 그런 것이 깔려있는데, "니가 아무리 그렇게 해도 너는 가짜야" 라는 것이 말이죠. 그러니 너무 차이가 나는 집안에는 보내지 않는 것이 좋은데, 이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이것은 누구나 다 그러한데, 그러니 자기를 너무 천사로 보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진리가 없다는 말이죠. 즉 "어디서 감히 진리를 언급해? 진리를 알아서 구원을 받으려고? 진리는 없어!"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생겨먹은 대로 살면 되는데, 그게 바로 진리라는 말이죠.
여덟 번째로, '도덕이 없다' !!
교재 30페이지에 보면, 여덟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도덕이 없다" 라는 겁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중심인데, 즉 마음의 질서를 두고 도덕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혼자 있을 때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라는 것이 곧 '도덕' 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은 '윤리' 라고 하고 말이죠.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누구나 다 천사인데, 그렇지요? 그게 바로 도덕이라는 겁니다. "나는 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 정말 미치겠어!" 라고 하는데, 그러니 도덕은 바르게 살기이고 착하게 살기인데, 하지만 전도서에는 그런 것이 일체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착하게 살았어요? 수고했어요!" 라고 하지 않는데, 오히려 "너는 착해봐야 별 수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착해봐야 자기 자랑밖에 하지 않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미 허무한 세상에 빠져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허무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프로에 보면, 요즘은 그것을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이것이 인생이다2' 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착하게 산 여자들에게, 그녀들이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끝까지 그녀들의 마음에 남아있는고 하니, "이렇게 착하게 살면 언젠가는 복이 오겠지!"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웃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 희망을 끈을 결코 놓지를 못하는데, 즉 "내가 이렇게 까지 고생을 하면서 참고 참았는데, 설마 복이 끝까지 나를 배반할 리가 없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도 보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도, 30년이 되고 40년이 되어도 계속해서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에 와서 의자를 당겨서 앉을 때부터 은근히 "오늘도 교회에 나왔으니 복을 주시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닌 줄 자신도 알면서도, 은근히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말이죠. 그런 꼼수를 주님이 아시는데, 그래서 전도서에는 도덕이 없다는 겁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결국 마지막에 내놓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 그것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자식이 잘 풀렸다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자기 자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만나면 자기 의를 자랑하고, 그러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즉 악마에게 쫓기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게 알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온다는 말이죠.
아홉 번째로, '이상 사회와 이상 국가가 없다' !!
이제 아홉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이상 사회와 이상 국가가 없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같이 모이면 이상적인 사회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일체 없다는 말이죠. 처음도 허무고 끝도 허무인데,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상 사회와 이상 국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상적인 교회도 역시 없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하늘나라도 없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그런 하늘나라를 감히 넘볼 수 있는 처지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꿈 깨라!" 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그렇게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희망합니까? 그것은 은근슬쩍 자기 다리를 하나 집어넣어서 남의 덕을 좀 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공동체에 들어가서 같이 살며시 넘어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남의 희생으로 자기는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선호하는데, 작은 교회에 가면 시키는 것이 많아서 귀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큰 교회에 가면 일군들이 많아서 그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헌금도 그들이 다 알아서 하고, 자기는 점심값으로 천원만 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슬쩍 넘어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아, 갈 곳이 없어 !!
국가가 잘 살면 좋다고 하는데, 왜 좋을까요? 세금을 적게 내도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처음에는 데모를 하는데, 그것으로도 안 되면 이민을 가고 만다는 것이죠. 뉴질랜드나 호주는 이민을 가기가 힘드는데, 또한 독일은 날씨가 추워서 안 된다는 겁니다. 미국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안 되고 말이죠. 중국은 텃새가 심해서 안 되고, 필리핀에는 위험해서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사우디는 너무 더워서 안 되고,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과 같은 종교적인 것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사우디도 그렇지만 말이죠. 인도는 먼지가 많아서 살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잘 산다고 하는 북유럽의 덴마크나 노르웨이는 추워서 안 되는데, 독일보다 더 춥다는 말이죠. 남미는 외로워서 안 되고, 그리고 아프리카는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재미가 없어서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한 군데 남은 곳이 있는데, 그게 '하와이' 라는 겁니다. 물론 "니가 가라. 하와이!" 라는 말도 있는데(ㅋㅋ), 그런데 이민도 젊어서 가야지 나이가 들면 가봐야 힘이 들어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갈 곳이 없다는 말이죠.
열 번째로,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 !!
이제 마지막 열 번째로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까,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 라는 겁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 똑같다는 말이죠. 우리의 마지막은 모두가 다 척추가 내려앉고 마는데, 그리고 맛있는 것이 있어도 이가 없어서 씹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를 놀러 가도 힘이 들어서 제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고, 해외여행을 가도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도 힘이 드는데, 그러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가고 싶다는 겁니다. 집구석이 제일로 편한데,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고 말이죠.
그러니 어디 부러워할 사람이 없는데, 물론 젊었을 때는 "누구처럼 되었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나이가 들면 만사가 다 귀찮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전도서가 정말이지 성경말씀인데,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해답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3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다시 정리를 하면, 전도서에는 첫째로 하나님의 지시가 없고, 둘째로 만남이 없고, 셋째로 눈물이 없고, 넷째로 약속이나 보상이 없고, 다섯째로 신앙이 없고, 여섯째로 기적이 없고, 일곱째로 진리가 없고, 여덟째로 도덕이 없고, 아홉째로 이상 사회와 이상 국가가 없고, 그리고 열 번째로 부러워할 사람이 없는데, 그러니 우리가 모델로 삼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3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그러면 전도서에는 없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있는데, 그러면 무엇이 있는가? 첫째는 허무가 있고, 둘째로 죽음이 있고, 셋째로 심판이 있고, 넷째로 끝이 있고, 다섯째로 흔적이 있고, 여섯째로 차이가 있고, 일곱째로 육신이 있고, 그리고 여덟째로 제일 중요한 왕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있는 것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좋아할 이유가 없는데, 차라리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없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왕이 있다고 하는데, 그 왕이 바로 전도서 1장 1절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이라는 겁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그렇다면 이제 강의를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찾아오신다고 했는데, 전도서에는 왕이 있으니 그 왕을 앞장세워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 왕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메시야는 누구의 계통입니까? 역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장차 오신다는 것을 내다보면서 전도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입장에 서야만 합니까? 아까 10가지가 없다고 했는데, 그 '없음'에 우리가 놓여있으면 '있음'의 왕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으로 이미 천국생활을 시작하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전도서라는 말이죠.
예, 저는 허무입니다 !!
제가 "성경은 이렇습니다" 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덮어도 그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를 않는데, 우리 아무리 학문을 공부해도, 철학을 하고 의학을 하고 과학을 해도, 이 전도서와 같은 말씀이 없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 전도서를 뛰어넘을 수가 없는데, 천국의 수능시험은 여기서 다 출제가 된다는 말이죠.
천사가 묻기를 "너는 뭐지?" 라고 하면, "예, 저는 허무입니다" 라고 하면 합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 저는 박사입니다" 라고 하면 불합격이라는 말이죠. 이 땅에서는 별 다른 인간이 없는데, 박사든 석사든 목사든 간에 모두가 똑같은데, 허무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는 허무하게 사셨는데, 그러니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윗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메시야이고 구원자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전도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들고 우리에게 넘어오시고 찾아오신 줄로 압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