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 - 주사기 방식
16,12,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부터는 예고한 대로 교재를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으로 하겠는데, 그런데 이 표현자체가 어떤 뉘앙스를 주는고 하니, 알다시피 전도서는 구약에 있고 그리스도는 신약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말이죠.
시간의 간격 !!
전도서 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라고 하는데,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천년 전의 사람인데, 그러면 천년 동안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간격을 우리 인간이 과연 메울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메워야 하냐는 겁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시간이라는 것은 지나가면 과거이고, 그 과거는 사라지는 것인데, 그러면 그렇게 없어지는 것은 구태여 살릴 필요가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말이죠. 중요한 것은 현재인데, 그렇게 현재만 붙잡고 있으면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전도서가 포함되어있는 구약자체를, 그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일이니까, 굳이 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아내와 산다고 하면 여고시절의 아내 모습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데, 지금의 아내 속에는 여중, 여고시절의 아내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여고시절의 수학여행 사진도 가끔은 볼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의 추억거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도서도 그런 식으로 하나의 추억거리로 봐야하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믿을 필요까지는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아내가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라고 하면서, 그것을 계속해서 끄집어낸다고 하면, 그러면 남편은 당연히 "그것은 지나간 것이잖아" 라고 하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계속해서 이번에는 초등학교 때의 일까지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아내가 자기 의사를 표현함에 있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일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감 잡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남편은 "케케묵은 과거는 왜 자꾸만 꺼내노?" 라고 하면서 핀잔을 주겠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니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라고 하는 것은, 전도서가 없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전도서와 함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그것을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가 없이 예수님을 보는 것과, 전도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전도서는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도서가 구약성경에 분명히 있는데, 그러니 이 전도서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구약성경을 떼어내어 버리고 달랑 신약성경만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도서가 있는 그리스도, 전도서가 없는 그리스도 !!
그래서 이번 첫 시간에는 전도서가 있는 그리스도와 전도서가 없는 그리스도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 그것부터 살펴보겠는데, 그것은 굳이 전도서뿐만이 아니라, 창세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창세기가 있는 그리스도와 창세기가 없는 그리스도, 즉 창세기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창세기를 옛날 이야기라고 하면서 때내어 버리고 아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제 강의가 끝나고 난 다음에, "그러면 예수님만을 믿자는 말은 잘못된 것이고, 예수님도 믿고 전도서도 믿자" 라고, 그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면 일단은 "예수님을 믿자는 것에 전도서가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둘러 쌓여있기에 !!
우리가 전도서를 보는데 있어서, 여러분의 연세를 고려해서 제가 요약해서 쉽게 말씀을 드리겠는데 말이죠(ㅋㅋ). 우리가 전도서를 보고,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을 보는데, 그러면 그게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전도서와 예수님을 딱 잘라서 본다고 여기지만,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겁니다.
어디에 싸여있는데, 그러면 무엇이 둘러 싸여있는고 하니, 시간과 공간에 싸여있다는 겁니다. 이 시간과 공간은 자기가 이해하는 시간과 공간인데, 그렇게 되면 "이것은 정당하고 또 옳다. 그러니 옳게 살아가는 내가 전도서를 볼까? 예수님을 한 번 볼까?"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오해와 곡해가 생기는데, 즉 해석에 있어서 착오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 대해서 문제를 삼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는 객관적이고 진리답다고 여기고 전도서를 보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보다 잘 알기 위해서 전도서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교재도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라고 했으니,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보다 잘 알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름 자신감을 가지고 전도서를 딱 펼쳐보았는데, 그런데 시작부터 뭐라고 합니까? 1장 2절에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마트에 가서 "이 신발이 얼마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신발을 신고 이 시간과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데 주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이 미친 게 아냐?" 라고 하게 되는데,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죠.
사는 것은 미친 짓이다 !!
교재 18페이지에 전도서 9장 3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찾았습니까? 저도 성질이 급하지만, 우리교회는 다들 목사를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피아노 반주자도 "찬송가 몇 장을 부릅시다" 라고 하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반주에 들어가서, 어떤 때는 저도 찬송가를 찾지 못해서 당황하곤 하는데 말이죠(ㅋㅋ).
** 전도서 9장 3절에 보면, 사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하는데, 결혼만이 미친 짓이 아닙니다. 여기서 전도서는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을 다 미친 짓이라고 합니다.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기에 "사는 것이 미친 짓이다" 라고 하는데, '결혼은 마친 짓이다' 라는 영화도 있는데 말이죠. 아무튼 사는 게 미친 짓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도서를 보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도서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었으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길 뻔했으니 말이죠.
그리고 전도서 1장 2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헛되다는 것인데, 그러니 전도서를 빼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게 자기는 정당한 일을 하는 것이 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염을 받고 착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기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서 믿었다는 겁니다.
Everything is Nothing !!
그런데 전도서를 보면 뭐라고 한다는 겁니까? "니가 예수를 믿어? 웃기고 있네. 헛짓을 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모든 것이 다 그러한데, 그러니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천국에 가고 싶어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전도서를 보니 헛짓을 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도 헛된 짓이고 미친 짓이라고 하니, 이 전도서는 그만 상당히 위험한 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비겁한 짓거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점점 더 환상이 되고 망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인데,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만은 헛되지 않아. 이것은 미친 짓이 아냐.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하늘나라에서 상이 크다고 했어!" 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기대치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의 범주를 둘러보고 와서 모은 개념들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진리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구축이 되는데, 그게 진리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말이죠.
예를 들어서, 지금 나이지리아의 어떤 부족이 자기 동네에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런데 그 축제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을 누가 이야기를 한다면, 축제에 참여한 사람은 참여하지 않는 자들보다도 보다 넓은 범위의 지식에 관여하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필리핀에 가봤지롱 !!
그래서 "나는 지난여름에 필리핀에 가봤거든" 라고 한다면, 필리핀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이 필리핀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는,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의 바깥범주의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죠.
그렇게 그 사람이 열심히 필리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모두들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놀 곳도 참 많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그러면 너는 아르헨티나를 가봤나?" 라고 하는데,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은 "그러면 너는 달에 가봤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거기에는 자기가 평생에 경험했던 범위가 들어있는데, 거기서 알게 된 내용을 함축해서 상대방에게 던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지식으로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아까 인간은 어디로 둘러 싸여있다고 했습니까? 시간과 공간에 둘러 싸여있다는 말이죠.
방금 이야기한 필리핀, 아르헨티나, 달나라는 공간에 관한 문제인데, 그런데 "실례지만 나이가 얼마입니까?"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상대방이 "예, 22살입니다" 라고 하면, "나는 72살이야. 이게 어디서 인생을 살았다고 까불어?"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요즘은 결혼식에 주례사를 없애는 풍토가 있다고 말이죠. 자기가 먼저 결혼을 했으면 했지, 결혼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아느냐는 겁니다. 제가 친척 결혼식에 간 적이 있었는데, 주례를 하시는 분이 나이가 70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요. 주례비만 챙기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는 정상적이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기가 경험한 것 안에서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것도 진리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서를 보거나 예수님을 믿을 때, 자기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내용만 따로 모아서 선별적으로 가지고 와서는,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우기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어느 범위 안에서 그렇다는 말인가요? 자기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만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마다 이야기하는 예수님 내용이 다들 다르다는 겁니다. 각자가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그리고 자기가 경험한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말이죠.
어떤 방송을 보니, 섬에 사는 할머니를 소개하는데, 그 할머니는 나이가 80이 되도록 한 번도 그 섬의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겁니다. 육지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데, 바닷가에 가서 미역이나 뜯으면서 살았는데, 집에 오면 TV나 보면서 말이죠. 물론 복음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 섬에는 교회도 없다는 겁니다.
복음은, 아다리 !!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설친다고 해서, 찾아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달될 때, 즉 복음에 아다리가 된 사람만이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에는 끝에 낚시바늘이 달려있는데, 그렇게 해서 걸리면 주님이 잡아당기는데, 성령에 의해서 말이죠. 그러니 낚싯줄이 성령인데, 성령에 의해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그만 인간의 행함으로 바뀌고 말았다는 말이죠.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런데 그것을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이 땅에서 반드시 저주를 생각하도록 되는데, 즉 복음에 대해서 얼굴을 돌리게 되면, 바로 거기에 저주가 있다는 말이죠.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시 정리하면, 복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성령으로 구원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성령은 어제 낮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성령은 주의 영인데, 그러면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가 스스로 설치고 나댄다고 해서 구원이 된다는 겁니까? 전혀 안 된다는 것이죠.
전도서의 폭력성 !!
그렇다면 전도서는 왜 있느냐는 겁니다. 이제 서서히 그 내막이 드러나는데, 우리가 전도서를 보려고 하면, 그러면 오히려 이 전도서 말씀이 튀어나와서 우리를 그만 꽉 물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도서에 의해서 그만 폭력을 당하게 되는데, 그게 어떤 폭력입니까?
"사는 것이 미친 짓이다" 라고, 즉 "니가 전도서를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말씀이 튀어나와서 우리를 물어버리는데, 낚시에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물고기가 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낚시바늘이 물고기를 물어버린다는 것이죠.
"나는 정상이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이성적이고 나름 진리를 알고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세계여행도 할만큼 했다" 라고 하다가, 그만 전도서를 보는 순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만 말씀에 물려서 박살이 나고 나는데, 코에 반창고를 붙이고 허리에는 파스를 붙이고 말이죠.
성경말씀은 'X-Ray' !!
그래서 저는 "성경말씀을 엑스레이 사진이다" 라고 했는데, 요즘은 CT가 더 적합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것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외모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인물이 얼마나 좋은지, 피부가 얼마나 탱탱한지는 드러나지 않고, 그러면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 사람의 내부를 다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말씀이 인간의 내부를 찍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썩었는지,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말씀은 우리의 마음까지 투과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으로 스스로 알 수 없습니까? 아무리 도를 닦아도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장치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초자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초자아' 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한다고 했는데 더 어렵게 되고 말았는데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너는 왜 그렇게 사는데?" 라고 하면,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가 그게 옳다고 하셨어" 라는 겁니다.
그러니 '초자아' 라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양심이, 그것도 조금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양심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바깥에서 내리쬐는 엑스레이를 강력하게 거부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무엇이라고 표현을 했습니까? 매우 폭력적이라는 겁니다.
초자아의 폭력성 !!
평소에는 점잔하고 예의 바르고 착해 보여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런 폭력적인 사건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는 잠재적인 요소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자꾸 나를 보고 양심이 더럽다고 하면, 평소에는 내가 매우 착하지만, 자꾸만 그런 소리를 하면 죽여버릴 거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 폭력적인 살인충동과 같은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살인사건이 나오는데, 가인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전혀 취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가인은 평범한데, 그런데 거기에 괴물이 그만 덮쳤다는 겁니다. 악마의 힘이 말이죠. 설령 동생의 제사만 응답이 되더라도, "그래, 너 잘났다" 라고 해버리면 그만인데,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구분하게 하시는데, 그것을 우리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만들어내신다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우리는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를 만들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사태를 일으켜서 "니가 죽던 내가 죽던,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한다"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적대적 대상을 기어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신다는 말이죠.
너는 끝까지 가봤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평생을 다 살아도 경험하지 못한 전체를, 우리가 온 세상을 다 다녀도 가지 못한 그 전체를,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부를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시는데,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접촉이 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 전체와 말이죠.
쉽게 말해서, "너는 끝까지 가봤어?" 라는 것인데, 이게 오늘의 강의제목으로 적당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인생이 길어도 어디 아프리카까지 다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면 안 돼. 끝까지 가봐야 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너는 끝까지 살아봤어?" 라고 하시면, 우리는 "제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년인데, 천년만년을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해서 다 알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안 돼. 끝까지 살아봐야 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끝까지 가본 내용이 바로 전도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끝의 끝이 바로 십자가인데, 하나님의 자기의 본심을 다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성령을 통해서, 주의 영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천년만년을 살지 않더라도, 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지 않아도,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 우리가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주님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진리가 누구냐고 물어라" 라고 하시는데,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은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라, 어떤 주체라는 겁니다. 말을 자꾸만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우리는 어떤 분과 만남을 통해서 세상의 전부를 다 전달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라고 하면, 그러면 주님은 "전도서를 보지 않았어? 거기서 무엇이라고 했지?" 라고 하면, "예, 모든 것은 헛되다고 했습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미처 경험하지 않았지만, 성령을 통해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리고 십자가는 무엇이지?" 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는 죄인인데,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이 된 자를 구원하십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렇지. 너희들은 죄인인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진리는, 어떤 주체 !!
* 인간 : 주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 주님 : 진리가 누구냐고 물어라.
* 인간 : 진리가 누구입니까?
* 주님 :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고, 어떤 분이다.
* 인간 : 예, 어떤 분이라고요?
* 주님 : 그렇다.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세상의 전부를 다 전달받았다.
* 인간 : 그런 적이 없는데요?
* 주님 : 전도서를 보지 않았는가? 거기서 뭐라고 하던가?
* 인간 : 예, 모든 것은 헛되다고 했습니다.
* 주님 : 그게 바로 미처 경험하지 않았지만, 성령을 통해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다.
* 인간 : 정말인가요?
* 주님 : 그렇다. 그리고 십자가는 무엇이지?
* 인간 : 사도바울은 말씀하기를, 우리는 죄인인데, 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한다고 합니다.
* 주님 : 그렇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우리가 죄를 많이 경험해서 그것을 다 모아서 "역시 나는 죄인이구나"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이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만을 가지고 때려도, 끝의 끝까지 간 그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의인은 없고 죄인뿐이다" 라는 것을 듣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의미인데, 성령에 의해서 말이죠. 우리는 끝까지 가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 듣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폼을 잡는다고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여자들이 군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여자가 그만 하사관 출신이라는 겁니다(ㅋㅋ). 드물기는 하지만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우리가 평소에 주님에게 무엇이라고 하소연을 합니까? "주님, 제가 지난날에 이렇게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그것을 모르는 줄 아나? 다 안다. 니가 경험한 것을 내가 다 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과 5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것을 달리 말하면, "너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도 나의 경험을 너에게 일부러 주었다" 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인데,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이는 것이 소원이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의 작용에 의해서 악마가 뒤집어 씌워지니, 그만 들에 가서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죽이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자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런데 죽고 난 뒤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아, 너의 동생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을 봐서, 우리는 "아하, 이것을 주님께서 아셨구나" 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인이 동생을 죽인다는 것을 다 아셨는데,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작년에 부도가 나게 하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나는 정당하고, 나는 옳다" 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만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으니 당연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항의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래? 나는 전도서대로 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너는 완전히 개무시했어. 분명히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했는데, 그런데 너는 헛되지 않다고 하면서 몸부림을 쳤잖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고 살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착하게 살았으니 말이죠. 물론 죄를 지은 적은 있지만, 그때그때마다 반성하고, 그리고 착한 일을 지은 죄보다 더 많이 했기에, 그래서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곡해이고 착오이고 오해인데, 그게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야 드러난다는 말이죠.
구세군의 이단성 !!
해마다 12월이 되면 삽입되는 풍경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구세군의 자선냄비라는 겁니다. 냄비를 하나 들고 거리에 나서는데, '달랑달랑' 하면서 말이죠. 이들 구세군은 19세기말에 영국에서 생겼는데, 이들의 목표가 무엇인고 하니,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회복지 쪽으로 나갔는데, 왜냐하면 19세기말은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어려운 사회에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할 길이 없느냐고 해서 만든 단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12월만 되면, 그때는 구세군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하루종일 거리에서 냄비를 걸어놓고 봉사를 했다고 하면 뿌듯하겠습니까? 죄를 지었다고 여기겠습니까? 뿌듯한데, 그게 바로 구세군의 이단성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전도서 9장 3절을 모독하고 있는데, "사는 것이 미친 짓이다" 라는 말씀을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서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그들은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다만 관심사는 사회가 어떻게 자기들을 옹호해주고 또 반겨주는지, 즉 그들의 반김 여부에 따라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판가름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측정하려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잘못인가요? 아닌가요? 우리도 여기에 호응할 가능성이 있는데, 즉 "구세군은 역시 착한 일을 하는 거야" 라고 하는 순간, 우리도 구세군과 한 통속이 될 수 있는데, 그들의 사고방식과 우리의 사고방식이 같이 그리고 꾸준히 살아온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가치관 !!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가치관'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인생관이라는 것은, 더 큰 범위를 말하는 것이고, 그 인생관 안에는 가치관이 들어있는데, 그러니 이 가치관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라는 것을 규명하는 것, 그것을 두고 가치관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무엇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무엇은 악하다고 이야기하겠다" 라고 하는 것을 말이죠.
이 가치관까지 전도서가 엑스레이로 찍으면,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시는 것은, 물론 우리는 "성경에 무엇이 들어있지? 내가 믿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순간 여기 전도서에서 손이 올라오는데, 포항 장기곶이라는 해수욕장에 가면 그런 손 모양의 조형물이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손이 올라와서 우리를 붙잡는데, 그렇게 잡고는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마치 저수지에서 물귀신이 나와서 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듯이, 그렇게 우리를 전도서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 안에서 누가 기다리는고 하니, 신약의 예수님이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언약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와 같지 않은데, 우리의 인생은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현재는 지금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런데 말씀 속에서는 한꺼번에 다 보게 된다는 겁니다. 쫙 펴놓고 말이죠. 무엇을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는데, 과거도 진리고 현재도 진리고 미래도 진리라는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데, 즉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 포착이 되었다고 하면 미래도 확실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인간은 창세 전부터 이미 예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시간은 왜 사라져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 라고 되지만,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면, 즉 끝 속에 들어가면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지상에서는 나이 차이가 나는데, 약 800년 정도 말이죠. 그런데 변화산에서는 동기인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하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아삭과 야곱이 차이가 나지만,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신약의 베드로도 그러하고 말이죠. 하늘나라에서는 서로가 동기동창이라는 겁니다. 시간은 천지창조와 더불어 생긴 것인데, 그러니 천지창조의 끝에 가면 시간이 없다는 말이죠.
시간도 만들어진 것인데, '태초에'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담아두셨는데, 그러니 그 시간만 사라지게 되면 모든 것도 다같이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시간이 왜 사라져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 이후가 곧 '종말' !!
모든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다 드러났기 때문에, 그래서 시간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 이후를 '종말' 이라고 하는데, 저는 종말이라고 하면 '아들과 딸' 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나는데, 거기에 나오는 막내딸의 이름이 바로 '종말'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종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거기에 예수님의 시간이 개입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더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채로서 산다는 말이죠. 즉 죽음을 보여주면서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산다, 살지 않는다" 라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데, 지금이라도 주님이 무덤 속을 열면 되니 말이죠.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고, 그 관계가 지어졌으면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즘 최순실 때문에 나리가 난리인데, 김기춘, 우병우도 있고 말이죠. 그리고 이완영과 이만희도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떤 가치관으로 보느냐는 겁니다. "저런 나쁜 놈들,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라고 하지 말고, "저것들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냐? 예수님을 믿을까?" 라고, 그런 가치관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의 가치관이 전도서에 나온 손에 의해서 붙잡혀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뀐 자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오래 사는지, 그런 것은 주님의 엑스레이로는 판독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의 엑스레이로 밝혀지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에 오해하고 곡해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가치관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에게 전도서를 준비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는 전도서를 찾아가야 하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맨홀 속으로 '풍덩'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맨홀이 있고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우연히 성경말씀 중에서 전도서를 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1장을 보는 순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물론 이 말씀을 이전에도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그 말씀을 보는 순간, 거기서 그만 말씀의 손이 나타나서 자기를 붙잡아서 맨홀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물론 이전에도 전도서를 알기는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전도서의 맨홀 속으로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맨홀 속에 전혀 다른 지하세계가 !!
그렇게 빠지고 보니, 그 옆에 시편도 있고 잠언서도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패밀리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하나의 맨홀로 들어갔을 뿐인데, 연결되어있는 그 지하세계가 모두 보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믿은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장난을 쳤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교회에 간 것도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오락실에 놀러 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남들이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말이죠. 사랑을 받기 위해서 갔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는 말씀이 중요하고,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지킬 필요도 없는데, 아예 '풍덩' 하고 빠졌으니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주님이 다시 맨홀 뚜껑을 열고 바깥으로 내보시는데, 빠질 때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빠졌지만, 그러나 이제 밖으로 다시 나올 때는, 성령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다시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제는 그 어떤 사건을 만나더라도 그 전체가 십자가 사건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는 복음의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평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수님의 증인'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생활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막무가내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복음을 끄집어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기서 십자가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성도는, 결론을 십자가로 설명할 수 있어야 !!
그러면 "그 어떤 것도 십자가다" 라고 해버리면 끝나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 사건을 평가함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성경전체에서 자기가 생각나는 성경구절을 모아 가지고, 결론을 십자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몇 마디를 하다가 그냥 십자가로 끝내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 과정에는 자기 체험이 들어가 있지를 않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식으로 끝나고 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제가 이 말씀 속에 들어가서 경험해보니, 그런 일을 통해서 저는 죄인이고 십자가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고,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게 바로 그 사람 안에 담겨있는 고백이고, 그게 바깥으로 분출된다는 겁니다.
철이 없는 손자가 할머니를 보고, "할머니도 이제 많이 늙었다" 라고 한다면, 물론 할머니는 화가 많이 나겠지만, 그래서 용돈을 적게 주든지 하는 보복을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래, 할머니가 나이가 들수록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게 되었어" 라고 한다면, 굳이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아도 그게 바로 십자가로 인한 가치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에는 나이가 드는 것이 아쉬웠는데,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점점 더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지니 말이죠. 그게 바로 그 할머니가 맨홀 속에 빠지고 난 이후에 새롭게 달라진 가치관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장소개념을 영어는 두 가지 다른 표현으로 구분을 합니다. 일반적인 공간을 표현할 때는 'SPACE' 라고 합니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는 지점이 있을 때는, 그것은 'PLACE' 라고 합니다.
SPACE, PLACE !!
여기에 제가 유식한 티를 내면서 적었는데, 영어단어가 두 개가 나오죠. 그것이 'SPACE'와 'PLACE' 라는 것인데, 앞의 것은 공간으로 번역이 되고, 뒤의 것은 처소, 혹은 장소의 의미인데 말이죠. 우리가 'SPACE' 라고 하면 주로 우주공간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데, 그런데 특정 장소를 집어서 이야기할 때는 'PLACE'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것을 언급했는고 하니, 전도서 1장 1절 때문인데, '다윗의 아들' 이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예루살렘'이 나온다는 말이죠. 물론 교인들은 이런 골치가 아픈 것은 싫어하는데, 그냥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 그것만 이야기해달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속이 복잡한데, 그래서 "편하게 갑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그런 것이 바로 자기 시공간에 빠져서 맨홀 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한데, 물론 교인들은 그러할 수 있지만, 맨홀 속에 빠진 성도라고 한다면, 성경말씀에 예루살렘이 나오면, "예루살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반면에 교인들은 "구원은 예수님이 하는 것이지 무슨 예루살렘에 구원을 한다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언뜻 들으면 교인들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교인들은 왜 그렇게 나오는고 하니까, 교인들은 예수님을 마치 부적처럼, 그래서 예수님을 외치면 거기서 신기한 효과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데, 그래서 자기가 추구하는 것은 계속해서 말로 내뱉으면 언젠가는 그 말이 씨가 되어서 합당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데, 하지만 그게 바로 미신 중의 미신이라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말도 있듯이, 계속해서 동일한 말을 내뱉는다는 말이죠.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영화에 보면, "마리아가 어떤 일을 줄 것이다" 라고 하면 실제로 주어지고 하는데, 그게 일종의 코미디 영화인데, 이태리의 유명한 영화라는 겁니다.
그러니 같은 일을 되풀이해서 간구를 하면, 여기서 간구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직접해서 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일면 '빽'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 간구를 교회에서는 '중보기도' 라고 해서 대히트를 쳤다는 겁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
그런데 성경에서는 중보기도는 누구만 할 수 있는고 하니, 우리와 같은 죄인은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에 중보기도를 할 수 없는데, 죄인이 할 수 있는 기도는 무엇인고 하니, 죄인이기 때문에 "이것도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 앞에 바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통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래서 기도를 예수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서, 그것이 죄이니까 죄는 아버지에게 응답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이 되도록 바꾸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너의 기도가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그러니 그게 바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터지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칼칼한(?) 심령이 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아하, 나에게 이런 죄가 들어있었구나" 라고 하면서 깨닫게 되는데, 그러니 그런 죄가 노출되는 순간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고마움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더 덜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모독인데, 그것은 이미 주어진 주님의 은혜를 짓밟는 짓임을 말이죠. 지금 시리아의 경우에는 내전에 나서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도 없어서 난리인데, 그러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냐는 겁니다.
계속해서 '공간'과 '처소'에 대해서 !!
지금 공간과 처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특정지점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는 그게 십자가인데, 여기 전도서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으로서 십자가의 능력을 주님께서 그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 퍼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관계인데, 옛날 계약서에는 예루살렘으로 표현되어있다는 것인데, 새로운 계약서에는 십자가로 되어있고 말이죠. 그런데 예루살렘은 스페이스가 아니고 플레이스인데, 그러면 예루살렘에 가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게 소위 성지순례라는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예루살렘에 가면 자동으로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는 고사하고 오히려 교만만 늘어나는데, 왜냐하면 성지순례를 하는 자기 자신이 시공간으로 둘러 쌓여있기에 말이죠. 그러니 "나는 한국에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간다" 라는 것 자체가 잘못인데, 현재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겁니다.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곧 예루살렘인데, 그리고 자기가 가는 모든 곳이 다 예루살렘이라는 말이죠.
여러분, 삼각형 드론이 뜹니까? 사각형 드론이 뜹니까? 아니면 동그란 드론이 뜹니까? 드론은 모양과 관계가 없이 다 뜬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십자가도 그 모양과 상관이 없는데, 십자가라면 그게 다 십자가라는 말이죠. 예배당에 걸린 십자가라고 해서 은혜가 되고 하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그런 것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곡해를 하는고 하니, 우리가 평소에 거울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듬어서, 그게 완성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이 비추는 것은 그런 바깥의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라는 겁니다. 마치 엑스레이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플레이스가 아니고 스페이스인데, 그런데 지금의 예루살렘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사건은 한 번 일어나고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가봐야 별 다른 감흥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마치 결혼을 하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처음 만났던 그 장소에 아무리 가봐도 그때의 그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저는 제대를 하고 나서 근무했던 부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그곳이 속초인데,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눈이 온다든지 해서 포기했는데 말이죠. 77년도에 제대를 했으니 벌써 40년이 되었는데, 지금도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꿈속에서나 그때 그 사건과 같이 있다는 말이죠.
물론 다시 입대를 하면 비슷한 느낌이 올지도 모르겠는데, 제대를 한 이상 아무리 가봐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빵빵한 시간의 스케줄 속에서 종속을 받는 모습이 아니면, 그때의 그 느낌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니 그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곧 '죄' !!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시간을 기억하는 것을 두고 죄라고 하는데,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사귀면서 "나를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과 사귄 적이 있나?"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죄인데, 지나간 것은 묻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 5년 전에 참 좋았다" 라고 하는 것도 가만히 들어보면, "지금은 별로다" 라는 의미인데(ㅋㅋ), 그러니 그런 것을 묻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겁니다.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닌데, 전도서에 이게 나온다는 말이죠. 전도서가 우리를 두 손으로 잡아당긴다는 것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인데,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마음껏 즐기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것이 아니니 말이죠.
지금 이렇게 커피를 맛있게 마시면, 이 커피가 자기 것이 아닌데, 그러면 그것을 마시는 자기 자신도 역시나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언약 속에 들어가면 자기 것이 주님의 것으로 바뀌어서 나오는데, 맨홀 뚜껑을 열고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것이 필요해서, 그 필요한 만큼만 매우 적절하게 주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이 되는데 필요한, 거기에 적재적소에 맞추어서 필요한 것만큼만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꼭 부자가 되어서 주님을 증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지금 받은 은혜가 족하다는 것인데, 즉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겁니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빼달라고 3번이나 기도를 했는데, 무슨 삼세판도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3번이나 기도하니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됐다. 고마해라" 라는 것인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비록 우리 자신은 불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주님의 증인이 되는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완벽하다는 말이죠.
지금 우리나라에 최순실 게이트가 벌어졌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게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는 겁니다. 하루하루가 지겹든 노인네들은 종편을 틀어놓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는 말이죠.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르는데, 언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를 보내는데 적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즉 우리의 인생관을 바꾸는데 적절하다는 말이죠. "아하, 대통령이 되어도 이 세상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밤이라도 심장마비가 온다든지 해서 갑자기 자기가 죽게 되든지 하면,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인데, 그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어있을 때, 그게 바로 언약 안에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도대체 예루살렘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고 하니, 예루살렘에는 '제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제사를 총괄하는 지점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것을 구약의 십자가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에서 하는 일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관광하는 곳이 아니고 말이죠.
물론 예루살렘에는 편의점도 있고 식당도 있고 목욕탕도 있겠지만, 그런데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라고 이야기를 할 때는, 그게 제사를 드리는 도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면 여기에 희생제물이 도입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백성들과 어디서 유일하게 만나시는고 하니, 예루살렘에서만 만나시는데, 다른 곳에서는 만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붕' 하고 뜬 예루살렘 !!
물론 모세언약 때는 이동하는 성막에서 만나시지만, 다윗언약 때가 되면 이게 플레이스가 된다는 겁니다. 만남의 장소가 딱 지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예루살렘인데, 그러면 지금 우리가 그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안 되는데, 예루살렘이 그만 붕 뜨고 말았는데, 시간세계에서 묵시세계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는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런데 40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 구름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붕 뜨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때 예수님이 시속 몇 킬로로 떴고 그리고 몇 미터를 공중부양을 했습니까? 그런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데, 그것은 시공간의 범주 안에서 가능한 질문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묵시세계로 들어가셨는데, 그 묵시세계는 우리가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도저히 갈 수 없다는 말이죠. 묵시세계는 들락날락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주님이 거기에 가셔서 거기서 성령을 보내주시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오시는고 하니, 주사기 방식으로 오신다는 말이죠. 며칠 전에 제가 복음을 위해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는데, 몸이 좀 아파도 견딜 수 있는데 말이죠. 그 주사기를 가만히 보면, 바깥에서 밀어 부치는데, 그렇게 피부를 뚫고 혈관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을 빼내면 나중에는 거의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옛날의 불주사는 그 흔적이 평생을 가지만 말이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주사기 방식' !!
무슨 말인고 하니까, 분명히 구원을 받았는데 그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으로 '주사기 방식'으로 바꾸어야 하겠는데,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올리겠습니다. 아무튼 성령께서 오시고 빠지시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기도를 해서 받았는지 헌금을 해서 받았는지 교회에 잘 다녀서 받았는지, 우리는 그것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구원을 받았다고, 달리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언약적 능력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게 되는데 말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인가?" 라고 하면, 주사기가 외부에서 꽂혀서 주사를 놓고 빼내게 되는데, 그러니 주사액이 우리 몸 속에 남아있는데, 하지만 주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예루살렘이 되는데, 즉 우리가 바로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성전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의 주사액이 들어있으면, 즉 언약이 들어있으면, 십자가가 들어있으면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죠.
아무튼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특정 사건이 일어난 지점, 즉 플레이스인데, 바로 이 특정한 지점에서 제사가 드려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제사가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면 이렇게 제사가 이루어지면 여기에 무엇이 도입이 됩니까? 제사를 드리려고 하면, 제물이 도입된다는 말이죠.
제사에 도입된 제물로 인해서 !!
그러면 강의를 처음부터 해보겠는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했는데, 누구를 보고 말입니까? 우리를 보고, 그리고 시공간의 이 세상을 보고 말이죠. 그러면 헛되다고 하는 그 가치관을, 그것을 이 제물이 증명해주게 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려지는 제사에 이 제물이 도입되게 되면, 제물이 무엇이 되어서 나옵니까? 피를 흘리는 죽음이 되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제물은 제물자체의 문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이끌고 관여하게 되면, 그래서 주님께서 이 제사를 아벨의 제사처럼 받으시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론 우리는 70년, 80년을 살아도 일부를 살게 될 뿐이고, 그리고 장소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만,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관여하게 된다는 겁니까?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이 보시는 그 전부에 이미 관계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게 죄라는 것을 규정하면서 말이죠. 구세군처럼 아무리 냄비를 흔들고 해도, 그것마저도 미친 짓이라는 겁니다.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몰라도, 그러면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말이죠. 예루살렘은 기분이 나쁜 이야기가 아니고, 박수를 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인생을 아무리 짧게 살아도, 지금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면, 십자가가 아니라면, 전도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오래 산다고 해서 알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니면 세계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알 수가 있습니까?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이렇습니다 !!
욥기에 보면 4명의 친구가 나오는데, 제일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4번째 친구라는 겁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는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할 때 가만히 있었는데, 나이가 제일 어려서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정당한 것으로 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이 제사를 지낼 때, 3명의 친구를 위해서는 대속물을 드리지만, 4번째 친구는 그만 빼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주님의 관계인데, 이 4번째 친구는 비록 나이는 적어도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했고 제대로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똑똑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렇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욥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세상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헛것이다" 라고 하면, 상대방은 "니가 인생을 참 많이 살았구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인생을 많이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고 보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되니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의 모습인데,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자기 이름으로, 자기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뒤에서 밀어주시는 데로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일부러 조성하신 환경인데, 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시고 사건을 일으키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라고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을 세 글자로 '선교사'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리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지식이 아니고 말씀화가 된 삶으로 전파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고 보니 어제 설교를 하면서 선교사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이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제물이 들어갔는데, 이 제물이 죽음으로 끝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죽인 것인데, 그러면 왜 죽이십니까? 이 모든 세상이 전체와 관여될 때는, 이 세상은 그야말로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그래서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이 제물이 죽음으로서 보여준다는 겁니다.
제물의 죽음이 어떻게 백성들과 연결이 되는가?
그러면 그 다음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죽음이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 예루살렘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닌데, 다른 지역에도 퍼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의 취지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즉 예루살렘이라는 플레이스에 있는 전도자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서 외친다는 것이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다고 하면 이 예루살렘의 전도자가, 그가 예루살렘의 왕이니까, 왕적인 권위를 가지고 "나의 말이 이스라엘의 그 어떤 지역도 벗어날 수 없다" 라고 선포를 했다는 겁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이죠.
전도서는 율법이기에 우리가 지킬 수 없지만 !!
그런데 이 말씀이, 그냥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말이라고 하면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지식이 될 뿐인데, 그러면 "아, 알았어요. 인생이 헛되다는 것이죠? 잘 알겠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의 전도서는 율법인데, 즉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키지도 못할 것을 보기는 왜 봅니까? 우리 안에 전도서가 담겨있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전도서라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 있던 말씀과 다시 엮이게 되는데, 그러면 "그래, 내 인생 자체가 헛된 것이야" 라고 하면서 동의하면서 고백이 나오게 되고, 그 고백이 곧 예수님의 증인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의 전도서만을 가지고는, 즉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빼버리고 달랑 전도서만 가지고는 안 되는데, 그러니 아무리 유대인들이 이 전도서를 천번만번 읽어봐도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필요합니까?
성령님의 능력으로 !!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의 확인된 진리가 일반 백성들에게 연결이 되려고 하면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 그렇게 되려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능력이 곧 성경책을 썼던 분의 능력인데, 그래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전도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전도서를 바로 아는 게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전도서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전도서라는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에게 투입이 되면, 마치 주사기를 가고 주사액을 우리의 몸 속으로 집어넣듯이 말이죠. 그렇게 투입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전도서의 삶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전도서를 시작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 속에는 이 전도서라는 말씀의 능력이 작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23 오후 6시에 마침.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