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4-허망한 잔상 0702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20. 07:38
2017-02-18 21:55:43조회 : 18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 - 허망한 잔상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 - 허망한 잔상

                                                             07,02,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전도서 1장에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합니다. '헛되다' 라는 것이 5번이나 나옵니다. '헛되다' 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하나님도 지치지를 않는데, 참으로 끈질기십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끈질기게 '헛되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 !!

여기서 '헛되다' 라고 하는 것은, 존재자체가 헛되다는 의미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라는 뜻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니 헛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덩어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헛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니까 말이죠.

그러니 지금 이 장소에 자기처럼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헛됨이 되는데, 즉 있는 것은 있음이 되고, 없는 것은 없음도 되고, 또한 헛됨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한 것은 헛됨이 아니라 의미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여기 교재에 보면 '끈질기다' 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헛되다' 라고 하시면서 따라붙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3년 이전에 한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3년 이후인 지금도 하는 것이 여전히 헛되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이 헛됨을 엿가락처럼 늘여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엿가락에 칼질을 해서 다시 토막을 내어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 하나 떨어져나간 조각들이 바로 '헛됨'의 조각들이 되겠죠. 그런데 인간들은 이 헛됨의 조각들을 하나로 연결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자기 가슴에 훈장처럼 차고 다니게 됩니다.

한꺼번에 헛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끈질기심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늘여봐도, 그것을 잘라서 보게 되면 헛됨의 조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속속들이 다 헛되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는데, 헛되다고 하나님 쪽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헛되려면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덩어리가 있어야 헛되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죠.

물론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사라지니 헛된 것이 되지만, 하지만 우선은 뭔가 있다고 하면, 그렇게 있는데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헛되다고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있으면 헛되다고 합니까? 있으면 헛되지 않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말이죠.

반발하고, 또 반발하고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헛되다고 하고, 반면에 인간은 헛되지 않다고 하고, 그렇게 해서 반발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호응하는 쪽이 아니라, 하나님이 했다고 하면 반발하고, 했다고 하면 또 반발하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인간이 따먹었는데, 그렇다면 인간 속에는 "따먹고 싶다" 라는 성깔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면 그냥 가만히 있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반발을 하는데, 동으로 가라고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고 하면 동으로 가고 말이죠.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십계명인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면, 꼭 다른 신을 찾아서 섬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탐내지 말라" 라고 하면 탐을 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반대로 나가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하나님에 대해서 반대하는 존재라는 말이죠. 그렇게 보시면, 우리 인간에 대해서 가장 적절하게 설명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왜 내가 죄인인가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

지난 오후시간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왜 내가 죄인인가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좀 더 부연설명을 하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그런데 왜 자꾸만 죽음 쪽으로 달려가야만 하는지, 도대체 누가 떠미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에 반대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반대하지 않으면 됩니까? 사실은 그것이 더 못되었는데, 그게 더 얄밉다는 겁니다. 성질자체가 반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성질을 가지고 반대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그것을 그야말로 쥐어박고 싶다는 말이죠. 본성을 보이라는 겁니다. 아닌 척을 하지 말고 말이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하면, "예, 저는 돈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게 바로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이게 주의한다고 해서 될 문제냐는 겁니다.

돈을 몇 십만원을 주면 거절할지 몰라도, "최순실의 재산을 니가 다 가져라" 라고 하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로또를 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은근히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 그런 로또를 선물로 주면, "뭐 이까짓 것!" 라고 하면서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말이죠.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보고 "노숙자가 되어라" 라고 하겠습니까? 노숙자의 반대말이 부자인데, 그러니 자식을 보고 부자가 되라고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평소에 그렇게 가르치는 부모의 마음속에는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돈이 최고라는 겁니다. 

여기서 성경을 한 군데 살펴보겠는데, 이 말씀을 보고도 착한 척을 한다고 하면 증세가 매우 심각하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입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어도 좋다" 라는 것인데, 아버지의 사랑이 우선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평생동안 연구해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가장 자기다운데, 그런 '나'가 되고 싶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은 성경말씀이 지적질을 하기 이전까지는, 누가 감히 여기에 대해서 지적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성공을 했다고 하면 다들 무엇이라고 합니까? "교회에 열심히 다니더니만 하나님에게 복을 받았네" 라고 하면서 부러워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라고 성경이 의도적으로 당부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정신이 빠져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세상 속에 정신이 빠져있는데, 그것을 울타리를 쳐서 '세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왔으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데, 기도해서 돈을 벌 생각만 하지 말고 말이죠.

이 세상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기에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까?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거기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찾는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대목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데, 하나님께서는 '세상' 이라는 동일한 말을 사용하시면서, 그 뒤에서 진짜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보는 눈을 보이지 않게 해서 바쳐놓고는, 그리고 나서 '세상'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세상은 우리가 태어난 이 현실이 전부인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당연히 그게 옳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그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한국교회 다 그렇게 가르치는데, 그게 잘못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렇게 배운 나는 도대체 뭡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보이지 않게 새롭게 해석을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내가 있는 이곳, 내가 즐겨 사는 이곳, 내가 살아야 하는 이곳", 바로 이곳을 세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누군가가 다녀간 곳을 세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배제'를 당했어 !!

그런데 그게 기분 좋게 다녀간 것이 아니라 그만 쫓겨났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배제' 라고 하는데, 즉 "그만 나가 주세요!" 라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나가주세요. 나가지 않으면 강제로 끌어내겠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배제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누가 다녀갔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보내신 분이 배제를 당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 전에는 선지자들이 왔지만, 모두가 다 배제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어떤 성질이 있는고 하니, 마치 용수철과 같은 성질이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성깔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다 배제를 시키는 성질이 가득한 곳이 바로, 우리가 좋다고 하면서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용수철이 모든 사람을 다 퉁겨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질을 가진 인간은 보담아준다는 것이죠. 위로와 격려도 해주고 말이죠.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의 직업이 도둑인데, 그런데 출근하는 아버지에게 딸이 부르는 노래가 무엇인고 하니,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힘이 있어야 가스관을 타고 올라갈 수 있기에 말이죠(ㅋㅋ).

그것을 '단편적'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 식구들끼리는 굉장히 정이 많지만, 정작 아버지는 도둑질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떤 짓을 하든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란 말이죠. 그러니 생각하는 폭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는데, 남에게 피해를 주던 말던 자기 가정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교회나 절이 왜 생겼는고 하니,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생겼다는 말이죠. 그들의 최종적인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행복해집니다" 라는 것인데, 성경본문을 가지고 그것을 설교하고 있다는 겁니다. 절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그게 뭐냐는 말이죠.

1대지 구라치고, 2대지 구라치고, 3대지 구라치고 !!

"1대지, 2대지, 3대지" 라고 하면서 그런 설교를 하는데, 저는 처음에 그게 돼지인 줄 알았는데(ㅋㅋ), 나중에 신학교에 와서 보니 돼지가 아니라 대지였다는 겁니다. 1대지 구라치고, 2대지 구라치고, 또한 3대지 구라치고, 그렇다는 말이죠.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듣고 있으니, 3대지에 가면 희망적인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는 겁니다.

그 희망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복을 받습니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어디서 그렇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인데, 즉 하나님을 추방시켜버린 세상인데, 우리는 거기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행복을 포기하자 !!

그러니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잠시 용기를 내보면, 그게 어떤 용기인도 하니, 행복을 포기하기로 하자는 겁니다.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만 누구만 알면 된다는 겁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겁니다. 그러니 출발점을 자기의 행복으로 하지 말고, 행복을 삽으로 퍼내고, 그러면 구덩이가 생기는데, 그곳에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것을 집어넣자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니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 이게 신앙의 스타트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 찾기가 쉽지 않은데,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겁이 나서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어느 세월에 그런 고백이 나오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오자마자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심지어 오기 전에 한 사람도 있는데, 그리고 얻어터지고 오는 사람도 있고 말이죠. 하지만 배부른 사람들은 교회를 제 아무리 오래 다녀도,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계속해서 "저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도 복을 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WHY ME, LORD !!

그러니 자기 관심이 전부인데, 출발점을 삽으로 퍼내는 일이 없었다는 말이죠. 즉 "내가 불행해도 좋습니다" 라는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용기로 될 문제는 아닌데, 노골적으로 말하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죽어야 그러한 고백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나를 죽이시는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줄이면 "주여, 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노골적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나만 건드리십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줄이면 "하필이면 나를?"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는 도중에는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공부가 모두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오늘도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엿을 길게 늘여서 일일이 다 토막을 낸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조각 하나 하나를 다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이렇게 엿가락을 길게 늘이면 전체적으로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조각 조각을 내어도 헛되다는 것이 맞는데,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라는 어떻게 합니까? 인생은 헛되다고 하면서 돌아서서는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헛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자기 논리와 실제생활은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을 하기 전에, 먼저 요한일서 2장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은 내 세상이기에 !!

"너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해서, 세상을 가운데 두고서 두 개의 의견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세상인데, 이게 자기의 전부라는 말이죠. 여기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이 세상이 없으면 자기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안정이 되어야하고, 전쟁이 없어야하고, 훌륭한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걱정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이 세상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등산을 하는데 비가 내린다면, "내가 등산을 하는데 왜 비가 오지? 이것은 말이 안 돼"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낸다고 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 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의 행복인데, 자기 행복을 다른 말로 자기 만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이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쾌락적 삶'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감각적 쾌락이 있는데, 이것은 곧 지루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에피큐로스 학파에서는 이것을 정신적 쾌락으로 해서 추구하게 되는데, 그게 곧 불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하는데, 그게 원래 인도종교인데, 브라만교에서 왔다는 말이죠. 불교는 곧 자기 행복이고, 그것은 자기 만족상태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쾌락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런데 감각적 쾌락은 시시하더라는 겁니다. 등산도 하고 난도 키워보고 해도 모두 시시한데, 그러니 정신적 만족이 최고더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해도 이런 식이 되어버리면 정말이지 곤란한데, 그렇게 감각에서 정신으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수양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불교나 공자나 맹자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그 수양하는 방법이 곧 절제인데, 무엇을 절제합니까? 항상 차고 들어오는 동물적인 충동과 욕구를 절제하게 되면 정신적 쾌락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시도했는데, 그런데 성공했을까요? 실패를 했을까요? 실패를 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놓쳤을까요? 우리 인간이 시간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절제를 할 때는 순간적으로 기뻤는데, 그런데 그게 몇 초를 가는고 하니까, 심리적으로 조사를 해보니, 3초를 간다는 겁니다. 그게 3초 동안의 천국인데, "참 기쁘다. 행복하다. 나는 지금 죽어도 좋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3초 동안의 천국 !!

그러고 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와서 "엄마, 돈 좀 있나? 우리 이 서방이 돈이 좀 필요해" 라고 하면, 그만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또 수양을 해야하는데, 그래서 머리를 밀고 절로 들어가는데, 그래서 10년 동안 도를 닦아서 깨닫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역시 3초 천국인데, 그것을 알려고 청춘을 다 날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바보인데, 그래서 절에서 준비한 것이 목탁인데, 그 3초를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아침마다 목탁을 두드리는데, 천주교에서는 묵주를 준비해서 돌리고 말이죠. 물론 그렇게 하면 5분은 가는데, 하지만 그 5분이 지나고 나면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그게 곧 새벽기도인데, 그 순간에는 은혜를 받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서 사람과 부딪치면 입에서 욕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인데, 찬양과 방언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할 때는 신이 나지만 끝나고 나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특히 봉사와 구제의 경우에는,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야말로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도와주기 시작하면 그 쾌감은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도와주고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끝나고 나면 역시나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부산물로서 우쭐거림이 남아있는데, 즉 "이 만큼 내가 대단하다" 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다 늘어진 엿가락 !!

이것이 다 늘어진 엿가락인데, 아무리 잘라봐야 헛되고 헛되다는 말이죠. 그게 전도서에 나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우리가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행복을 추구하려고 그 짓을 하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대해서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용수철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오면 퉁겨내는 성깔로 통치된 세상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아무리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해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데, 이 세상에 왔다가 그만 퉁겨버린, 그 사랑이 바로 영원한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겁니다.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그러면 그 사랑이 누구인고 하니, 요한일서에서는 그것을 화목제물이고 하는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아는 것이 왜 행복합니까? 불교의 원칙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으면 3초의 감사가 나오는데, 그러면 3초가 지나면 또 불행해진다는 겁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니 '나' 라는 인간 자체가 이 세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즉 십자가, 언약, 복음, 천국을 주어도, 물론 그게 왔을 때는 잠시 좋았다가 다시 돌아서서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 물들게 된다면, 그러면 불교나 기독교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주장은 십자가를 오해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를 소유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억하라는 것이 전혀 아닌데,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달랑 십자가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계를 동반해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겁니다. 

다중현실(多重現實)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 동그라미가 '나' 라고 하면, 한 쪽은 예수님을 배제한 세상이 점령하고 있고, 반면에 십자가가 오게 되면, 이 세상에 허덕이고 있는, 스스로 만족이 없고 죄책감과 불안의식으로, 즉 "나는 나쁜 놈이니 하나님을 벌을 주시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망해" 라고 하는, 그런 불안함이 우리에게는 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해서 마일리지를 쌓아놓아야 내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뭔가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야단을 치지는 않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만 나쁜 짓을 했다고 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중요한 일이 영향을 받을 것 같아서, 그래서 미리 앞당겨서 슬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십자가라는 새로운 현실이 덮치면 어떻게 됩니까? 이번 수련회에서 이 현실을 '다중현실'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중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고 하니, 미처 이것은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를 해드리는데, 왜냐하면 우리교회이니 말이죠(ㅋㅋ).

숫자 2는 없어 !!

숫자에 있어서 2는 없는데, 우리는 흔히 "1, 2, 3, 4, 5 …", 그런 식으로 나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2는 2가 아니고 '1+1' 이라는 겁니다. 3은 '1+1+1'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숫자는 인간의 생각하는 놀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이게 오렌지 하나에 오렌지 하나가 붙은 것일 뿐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2라고 하니, 마치 '2' 라고 하는 오렌지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긴다는 말이죠. 사실 그런 오렌지는 없는데, 그것을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숫자를 붙인다는 것은, 단지 편리함을 위해서 그런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삭제하고 하면 달랑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몸뚱아리 하나만 남는다는 말이죠. 연세가 많은 분들은 다들 아는데, 그렇게 인생을 한 평생을 살아도, 결국에 남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가지고 가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자기의 벌거벗은 몸, 그것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김국환의 '타타타' 라는 노래가사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러니 결국 그냥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데, 자식은 소유가 아니라 자기 곁에 출몰하는 것이고 말이죠.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아직 출현하지 않은 전체 !!

'다중(多重)' 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1인데, 그런데 이쪽 1과 저쪽 1이 서로 차원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쪽 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있는 1이고, 저쪽 1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전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일 낮 시간에 지나가면서 '아직 출현하지 않은 전체' 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래서 인간은 철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전체를 다 모르니 말이죠. 사람은 현재 자기에게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을 몰고 오는고 하니, 이미 주님이 준비하신 그 전부의 나라가 십자가로 덮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성도는 단편적으로만 알던 삶에서 전체를 아는 삶으로 전환이 된다는 말이죠. 즉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경우에는, 기도를 할 때 진리를 알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지혜는 아직 모르는 것을 알게 해주는 지혜라는 겁니다. 그게 시편 39편에 보면, 자기가 없는 것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런 기도를 하라는 말이죠.

(시 39: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예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을 것이요" 라고 했는데,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이 있더라도 살다가 없어지면 없는 것이 되는데, 그런데 그 '나' 라는 것은 없어져도 없는 그 자리는 주님이 준비한 그 전체에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는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다 !!

다시 말해서, "너는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이유가 자리잡고 있는 그 빈자리를, 우리는 '나' 라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방해를 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살다보니, 그만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고 말았다는 겁니다. 평생토록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한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말이죠. 주로 목사들이 그런 꿈을 많이 꾸는데, 설교준비는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미 예배는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교인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데 설교는 준비되지 않았고, 물론 그것은 대부분이 화장실에 가라는 신호인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자기는 꿈속에서 자기는 설교가 준비되지 않아서 난리인데, 그런데 이미 강단에는 설교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인데 여기에 있습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줄이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곧 '죄' !!

그 당시에 사도바울은 사울이었는데, 즉 자기가 주인공이었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니, "당신이 무엇인데 내 인생에 관여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 것을 찾으러 왔다는 말이죠. 원래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사울은 그것을 착각해서, 자기 인생이니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죠.

거기서 사도바울이 알게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을 모르는 것이 죄이고, 그것을 고린도전서 16장에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니 우리는 주님만을 사랑해야하는 자리를,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자리로 여기고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물론 그것은 옆 사람에게 배웠지요. 같이 이 세상을 살다보니, 다들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아하, 저렇게 살면 되겠구나" 라고 해서 말이죠.

최순실의 문제점은?

최순실이 왜 문제입니까? 인사에 개입하고 뇌물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최순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돌이 아니라 촛불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최순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사랑하니, 박근혜를 붙들게 되었고, 자기 딸을 위해서 삼성을 붙잡았다는 겁니다. 이게 성경바깥에서는 출세한 것이고 성공한 것인데, 그런데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의하면 어떻다는 겁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최순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겁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자기 사랑밖에 몰랐는데, 그러면서도 강남의 큰 교회라는 교회는 다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죠. 그야말로 미친 여자에 미친 교회라는 겁니다. 세상 교회의 이론에 의하면 형제를 비난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최순실을 비난을 했으니 곤란한데 말이죠.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고 나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건제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의 문제는 먼저 상대방에게 보상을 해주고 나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물을 훼손한 경우에는 제사를 먼저 드리고 보상을 하고 말이죠. 물론 제사 자체가 보상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주장하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부모님에게 용돈을 먼저 드리고 나서 교회에 와서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던지 하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예배만 드리면 부모에게는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에 있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는가?" 라고 하셨는데, 이게 요한일서에도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우리 인간들의 이런 실체를 다 끄집어내기 위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래,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야"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이 성경말씀을 보통 오해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삽시다 !!

요즘 교회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기존의 기성 교인들에게 대해서 그야말로 염증을 넘어서서 환멸을 느끼는데, 그 이중성에 대해서 말이죠. 교회에서는 장로라고 하면서 바깥에서는 너무나도 개판으로 살아가니, 그래서 "정말 말씀대로 살자" 라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젊은 신학자나 목사나 교인들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정의실현인데, 즉 정치적 정의실현, 경제적 정의실현, 이 두 가지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정치적으로는 좌파고, 경제적으로는 공동체 운동을 하는 것인데, 즉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자" 라는 것인데, 이것은 벌써 마르크스가 시도했던 겁니다.

이게 한국 땅에서 안 되니 아프리카로 가는데, 이것을 선교단체에서 장려한다는 말이죠. "이제 한국 땅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 아프리카로 가서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그것이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삶으로 보여주는 산 제사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코니카(?)' 라는 것을 통해서, 그것이 한국에 있는 대외적인 협력단체인데, 과거에는 우리가 원조를 받았지만 이제는 해주라고 압력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무상으로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는 원조단체를 만들어주어야, 우리나라의 국격이, 우리나라의 브랜드가 해외에서도 먹혀 들어간다는 겁니다.

일본도 그런 무상원조를 많이 했는데, 그런데 일본은 자기 나라의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공짜로 물건을 원조해주다가, 나중에 거기에 맛이 들면 비싸게 팔아먹는다는 것이죠. 요즘은 중국도 활발하게 이런 움직임이 있고 말이죠.

나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다 !!

그런데 이게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계속해서 무엇을 비켜가고 있습니까? 그런 정의실현 자체가 십자가의 복음을 배척하는, 그런 성깔이 나오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그 출발점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겠다는 것인데, 즉 "내 몸을 하나님께 직접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중간이 무엇이 빠지고 없는가?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의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계속해서 배제하는 것인데, 그것이 헛된 짓임을 말이죠. 젊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데, 물론 나이가 든 사람들도 역시 모르지만 말이죠. "기성교회가 문제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거부하고 성도의 삶으로 보여주자"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맞느냐는 겁니다. 기존의 것이 틀렸다는 이유로 인해서 이게 정당화가 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 중간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그만 빠지고 말았는데, 즉 "무슨 일을 해도 나는 죄인이다. 나는 허무하다" 라는 것이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나는 왜 죄인이며, 왜 부질없는 일만 벌리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 즐거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이웃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이죠. 굳이 아프리카로 가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 동네에서 쓰레기만 치워도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쓰레기를 치우는 나는 착하고, 버리는 놈들은 나쁘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뭔가 움직였다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제하고 밀칠 수밖에 없는 용수철과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여기서 교재 1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왜냐하면 그래야 그 헛됨의 조각들이 무엇에 달라붙는가를 지켜보고 계시고, 그 달라붙은 몸체를 로마서 8장 3절에 나오는 '육신됨'을 증명하는 바탕으로 삼으시려는 겁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나가 놀아라 !!

여기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반면에 하나님은 그것을 하심으로서 인간구원에 대해서는 배제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나가 놀아라!" 라고 하시면서 배제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악마와 상대하지 우리와 상대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게 곧 복음이라는 말이죠.

왜 집안에 손님이 오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나가 놀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 집에 손님들이 엄청 왔었는데,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법 유지였다는 말이죠. 그러면 손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손님들이 간 다음에 남아있는 음식, 거기에 눈독을 들이겠죠. 그때는 삼촌과 고모들도 같이 있었으니, 누가 빨리 가서 가로채느냐는 것이 관건이었다는 말이죠.

아무튼 "나가 놀아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인생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은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육신이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율법, 육신, 그런 모든 개념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뗄 것을 요구하시는데, 언약과 말씀에서도 그렇고 말이죠.

왜냐하면 그 말씀은 친히 누가 이루시는고 하니, 아버지가 준비한 말씀을 아들이 혼자서 다 이룬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취'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인간에게 좋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 좋게 한다는 겁니다.

'심판주'로서의 주님 !!

그러면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심판주인데, 여기서 심판주라는 것은 편가름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당연히 편을 나누니, 심판이 있다는 말이죠. 즉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보내고, 반면에 주를 사랑하는 자는 천국으로 보내는, 그런 심판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새롭게 준비한 세상이라는 것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세상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심판주가 되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인데,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을 심판주로 만들어내기 위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그러한 심판을 받을 악한 세상이 있어야, 그 악한 세상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심판주의 모든 행사와 권리는 합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한 권리를 두고서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데, 그게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겁니다.

로마서의 전개과정 !!

로마서의 전개가 어떠한고 하니까, 1장에서는 아예 "인간은 우상을 섬긴다" 라고 전제를 하고 들어가는데, 그 다음에 2장에서는 "마지막 날에 진노의 날이 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시면서, 뒤에서는 그것을 위해서 심판의 날을 준비해놓았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3장에 들어가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1장에서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우상을 섬긴다고 하고, 2장에서는 그것 때문에 진노의 날이 있다고 하시고, 3장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 4장을 우리보고 쓰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별로 어렵지 않은데, 그 다음에는 예수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실제로 4장에 보면 화목제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로마서 앞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복음인데, 2장에 보면 복음은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멸망을 당할 자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멸망을 당할 것 같으면 그대로 멸망을 시켜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굳이 복음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죄를 짓는 우리마저도 무엇에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있어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죠. 어떻게 관련성이 있습니까? 우리가 죄인이 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즉 아무도 의인이 없을 때, 주님의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렇게 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가게 하시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예수님의 심판기준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 우리가 좋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현실이, 즉 장사를 하는 사람은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를 짓고, 그리고 공무원으로 있는 사람은 공무원으로서 일하는 것이 말이죠.

그게 왜 필요한고 하니, 거기서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온 몸으로 평생동안 체득하게 된다는 겁니다. 눈만 뜨면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즉 "오늘도 돈을 벌어야한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는데, 아무리 더러워도 사표를 던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주여, 죄인임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 외에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고백이고, 구원받은 자의 고백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단디해야 하는데(ㅋㅋ),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여, 죄인임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는, 그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미 결정이 난 사항인데, 이미 합격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고백을 해서 합격통지서를 받는 게 아니고 말이죠. 이런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천국에 가서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다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삶 속에는 무엇도 포함이 되는고 하니, 거기에는 교회도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왜 가짜일 수밖에 없는가를 똑똑하게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목사에게 속아서 돈도 날리고 사기도 당해가면서 말이죠. 모두들 그런 경험이 있지요?

내가 바로 바리새인이구나 !!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한 번 경험해보라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장 근접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라고 누가 주동을 했느냐는 말이죠. 가장 경건하다고 하는 자들이 그렇게 했는데, 거룩의 최첨단을 걸었다고 하던 자들이 말이죠.

그들은 거룩과 경건에 대해서는 모든 정답을 다 가지고 있던 자들인데, 세리와 창기들이 모의를 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죄로 인해서 부끄러워했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간다고 했다는 말이죠.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닌데, 오히려 그녀는 자기와 같은 여인을 사랑해주신 예수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평생을 모은 돈으로 향수를 사놓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이 짓을 했는가?" 라고 하면서, 그것을 주님 발 앞에서 그만 깨트려버리는데, 그러면서 자기 눈물을 거기에 섞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평생 눈물로 지새운 이유가 이런 향수 때문인가?" 라고 하면서, 그래서 자기의 눈물과 양수를 예수님께 다 드리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주님께서 벌이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이죠. "아하, 주님이 그래서 나를 죄인이 되게 해주셨구나" 라고 하는, 그 은혜를 이제야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데, "용서를 많이 받은 자가 은혜를 많이 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인생목표를 "헛되게 살자" 라고 할 수 있는데,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부질없이 살자"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하나로 응축한 단어가 곧 '육신' 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육신이라고 보지 않는데, 인간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권이 나왔는데, 인간의 존엄성이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인데, 거기서 나온 것이 진화론이고, 자동차도 나오고, 비행기도 나오고, 온갖 것들이 다 나온다는  겁니다.

징기스칸 제국 !!

이런 문명이기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라는 말이죠, 12세기부터 있었던 위대한 나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징기스칸 제국, 즉 몽골이라는 겁니다. 이 나라의 규모가 그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고 하니, 그야말로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일본 북쪽의 홋카이도부터 시작해서 저기 유럽의 헝가리까지인데, 북쪽은 주인이 없으니까 아예 자기들의 것이고, 그리고 남쪽으로는 태국까지 내려갔다는 말이죠. 이 태국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망한 경우가 달리 없는데, 이 몽골이 유일하다는 겁니다.

이 몽골의 통치원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아주 간단한데,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라는 겁니다. 그 몽골에게 지배를 받은 나라가 이슬람인데, 그런데 이슬람 국가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천국이 전부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던 국가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한 몽골에게 당하고 말았는데, 헝가리도 천주교 국가이니 그렇고 말이죠. 

역시 현찰이야 !!

그렇다면 이런 역사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종교든 신앙이든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현찰이다" 라는 것인데(ㅋㅋ), 누가 뭐라고 해도 돈이 최고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도 돈을 밝힐 수밖에 없는데, 역시 돈이 최고라는 말이죠.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목사는 흐뭇해하는데, 물론 재정집사도 그렇고 말이죠. 그런데 재정이 바닥이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재정집사는 긴장을 하게 되는데, 물론 다른 교인들은 관심도 없지만 말이죠. 다 맡겨놓고는 남의 일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라 돈이란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교회도 헛된 것임을 말이죠. "목사님, 죄송합니다. 헌금이 적어서 월급을 반만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때부터 목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기독교 신문에 보면 광고가 나오는데, 어디 당회장을 구하는 교회가 없는지, 그것만 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추방이 되었는데,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다가올 때는 십자가를 앞세워서 온다는 겁니다. 성도든 성도가 아니든 돈밖에 모른다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하나님을 이용해서 출세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십자가가 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느냐는 말이죠. 성도라고 해도 돈밖에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인데 말이죠.

허망한 잔상 !!

이제부터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전도서에서의 헛되다고 하는 것과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고 하는 내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이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 스크린의 천을 보려고 옵니까? 아니면 거기에 비춰지는 그림을 보려고 옵니까? 화면에 맺힌 그림을 보려고 오는데, 그래서 화면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면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꽂혀있는 이 모든 화려한 것들이, 그야말로 허망한 얇은 그림자이고 잔상에 불과한데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잔상을 만드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자가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녀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수미가 불렀던 명성황후에 나오는데 말이죠. 그러니 성도라는 것은, 주님께서 다녀갔던 그 세계를 지금 맛보라고, 그래서 주님께서 일부러 집어넣고 다시 빼내는, 그런 작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같이 다녀가는데, 그렇게 다녀가면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이런 허망한 잔상을 열심히 목숨을 걸고 남겼다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하얀 천에 불과한데, 무(無)에 불과한데, 그런데 왜 이것을 허망한 잔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생이라고 보는고 하니, 여기 무에서 악마의 손길이, 즉 악마의 능력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의미가 있어. 의미가 있어. 참 잘했어!" 라고 하면서 붙든다는 것이죠. "이전에는 헌금을 9천원을 했는데, 그러니 이제는 만원을 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악마는 부질없는 것을 전혀 부질없는 짓으로 보지 않고, 거기에 의미를 계속해서 퍼부어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는데,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죠. 사실은 잔상에 불과하고 허망한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허망하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악마가 그렇게 손을 내밀어서 여기에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거기에 호응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는 겁니다.

설교도, 잔상에 불과해 !!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설교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계에 부딪쳤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그동안 끌어 모아놓은 팬클럽은 많고, 그 수많은 눈동자가 자기를 주시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설교는 잔상인데, 구원은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어떻게 합니까? 마치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구원이 된 것처럼, 자기에게 의미를 주게 만든다는 것이죠. 늙어 죽으면 의미가 없는 존재인데, 그런데 악마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손목을 붙잡는다는 겁니다. "놀고 가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마치 잠언서에 나오는 애굽의 창녀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마귀가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그게 결론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서,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면 너는 너답지 못하다" 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세뇌를 시키고 정신적으로 조종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진정으로 자기답게 되기 위해서 거룩해지려고 하는데,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얼마나 분투하고 노력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함을 기하고 완벽하게 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자기에게 미흡함이 있으면 견디지를 못한다는 것이죠. 또한 자책을 하고 말이죠.

그러면 마귀 쪽에서 좋다고 하면서 박수를 치면서 난리인데, 한 놈이 걸려들었다고 말이죠. 마치 거미줄에 걸려든 잠자리와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미줄에 있는 거미를 보면 얼마나 건방진지 모르는데, 폼을 잡으면서 슬슬 움직인다는 겁니다. 먹이가 걸려있어도 빨리 움직이지를 않는데, 어차피 자기가 친 거미줄에 걸려있으니 말이죠.   

악마 - '무의미한 것은 없다' !!

이와 같이 악마의 '의미 관계망' 이란 것은, 이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정보' 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정보의 바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죠. 즉 의미의 세계인데,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거미줄에 걸려들게 되면 사람들은 입이 그만 바짝바짝 타는데,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자기다우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말씀을 보고 규정한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 조언을 구해서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즉 "악마야, 내가 어떻게 하면 의미가 있지?" 라고 말이죠. 그러면 악마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첫째 돈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인물이 좋아야하고, 셋째로는 성격이 좋아야하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결혼의 조건이기도 한데 말이죠. 

하지만 죄송하게도 이런 모든 것들이 스크린의 잔상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있을 때 자기 눈으로 보는 영화라는 말이죠. 그것도 단편영화인데, 자기는 자기대로의 단편영화가 있고, 또 저쪽은 저쪽대로의 단편영화가 있다는 겁니다. 인생은 그렇게 훅 간다는 말이죠.

그 조각들이 다 예수님이 다녀간 곳 !!

그게 곧 전도서인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마치 엿가락처럼 길게 늘여서, 그것을 조각 조각을 낸다는 말이죠. 조각을 내놓으니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일일이 붙여보면 그게 다 예수님이 다녀간 곳이란 말이죠. 그것도 예수님이 그냥 다녀간 것이 아니라, 배척을 당하고 배제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다같이 한 통속이 되어서, 거기에서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다하고, 온갖 경건함과 거룩을 다 집어넣었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떻다는 겁니까?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면,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 피가 다가옴으로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다가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십자가를 소유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세상을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다시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악한 세상이 꼭 있어야 하고,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가 헛된 존재로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게 주님의 입장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말이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제 정리를 하면 !!

이제 정리를 하겠습니다.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실제로 이 땅에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까, 율법을 아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 과연 율법을 지켜서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지키지 못해서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문제가 그리 만만치 않지요?

지키기 못해서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 그것은 오늘날 신약시대의 성도가 구약시대에 있었다면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죠. 즉 진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몰랐는데, 그래서 지켜야 영광이 된다고 여기고 열심히 지켰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은 잘 지킨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옆의 나라를 더 융성하게 해주었다는 말이죠. 약속의 땅보다도 이웃국가가 더 잘 산다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을 지킨 자기들의 형편이 경제적으로 별 볼일이 없다는 겁니다. 옆에 나라가 없으면 그래도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살겠는데, 갑자기 옆에 잘 사는 나라들이 생기니,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호와 종교인가? 바알 종교인가? 

그래서 그 나라들이 쳐들어오니, 이스라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까, "우리보다도 더 크게 잘 된 나라의 신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껍데기는 여호와이고 알맹이는 순전히 바알종교를 믿었다는 말이죠.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겉으로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만, 그 속마음은 부처에게 비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까요? 되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영광이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영광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말이죠.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인데, 왜 변함이 없을까요?

이들은 율법대로 하면, 그렇게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무엇을 받아야 합니까?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니 주님의 영광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벌을 받아야 하는 자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영광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벌을 받았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중보자로 인해서 !!

여기서 우리가 그 내막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 전체를 아예 죄인으로 규정을 하셨는데, 그런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 중간에 중간자가 있는데, 즉 중보자가 있어서, 이 중보자가 그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림으로서 아버지에게 꾸준하게 영광이 되어왔었는데, 그것을 우리가 신약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 관심사가 자기 구원이 아니라, 자기 행복이 아니라, 그러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중보자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는 현상이 신약에 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럴 때 신약에 있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새로운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곧 '새 이스라엘' !!

그러한 새 이스라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의 행복도 이제는 잊어버리고, 그것은 망상이고 잔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라고 하는, 그것이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인생을 꾸리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셨는가?" 라고 하는,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물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셨는지, 그것을 후차적으로 수용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이미 도착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헛되고 헛되게 하신 이유를 우리가 이제 알았습니다. 잔상에 불과한 것을 우리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영화가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듯이, 그 하얗게 된 스크린을 더 이상 주목할 이유가 없는데, 그 마귀의 세계는 이제 멸망만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세상이 우리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이런 세상을 오히려 이용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18 오후 8시에 마침.
                                             잔상에 불과한 이 세상, 그런데 자꾸만 가슴이 아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