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 - 후련함
07,02,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요즘은 저 혼자서 "내가 설교를 하면서 너무 구원을 조건을 높인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저는 나름 성경대로 한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하다가는 요즘 현대인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그래서 모두가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의구심도 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설교자로서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폭이 더욱 더 넓고 커지려고 하면 구원의 조건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20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해서 일하시는데,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짐' 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참여시키는 겁니다. 적극적 죄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인간 없는 구원 !!
이렇게 인간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고 뭔가 장만을 해놓으면 그게 하루아침에 그냥 날아가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정말로 귀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헌금이 될 수도 있고 봉사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죠.
녹취를 하는 사람은 그런 경험을 종종 한다고 하는데, 실컷 해놓고는 그만 마지막에 키를 잘못 눌려서 왕창 다 날리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녹취를 하면서 더욱 더 말씀에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까, 자기가 설치지 않아도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감사가 더욱 더 깊고 넓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면 미안한 마음도 들기도 하는데, 마치 "누구라도 들어오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니 말이죠. 하지만 주님이 정말로 구원해주신 사람이라고 하면, 구원의 짐을 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 덕분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은 멋있게 하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인생이 굉장히 무겁다는 겁니다. 감사가 나와야하는 자리에, "저는 이 정도로 성도답게 삽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의 성도다움을 내미는데, 저는 그런 사람을 보면 정말로 그 손을 떨치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나 성도다운 삶이라는 것은, 그것은 구상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은 좀 버리자는 겁니다. 그것은 아직도 매서운 맛을 보지 못해서 그러한데, 만약에 북한에서 쳐내려오면 그런 것이 어디에 있냐는 겁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하면서 빌기에 바쁜데 말이죠.
물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닌데, 이미 베드로가 다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평소에 감사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인데,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의 조건을 높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춘 것인데, 하지만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뭔가 자기가 손에 쥐려고 하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때 성령님이 등장합니다 !!
그렇게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 라는 것에 말씀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그런데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그것이 교재에 있는데, 즉 "제자들마저 그러합니다. 이때 성령님이 등장합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 제자들마저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님이 등장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육신의 실정을 낱낱이 폭로하는 작업에 소홀함이나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하나님, 저는 저만 생각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하고 의논을 하십니까? 제자들과 하는 것이 아닌데, 구원을 받는 당사자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흥정도 거래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와 합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보낸 영과 대화하고 의논을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믿는 자만이 흔케이 수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고 하니, 오늘 강의제목이 될 수도 있는데, 즉 '후련함' 이라는 겁니다. 속이 시원하다는 것인데, 마치 묵은 때가 씻겨지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그렇게 복음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응은 무엇인고 하니, "그래도 성도라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씻어내도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지금의 최적화가 된 나의 삶 !!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과 의논을 하시지 우리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님과 의논해서 된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의 최적화가 된 나의 삶'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님과 의논해서 우리에게 주신 환경인데, 즉 "지금 너의 환경에 너에게는 가장 적절해"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물론 제자들도 그러했는데,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이 가장 제자들에게는 적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처럼 배반하면 안 됩니다" 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성경해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라.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성령님이 오심으로서
후련하게 구원을 받았잖아"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련함을 우리가 계속해서 맛보기 위해서는, 설령 우리가 제자들보다 더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거기에서 그 후련함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고 나와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어떤 경우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걱정 말아요 그대' 라는 노래도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 성령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리 육신의 실정을 낱낱이 폭로를 하시는데, 그러면서 "하나님, 저는 저만 생각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물론 '후련함' 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같은 말로 '차이남' 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차이남 !!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우리 자신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즉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의 차이점, 예수님의 관심사와 우리 자신의 관심사의 차이점인데, 성령이 오셔서 개입하지 않고서는 이런 차이점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를 잘 믿는 사람과 자기와의 차이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훌륭한 목사님과 자기와의 차이점도 아니고, 또한 일년에 한 번씩 교회에 나오는 사람과 자기의 차이점도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과 자기와의 차이점인데, 그것은 성령님이 오셔야만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성령님이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라고 하면, 방금 제가 거기에서 언급했는데 말이죠. 정답을 미리 말하고 문제를 내는 것인데, 그것을 바로 '주님과 나의 차이점', 그것을 안다면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비교를 해보라는 말이죠.
예수님에게는 후련함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에는 찜찜함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뭔가 떨어내야 하는 먼지가 가득 쌓여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 저는 저만 생각했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만 생각했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만 생각하시는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나는 아버지의 말씀만 생각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과 성령충만 !!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 어떤 사람은 그분을 "끝까지 자기 의를 지키기 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포기하지 않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다" 라고 평가를 하는데, 하지만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교재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죠.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에 충만했다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진정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아닌 예수님의 살아계심이라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닌데, 예수님을 믿었다는 겁니다.
방금 했던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무려 40년이나 걸렸는데,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십자가를 빼고 그 자리에 자기들이 아는 하나님을 집어넣었는데,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우상숭배이고, 한국교회가 그런 집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예수님을 넣으면 엄청난 소동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이 누구에게 돌을 맞았습니까? 무신론자들이 아닌데, 하나님도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죽었다는 겁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누구에게 핍박을 받았는고 하니, 여호와 하나님에게 열심을 내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스데반 집사님이 죽던 현장에도 이 사울이 있었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는가?
그러니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받았는가?"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즉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던 사람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바뀌는 것이 성령을 받지 않으면 전혀 불가능한데,
성령을 받으면 바로 되지만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니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인데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인간들의 행태도 같이 배치해주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상대방은 반드시 반(反)예수, 반(反)복음, 반(反)성령을 전하는 자들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님과 의논해서 배치하시는 현장인데, 즉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일체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시는데 철저하게 우리를 비품으로 사용하시는데, 그렇게 엑스트라도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주님의 생각을 모르는데, 그 차이남을 모르니 말이죠. 그래서 남들처럼 자기 인생의 행복에 매진하고 있는데,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니, 자기가 자기 인생을 꾸린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락도 없이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으셨다는 말이죠.
'도깨비 칼'을 아십니까?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난입' 이라고 했는데, 마치 도깨비 칼처럼 십자가가 우리 가슴에 팍 꽂힌다는 겁니다. 도저히 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도깨비 칼이 무엇인지 아세요? 요즘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그것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십자가 안에 놓여있다고 하는데, 갑자기 강의제목을 '도깨비'로 바꾸고 싶은데 말이죠. 우리는 이 땅에서 도깨비와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ㅋㅋ).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교재 21페이지를 보기 이전에 20페이지를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이미 그 의미가 확정되어있다는 겁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사건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 사건을 만들어내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미 심판대가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너무 어려워서 그냥 지나간 것이 있는데, "우리가 죽으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 심판대를 우리를 가지고 만들어 가신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설교의 끝 부분이라서 후딱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는 모두들 몸이 뒤틀려 있기 때문에 무엇을 다시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튼 주님의 심판대가 곧 말씀인데, 그 심판대가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는 말이죠, 바로 그 심판대인 말씀을 현재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만들어 가신다는 겁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를 들어서, 닭 요리를 할 때 보면 닭을 어떻게 합니까? 팔이든 다리든 간에 마구 잘라내는데, 그게 히브리서 4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즉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관절과 골수를 다 찔러 쪼개는데, 그렇게 해놓고는 십자가로 이어나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모형이고 제작물이 되는데, 즉 십자가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현장에서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러니 "그때가 되면 심판대가 있겠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도바울을 보고 성도를 보라는 말이죠. 벌써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아름다운 과거사는 사실 없는 것인데, 그런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처음부터 다시 !!
어제 제가 분명히 오늘 강의를 10시에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10시 30분에 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 설교 동영상을 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아무튼 지금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을 참여시킨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성도이겠습니까? 이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인데,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성도가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약에 성도가 아니라면, "나를 구원해봐라" 라고 하겠지만, 성도라고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소박한 꿈과 행복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교재 20페이지에 나오듯이 "제자들마저 그러했다" 라는 겁니다. 제자들도 나름대로의 포부를 가지고 인생을 계획했지만, 그게 다 예수님을 오해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언제 제대로 알았습니까? 성령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 알았는데, 처음부터 자기 인생에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주관하셨다는 것을 말이죠. 뒤돌아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후련함이 되는데,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계획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라는 것에서 오는 후련함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성령님과 의논해서 십자가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하신다면,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주어지겠습니까?
구원의 조건을 아무리 높인다고 해도, 감사가 계속해서 나올 뿐이라는 겁니다. "모두가 가짜입니다.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라고 해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죠. 어차피 주님께서는 인간과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니 말이죠.
이제 교재 2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 세상에는 비합리적인 힘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합리적인 규격화를 시도하면서 정리정돈을 해나가지만, 정리된 것은 자꾸만 흐트러지고 옆의 규격대로 차이가 나게 정해놓은 경계선 틈 사이가 벌어지면서, 새롭게 이전의 이성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악한 충동들이 새로운 얼굴을 하면서 올라옵니다.
출렁이는 비합리적인 힘 !!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이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에 성경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이해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비합리적인 힘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이해하기가 좀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교재 21페이지에 나온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무척 어려워 보이는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나' 중심의 현실구상이 늘 실패로 끝난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조합해서 모아놓은 것인데, 그것을 일단 현실로서 생각하고, 그리고는 "나는 현실에 충실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대구에서 사업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사업계획을 구상하고 그것을 관공서에 신고해서 허가를 받고, 그리고 땅과 건물을 구입하고 사람들도 구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때 북한에서 쳐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부산으로, 아닌 일본으로 도망을 가야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6.25 때 그러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빠졌는고 하니, 6.25 전쟁은 고려하지 않고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모아서, 그런 현실에서 사업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일방적인 자기 중심의 현실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6.25 전쟁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6.25까지 고려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되면 그만 허망한 것이 되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비합리적인, 물론 나름대로는 합리적이지만 말이죠.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 "이 세상에는 비합리적인 힘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2월에 이사를 가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그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제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빌고 바치오니, 아무쪼록 제 뜻대로 하게 해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봉사로서 대신해서 매우면서 말이죠. 그렇게 인간에게는 비합리적인 힘이 출렁거리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자꾸만 새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제 품위는 지켜주세요 !!
그것이 바로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인데, 즉 "하나님, 이번 일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묻습니다. "왜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가?" 라고 말이죠.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제 품위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이 자기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면, 그러면 모든 것이 자기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존재는 자기 품위를 높여줄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데, 하지만 막상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즉 고난받은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품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 품위 따위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 내 품위가 어떻게 되는 것은 전혀 나에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동반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만약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런 마음이 과연 들겠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23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을 미리 앞당겨서 살펴보면, 거기에 마태복음 8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21절과 22절입니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까? 그냥 따르면 안 됩니까? 이미 정답을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서 자기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제자는 자기가 예수님을 따르면 자기 품위에 손상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품위가 높아질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자기 것은 전혀 양보할 마음이 없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지금의 자기 것을 더 키워줄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당연히 오해인데, 그래서 교재 20페이지에서 "제자들마저 그러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를 했는데, 즉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또 구원의 조건을 높인다고 불만을 토로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이 진실이니 말이죠. 그래서 장례식장에 가서 과감히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인간은 유교적인 윤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데,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옆에다 장막을 치고 3년 동안 버텨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잘 먹으면서 버티면 안 되고 최소한의 양식으로 말이죠. 아마 요즘은 그렇게 하라고 하면 먼저 인터넷부터 설치하지 싶은데 말이죠. 아무튼 예수님은 우리의 품위를 지켜주기는커녕 그만 손상을 시키고 만다는 겁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라 !!
이제 마태복음 8장 22절의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라" 라는 것으로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겠는데, 그러고 보니까 또 어렵게 되었는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라" 라고 하신 것은, 육에서는 육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죽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도 이미 죽은 자로서, 그 결과를 이렇게 보이는 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도 죽었다는 것을 니가 왜 몰랐는가?" 라고 하시면서 닥달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살아있는 아버지를 보고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것은 유교적 윤리에서는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죽은 자에게서 영을 끄집어내시는 주님 !!
성경은 인간을 죽은 자로 보는데, 그래서 육과 영에서, 놀랍게도 죽은 자에게서 영을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거기서 생명을 끄집어내는 작전을 벌리신다는 말이죠. 그게 곧 복음인데, 즉 죽은 것에서 사는 장치, 그런 장치를 죽은 자에게서 가동을 시킨다는 겁니다.
공장에서 노동력을 줄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동화를 시키는 것인데, 심지어 병원에서도 수술을 의사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달린 기계가 하도록 한다는데 말이죠. 아무튼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에 하나님의 장치를 가동시키시는데, 그게 바로 죽은 육에서 살아있는 영을 빼내는 작업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안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것을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죽은 자는 영원히 죽은 자인데, 즉 흙에 속한 것은 영원히 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형체는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메이드 인 헤븐, '언약' !!
그런데 흙의 형상에서 하늘의 형상이 나오도록, 그러한 새로운 장치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입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입시키는 기계 이름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메이드 인 헤븐' 인데, 즉 하늘에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 즉 '약속'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 언약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전이기 때문에,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성껏 빌면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 교회는 기도를 승부를 거는데 말이죠.
그래서 무조건 기도를 강조하고, 그렇게 해서 응답을 받으면 서로 갈라먹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목회방침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즉 "빌고 또 빌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주고, 그래서 해서 빌도록 하는데, 그렇게 해서 효과를 보았다고 여기면 돈을 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효과를 보지 못하면 돈을 내지 않아도 됩니까? 그것은 아닌데, 자칭 신자이니 생색은 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빌고 넣고, 또 빌고 또 넣고",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러니 굳이 성경말씀이 왜 필요하냐는 말이죠.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하는데 말이죠.
절이 마을로 내려온 것이 곧 '교회' !!
그래서 온 천지에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밤만 되면 온 천지가 빨간 십자가로서 뒤덮인다는 겁니다. 요즘은 흰색도 있는데 말이죠. 이것은 산에 있던 절이 마을로 내려온 것인데, 거기에서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목사가 되는데, 다들 그렇게 양상이 되었다는 말이죠. 언약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러니 그것을 누가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까?
물론 목사가 설교시간에 십자가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색을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 컨퍼런스' 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평소에 하도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게 모이고 한다는 말이죠.
목사가 바보가 아닌데, 그래도 프로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인들을 붙들기 위해서라도 십자가 이야기를 자제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복 받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지, 십자가를 말해버리면 교인들이 그만 짜증을 낸다는 말이죠.
강대상을 빼낼 때까지는 버티세요 !!
십자가 마을의 어느 목사님 이야기인데, 제가 그분을 잘 알기에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건물도 얻어주고 생활비도 대어주었는데, 무려 12년 동안을 말이죠. 자기 아들이 혹시나 목사로서 성공을 할까 싶어서 계속해서 대주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한 번 계산해보세요.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말이죠.
그러면서 아버지가 체크한 것은 교인수와 헌금인데, 그렇게 하다가 아버지가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너는 설교로서 교인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나가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들도 지지를 않고 "아버지는 지옥에 갑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제는 도저히 교회라는 회사가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투자자와 경영자 사이에 완전히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그 목사님이 저에게 상담전화를 했는데, 그래서 제가 "아버지가 나가라고 했는데, 그래도 강대상과 비품을 빼내기 이전까지는 버티세요"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 목사님이 저의 말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모르는데(ㅋㅋ), 일단 큰 소리는 쳤는데,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에 죽고 사는 문제인데,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창기의 더러운 돈은 제단에 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돈에 무슨 더럽고 말고 하는 것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돈이라도 있으면 자기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죠. 지금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 언약이란 장치는, 육이 알아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귀적인 방식인데, 즉 합리성에서 비합리성으로 나가는 것을 신비라고 해서,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을 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지옥에 가는 백성을 배나 더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가시적인 것 + 신비적인 것 = 구원 !!
이러한 인간을 향한 유혹, 즉 가시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합쳐서 구원이라고 하는, 그런 공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나에게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뿐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지만 사도바울에게 십자가란?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지혜도 아니고, 그리고 인간들이 기대하는 가시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신비, 즉 인간적인 것이 아닌 신적인 것을 고대하는 그 무엇도 역시 구원의 능력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들에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그 넘어서 있는 무한계의 어떤 신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물론 그게 자기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도 역시 인간적이라는 말이죠. 인간 넘어있는 그 무엇도 역시나 인간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이제 인간적인 도리는 모두 다 했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라고 하는데, 그 기적조차도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적인지 아닌지 그것을 자기가 판정하기에 말이죠. 하지만 오늘 아침에 밥을 먹는 것도 기적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적을 우리가 밟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려줄 때까지만 살자 !!
저는 대구강의에서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 크랙카를 먹는 것도 기적이라고 보는데, 물론 오늘은 없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죽어야하는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라" 라고 하면,
그 죽은 자에 우리도 포함이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왜 살아있는고 하니까,
그 언약이라는 장치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 때까지는 살아야 하는데, 강대상과 그 비품을 빼낼 때까지는 말이죠.
그 젊은 목사님은 자기가 복음을 아니
복음을 아는 목사답게 행동을 한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아니 복음답게 행동한다는 것을
자기가 판단하고 꾸며내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정말로 하나님의 복음이 왔을 때, 그 복음의 현상이 뭐라고 했지요?
오늘강의에서 제일 처음에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바로 감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의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은 항상 감사를 하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아버지, 10년 동안을 해주었으면 계속해서 해주어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사람은 계속해서 도와주면 나중에는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러면 그만 감사를 놓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이제 그만 나가라" 라고 하면, 그 순간 목사님은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하는데, 그래서 제가 실제로 그런 문자를 보냈다는 겁니다. "아버지에게 감사하세요" 라고 말이죠. 12동안 복음도 모르면서 다른 교회처럼 부흥이 되기를 소원했던 아버지의 바램처럼,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렇게 기대를 해준 아버지에게 감사를 하라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사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만 그것을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후원자에게 감히 "아버지는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물론 복음을 모르기에 지옥에 가는 것은 맞더라도 말이죠. 그렇게 되면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도 걱정이 되어서 다시 전화를 했는데, 그러니 이제는 후원자와 화해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가 하와이에 이민을 가지고 한다고 하면서 또 다시 전화가 와서, 그래서 제가 가라고 했다는 말이죠. 여전히 아버지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못난 자식을 사랑해주니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죠. 평생 후원자를 만났으니, 그야말로 봉을 잡았다는 겁니다. 대부분이 그런 아버지가 없어서 문제인데 말이죠.
그러니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나는 복음을 아니 누구라도 도와줄 것이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건방진 생각이고, 지금까지 키워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이니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는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언약 장치를 가동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육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인간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그런데 사람에서 육으로 달라지기 위해서는 언약이 개입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말씀으로 닭을 자르듯이 잘라낼 때, 그때는 "나도 육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육이라는 것은 언약이 작용하는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잘 가동되고 있다는 것인데,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말이죠. 그러면 그런 육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지옥에 가야하는데, 이런 것을 안다는 것은 생명의 나라, 즉 천국으로 가고 있음이 확인된다는 겁니다.
아하, 저는 사람이 아니군요 !!
그러면 여기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철없는 제자가 지옥이 갔습니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데 갑자기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것이 유교적인 윤리인데, 즉 마지막으로 자식된 도리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게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는데, 그렇다면 그런 상황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 당시의 제자들을 보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너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언약을, 즉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가장 적절하고 최적화된 사건들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해주신 주님에게 감사하게 되는데, 즉 "제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육에 불과한데, 그런데 그만 착각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감사가 나오면, 그런 경우에는 구원받은 자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22페이지를 봅시다.
** 전도서에서는 '허무'를 가지고 십자가 사건을 미리 전달합니다. 허무를 언급함으로서, 허무에서 기어이 자력으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의 면면을 전도서는 놓치지 않고 따라가서 '그것마저 실패해!' 라고 허무하게 규정을 해버립니다.
여기 '허무'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위한 현실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모든 인간의 현실은 누구 중심인고 하니, '나' 중심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만드는데, 그런데 여기서 틈이 갈라지면서 그 틈 사이로 허무가 나온다는 말이죠.
진주 목걸이 !!
어제 낫 시간에 했던 진주 목걸이를 다시 해보겠는데, 이게 진주이라고 하면 그것을 끈으로 연결시켜놓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는 것은, 진주를 자랑하는 것이지 끈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 끈은 평소에 바깥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그 하나 하나가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합리적인 계획, 합리적인 구상, 즉 "오늘은 무엇을 하고 내일은 무엇을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간격을 벌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차질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면서 진주와 진주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끈이 보이는데, 그렇게 언뜻 언뜻 허무가 보인다는 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원래의 그 바탕이 허무인데, 그 허무에다가 구슬을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그 구슬에 그만 마음을 빼앗겨서 허무라는 바탕 위에서 이것들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이 구슬을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밑에서 열을 가하면 녹게 되는데, 그렇게 녹아지는 것을 두고 전도서에는 '인생'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도서의 마지막에 보면 모든 것이 다 주저앉는데, 중력을 누가 이기느냐는 말이죠. 아무도 그것을 이길 수가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전 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인간은, 중력을 버티는 골조 !!
그러니 성경은 인간을 중력을 버티는 골조로 보는데, 그렇게 버티다가 그만 무너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에는 "누가 죽음을 이기랴?" 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죽음을 증거하고 확인해야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것을 아는데, 다른 나라의 백성들은 모른다는 말이죠. "인간은 왜 죽지? 죽을 때가 되었으니 죽겠지. 그러니 미리 생각하지는 말자" 라는 것이고, 반면에 이스라엘은 "인간은 왜 죽지?" 라는 것을 미리 당겨서 살아있을 때 언약의 장치 안에서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감사가 나오는데, 즉 "죽어야 하는데 주님 때문에 죽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빌립보서 1장을 보겠는데, 21절에서 24절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바울은 지금 당장에 자기는 죽고 싶은데, 그게 자기에게는 좋고 합당한 것인데, 그게 후련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아직 죽지 않고 이렇게 찜찜하게 살아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너희들에게 봉사하라고 이렇게 살게 하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린도후서 5장 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하는데, 즉 '우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나와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라" 라는 겁니다.
(고후 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그러니 구원의 조건을 한껏 높여놓았는데, 즉 "살고 싶은 사람은 가짜이고, 죽고 싶은 사람은 진짜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목사님, 저는 그렇게 안 됩니다" 라고 하지 마시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왔다는 겁니다. 난입, 즉 허락도 받지 않고 침범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이 도적같이 쳐들어왔는데, 물론 우리의 계획은 따로 있는데,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세워놓았다는 겁니다. 일종의 진주 목걸이인데, 진주만 드러나게 하고 끈은 감춘다는 말이죠. 그렇게 허무라는 끈은 감추고, "나는 허무하지 않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예를 들어서, TV방송국에서 '성공한 청년 스토리' 라는 프로를 진행하는데, 어떤 청년이 나와서 한다는 말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일종의 방송사고인데, "공부를 해도 헛되고 부자가 되어도 헛되고 결혼을 해도 헛되고, 결국 우리의 골조는 무너집니다" 하면 더 이상 계속해서 방송을 진행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복음을 가로막는 언론의 횡포인데(ㅋㅋ), 인간은 자기가 육이면서도 아닌 척을 하고 있는, 인간들 위주의 가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론이 있고 또한 민주주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는 입장에서 그런 것도 다 헛되다는 것을 전적으로 수용해주어야 하는데, 헛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죽는 것이 좋은데, 가동되고 있는 이 언약의 장치 때문에, 십자가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데, "방 빼!" 라고 할 때까지 말이죠. 그때까지는 붙들고 복음을 외쳐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한 시간만 하겠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육에서 육이 나온다는 것은 지옥에 갈 사람이고, 그런데 육에서 영이 나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육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육은 육으로 끝나는데, 즉 성도라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죽어가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는 말이죠. 즉 "나는 죽고 날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등장하는데, 그것을 우리 눈에 보이는 형식을 취한 것이 바로 신약성경이고,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어려운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은 무엇입니까? 조상의 육에서 자식의 육이 되는 것, 이게 우리가 아는 전부라는 겁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가르시고", 이게 전부라는 말이죠.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오게 되면, 육에서 말씀이 튀어나오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그런 작용이 성령을 통해서, 새언약의 능력을 통해서, 그게 성도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성도가 주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는 활동인데, 그것이 죽어가는 성도를 통해서 발산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스데반 집사님의 이야기이고, 또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철없는 제자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육에서 말씀이 나오는데, 즉 말씀이 말씀되게 나온다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의 완성으로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전도서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나는 인생은 헛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서라는 말씀이 나마저도 짓누르고 붕 날아서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간다" 라고, 그런 식으로 되고 또한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즉 "사는 것이 다 헛된 것이야. 이 세상이 원래 그래. 아담이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야" 라고 말이죠.
죽음을 이긴 말씀이 혓바닥 !!
이번에 '복음의 생산' 이라는 책을 내는데, 앞에 있는 머리말을 지금 구상하고 있는데, 왜 시처럼 쓰는 대목이 있잖아요? 오늘 아침 9시까지 구상한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딱 두 줄인데, "악마, 그리고 인류의 자궁, 죽음의 혀가 나온다" 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아직 후보감이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걸어 다니는 인간에게는 악마의 혓바닥이 그 사람의 입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죽음을 이긴 말씀이 혓바닥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인한 후련함이 있게 해주시고,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은 것처럼, 언제 죽음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언약의 기계로서만 충실하게 작동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 오후 5시에 마침.
도깨비의 칼은 몰라도, 십자가만은 알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