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3-운반책 0701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6. 18:15
2017-02-05 15:11:54조회 : 23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 - 운반책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 - 운반책

                                                             07,01,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 지점은 구약의 모든 말씀이 '다 이룬' 지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전도서 1장에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에게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혼자서 하셔도 되는데 말이죠. 왜 굳이 인간을 상대로 해서 인간에게 말을 거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기 때문인데, 다른 민족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말을 건넸으면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시는데, 말을 건네고는 정작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이, 즉 메시야가 잉태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스라엘 안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태여 말을 건다고 하는 것,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원했던 바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원했던 바입니까? 어느 쪽인가요? 하나님께서 원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사실 정답은 3번인데, 제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죠. 우리 인간의 태도는 무엇인고 하니, 성경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이야기를 하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든, 아예 그런 이야기를 자기에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주장이라는 말이죠. 즉 "교회는 나와주겠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이야기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듣기 싫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우리 인간 속에 반발세력이 있기 때문인데, 물론 우리는 그 반발세력이 사탄이라는 줄은 전혀 모르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다고 한다는 말이죠. 뉴스는 열심히 봐도 성경은 보기 싫은데, 그냥 싫다는 것이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자기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내가 하나님을 찾아갈 테니, 하나님 쪽에서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모순된 이야기인데, 즉 "신에게 대해서 궁금해해도, 내가 궁금해할 때 궁금해할 테니, 신은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들이대지 마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귀찮다는 겁니다.

주제넘은 '신' !!

그러니 자기가 시작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주제넘게 '신' 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성깔이 되먹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안에 그 무엇인가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괴물이 들어있는데, 그러니 자기가 필요할 때는 알아서 신을 찾겠지만, 자기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신이 찾아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교회는, 하나님을 전해야지 말씀을 전하면 안 돼 !!

그래서 교회가 교인들에게 해야할 예의가 무엇인고 하니,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교인들이 원해서 그러한데, 즉 하나님은 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거부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전할 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즉 말씀에 대해서는 이미 자신들이 이미 다 준비해놓은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신에게 예물로 준비해서 바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 마음자세가 그러한데, 즉 "제가 이렇게 바쳤으니, 여기에 대한 보상으로 이렇게 해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이라는 기관차가 있으면, 객차는 인간들이 알아서 준비하겠다는 말이죠. 동짓날도 그렇고, 설도 그렇고, 그리고 정월 대보름도 그렇고 말이죠. 옛날 우리 조상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신을 섬길 때, 신의 계시를 받아서 섬겼어요? 아니면 알아서 섬겼어요? 자기들이 알아서 섬겼는데, 그게 그대로 모아져서 오늘날의 교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두들 공감을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려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목사가 눈치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인데, 그게 교재 17페이지에 나옵니다. 이것이 이번 교재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지 싶은데, 그게 먼저 나와버렸다는 말이죠.

교재 17페이지를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 지점은 구약의 모든 말씀이 '다 이룬' 지점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신이 죽는 자리'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신마저 죽는 자리'입니다. 즉 인간과 신 위에 특정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마저 죽는 자리, 곧 십자가 !!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마저 죽는 자리인데, 그러니 이 죽음은 하나님마저도 예외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죽여버리는 그 죽음이 인간의 머리 위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 세상에는 뚜껑이 있는데, 그게 곧 저주의 뚜껑이고, 하나님마저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눈치 없는 너 !!

그래서 부목사가 되어서 당회장이 설교를 하라고 하니, 눈치도 없이 그만 복음을 전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데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버리면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는 신이고 인간이고 모두 죽여버리는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도 그만 싸늘하게 되고 만다는 겁니다.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 즉 "선교를 해도 죄입니다. 봉사를 해도 죄입니다. 청춘을 바쳐도 죄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이 몸을 바칠 테니 주님이 키워주세요" 라고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 젊음을, 이 청춘을 바칠 테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쓰이게 해주세요" 라는 것을 노리고 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름 "이 세상을 정복하라" 라는 창세기 1장 말씀에 모든 것을 다 걸고 나왔는데, 그런데 그만 복음을 전해버리면 졸지에 냉동고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라고 하는 하나님을 원했는데, 그런데 그만 말씀을 증거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눈치 없는 너'가 되고 마는데, 싱어송 라이터 송재원 씨가 부른 유명한 그런 노래가 있는데 말이죠. 그 가수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요? 이미아 씨와 매우 가까이 있는 분인데(ㅋㅋ), 인터넷에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데, 노래가 참 좋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제야 "아차, 내가 참으로 눈치가 없었구나.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버렸네. 이제부터는 작전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전해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같이 망하는데, "여러분, 이렇게 행하시면 효과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점을 치는 점 집이 하나 더 생긴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전도서에서 '허무' 라는 말은, 사실은 십자가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한 다른 표현방식입니다.

그러니 전도서에서 '허무' 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당겨서 이야기한 것인데, 그래서 '허무하다' 라는 것은, 


십자가 안에 있을 때 

하나님과 동일한 안목으로 보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어야만 보이는 세계가 천국인데, 천국은 죽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죽지 않고 천국이 보인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천국이라는 말이죠. 마귀가 우리를 가두어놓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짝퉁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야기할 때, 이제부터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말이죠. 전도서 속에 있는 복음을 이야기할 텐데, 그런데 복음을 바로 이야기하면 백 퍼센트 오해를 하는데, 그래서 우회를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회하는 자리가 곧 종교인데,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종교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전도서의 방식이기도 한데, 그러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헛되다고 하는 목록들을 살펴보면, 그게 다 종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로 시작해서 복음에 접근하는 것이, 그렇게 하면 복음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죠.

잠시 어느 노부부 이야기를 !!

그래서 종교를 이야기하게 되면, 물론 이것도 굉장히 복잡하지만 말이죠. KBS에서 아침 8시에 하는 '인간극장'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번은 영덕의 영해에서 대게를 잡는 어느 노부부 이야기라는 겁니다. 동짓날 팥죽을 끓이고 난 다음에 문가에 팥죽을 뿌리면서 제사의 제문을 읽는데, 그것을 제가 적어왔는데 말이죠. 이게 일종의 종교라는 겁니다.

"조상님, 용왕님, 성주님" 라고 하는데, 이렇게 주의 이름을 먼저 불러놓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은 누가 채운다고 했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그 내용은 본인이 가지고 온다는 말이죠. "올해도 아무런 사고도 없이 대게가 잘 잡히게 해주소서. 그리고 대게도 실컷 먹게 해주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사고를 치는 것인데,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머리 위에 머물러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게를 잡든 무엇을 하든 이미 저주가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남자가 제사장이니까 이렇게 하는데, 여자는 팥죽을 끓이고 말이죠.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냥 놔두세요 !!

아무튼 그렇게 제문(祭文)을 이야기하는데,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 내용은 자기가 채워서 넣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물론 우리 모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들의 반응이 "그 사람이 무엇을 믿던 그냥 놔두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인데, "그 사람이 바다의 용왕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던, 하나님을 믿든 무엇을 믿든 간에 그냥 놔두세요" 라고 할 때, 여기서 종교의 본질은 "무엇을 믿든!"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놔두세요!"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냥 놔두라는 것은 종교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인데, 시간이 있어서 믿으면 좋지만, 굳이 믿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을 믿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여기서 사람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고 하니,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교재 16페이지에 나오는데, 같이 찾아봅시다.

** 인간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붙인 것이고, 사실은 성경에서는 육신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아닌 육신에게 !!

그러니 성경은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겁니까? 육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전도서에서 하나님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는고 하니, 인간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육신에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려고 하면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포기해야하는데, 인간을 버리고 육신으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전도서를 받을 때, 자기들이 인간이라고 여기고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전도서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인간이라고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아쉬울 때는 종교를 가질 수도 있고, 바쁘면 믿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니 무엇을 하든지 그냥 놔두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보다도 자기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필수가 아니라 선택사항이 되고 마는데, 아쉬우면 하나님을 찾지만, 배가 부르면 찾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신보다 자식이 중요해 !!

그렇게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신보다도 육신으로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신보다 자기 자식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신은 육신만 챙긴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자식이 중요합니까?" 라고 하면,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을 마구 때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바치라고 했습니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바치라고 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혈과 육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자기 자신도 육이고 자식도 육이라는 말이죠. 자기 자식보다, 자기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달이 좋아서 달에게 비는 사람이 없고, 해가 좋아서 해에게 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모두가 자기 자식이 잘 되게 해달라고, 자기 가족이 잘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도 날씨가 춥고 차가 밀리는데도 동해안의 장승포나 정동진에 가서 빈다는 겁니다. 그것이 안 되면 언덕이라도 올라가서 빌고 빈다는 말이죠.

부모가 힘이 들어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그냥 죽고 싶어도, 이혼을 하고 싶어도, 자식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그것도 안 되면 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기도 죽는다는 말이죠.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의 사는 상대자가 같은 육밖에 없는데,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노선을 도중에 누가 치고 들어와서 끊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6페이지에 나오는데, 살펴보겠습니다.

**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는데, 육신의 죄를 정죄하려고 오셨다고 되어있습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인간이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어디서 만들었는고 하니,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었지 육신을 만든 것이 아닌데, 

누가 또 중간에 치고 들어왔다는 겁니다. 

마귀가 치고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치고 들어올 차례라는 말이죠.

마귀가 치고 들어와서 인간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면, 그렇게 해서 저주받은 몸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치고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육신의 죄를 정하사, 그것을 해결하시고 영으로 몸으로 바꾸신다는 말이죠.


그러한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을 우리 좋아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좋아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런 일에 우리가 말려들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은 우리가 요청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그만 빨려 들어서, 마치 진공 청소기에 먼지가 빨려들 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는 모든 혜택을 공히 같이 받아서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데, 아들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아들이 아닌데,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는 그분의 영을 받아서 우리는 아들도 아닌데 아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시동생들아, 오히려 자랑스러워해라 !!

그것이 바로 '시형제 결혼법' 이라는 것인데, 집안의 맏이에게 그만 자식이 없어서 대를 잇지 못하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하는 것인데, 그러면 동생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닌 삼촌이 되어야하니 말이죠.

우리가 보기에는 막장 드라마 같은데,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이 시동생들아, 그것을 자랑스러워해라!" 라고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너희가 언제 맏이의 자식을 낳겠는가? 그런데 너희가 맏이의 자식을 낳았다면 고마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맏이만 좋아하고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장자만 죽이고 살리고 하는데, 나머지는 장자에 종속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몽땅 큰아들에게 가고, 둘째부터는 큰아들에게 얹혀서 산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같이 취직이 힘들고 할 때는 오히려 그게 편하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형이 5층 짜리 상가를 지어서, 형이 1층을 하고, 나머지 층은 동생들에게 나눠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장사를 하다가 적자가 나면 형이 다 매워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동생들은 대충 주5일 근무만 해도 되는데, 주말에는 등산도 즐기고, 연휴가 되면 해외여행도 가고 말이죠. 그러면 형은 1년 365일 중에서 쉬는 날이 없지 싶은데, 물론 재산등기는 다 형에게 되어있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살면 편하지 않겠습니까? 고생은 형이 다 하고, 동생들은 여유가 있게 즐기기만 해도 그 혜택은 같이 누린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두 글자로 '천국' 이라고 하는데, 다섯 글자로는 '아들의 나라' 라고 하고 말이죠. 천국이 그런 구조인데,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어서 동생들은 아무런 행한 것도 없이, 형이 고생해서 형이 받아 누려도 되는 모든 하나님의 그 영광을 동생들에게 줄줄이 나눠준다는 겁니다. 동생들의 입장에서는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다는 말이죠.  

여러분에게 연초부터 이런 대박이 왕창 터지기를 바라는데, 그러니 조상님이나 용왕님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천국이 바로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부터는 모든 초점이 어디로 모아지는고 하니, "맏이가 이 땅에 무슨 일을 벌렸는가?" 라는 것으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강의를 다시, '왕 짜증' !!

강의를 다시 하겠는데, 전도서가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하고 했습니까? 얼른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것 같은데, 물론 해도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하지만 말이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향해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는 듣고 싶지 않는데 하나님이 왜 자꾸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오히려 짜증이 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방금 제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 하나님을 잘 믿자" 라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자꾸만 잔소리를 해대니, 그때부터는 믿고 싶다가도 그만 도망을 치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잔소리가 없는 곳으로 말이죠. 어차피 해봤자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어, 어, 어!" 라고 하면서 귀를 막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노리는데, 그래서 이 세상은 헛되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기뻐하는 자는 단 한 사람뿐인데, 아버지의 말을 기뻐하는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듣기 싫어하는데, 자기가 챙길 것만 챙기고 도망을 치기에 바쁘다는 말이죠.

여기서 도망을 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예수님에게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면 마치 스토커처럼 집착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는데, 그때 예수님에게 점심을 얻어먹은 자들이 도망을 쳤습니까? 아니면 집착해서 달라붙었습니까? 그들은 집착을 했다는 말이죠.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를 스토킹해라 !!

이것은 마치 교회에 나오면서, "교회에 오니 복을 받네" 라고 하면서 집착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전도를 한다면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교회에 나와보세요. 복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들 건강하고 집안이 잘 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러나 저러나 손해는 아니니 일단 한 번 다녀보자" 라고 해서,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가면 일단은 미끼를 물은 것인데, 소위 '총동원주일'을 해서 평소에 500명이 다니던 교회에 1,500이 왔다고 하면, 목사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만약에 거기에 강사로 갔다고 하면,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죠. 그러면 제가 거기서 무슨 설교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도, 여러분의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아서, 복을 주어도 받지를 못해. 이 등신들아!"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완전히 점쟁이와 같은데, 점쟁이는 점을 치면서 반말을 한다는 말이죠. 처음에 가면 점쟁이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당장에 "어디서 왔어?" 라고 하는데, 나이고 뭐고 간에 완전히 무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결혼하면 안 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영적인 카리스마가 있게 보이려고 하면 반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성경전체가 축복으로 가득한데도, 너희들이 등신 같아서 받지를 못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어야 하는데, 왜 따지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정성을 다해서 바치면 복을 받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따지는가? 한국교회가 섞었니 어쩌니 하지 말고, 그냥 믿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소리를 들으면 교인들은 갑자기 자기들의 미래가 밝아지면서, "이거 잘하면 되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무엇인가요? 초빙강사는 힘주어서 외치는데, "낯짝이 있으면 바치고 받아야지. 기본은 십일조이고 말이야" 라고 말이죠. 그러면 담임목사는 속으로 박수를 치는데, 나중에 헌금이 나오는 것은 4대 6으로 갈라먹기를 하든지 하고 말이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뭐라고 합니까?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은 자식 걱정이 되지 않아? 그렇게 자식이 걱정이 되면서 교회에 보내지 않아? 그러면 장소가 좁은데, 당연히 건축헌금을 해서 예배당을 넓혀서 교육관도 짓고 해서 자식들 교육을 시켜야지. 돈이 없다고 하는데, 자식이 중요해? 돈이 중요해? 집이라도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는 교회에 바쳐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2부 순서로 간증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어떤 집사가 나와서 "집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더니만, 자식도 잘 되고, 그리고 집도 4채나 더 생겼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데, 대형교회가 다들 이렇게 해서 덩치를 키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이 기존교회가 그렇게 엉터리인 줄을 알면서도 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고 하니까, "그래도 언젠가 행운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서와 같은 성경말씀은 보지도 않고, 물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들이 단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에게 복이 오는 것만 알려주면, 자기는 얼마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목사님을 영적 지도자로서 섬기면서, 그렇게 교회에서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지, 신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단언하기는, 신학교를 나와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사람은 다 목회에 성공했고, 말씀을 언급한 목사들은 복사를 하던지 문방구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고, 식당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목회는 되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말씀을 전하느냐는 말이죠. 사람들은 용왕님을 원하지, 성경말씀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을 육으로 바꾸어서, '죽어라' !!

그러니 진짜 신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를 했지만 신마저도 죽인 자리인데, 그러니까 이 땅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는데, 즉 죽으라고 있는 자리라는 겁니다. 육을 죽여서 영이 되는 자리, 그런데 그렇게 죽을 때 인간으로 죽는 게 아니라, 육을 인간으로 바꾸어놓고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일 만해서 죽인다는 것인데, "왜 인간인데 죽입니까? 아담을 창조할 때는 언제이고?"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창조할 때의 인간은 없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라고 했잖아? 그래서 죽이는데 뭐가 문제야?"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벨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하면, "아벨을 해부해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끄집어내었잖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 안에서 믿음을 끄집어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 그 선물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아벨은 형에서 맞아죽었지만, 그 아벨이 그리스도까지 연속된다는 겁니다. 

성도는, 보따리 장수와 같아서 !!

그러니 이것은 마치 중국에서 들어오는 보따리상들과 같은데, 이번에 인천세관에서 검사하니 그들의 몸에서 금덩이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것도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과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항문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한 사람 앞에 5개씩인가 말이죠(ㅋㅋ).

그러니 성경은 성도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게 오늘 강의제목으로 괜찮지 싶은데, '운반책' 이라는 겁니다. 물론 마약이나 금덩이를 옮기는 운반책은 아니고 말이죠. 혹은 '매개체'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병균을 옮기는 매개체가 바이러스인데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옮기다가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육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은, "내가 이것을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전도서 자체를 운반하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을 매일의 삶을 통해서 운반하는, 그런 운반책으로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아하, 이래서 주님은 이 세상을 헛되다고 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육의 허무와, 영의 허무가 달라요 !!

그런데 여기서 '헛되다' 라는 개념을 좀 구분해야 하는데, 강의를 여기서 마치게 되면 정말이지 허무하고 헛되게 되는데, 살기가 싫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헛되다고 하는, 그 '허무' 라는 개념자체가 다르다는 말이죠. 육의 입장에서의 허무와 영의 입장에서의 허무가 다르다는 겁니다.  

육의 입장에서의 허무라는 것은, 소위 '허무주의'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허무주의는 어떤 현상을 낳는고 하니, 고립현상을 낳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토굴' 이라고 했는데, 토굴 속에서 산다는 말이죠. 일종의 현대판 구석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진화론자들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는 오십만년 전에서 일만년 전까지로 보는데, 그리고 신석기 시대는 일만년 전에서 역사시대까지로서, 약 오천년 전까지로 본다는 겁니다. 이 구석기 시대는 토굴에 그림을 그리고 했는데, 물론 신석기 시대도 그렇지만 말이죠. 그게 바로 언양의 반구대에 가면 있는 그림이라는 겁니다.

옛날에 거기 언약까지 바다였다고 하는데, 울산 방어진이 바다의 끝이 아니라 거기까지 바닷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빙하기가 끝나면서 그 빙하가 녹아서 물이 그만큼 넘쳤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보면 고래그림도 있는데, 사냥이 되지 않으면 굶어죽으니, 그렇게 그림으로서 남겨놓았다는 겁니다. 신석기 초반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불멸과 영생에 관한 낙서 !!

아무튼 토굴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그것을 어제 간단하게 '낙서' 라고 했는데, 그 낙서 가운데 무엇이 있는고 하니, 불멸과 영생에 관한 낙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일본의 신화를 조사해보면, 낙서가 굉장히 추상적인데, 기호와 같은 게 있다는 말이죠.

아주 옛날인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언어가 없었는데도 기호는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무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얼른 보면 무슨 UFO가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우리가 지금 보는 이런 문자는 처음부터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림으로 된, 그것을 '상형문자' 라고 하는데, 혹은 새끼를 꼬아놓은 것과도 같다고 해서 '쐐기문자'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초월적인 것을 생각했는데, 그러니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서서히 발달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맞다는 겁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이미 신을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인이 신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신을 찾아가는 '외재성' !!

그러니 종교는 발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인간은 종교적이었다는 말이죠. 즉 처음부터 신을 찾았다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첫째 시간을 하면서, 이렇게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을 두고 '외재성' 이라고 했는데, 즉 바깥에 존재하는 성질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이 외재성이 무엇인고 하니, 일본신화를 예를 들어보면, 일본은 신의 개념이 어떻게 발달했는고 하니, 신이 숲 속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SPIRIT' 라고 하는데, 즉 숲 속에서 나온 귀신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귀신에 둘러 쌓여서 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고 하니, 귀신이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이것이 일본신화이지만 모든 민족들이 다 그렇다고 봐도 무방한데, 고대인들은 죽은 자와 산 자와 숲이라는 것을 통해서 공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숲 속의 귀신이지만, 다른 민족들은 아예 마을의 한 가운데에 공동묘지를 두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일본에서도 앞마당에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

특히 제가 지난번에 직접 가보았던 유럽의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어있는고 하니까, 아예 교회 안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이죠. 배를 기다리면서 한 시간 동안 그곳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는데, 저는 믿음이 있어서 어디를 가도 복음과 관련해서 본다는 말이죠(ㅋㅋ).

하지만, '내가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이 없어 !!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한다는 것은, 거기에는 무엇이 빠져있는고 하니, "내가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이 빠져있는데, 그래서 "다같이 함께 사니 좋은 것이 좋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교회도 좋은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그러니 부정적인 언사는 설교시간에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도 정성을 바치려고 온 자들에게 격려를 해주어야지, 어디에서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는 겁니다. "바치는 것도 죄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격려를 해주고 해야 바치고 싶은 마음이 '더, 더, 더' 생기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정말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좋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아까 총동원주일을 예로 들었는데, 즉 "따지지를 말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해야한다" 라고 하는 것은, 자꾸 따지게 되면 몽땅 다 빼먹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무엇입니까?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 바친다는 것이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교회는 따봉인데, 부흥이 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생각보다 가까워 !!

여기서 공존한다는 것, 즉 외재성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외부와 현실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까이 통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바깥에 죽은 자들이 있는데, 그것을 '근접성' 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 보면 우리의 조상들이 상여를 매었는데, 그런데 상여가 가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합니까? 노잣돈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 노잣돈이 무엇인고 하니까, 죽은 자가 저승에 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했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음의 세계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나 죽음의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서양의 로마신화를 보면 죽으면 강을 건너는데, '레테의 강' 이라고 말이죠. 저승사자가 오면 거기도 역시 돈을 내고 배를 타는데, 그러면 길다란 작대기를 가지고 노를 저어서 저승으로 간다는 겁니다. 마치 소양강 처녀와도 같은데 말이죠. 그렇게 해서 저승에 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와 이승의 연락책이 있어서, 그것을 보면 동양의 귀신과 참 닮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인간 세상은 우선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 바쁜데, 그런데 그러다가 사는 것이 좀 꼬이고 할 때는, 그것은 누가 브레이크를 걸었는고 하니, 죽은 귀신이 와서 일이 잘 안 되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귀신을 달래야 하는데, 그것을 옛날에는 산에 가서 달래고 했는데, 이제는 교회에 와서 달랜다는 겁니다.

산 속의 절은 너무 멀고, 또한 중들은 너무 돈을 많이 밝히고 하니까 절에는 가기 싫고, 그래서 성당이나 교회로 나온다는 말이죠. 중들보다는 좀 점잖고 유식해 보이는 목사들이나 신부들이 있는 곳으로 온다는 겁니다. 성당이나 교회로 가서라도 귀신을 달래주어야 하니 말이죠.

그래서 "이것만 먹고 그만 좀 떨어지소. 너무 밝히지 말고, 이제 제발 그만 하소. 그리고 내 사업이나 잘 되게 해주소" 라고 하는, 바로 이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성경말씀을 볼 시간은 없는데, 살기 바빠서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과 교양대로, "착하면 복을 받고, 그리고 바치면 신도 받은 것이 있으니 나를 무시하지는 않겠지" 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

그러니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하는데, 그리고 그게 바로 천국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은 구원방식도 종교와는 전혀 다르고, 구원의 대상도 다르고, 구원의 목적도 다르다는 말이죠.

종교는 구원의 대상이 '나' 라고 하면, 성경말씀은 '육신'을 구원한다는 겁니다. 괜찮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는 쓰레기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은 쓰레기를, 탕자를 구원하시는 것이지, 괜찮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탕자교회'를 아십니까?

만약에 역사가 백 년이 된 교회에 목사가 새로 와서 "이제부터 교회 이름을 탕자교회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장로부터 시작해서 모두 데모를 하지 싶은데 말이죠. 물론 처음 들어올 때는 탕자였지만 장로까지 되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래서 이제 자기는 천사가 되었는데, 그런 천사를 보고 다시 탕자가 되라고 하면, 그것은 인간모독이라는 겁니다. 스스 자기를 디스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탕자교회라고 하면 분위기가 벌써 어둠침침해 보이지 않습니까? 무슨 노숙자들이 모인 교회도 아니고, 역사가 백 년이나 되었으니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차라리 귀족교회나 백작교회가 더 어울린다는 겁니다. 신사교회라고 하면 몰라도, 탕자교회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러니 탕자교회라는 것은, 그 이름 자체부터가 심히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목적도 다른데, 구원이 목적이 아니란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만족, 즉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는 겁니다. 토기장이에게 천국에 보낼 자와 지옥에 보낼 자의 권한이 있는데, 자기가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웠는데, 그러니 미움을 받았다고 해서 인상을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만한 권한이 창조주에게 있다는 말이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질 영광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육이 된 자에게 주어진 영광은, 그게 육의 영광이 아니라 아들의 영광인데, 그 영광이 덧입혀져서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피조물에게 주어질 영광은 없다는 말이죠. 성도는 예수님의 영광이 같이 포함이 되어서 같이 영광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신부' 라고 하는데, 즉 신랑의 영광에 합류가 되어서 받는 영광이지, 신부가 단독으로, 즉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같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아들의 영광인데, 그래서 천국의 이름이 곧 '아들의 나라' 라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어떻게 하십니까? 이런 전도서를 통해서, 구원의 대상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육으로 바꾸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전도서 1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여기에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미친놈과 미련한 놈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친놈과 미련한 놈이 하는 짓거리까지 다 포함한다는 겁니다. 미쳐놓고도 미치지 않았다고 우기고, 미련하고도 미련하지 않은 것처럼 일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가는, 그런 것들을 몽땅 일괄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미친놈에게는 미친 것밖에 나오지 않고, 미련한 놈에게서는 미련한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 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완전히 박살을 내고 마는 겁니다. 누가 말인가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향해서, 자칭 인간이라고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예수님도 미친놈에 합류하심으로 !!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왜 이렇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아까 교재 16페이지에서 언급했는데, 로마서 8장 3절에서 예수님을 육신의 모양으로 온다고 했는데, 기억이 납니까? 그러니 하나님마저, 예수님마저 미치고 미련한 놈의 처지에 합류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예수님이 미친 것이 합류했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진짜로 미치고 미련한 놈들도 하늘나라에 합류가 가능하도록 공간을 마련하도록 했다는 말이죠. 그것을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처소' 라고 했다는 겁니다. 처소, 즉 '장소(PLACE)' 라는 말이죠.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 안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그 자리는 미친 너희라고 해도 해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그런 장소가 성령에 의해서 마련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련이 됩니까? 언제나 무한으로 육은 제거가 되어서 영이 되는데, 그게 매일같이 반복된다는 말이죠. 육의 모습이 영의 모습으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공장은 싫어요 !!

그러니 그게 마치 공장과 같아요. 그래서 저는 '생산' 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공장이란 것은 단 하루만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쿵덕쿵덕하면서 물건이 나온다는 겁니다. 권사님은 혹시나 공장에 취직을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돈을 벌려고 공장에 가는데, 그런데 처음에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고막이 터질 정도로 시끄럽다는 겁니다.

물론 오래 다닌 사람은 만성이 되어서 모르지만, 처음에 취직해서 가게 되면 "물건을 만들다가 그만 사람을 잡겠다" 라는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싫어하는데,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그런 쾌적한 환경에서 일을 싶어한다는 말이죠.

공장은 덥고 추운 것도 문제지만, 사실은 소음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건을 만들게 되면 시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때려치우고 치킨 집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그것도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하루종일 그 뜨거운 튀김기름과 싸워야하니 말이죠.

방직공장 같은 경우에는 근처에만 가도 시끄러운데, 그러니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떻겠느냐는 겁니다. 어떤 아이를 둘이나 낳고 나이 40에 취직을 하려고 하니까, 그분도 글도 잘 쓰고 말하는 것도 참 재미가 있는데 말이죠. 그분의 이야기가, 토익점수가 900점이 나와도 생산직이라는 겁니다(ㅋㅋ).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달리 취직할 곳이 없다는 말이죠.

생산직이라는 것은 집에서 조용히 인형을 붙이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돈을 벌려고 하다가 그만 몸이 다 망가진다는 말이죠. 요즘은 감정 노동자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래도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제일 힘들다는 겁니다. 교사도 목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다고 하지만, 공장과는 족히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공장은 방학도 없다는 겁니다.

육신을 인간이라고 조작하는 배후세력을 !!

그래서 미친 것, 헛된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육신으로 만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육신이 되어야 그 속에서 인간도 아닌 육신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조작을 해내는, 그런 배후세력이 있음을 드디어 들통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 배후세력이 말이죠.

이런 육신이 되면, 창세기 3장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벌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시여, 너무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뒤에서 그렇게 인간을 조종하는 놈은 나와라. 인간을 아바타로 삼는 놈은 나와라!" 라고 하면서 불러내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귀인데, 그런데 이 마귀는 절대로 하나님과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과 상대를 하는데, 물론 아들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마귀는 다른 것은 다 용납해도 메시야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 !!

악마가 지옥에 가는 근거는, 그게 하나님의 아들이 주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악마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만든 악마가 유황불로 가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과 지옥의 주관자로서, 즉 심판주로 등장하면서, 그 악마가 그 주님의 십자가에 대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악마로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악마를 유황불에 두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 그래서 반드시 마귀는 지옥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직 우리를 멸할 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일찍 왔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귀신이 들린 사람을 아바타로 내세워서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죠.

(마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러니 마귀는 자기 운명을 알고 있는데, 그래서 우는 사자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자기와 같이 망할 인간들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모두 허용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고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한 예수님은 뜻은 "막으려면 막아봐라" 라는 겁니다. 악마는 이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데, 그 권력을 가지고 천국에 갈 자들을 지옥으로 돌릴 수 있거든 그렇게 한 번 해보라는 겁니다. 누가 더 힘이 센지 겨루어보자는 말이죠.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그 어떤 것도 퍼부어 보라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과연 끊을 수 있는지 말이죠.

(질문, 녹취 구 - 목사님, 악마는 어떻게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예수님은 자신만만한데, 왜 그런고 하니, 이미 거기서 탈출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지구와 성층권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는 양반이 있는데, 슈퍼맨이라고 말이죠(ㅋㅋ). 제가 이 세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중현실이 있다고 했는데, 외재성이 아닌, 즉 고대의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생각하는 것 말고 말이죠.

그것은 유일신이 아니고, 그냥 조상들이 죽어서 영혼들이 신으로 있다는 겁니다. 불교와도 똑같은데, 이 세상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 '49제'고 말이죠. 그것도 꼭 습기가 차고 어둔 곳에 있는데,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는 공동묘지 근처로 차를 몰고 가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일신이라는 것은, 그게 귀신들의 집합체에서 유일신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게 외재성인데, 즉 인간들이 상상하는 종교라는 겁니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종교는 인간을 위하지만, 하지만 복음은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구원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데, 인간을 구원을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종교라는 겁니다. 기독교나 불교가 그렇다는 말이죠. 복음은 인간을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할 대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글은 글자 하나만 더 적으면 되는데, "그런 사람은 '또' 없습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예수님에게 적용시키면, "예수님 같은 사람은 또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극단적인 반대인데, 우리가 믿는 것이 바로, "예수님 같은 사람은 또 없습니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또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좋은지, 슬퍼도 또 행복하다는 겁니다. 이승철의 노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이니까, 슬퍼도 또 행복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에 '또' 라는 것을 넣게 되면 의미가 완전히 반대로 된다는 겁니다. 마귀의 권세를 유일하게 빠져 나오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죠. 

거기에 우리를 집어넣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운반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되었다는 말이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화목제물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화목제물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했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했다는 말이죠.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여격(?)' 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얼마나 개판인 것을 구원받고 난 뒤에 알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두고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혜리의 '내가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라는 노래도 부르고 했는데 말이죠(ㅋㅋ). 주님의 그 고난을 자기에게 채우는데, 그러면 자기는 도화지이고, 그 도화지에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고생하신 그 고생담이 우리의 남은 인생에 채워진다는 겁니다.

주님은 화가, 우리는 캔버스 !!

그러므로 개인적인 구원은 없는데, 우리는 주님이 그리는 도구이고 또한 캔버스라는 말이죠. "어떻게 그려볼까? 늙어서 관절염에 걸린 그림을 그려볼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합니까? "올해 들어서 왜 이렇게 무릎이 아프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림을 그리신 겁니다.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자꾸만 빠지지?"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주님의 그림솜씨라는 말이죠. 마지막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그림을 그린다는 겁니다. 마침 오늘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그림의 대상인 분이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ㅋㅋ).

그런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말씀의 운반책으로서, 우리의 입에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미친놈이고, 나는 미련한 인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제 아무리 사업에 성공하고 해도 역시 미친 짓이라는 말이죠. 포도원을 크게 해서 성공했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미친 짓인데, 그게 전도서에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어도, 그 모든 것이 다 미친 짓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런 헛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알아서 한다는 말이죠.

전도서 3장에 보면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나오는데, 1절부터 보겠습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메시야를 죽인, 인간의 '자의식' !!

이것을 랩으로 한 번 해보았으면 좋겠는데(ㅋㅋ),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인간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여지를 다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래도 미친 짓이고 저래도 미친 짓인데, 그러니 고유의 자기 의미와 체면과 위신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이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를 하지만 돌아서면 또 이것으로 가는데 말이죠. 마귀가 얼마나 활동을 열심히 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자의식(自意識), 이것을 영어로 '아이덴디티(IDENTITY)' 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는 '주체성', 혹은 '자아성'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이러이러하다' 라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데, "나는 회사부장이다. 나는 치킨 집을 한다. 나는 아이큐가 150이다. 나는 방금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왔다. 나는 자식이 3명인데, 너무나 잘 키웠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성경공부를 아무리 해도 이것밖에 모르는데, 돌아서면 "나는 이 정도다.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전도서를 받은 이스라엘도 역시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라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것이 바로 메시야를 죽였다는 말이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유대인들이고, 이들은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의 전도여행을 하는데, 거기까지 따라와서 괴롭혔다는 겁니다. 터키와 그리스 지역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도 역시 괴롭혔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핍박을 받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러한 핍박 하나 하나가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게 놀랍게도 신약성경이 되는데, 그러니 주님이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너는 핍박을 받고, 나는 성경책을 만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남은 고난을 자에게 채운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

이것은 구약에서, 다윗에게 성신이 임해서 고생을 누가 하는 겁니까? 고생은 다윗이 하고, 시편이라는 성경책이 나온다는 말이죠. 특히 시편 2편 2절에서 보면, 이번 여름 수련회는 열왕기상을 한다고 예고를 했는데, 주님이 허락을 하시면 말이죠. 그 주제가 바로 이 시편 2편 2절이라는 겁니다.

(시 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 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 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여기 2절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라고 하는데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로마서를 설교하면서 복음은 무엇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아들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아들이 유발시켜야 있다는 겁니다.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아버지는 아들만이 !!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와서 아버지를 유발시켜주어야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빼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인간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다 귀신들인데, 그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아들이 와야만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아들과 동반해서 오시는 분이 하나님이지,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은 인간들의 탐심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것은 우상이라는 말이죠.

성경이 이렇게 다 연결이 되는데, 탐심은 신을 만들게 되어있고, 그 신은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해 보여도, 그게 자기 자신의 탐심과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기 때문에 우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은 가짜가 되고,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만이 아시는 그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우리는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의 죄를 질책하시는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만이 아시는 그 아버지가 우리의 아바 아버지로, 그렇게 성령의 능력이 미친 우리에게 발휘가 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니 성경공부가 납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선별성을 반복시키는 것인데,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함을 계속해서 반복시킨다는 겁니다.

다시, 시형제 결혼법을 !!

아까 이야기한 '시형제 결혼법'에 있어서, 형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삼촌의 입장에서 자기 자식이 되지 않고 형의 자식이 된다는 것이 아쉽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바꾸는고 하니, 감히 하나님과 통하는 아드님을 형수가 마침 살아있어서 그 자식의 대를 잇는데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렇게 마음가짐을 바꾸어야 하는데, 즉 "나 같은 미친 인간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이것은 천사도 부러워할 영광된 자리구나" 라고 말이죠. 그게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히브리서 1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히 1: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그러니 성경에서는 자기 자의식을,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성경이 "너의 청춘을 하나님께 바쳐라" 라고 하는 책도 전혀 아니고, 그런 하나님도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멋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외재성인데, 즉 종교라는 말이죠. 

종교는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마약과 같아서,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에게 미쳐있는데, 그러니 종교에 미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갑자기 교회에 열심을 내는 자들 !!

제가 별로 많은 경험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회 40년을 하고 기존교회도 조금은 다녔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있는고 하니, 평생을 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망하고 난 다음에 교회에 귀화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릴 때 주일학교 시절에는 교회에 좀 다녔지만, 돈을 번다고 바빠서 전혀 나오지 않다가, 그런데 잘 되던 사업을 갑자기 날리고 난 다음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부터 시작해서 성가대고 뭐고 간에 봉사를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일요일에는 하루종일 교회에서 사는데, 목사를 섬긴다고 하면서 일식집에 가서 별미를 사주고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에 자기 자신에게 미쳤다가 이제는 교회를 빙자해서, 그것이 교회라는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데, 복음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밑그름이 되어서 큰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다시는 망하면 안 되니 보험차원에서 교회에 투자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장로가 되는데,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복음에 미친 것과 교회에 미친 것은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것은 자기 역량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조용한 것을 보니 다들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성경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

경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빼고는 다 미친놈이고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자리에 만족해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영화제목처럼 결혼도 미친 짓이라는 말이죠. 살아가는 그 하루하루가 할 짓이 없어서 살아가는 것인데, 이렇게도 살아봤다가 저렇게도 살아봤다가 말이죠.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국가에서 주는 연금이나 받아서 살아가면 되는데, 물론 그것도 미친 짓이고 말이죠. 그렇게 온갖 미친 짓을 다 하다가 살아가다 보면, 나중에는 그렇게 미칠 것도 별로 남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교회에 나오는 미친 짓이라는 말이죠.  

아무튼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악마에게서 나오는데, 그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시편 2편 2절에 나오는 그 기름 부름을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인데, 즉 "아들과의 관계를 끊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복을 주고, 부자가 되게 해주고,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니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니가 하는 짓이 미친 짓이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끊어버려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너는 헛되지 않다. 미치지 않았다. 의미가 있다" 라는 쪽으로 자꾸만 몰아간다는 말이죠.

괴테의 '파우스트' !!

그래서 괴테의 '파우스트' 라는 책에 보면, 자칭 똑똑한 박사가 악마와 거래를 한다는 겁니다. "너희 소원은 다 들어줄 테니, 그 대신에 너의 영혼을 데리고 가겠다" 라는 것인데, 괴테가 사실은 유명한 신학자라는 겁니다.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는데, 그래서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이고 독일은 괴테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떻게 보면 아인쉬타인보다 더 똑똑한다는 겁니다.

그 파우스트의 마지막 대목이 무엇인고 하니까, "남자는 백 날을 해봐야 미친 짓밖에 하지를 않는데, 그 남자를 구원하는 것은 여자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복음적이 아니라 예술적인데, 왜냐하면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은 남자에게 속하지만, 아름다움은 이성으로 장악될 수 없는 외재성, 즉 초월적인 신의 영역으로 여겨진다는 겁니다. 그 아름다움에 가장 가까운 것이 여성이라는 말이죠. 물론 괴테가 여성이라고 할 때는 여성이 맞지만, 그러나 괴테의 책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고 하니, 그게 젊은 여성이라는 겁니다. 갱년기가 지나서 여성 호르몬도 나오지 않는 여성이 아니고 말이죠.

그 어떤 달력이라도 이화여대 체육학과 학장이 등장하지는 않는데(ㅋㅋ),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을 소주회사에서 모델로서 삼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총장은 다소 여자 같은데, 그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어제는 설교를 하면서 정유라를 최유라라고 했는데, 물론 다들 알아들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미쳐있는데, 요즘은 점점 더 미쳐간다는 겁니다.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정리를 하자면, 전도서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래서 전도서를 덮고 나면 우리는 "나는 이 정도야" 라는 것을 돌아가는데, 그래도 자기는 제법 괜찮게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을 펼치면 뭐라고 합니까? "이 미친놈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감사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미친놈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그 사랑, 주님이 아니라면 누가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겠느냐는 겁니다. 전부가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미쳤다. 헛되다. 어리석다" 라는 이야기를 누가 해주겠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완성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입장에 놓여있기 때문에, 미친 우리를 누가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분인데, 그분이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자기 자신의 그 영광으로 몸으로, 예수님의 몸으로,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셨다는 겁니다. 그게 곧 신약의 내용인데, 그래서 우리는 오늘 구약을 보았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면서 어린양의 기능으로, 그 아들로 말씀하신 그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우리가 합류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게 얼마나 놀라운 자리이고 신분인지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2,4 오후 4시에 마침.
                                                   미치고 미치며 미치고 미치니 모든 것이 미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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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작사 강은경,  노래 이승철 (2009)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 데도 그런 사람 또 없을 테죠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준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런 그댈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얼마든 아파도 좋은데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 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나 태어나 처음 가슴 떨리는 이런 사랑 또 없을 테죠
몰래 감추듯 오랜 기억 속에 단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런 그댈 위해서 아픈 눈물쯤이야 얼마든 참을 수 있는데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그대 웃어준다면 난 행복할 텐데
사랑은 주는 거니까 그저 주는 거니까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