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마태복음6강-수동적 믿음

아빠와 함께 2016. 8. 6. 15:29
2016-08-06 12:11:24조회 : 17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6강 [수동적믿음] 이름 : 오용익 (IP:125.136.25.28)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6강 [수동적믿음]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13장에서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라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한 해법, 해결책은 13장 35절에 보면 나옵니다. 13장 35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비유를 말하신 그 당사자가 창세전부터 감추인 것,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활동에 나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리고, 돌밭에 뿌리고, 가시떨기에 뿌리고, 좋은 땅에 뿌린다는 것은, 우리는 뭐만 생각하면 되느냐 하면, 네 개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의 장면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고 나머지 세 개의 밭은 전혀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3장, “내가 입을 열어서 비유를 말하고” 이렇게 비유를 말하는 그분의 활동성은, 열매 있는 쪽과 열매 없는 쪽을 차별화시키는 식으로 비유를 말하신 당사자가 그것을 현실화시키면서 계속해서 활동해 나가시는 것이지요.

 

열매가 없는 쪽, 열매가 생길 수 없는 경우를 계속 유발하게 됩니다. 열매 없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가져가는 경우와 돌밭에 떨어져서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잠시 견디다가 환란이 일어났을 때 넘어지는 자,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뿌리웠다는 것은 세상염려와 재리와 유혹에 막혀서 결실치 못한 자, 이런 자들이 예수님께서 비밀을 드러내는 협조자들로 등장인물로 삼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 하는 일에 하나 버릴 것이 없어요. 마귀도 다 쓸모가 있는 겁니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비유를 던지신 예수님께서 그 비유의 마지막결말을 일구어 내시는데 있어서 마귀는 필히 자기의 역할을 담당을 해줘야 돼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자로 하여금 말씀을 빼앗아 가도록 마귀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입장은 뭐냐 하면, 확실성 앞에서의 성도의 입장은 수동적이에요. 어디 앞에서? 확실성 앞에서. 모든 것이 확실해 졌어요. 끝에 웃는 자,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라고 하잖아요. 마지막에 누가 웃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지막에 웃어요. 마지막 예수님의 웃음을 위해서 얼마든지 우리가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같이 웃을 수 있는 겁니다. 어떻게 되든지 “주님께서 참 잘하셨습니다. 모든 세상만사는 주님의 뜻대로 통일되게 돌아가는 것이 맞군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치고 지옥 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을 왜 지옥 보냅니까? 마귀 증인입니까? 자기를, 모든 것을 시작했고 모든 것을 끝장내시는 분으로 증거 하는데, 그런 자들을 모아서 천국 보내는데 그 사람이 구원 안 될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여러 밭의 경우들을 보고 남은 것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어디서? 세상에서, 이 가야산 밑에 내려가서 즐기는 거예요.

 

세상재리의 염려가지고 고민하는 사람, 말씀 들으면 홱, 하고 외면하는 사람, 교회 나와서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해가지고 ‘나는 종교를 잘못 선택해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사람, 세상에, 딱이야 딱! 어쩌면 그렇게 마태복음 13장의 현실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우리의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그걸 보고 매사 깊숙하게 세세한 곳에 손길을 닿게 하시는 주님의 섬세한 손길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 끝났네. 걱정할 것이 없네요. 전부 다 하나의 역할이니까. 그렇게 해서 16절을 보게 되면,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것을 절대로 수동적으로 이 결과물을 받아들여야지 능동적으로 이것을 차지하려고 용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열매는 기껏해야 자기열매가 되지 주님의 열매가 안돼요. 농부의 모든 열매는 주님의 열매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능동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길가에 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슝, 하고 독수리가 날아와서 방금 떨어진 씨앗이 어디 있지, 라고 하는데 독수리가 날아오니까 이쪽으로 확 피해서 ‘휴, 살았다.’ 또 ‘내가 마귀에게 잡힐까 보냐.’ 이렇게 능동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들이닥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그냥 즐기세요. 주께서, 비유로 던진 분이 알아서 홀로 완성한다는 사실을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비유도 마찬가지에요. 가라지를 심어놓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29절에 봅시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마지막 때까지 미래에서 온 열차로 인하여 과거에 있던 모든 것은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느긋하게 봐 줘야 돼요. 제가 이 바닥에, 이 목회의 바닥에 들어오고 난 뒤에 이 본문을 교회 내에 적용해 버리면 정말 이것은 당파싸움이 일어납니다. 노론소론 난리 납니다. “네가 가라지야. 어디서 가라지가 주제도 모르고.” 이래가지고 난리가 나요. “우리는 알곡이야.” “알곡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래서 한쪽은 입구에 모여 있고, 경찰들이 와서 진치고 있고, 한쪽은 본당 내놓으라고 하고 다른 쪽은 본당 입구에 서서 못 들어오게 막고 있고.

 

그게 전부다 뭐냐 하면,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으로 사수하겠다고 설치는 것, 그게 바로 가라지입니다. 아주 그 역할들을 그들이 잘 하고 있어요. 분쟁하는 그런 교회 가서 “주께서 참 일 잘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찬미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31절에 보게 되면, 여기에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투입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겨자씨 한 알이 있는데 겨자씨가 아무리 커도 나무가 안돼요. 어쨌든 겨자씨가 있는데 32절에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식물학적으로 겨자씨가 제일 작은 씨는 아닙니다. 좀 작은 편에 속해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좀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런 비유를 하시는 분이 35절에, 비유로 말하되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별로 해석할 것이 없어요. 우리가 개입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구경만 하고 떡만 먹으면 되니까요.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고요. 그 다음에 37절에 죽 보게 되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전부 이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에 필요한 하나의 스텝들이에요. 조명은 누가 담당하고, 그리고 카메라는 누가 담당하고, 조연출은 누가 하고, 미술담당 따로 있고, 여러 가지 또 많을 거예요. 그 모든 스텝들, 끝나고 난 뒤에 짜장면 한 그릇씩 얻어먹는 스텝들 있잖아요. 그런 스텝들이 쫙 깔린 거예요.

 

그 스텝들이 마귀요, 그 스텝들이 바로 이단이고 불신자라는 말이지요. 그 스텝들의 특징이 뭐냐? 한결같이 예수님 하는 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자꾸 개입하려고 시도한다는 겁니다. 비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뭔가 몸부림친다는 거예요. 비유는 그냥 비유일 뿐 우리는 그냥 느긋한 마음으로 보면 되는 겁니다. 비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비유 끝나고 난 뒤에 이루어져요.

 

비유는 하나의 원설계도고 그 설계도대로 이것은 미래에서 투입된 시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끝까지 가실 거예요.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반전을 일으키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밭을 사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일에 대해서 남에게 하청 떼어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본인이 알아서 홀로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48절에,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 52절에, 마지막 때에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구약과 신약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구약과 신약, 옛 약속과 새 약속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꺼낼 때 혼자 꺼내면서 그 말씀을 혼자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신원조회가 나오는데 그들은 그 일에 실패합니다. 57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보고서도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14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14장에서 주목할 것은 27절입니다. 유령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령이다.”

 

그러면서 무서워하지요. 왜 유령이라고 했을까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인간이라면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 기존에 깔려 있는데 물위를 걸었고 거기에 세트처럼 짝을 이루어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이럴 때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자기를 관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만 보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주님만 바라보고 있지요.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의 수동적인 모습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자기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미쳤지. 지금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어?’ 하는 순간 물에 빠졌어요. 자, 그렇다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면서 그가 경험했던 것은 뭐냐?

 

출애굽기 24장을 보겠습니다. 4절에서 8절까지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순서가 이래요. 12, 그 다음에 법, 물론 제사법도 포함됩니다, 법, 그 다음에 마지막 마무리가 뭐냐 하면, 피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언약이 체결돼요. 열 두 지파는 인간입니다. 인간이고 그 다음부터 인간 말고 주어지는 것, 피와 법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져서 이루는 것은 언약을 이루는 겁니다. 그렇게 주어지게 되면 인간들은 신분이 바뀌어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 쪽에서 다가올 때 법은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안은 밖으로 나가고, 밖에 있는 것은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안에 있는 것은 의고 흠 없는 제물이니까 흠 없는 의가 밖에 나가서 죄인으로 취급받아서 죽게 되고 밖에 있는 죄인은 그로 인하여 안에 들어와서 원래 안에 있던 의의 사람이 되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기제,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어요.

 

이런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반가워서 뛰어내릴 때 베드로마저 하나의 세트가 돼요. 열두 지파 이스라엘의 원형을 베드로가 잠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법이나 피라는 것은 바꿔치기 할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인이 필요하고 그 죄인의 자리에 열두지파가 개입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예수님 쪽에서 준비한 것은 법과 피를 준비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율법이고 피라는 것은 십자가 피죠. 이것이 결합할 때 이미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공식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어느 정도로 수동적이 되어야 되느냐? 나 없다. 그냥 주님만 있으면 주님이 알아서 모든 것을 친히 홀로 이루신다, 하는 순간 그 베드로의 자리는 물이든 불이든 상관없이 주와 같은 범주안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자기를 보는 순간 빠져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자기고유의 단독적인 생활공간을 따로 설정해버리고 만 겁니다. 그럴 때 이것은 뭐냐? 수동에서 능동으로 바뀌게 돼요. 제가 뭘 해야 됩니까,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사람들은 뭐냐 하면, 유령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전진하는 경계(2강)라는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점점 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결별의 순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갈라져요. 그게 14장부터 나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걱정되는 것은,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마음이 들끓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물위를 걷고 싶다는 자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이용합니까?

 

우리는 물위를 걷기는커녕 폐허가 된 옛 초등학교건물에 혼자 있을 때도 “귀신이다. 엄마야!” 하고 막 벌벌 떠는데요. <여고괴담>식으로 복도에 팡, 팡, 팡, 팡, 오게 되면 막 도망치는데. 심지어 거울보고 자기가 유령이라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생활공간에서는 자꾸 이런 것을 흉내 내지 마세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제자들이 “베드로야! 한번만 더. 내가 사진 찍어줄 테니 한 번 더 걸어.” 이런 것은 없습니다.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사람 낫게 했다고 해서 손수건 한 번만 더, 이런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잠시의 역할로 들어갔는데 그게 제자들에게는 신스틸러, 신을 강탈하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처럼 느껴지겠지요. 15장 봅시다. 15장 18절을 봅시다. 17절에, 이것은 전에도 했는데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 마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무리 경건하고, 손을 씻고, 어떻게 해도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면 전부 다 그것이 주께서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짓이 되는 겁니다.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손씻고 경건하게 먹는 것은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냥 살아라. 어차피 인간 안 되는 거, 그냥 살라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그 인간 안 되는 것……, 그 뒤에 나옵니다.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것은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과의 결별하는 상태에서 제자가 아닌 엉뚱한 제 삼자를 예수님과 그 유대인 사이에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고 왜 너희들이 나를 따를 수 없는가를 계속해서 추가적인 사람들이 와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믿음 좋다, 충실히 따랐습니다, 하는 그런 것들이 새롭게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색해 집니다.

 

14장 36절을 보겠습니다.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리라. 이게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을까요? 접촉하니까 다 낫게 된다. 출애굽 때는 제물이 있었는데 그 제물에 접촉한 자는 반대로 다 더러워진다고 했어요. 죽은 시체, 부정한 음식을 접촉하게 되면 역시 더러워집니다.

 

접촉이라는 말은, 전염, 또는 오염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접촉하니까 그들이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예수님을 접촉한다는 말은, 예수님 자체를 뭘로 보느냐 하면, 하나의 공백, 또는 구멍,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구멍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바람이 술술 들어오겠지요.

 

텅 비어있는 거예요. 텅 비어있는 곳을 접촉한다는 말은 기존에 있는 모든 세계를 순간적으로 부정하는 거예요. 부정한다는 말은 이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온갖 것 다 해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더라.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세계에서 이 통로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를 맡기게 되면 이 새로운 다른 차원의 바람으로 인하여 우리가 낫는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손을 만진 거예요.

 

만진다는 말이 행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만질 때 딱 만져야 된다는 식의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마음자체가 이 땅과 저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가서게 되면 거기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보다 더 좋은 바람이 불어서 예상치 않은 새로운 변화가 여기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 역할을 지금도 우리가 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여러분, 병 낫는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문제는 죄 용서기 때문에 그 죄용서가 “죄용서!”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대리변호를 해주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분이 “쟤는 죄가 없어. 왜? 내가 대신 모든 율법을 지켰으니 죄가 없어.”

 

의로운 자가 변호하면 죄가 없는 거예요. 너무 간단해서 이상해요. 그런데 너무 간단하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나대거나 설칠 필요가 없다는 그 점에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효과를 낳게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는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우리 인생 그렇게 한 번 살아봅시다. “내 쪽에서 할 것이 없습니다.” 저쪽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구멍 같은 주님 앞에 서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저렇게 했습니다.”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염치 불구하고 나왔습니다.” 하는 그 순간 그게 바로 대리변호의 효과를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순간이에요. 어차피 생활공간에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다음에 마태복음 16장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13절이요.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드디어 결별의 수순으로 빠집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2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대비를 시켰습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사도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 돼요. 그러나 성령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만 되고 그 외 모든 사람의 일은 사람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딱 하나만 알면 돼요. 사탄은 어디에 등장하는가? 사탄은 항상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어떨 때 사탄이 자기정체를 유감없이 드러내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언급하게 되면 사탄은 거기서 등장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십자가로 한꺼번에 모든 일이 해결되는가?’라고 진지한 얼굴로, 걱정스런 얼굴로, 되레 우리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많이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럴 수 없느니라.” 할 때 사탄이 나와요. 그것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신이 오직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도록.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관심사를 다른데 두게 하는 거예요. 관심사를 다른데 두게 할 때 그 딴 데 두는 내용이 뭐냐? “너는 이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주저하지 말고 해봐. 그러면 너는 되게 되어있어.” 자꾸 우리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주의 일이 된다는 그것에서 자꾸 얼굴 돌리게 만드는 겁니다. 누가? 세상신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들이 소통이 되는 현장이 세상이기 때문에요. 예수님 공생애에서 제일먼저 마중 나온 자가 누구였습니까? 놀랍게도 악마가 마중 나왔어요. 악마가 마중 나올 때 사람들은 궁금해요. “목사님, 악마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악마 생긴 것 제가 묘사해 드려요? 녹색 날개 달리고 뿔나고, 악마가 그렇게 생겼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가 평소에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잠재의식이 그렇게 튀어나온 거였어요. 튀어나온 것을 묘사했는데 나쁜 것만 골라서 집대성해서 악마를 그려내게 되면 얼굴이 이렇게 있다면, 눈은 쫙 째지고, 입은 비웃는 듯하고, 얼굴은 이렇게 길어요. 관상학적으로 안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은 거예요. 뿔이 있고, 날개는 징그럽게도 녹색으로 되어 있고요.

 

브람스토커라는 사람이 지은 <드라큘라>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소설에서 보면, 모양새는 점잖은 백작입니다. 밤만 되면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일으키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400년 동안의 한 맺힘이 혈관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호러지요? 무섭지요? 지금 춥지 않습니까, 여러분. 꿈속에 드라큘라 나오겠어요.

 

얼마나 한이 맺혔습니까? 400년 동안, 희생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걸 백작이 온 몸으로 받아내는 거예요. 그걸 참을 수가 없어서 일단 덧니가 나야 돼요. 덧니가 나야 목을 물 때 잘 안 빠지니까. 그런데 그걸 막는 방법이 뭐냐? 마늘, 마늘 값 오를 때는 곤란해지죠. 마늘과 십자가. 동양철학과 혼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들이대면 드라큘라가 으악,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하나는 뽑아낼 수 있어요. 한 맺히면 마귀 들렸다고 보면 돼요. 그 놈의 한. 뭐가 그리 한이 맺혔습니까? 한 맺히면 사주 보게 되어 있고 한 맺히면 점 보러 다니고, 한 풀려고 온갖 짓 하고, 한 맺히면 철야하게 되고, 한 맺히면 갑자기 평소에 안하던 헌금을 많이 하게 되고, 한 맺히면 갑자기 안 나오던 오후예배까지 나오고요. 한이 맺히면 사람이 가만 있지를 못하고 뭔가를 해요.

 

한이 왜 맺히겠어요? 왜 나를 단독존재로 살지 못하게 만드느냐, 그것 때문에 한 맺히거든요. 그게 바로 베드로가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건재한데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어줘야 우리가 희망이 있고 낙이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그게 바로 사람의 일이라는 거예요.

 

사람의 일이 사탄의 일이라는 말은 사람 중에서 한 안 맺힌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이 맺힌 거예요. 자, 그런데 16장 17절부터 하는 말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베드로를 가지고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베드로가 앞으로 예수님과 의견충돌이 없어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했다면 이것이 가장 반석다운, 돌로서는 최상의 것,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최고의 반석으로서 베드로가 아주 적절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겁니다. 자력으로 교회 되는 방법은 없었다. 베드로가 다시 이걸 보면서 얼마나 절감했겠습니까?

 

내가 가장 교회의 반석다운 이유는, 내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소리를 들을만했다는 고백의 대표자기에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고백하고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거든요. 한 맺혀 있으니 무슨 일을 못하겠어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 한 짓거리들 하고 오신 분들이에요. 아직도 그런 짓거리를 안했으면 그런 짓거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상당히 아쉽네요. 염려스럽습니다.

 

17장 봅시다. 점점 더 헤어질 대목들이 가까이 옵니다. 변화 산 이야기인데 변화 산에 세 명이 대표로 올라갔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가 아주 멋들어진, 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발언을 합니다.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게 왜 가장 세속적이냐 하면, 초막 셋은 누구한테 좋은 집이냐 하면, 땅 밑에 사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는 멋들어진 제안입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같이 살고 싶은데 집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 있는 세 사람,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는 그런 집이 필요하겠어요, 필요 없겠어요? 그런 집이 필요치 않잖아요. 이것은 베드로가 무엇을 경유하지 못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직 경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바가 곧 주님도 굉장히 좋아하는 선물이 될 것이라고 지금 착오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냐? “갖다 바칠 생각을 하지 말고 너희는 저 예수님의 말만 들어라. 이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원하는 바에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가 뭐냐 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 갖다 바칠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말씀을 경청하고 어떤 식으로 과정을 이끄는가를, 그 말을 마음에 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만 모든 정보를 알려주셨다? 누구에게만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외의 여러 항목이 있는데 적어보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교회. 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환경, 자기의 집을 위해서 사는 것, 자기 가정을 위해서 사는 그것도 우상숭배가 되고, 그 다음에 자기직장, 이것도 우상숭배가 되고, 자기조국을 위해서, 자기국가를 위해서,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이게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을 위해서 가정을 잘 다스리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을 위하려면 주님의 조치가 주어졌을 때만 영광이 됩니다. 자기가정 살피다가 주에 의해서 폭삭 망했다는 체험을 할 때 그것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 덕분에 우리가정 잘 다스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섬기는 대상이 두 개가 돼버려요. 주님도 섬기고 자기 집도 섬기는 그런 얄팍한 꼼수를 쓴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도 우상이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듯이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예수님의 말씀만 우상숭배가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만 섬기는 방법은 뭐냐? 주께서 알아서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음을 조치를 해주니까 우리가 미리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우리 하던 대로, 가정 섬기고, 직장 섬기고,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의 기대대로 잘 안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주께 영광돌리시면 되는 겁니다. 굉장히 쉽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 다음 17장 20절에 보게 되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니까 우리가 섬기는 일에 실망을 일으키는 일이 벌어지거든 주께서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참견하고 있다고 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나 기대하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될 때, 그것은 주께서 그런 것을 잡고 그런 것에 마음 두면 안 된다고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계속해서 17장 2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러면 교회에서 기도회 할 때 다른 것 가지고 기도제목 할 필요 없어요. 전도사가 앞에서 한 30분 찬양 인도하고 기도제목 줄 때 “다 같이 합심해서 산을 옮깁시다. 가야산을 옮깁시다.” 이것이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했거든요. 산을 옮겼다면 그것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봐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산을 못 옮긴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기도해서 산을 옮긴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그런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아무도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믿음이 있으면 안돼요. 왜? 믿음은 갖다 줘야 돼요. 주님께서. 아까 식사할 때 제각기 찬거리 들고 갔습니까? 장봐서 갔습니까? 그냥 다 차려놨잖아요. 늦게 가면 비빔밥 없지만. 이미 다 차려놨잖아요. 그냥 먹기만 한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참석한 것도 주의 은혜요, 앞자리에 앉게 된 것도 주의 은혜요, 앞자리에 앉으려고 하다가 권사님에게 눈총 받아서 뒷자리로 간 것도 주의 은혜요, 찬양하는데 4절을 부를 것을 3절 불러서 우세당하는 것도 은혜요, 그것도 생중계 되는데 가사 더듬거리는 그것도 은혜요, 반주하다가 텅, 텅, 텅, 미끄러지는 것도 은혜요, 모든 것이 주의 상찬,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믿음이 없음에도 주어지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제공된 것을 믿을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간질 들리고, 자주 넘어지는 이 모든 병자고침은 자기소관이 아니고 주님소관인 것을 그들은 믿지를 못한 거지요. 예수를 안 믿은 겁니다. 그들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네 식으로 하려면 산을 옮겨보라고 주께서 숙제를 준 거예요. 이게 지금 제자들과 결별수순을 밟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24절에 보니까 여기에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본인이 성전이기에 안내도 되지만 너희들로 오해케 하지 않도록 성전 세를 준다, 하면서 돈이 없어서 못주는 것이 아니고 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낚시를 던져서 잡힌 고기의 입을 벌리니까 거기에 딱 성전세 액수만큼의 돈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없는데서 생긴 거예요. 사전에 공작을 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몰래 고기 한 마리 잡아서 입을 벌려서 동전 넣어놓은 다음에 물에 딱 띄워놓고, 시간 맞춰서 딱 봤다가 “성전세를 내라고? 베드로야, 고기 잡아라. 베드로야, 그 고기 말고 옆의 고기!” 벌써 주님께서 표를 해놓았거든요. “그 고기 말고 이 고기! 그렇지 입을 벌려라. 나왔다.”

 

그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 설명하고 이번시간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기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처녀. 두 번째가 너무너무 유명한 거예요. 교회 한 달만 다녀도 다 아는 유명한 비유가 나옵니다. 흔히 달란트 비유인데 이 달란트 비유가 언제부터인가 탤런트비유로 바뀌었어요. 기가 찰 일입니다.

 

달란트는 돈의 단위인데 갑자기 탤런트가 왜 나옵니까? 재능기부 하라는 그 말이거든요. 두 번째가 달란트비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어린 소자에게 지극히 작은 자가 했다고 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 지옥과 천국의 비유인 이 세 가지 비유인데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비유가 뭐냐 하면, 주께서 네게 없는 것을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없는데 어떻게 줘요? 없는데? 없는 것을 내놓으라는 것은 뭐냐 하면, 없는 것을 내놓는데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움직이게 되면 없는 것이 새롭게 발생되었다는 그 원인이 예수님이 움직임으로 연계해서 없는 것이 새롭게 생깁니다. 예를 들면, 주인이 먼 곳으로 출장을 가버려요. 이렇게 움직입니다. 주인이 움직이는 순간 그들에게는 ‘나에게 이런 것이 있었어?’ 하는 그런 요소를 내놓게 되지요. 바로 그것, 내가 움직여서 획득된 부가적인, 추가적인 것을 내 것으로 가져오라는 거예요.

 

신랑이 미리 와서 신부 챙기고 결혼식 하면 돼요. 그런데 신랑은 오지를 않습니다. 신랑은 오지 않고 신랑이 오지 않다가 움직입니다. 움직일 때 그 때, 기름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요소가 발생이 돼요. 그 기름을 보겠다는 겁니다. 신랑이 오지 않고 있을 때는 기름이 필요 없어요. 신랑이 드디어 신부를 만나러 오면서 기름이 새롭게 필요한 요소로서 신랑을 맞이할 중요한 핵심요소로 등장합니다.

 

그 기름을 보자는 거예요. 이것은 세 번째 비유인데요. 사람이 가만있어도 주님께서 혼자 설쳐대는 거예요. 혼자 설쳐대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주섬주섬, 이것도 네가 한 것이고, 이것도 네가 나 주려고 한 것이고, 그렇게 다 가져가요. 가져가니까 25장 37부터 보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주님께서 “네가 나에게 줬다.” “제가 언제 줬습니까?” 천국 가는 양은 기억이 안나요. 언제 우리가 주님한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막 사시라는 그 말이지요. 막 사시면 주섬주섬 다 가져가요. 마치 장사하고 있으면 휴지 줍는 노인네가 와서 주섬주섬 휴지를 가져가요. 나중에 “할아버지 이 휴지 어디서 주웠습니까?” “저 사람이 줬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응? 내가 준적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아니요. 저 사람이 내가 어려울 때 종이를 모아놓고는 ‘할아버지, 이것 팔아서 용돈 쓰세요.’ 하고 줬습니다.” 하는 거예요.

 

순전히 노인의 자작극이잖아요. 세상 자체가 주님의 자작극이에요. 그게 주님의 활동 때문에 우리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는 우리 것으로, 우리가 한 것으로 전부 다 해주시는 것, 이것이 주께서 모든 활동의 그 열매와 혜택을 자기백성에게 넘겨주는 그런 비유가 마지막 때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이게 세 가지 비유에요.

 

기름 준비하려면 주유소 가까이에서 살아야 돼요. 얼른 준비해야 되니까. 기름 준비하는 이것은, 기름은 성령이니 성령을 준비해야 된다. 제발 그 해석은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 쪽에서 나서서 뭘 준비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채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나름대로 투쟁하고 노력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가만있으세요. 주께서 다 혼자 하셔서 모든 것을 “네가 날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다.”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딱 하나밖에 안 남아요. 그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동안 참 인내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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