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강 (단독 수행)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결별 수순을 밟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 템포 늦춰서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로 용서해 준다.’ 이건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 대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천국으로 인도하겠다.’ 이런 말씀은 듣기만 해도 황공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소원은 안 들어주십니까? 영생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왜 우리 소원은 안 들어주시는 겁니까? 참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고, 주님이 희생하셔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입이 100개라도 감사할 뿐인데, 소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작은 소원을 외면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리 좋은 미래의 천국을 약속해 주셔도 지금 당장 시급한 소원을 안 들어주시면 섭섭합니다. 만약 내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나라를 구했다면 그것도 좋지만 나와 함께 놀아주고, 잠자리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그런 아빠가 더 좋지 않을까요? ‘내 아버지 아니면 나라 구할 사람이 없나?’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좋은데 왜 작은 나의 소원은 안 들어 주시는가?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주님 말씀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평소에 물 위를 걷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이 반가워서 맞으러 나가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물 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왜 주님은 들어주시지 않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분위기 속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다 보니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그냥 얻게 된 것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과 출애굽기 24장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12지파에게 법이 주어지고(제사법도 포함), 거기에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언약을 이루셨는데, 12제자는 이런 방식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어른 된 입장에서 그런 것들을 다 챙겨 주시는 겁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자신에게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챙겨 주십니다. 초등학생이 철없이 엄마에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하는데, 그것 안 들어준다고 시장 통에서 엄마 붙들고 울고불고하다가 얻어맞고 집으로 오지요.
엄마는 자식이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원치 않아도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챙겨주시는 것에 대해서 아이는 너무나 무관심하고 고마운 줄도 몰라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법과 피를 주셨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두 번째 이유가 19장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의 단독 작업입니다. 주변에 있는 제자들을 따돌리고 혼자 일하십니다. ‘이번 거사는 너희들이 함께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와 우리 소원 안 들어주시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주님의 공생애가 성도에게 그대로 주어집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붙들고 자기 소망을 이뤄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따돌립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너희들은 갈 수가 없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상황을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제자들마저 따돌리시는 주님의 작업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심으로 주님이 가신 길(공생애)을 우리도 가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거사를 앞두고 우리의 소소한 요구는 묵살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요청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우리가 두려워 피한 길을 주께서 외롭게 홀로 가셔서 거사를 이루시고 그 이루심을 우리 인생에 그대로 소프트웨어로 심습니다. 마치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듯이.
그러면 제자들이 튕겨 나온 것처럼 우리도 튕겨 나오고 나중에 뒤돌아보면 주님께서 외롭게 거사를 다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결별하는 수순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19장부터 시작됩니다. 1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어요. 이런 사람의 등장을 저는 굉장히 반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마음을 이 사람이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런 답변을 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말씀에 대해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청년처럼 어릴 때부터 철저히 십계명을 지켰으면 영생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눈 팔거나 딴 길로 가지 않았고 계명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았기에 자신은 당연히 복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영생 얻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확인 차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답변하시기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의 답변은 제자들의 답변을 대변해 주고 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듣고 제자들도 근심에 휩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은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점점 더 미궁에 빠집니다. 자신들이 예상했던 분이 아니고 다른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떼 내는 작업의 결과입니다. 주님 홀로 일하셔서 오늘날 우리가 혜택을 입습니다.
신앙생활 40년 하면서 신학도 공부하고 목회 생활도 30년 했는데 날이 갈수록 내가 지금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나태해서가 아니라 더욱 자책하면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게 주어질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정상입니다. 아주 건강한 것입니다.
이제 서서히 주님께 하청 받아 일하는 내 모습은 사라지고 주님만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제 주님께 이런 저런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입을 다물고 주님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만 가지는 깊이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이것 할까요, 저것 할까요?” 촐랑대며 까불지 말고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바라봐야 합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더라.’ 주님은 다 떨쳐내십니다. “제가 주님의 호위무사가 되어 끝까지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검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주님 하신 말씀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지요.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 대화하실 때 왜 청년이 제시하는 것으로 대화를 지속하지 않습니까? ‘십계명 지켰습니다.’라고 할 때 ‘제대로 지켰는지 따져보자.’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게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어요.
진작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으면 부자 청년은 지켰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 온 청년은 십계명 외에 더 추가된 계명을 주셨다면 그것마저 지켰을 것인데 처음에는 전혀 말씀하지 않은 계명을 이제 와서 새롭게 불쑥 제시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것이 꼭 지켜야 할 계명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해야 하는데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 청년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라고 했기에 새로운 것, 절대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추가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에게 구멍을 낼 수 없어요. 주님의 응시가 있을 때 구멍이 발생합니다. ‘응시’란 표현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지켜도 미진한 것이 계속 남아 있어요. 계속 남아 있으면 감시받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잉여’부분입니다.
내가 말씀을 온전히 지켰다 할지라도 뭔가 빠져나가는 잉여분이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다른 요소입니다. 이것은 ‘타인’인데,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십계명을 지켰는데 타인이 내가 지켰다는 것 외에 다른 계명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이것이 뭔가 하면 ‘주님의 응시’입니다. 쉽게 말하면 미지의 X입니다. 미지의 X로 인하여 초월적인 타인이 볼 때 나는 항상 미흡한 사람이 됩니다. 구멍 난 것처럼 미흡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바라볼 때 “영생의 문제는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네 영생 문제에 너는 손을 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능한 자여서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십니다. 이 주님의 작업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개입시키지도 않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4).” 부자 청년에게 주셨던 응시를 이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반응은 “듣고 심히 놀라”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제자들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오늘날 우리들도 오해하고 있지만)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개별적 구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 중 누가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이런 식으로.
20장에도 치맛바람이 불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 받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 것과 천국 가는 것은 달라요.
진짜 천국은 자기 구원을 포기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적은 구원을 포기한 자만 집단으로 구원 받습니다. 천국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들어가면 나중에 난리가 납니다. 누가 상급이 더 많은가 경쟁이 벌어집니다. 한쪽에서는 주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상급 경쟁이 벌어지고 ---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함과 상관없이 갑니다. 착한 사람은 천국 못갑니다. 나쁜 사람만 가요. 나쁜 남자, 나쁜 여자만 가요. 좋은 남자, 좋은 여자는 다 탈락합니다. 부자 청년이 착각을 하고, 제자들도 사적인 구원을 생각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갈까?’를 생각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은 천사들이 철저히 경비를 서기에 두 번 다시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우리가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만 살아야지 왜 내가 들어가 살려합니까? 그 사고방식 자체가 틀려먹은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행세가 있는데 어디를 감히 넘봅니까?
갈 수 없는 동네에 주님이 넣어 주십니다. 갈 수 없는데 특혜를 입어 들어갑니다. 공짜로 넣어 주십니다. 천국 가기 위해 시험치고 노력해서 들어가는 자는 없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다 떨어져 나갑니다. 이들은 율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천국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못 갔습니다. 세리, 창기, 이방인 백부장이 천국 갔습니다.
제자들도 아직은 멀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떨쳐냅니다.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지니라.’ 예수님의 밀어내심에 제자들이 근심되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구원은 예초에 인간에게는 할당 된 바가 없습니다. 인간이 허전하니까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려고 합니다.
메울 수 없는 공백을 신을 초빙해서 “신이 우리를 예정하사 구원했다.”고 우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예정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옵니다. 칼빈은 엄청나게 잘못된 해석을 했어요. 사적 구원론에 집착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예정해서 천국에 넣어준다’고 주장했어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예정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예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만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천국은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아들의 나라’라고 붙였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어찌하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 생각에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나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떨쳐내십니다. ‘너희들이 힘써서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면 너희들을 그곳으로 부를 게. 그 때에는 너희들이 얼마나 천국에 대해 오해했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 사실 전체를 성경에 기록해서 후대에 전해라.’고 해서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은 천국 못 간다.” 19장 26절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미 제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신 거예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면 하늘나라 갑니까?’ 정답은 간단합니다.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 6절에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애초부터 천국 가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문제는 나에게 맡겨라. 너희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의문이 생깁니다. ‘걱정 안 하고 그냥 살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주님이 지옥 가라고 하시면 우리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힘써서 지옥 갈 것을 천국으로 갈아 탈 재주가 없습니다. 지옥도 주님의 나라이고 천국도 주님의 나리인데 주인이 알아서 보내는 데로 가면 되지 왜 우리가 천국을 욕심냅니까? 그래서 주님은 단독으로 일하십니다. 계속 인간을 배재시킵니다.
“너희들을 그냥 지켜보고 있어. 성령이 오면 ‘아, 이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본바탕이 폭로됩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설교하면서 ‘실패하라.’고 했잖아요. 무엇을 해도 우리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실패하자.’ 이런 마음으로 살면 편합니다.
주님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실 때, 우리라면 이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 가기 힘들지만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 갈 수 있겠네요?’라고. 그러나 제자들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다고 해도 추상적인 관념보다 손에 잡히는 돈이 더 좋아요. 어쨌든 제자들은 계속 의문이 생겨 질문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통해 주님이 제자들에게 원하는 답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나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을 만해야 믿지요?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믿습니다.”라는 태도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시도는 했잖아요?” 라고 나온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고 하시면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절).”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33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질문했는데 불똥이 제자들에게 튀었어요.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괜히 주님께 영생에 대해 질문했다고 심각한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까요. 그 고생에 대해 주님이 격려해 주시고 복을 주실 것을 기대했는데, 날이 갈수록 주님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시고 자신들과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구 고집에 더 센지 경쟁하는 것 같아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6-27).”고 했어요.
천주교의 신부, 수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면, 결혼하지 않고 신부, 수녀가 됨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9장 12절의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이 말씀을 순종한다고 남자는 신부가 되고 여자는 수녀가 됩니다.
모든 것을 바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니까 큰 것을 얻기 위해서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결혼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어떤 여인이 수녀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송준기나 조인성이 청혼하면 자기의 결심을 고수할까 의심이 들어요.
남자 청년이 신부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예쁘고, 성격 좋고, 직장 좋고, 재벌 3세인 아가씨가 청혼하면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여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요? 이게 뭔가 하면, 모든 소유 속에 본인의 자존심과 미래의 꿈도 자기 소유에 포함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이 구절을 써서 액자를 만들어 방 안에 걸어놓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사람이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너는 이렇게 되었잖아!’라고 하면, ‘주님이 하셨다.’고 답변하겠지요.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자 청년이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줘야지요. 왜? 자기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장차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19, 20장을 보면 점점 예수님과 제자들이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 19장 28절을 보면 ‘너희가 어떤 짓을 해도 열 두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제가 16장을 보면서 말했는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제자들에게 12 보좌에 앉아 통치하게 하십니까? 제자들은 다 실패자요 못난 사람의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못난 자입니다.’ 목자를 치니 제자들도 다 흩어졌기 때문에 12지파를 다스릴 만한 충분한 자격자가 됩니다. 실패했다는 의미에서.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도 천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배신까지는 안 했고 짜증을 낸 우리는 능히 천국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의외로 저 높은 곳에 바라는 것이 아니고 저 낮은 곳에 바라야 한다는 것이 오늘도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술을 끊고 10년째 마시지 않다가 화가 나서 술을 한잔 했다면 약간 미끄러졌잖아요. 그러나 배신까지는 안 갔잖아요. 앞으로 여분의 죄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얼마나 느긋합니까?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100가지가 있다는데 죽기 전에 100가지 지을 죄를 생각해 보세요.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몰라요. 성도는 이런 넉넉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 안 짓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정신병자 되지 말고, ‘오늘은 이런 죄를 지었는데 내일은 또 무슨 죄를 지을까?’ 이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20장을 봅시다. 여기에 보면 자본주의 원리가 나옵니다. 노동한 대가만큼 얻는 것. 그것이 통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천국은 자본주의와 정 반대 지점에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는 받아야겠다는 것이 대세가 되어 있는 이 세속적인 풍토 속에서 천국을 생각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내가 노동해서 받은 대가인데 이 가치를 누가 무산시킬 수 있는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 와 같으니’ 라고 시작합니다. 천국은 개별 구원이 아닙니다. 천국은 천국 되게 하는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에 모든 사람이 공유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기능을 같이 나누게 됩니다. 그럼 천국의 기능이 뭔가?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고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가치를 만드신 세상에서 조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럼 뭘 했는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할 뿐이지 주님의 것은 전혀 없어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요6:38)’고 했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그리고 퇴근 시간 1시간 남기고 온 사람이 있었지요. 만약 자발적으로 퇴근 1시간 전에 왔다면 정말 싸가지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불러서 온 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할 일 없이 놀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놀고 있던 사람이니까 주인이 불러줄 때 주인이 준 품삯이 발생되었는데, 품삯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게 1데나리온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과의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입니다. 피로써만 구원 받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오직 예수님 피로써만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이 피는 예수님의 노동입니다. 예수님의 노동에서만 집단적으로 구원 받기 때문에 여기서 개인의 노동과 땀은 삭제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면 ‘이런 설교가 교인들의 열의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라고 물어요.
‘놀아도 구원 받고, 헌금 안 해도 구원 받고, 예배 참석 안 해도 구원 받는다면 교회 잘 돌아가겠네?’라고 비웃습니다. 이런 식으로 빈정대지 말고 교회 잘 돌아가는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믿는 사람입니다. 형광등 고장 났는데 고칠 사람 없어도 감사하고, 식사 당번이 결석해서 라면을 끓여 먹어도 감사하는 믿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교회지요.
교회에서 말썽이 일어나는 것이 뭔가 하면, 교회에서는 늘 봉사하는 자만 봉사합니다. 그 사람은 제일 먼저 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먼저 온 사람이 나중이 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우스운 일이 생깁니다. 전부 꾹 참고 있어요. 왜? 나중 된 자가 되기 싫어서.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교회 꼴좋다.”하고 불평을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경우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지상에서 미리 맛보는 천국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참아야 하는가? 나서고 싶은데 참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모두가 먼저 노동했더라도 오후 5시에 온 사람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1시간 일하고 하루(8시간) 품삯을 받았으니 오직 감사할 뿐이겠지요.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성령 안에서의 천국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미 천국이 왔어요. 왜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잖아요.
20장 26-2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실천한다고 교회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져요. 식당에서 목사님께 제일 상석에 앉으라고 권했는데 목사가 이 말씀 실천한다고 말석인 식당 입구에 앉았어요. 그러니까 더나드는 교인들이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상석에 앉아라고 하면 앉아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 겸손한 것 티낸다고 ‘내가 모범을 보여야지’라고 나오는데, 이게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교인들이 골프 치자고 하면 같이 골프 치면 되지 ‘나는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에 골프는 치지 않겠습니다.’ 왜 목사가 모범이 되어야 합니까? 주님은 어디가고?
주님을 믿어야지 목사를 믿습니까?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을 왜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고맙다고 받고 감사하면 됩니다. 겸손한 티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21장 18-19절입니다. 무화과나무 열매가 몇 월에 달립니까? 아직 열매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이 저주해 버립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 주님이 시장하시다고 때도 되지 않았는데 열매를 찾았어요. 때가 되지 않았기에 무화과나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저주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권성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주님 뜻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계약을 체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축복을 하든 저주를 하든 그대로 성취 될 뿐입니다.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성경을 알아도 소용없어요. 주님이 보내시는 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무화과나무가 주님의 저주로 말라버린 것을 보고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갑자기 소름이 돋습니다. 납득이 안 돼요. 만약 무화과나무가 우리라면 어쩌겠어요? 밤 10시가 넘어 식사가 끝났는데 갑자가 남편이 손님과 함께 들이닥쳐 밥상 차리라고 합니다. “반찬거리도 없고 밥도 없는데요.”라고 하니까 남편이 “당장 나가!” 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억울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는 잘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남아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이 남아 있음을 아시고 주께서는 무화과나무에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위해서 멸망당해야 할 민족입니다. 그게 그들의 역할입니다. 나빠서가 아닙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은 멸망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