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여름수련회 8강 (상징과 실체) 녹취 - 정석훈 목사
먼저 시간에 두 개의 시간 층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게 되면 예수님은 미래의 완료적 입장에서 세상을 다루고 계십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은 과거에서부터 차올라오고 미래로 향하는 입장에서, 미지의 것이 남아있는 입장에서 잘해보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미 잘해보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두 지점이 한 쪽은 미래에 서있고 다른 한 쪽은 현재에 서 있기 때문에 갭이 생깁니다. 오른 쪽이 미래고 거리를 둔 왼쪽이 현재라면 그 사이만큼 의견 일치가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의견 일치가 안 될 때 주님께서는 미래의 입장에서 계속 미사일을 쏴 대시면서 심판의 정당성을 남겨 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해야 하는가? 그 멸망의 이유를 알려고 사람들은 그들의 나쁜 짓 찾기에 급급합니다.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하면 이스라엘처럼 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나쁜 짓했던 사례들을 다 가져와도 그 나쁜 짓 때문에 이만큼 매를 더 맞아야 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분석해서 이야기 했지만 결국 누가 옳았습니까? 욥이 옳았고 욥의 친구들은 잘못된 겁니다. 욥은 욥의 친구들이 모르는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유일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는 유일한 민족임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 유일성의 내용은 곧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대표로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이 땅의 생로병사로 고생하는 모든 것은 주님의 정당한 조치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대표해서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서 인간은 구원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럼 앞의 인간은 모든 이스라엘이고 두 번째 인간은 이스라엘 속에 먼저 잠입을 시도하시는 인자가 됩니다. 그럼 인자는 무슨 근거로 멸망될 이스라엘에 들어오느냐? 인자가 들어오는 근거는 바로 다윗에게 맺어진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89편에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반드시 다윗 언약을 성취시킨다는 겁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에게 다윗 약속을 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닌 다윗 언약을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을 겹겹으로 그동안 이끌어 온 것입니다. 알갱이가 중요하고 껍데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갱이가 언약을 위하여 그동안 많은 이스라엘 역사라는 껍데기가 겹겹이 쌓여있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왕들이 그렇게 해도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멸망당해도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족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럼 이것은 누구 솜씨냐? 위대한 왕? 없었어요. 대단한 사람? 없었습니다. 그것은 누구 솜씨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까지 면면히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오신 주님의 솜씨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의 근거를 미리 대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3절입니다. “가라사대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이 말씀을 이방인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요. 다윗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 나옵니다. 그리스도 나옵니다. 주가 나옵니다. 이런 개념들은 이방 민족이나 단군의 자손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주라고 한다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이 뭐냐? 약속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약속 위반하면 그만이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과의 약속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했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범죄한다 해도 절대로 그 언약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패괴해도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여전히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기 언약 완성의 여정입니다. 약속을 던진 신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고, 언약의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을 던져놓고 자신이 회수하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주님께서 언약을 던진 만큼 세상 역사는 조금 더 진전해 가는 겁니다. 세상에 언약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포장하기 위해서 역사는 그만큼 더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이 마감되면 끝납니다. 끝났기 때문에 세상은 언약 따라서 옛날엔 물로, 이제는 불로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고 끊어지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있는데 그 증거를 찾으려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만 찾아야지 단군의 역사를 찾아봐야 무당의 역사밖에 안돼요. 단군이 무당이란 뜻이에요. 무당역사 찾아 봐야 무당만 나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는데 이방인들은 말을 해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께서 내 주에게” 주님은 몇 분입니까? 두 분이죠? 약속을 계획하시는 주님 따로 있고, 그 계획한 것을 지상에서 실행에 옮기는 주님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은 누구와 누구 사이의 언약입니까? 주님과 주님 사이의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은 제발 나대지 말고 빠져 달라는 겁니다. 인간은 빠져야 됩니다. 인간이 빠진다는 말은 인간의 선교, 헌금, 전도, 봉사, 희생 이런 것들도 의미 없이 다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 두 분이 알아서 하도록 우린 끼어들면 안 됩니다. ‘내가 아버지와 의논해서 모든 것을 끝낸다.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은 아버지가 증인이고 나도 증인이 된다.’ 둘 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질문 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22:45).” 이 질문을 바꿔 이야기하면, ‘너의 아들이 너의 주가 된다면 그것을 믿겠느냐?’ 하는 말과 같은 겁니다. 이순신이 전주이씨 입니까? 전주이씨라면, ‘이순신 장군이 네 자식이라면 어떻게 이순신 장군이 네 선조가 되겠는가?’ 라는 질문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진행하는 방법이 아니고, 긴 전봇대의 그림자처럼 미래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 창세기까지 뻗어 있는 겁니다. 그럼 모든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무엇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모형, 그림자, 상징, 표상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했는데, 이 말은 아담은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한 분을 상대로 해서 대들 수가 없습니다. 사투르누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 신. = 크로노스)라는 거인이 있는데 시간과 관련된 거인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자기 입으로 다 먹습니다. 고야의 작품을 보면 그런 그림이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간이 인간을 잡아먹을 때 아름다운 청춘이고 뭐고 간에 다 잡아먹어요. 그림에 보면 머리부터 잡아먹어요. 거기에 머리는 삼켜지고 다리만 가련하게 남아있는 그림입니다. 거인이 인간을 먹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시간의 모든 우리의 아름다운 것을 다 삼키고 잡아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이사야 40장 6-8절에 나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인생은 풀이요 그 한 때의 영광은 풀의 꽃 같아서 바람이 휙 불면 다 시들어버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필히 망해야 될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망해야 될 나라고, 망함으로써 그 포장지가 벗겨져 거기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이스라엘이 서서히 빛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44,000이고, 12지파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남아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들에게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동일한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릿돌 되시고 그들과 함께 있는 그것을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21장 42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22장 44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그 다음 46절을 보면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그 실체를 과거 쪽에서 당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말하느냐?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주를 위해서 앞에는 이스라엘이 있다고. 주관식 문제지만 간단한 문젭니다. 이스라엘은 왜 있습니까? 답변은 주의 그림자입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답하면 됩니다.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해서 있습니까?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통일되게 있습니다.’ 이렇게 답변하시면 됩니다. 답변만 잘하지 마시고 실생활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래에 선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미래에서 과거를 바라보고자 한다면 주님으로부터 그 안목을 수입해 와야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 미래에서 보는 안목을 제게 알려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기다려봐. 좀 더 기다려야 돼.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성령 올 때까지, 오순절 올 때까지 기다려!’ 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날이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고 진짜 이스라엘이 등장할 터인데 그들은 바로 오순절 날 성령이 오게 되면 등장한다.’고 하십니다.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안 망합니까? 네,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아까 제가 이스라엘을 뭐라 했습니까? 유일성이라 했죠. 이것이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교회도 똑같이 씁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유일성입니다. 하나란 말은 개인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 구원이 없으면 개인교회도 없습니다. 우리들끼리의 ‘우리교회’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있습니다. 지묘동에. 왜 있느냐? 망하라고 있습니다. 언제 망합니까? 매 번 망합니다. 항상 교회가 망해야 진짜 교회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보면 정말 하나밖에 없는 교회가 가려지게 돼 있습니다.
지난 번 설교 직전에 갑자기 에어컨 4대를 가동하다보니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찜통이 되었습니다. 더워지면 설교자가 신경 쓸 것이 정말 많습니다. 일단 더우면 성도들이 주무십니다. 주무시면 설교문맥이 연결이 안돼요. 그럼 그 사람이 깰 틈에 지나간 것을 다시 집어넣어 줘야 해요. 그래야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실패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윗이 주 되심을 언급하는 쪽에서 그렇습니다.
하나 된 그 교회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다 무너져야 합니다. 무너지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어요. 그들이 예수를 몰랐다는 겁니다. 상당히 억울하죠.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단독 행위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건 성령이 와야 알지 그게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멸망시키고 제자들에게는 성령이 오고, 그것은 무슨 특혜입니까? 주님의 답변은 ‘내 마음대로다.’ 주님 맘대로란 겁니다. 내가 사랑하기로 작정한 자에겐 특혜를 줄 충분히 그럴 만 한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이후에 나온 교회들은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이미 망한 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걸 보고 비웃거나 조롱할 수 없어요. 그들이 망했으면 우리도 당연히 망해야 돼요. 율법 지킨다고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우린 안 지킵니까? 그런데 그들은 망하고 우리는 망하지 않고 견뎌냅니까? 우리가 기댈 것은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잘 할게요.’ 이건 옛날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인데, 두 번 다시 교회에서 용납하면 안돼요. 날을 지키고 절기를 지켜요? 십일조를 드려요? 안식일을 지킵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서 탄식하면서 바울이 말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드냐?”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대체 어느 인간이 날과 절기를 지킨단 말이냐? 어느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킨단 말이냐? 도대체 넌 뭘 믿기에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냐? 내가 전한 복음이 헛되이 될까 염려스럽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방인들은 아무 것도 없이 성령 세례를 공짜로 받았어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기가 지켰던 율법이 죄인 줄 알면서 성령을 받았어요. 그게 교회에요.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른 두 개의 교회가 아닙니다. 둘 다 동일하게 집단 구원 받았어요. 그 중간에 있는 담은 오직 십자가로 헐어지고 십자가로 하나로 맺어진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에서 교회이야기 할 때 말씀하십니다. 몸의 지체는 여러 가지지만 머리는 하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예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실 때 어떻게 언약을 성취해서 완전히 허물어버리느냐? 22장 초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이야기하되 천국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천국은 ᷧ다. 천국은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붙들고 쳐다본다고 천국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쪽에서 어떤 기능이 작용해서 거기에 포섭이 되면 그 사람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이 어떤 기능을 하느냐?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고 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 받았으면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묘합니다. 날짜를 초청한 사람과 사전에 상의해서 정했으면 참석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요. ‘당연히 가야죠. 임금님.’ 그런데 한창 바쁠 때 초청장을 보냅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참석 못하는 변명을 늘어놓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능입니다.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더 귀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그런 인간이 들어가 봐야, 즉 임금님 아들 결혼식에 가봐야 자꾸 시계만 볼 겁니다. ‘소를 샀는데 지금쯤 차에서 내릴 텐데 .... 돈만 내고 갈까 ...’
누가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본인이 장가가는데 임금님이 초청장을 보냈어요. 본인 장가가는데 장가가지 않고 임금님 잔치에 갈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천국이라는 겁니다. 자기 장가간다는 그것이 천국에서는 변명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장가가는 것보다 임금님 아들 장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지금 임금님이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 ‘너무 합니다, 이건 너무합니다.’ 라고 나오겠죠. 그게 바로 기능이에요. 주께서 ‘너무합니다.’ 라는 소리 안하는 사람 데리고 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8절에 보면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니~’ 이 혼인잔치는 조폭 혼인 잔치도 아니고 잔치 참석 안했다고 거기에 대한 징벌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그러나 미래에서 바라보면 이것이 과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천국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자신들의 바쁜 일상 때문에 다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복은 저주를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는 또 심판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은 한쪽은 완전히 망했다고 보면 됩니다. 시소원리입니다.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은 반드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지옥 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오라한대...’ 그럼 진작부터 사거리로 가지. 뭣 하러 오지도 않을 자을 부르시고, 오히려 약만 실컷 올리기 위해 사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오게 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할 이유를 억지로라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21장 28절~31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결과적으로 보면 미래적 입장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비의 뜻대로 하였는데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둘째 아들에게 물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뉘우침이란 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뉘우침이 바로 천국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반드시 뉘우침을 동반해서 천국에 가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를 봅시다. 13절입니다. “바깥 어두운데 내어 던지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곳은 지옥 같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참석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참석한 사람 외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임금의 혼인 잔치에 참석 못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구분 짓습니다. 예를 들면 축구경기에서 골대 근처에서 반칙을 해서 프리킥을 합니다. 그때 방어하는 쪽에서는 스크린을 짭니다. 이때 방어하는 쪽만 스크린 짠 곳에 서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팀원들도 그 속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수비하는 선수들이 공을 누가 어떻게 차는지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킥을 하는 순간 스크린 속에 있던 선수 중 약속된 선수가 그 자리를 빠져 나오면 그 곳에 틈이 생겨 그곳으로 공을 차서 골을 넣습니다. 이처럼 가짜 이스라엘이 스크린을 짭니다. 이들이 싹 빠지고 나면 진짜 구원받는 자들이 그때 윤곽을 드러냅니다. ‘우리에게 올 것이 아닌 천국이 우리에게 공짜로 공통적으로 왔네. 너나 나나 잘한 것이 없는데 동일한 기준에 의해서 동일한 은혜를 받네.’ 이것이 바로 천국 만들기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혼인잔치 때가 되면 쏙 빠집니다. 장가간다고 빠지고, 소를 사야 한다고, 밭을 사야 한다고, 상업 차 쏙 빠지는 겁니다. 그럴 때 엉겁결에 남아 있는 자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방인들입니다. 원래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빠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아브라함 자손도 아닌데 아브라함 자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경주이씨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의 유일성이 됩니다.
22장에서는 혼인잔치 문제, 세금문제, 부활문제, 무슨 계명이 가장 큰가 하는 문제를 마지막 전봇대를 꼽고 미래의 관점에서 보십니다. 17절입니다. 세금을 누구에게 내느냐의 문제를 다룹니다. 세금은 아무나에게 내도 괜찮다는 것이 미래의 관점입니다. 굉장히 간단합니다. 세금 낼까요, 말까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이 미래의 관점입니다. 세금문제가 주님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마음대로 해. 내려면 내고 내기 싫으면 내지 마.’ 이것이 주님의 답변입니다. 관심사를 하나님께 두어야지 세금 문제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세금 내야 합니까? 내고 싶으면 내고 내기 싫으면 내지 마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내고 싶지 않습니다. 수입이 나가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낼만한 소득이 없으니 낼 수 없을 겁니다.
마지막, 미래에서 보게 되면 우리의 고민거리, 걱정거리가 걱정거리도 아니고 고민거리도 아니고 오히려 천국을 가로막는 스크린 같은 것들밖에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몇 위 하겠습니까?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 따겠습니까? 몇 등 하든 말든, 메달 따든 말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삼성라이온스가 9등인데 꼴찌 하든 말든 무슨 의미 있습니까? 도박해서 선수가 퇴출되든 말든, 한화가 5등으로 올라가든, 두산이 일등 하든 말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나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야구가 종교입니다. 유럽은 축구가 종교입니다. 삼만, 사만 명이 모입니다. 브라질은 칠만 명 모입니다. 교회는 나가지 않고 축구장에, 야구장에 갑니다.
주님께서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시면 나는 티켓 끊어 두었기에 축구장에 가야 된다고 할 겁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메시 한 골 넣으라고 말입니다. 은퇴하지 않게 해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야구 중계방송을 보면 아가씨들이 두 손 모아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지금 동점인데 제발 안타 쳐서 역전하게 해 달라고, 아니면 제발 실점 하지 말로 경기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왜 기도합니까? 마지막에는 야구도 없고 축구도 없고,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없어질 것을 위해 기도합니까? 그저 과정이 재미있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마태복음 22장 23절 이하에서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땅에서 여자가 남자 일곱과 결혼했는데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국도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천국도 부활도 없지만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부활의 세계에 가서 집안싸움 일어날 때 해결책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일곱 명의 남자가 모두 꽃을 든 남자가 되어 한 여자에게 ‘여보’하고 달려들면 여자가 어느 꽃은 선택해야 합니까? ‘이것이 난처한 일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미래를 몰라서 그렇다. 부활의 세계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 이 소리를 들은 사두개인들이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천국은 정말 재미없겠다. 권태도 그런 극단적인 권태가 어디 있느냐?’ 그럼 천국에서 뭐합니까? 당구, 바둑판 필요 없습니다. 시간도 남아도는 천국에서 영원히 뭐 합니까? 그래서 니체는 말했습니다. ‘천국은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없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천국은 가기 싫다고 안 가는 곳이 아니요,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넣어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을 살면 누적된 체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십자가와 함께 죽을 때 한 때의 기분으로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엇이 대신 채워집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당하신 모든 고생과 아픔과 서러움이 성도의 마음속에 성령에 의해서 다 채워집니다. 주님만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복음 때문에 수난 받고 밉상 받습니다. 그것이 채워지면서 천국을 가면 두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시는 의미가 생깁니다. ‘내 신부로 산다고 고생 많이 했지?’ 라고 하면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 때 그 귀인 내가 보냈다. 곡성 영화에서처럼. 그 때 벌벌 떨었지? 네가 믿음 있는지 내가 테스터 한 것이야.’ 부활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주께서 적합하게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을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해 유도하신 일입니다.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재미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있는 자는 돈이 없는 것처럼 해라’고 합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30-31).”
결국 세상 형적은 돈이고 아내고 남편이고 간에 다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것도 다 한 때라는 말입니다. 한 때라는 말은 그것이 너에게 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려주는 재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무대장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모습은 ‘연극이 끝난 뒤에 객석에 남아 조명도 꺼지고, 한때 꿈이었구나! 아무것도 아니네.’ 그 현장에 그 모든 이벤트를 계획하신 분, 주님이 계시고 그 옆에서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마태복음 23장18-22절입니다.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따라 하나님과 유일하게 소통하고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는 내 이름으로 구원되지 너희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제단과 제물은 나처럼 구원되는 통로는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쓸데없는 짓거리를 했다는 말입니다.
23장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파하겠느냐?”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15장 22절에 나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동안 저들은 이것이 죄다, 아니다를 본인이 결정했습니다. 본인이 결정할 때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면 죄를 짓더라도 다음에는 얼마든지 안 지을 수 있는 사항만 죄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지은 죄지만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는 자랑거리를 만들 수 있고 생산해 낼 수 있는 여지를 남깁니다. 항상 그렇게 합니다. ‘잘못 했습니다.’ 라는 말은 그 정도는 다음에는 잘만하면 그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서 회개하고 반성하는 겁니다. 정말 두 번 다시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 회개하거나 반성하는 항목에서 빼버립니다.
죄는 아무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유사 죄만 지어놓고 부흥회 때 수요일 밤에 단체로 통회하고 랄랄랄라 하고 있습니다. 그것? 연출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 해보면 요령이 늘어요. 죄는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지옥가면서 왜 지옥 가는지를 모릅니다. 지옥 간 후 알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그냥 보냈구나.’ 이런 어리석은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십자가도 동등합니다. 라인이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어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합니까? 그러면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당신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지옥가야 됩니다. 주님 때문에 지옥 갑니다. 그만한 권리는 우리 예수님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미래에 다리를 걸치고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가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것이 피의 족보입니다. 이 피 안에는 억울함이 들어 있습니다. 이 피는 억울한 피 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이 억울함을 당하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함이 닥쳐도 억울한 줄도 모릅니다. 당연한 조치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가인에게 죽고 난 뒤에 가인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벨을 죽인 가인은 죽이지 않습니다. 그 자손들이 대대로 번창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죽은 아벨만 손해가 아닙니까?’ 라고 하겠지만 원래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긴 그림자입니다. 그러니 이 귀한 보석같은 노선 주위에 다른 많은 것들이 거푸집처럼 형성되어 덮어 버리는데 이것을 나중에 물로써, 불로써 심판해 버립니다.
아벨이 피를 흘렸다는 말은 아벨처럼 예수님이 피로써 오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불교와 복음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불교는 마지막이 자기 구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나 성당이나 모두가 어떻습니까? 불교와 동급입니다. 노골적으로 목사들이 중을 크리스마스 날 초청해서 함께 합니다. 서로 경우 바른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가 조용한데 그 앞에 있는 아미사 절에서는 크리스마스 날 난리입니다. ‘축 성탄절’이라고 간판을 세웁니다. 그러면 그 못지않게 저쪽 성당에 가보면 ‘축 부처님 오신 날’을 세웁니다. 이것이 도대체 뭐하는 짓들인지 둘 다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만 영원히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고객만족입니다. 고객이 왕이잖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소득이 있으니 고객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탓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거푸집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아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자기 구원만 생각하는 남성중심의 세계가 확산되어 있습니다. 더럽고 치사한 정글 같은 그런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성중심의 세계가 팍팍 티가 난다는 것은 주님께서 배후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이 땅에서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외롭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가치를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심보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울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 지시 받기 바쁜데 그럴 여가 없습니다.
37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르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미래에 서서 보는 안목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우리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