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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씨뿌림의 비유 1502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25. 14:32
2015-02-28 01:59:36조회 : 1156         
씨뿌림의 비유 152027 이름 : 이근호 (IP:119.18.8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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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18.♡.138.177)15-03-11 22:40 
광주 강의(2015. 2. 27) 12-1

마가복음 4장 3절에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라고 되어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천국에 대한 비유’라고 했어요.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는 것과 구원이 관계 있습니까?

‘천국은 저기 있고, 너희는 여기 있으니까 이렇게 하면 천국에 간다.’라는 식으로 정확하게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피곤하냐? 그렇다면 비타 500을 먹으라.” 이렇게 하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목적이 있고, 목적에 이르는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면 굉장히 간편하지요. 

‘씨 뿌리는 비유, 농사짓는 이야기를 주님이 왜 하시는가? 별 소용도 없는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시고 그걸 거부해 버립니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여기 있고, 천국은 저기 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것인데, 주님 대답은 ‘저 천국도 가짜고 너도 가짜다.’라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가짜고, 세상살이도 가짜고, 있다고 하는 것도 나중에 사라질 것들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있으면서 천국을 구상하고, 그 천국에 가겠다는 구상도 일시적인 현상이지요. 그저 잠에서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그만인 꿈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 인간들이 이해하는 천국과 전혀 다르기에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천국 비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칙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비관계. 2) 무. 3) 주체. 4) 하나님. 여기 순서를 보면 하나님이 언제 등장합니까? 하나님이 등장하려면 비관계, 무, 주체를 거친 후에 등장하십니다. ‘비관계’란 관계없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아예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사람들이 4명 있다고 합시다. 이 중에 내 동창생이 있다면 이것은 ‘관계’죠. 그러면 동창생이 아닌 사람들은 ‘무’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들은 동창생이 아니니까 모르는 사이죠.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이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관계가 무관계(관계없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비관계’는 뭔가 하면, 안다는 것도 아는 것이 아니라면 관계없다는 것도 관계없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 집사님 집에 있는 [비타 500]을 내가 대구 있을 때는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지요. 그러면 이것이 있더라도 나에게는 ‘무관계’가 아니고 ‘비관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오니까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나는 너희를 구원한다.” 이것이 아니고, 주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에게 이를 때 비로소 주가 원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찾기 전에는 우리는 주님과의 ‘비관계’ 속에 있는 거예요. ‘무관계’가 아닙니다. 아예 관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태란 말이지요.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끊어졌다는 것은 ‘나는 다른 사람은 아는데 주님은 몰랐다.’ 이런 경우에는 ‘관계있다, 관계없다’가 성립 되는데, ‘비관계’가 되면 ‘나는 저 사람을 안다.’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은 이런 거야. 천국은 이런 거야. 저 사람은 내 동창생이야.’ 이것을 내가 일방적으로 말했을 뿐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어쨌든 이 ‘비관계’는 2단계 ‘무관계’에서 밝혀집니다. ‘무’는 없다는 것인데, 없다는 말은 없다는 것이 나타나야 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은 없는데서 있게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비관계가 아니고 관계, 혹은 무관계 속에서의 무에서 유는 신학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지요?” “없는데서 있게 했습니다.” 이게 엉터리입니다. 이게 왜 틀렸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없던 곳에서 현재는 있게 되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있어도 내가 스스로 있다고 인정한 것이지 주님이 나타나서 “네가 여기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손에 만져지니까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나를 규정할 때 하는 짓입니다. 화장실 밖에서 노크를 할 때 안에서도 노크를 하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신호지요. 그 때는 노크 소리를 듣고 사람이 있다고 판단하잖아요.

주님이 노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왜냐? 주님이 늘 노크를 해도 우리는 바람소리인지 천둥소린지 몰라요. 그러니 주님께서 의미 있게 노크하는 순간이 있어요.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울에게 주님이 노크를 했을 때, 다른 사람은 ‘우레가 쳤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그 때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런 대화는 주님과 사울간에만 오고갔을 뿐 사울과 동행한 사람은 전혀 몰랐습니다. 사울은 그 이전에는 주님과 비관계에 있었던 거예요. 관계라는 말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그 때부터 사울이 한 모든 행동이 주님을 핍박하는 관계로 주님 쪽에서 그 관계를 의도적으로 형성시키고 만들어낸 겁니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여자 쪽에서 먼저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 받기 전에는 교회 가서 성경을 보니까 믿지 않는 남편과는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서 남편과 이혼하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자기가 여기 있고 주님이 저기 계시니까(관계지요) 내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내 남편은 무관계로 내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저 남편을 왜 나에게 붙여 주셨을까? 불신 남편을 나에게 붙여주신 것도 하나님의 관계성 때문이구나.’라고 깨달아지지요. 그 때 비로소 그 전의 상태는 비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지.’ 이것은 비관계에 있는 겁니다. 아무리 믿어도 천국 못가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접근해서 나를 천국 보내려는 모든 시도는 복음이 아닌 환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을 벌려 찾아오고, 찾아오심을 내가 느낄 때 비로소 주님과 나는 관계에 돌입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관계가 아니고 비관계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라고 여기는데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내 쪽에서 하는 모든 것은 비관계고, 주님 쪽에서 조치하는 모든 것이 관계가 되어 우리가 일방적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 있으니까 누가 나를 욕하면 화나고, 누가 성령 받아서 천국 간다고 하면 나도 천국 가고 싶고, 이 모든 출발점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말이 맞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서 있을 때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면서 있으니까 이것을 데카르트는 진리로 봤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언어가 발달합니다. 언어, 문장, 대인관계, 교회 다니기, 하나님 믿기 등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없다.’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설정한 관계 속에 천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지요.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만큼 힘들다.’고 할 때, 제자들이 묻기를 ‘그러면 누가 천국 갑니까?’라고 했어요. 예수님 입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를 주와 나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인정하기 위해 채워 넣는 겁니다. 이 자체가 반칙이죠.

채우지 마세요. 그냥 막 사세요. 듣고 잊어버려야 해요. 왜냐? 우리는 듣고 잊어버려도 주님께서 관계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지요. 마치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처럼 뒤늦게 느껴진다니까요. 뒤늦게 느껴지고, 어떤 때는 순간순간 느껴지고.

‘내가 왜 있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아니 내가 왜 있어야 하지? 없어도 되잖아! 그런데 왜 있지? 사는 것이 힘드니까 죽어버릴까?’ 스마트폰 조작하는 것이 괴로우니까 투신자살할까요? 처리를 해도 본인이 자살해서 처리하려고 해요. 처리하지 마세요. 그래서 자살이 죄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자살한 목사가 생각나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주의 말씀을 오해해서 그래요. 주의 말씀은 우리의 있음을 기정사실로 하지 않습니다. 가수 전영록이 불렀던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 필요하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이런 게 있어요. 내가 나를 지워도 나는 있어요. 그러나 내가 안 지워도 나는 없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주관할 수 없어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이 하나님 계신 거예요. 몰론 내가 하나님이란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있다면 나에 대해서 관여하지 맙시다. 이 세상 모든 일에 주제넘게 관여하지 맙시다.

관여한다는 자체가 수상해요. 주께서 말씀 주시는 것은 ‘가만히 있어! 관여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처럼. 이런 말씀이 사무엘상 12장 16절에도 나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설치면 됩니다. 어떻게 설치는가? 막 설치면 돼요. 막 설치면서 가만히 있는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설침도 의미를 두지 마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이런 식으로 사셨습니다. “아버지여, 다음에는 뭘 할까요?” 아버지께서 차려놓으신 밥상입니다. 다음에 어느 반찬을 먹을까요?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그것은 아버지께서 일을 만들어요. 시간은 채우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지 말고 본인이 뭔가 움직이면 움직이기 전에 생각했던 시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간이 나와요. 우리는 늘 시간을 품고 있고 시간을 토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해서 보내는 시간과 교사로 있으면서 아이들과 보냈던 시간이 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달력으로는 같은 시간이지만 본인이게는 같은 시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시간은 수천만 개가 됩니다. 다 다른 시간입니다. 1시간이다. 이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이고, 시간은 행동에 따라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져요.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는 한가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시간이 창조되고 있습니다. 감이 그냥 있을 때와 깎아 먹을 때는 달라요. 깎으면서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졌어요. “감이 참 맛있다.” 뭔가 새로운 창조가 만들어진 거예요. 나중에 오늘 감 먹은 것을 회상할 수도 있고 --

어쨌든 간에 새로움이 나왔잖아요. 그러니 시간을 때우려 하지 말고, 내 시간을 만들어 가면 됩니다. 그래서 ‘시간은 의식이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이 자기 있음을 근거로 해서 구원 받고, 복음 받으려 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가만히 있어! 이제부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새로운 시간을 창조할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에 가면 그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지요?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모든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천국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만든 내 세계, 내 시간 밖에 모르는 인간이기에 인간들이 천국 못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천국을 생각해도 그 천국은 주님의 천국이 아니고 나의 천국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 내가 생각하고 나의 현실만 아는데 그런 자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준비된 것이 2, 3, 4번째 단계입니다.

첫 번째는 아시겠지요? 인간은 자기 존재에서 관계를 만드는데 주님이 오게 되면 그 관계는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관계다. “주님이여, 헌금을 많이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나에게서 출발한 관계이기에 안 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꼴 보기 싫기에 저 사람과 관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멀리해서 그것으로 무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한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나는 네 얼굴은 절대 안 보겠다.”고 해도 주께서 상황을 만드시면 10년 뒤에 그가 나의 생명의 은인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막 살면 돼요. 그러면 주께서 알아서 조립해 주십니다. 믿으세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주님의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 미국에 계시는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이분은 전화만 하면 30분 이상 통화를 해요. 여자 선교사인데 전화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설교는 다 이해가 되는데 한 가지가 잘 납득이 안 됩니다.”라고 해요. 그 한 가지가 뭔가 하면, ‘어떤 선교사 말을 들으면 이슬람 사람에게 잡히면 36번 찔러서 죽인다는데 나는 36번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실수하면 되잖아요.”라고 했어요. 실패하면 됩니다. 믿음에 실패하면 되잖아요. 그만한 믿음 없습니까? “예, 이제부터 예수 안 믿고 알라 신 믿을 게요.” 이렇게 실패하면 되잖아요. 왜 실패 안 하려고 합니까?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예수님이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셨는데--

주께서 이미 벌이신 일이 우리의 실수 때문에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동안 뭘 믿었습니까?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도 인간은 믿음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사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피 제사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이제 해결됐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실수해도 됩니다.’ 이 한마디가 오늘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실수 안 한 적이 있던가요? 만약 전임자가 교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는데 내가 후임자로 간다면 나는 참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왜 교실을 이 지정으로 만들어놓고 갔냐?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지 마라.’고 따졌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너무 경솔했나? 혹시 목소리를 너무 높여서 말을 했나?’ 또 되돌아보겠지요.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늘 실수합니다. 목소리 높인 것만 실수가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실수입니다. 인생은 출발부터 끝까지 실수의 연속입니다. 왜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실수입니다.

주께서 이것을 아시고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거예요. 왜 씨를 뿌립니까? 왜 주님이 일방적으로 씨를 뿌리냔 말이지요. 천국을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으로 천국을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천국을 만드시는지를 알면 됩니다.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갑시다. 무(없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는데 없을 때가 있다는 식의 무가 아닙니다. 있는 인간이 무를 생각하면 그 무(없음)는 있음에 포함이 됩니다. 이게 바로 불교의 한계요 실수입니다. 불교는 자아가 있으면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자아를 없애려고 했는데 자아가 없어지지를 않아요.

있음이 생각하는 없음은 넓은 의미의 있음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없음은 있음의 반대 명제라고 합니다. 있음과 없음이 짝을 이루는 거지요. 있다고 할 때는 반드시 없음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있음이란 말 속에는 반드시 없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없음은 있음 안에 들어있는 없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짜 없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없는데서 만들어내는 것, 말씀으로 창조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의사에게 환자가 찾아왔는데 그 환자가 기침을 해요. 이 기침을 증상이라고 하지요. 이마를 만져보니 열도 납니다. 열도 증상이고 또는 징후라고 이야기합니다. “감기에 걸렸네요.” 라고 진단을 합니다.

환자가 묻습니다. “감기가 왜 걸렸지요?” 의사가 하는 말이 “당신이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식사도 제 때 못하고 무리하다보니 면역력이 저하되어 바이러스가 침투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그 말을 듣고 가면 되는데 또 묻습니다. “바이러스는 왜 있지요?” “그것은 진화론적으로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약 먹으면 됩니다.”라고 하지요.

무엇을 설명할 때 항상 있음은 있음을 가지고 설명해야 되고, 그 있음은 또 다른 있음으로 설명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시기 전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또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 이런 의문이 생겨요. 따라서 진짜 없음이란 있음으로 아무리 해명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바로 무(없음)가 돼요.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 표현하면 ‘죄’입니다.

왜? 설명을 못하니까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니까 죄가 됩니다.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몰라요.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은 “이발소가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그럼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 “이발소 옆에 있습니다.” 이런 말과 같아요. 이런 대답은 하나마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들을 그 말을 들으면서 해석의 한계를 가져요.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이 안 되는 한계를 가져야 돼요. 첫 번째는 뭔가 하면, 인간은 자기와 얽힌 가상적 현실로 하나님, 천국을 이해하다가 주님이 오시면 그 모든 것이 엉터리인 것이 드러나고. 두 번째는 주의 말씀을 해석하려 하는데 아무리 해석해도 안 돼요. 주춧돌이 하나 모자라서 옆에 것을 뽑아 빈자리를 메웠는데, 또 옆에 빈자리가 생기는 식입니다. 세 번째로, 해명이 안 되면서 마지막 도달되는 지점이 있어요. 유에서 유로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결론은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여기에서 주체가 나와요.

주님 말씀은 인간의 주체가 마귀라는 사실을 들춰냅니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가 주인이라고 유발시켰던 그 작업현장(에덴동산의 선악과 따먹은 그 현장) ---. 선악과 따먹고 난 후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뭡니까? 자신의 벌거벗음을 가렸지요. 벌거벗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그 전에는 벌거벗었다는 것 자체가 없지요.

자아가 두 개가 된 거예요. 벌거벗은 자아와 안 벌거벗은 자아 두 개로 나눠져 버린 거예요. 이것을 고칠 병원이 없습니다. 자아가 두 개 되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니 창피한 거예요. 그러니까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나에게 늘 쫓깁니다. 사람이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이 누구한테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고기 먹고 싶다는 부모한테 효도한다고 가난한 집 아들이 공동묘지에 가서 시체의 다리를 가지고 오는데, 뒤에서 따라오면서 “내 다리 내놔라!”고 합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자기 의’가 따라온다고 합니다. “네가 그런 인간 아니었잖아?”

오늘 낮에 버스타고 오는데 뉴스에서, 화성에서 74세 동생이 82세 된 형을 엽총으로 살해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술 먹고 돈 내놓으라고 합니다. 엽총 팔아서 술 먹으면 안 되나? 엽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냥하러 다녔다는 말이고, 사냥을 한다면 4륜구동 차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고, 한 때는 돈도 좀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그 사람이 엽총으로 경찰과 형과 형수를 죽이고 자살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그 사람 속의 마귀가 그들을 죽인 거예요.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돈 없는 인간이 아니야. 너는 돈 없으면 안 돼.”라고 하면서 쫓아온 거예요. “너는 돈을 쓰면서 사냥도 하고 즐겁게 살 사람인데 돈 없어 술이나 마시고 비참하게 살 인간이 아니야.” 이게 계속 따라온 거예요.

모든 사람이 자아가 두 개입니다. 이건 고질병입니다. 평생 이 병을 못 고칩니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들 모두 정신병자입니다. “아이고 영감, 당신은 죽어서 차가운 흙속에서 자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 자네. 잠을 못자겠다.” 이게 제 정신입니까?

모든 사람은 다 정신병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죠. 다른 사람은 자아가 두 개인데 예수님은 하나거든요. 때로는 예수님도 두 개인 것 같기도 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지요.

무(없음)란 한계를 말해요. 이게 전혀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 갑자기 벌거벗었다는 것이 부끄러움으로 느껴졌는가? 마귀가 만든 자아가 따로 있고 주님 주신 자아가 따로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만든 자아를 내가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마귀가 만들어준 자아를 나의 자아로 삼는 겁니다. IS 같아요. 부모 버리고 사람 죽이는 게임을 하겠다고 이슬람 지역으로 갑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면 인간에게 예수님 말씀은 전혀 해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체’라는 겁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미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아를 잊어버렸지요. 그래서 잊어버린 나의 자리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몰론 성도에게만. 예수님이 등장하면 마귀가 만든 자아가 극구 예수님을 핍박하지요.

이게 바로 네 번째 나타나신 주님입니다. 주님이 나의 자리에 들어오면 여기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는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매일 반복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마귀의 죽음이 장착이 되어 있어요. 대구(생선) 뱃속에 알이 굉장히 많아요. 그 알 하나하나가 나중에 다 대구가 되겠지요.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하면 144,000 주님이 구원할 자기 알들이 있는 거예요. 그 알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한꺼번에 부활했잖아요.

부활했으니까 그 부활을 우리한테 주면 나의 악마적인 것은 그 순간 십자가에 죽고 주님의 것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지요. 주님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방법, 십자가 사건으로 확정지었어요. 따라서 주의 모든 말씀은 이 절차를 말씀에다 담는 겁니다. 담아서 그것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거지요.

3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했는데,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왜? 자기 자신도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마귀가 갖고 놀라고 준 가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자기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만 인정해요. 그게 바로 가짜라는 뜻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 신은 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 자매, 모친이다.’고 했기에 형제, 자매, 모친은 주님이 말씀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멀리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형제, 자매여!”라고 하지요. 자매, 형제, 모친은 비관계 상태를 만들어서 그 비관계를 만든 주님이 관계성을 가지고 ‘내가 부르던 자매는 자매가 아니고 내가 만든 형제는 형제가 아니구나. 교회에서 은근히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관계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나의 악마적인 주체성이 파악이 되고, 그 다음 그 주체성에서 살해당하고, 밉상 받고, 핍박 받으신 그 주님이 도리어 부활의 능력으로 날마다 우리의 주체를 죽일 때, 그 때 비로소 성령 안에서 주와 연합이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 장로님이 어느 날 제게 질문을 했어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연합이 뭡니까?”라고. 연합은 존재와 존재의 결합이 아니고 사건입니다. 존재로 보면 안 되고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이 사건은 말씀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죠. 성경책 속에 문자로 갇혀있는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이 날아다니면서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거지요. 왜냐하면 말씀이 주도권을 갖고 있으니까요. 말씀이 말씀을 드러내는 대로 우리가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뒤돌아보면서 ‘나는 못 지킨 말씀을 주께서 지켜서 성도되게 했구나.’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지요.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1, 2, 3, 4가 반복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4장부터 주님 뜻대로 형제, 자매, 모친을 만들어 냅니다. 만들어내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는 우리가 지켜서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뜻대로 나를 형제, 자매로 만들어 놓고 아버지께 뜻대로 했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덩달아 혜택을 입은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우리의 연합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3. 11. 08:37 녹취 마침)

 서경수 (IP:118.♡.140.196)15-03-20 17:16 
광주 강의(2015. 2. 27) 12-2

주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셨을 것이고, 우리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그 말씀을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생각하는 주체에 문제성이 있음을 알리는 방법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3절에 보면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라고 했습니다. 길 가에 떨어졌으니까 이것은 헛수고 한 거잖아요. 우리 같으면 “아이고, 아까워라. 내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네.” 헛수고처럼 보일 때 그만큼 우리는 헛수고를 싫어하는 자아를 가지고 평소에 살았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그래서 우리가 문제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이야기가 “너는 왜 헛수고 하는 것을 싫어하느냐?”고 우리에게 말씀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씨가 길 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었다. 너도 그렇게 살아볼래?” 라고 하시면, 우리는 “미쳤습니까? 그렇게 살게.”라고 답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왜 문제가 없는가 하면 말씀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은 뭐냐 하면, 길 가에 씨를 뿌리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새들이 와서 쪼아 먹는데 그것이 제대로 일이 성사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만으로도 씨 뿌리는 비유의 내용이 기쁘고 즐겁지요? ‘망해도 이게 성공이구나!’를 알 때 이것이 정말 기쁜 소식이잖아요. 어제 법조계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지워지는 거예요.

늙은 남자와 결혼한 젊은 여자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남편은 아직 오지 않았고 여자가 먼저 미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프린스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목사 한 사람이 그 여자가 처녀인줄 알고 관계를 해서 딸을 낳았는데 뒤늦게 미국으로 온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복수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로 변장해서 목사를 괴롭힙니다. 상담을 하는데 사실을 그 자체가 복수입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복음적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했어요. 불신 그 자체가 징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벌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믿는 것 자체가 벌의 시작이에요. 수업시간에 공부 안 하니까 “야, 너는 왜 책을 보지 않고 엉뚱한 짓하고 있니?” “저는 공부하기 싫어요.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운동장에 가서 축구해라.”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그것이 그 학생에게 내려진 벌이에요.

성경을 보면 예수 안 믿는 것이 벌이에요. 예수 안 믿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기 위해서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해야 했어요. 하여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달라요. 때로는 주님 말씀과는 멀어져서 돈을 잘 벌면서 재미나게 살 때가 있지요. 그것이 징벌입니다. 말씀에 위반되는 자체가 징벌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주여, 제가 요즘 교회도 안 가고, 말씀도 안 읽고 이러다가는 벌을 받을 텐데 두렵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벌 안 옵니다. 왜? 이미 그런 삶 자체가 벌입니다. 예수님 안 믿으면 벌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도에게는 벌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어요. 그런데 저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징계 받는 거예요.

마귀적 발상이 잠시 침입했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 했으니까 벌 받을 거야.”라는 생각 자체가 불신의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라는 책을 보면, 피를 잉크로 사용하고 몸체를 용지로 사용해서 지은 죄를 온 몸에 기록한 거예요. 그 책을 보면서 생각난 것이 요한복음 8장 이야기였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사람들에게 끌려와 예수님 앞에 섰고, 예수님은 땅바닥에 뭔가 글씨를 섰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니까 사람들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왜냐? 율법을 어기면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저주 받을 상황에 처한 인간이 간음한 여인을 벌할 입장이 아니었지요.

불신자는 남을 욕할 처지가 아닙니다. 복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정죄해요? 그건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마귀는 이미 자신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마음껏 정죄합니다. ‘나만 당할 수 없다. 같이 당하자.’해서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으라고 유혹해서 같이 죽자고 나왔지요.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길 가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농부가 헛수고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되묻습니다. “너희들 보기에는 씨가 길 가에 떨어져 새들(마귀)이 와서 쪼아 먹는 이것이 실패로 보이냐? 실패로 보인다면 너희들 자체가 실패다.”

이들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가 아니고 형제, 자매, 모친이 아닙니다. 만약 주님이 그들을 형제, 자매, 모친으로 만든다면 농부가 길 가에 씨를 뿌리는 이유에 대해서 박수치면서 동감할 것입니다. “주님, 참 잘 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솜씨에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될 거예요.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실수했다, 실패했다’는 말 자체가 자기 분수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었다.’고 했는데, 씨를 길가에 뿌리지 않았으면 새들이 등장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그것이 실패입니다. 지금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죄인이 등장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본인이 그냥 살아도 죄인인데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죄를 짓고 있어요.

라캉이 이런 소리를 했어요. “‘너희들이 믿는 척하지 마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신앙도 없으면서 믿는 척하지 말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불신이 신앙을 만들어 낸다.”고 했어요. 내가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불신의 궁극적 모습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앙 앞에 ‘내가’를 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말하려면 신앙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신앙 내용을 다 설명하면 이것은 신앙이 아니고 지식이 돼요. 신앙이란 내가 설명할 수 없어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이 신앙을 설명해야 되는데 설명하는 순간 나는 내용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가 믿는 것을 포기 못하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예수를 말해도 그것은 자기 설명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을 하나님은 신앙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불신이 불신 아닌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를 신앙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불신자란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단, 나를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주부가 음식을 만들 때 내가 음식을 만듭니까, ‘음식 만들어야지.’만 생각합니까? 내가 안 들어가지요. ‘둘째가 배고파하는데 빨리 잡채를 만들어줘야지.’ 이것만 생각하지, ‘지금 내가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잖아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누가 부엌에서 소란을 떨고 있나?”라고 할 때, “어머니, 접니다.”라고 할 때 내가 나오는 거예요. 선생님이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을 하면서 아이들 반응을 살피며 수업을 진행할 때는 본인 생각을 못해요. 그러다가 교장 선생님이 “이 교실은 담당 선생님이 누구지요?” 라고 물으면 내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외부에서 나를 응시할 때 비로소 내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는데 새들이 와서 먹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래서 어쩌라고요?” 주님은 “너희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예, 모르겠습니다.” “성공이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자가 뿌렸는데 길 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와서 먹었다’는 말을 유치원 아이들에게 말했다면 그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 알까요? 다 알아요.

왜 다 알아들을까요? 그들은 자기 주체를 생각하지 않아요. 농부에 빠졌고, 떨어진 씨에 빠졌고, 길에 빠졌고, 새에 빠졌기 때문에 자기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주체가 없어요. 그래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주체가 있는 자는 천국에 안 넣어준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네 주체를 삭제시켜 버리라는 겁니다. 왜냐? 그 주체의 자리를 십자가 지신 분이, 두 개의 자아가운데 마귀가 있는 자아 앞에서 진짜 우리의 자리에 주님의 형상이 오니까 마귀가 만든 내가 주님을 밀칠 때 십자가 사건이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면서 우리는 죄인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누가 “당신은 죄입니까, 의인입니까?” 물을 때, 반드시 “예수 안에서 말입니까, 바깥에서 말입니까?”라고 되물어야 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고, 예수 밖에서는 죄인입니다.

5-6절에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라는 말씀이 있어요.

이 내용을 어른들에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뻔한 이야기를 왜 하지?’ 이렇게 나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합니까?” 주님 답변은 “너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모르라고 이야기한 거야.”

이 본문을 읽은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은 쉬운 이야기를 했는데 제자들은 왜 못 알아들을까?’ 이런 의문을 가져요.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못 알아들은 거예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어 말랐습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농부가 농사에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우리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요. 주님은 이것을 성공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런가? 처음 예수 믿을 때 기쁨으로 받았지만 갑자기 큰 시험이 오면 “내가 지금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면, 주님이 성공하신 거예요.

나의 실패를 주님은 성공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을 ‘포대 갈이’라고 합니다. 중국산을 사서 포장만 바꿔 한국산으로 둔갑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포장을 바꿔 유통 기간도 제 마음대로 바꾸고. 주님이 죄인인 우리를 포대 갈이 해서 의인으로 둔갑시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오다 말라 죽었어요.

이 농부는 대 성공을 한 거예요. 왜? 인간들은 이것을 농부의 실패로 보는 자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처음 믿을 때는 기뻤는데 바쁘다 보니 예수님도 잊고 살았어요. 나는 지옥 갑니까?”라는 질문을 할 때,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을 믿었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신의 세력이 신앙인을 만든 거예요. 마귀가 지금도 많은 신앙인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천국 가는데 성공해라.”고 유혹하면서. ‘천로역정’이란 책이 이런 나쁜 역할을 합니다. ‘주홍글씨’는 나타나야 성공입니다. 안 나타나면 안 돼요. 주께서는 이 주홍글씨를 드러내는 겁니다.

주님이 정신과 의사로 변장해서 모든 인간이 간음한 자, 죄인인 것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주신 겁니다. 열심히 믿으려고 애쓴 만큼 착한 게 아니에요. 이것은 처음부터 열심히 해도 안 될 일인 것을 믿어야 되는데, ‘내가 지금 복음을 기뻐한다. 이것을 지속시켜야지.’ 이렇게 시작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시작입니다.

7절을 봅시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절에는 새들이 와서 먹었고, 6절에는 말라 비틀어졌고, 7절에는 결실치 못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의 특징이 뭡니까? 농사가 제대로 안 된 것입니다.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절에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9절은 빼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농사는 1, 2, 3번은 잘라버리고 4번만 있으면 농사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것이 아니고 1, 2, 3, 4번이 다 있어야 돼요. 그래야 말씀이 완성이 됩니다.

10-1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를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하늘나라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농사짓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이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은 이해가 됩니까? “농사짓는 비유는 이해가 되는데, 왜 네 가지 서로 다른 경우로 설명을 하는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분명히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 속에는 더 깊은 무엇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시작이고, 두 번째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온전하게 설명해 주시면 우리가 그 비밀을 이해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해석했지요. 해석까지 언급해서 이것 전체가 ‘너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비밀이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비유에서 해석까지 해 주셨어도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게 하셨어요.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비유와 해석까지 주시면 이해가 된다는 이 자체 속에서 ‘해석해 주시면 됩니다’라는 인간의 해석 그 자체를 쪼개야 비로소 그 안에서 진짜 예수님의 숨겨진 비유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과 비교해 봅시다.
13절에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나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이 모든 말씀을 쉽게 설명해 주시리라 생각했어. 씨 뿌리는 것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구나. 이제 이해된다.’ 이것이 완전한 착각입니다. 인간의 영적이라는 이름의 한계를 쪼개버립니다. 인간의 영은 영이 아닙니다. 마귀예요.

인간이 영이라고 하는 것, 영적 해석이 다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워치만리의 삼분설이 문제가 심각한 거예요.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가면 육의 사람도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주장, 그 영은 육의 연장입니다. 육의 확장이에요. 예수님 말씀은 아무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네가 영적인 견해까지 밝혀도 그것은 진짜 영이 아니고 네 육에서 나온 마귀적인 해석의 극단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15절에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이렇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대충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단’은 진짜 사단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도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해석해 주셔도 우리는 달리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16-17절에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아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주여, 제가 넘어졌습니다. 제가 젊은 때는 신앙생활 잘 했는데 이제 와서 살려고 하다 보니 제가 넘어졌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처음부터 너는 넘어졌어!” 인간은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했고 처음부터 이미 넘어진 자입니다. 처음부터 세상의 재리와 유혹이 좋아서 따라갔고, 처음부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 될 사람이 우리였습니다. 

이걸 누가 이해합니까? 아무도 이해 못해요. 네 종류의 밭이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이에요. 누구? 성도. 성도는 이렇게 태어나요. 마귀한테 빼앗겼던 사람이 성도요, 넘어진 자도 성도요, 세상의 유혹에 빠졌던 자가 성도요, 30, 60, 100배 열매를 맺는 것도 성도입니다. 성도의 네 가지 색깔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3장 35절에 나오는 주님의 형제, 자매, 모친입니다. 왜? 예수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릇입니다. 그릇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말씀을 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잡아당겨야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유가 뭡니까? 말씀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잖아요.

주의 말씀이,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주와 같이 하늘나라에 합류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릇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주여, 무슨 말씀 지키면 됩니까?” 이렇게 나와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릇에 담긴다니까요. 담겨진 말씀이 우리를 구원해요. 우리가 할 것은 없어요.

마귀가 유혹하면 유혹에 빠지면 됩니다. 재리의 유혹이 오면 돈 좋아하면 되고. 그런데 열매가 맺혔어요. 제자들은 주체가 있고 주님이 말씀만 주시면 그 말씀을 내 손으로 가져다 내 그릇에 담아서 내가 구원 받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불신이 만들어 낸 가짜 신앙이지요.

새삼스럽게 믿는 척할 필요 없어요. 믿는 척해도 믿음 아니고 믿음 있어도 믿음 아닌데 뭘 믿는 척을 해요. 주체가 있는 이상은 믿음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체가 포대 갈이, 주체가 바뀌어야 됩니다.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해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에 네 가지로 이야기했다면 이것이 바울의 서신에도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 안에 있으면 의인이다’ 이것으로 끝나요. 이런 네 가지 종류가 안 나와요. 육이냐, 영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에도 그렇게 나오지요.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네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비유를 제대로 설명해야 합니다. 영과 육으로 이것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16-17절에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넘어지는 자요”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넘어지는 자’가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넘어지는 자가 나인 것을 아는 자’가 말씀이 담긴 자로써 성도가 되는 겁니다.

마가복음 4장이 우리 안에 출렁이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넘어지더라도 열매 맺게 하시는 모든 은혜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능력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피로 용서하십니다. 성경을 잘 못 해석한 죄, 내 힘으로 말씀 지켜 구원 받고자 하는 죄,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겠다고 하는 죄. 이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성령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뭘 하고 말고가 의미 없이 뭘 해도 주의 은혜로 말씀이 말씀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이런 상황을 일으키셨다고 믿으면 됩니다.

17절을 보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되어 있는데, 환란과 핍박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견디라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견디지 못하라고 일어나는 거예요. 영화 촬영하는데 엑스트라는 주인공의 총에 맞으면 쓰러지고 신음하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죽지 않고 버티면 이건 엑스트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실패하고 넘어지게 하기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 앞에 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역할을 하라고 세워놓았는데 안 넘어지려고 버티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18-19절에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했지요. 세상에서 염려와 걱정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불안해하고 겁을 냅니다.

말씀의 열매는 말씀 주시는 분이 맺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넘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는 이것이 마귀가 만든 두 번째 자아에요.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고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와서 “네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라고 한다면 아담이 뭐라고 하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합니까? 아니지요.

부끄러움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재리의 유혹 이런 것은 벌거벗은 것과 같아요.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돈이 좋고 세상 쾌락이 좋은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찾아와서 알라 신을 안 믿으면 도끼로 찍겠다고 하면 버딜 수 있겠어요? 안 됩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망하면 돼요. 도끼에 찍히면 되는 겁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한강 다리 위에서 ‘물이 차가울까, 미지근할까?’ 이걸 생각한다면 못 죽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와 함께 죽었다’고 해놓고,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죽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주와 함께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힘으로 주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어요. 말씀이 덮쳐야 됩니다. 말씀이 와야 된다는 말은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 앞에서 넘어지는 자로 발각될 때 비로소 천국이 나를 재료로 활용해서 주님의 천국을 만드는 과정에 있음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아, 주님이 이런 식으로 천국을 만드시는 구나!’ 

20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삼분설(영, 혼, 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음 밭에 말씀이 떨어졌다는 거예요. 신체가 아니고 마음이니까 혼이겠지요. 혼에 말씀이 떨어질 때 정신 바짝 차리라는 거예요. 마귀가 오면 쫓아내고, 환란이 오면 견디고, 재리의 유혹이 오면 물리치고 그래야 영의 세계로 승진할 수 있다는 겁니다.

키에르케골이 인간을 세 단계로 봤는데 첫째는 생물학적인 단계(본능적인 것), 그 다음 윤리적 단계, 그 다음 미학적 단계인데 이것이 영적 단계입니다. 단계를 나누는 것이 육과 영과 혼으로 나누는 삼분설에 근거한 사상입니다. 오리겐이란 사람도 이런 주장을 했고 과거 그리스 철학에 이런 사상이 나옵니다.

이것은 철학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마음 밭에 말씀이 오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씨 뿌리는 비유 전체가 주인 없는 빈 그릇에 그냥 담깁니다. 예를 들면, 마술하는 사람들이 신문지를 찢어서 그릇에 담는데 잠시 후에 그 찢어진 신문지가 예전 온전한 신문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담기면 더 이상 우리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 나옵니다. 주님의 몸이 이뤄져요. 말씀이 덮치니까 우리는 주의 자매, 형제, 모친으로 바뀐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우리가 보기에는 살기 힘든 곳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딱 필요한 세상입니다. 마귀도 사기꾼도 살인자도 다 필요한 세상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주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해했을까요? 이해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부정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씨 뿌리는 비유가 생각났다면 “예수님이 참 좋은 비유를 우리에게 일러주셨다. 하지만 그 비유가 날 살리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말씀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세가 날 살린다고 여겨 세상 권세 편에 섰잖아요. 정말 그렇습니까? 말씀이 우리를 못 살립니까? 바리새인들은 생각했어요. 말씀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을 지킬 때 말씀 지킨 내가 나를 살린다고. 다만 말씀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여깁니다.

침례교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지시는 것까지는 주님이 하시고 그 이후 구원 받는 것은 인간의 손에 달렸다는 겁니다.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손들고 나올 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때가 무엇인가 하면, 카이로스인데, 카이로스가 구원 받는 때를 말합니다. 내가 믿는다고 손들고 나올 때가 아닙니다. 이건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시간)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아는 시간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이 우리를 구원해요. 그러니까 사건 안에는 전 시간이 다 들어있어요. 창세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들어있다니까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구원 받은 셈이 돼요. 그래서 이미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미 끝난 상태에요. ‘이미 구원 받았으면 더 이상 성경 볼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의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니고 인간이 상상한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관은 마귀한테 깨져야 되고, 재리의 유혹에 깨져야 되고, 환란에 깨어져야 돼요. 깨어지고 주님이 살아계셔서 주 안에서 날 용서했다는 그 구원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그 때부터 이 구원을 즐거워하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나야 하는가’를 말씀으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니까 성경 말씀을 늘 보게 되고,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 속에서 살게 되고, 순간순간 성경 말씀이 나를 치면서 “이게 바로 말씀이 성취된 거야.”라고 말씀이 생각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마치 부부생활과 같아요. 평소에 둘이 있을 때는 하숙집인지 여관인지 모르다가 내가 몸이 아플 때, 혹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데 아내가 막아 줄 때 “당신과 결혼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세상에 당신 말고 내 편은 아무도 없네.” 이렇게 되지요.

이미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효과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미 구원 받았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사건을 유발시켜서 그 사건을 통해 확인시켜 주는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사건을 늘 만나고 싶지요? 기대하지 마세요. 기다리면 안 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냥 막 사세요.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옵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 받게 되었다는 기쁨이 올 때 이 사람이 이미 주님의 신부로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날 위한 세상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세상인 것을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느껴지도록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