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3. 27) 13-1
마가복음 4장 21-22절입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등불의 조명이 얼마나 밝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온다는 시간적 요소는 여기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등장하면 시간적 요소는 사라집니다. ‘언제 오십니까?’라는 물음이 성립이 안 돼요. 주님 입에서 하나님 나라가 말해지는 순간,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어디(어떤 장소)로 가려고 합니다. 가뭄이 들어 바짝 마른 논에 양수기를 동원해서 저주지 물을 끌어와 물을 댑니다. 그러면 논에 물이 넘치게 되지요.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로 채워지면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듯이 하나님 나라 요소가 차고 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언제 오십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등경 위에 두려 함’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 여기에 와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찢어져 버렸습니다. 애초에 그런 하나님 나라는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3절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요. “여러분은 등불을 켜서 상아래 숨겨놓지 않고 환희 비치도록 높은 곳에 두지요? 내 말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듣는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들을 귀가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아닌가요?
시간문제에 있어서 인간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함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론할 때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인간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왜 다른 나라를 찾는가? 그 이유는, 나는 변하지 않고 세상만 바뀌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걸치듯이 내가 그냥 들어가면 되잖아요.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나는 그냥 은혜로 그곳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곳은 아니고 나중에 천국 간다. 왜냐? 지금 이곳을 천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불 품 없으니까 지금 말고 나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이유는, 메시아가 오면 천국을 그분이 거느리고 오실 것이니까 메시아를 통해서 우리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죽음을 갖고 왔어요.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망이 2개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죠. 첫째 사망에서 죽은 사람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첫째 사망을 모르는 사람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데, 두 번째 사망이 뭔가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망이 둘로 나눠져 있을까요? 이 문제를 풀지 아니하면 ‘빛을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빛이다. 내가 빛을 가지고 왔다.’는 말씀에 사람들은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예수님만 빛이라고 하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어둠에 속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인간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어둠이라고 여기고, 인간들이 어둠 속해 있다고 증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등불을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높은 곳에 두어 환히 비치게 한다는 것은, 주님이 빛이라고 등장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의견은 모두 거부합니다. 인간의 생각 중에 천국은 이러이러한 곳이고 우리는 그곳에 몸만 가면 된다는 생각도 포함이 돼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22절).”고 했는데, 이 말씀은 마치 삼손이 낸 수수께끼 같아요. 계속 비유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빛을 억압한다 할찌라도 그 일은 성공하지 못한다. 빛은 어두움의 어떤 훼방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두움은 강력하게 빛을 억압하고 빛이 비추지 못하게 하는 힘으로 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그냥 듣기만 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너희들은 나를 싫어하지? 정말로 밉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아.”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는 주님을 싫다고 한 적 없는데요. 주님혼자 지나친 상상을 하시는 것 아닌가요?” 이런 심정이지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21절)” 이 말씀은, ‘나는 기어이 내 말을 드러내겠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어요.” 라고 하고, 주님은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지금 못 알아듣고 있어.”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등불이다. 훤하지?” “예, 밝습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주님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내가 기어이 빛을 드러내고 말거야.”라고 하시면, 제자들은 “그렇게 하세요. 말리는 사람 없어요.” 이렇게 나오죠.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의 반응은 다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시려는 것은 죽음의 2중 구조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지요? 주님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하신다고 해도 우리들은 그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왜냐? 죽음의 2중 구조 때문입니다. 죽음은 2개의 층이 있어요. 1층 죽고, 2층 죽고.
죽음은 시루떡처럼 2중 구조로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키가 커서 두 층 모두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 위쪽은 두 번째 죽음을 내다보시고, 아래쪽은 인간들이 죽는 죽음을 보십니다. 인간들은 2층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 안목(너희들은 죽었다)은 없고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예수님만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2중 구조를 말씀하신 이유는, 천국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2중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알아듣지 못함을 알려주시기 위해 상자 속에 가두십니다. 그 후 주님이 공생애를 성공해서 상자를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1층 죽음과 2층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완성하신 상태를 빛,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등불이 등불 되려면 사람들의 협조가 있어야 돼요. 어떤 협조냐 하면, 등불을 감추려 하고,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시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 안 하고 우리끼리만 알기. 왜? 복음은 내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남에게 구태여 말할 필요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상자 안에 우리를 넣어 둔 상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천국이 이뤄집니다. 거기에 대해 인간은 협조를 해야 되는데 어떻게 협조하는가 하면, 주님 말씀을 훼방하고, 그 말씀을 이해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사태가 발생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을 알았으니까 죽으면 천국 갈 것이고 그곳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착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죽음 안에 모든 인간은 가둬져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죽음에서 부활에 참여해야 되는데, 주께서 열어 준 사람만 구원 받게 되어 있어요. 주님이 열어 주실 때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등불은 영원한 비밀은 아니고 현실화 되고 드러나는데 과거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등불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지요.
지금까지의 강의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등불)을 테이블 밑에 두는 셈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놓아두는데 주께서는 기어이 등불을 환히 밝혀는 높은 곳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십니다. 이 때 제자들이 하는 일은 뭡니까?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오해해서 등불을 감추는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 말씀을 제대로 알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짓은 전부 말씀을 감추고 빛을 어둠으로 둔갑시키는 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짓은 용서받을 짓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말썽부리는 일만 하면 됩니다. 이게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믿는 내가 들어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상자 속에 가둬진 우리를 상자를 열고 빼내 준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천국은 인간이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빼내 줄 때 천국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나는 천국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는 깨달음과 함께 천국에 갑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2중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죽은 티를 낼 수밖에 없는데,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데 모든 말씀을 내 잘되는 쪽으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오늘 하루를 살았는데 누구 덕분에 살았습니까? 주님 덕분에 살았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의 수모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웃고 있습니다.
인간 피라미드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은 국기를 펄럭이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맨 밑에는 자기 위의 모든 사람들을 바치느라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단 말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웃고 가족이 화목하게 잘 먹고 지내는 모든 것은 주님이 밑에서 희생하신 덕분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올려 세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조금이라도 주의 일에 순종하고 협조한 공이 있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자신은 죽은 자로 여기지 않고 산자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어떤 요소가 있는가 하면, 잃어버린 요소가 있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요소가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잃어버린 요소로 가야 주님이 건지시는데, 우리가 잃어버린 요소로 가면 뭘 잊어버리는가 하면, 우리 자아를 잊어버려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에서 멈춥니까? ‘나는 구원 받아야 돼!’하는 그 순간까지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어요. 그런데 진짜 잃어버리면 내가 구원 받아야 된다는 의지도 함께 없어집니다.
제가 수면 내시경 할 때 어떤 식으로 내 속을 들여다보는지 궁금해서 눈을 부릅뜨고 의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나니까 모든 검사가 끝난 거예요. 왜 내 몸을 검사하는 순간을 놓쳤는지--. 그 순간 자아가 날아가 버렸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데 생각이 없으니까 존재가 날아가 버렸어요.
수면 내시경 할 때 의사가 마취약을 주사했잖아요. 그 마취약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 피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잃어버리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깨어나서 하는 말이 “누구세요? 나를 완전히 잊고 잠들게 하신 분이 누구세요?”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잠자는데 자신이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았어요.
우리가 천국에 오게 되었는데 내가 기여한 바가 있나요? 일체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제자들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주님의 전제 작업 중 하나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들을 귀가 없는데 내가 들을 귀가 있도록 조치해서 결국은 천국으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말씀을 알아듣게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수모 당하심 때문에 죽은 자가 산자가 된 것입니다.
제가 죽음의 2중 구조를 말씀드렸습니다. 두 개의 죽음이 있기에 두 개의 부활도 있습니다. 이 둘은 다른 위상입니다. 같이 있지만 같은 평지가 아닙니다.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은 시간 순서가 아니고 같이 있으면서 다른 층에 있는 거예요. 이것을 위상적 존재, 위상적 지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잃어버렸다가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 안에 위상적 존재가 들어와요. 나는 죽었기에 비로소 산자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7장, 고린도후서 5장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지위가 바로 위상적 존재입니다. 두 개의 사망과 두 개의 부활을 다 알고 있어요.
왜 그런가? 잃었다가 얻은 그 커튼에 우리가 같이 수놓아져 있기 때문에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면 같이 펄럭이는 거예요. 여기 포도가 있는데 이건 누가 주신 것입니까? 주님이 주신 거지요. 우리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점을 그냥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자아를 따로 상정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은 간단히 요약한다면, ‘천국은 자리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누가 마련하는가? 예수님이 먼저 위상적 존재로 오셔서 그것이 본인의 자리인 동시에 본인이 구원할 사람들의 자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현재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 받겠다는 그 자리에서 주께서 새로 만든 자리로 옮겨 갈 수 있는 방법은 인간 쪽에서는 없습니다.
없는데 사람은 육신이기 때문에 시도를 합니다. 나를 예수 안에 집어넣는 시도를 합니다. 그런 시도를 하면서 실행되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를 천국에 집어넣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
내가 여기 있다면 내가 나를 상상합니다. 그러면 나는 두 개가 됩니다. 여기 있는 나를 ‘나1’, 생각하는 나를 ‘나2’라고 한다면, ‘나2’가 있기 때문에 ‘나1’이 실수하고 실패해도 실망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반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공부를 못했어요. 성적표를 보니 최하위권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퇴근하고 들어와요. 그러면 아이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집안 청소를 깨끗하게 해 놓았어요.
청소할 때 뭘 생각합니까? 엄마가 와서 깨끗하게 청소된 집을 보면서 기뻐하겠지. 그런데 성적표를 보여주면 ‘그래,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뭐.’ 라고 말하는 것까지 상상을 합니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내가 주인공 되는 세상과 함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나2’도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했던 멋진 나를 생각하겠지요.
자, 여기에서 반성을 해야 되는데, 순서가 이렇습니다. 반성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도입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보니까 ‘예수 믿으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하튼 인간들은 예수를 몰라요. 하지만 언어는 있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 언어는 알잖아요. 언어는 어디서 생긴 겁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어의 세계인데, 이 언어의 세계에서 성경 말씀이 주어졌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예수 믿는 행동을 하면 내가 천국 가 있는 상상을 하게 돼요. 여기에서 질문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요? 그러면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나1’은 항상 있으니까 또 반성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면 됩니다.
신명기에 '말씀대로 살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벌써 머리가 되어 큰 소리 치면서 사는 것을 상상합니다. 현재는 꼬리가 되어 있어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인간은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칸트는 인간의 이성중에 동물과는 달리 분석하고 판단하고 반성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실천적 이성’이라고 했는데, 하여튼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계속해서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현재의 나에서 더 괜찮은 ‘나2’를 항상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서 건전한 나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게 틀렸다면 어떻게 하겠느냔 말입니다.
이렇게 반성하는 것 자체가 죽어야 마땅한 짓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반성 없는 인간은 없는데, 반성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죽을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 반성하며 더 나은 나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구원 받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숨겨져 있던 죄가 만개를 하는 거예요. 반성을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나1’을 없앨 방법이 없는 이상 천국은 무관한 곳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구원 받고자 하는 내가 나의 구원을 훼방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살다가 지옥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지옥가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말은 지옥 간 사람만 하는 이야기지 천국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질문 안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인간은 다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없다면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는 어떻게 천국 갔습니까?” 주님 은혜로 갔지요.
이제 주님 십자가의 능력을 아시겠습니까? 십자가의 효과는 우리에게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재 파악을 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주재 파악하라고 이렇게 모이게 하셨잖아요.
주님 말씀은 우리가 반성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키는 담당자는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이 담당해서 말씀대로 어둠의 상자 안에 있는 우리를 꺼내 주십니다. “얘야, 나와라. 빛이다.” 그런데 이 빛은 내가 생각한 빛이 아니었고, 이 빛을 보고 난 뒤에 할 말은 “제가 어둠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뭘 해도 어둠이고 빛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일 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나1’부터 출발해요. 그리고 ‘나2’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의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뭘 해도 어둠의 상자를 열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한계가 어디인지 몰라요. 한계를 안다면 한계까지 가서 열면 됩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는데, 출생부터 평생 몰래 카메라가 있어서 한 사람의 삶을 전 세계에 생중계를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바다라고 여겼던 것이 바다가 아니라 그림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국 세트장을 열고 처음으로 세트장 밖으로 나갑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기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한계를 모릅니다. 그러니 탈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한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한계는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요. 그 한계는 이미 주님께서 만들어 주셨지요. 십자가가 한계입니다.
이 십자가가 두 번째 죽음입니다. 첫 번째 죽음과 두 번째 죽음이 함께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고, 우리가 지옥 불에 가는 것은 두 번째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두 번째 죽음을 한계점으로 잡아서 성도에게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자체가 한계고, 부활이 그 한계를 넘어섰다는 증거가 되고. 이미 부활 세계, 성령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안에 갇혀 있습니다. 밖으로 못 나갑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한계점 밖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4장 21-22절을 다시 봅시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기어이 드러내야 될 것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숨은 것처럼 보일 것이고, 기어이 나타날 것은 지금 숨어 있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뜸 들이지 말고 지금 다 드러내시면 될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그러니까 너는 들을 귀가 없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천국은 내 몸이 가는 곳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듯이 그냥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물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고 내 힘으로 천국 가려고 반성과 회개와 충성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헛된 일이 주님이 하늘나라 만드는 일에 부정적 협조가 됩니다. 우리의 헛된 짓이 주님 말씀 성취의 일부로 가담이 된단 말이지요.
우리는 이미 죽었는데 마치 안 죽고 살아있기에 빨리 죽음을 극복해서 두 번째 죽음을 피해 두 번째 부활로 가야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죽은 자의 티를 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철학과 복음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철학은 자꾸 한계를 찾아갑니다. 왜? 한계를 찾아야 그것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학, 천문학도 한계를 찾으려고 달려갑니다. 한계를 찾기 위해 망원경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한계선을 더 넓혀 놓았어요.
개미를 잡기 위해서 개미구멍을 팠는데, 파다 보니까 구멍이 더 넓어져서 온 천지가 개미의 세계입니다. 일을 더 크게 만들고 말았어요. 인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일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하늘나라에 협조하는 일로 받아주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이 일을 해서 구원 받겠다고 나오면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나의 자리를 대체해야 됩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십니다.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체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을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두꺼운 이불로 자기 얼굴을 덮으세요. 제 딸이 어릴 때 저랑 장난치면서 이런 놀이를 했어요. 딸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제가 이불을 확 열어젖히면서 제 얼굴을 들이밀면서 ‘까꿍’ 하면 깔깔깔 웃었어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불이 열리면서 갑자기 아빠 얼굴이 보이니까 아이가 좋았던 모양이에요. 이처럼 주님이 ‘까꿍’ 작업을 하시는데 우리는 그 때마다 영광돌리고 찬양합시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 주님이 ‘까꿍’하고 찾아오시면, 우리는 ‘아, 주님이 말씀대로 나를 사용하고 계시는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 안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요.
24절을 봅시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말해놓고 듣지 말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네가 이해했다는 식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해하지 말라는 말인가, 이해하라는 말인가?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이해하고 그것을 가위표 하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아, 이런 뜻이구나.’라고 알았다면 네 자신이 알았다는 그것이 ‘내가 또 무식한 소리를 했구나.’라고 평가 받을 것이다.”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는 이 간단한 이야기, 이건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안다는 그것이 우리가 어둠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는 말씀을 하실 때, ‘아, 나는 빛이구나.’라고 여긴 그것이 바로 어둠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빛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않는다는 것이 신앙인이고, 믿는다는 것이 불신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나는 불신자입니다.’라고 떠들면서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하면 그가 신자입니다.
첫째시간 결론을 맺는다면, ‘너희들은 단독으로 살 수 없고 내 앞에서 비로소 규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4. 2. 08:36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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