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10. 23) 29-1
마가복음 6장 14절입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헤롯과 세례 요한인데, 헤롯은 세상 나라의 대표자고 요한은 하늘나라의 대표자.
두 사람이 같은 인간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혈연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요한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태어나기 전에 성령이 먼저 임했지요. 이름도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와서 ‘요한’으로 하라고 알려주지요.
하나님 쪽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혈연관계가 끊어져 있어요. 달리 표현하면 육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만약 혈연관계가 끊어져서 하늘나라 간다면 우리도 ‘가족을 안 만나고 살면 되지 않은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에서의 모든 행동은 혈연관계에서 나와요. 예를 들어봅시다. 딸을 시집보냈어요. 집에는 부부만 남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인생 챙기고 내 삶을 살아야지. 하면서 지내는데 딸이 전화가 와서 아기를 돌봐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거절해도 혈연관계에 있는 부모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망나니 같은 남편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친구 만난다고 늦게 들어오고, 총각 때처럼 외박도 하면서 마음대로 다닙니다. 돈도 자신이 벌었다고 아내에게는 생활비 조금 주고 나머지는 자기마음대로 씁니다. 이런 남편도 아이가 태어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이 때문에 밤에 잠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기를 없앨까요? 안 되잖아요. 아무리 망나니라도 혈연관계가 주는 압박감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인간의 육은 내 마음대로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아내, 자식 이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꼼짝 말고 갇혀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혈연관계가 우리에게 웃음과 행복과 기쁨도 주지만 원치 않는 고통과 부담과 어려움도 함께 주지요. 그러니까 혈연관계에 갇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자아는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지고 홀로 있는 자아는 없어요. 이것을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공인 메로스가 시도합니다.
엄마가 죽었는데 울지 않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아랍 사람을 총으로 죽였는데, 별 죄책감도 없어요. 날씨가 더워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노벨 문학상 받은 소설입니다. 이런 것이 소설이니까 성립되는데, 절대적 실존, 나만 달랑 있는 것을 통해서 완벽한 자유를 누려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끝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형무소에 있는데 하늘에 별이 보입니다.
별을 보면서 ‘저 수많은 별 중 하나가 나야.’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되어 별을 보니까 대단해 보이지요. 홀로 반짝이니까. 그런데 별의 동네에서는 어떻습니까? 반짝이는 것입니까, 검은 암석 덩어리입니까? 돌덩어리죠. 실존이란 것은 결국 남이 볼 때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럴싸하게 보이는 당사자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별처럼 자유롭게 삽니까?’라고 물으면 ‘혈연관계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혈연관계에 갇혀 있으니까 자유를 희망하게 되지만, 희망하는 최종 모델은 없어요. 없는데 갇혀있는 자아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다.’라고 해석하면 그것이 타인이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제 2의 자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실존이란 결국 삶이 힘드니까 그곳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카뮈의 경우는 별들을 꿈꾸는 것이지요.
별을 보면 혼자 반짝이잖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누구한테 간섭받지도 않고 반짝이는 것이.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절대 신입니다. 이처럼 별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내가 은근히 절대적인 자아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바로 나는 지금 갇혀있음을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 실존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이 제일 괴로운 것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하면 될 것 아닌가? 다른 것은 싫어요. 그런 것은 식상해요. 마지막 희망은 하늘의 별이 되는 것입니다.
별을 영어로 스타라고 하는데, 과외에 매여 있고, 수능에 매여 있는 청소년들이 꿈꾸는 것이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연예인 스타 또는 스포츠 스타를 꿈꿉니다. 야구의 경우 강정호 선수같이. 이런 선수가 몇 명 중에 한명이 나옵니까? 수천명 중 한 명입니다. 인기 배우, 가수가 몇 명 중에 한명 나옵니까? 희박한 확률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례 요한은 혈연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세례 요한도 부모가 분명히 있습니다. 무론 친척들도 있고.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지요. 본인은 얽매여요. 본인은 혈연관계를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성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을 그냥 이웃집 아저씨로 보지 말고 성도의 모델로 보세요. 왜 그런가? 주님이 개입해서 혈연관계를 끊으시고 주님과 맺어진 관계가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목사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아요.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론하지.
누가복음 1장 39-41절을 보겠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리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례 요한이 까뮈가 [이방인]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적 실존은 아니지만 태중에서부터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절대적 실존입니다. 요한이 지상에서는 세례 요한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예수 안에 있는 요한이 되겠지요.
이것은 기존 아담과의 혈연관계는 처음부터 끊어져야 되고 세례 요한이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사는 그 육은 어디에서 공급받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 지고 부활한 육이 있어야 돼요. 그 육과 세례 요한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이 바꿔치기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바꿔치기 되면 세례 요한이 갖고 있던 그 아담의 몸은 껍데기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꿔치기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육의 몸으로 죽고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아담의 몸이 아니고 영광된 몸이에요.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몸으로 부활된 겁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할까요? 성도의 실존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내가 어디 있지?’ 이런 질문을 성도는 해야 돼요. 그러나 성도 아닌 사람은 이런 질문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몸을 자신이 만질 수 있기에 그런 질문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 몸은 껍데기고 진짜 몸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 이 몸 죽어서 하늘나라 가야지.’ 이렇게 내가 결정하고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례 요한처럼 혈연관계와 결별한 징후들을 사건을 통해서 알려줘요.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이 2,000년 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고조선 시대 어떤 청년입니다. 고조선 시대 청년과 오늘날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 나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그 사실이 그냥 인정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는 요즘 신앙이 떨어져서 은혜가 안 됩니다.”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주기도문만 외워도 눈물이 나는데요.” 특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대목입니다. 주기도문을 할 때 그 현실감,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받고 있는 현실감으로 인해 나의 존재마자 망각할 지경이 되면 나의 걱정, 근심은 논의할 거리가 안 됩니다.
내일 시험 치는 00는 긴장도 되고 할 텐데, 주기도문을 차분히 외워보세요. 그 구절이 현실로 다가오면 시험에 대한 부담감은 흔적도 없이 살아질 겁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께 영광이 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뭘 걱정합니까?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를 만날 때(눅1:41-42) 핵심이 뭡니까? 임신된 아기 예수입니다. 이것이 현실 속의 현실입니다. 남들은 현실을 하나로 봐요. 그러나 성도는 현실 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어요. 우리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의 운명이기도 하고.
“변화산에 들어간 모세와 엘리야처럼 주님이여, 우리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오셨지요?”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지?”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도는 이런 말을 서로 주고받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혈연관계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해도 다 혈연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엄마는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혈연관계에 놓인 인간이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빈말이고, 하나님을 찾아도 결국 혈연관계로 돌아갈 뿐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두꺼운 혈연관계의 벽을 뚫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 쏘아올린 우주선이 왜 실패를 했습니까? 중력이 세서 그래요. 그런데 중력보다 더 센 것이 혈연관계입니다. 로켓 만든 과학자들이 돼지머리 앞에서 절하며 고사 지내지요.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이번 일에 성공하면 나의 능력을 인정받고, 인정받으면 승진하고, 승진하면 내 처자식 잘 먹고 잘 살게 됩니다.
인간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은 혈연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위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지막 할 말은 “여보, 사랑해!” 이것입니다. 진작 그런 소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꼭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면 이런 소리를 합니다. “엄마, 사랑해!” 이런 말을.
인간은 모든 것이 혈연관계와 얽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육의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혈연관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혈연의 중력에서 끊어지면서 예수 안에서 영생 얻을 사람인 것을 우리는 예상도 못합니다.
성도나 비성도나 예상을 못해요. 예상 못하는데 낯선 사건이 와요. 그 순간 이것이 나의 주체가 됩니다. 낯선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체가 되기 때문에 기존의 주체는 무너집니다. 낯선 사건이지 익숙한 사건은 아닙니다. 익숙한 사건으로 이미 구닥다리 주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안 됩니다.
새로운 낯선 사건이 터지면 기존의 구닥다리 주체는 사라지고 새로운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 주체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고 나는 주님이 만드는 결과물인 것을 파악한다면 그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주체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언약이 빠지고 내가 하루하루 알아서 반성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왜 태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역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태어났지요. 12제자는?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혈연관계만 생각하고 그곳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런데 낯선 사건이 침투하게 되면 주님과 관련되는 것이 원래 나의 집안이고, 내 인생이 보여줄 것은 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의 공통점은 어떤 식의 삶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내놓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재미없거든 사는 방식을 바꿔보세요. 라면을 먹다가 라면을 안 먹는다든지, 운동을 안 하다가 운동을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사는 방식을 바꾸는데 내가 알아서 바꾸면 혈연관계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주께서 바뀌게 하는 방식이 있어요. 갑자기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밀가루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해서 즐겨 먹던 라면을 먹지 않게 되는 경우는 주님이 주신 낯선 방식인데, 이 방식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가는 인생인 것을 힌트 주는 순간입니다.
인생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익숙한 같은 방식으로 살기에 늘 같은 주체이기 때문인데,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만 이끄시는 독특한 길로 가시고 그것을 남에게 평가 받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가는 길에 대해서 남에게 평가 받기를 원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타인이 나의 모델이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 칭찬 받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람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인생이 있어요. 다 다릅니다. 그리고 타인은 주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을 모릅니다. 만약 알면 미리 예상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엉터리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야 해요. 그리고 몰라도 괜찮아요.
누가복음 1장 62-63절에 ‘무엇으로 이름하려는가 물으니 저가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라고 나옵니다. 왜 부친의 이름을 딴 사가랴가 아닌 요한이라고 씁니까? 이것은 바로 성도는 혈연관계에 매인 사람이 아니고 예수와 관련된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럼 ‘요한’이란 이름은 누가 지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이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됩니다. 다른 이름은 필요 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이름, 야곱, 예레미야 등을 붙어봐야 그것은 이미 지나간 구닥다리 남의 이름이고, 성도의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왜냐?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이름을 붙일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현재 우리 이름은 껍데기, 아담에게 붙여진 것이고 나는 예수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살 필요가 없어요. 모든 성도는 예수 이름 증거하기 위해서 살지 내 이름 증거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서울 중량구에서 47세 된 목사를 68세 된 목사가 칼로 찔렀어요. 칼에 찔린 목사가 칼을 빼앗아 자신을 찌른 목사를 또 칼로 찔렀어요. 목사끼리 칼부림으로 인해 둘 다 입원해 있답니다. 칼로 찌른 이유가 젊은 목사가 자신을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판정 기준을 저는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으로 내립니다. ‘심판하는 것은 주께 맡기라’고 했어요. 왜냐?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억울하게 죽었어요. 그러나 자기 영혼을 아버지께 맡겼지요.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지요. 죽은 자는 우리 영혼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맡겨야 합니까? 내 모든 인생을 아버지께 맡겨야 돼요. 죽은 자가 어떻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나를 성령으로 죽게 하신 그분께 소유권이 넘어갔으면 그분께 맡겨야지요.
남이 나에게 욕을 한다면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내 주인 되시는 분이 나를 욕하도록 어떤 사람을 동원한 겁니다. 왜? 환란 가운데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술사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데 그 비둘기는 검은 천으로 덮힌 바구니 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요.
주 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나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당했던 환란과 핍박을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조각품을 만들 때 먼저 틀을 만들고 그 틀이 깨어지면 조각품이 만들어지지요. 그 틀로 동원되는 것이 마귀들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누가 내게 욕을 하거든 환란 가운데 소망을 바라보라고 주께서 보낸 분으로 여기시면 됩니다.
환란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노골적 환란이 있고, 정신적 환란이 있어요. 노골적 환란이란 폭행이나 욕설 등이 있고, 정신적 환란은 타인이 나를 압박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나를 압박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도박하는 것입니다. 도박하는 사람만 정신적 환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주부도 ‘오늘도 좋은 일만 있게 하옵소서.’라고 소망하는 것, 이것이 도박입니다.
정신적 환란은 사적인 것이 있고, 구조적인 것이 있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구조적 환란을 받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 된다.’고 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해도 가난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 버는 타이밍을 놓치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래방, 빨래방은 한 물 갔는데 뒤늦게 그런 사업에 뛰어들면 망하기 십상입니다. 폭락하고 있는 주식을 왕창 매입해서 망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타이밍입니다.
구조는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 범위, 내가 아는 정보 범위를 벗어납니다. 해변에 고기가 몰려와서 잡으려고 하는데 파도가 강하게 밀려오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파도를 제어하려면 바다의 몇 킬로미터를 장악해야 됩니까? 세상이 파도처럼 몰아치는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을 ‘3포 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고 3포 세대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들이 30년 전에 태어났다면 다 취직했습니다. 그때는 일 할 사람이 모자라서 난리를 쳤으니까요. 이런 것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말씀은, 평소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최종 심판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립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 갈 사람을 내가 좋아할 수도 있고, 천국 갈 사람을 내가 배척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방해하는 꼴이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싫어합니다. 내가 주인인데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하니 싫지요. 내가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되면 망나니가 됩니다. 망나니는 옛날 칼로 사형을 집행하는 자입니다. 어느 시점에 죽일 지 칼을 들고 춤을 추면서 기회를 보다가 단칼에 목을 치지요. 본문에 나오는 헤롯이 바로 망나니입니다.
본문에 보면 헤롯이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막6:14).” 지금 헤롯이 빠짝 긴장이 된 거예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혹시 내가 억울하게 죽인 세례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을 했습니다. 지금 헤롯은 혈연관계에 매여 있지요.
혈연관계에 매여 있다는 말은, 자기를 둘러 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하고, 칭찬하면 그것이 나의 존재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런 평가를 기대해서 헤롯은 자기 관리에 나섭니다. 그런데 왜 공포가 발생하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공포’입니다.
마가복음 6장 14절에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에는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이렇게 나오고, 뒤에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가 나옵니다.
왜 공포가 발생합니까? 근접성 때문에 생깁니다. 이물질이 내가 설정한 경계선에 가까이 오게 되면 적색 신호가 옵니다. 우리 몸에 땀이 나면서 반응을 합니다. “주인님, 외부인이 접근해 옵니다. 백혈구는 마음에 준비하시고 바이러스가 침투할 때는 전군이 힘을 합쳐 막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자기 몸을 지탱하게 되어 있어요. 적이 멀리 있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가까이 오면 아무리 친한 형제, 자매, 자식이라도 공포를 느끼고 밀어냅니다. 적은 내가 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상대입니다. 상대의 정보를 모르면 그가 나의 적이 됩니다. 히틀러는 적이 아닙니다. 완악한 자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면 긴장이 되고 두려워서 접근 금지령이 발동됩니다. 공포 때문에. 그런데 세상 학문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답변이 나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왜냐?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나에게 굴복당한 거예요. 아가에 나옵니다.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을 자꾸 따라붙어요. 그런데 그 여인은 문을 잠그고 도망을 칩니다. 왜 그럴까요? 이 관계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이란 내가 예상하고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가 예상한 것, 바라는 것을 받기 원합니다. 왜냐? 공포가 없는 상태에서 내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세 아이에게 엄마가 “김치도 먹어라.”고 하면 아이는 “싫어!”하고 안 먹습니다. 왜 먹기 싫어할까요? 자기가 예전에 김치를 먹어 봤어요. 먹어보니까 맵고, 짜고 해서 먹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는 김치가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김치를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사랑 아닙니까? 사랑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한테 김치를 주면서 뭐라고 합니까? “침치 먹어라. 이것이 엄마의 사랑이다.”라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따라다니면서 입 벌리고 강제로 먹이는 거예요.
심지어 죽어도 되살려 냅니다. 이런 모습은 “네가 생각하는 인생을 나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네가 원하는 멋있어 보이는 인생, 훌륭해 보이는 인생을 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너는 나를 닮아야 해.’
오는 주일 설교할 본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본받으려고 하지요. 그게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 중 내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껍데기를 장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찾아오면 “네가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 모르지? 내가 깨닫게 해줄게.” 이렇게 됩니다.
욥이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주실 바에야 차라리 죽이시지 왜 살려두십니까?’ 그런데 결국은 주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말씀 중에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고백이 나오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셨지요.
왜 인생이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인생이 아닙니까? 나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인생이 왜 아닌 거예요? 그것은, 사랑은 우리가 느끼는 공포를 타넘고 오기 때문에 그래요. 무서워서 저지선을 설정했는데, 그 저지선을 넘어서면 자포자기가 됩니다. 일종의 강간이죠. 그냥 덮쳐버려요. 주님이 덮치시니 누구에게 신고할 수도 없고 --
만약 내가 38년 된 병자였다면 주님께 따졌을 거예요.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왜 38년 동안 병자로 살아야 합니까?’ 라고. 12년 동안 귀신 들린 여인이 주님 만났을 때 따질 마음이 없었겠어요?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는 귀신에 들렸습니까?’라고 따지고 싶을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왜 나를 강도로 살게 했습니까?’라고 따지고 싶었을 것인데, 이 3명의 특징은 원망이 아니라 감사였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이렇게 살게 하셨지요?”라는 마음으로 “주여, 저를 생각하옵소서.”라고 합니다.
10분 쉽시다.
(2015. 11. 4. 09:45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