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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혈연관계 1510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19. 09:04

2015-10-24 01:58:11 조회 : 689         
혈연관계 151023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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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59.♡.105.34) 15-11-05 09:36 
광주 강의(2015. 10. 23) 29-1

마가복음 6장 14절입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헤롯과 세례 요한인데, 헤롯은 세상 나라의 대표자고 요한은 하늘나라의 대표자.

두 사람이 같은 인간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혈연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요한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태어나기 전에 성령이 먼저 임했지요. 이름도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와서 ‘요한’으로 하라고 알려주지요.

하나님 쪽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혈연관계가 끊어져 있어요. 달리 표현하면 육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만약 혈연관계가 끊어져서 하늘나라 간다면 우리도 ‘가족을 안 만나고 살면 되지 않은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에서의 모든 행동은 혈연관계에서 나와요. 예를 들어봅시다. 딸을 시집보냈어요. 집에는 부부만 남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인생 챙기고 내 삶을 살아야지. 하면서 지내는데 딸이 전화가 와서 아기를 돌봐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거절해도 혈연관계에 있는 부모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망나니 같은 남편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친구 만난다고 늦게 들어오고, 총각 때처럼 외박도 하면서 마음대로 다닙니다. 돈도 자신이 벌었다고 아내에게는 생활비 조금 주고 나머지는 자기마음대로 씁니다. 이런 남편도 아이가 태어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이 때문에 밤에 잠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기를 없앨까요? 안 되잖아요. 아무리 망나니라도 혈연관계가 주는 압박감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인간의 육은 내 마음대로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아내, 자식 이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꼼짝 말고 갇혀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혈연관계가 우리에게 웃음과 행복과 기쁨도 주지만 원치 않는 고통과 부담과 어려움도 함께 주지요. 그러니까 혈연관계에 갇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자아는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지고 홀로 있는 자아는 없어요. 이것을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공인 메로스가 시도합니다.

엄마가 죽었는데 울지 않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아랍 사람을 총으로 죽였는데, 별 죄책감도 없어요. 날씨가 더워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노벨 문학상 받은 소설입니다. 이런 것이 소설이니까 성립되는데, 절대적 실존, 나만 달랑 있는 것을 통해서 완벽한 자유를 누려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끝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형무소에 있는데 하늘에 별이 보입니다.

별을 보면서 ‘저 수많은 별 중 하나가 나야.’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되어 별을 보니까 대단해 보이지요. 홀로 반짝이니까. 그런데 별의 동네에서는 어떻습니까? 반짝이는 것입니까, 검은 암석 덩어리입니까? 돌덩어리죠. 실존이란 것은 결국 남이 볼 때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럴싸하게 보이는 당사자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별처럼 자유롭게 삽니까?’라고 물으면 ‘혈연관계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혈연관계에 갇혀 있으니까 자유를 희망하게 되지만, 희망하는 최종 모델은 없어요. 없는데 갇혀있는 자아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다.’라고 해석하면 그것이 타인이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제 2의 자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실존이란 결국 삶이 힘드니까 그곳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카뮈의 경우는 별들을 꿈꾸는 것이지요.

별을 보면 혼자 반짝이잖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누구한테 간섭받지도 않고 반짝이는 것이.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절대 신입니다. 이처럼 별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내가 은근히 절대적인 자아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바로 나는 지금 갇혀있음을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 실존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이 제일 괴로운 것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하면 될 것 아닌가? 다른 것은 싫어요. 그런 것은 식상해요. 마지막 희망은 하늘의 별이 되는 것입니다.

별을 영어로 스타라고 하는데, 과외에 매여 있고, 수능에 매여 있는 청소년들이 꿈꾸는 것이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연예인 스타 또는 스포츠 스타를 꿈꿉니다. 야구의 경우 강정호 선수같이. 이런 선수가 몇 명 중에 한명이 나옵니까? 수천명 중 한 명입니다. 인기 배우, 가수가 몇 명 중에 한명 나옵니까? 희박한 확률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례 요한은 혈연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세례 요한도 부모가 분명히 있습니다. 무론 친척들도 있고.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지요. 본인은 얽매여요. 본인은 혈연관계를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성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을 그냥 이웃집 아저씨로 보지 말고 성도의 모델로 보세요. 왜 그런가? 주님이 개입해서 혈연관계를 끊으시고 주님과 맺어진 관계가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목사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아요.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론하지.

누가복음 1장 39-41절을 보겠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리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례 요한이 까뮈가 [이방인]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적 실존은 아니지만 태중에서부터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절대적 실존입니다. 요한이 지상에서는 세례 요한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예수 안에 있는 요한이 되겠지요.

이것은 기존 아담과의 혈연관계는 처음부터 끊어져야 되고 세례 요한이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사는 그 육은 어디에서 공급받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 지고 부활한 육이 있어야 돼요. 그 육과 세례 요한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이 바꿔치기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바꿔치기 되면 세례 요한이 갖고 있던 그 아담의 몸은 껍데기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꿔치기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육의 몸으로 죽고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아담의 몸이 아니고 영광된 몸이에요.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몸으로 부활된 겁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할까요? 성도의 실존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내가 어디 있지?’ 이런 질문을 성도는 해야 돼요. 그러나 성도 아닌 사람은 이런 질문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몸을 자신이 만질 수 있기에 그런 질문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 몸은 껍데기고 진짜 몸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 이 몸 죽어서 하늘나라 가야지.’ 이렇게 내가 결정하고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례 요한처럼 혈연관계와 결별한 징후들을 사건을 통해서 알려줘요.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이 2,000년 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고조선 시대 어떤 청년입니다. 고조선 시대 청년과 오늘날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 나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그 사실이 그냥 인정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는 요즘 신앙이 떨어져서 은혜가 안 됩니다.”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주기도문만 외워도 눈물이 나는데요.” 특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대목입니다. 주기도문을 할 때 그 현실감,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받고 있는 현실감으로 인해 나의 존재마자 망각할 지경이 되면 나의 걱정, 근심은 논의할 거리가 안 됩니다. 

내일 시험 치는 00는 긴장도 되고 할 텐데, 주기도문을 차분히 외워보세요. 그 구절이 현실로 다가오면 시험에 대한 부담감은 흔적도 없이 살아질 겁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께 영광이 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뭘 걱정합니까?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를 만날 때(눅1:41-42) 핵심이 뭡니까? 임신된 아기 예수입니다. 이것이 현실 속의 현실입니다. 남들은 현실을 하나로 봐요. 그러나 성도는 현실 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어요. 우리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의 운명이기도 하고.

“변화산에 들어간 모세와 엘리야처럼 주님이여, 우리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오셨지요?”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지?”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도는 이런 말을 서로 주고받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혈연관계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해도 다 혈연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엄마는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혈연관계에 놓인 인간이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빈말이고, 하나님을 찾아도 결국 혈연관계로 돌아갈 뿐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두꺼운 혈연관계의 벽을 뚫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 쏘아올린 우주선이 왜 실패를 했습니까? 중력이 세서 그래요. 그런데 중력보다 더 센 것이 혈연관계입니다. 로켓 만든 과학자들이 돼지머리 앞에서 절하며 고사 지내지요.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이번 일에 성공하면 나의 능력을 인정받고, 인정받으면 승진하고, 승진하면 내 처자식 잘 먹고 잘 살게 됩니다.

인간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은 혈연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위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지막 할 말은 “여보, 사랑해!” 이것입니다. 진작 그런 소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꼭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면 이런 소리를 합니다. “엄마, 사랑해!” 이런 말을.

인간은 모든 것이 혈연관계와 얽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육의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혈연관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혈연의 중력에서 끊어지면서 예수 안에서 영생 얻을 사람인 것을 우리는 예상도 못합니다.

성도나 비성도나 예상을 못해요. 예상 못하는데 낯선 사건이 와요. 그 순간 이것이 나의 주체가 됩니다. 낯선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체가 되기 때문에 기존의 주체는 무너집니다. 낯선 사건이지 익숙한 사건은 아닙니다. 익숙한 사건으로 이미 구닥다리 주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안 됩니다.

새로운 낯선 사건이 터지면 기존의 구닥다리 주체는 사라지고 새로운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 주체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고 나는 주님이 만드는 결과물인 것을 파악한다면 그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주체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언약이 빠지고 내가 하루하루 알아서 반성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왜 태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역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태어났지요. 12제자는?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혈연관계만 생각하고 그곳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런데 낯선 사건이 침투하게 되면 주님과 관련되는 것이 원래 나의 집안이고, 내 인생이 보여줄 것은 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의 공통점은 어떤 식의 삶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내놓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재미없거든 사는 방식을 바꿔보세요. 라면을 먹다가 라면을 안 먹는다든지, 운동을 안 하다가 운동을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사는 방식을 바꾸는데 내가 알아서 바꾸면 혈연관계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주께서 바뀌게 하는 방식이 있어요. 갑자기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밀가루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해서 즐겨 먹던 라면을 먹지 않게 되는 경우는 주님이 주신 낯선 방식인데, 이 방식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가는 인생인 것을 힌트 주는 순간입니다.

인생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익숙한 같은 방식으로 살기에 늘 같은 주체이기 때문인데,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만 이끄시는 독특한 길로 가시고 그것을 남에게 평가 받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가는 길에 대해서 남에게 평가 받기를 원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타인이 나의 모델이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 칭찬 받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람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인생이 있어요. 다 다릅니다. 그리고 타인은 주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을 모릅니다. 만약 알면 미리 예상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엉터리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야 해요. 그리고 몰라도 괜찮아요.

누가복음 1장 62-63절에 ‘무엇으로 이름하려는가 물으니 저가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라고 나옵니다. 왜 부친의 이름을 딴 사가랴가 아닌 요한이라고 씁니까? 이것은 바로 성도는 혈연관계에 매인 사람이 아니고 예수와 관련된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럼 ‘요한’이란 이름은 누가 지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이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됩니다. 다른 이름은 필요 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이름, 야곱, 예레미야 등을 붙어봐야 그것은 이미 지나간 구닥다리 남의 이름이고, 성도의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왜냐?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이름을 붙일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현재 우리 이름은 껍데기, 아담에게 붙여진 것이고 나는 예수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살 필요가 없어요. 모든 성도는 예수 이름 증거하기 위해서 살지 내 이름 증거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서울 중량구에서 47세 된 목사를 68세 된 목사가 칼로 찔렀어요. 칼에 찔린 목사가 칼을 빼앗아 자신을 찌른 목사를 또 칼로 찔렀어요. 목사끼리 칼부림으로 인해 둘 다 입원해 있답니다. 칼로 찌른 이유가 젊은 목사가 자신을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판정 기준을 저는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으로 내립니다. ‘심판하는 것은 주께 맡기라’고 했어요. 왜냐?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억울하게 죽었어요. 그러나 자기 영혼을 아버지께 맡겼지요.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지요. 죽은 자는 우리 영혼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맡겨야 합니까? 내 모든 인생을 아버지께 맡겨야 돼요. 죽은 자가 어떻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나를 성령으로 죽게 하신 그분께 소유권이 넘어갔으면 그분께 맡겨야지요.

남이 나에게 욕을 한다면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내 주인 되시는 분이 나를 욕하도록 어떤 사람을 동원한 겁니다. 왜? 환란 가운데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술사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데 그 비둘기는 검은 천으로 덮힌 바구니 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요.

주 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나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당했던 환란과 핍박을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조각품을 만들 때 먼저 틀을 만들고 그 틀이 깨어지면 조각품이 만들어지지요. 그 틀로 동원되는 것이 마귀들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누가 내게 욕을 하거든 환란 가운데 소망을 바라보라고 주께서 보낸 분으로 여기시면 됩니다.

환란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노골적 환란이 있고, 정신적 환란이 있어요. 노골적 환란이란 폭행이나 욕설 등이 있고, 정신적 환란은 타인이 나를 압박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나를 압박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도박하는 것입니다. 도박하는 사람만 정신적 환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주부도 ‘오늘도 좋은 일만 있게 하옵소서.’라고 소망하는 것, 이것이 도박입니다.

정신적 환란은 사적인 것이 있고, 구조적인 것이 있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구조적 환란을 받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 된다.’고 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해도 가난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 버는 타이밍을 놓치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래방, 빨래방은 한 물 갔는데 뒤늦게 그런 사업에 뛰어들면 망하기 십상입니다. 폭락하고 있는 주식을 왕창 매입해서 망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타이밍입니다.

구조는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 범위, 내가 아는 정보 범위를 벗어납니다. 해변에 고기가 몰려와서 잡으려고 하는데 파도가 강하게 밀려오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파도를 제어하려면 바다의 몇 킬로미터를 장악해야 됩니까? 세상이 파도처럼 몰아치는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을 ‘3포 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고 3포 세대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들이 30년 전에 태어났다면 다 취직했습니다. 그때는 일 할 사람이 모자라서 난리를 쳤으니까요. 이런 것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말씀은, 평소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최종 심판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립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 갈 사람을 내가 좋아할 수도 있고, 천국 갈 사람을 내가 배척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방해하는 꼴이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싫어합니다. 내가 주인인데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하니 싫지요. 내가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되면 망나니가 됩니다. 망나니는 옛날 칼로 사형을 집행하는 자입니다. 어느 시점에 죽일 지 칼을 들고 춤을 추면서 기회를 보다가 단칼에 목을 치지요. 본문에 나오는 헤롯이 바로 망나니입니다. 

본문에 보면 헤롯이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막6:14).” 지금 헤롯이 빠짝 긴장이 된 거예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혹시 내가 억울하게 죽인 세례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을 했습니다. 지금 헤롯은 혈연관계에 매여 있지요.

혈연관계에 매여 있다는 말은, 자기를 둘러 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하고, 칭찬하면 그것이 나의 존재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런 평가를 기대해서 헤롯은 자기 관리에 나섭니다. 그런데 왜 공포가 발생하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공포’입니다.

마가복음 6장 14절에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에는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이렇게 나오고, 뒤에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가 나옵니다.

왜 공포가 발생합니까? 근접성 때문에 생깁니다. 이물질이 내가 설정한 경계선에 가까이 오게 되면 적색 신호가 옵니다. 우리 몸에 땀이 나면서 반응을 합니다. “주인님, 외부인이 접근해 옵니다. 백혈구는 마음에 준비하시고 바이러스가 침투할 때는 전군이 힘을 합쳐 막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자기 몸을 지탱하게 되어 있어요. 적이 멀리 있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가까이 오면 아무리 친한 형제, 자매, 자식이라도 공포를 느끼고 밀어냅니다. 적은 내가 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상대입니다. 상대의 정보를 모르면 그가 나의 적이 됩니다. 히틀러는 적이 아닙니다. 완악한 자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면 긴장이 되고 두려워서 접근 금지령이 발동됩니다. 공포 때문에. 그런데 세상 학문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답변이 나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왜냐?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나에게 굴복당한 거예요. 아가에 나옵니다.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을 자꾸 따라붙어요. 그런데 그 여인은 문을 잠그고 도망을 칩니다. 왜 그럴까요? 이 관계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이란 내가 예상하고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가 예상한 것, 바라는 것을 받기 원합니다. 왜냐? 공포가 없는 상태에서 내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세 아이에게 엄마가 “김치도 먹어라.”고 하면 아이는 “싫어!”하고 안 먹습니다. 왜 먹기 싫어할까요? 자기가 예전에 김치를 먹어 봤어요. 먹어보니까 맵고, 짜고 해서 먹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는 김치가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김치를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사랑 아닙니까? 사랑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한테 김치를 주면서 뭐라고 합니까? “침치 먹어라. 이것이 엄마의 사랑이다.”라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따라다니면서 입 벌리고 강제로 먹이는 거예요.

심지어 죽어도 되살려 냅니다. 이런 모습은 “네가 생각하는 인생을 나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네가 원하는 멋있어 보이는 인생, 훌륭해 보이는 인생을 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너는 나를 닮아야 해.’

오는 주일 설교할 본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본받으려고 하지요. 그게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 중 내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껍데기를 장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찾아오면 “네가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 모르지? 내가 깨닫게 해줄게.” 이렇게 됩니다.

욥이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주실 바에야 차라리 죽이시지 왜 살려두십니까?’ 그런데 결국은 주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말씀 중에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고백이 나오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셨지요.

왜 인생이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인생이 아닙니까? 나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인생이 왜 아닌 거예요? 그것은, 사랑은 우리가 느끼는 공포를 타넘고 오기 때문에 그래요. 무서워서 저지선을 설정했는데, 그 저지선을 넘어서면 자포자기가 됩니다. 일종의 강간이죠. 그냥 덮쳐버려요. 주님이 덮치시니 누구에게 신고할 수도 없고 --

만약 내가 38년 된 병자였다면 주님께 따졌을 거예요.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왜 38년 동안 병자로 살아야 합니까?’ 라고. 12년 동안 귀신 들린 여인이 주님 만났을 때 따질 마음이 없었겠어요?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는 귀신에 들렸습니까?’라고 따지고 싶을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왜 나를 강도로 살게 했습니까?’라고 따지고 싶었을 것인데, 이 3명의 특징은 원망이 아니라 감사였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이렇게 살게 하셨지요?”라는 마음으로 “주여, 저를 생각하옵소서.”라고 합니다.

10분 쉽시다.

(2015. 11. 4. 09:45 녹취 마침)
 서경수 (IP:175.♡.232.200) 15-11-19 08:27 
광주 강의(2015. 10. 23) 20-2

정보가 없는 상대는 일단 적입니다. 아들이 여자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면, 부모의 입장에서 그 여자 친구는 적입니다. 그래서 일단 정보를 캐내야 합니다. “아버지는 뭐하시지?” 이런 식으로. 적에서 우리 집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 내가 판정을 내리지요.

근접성을 어디 정도까지 허락하는가? 잘 사는 집 아이면 자기 근접성을 많이 허용하고, 못사는 아이면 멀찍이 떼어놓지요. 그 안에는 공포심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공포심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말씀 때문에 생겨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이웃을 통해서 알아요.

외동딸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예쁜 동생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딸은 “나도 동생이 있다면 정말 사랑해 줄 텐데.” 라고 상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이 자기보다 1살 어린 딸을 데리고 와서 하룻밤 같이 자게 되었습니다. 그 손님이 가고 난 뒤에 엉엉 울었어요. 왜냐? 하룻밤 같이 자는데 동생이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해서 울었어요.

상상할 때의 동생은 나로부터 나온 동생이기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 주위에 배치한 타인들은 내가 날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내가 공격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장착하고 내 앞에 등장합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발전하는가?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덧붙이기를 ‘너를 아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지옥 갈 이방인도 그렇게 한다. 그러니 너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다.’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너에게 찾아오는 공포를 네가 넘어설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쓴 잔을 마실 때 일단은 거부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여기에서 잔을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인 것이 확연히 드러났지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왜냐? 내가 원치 않는 것이 내 바깥에서 나의 공포를 넘어서서 나에게 침범해 들어온 거지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구원하실 때 구원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주님과 나의 의견이 일치해서 주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여서 주님이 날 구원하십니까? 우리가 외면하고 싶고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건과 사태를 만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자임을 분명히 해주시고,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감히 구원은 꿈도 꿀 수 없고 저주가 마땅한 자임을 확실히 인식 시킨 후, 주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펼쳐지지요.

그럼 여기에서 밝혀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예상 못했는데 예상 못한 사랑이 찾아온 사람은 예수님만 증거하겠지요. 아가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여인은 남자가 너무 대시를 하니까 무서워서 도망치지요. 어디로?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도망을 갑니다.

솔로몬이 찾아와서 날리는 단어가 있어요. 그런데 그 단어들이 너무 과도해요. 입술, 눈, 가슴 모든 신체부위를 세상에 있는 것 중에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만 골라 그 여인에서 쏟아 붓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가진 공포심을 허물어지게 합니다. 나의 자의식이 무너지지 않으면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아가에서 넘치는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2장 14절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기에서 ‘기뻐하심을 입은’이라고 했지요. 제가 집사님이 만들어주신 옷이 좋아서 자주 입고 다니는데,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어야 돼요.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으면서 우리가 주님께 대해 가지고 있었던 공포심이 사라져 버립니다. 주님의 사랑이 몰래 숨어서 온 것이 아니고 현재 우리의 강력한 저항선을 뚫고 쳐들어 온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몸에서 나오는 모든 향기는 주께서 좋아하십니다. 그 냄새는 말씀의 향기입니다.

“이런 경우는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을 성취하려고 하시는 것이구나. 아하,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이군요. 이 사건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뜻이네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게 됩니다. 이 말씀을 모으면 거기에 사랑이 들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들어 있고,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2장 10절에서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식(율법 지침)으로 구원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해주는 것입니다. ‘기다려 봐. 내가 너를 사랑할 테니까.’ 그런 뜻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만 지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서 율법 지킨 효과를 사랑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주시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따사롭습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는데, 탕자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가 탕자를 보는 마음이 달라요.

탕자는 그저 죄송하고 미안하지요. 그래서 차마 ‘아버지의 아들’로 대우받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품군 중 하나’로 대우해 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특급 사랑으로 아들을 대우합니다. 정말로 성경은 쉬워요. 간단히 말하면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상세히 표현하면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준다.’ 그러니까 ‘너의 사랑은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그럼 주님이 주신 사랑을 내놓게 되면 어떤 현상은 일어나는가? ‘주여, 저는 주 앞에 죄인입니다.’ 이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이 주님 십자가 안에서 반복되는 겁니다. 누가 무엇을 바치라고 했습니까, 밤을 새워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은 친히 주시는 분이지 받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아 챙긴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의 이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여도 주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나이가 90이 되고 100세가 되어도 ‘저는 주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말이 어렵습니까? 이것이 주님 앞에 얼마나 예뻐보이는 말인지 몰라요.

세례 요한은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 의해 성령의 지시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혈연관계와 상관없이 태어난 것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 말에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어쨌건 태어난 것은 맞잖아? 혈연관계가 아니면 어떻게 태어났어.’라고.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변하면 됩니까? 엄마 엘리사벳이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를 만나서 뱃속에 있는 세례 요한이 뱃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기쁨으로 뛰놀지요. 그래서 혈연관계는 아니고 예수님과 관련된 상태에서 태어났지요.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성도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혈연관계에서 끊어졌다는 것이지요.

혈연관계에서 끊어졌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를 증거하겠어요? 살아온 인생 전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도지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게 되면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가?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죄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죽게 된다는 것을 세례 요한이 앞당겨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사람(혈연관계)의 대표자가 누구입니까? 헤롯입니다. 헤롯은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헤롯의 공포는 어디에서 생긴 공포냐? 세례 요한이 죽은 것 때문에 생긴 공포는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소문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는 말은 혈연관계와 상관없이 주님이 살리신 것이 되지요.

이것을 헤롯이 왜 겁냅니까? 본인은 혈연관계에 매여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혈연관계에 매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분명히 죽었는데 다시 살았다는 의식이 드니까 죽음을 무서워하는 모든 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질적인 존재가 되겠지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이웃을 예수님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환경을 그렇게 조성하신 겁니다. 헤롯이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일 때 겁이 나서 안 죽였습니까? 죽였어요. 그러면 누가 강자예요? 세례 요한을 죽였으니까 헤롯이 강자잖아요.

그런데 강자가 왜 겁을 냅니까? 희한하지요? 헤롯은 왕인데 세례 요한을 겁낼 이유가 없잖아요. 혈연관계에서는 왕이 평범한 백성들을 겁내지 않아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혈연관계에 속한 인물이 아니기에 헤롯이 그를 알지 못합니다. 모를 때는 적이 되고, 적이 되면 공포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비나 귀신을 두려워합니다. 무당이나 접신자들을 사람들은 비난하면서 멀리합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멀리해요.

모든 인간은 혈연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헤롯과 같이 우리가 알아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성립됩니까?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을 저쪽에서 해소시켜주면 되지요. 그러면 저쪽에서 이웃으로 오셔서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을 뛰어넘어 쳐들어오면 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그분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성취합니다.

산상설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이것 역시 주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에 나와요. 우리는 주님의 원수였는데 주님이 피로 의롭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사도 바울은 논리적이고 딱딱하게 이야기했지만 아가에 보면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아4:3).” 이렇게 표현했어요. 

아름다워서 아름답다고 하기 보다는 억지로 너는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어요. 심지어 ‘산천초목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묘사하기 위해서 너희는 아름다워야 돼.’ 이 정도까지 나옵니다. 이 세상 좋은 것은 전부 끌어들여 ‘여인아, 내가 이처럼 너를 사랑한다. 제발 좀 나에게로 와라.’고 소호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혈연관계가 아닌데 혈연관계로 일방적으로 주장합니다. ‘내 사랑하는 누이야.’라고. 우리는 처음부터 혈연(오누이)관계였다는 겁니다. 영적인 혈연관계지요.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 챙기기지요. 이런 것을 알면 성경은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일상생활에 파묻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라요.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마음껏 살아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어요. 결국은 아버지께 돌아오면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15:18-19).”라고 하면서 죄인으로 아버지께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렸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야 내가 예상 못한 주님의 뜻이 생산됩니다.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통해서 내가 예전에 알았던 하나님이 아닌 말씀이 점점 더 쌓이면서 알게 된 주님, 날 구원하기 위해서 왜 이 두꺼운 성경 말씀 전체를 동원하셔야 하는지, 그리고 날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까지 지셔야 하는지를 이제 알아가는 거예요. 주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범위가 넓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헤롯처럼 공포심을 갖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마가복음 6장 15절 이후의 말씀을 계속 봅시다. 그 전에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이런 말이 있었지요. 이 모든 것은 다 핑계입니다. 왜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헤롯은 왕이고, 왕이라면 모든 사람을 자기 밑에 두어야 하는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권세는 땅에서 온 권세가 아니고 하늘에서 온 권세가 있어요. 그러면 안 죽이면 되는데 타이밍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요. 헤롯의 딸이 와서 죽여 달라고 해요.

헤롯과 딸은 혈연관계지요. 이 혈연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려 쟁반에 담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지요. 그러면 오늘날 현연관계를 못 끊고 있는 우리에게 이 관계를 끊기 위해서 십자가 피가 들어가는 겁니다.

“혈연관계 안 끊어지지?” “예.” “헤롯처럼 딸이 사랑스럽지?” “예.” “그럼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네?” “예. 내 소유의 절반이라도 내놓겠습니다.” “딸에게 주면 즐겁나?” “예. 즐겁습니다.” 즐거울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바깥은 불안한 사회에요. 내 안의 세계가 안정된 사회입니다.

불안한 사회가 밀려오면 공포가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체적으로 성을 만들고 그 안에 안전사회를 만듭니다. 이것을 ‘비둘기 집’이라고 노래한 사람도 있어요.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 그런데 그 비둘기 집 바깥으로 나오면 모두가 나를 이용해서 이익 챙기려는 적들이 우글거립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래서 여자들은 일찍 집에 들어갑니다. 안전 사회 속에서 행복을 느끼니까요.

우리가 집안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상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공포에 포위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60-70년대 시골에는 안전사회 범위가 넓었어요. 리, 동 단위로 넓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아파트 옆 동도 못나가요. 범위가 좁아졌어요. 옛날에는 안전망의 범위가 넓으니까 어디를 가도 마음이 여유로웠어요. 지금은 자기 집만 나서면 불안합니다.

이제는 집 안에서도 싸움이 나는데 어디에서 평안을 찾겠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푹 파묻혀 살아야 되는데 내 스스로 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카뮈의 [이방인]처럼. 이것이 현재 자본주의 사회를 말해주는 겁니다. 하늘의 별을 봅시다. 별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요. 별은 하늘에 홀로 떠있어요.

헤롯이 이런 존재입니다. 혼자에요. 딸이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 세례 요한의 목을 주세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는 최고의 권한을 가졌잖아요.’ 이 최고의 권한이 혈연관계 속에서는 추가적 공포를 유발하는 요인이 됩니다. “네 아버지 뭐하시노?” “조폭인데요.” “이놈이 장난치나?” 영화 [친구]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을 발휘하지요. 마지막 대사 중에 “하와이 네가 가라!” 이런 말이 있어요.

주먹 세계에서 힘이 본인에게 해준 것이 뭡니까? 힘을 쓰다 보니 적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 적 앞에서 자기는 어떻게 되는가? 파탄에 이르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적이 줄어듭니까, 늘어납니까? 늘어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데 감당할 수 있는 공포와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랑만 허락하시는 겁니다.

최고의 공포는 죽음이고, 죽음을 실패로 간주하는 그 공포를 주께서는 능가하게 해주십니다. 헤롯이 딸을 기뻐하면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할 때, 딸은 ‘요한의 목을 주세요.’라고 합니다. 이 때 헤롯의 위치는 누가 부러워하는 위치인가 하면,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부러워하는 왕의 자리입니다.

23절을 봅시다.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나라의 절반까지 준다면 임금의 권세가 반으로 줄어드는 겁니까, 아니면 임금이 더 부각되는 거예요? 부각되겠지요. 부각되지만 결국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두려워한 거예요. 자기의 권력 행사가 공포로 증가되어 다가옵니다.

권력을 좋아하지만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아야 합니다. 권력은 공포가 수반됩니다. 누가 욕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구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착해도 망합니다. 지하철에서 계속 전도한 사람 예를 들었지요. 열심히 전도했는데 한 사람도 예수 믿겠다고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은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는 착한 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망하면 안 된다는 공포심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이 시켜서 전도했으면 됐지 몇 명이 구원되었는지 그것을 왜 따집니까? 전도자가 정말 주님이 시켜서 전도했다면 몇 명이 결실할 것인지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가에 보면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공포가 없어요. 공포가 없으니까 주님 사랑의 힘으로 삽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있어요. 세례 요한이 이런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성도의 모델이라고 했잖아요. 세례 요한이 잡혔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주님이 무대에 등장하셨기에 나는 은퇴해야 한다고.

세례 요한의 목이 쟁반에 담겨 왔습니다. 헤롯이 강자입니까, 헤롯의 딸이 강자입니까? 딸이 강자입니다. 최고의 권력자도 자기 딸을 못 이겨요. 헤롯이 딸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어요. 반을 주면 딸은 반을 받고도 왕 밑에 있어요. 왜냐? 내가 원하는 것을 딸이 받았기 때문에 딸은 나에게 예속되지요.

그러나 딸이 요구한 것은 자신이 예상치 못한 세례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헤롯의 딸은 아비를 닮아서 잔인하다.’고 하는데, 잔인한 문제가 아니고 최고의 권력에 누수가 생긴 거예요. 구멍이 뚫린 거지요. 구멍 뚫은 자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죽기까지 세례 요한은 헤롯의 손에 잡히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겁니다.

그래서 헤롯은 구멍이 뚫렸고, 예수님이 활동하니까 헤롯은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저놈의 귀신이 죽지도 않고 나를 괴롭히네.’ 세례 요한의 유령이 살아났다고 떨고 있습니다. 뭔가 캥기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죄가 주는 공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말씀을 지킨다. 바르게 산다.’는 말은 ‘나는 헤롯처럼 불안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의 뻥 뚫린 구멍을 선행으로 메우려고 하는데 메워지지를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착하게 되면 착한 것이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장시키는 재료가 됩니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사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반드시 뒤에는 이런 것이 붙어요.

이렇게 원망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막사는 것이 낫지요. 죽은 자가 산자를 힘들게 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지요. 그 후에 살아났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걱정이 되어서 ‘어찌할꼬?’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예수님이 살아있음을 인정하고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빌어라. 그러면 너희가 이제부터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사람으로 살면 구약에 약속된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지요.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이방인은 일단 말씀 속에 들어가서 유대인이 되어야 해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믿는다. 말씀 지키자.’는 그 행세가 옛날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고 한 행세와 같은 행세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살다가 성령이 임하면 그동안의 내 모든 행위가 나를 치장하는 쓸데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나를 위선적으로 포장한다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공포 속에서. 왜?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서 착한 사람이 되어서 복도 받고 천국도 가려고 수작을 부린 겁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운명은 예수의 삶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은 ‘길을 비켜라. 물렀거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소리가 실체이신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어요.

관련성을 말하는 이유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관련을 맺고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세례 요한만 모델이 아니고 헤롯도 우리의 모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요. 만약 아들이 “엄마, 좀 도와줘!”라고 하면, 안 도와주겠어요? 아낌없이 다 도와줍니다. 왜냐? 인간은 혈연관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이것을 상처처럼 박히게 만듭니다. 십자가가. ‘너는 그런 인간이야!’라고 우리 내부에 이것을 고발하는 트라우마가 십자가로 박혀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갑니다. “주님, 제가 바로 헤롯입니다. 지금도 세례 요한을 죽여야 한다면 죽일 인간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예수와 바라바 중 누구를 풀어줄까?” 물으면 나 역시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할 인간입니다. 왜? 같은 인간이 좋이 내 영역 밖의 초월적 존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 헤롯은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가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했고, 25절에서 딸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인생과 얽히고 싶어합니까? 아니지요. 왜냐? 자기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안전망에 예상 밖의 세례 요한이 개입을 해요. 이게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헤롯과 아내, 그리고 딸을 에버랜드의 장난감처럼 배치를 해서 세례 요한과 얽히게 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앞서 벌어진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혈연관계 속에, 결속된 나만의 안전망 속에 터진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어쨌든 주님의 십자가와 얽히게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죄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헤롯, 그 아내, 딸을 다 섞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건을 일으키듯이 우리 인생도 헤롯 그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서 내 욕망을 쫓아 살고, 혈연관계에 묶여 엉뚱한 짓을 해서 내게 구멍이 뚫리게 하셔서 나의 죄를 지적하실 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헤롯이 12년 동안 귀신이 들렸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38년 동안 병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멀쩡하게 살다가 죽었지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헤롯을 어떻게 볼까요? 그냥 살다가 평범하게 죽었다고 보지요. 헤롯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그는 평생을 시달렸어요. 아니 죽고 난 뒤에도 지옥에서 시달리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상처가 있고, 그뿐만 아니고 우리 죄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님의 사랑의 사람으로 새롭게 제조되기 위해서 주께서 내 인생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데 그 인생이 바로 지금 내 인생 이 모습입니다. 재벌이 되겠다고 상상하지 마세요. 지금 이 모양 이대로가 주님 보시기에 가정 적합한 인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공포가 주님이 의도하신 바가 있어서 주신 공포이기에 성경 말씀 앞에서 그것마저 주님의 사랑인 것을 소급해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