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신 7장 17-21절(왕벌)1508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7장 17-21절입니다. 구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 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성경에서 신나는 일이 나올 때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고요.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은, 제발 우리 인생을 좀 가만 놔두면 안 됩니까? 그냥 왕벌 보내시고 좋을 일 그런 것도 귀찮아, 그냥 가만 놔두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부터 아브라함은 사실은 미치기 직전에 빠진 겁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 않고 저를 달리 관리하십니까? 다른 사람은 자기 인생 자기가 계획해서 자기가 관리해서 잘도 사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저가 뭔데 찾아오셔서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떠나면 뭐 줄게, 안 줄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왜 우리를 귀찮게 하느냐 이 말이죠. 남자는 하여튼 여자를 귀찮게 해.
왜 우리 인생에 관여하시고 개입하시고 왜 그렇게 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부터가 불쾌해요. 진짜 하나님은요, 제가 낮 설교에서 하나님 없다 했는데,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하나님입니다. 불쾌하게 만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의 건전성과 참신함과 착함, 이런 것들을 챙기기 위해서 나한테 어떤 불편한 요소는 제거 대상이 되겠죠.
그 제거 대상에서 같이 날아가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은 우리가 가짜 하나님을 이미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미 우상숭배를 하고 있으니까 진짜 하나님이 찾아와도 그걸 떨쳐버리는 겁니다.
욕조에 아기를 목욕시켜놓고 아기를 버리지 않는 방법은 없어요. 물과 더불어서 아기도 같이 버려야 되요. 애도 같이 버려야 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착해지려면 우리 자신도 같이 착해지려고 하는, 고 본 내용이 되고 목적이 되는 나도 같이 더러운 존재라고 간주 당해야 되요. 그렇게 돼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찾아왔는가, 이스라엘을 치워버리기 위해서 찾아온 겁니다. 이 역사라는 장막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을 지금 커버, 가리고 있거든요.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근데 아들이라는 개념이 무슨 개념이냐 하면 이것이 인간이 선택된 개념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찾아오는 존재가 아들이지 내가 뭐 따로 노리고 들어갈 수 있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부모도, 나쁜 부모 강도의 부모, 살인자의 부모라 할지라도 이미 태어난 자식에 대해서는 자기가 거기서 손을 뗄 수가 없어요. 애를 낳았는데 애가 밤에 운다, 울거나 말거나 나는 모른 척 할래. 그건 굉장한 강심장이 아니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내가 잠을 못 잔다 할지라도 우는 애 잠 재워놓고, 그 다음에 새근새근 잠자는 모습 보고, 그 다음에 엄마가 그 옆에 잠을 자게 되어 있어요. 이거는 내가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의 존재에 내가 종속되고 딸려가는 거죠. 애 잘 때 같이 자고 애 먹을 때 같이 먹고, 그래서 애 놓을 때 여자는 살이 찌도록 되어 있어요. 만날 자니까. 애가 하루에 한 열 시간 넘게 자는데 엄마도 같이 자니까. 남은 밥 처리한다고 다 먹고 하니까 살이 안 찔 수가 없죠.
그런데 그렇게 애를 키우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어요. 그것은 다른 운명이 난입한 것이고 이거는 무례하게 침투한 거예요. 예의 없이. 둘이 사는 가정에 애가 태어났다, 근데 그 애가 밤이면 밤마다 운다,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니가 뭔데 이 정다운 우리 가정의 밤을 깨느냐, 이렇게 해도 애는 몰라요. 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거 유튜브에 보면 제목이 <통성기도 하는 아이>라는 유튜브가 있어요.
그 유튜브를 보게 되면 할머니인가 할아버지인가 애에게 자꾸 통성기도를 시켜요. 그런데 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여! 주여! 아버지여!” 하면서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하면서 노래하는 것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대목에서 잘 들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할머니가 옆에서 사주를 해요. “집사게 해주세요. 집사게 해주세요.” 하니까 애가 주여, 하면서 제목을 집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무슨 집사주는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성경에 그런 하나님 봤어요? 하나님이 어디 부동산 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까? 십자가 안지시고 부동산 계약서 갖고 오시는 겁니까?
십자가 자체가 불쾌해요. 그래서 오늘 낮 설교 때에 어떤 아줌마 뛰쳐나갔습니다. 더워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불쾌해요. 그걸 성경 로마서에서는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나를 불쾌하게 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고건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우리가 너무 불쾌해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어요. 우리가 선택할 수 없기에 우리는 선택 당함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내 쪽에서 떨쳐버렸는데 저쪽에서는 나를 버리지 않았어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존재 기반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결책이 없어요.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는 코스는 이스라엘이 예상 못한 길을 가는 겁니다.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가는 베드로처럼. 이스라엘도 그런 길을 가는 겁니다.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런 길로 접어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좋아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으니까 조용히 그냥 나를 놔두면 좋겠어요. 그래서 누가 예수 믿으라 하면 싫어요. 나는 내 맘대로 살 테니까, 술을 먹든 담배를 피우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지옥가도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간섭하지 마라고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안 믿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평소에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내 인생 누구한테 침입당하지 않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수시로 찌르면서 침투한다는 게 이게 문제거든요. 침투할 때 그냥 침이나 놓으면 몸이나 건강하지, 침을 놓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침을 놔버려요. 그러면 그 말씀은 내가 기대했던 것, 나는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이것을 불쾌하게 만들어버려요. 이질적인 요소가 침투하게 되면 원치 않는 길로 가면서 그 원치 않는 동네가 말씀의 동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네죠.
예수님이 펼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침에 이야기한 신령한 것이 그렇게, 우리가 필요한 것에 그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불쾌함을 동반해서 신령함에 들어가요.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뭐냐,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작업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할아버지가 햄버거 사먹으러 가면서 이발소 옆에 있는 햄버거 집에 갔어요. 이발소 옆에 있는 햄버거 집에. 두 개 샀어요. 그러면 이발소 옆을 지나가서 햄버거 집에 쑤욱 지나 갈 때에 그 할아버지의 모발은 그대로입니다.
원래 뭘 거쳐야 되냐면 할아버지가 이발소에 가서 머리 다듬고 이발 끝나고 난 뒤에 햄버거 집에 가게 되면, 햄버거 사러 가면서 자기 머리 손질 당하고 햄버거 먹게 되는, 이래 되어야 하는데, 그냥 햄버거 먹고 싶어서 이발소 지나서 햄버거 사오게 되면 그 할아버지의 모발은 아무 이상이 없죠. 그대로죠. 성경을 보면서 천국 이야기 나오니까 천국이 성급해가지고, 햄버거 가게가 급해가지고 앞에 이발소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천국 들어가겠다고, 뭔가 해보겠다고 이렇게 시도할 때, 그 사람이 아무런 변화 없이 가는 천국은 그게 가짜거든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전에 뭐냐 하면 이발소를 두었습니다. 그게 광야입니다. 광야 거쳐서, 이발소 거쳐서 햄버거 가게에 가야 해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곳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발소를 들어가게 되면 보통 이발소는 머리카락을 손질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이발소는 목을 잘라버려요. 우야꾜(어떻게 하나? 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가 아닙니다. 우야꼬가 아니고 목을 잘라버립니다. 왜 목을 자르냐 하면 목 위에 얼굴이 있어요.
이 얼굴은 눈이 달려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마음이 표현되는 겁니다. 이 얼굴을 잘라버리므로 말미암아 이거는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게 만들어요. 근데 얼굴을 잘라버리면 눈이 없어지니까 타인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시선이 없어요. 남을 보는 시선이 없어버리면 수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겁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이에는. “주님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쉬잇!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야!” 남녀가 그렇게 연애할 때는 몸 사리다가 막상 결혼하고 나면 요강을 자기 방에다 두듯이.
부끄러운 것을 모를 때, 그게 비로소 행복한 가정이잖아요. 서로. 방구 트고 다 트고 트고. 처음에 나 혼자 살 때는 나를 사수하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데 이제 타인이, 내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에서는 뭐냐 하면 나도 없어지고 타인도 없어지고 남는 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수치 없는 사랑의 관계, 그것만 남아요. 수치가 없어야 되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죄짓고 난 뒤에 죄지었다는 티로 수치가 있기 때문에.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 안에는 부끄러움이 없고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무서움이 없거든요. 그리고 우리를 가려주니까. 우리를 가려주는 것이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은 다 연계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하는 여인을 가지고 자기를 바라보게 한 거예요. 옆에서 누가 뭐 주홍글씨니 빨강글씨니 해도 관계없어요. 주님이 나를 자유케 해버렸어요. 주님 앞에서 합격이면 어디가도 합격자에요. 가끔 일이 있어서 촌에 가게 되면, 옛날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구 아들 사법고시 3차 최종합격’ 그런 글씨가 붙어있어요. 근데 요새는 그게 점점 더 진화가 되어 가지고, ‘누구 애 LG 야구선수 합격’ 희한한 것이 다 붙어 있어요. 어떤 때는 ‘공인중개사 합격’ 이런 것도 있고. 공부시키는 에듀윌 같아.
천국에서 플랜카드를 겁니다. ‘쟤는 합격’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미 합격을 했기 때문에 이 합격한 것을 지상에 되돌려, 우리를 재파견 시켜가지고 살아있을 동안에 제발 자랑질 좀 해라. 니 못남을 자랑하고 니 죄인 됨을 자랑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라고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이 도무지 예상도 못한 거죠.
처음에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 “제발 나 살던 대로 놔두지 내 인생 왜 건드리십니까? 왜 차고 들어오십니까?”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끝나고 보니까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한다는 이 자체가 사실은 타인을 의식한 거예요. 타인을. 보통 드라마 제일 끝 장면이 이렇게 끝나요. “아무데 없는 곳으로 떠나자. 당신하고 나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자.” 얼마 전에 ‘가면’이란 드라마가 마지막 이 대목으로 끝나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자. 그걸 생각하면 남이 있으면 왜 안 되죠? 왜 남이 있으면 안 되는데요? 남이 있으면 남을 신경 써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드라마는 백날 봐도 구원이 안 돼요.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왜 구원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왜 이스라엘 적들에게는 왕벌이 주어지는가, 그걸 언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왕벌이 주어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도 없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실제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참 이거 어려운 말이거든요. 있어봐야 안개니까. 실제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거니까 거기에 신경 쓰면 안 되잖아요.
저는 취미로 옛날부터 바둑을 좋아하는데, 어릴 때는 아버지 따라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고 화투는, 당구 뭐 이런 것은 돈이 드니까 돈 안 드는 것은 해요. 바둑, 장기 이런 것은 해요. 바둑이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바둑을 두다가 졌잖아요? 그러면 새로 하면 되요. 이게 좋은 점이이요.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서는 없애버리고, 없애버리고 하나님께서 심어준 것, 성령이죠. 하나님의 용서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되찾는 방법으로 우리가 딸려오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라 하는 것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은닉된, 숨어있는 그 신령한 세계의 무늬이기 때문에. 무늬, 하나의 포장지 안에 본체를 반영해주는 메아리고 파동이고 무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맹이가 신령한 것이 담겨 있으면, 신령한 것을 찾다보면 우리 포장지도 같이 달려서 구원받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보낼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를 관여한 줄 알았죠. 그러나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내가 난 자식입니다. 자식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근데 자식이 도리어 아버지를 살려요.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린다고요.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거예요.
좀 가만 놔두면 되는데 우리로 하여금 가만 놔두지 않고 우리에게 왜 개입하는가. 주님께서 집어넣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루성 때문에, 관계성 그걸 찾아 발견하라고.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짐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짐승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것은 잘못이에요. 짐승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에요. 옳은 질문은 뭐냐 하면 짐승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물어야 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이렇게 물어야 되요. 짐승이나 하나님은 내가 있다고 여기는 그곳에는 없어요. 내가 있다고. 내가 없는 존재로 만들 때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짐승이고 하나님이고 영적세계입니다. 내가 없는 곳에. 인간들은 짐승을 볼 때, 짐승이 무엇이냐? 이렇게 할 때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내가 알아서 관리하려고 해요. 왜, 내가 있는 지평에, 이 영역에 짐승이 있다면 그 짐승과 대결해서 내 힘으로 짐승을 물리치려고 하는 거예요.
뭐 인터넷 게임합니까? 그물 들고 설치게? 그게 대표적인 잘못된 개념이 뭐냐 하면 666개념이에요. 베리칩(verichip) 같은 것. 짐승이 뭡니까? 666이다. 666은 베리칩이다. 그러면 내 힘으로 어떻게 물리칠 수 있습니까? 이거 도장 안 받으면 되겠네. 그게 바로 남이 없는 곳에 살자는 드라마 끝 장면하고 똑같은 거예요. 남이 없는 곳에 살자. 그런데 그게 왜 잘못되었느냐 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계셨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남이 없는 곳에 살자.” 하지 말고 질문을 “나는 왜 있지?” 이 질문부터 해야 해요. “나는 왜 있지? 나는 없어야 되는데 나는 왜 있지?” 그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도대체 나는 왜 있는 거야?” 그 왜 있는지의 이유의 정답은 이미 있게 된 내 속에 칩처럼 이미 들어있어요. 말씀으로 들어있어요. 그런데 내 세계가 내가 생각한 현실이 너무 강렬해서 이것이 나의 존재 이유가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에 보냅니다. 이발소에 보내서 아예 목을 쳐버려요. 니가 보고 듣고 하는 이 모든 게 문제가 되요. 니가 아무리 보고 듣고 하게 되도 보고 듣고 하는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관리하게 되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목을 날려 버리면 이제는 몸은 있으나 내 힘으로 나를 커버하거나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요.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를 통과한 자가 광야를 통과하지 못한 자를 이기는 전쟁이 바로 가나안 약속의 땅의 전쟁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영적 전쟁입니다. 목 없는 미녀가 목 있는 미녀보다 더 이쁜 것, 그런 식이죠. 그러면 성도가 목이 달아났다는 말은 무슨 의미냐, 요 목 윗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박아놓아 버리는 거예요. 내가 생각해도 참 끔찍하다. 목 위에다가 십자가로 꽂아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나의 모든, 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모든 통제가 머리 부분에서 나오는 거예요.
엔진이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가 엔진이에요.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고. 주님에서 나오는 힘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아침에 참 어수선해서 미쳐버리는 줄.....,제가 전에 있던 박사교회부터 수 십 년 동안 하면서 이렇게 어수선 했던 적은 처음이었어요. 설교를 하라 하는지 말라 하는지.....,하지만 그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머리 부분이 이렇게 에너지가 나오죠. 제가 아침에 말한 것처럼 내가 먹고 싶어서 먹지 나를 살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기에 나한테 그런 식으로 먹으라 하고 나를 먹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제 아내가 미국 LA에 가 있잖아요. 그래서 또 우리 집사님이 걱정을 하셔 가지고 “목사님. 식사 어떻게 합니까?” 간단해요. 15,000원 주게 되면 피자 여덟 조각 나오거든요. 한 끼에 하나씩 먹으면 여덟 끼가 되요. 배고프다 싶으면 이걸 두 조각 먹으면 이게 네 끼가 된다고요. 여기에다 과일하고 우유 곁드리면 훌륭한 식사가 되요. 그럼 만 오천을 8로 나누자 이 말이죠. 그럼 한 끼에 2500원밖에 되지를 않아요. 다음에 수련회 갔다 올 때는 김밥 살 예정입니다. 왜 질려가지고. 한 줄에 1500원밖에 하지 않으니까 바꿀 예정이에요.
제가 하는 말은 결국 그게 사소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게. 중요하지 않는 일이에요. 빨래는 어떻게 하세요? 빨래는 그때그때마다 손빨래하면 되요. 주부의 맛은 손빨래에 있잖아요. 그때그때마다. 막상 이렇게 아내가 없어보니까 살만 해요. 안 일러줘도 다 듣고 있어요. 지금. 다 듣고 있다가 제 딸이 다 일러줍니다. 다만 삶의 질이 차이가 나죠. 삶의 질 차이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원주민들에게 왕벌을 보낸다는 말은 없으면서 마치 있는 체하기 때문에 왕벌을 보내서 다 없애버려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자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는데, 주님과 관련 없으면서 땅을 차지하는 것, 그거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허용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발소를 거쳐서 햄버거 가게에 가는 것처럼 광야를 거쳐서 가지 않는 사람은 진정 없는 내가 왜 생겼느냐? 근원적인 내가 누구냐? 내가 뭐냐? 나는 왜 인간이었지? 전혀 그 모든 해답을 모르게 됩니다. 이걸 모르게 되면 “아이구 몰라도 이왕 태어난 것..” 그리 되지 싶으죠? 문제는 끝을 모른다는 것.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말씀 안에 함께 들어있기 때문에 시작을 모른다는 말은 가는 길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시작을 안다는 말은 이미 도착지점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머리가 이미 머리 부분인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어떤 분하고 식사를 했는데, 어떤 분이 뒤에 와 있어요. 그래서 어떤 분하고 식사를 했는데 “재림이 무엇입니까?” 라는 참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해주었습니다.
재림이라는 것은 이미 야고보서 5장의 말씀되어 있는 것처럼 주님이 문 밖에 있어요. 있는데 문이 뭐냐 역사에요. 이 역사에는 인간의 기억이 들어있고 과거, 현재, 미래, 문화, 과거의 찬란한 꿈과 과거의 경험들이 들어있어요. 이런 것들이 바로 지금 주님을 가로막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역사는 뭐가 박혀있는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박혀있거든요. 근데 그 사건들은 항상 무엇을 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껍질을 벗기는, 우리의 위선을 벗기는, 우리의 가짜임을 고발하는 쪽으로 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무너질 때, 짠~~하고 나타날 때 재림입니다. 역사가 무너지고 역사가 무너지면서 해와 달과 별 다 같이 무너져요.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이 뭐냐, 시간을 정하는 것이거든요. 시간의 특징이 없어질 때, 아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때, 처음부터, 애초부터 없어야 되는데 주님 때문에, 주님 살아계심 때문에 잠시 잠간 등장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삽니까? 질문하지 마시고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로 그렇게 질문을 바꾸어줘야 해요. 지금이라도 없어도 되는데 왜 살려주십니까?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혜택 아무나 주는 줄 아느냐? 아무나 보너스 받는 줄 알아? 고생 더해! 이 땅에서 구십까지 진짜 치매 걸려 고생해! 이래 하면 진짜 할 수 없죠. 고생해야죠. 남자들 좋다는 그 산수유 먹고 고생 더해! 보약 먹고. 그럼 산수유 먹어야 되요. 보약도 먹고. 침 맞고 링거 맞고 해가지고 더 살아야 되요.
살면서 유언해야 됩니다. “인생 훅 간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 둘째 아들 롯데 그만두고 첫째 아들 롯데 그만두고 나 사위 그냥 할 거야. 신격호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자일 때 비로소 목이 잘린 사람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 이 자체가 허구적인 것이고 진짜는 그리스도가 살아 있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왕벌 보내서 소위 살았다는 자, 있다는 자를 없애는, 없는 걸로 만드는 그 작업을 이미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겪었습니다. 저희들 이 땅에 겪게 해주신 것을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