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염기43강-하나님의 요구(신7;22-26) 1508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8. 13. 10:09

2015-08-09 15:14:18 조회 : 72         
   하나님의 요구 150809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하나님의 요구(신명기 7: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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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8-09 15:24 
하나님의 요구

2015년 8월 9일                              본문 말씀: 신명기 7:22- 26

(7: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7: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고 그들을 크게 요란케 하여 필경은 진멸하시고

(7:24)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

(7:25)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7: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요구는 반드시 ‘아들’이라는 조건에 충족되도록 제시됩니다. 출애굽기 4:23에 보면,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들’이라고 지창하시면서 다가오시는 분은 바로 참된 ‘아버지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로서 아버지-아들 관계가 지상에도 구체화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은, 이 ‘아버지-아들’ 사이의 관계에 담겨 있는 창세전의 내막을 펼치는 일과 관련 있습니다. 창조의 비밀이지요. 그렇다면 그 뒤에 연이어 주어지는 말씀은 이 ‘창조의 비밀’을 전달하거나 일부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아버지-아들’의 사이에는 참된 인간이 비로소 ‘아들’ 조건‘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들로 간주하시지 않고 내치신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스스로 “나는 인간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일방적 고집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이냐 아니냐를 결정지을 근거를 인간이 스스로 내놓은 것은 반칙입니다.

어디를 봐서 인간입니까? 모든 우상숭배는 그 시작점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바른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것에서부터 이미 오류가 발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기존의 인간의 관점과는 다른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온 인간군을 지상에 펼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만 주고받은 내용만을 고수하는 관점을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대해서 인간은 관여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지칭한 이스라엘 내부를 열어서 보여주실 수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해체하십니다. 그러면 줄곧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아들됨을 가리고 훼방하는 것들이 사라지게 되면 그 현장에 참된 아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약시대는 개시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입장을 예수님과 견주어 소개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나는 그의 길을 예비하려 왔다”고 말입니다. 마치 옛날 시대에 대감 행차하는 식으로 길을 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 눈에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는 특이한 찬란함을 보이지 않고 단지 무조건적인 회개만 촉구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시간 끌 여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장이 펼쳐졌다는 말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심판받을 상대자라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한다는 것은 엄청난 월권처럼 보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아들로서 취급받아야 했던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들의 자기 위장을 벗겨버리는 기능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작용해온 것입니다. 즉 인간들은, 혹은 이스라엘은 과연 본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그냥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바는, 불가능한 내용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이기게 마련인데 이스라엘은 그 어떤 주변 나라보다도 작고 힘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진멸하라”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야 한다 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한 게 맞습니다. 이 불가능성 속에서 비로소 말씀 실천의 원래 주인공이 따로 있음을 드러납니다.

즉 이스라엘이 “우리가 나서서 이 말씀대로 해보자”고 나오는 순간, 이미 그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진멸당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내용대로 진멸당한 대상자 속에서 벌써 이스라엘을 포함되어 있음을 이스라엘이 감안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시켜서 다른 민족을 진멸하라고 하시지만 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이스라엘도 진멸대상민족으로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가 됩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게 되는 경우는, 본인이 본인을 지켜내기에 힘겨울 때에, 힘 센 분으로 초청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진멸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즉 “나 스스로 나를 지켜낼 수가 없구나”는 식으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지킬 가치나 있는 건가?”를 되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관점을 자기에게서 출발하는 관점을 스스로 부정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반대로 참된 인간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분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함’을 전제로 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는지를 후차적으로 그 내용을 전개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 율법의 실천과 수행에서 인간은 개입할 자격조차 되지 않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의롭다함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거래가 아니라 다른 곳을 경유한 바 그 결과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아브라함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조차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근거로 작용하지를 못하고, 그 믿음조차 예수님이 주신 은혜로서 주입되어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있어 믿음이 아브라함의 행함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주시는 은혜에 속합니다.(롬 4:16) 그렇다면 아브라함 뒤를 이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모든 믿음의 후손들에게는 이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원리와 같은 식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구약 어느 구절이든 성도에게는 ‘못 지키는 구절’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상응하는 징벌과 저주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마다할 입장에 있지 않는 것이 또한 성도의 입장입니다. 바로 십자가 걸림돌을 거쳐서 ‘나는 죄인 맞다’가 확정된 채로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이 되는 관점이 바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 사이에 형성된 관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8-10 19:24 
43강-신 7장 22-26절(하나님의 요구)1508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7장 22-26절입니다. 구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고 그들을 크게 요란케 하여 필경은 진멸하시고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여기 너, 너라고 나올 때 이스라엘백성보고 이야기한 걸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결론부터 말해서 이 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보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굉장히 쉬워요.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무엇으로 간주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시고 이 말씀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거든요.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고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주신 분이 이 말씀을 받는 쪽과 아버지와 아들관계에 형성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확정된 신분관계입니다. 어느 정도로 확정되었는가, 창세전부터 이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참 어느 부모치고 자식 밉다, 밉다 해도 결국은 어려울 때는 부모가 와서 자식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호적 파가라고 이렇게 큰소리치지만 마지막 돌보는 것은 부모가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관계가 자기가 원했던 관계가 아니고 하늘이 허락한 관계거든요. 없는데서 자식 생겼잖아요. 자식 운다고 던질 수는 없는 겁니다. 우는 애를 이집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이거는 귀찮다고 잘 안한다고 애를 돌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잘 안하고 힘들지만 이거 키워야 하기 때문에 키운 거예요.

그래서 자식 키우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니가 뭔데 내 인생 조지느냐?” 그런 생각이 막 들어요. “니가 감히 뭔데? 나도 나를 함부로 안 건드리는데 니가 뭔데? 제 삼자인 니가 내 인생을 이렇게 흔들어대고 힘들게 하니?” 아! 뭐 죽이지도 못하고...그런 생각이 들어요. 확정된 관계가 부모자식관계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이 부모자식관계가 나중에는 시간 따라서 삭제되고 절단 나버립니다.

부모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어겼던 그 아버지가 이스라엘을 아들로 여겼던 그 관계가 역사와 더불어서 이게 옅어지면서 날아가 버려요. 없어집니다. 그러면 이 신명기, 방금 읽었던 것은 율법이거든요. 율법은 살짝이 활주로에 앉는듯하다가 도로 날아가 버려요. 항상 비행기는 활주로 끝에서 날기 마련이거든요. 살짝이 연착륙하는 것처럼 같다가 율법은 그냥 도로 가져가버리죠. ‘어, 지킬 위인 없네?’ 하고 도로 가져가 버리죠.

이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하나님을 믿으매 이미 의롭게 된 입장에서 도대체 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됐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뒤늦게 율법 실은 화물이 이 세상에 연착륙하다가 뭐 화물 실은 주위를 보니까 이게 못 지키잖아요. “에이, 회수!!” 다시 긁어모아 도로 가져가버립니다. 그래서 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그 믿을 때는 모르고 그 뒤에 율법이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거는 ‘아! 나의 행위를 더 이상 의존해서는 안 되겠구나.’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날아가게 돼있죠.

근데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믿었던,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던 그 약속의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예수님이냐 하는 그 문제가 나와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세자로 줄이면 예수님이 돼요. 그걸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냥 “아브라함아! 네가 너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가짜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냥 맨손으로 찾아오면 안 돼요. “아브라함아. 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약속을 주는데 그 약속은 내가 알아서 다 지켜낼 거야. 믿느냐?”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니 현재 자식 있나? 없나?” “없습니다.” “없지만 니 자손이 하늘에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의인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자손이 별처럼, 그렇게 많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심을 믿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점점 복잡해지죠. 내 자식이 하늘의 별만큼을 믿습니다를 믿어버리면, 이미 활주로 끝을 떠나버리면 더 이상 비행기기 보이지 않잖아요. 아브라함이 살 동안에 자식들 해봐야 몇 명 되지 않아요. 그럼 아브라함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약속은 유효하다, 그것까지 믿으려면 그 약속이 나를 경유하기 이 전에 다른 곳을 경유해서 나에게 와야 해요.

약속의 원주인이 나는 모르지만 어떤 분을 경유하고 나에게 주어진 것은 그 분이 모든 걸, 아직까지 미래는 안 됐지만 미래에 다 이루었다 치고, 다 이루었을 때의 그 효과는 니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미리 나한테 주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문장이 길어서 죄송합니다만 어쨌든 맞는 이야기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한테 주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한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미처 모르는 다른 분한테 바통을 넘겨 준 거예요. “자 네가 해라.” 바통을 넘겨준 게 그게 아들이라 말이죠. 그게 아들인데 그 아들의 모형으로서 이 세상 등장한 민족이 뭐냐,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뭐가 이렇게 복잡합니까? 왜 이리 복잡해요?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 안 하려고 하니까 복잡한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으려 합니까? 우리만 상대하면 우리는 자꾸 정성을 내놓으려고 하고 열심을 내놓으려고 하고 착함과 예의바름을 내놓으려고 하고 우리의 성의를 내놓으려고 하니까, 그런 것들을 다 치우려고 하니까 힘들어요. 치우라! 그런 것 좀 가져오지 마라! 자신의 지.정.의 좀 가져오지 마라 이 말이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우리 것을 받아주시지 않고 우리 속에 집어넣은 것을 받으세요. 집어넣은 것을 경유하게 되면 우리에게 주는 효과는 뭐냐 하면 내가 행한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근데 행한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가 고 문장만 해서는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돼요. 왜 우리 행한 것이 소용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신명기의 말씀을 줘버려요.

오늘 말씀을 줬는데 말씀의 내용은 무시무시합니다. 적들이 나타날 테니까 진멸해라. 그거거든요. 그런데 그 적들이 만만치 않는 적들입니다. 게임을 할 때 뭔가 이길만해야 게임이 되는데 이 이스라엘 적들은 이스라엘이 감당 못할 적들이에요. 뭔가 상대가 돼야 상대를 해죠. 상대가 안 되는데. 강호동이하고 나하고 씨름을 한다, 이게 말이 돼요? 뭐 아무리 용 써도 상대가 안 되죠. 천하장사인데. 천하장사VS천하외소인데 뭐 됩니까? 안 되잖아요? 이게 시합이 안 되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궁지로 몰아세웁니다. “이래도 하나님 믿을래? 이래도 니가 의지할만한 것이 니 속에 있단 말인가?” 자꾸 궁지로 몰아세우는 작업이 얼마나 고마운 작업인지.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그걸 느껴야 돼요. 우리는 그럴 때마다 ‘아! 스스로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없구나!’ 그런 말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래되면 오해돼요. 절대 그런 말이 아니고, ‘스스로 지금 자기가 지킬 가치가 없다.’ 이래 나와야죠.

‘아휴! 나를 지켜야 되는데 나를 지킬 힘이 없네.’ 이러면 아직도 그거는 믿음 근처에도 안 갔어요. 믿음 근처에는 갔는데 아직 멀었어요. ‘아, 지키려고 하는데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주님 힘 빌릴까?’ 이거는 아니고 도대체 내가 스스로 지킬만한 가치가 나한테 없지요. 근데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이 못된 마귀는 또 나에게 그걸 자꾸 부추긴다는 말이죠. 젊은 청년들에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세상이냐 하면, 세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거 원하지? 내가 이거 줄게.” 이게 세상이라는 겁니다. “니가 이거 원하고 있잖아? 내가 줄게.” 고게 바로 우리 청년들이 기다리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그런 세상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돼요. 그러면 이천 귀신 다 떠나가요. 그러나 원하는 것이 있는 순간 확 달려 들어가요. 특히 개척교회 하는 목사들, “하나님이여 가게 했으니까 홀만 꽉 채워주시면 나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그 홀 마귀가 다 차있어요. 반드시 원하는 곳에는 마귀가 들끓습니다. 파우스트라는 괴테의 작품이 있는데 무려 60년 동안 20살 때부터 계획해가지고 80대에 완성한 작품, 지 맘대로 완성했지만, 하여튼 완성한 작품이 파우스트인데 그 파우스트에 보면 거기에 마귀가 등장합니다.

마귀하고 주인공 파우스트박사하고 거래를 해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는 마귀가 파우스트한테 “뭐 해주꼬? 니가 뭐 공부 많이 하고 했는데 아직도 필요한 것이 많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게. 니가 원하는 것만 채워주고 그 뒤에서 찍소리도 안 할 테니까 뭘 원하든지 다 해줄게.” 그럴 때 파우스트 박사가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그 요구한 것이 뭐냐, 나훈아가 요구한 것이에요. 나훈아가 바닥을 치면서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청춘을 돌려다오.” 같은 취지로 “젊은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마귀는 들어줍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젊은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됩니다. 지금 파우스트 박사가 마귀한테 말려들었어요. 어떤 점에서 마귀한테 말려들었느냐 하면 지금 시간이라는 판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렇게 고 판이 판판하게, 수평적으로 어떤 높이도 없이 그냥 두꺼운 선처럼 과거 선에서부터, 현재선, 그렇게 같은 선 위에서 흘러간다고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해서 청춘을 돌려다오, 다시 옛날처럼 살고 싶다고 그렇게 요구한 거예요.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 오고 난 뒤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늘나라가 왔다 이야기했거든요. “왔다!” 왔다가 돼버리면 시간이 그냥 판판한 판이 아니고 시간 자체가 윈도우가 돼요. ‘열린 창’이 돼요. 창window이 되면, 하늘과 뚝 떨어진 창이 되어버리면 어느 시점이든 상관없이 하늘과 교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늙어도 청춘이에요. “늙어도 청춘” 이거 포맷format(형태)잡으면 괜찮은데, 방송국 프로그램 제목으로. 언제나 청춘 말고 늙어도 청춘이 더 나은 거 같은데. 늙어도 청춘이에요. 청춘 아닌 적이 없습니다.

겉은 썩어빠져도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고린도후서 4장 마지막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마귀는 이걸 알아요. 그러나 어느 인간도 이걸 몰라요. 그리스도가 오고 난 뒤에 시간이 윈도우window, 열린 창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왜 모르냐, 그놈의 기억 때문에, 추억 때문에 그래요. ‘아 그때, 총각 때 그 아가씨가 나하고 결혼하자고 할 때 뺄게 아니었는데, 그 아가씨 아버지가 재벌인줄 그때 몰랐었잖아. 수수하게 생겨가지고, 그때 결혼할 건데.’ 자꾸 과거에 어떤 미진한 것에 애달아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개미가 되어가지고 3차원이 아니라 2차원 존재가 되는 겁니다. 자꾸 과거, 미래 그 선 위에서 자꾸 왔다 갔다 해요. 선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껏 하는 게 뭐냐 하면, ‘그래 미래가 과거보다 월등하면 낫지.’ 기껏 위로한다는 것이 ‘앞으로 내가 잘살면 과거에 실수한 것을 만회할 수 있다.’ 이런 것을 희망이라고 여기고 자기를 매진하고 채찍질합니다. 해보면 이미 몸은 망가져있는 거예요.

어떤 분이 문화강좌에 돈 내고 수강을 하는데, 대구 수성구에 홀이 있잖아요. 거기서 인문학 강좌를 하는 거예요. 한 오만원인가, 이쪽에 굉장히 돈이 많아요. 돈 내고 한 회원들끼리 모여서 하는데, 그 사람 이름이 허경인데, 그 인문학 학자가, 철학 강의하는 사람인데, 그 강의를 했어요. 근데 그 분이 교양 쌓겠다고 거기에 등록해서 들었는데, 듣다보니까 특히 기독교나 성경 말씀에 대해서 슬슬 짜증이 나는 거예요. 인문학 학자, 지가 들었던 성경 구절 해봐야 뻔하고 교회에서 이야기해서 들었던 성경 구절 이야기하면서 하니까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원래 질문을 안해야 되는데, 질문을 하게 되면 다른 분들이 짜증내고 하니까, 근데 너무 짜증나서 질문을 했어요. “저기 강사님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면 안 되겠습니까? 왜 그렇게 보는 관점이 없습니까?” 이래 이야기했어요. 강사가 쇼크를 받아버렸어요. 왜 신은 인간에게 뭘 해줬다, 인간은 신하고 이런 관계다, 이것만 이야기하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했던 그 이야기를 왜 안 합니까? 이 말입니다. 그 철학자가 미셀 푸코 전공한 철학자랍니다. 그러니까 말을 못하죠.

이번 수련회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인간인 것을 증명해보세요. 본인이 인간인 것을 증명해보세요.” 지금 왜 인문학 강좌, 세상의 학문이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가 인간이라고 지금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부터가 반칙이에요. 그러나 모든 말씀은 활주로에 내렸다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은, 인간 같은 인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인간 아닙니다.

그냥 뼉다구 같은 인간을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고 기독교의 내용이라 이 말이죠. “신이시여, 당신이 만든 인간인데 당신한테 이렇게 기도하는데 뭐해 줄 거요?” 그런 말은 애초부터 나올 수 없는 질문이고 그렇게 나와서는 안 되는 질문이에요. 그거는. 그럼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러해서 뭐 할 건데?” “그거하면 제가 청춘에 미진한 것을 보충할 겁니다.” “그거는 니가 지금 하늘에 기도한 것이 아니고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한테 기도한 것이다.” 지금 악마하고 거래한 거예요.

신이시여 내가 기도할 테니까 뭐해줄랍니까? 내가 금식할 때는 뭐해줄랍니까? 십일조 할 때는 뭐해줄랍니까? 내가 교회 나올 테니까 앞으로 취직 잘 되게 해주시고 장가가게 해줄 거예요? 이거 뭐해 줄 겁니까? 앞으로 뭘 해줄 겁니까? 그러면 뭐하겠어요? 내가 만든 신한테 뭐하겠습니까? 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소원이 무엇이냐? 다 들어줄게.”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이렇게 해야 돼요. “니가 인간이야? 니가 언제부터 인간이야? 니가 그럴 잽이 돼?” 우리는 자기를 지키는데 힘이 부치니까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 믿지 마시고 도대체 내가 나를 지킬 만한 그런 대상이라도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성경을 통해서 물어봐야 해요.

바로 이스라엘 망합니다. 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하나님과 예수님과 이야기했던 모든 말씀이, 앞에 가려졌던 것이 이렇게 치워진 거예요. 가리워졌던 것이 치워지니까 하늘나라가 온 거예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세례 요한이 이야기하면서 세례 요한이 아주 흐뭇한 이야기를 하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찍히는 자마다 불에다 던져 넣을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한 겁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늘나라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물렀거라!!하는 방식으로 온 거예요. 대감님 행차하신다. 저 앞길 막는 저 지저분한 것들, 찌질이들 그런 것들 좀 물렀거라!

그래야 광야에서 길이 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지신 의미가 빛이 난다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의미가. 주님은 죽으러 오셨다 이 말이죠. 죽은 자를 살려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왜 죽은 자냐, 이걸 탐색하면 돼요. 성경을 통해서 왜 나는 마땅히 죽은 자고 왜 죽은 자이여야 하는 가를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저한테 많이 하는 질문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입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철커덕 하고 어떤 금속 소리가 나더란 말이죠. 이게 뭐지? 하고 파보니까 그게 보물이었어요. 아마 애꾸눈 선장이 몰래 감추고 다시 찾으러 오려고 했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그 농부가 머리를 써가지고 땅 주인한테 가서 “고만 저한테 파세요.” 해가지고 대출해서 사서, 보물 파내가지고, 대출 갚고, 지는 부자 되었다는 아주 행복한 해피엔딩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농부가 우리입니까? 하는 질문인데, 이런 질문들이 수 십 년째 들어와요.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농부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물을 발견할 입장도 안 되고 딩가딩가 하고 놀 입장도 안 돼요. 그 예수님의 비유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물을 눈앞에 두고도 보물인줄 모르는, 그 정도로 우리는 소경된 자들이거든요. 우리는 소경된 자입니다. 왜 소경이냐, 그 악마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해서 우리를 가려왔기 때문에. 너는 소중하다. 너는 사랑받기만 해. 너는 귀한 존재야. 너는 너를 포기 하지 마. 너는 될 수 있어. you raise me up, 너는 올라갈 수 있어.

계속해서 우리를 격려하고 독려하고 우리를 낙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험쳐봐! 이번에 한 번에 될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독려를 해왔는데, 거기에 우리는 덩달아 춤을 추면서, 그래 그럴 것 같아. 그럼 어느 말씀 지키면 우리가 이래 됩니까? 그래. 이 말씀 지키면 아마 성사될 걸. 그게 주님을 경유했습니까? 아니면 직접 직거래 했습니까? 직구도 아니고 커브도 아니고 이거는 완전히 하나님하고 직거래하고 있어요.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뭐냐, 걸림돌을. 어는 걸림돌?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경유하고, 막상 우리를 찾아올 때는 주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와요.

십자가 저기 뒤에 있거든요. 근데 십자가 보세요. 뾰족하잖아요. 십자가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깨면 그 돌이 깨어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를 깨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믿고 천당 가는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를 깨야 해요. 내가 깨어질 때, 바로 내 자리가 하나님이 아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자리, 진짜 아버지의 그 아들, 맏아들 형상을 본받는 작업을 주께서는 우리의 가짜, 마귀가 좋아하는, 내가 스스로 착각하는 것들을 깨는 작업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나오는 겁니다. 마치 석고 깨지면 본 동상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걸치고 있던 것들이 떼어지는 작업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굉장히 이 여름철에 속 시원해요. 말씀 우리가 읽었죠. 진멸하세요. 진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진멸해요. 진멸은 고사하고 아이고 살려달라고 빌기도 바쁜데. 근데 가만히 힘주고 하는 말이 진멸해라. 우리의 답변은 굉장히 쉽습니다. “주여 못합니다.” “그럼 이거 못하면 저주받는데?” “그럼 받아도 할 수 없죠.” 왜 요런 속 시원한 말을 못합니까?

여름철에 쿨세척, 시원해요. 시원해. 눈 감고 아무데나 들추세요. 읽었잖아요. “못 지킵니다.” “못 지키면 맴매 맞아야 된다.” “맞으면 맞아야죠.” 이러면 됩니다. 이런 것이 날이면 날마다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 십 년 만에 처음 가르쳐주는 거예요. 아무데나 갈라디아서 뭐든 좋아요. 에베소서고 뭐고. “내가 너를 사랑한즉 서로 사랑하라” 딱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못 지킵니다.” “그런데 너 사랑 안 하면 벌 받는데?” “받지 뭐.” 그러면 되는 거예요.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마라” “저는 해지고 난 뒤에 더 분이 나던데요?” “못 지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굶어야 돼!” “그럼 굶어야죠.” 이러면 될 걸 가지고.

바로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경유시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마귀한테 속아 넘어 갔습니다. 근사한 나, 멋진 나, 장래가 보장되는 나,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이름 떨치는 나, 그것이 하나의 마귀와의 거래인 것을 깨닫고 이미 우리 자리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리인 것을 깨닫고 새삼 시원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