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신 8장 1-2절(40년 광야기간)1508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8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주신다고 하시면서 왜 40년 광야를 걷게 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이 대목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할 때, 그 지키는 너 자신이 광야에 들어오기 전에 명령 지키는 것과 광야 없는 채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이게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난 뒤에 명령을 지켜버리면 ‘아, 내가 옛날 애굽에 있었던 그 주체, 그 사고방식 가지고 이게 지켜질 계명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광야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플러그를 빼버리는 겁니다. 애굽에서 내려오는 플러그를 빼버려요. 그러면 이들은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이에요. 애굽에서 나온 지 며칠, 몇 달 되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구경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칙을 범하는 거예요. 뭘 지키라고 한다면, “약속의 땅은 이런 세계이고, 이런 데인데 니가 지켜라.”가 되어야 되는데 약속의 땅은 구경도 못했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그들이 아는 것은 애굽에서 생활한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겠다고 나오는 짓들이 뭐냐, 애굽적인 속셈, 애굽적인 욕망, 애굽적인 탐욕, 이런 것들이 나오거든요.
그런 것들이 나오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떠하냐가 2절에 나와요. “니가 40년 동안 니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얼마나 약속에 땅에 부합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들추어내리라.”가 성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지고 장난치신 거예요. 지켜라 해놓고 못 지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키라고 한 거예요. 약속의 땅을 한 번 가보고 난 뒤에, 애굽 땅을 가보고 난 뒤에 ‘그래 이럴 때는 약속의 땅을 적용시켜야지, 애굽 땅을 적용시키면 안 돼! 이러면 나는 약속의 땅을 적용시키겠어.’ 이렇게 되면 말이 되는데, 근데 약속의 땅 구경도 못해봤고 가 본적도 없어요.
오직 애굽에 살던 사고방식뿐인데 거기다가 약속의 땅의 원칙을 들이대니까 이게 지킬 수가 있습니까? 못 지키죠. 40년 이라는 터널, 마치 프랑스나 영국의 해저 터널처럼 뭔가 숨겨져 있는 40년입니다. 그러면 이 40년 동안에 그들은 교체를 요구받게 되어 있어요. 교체를. ‘아하!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세가 아니구나!’ 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간단합니다. 성도인데, 성도 만들어놓고 성도답지 않음을 추궁을 해요. 그렇게 해서 이 말은 뭐냐, “니는 내 보기에는 성도인데 니 힘으로 성도 아니고 싶거든 성도 안 해봐라! 그게 가능한지.”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요? 하나님이 이 성도를 만들어놓고, 만들어놨는데 “니가 성도되기 싫어? 천국가기 싫어? 싫지. 그럼 니 힘으로 지옥 가봐! 지옥 갈 수 있는 존재인지. 불가능할거야. 왜? 너를 불가능으로 성도되게 했기 때문에.”
그 불가능을 뚫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나쁜 짓해서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도 천국 갈 사람은 가야 되는 겁니다. 그거는 불가능한 요소가 우리의 가능한 요소를 이기기 때문에 그래요. 그 불가능한 요소에 대해서는 그걸 행함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은 항상 가능성을 내다보고 하기 때문에 그건 행함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 행함? 아니에요. 행함에서 믿음? 아닙니다. 행함에서 행함? 아니에요. 믿음에서 믿음입니다. 끝까지 믿음이에요. 우리 속에 하나님이 행하시고 계시다는 말씀처럼. 이럴 때마다 제가 밉고 짜증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교회입니다. 가능성을 주면 안돼요. 인간에게. 이 가능성을 주면 어떤 오류가 생기느냐 하면 지옥 갈 사람들이 천국 간다고 자부하고 교회들을 나와요. 그리고 그들이 목사가 되고 그들이 장로가 된다니까요.
지옥 가고 있는데, 내놔라 하면 자기가 애굽에서 살던 것만 내놓고 자기는 천국 간다고 우겨버리면 다른 아무것도 모르는 평신도들이 그걸 모방해서 따라가게 돼요. 목사가 앞장서서 그렇게 거짓 사도가 되니까 다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복음 전하는 그런 분도 별로 없지만 혹시 복음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쳐버리고 쫓아내버리고.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뭐냐 하면 광야 가면서, 교체가 되면서 내가 나한테 낯설어져야 합니다. 내가 나한테. ‘내 욕심이 이렇게까지...분명히 이런 인간이 아닌데?’ 그거는 내가 나와 결별하라는 겁니다. 이별하라는 겁니다. 이별은 만남보다 참 쉬워요. 근데 내가 나하고 이별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제발, 나를 이제 고만 놔주세요. 거머리도 그런 거머리가 없어. 애굽에서 잘나가던 나를 이제는 좀 떼 내어버리세요. 잘 나가던 나, 신데렐라, 백설 공주, 이혼하세요. 헤어져버리세요. 그리고 다가오는 나는 내가 낯설어요. 내가 생각지도, 애쓰지도 못한 내가 다가옵니다. 그러한 변화, 그것을 40년 광야에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40년 광야의 의미가 뭡니까? 이렇게 하게 되면 또 기존 목사들이 미워요. 왜냐하면 또 40년, 40을 연구한다고요. “40이라는 것은 이 땅의 숫자다.” 이 땅의 숫자? 전부 다 그런 것 없어요. “40년 이라는 것은 시험의 숫자다.” 우에라고?? “그래서 니가 금식 할 때 40일 해야 한다.” 이거 말도 안 되는....또 가능성, 또 가능성을 내놔요.
거기에 얼마나 속아 넘어갔습니까? 7이란 무슨 숫자냐? 완전 숫자다. 왜 8이라는 숫자는 왜 안 되는지. 4는 무슨 숫자고 7은 무슨 숫자고, 무슨 숫자, 무슨 숫자, 이거 뭐 남묘호랑개교도 아니고 숫자 놀이해가지고, 숫자 알면 구원 받습니까? 다 같이 무식하니까. 무슨 사기를 쳐도 다 넘어가니까. 성경에서 숫자 잊으세요. 요번 겨울수련회에서는 요한계시록 할 텐데 제가 숫자 다 빼버렸습니다. 숫자에 다 속아 넘어가서. 이거 숫자를 풀면, 뭐 곱하고 뭐 빼고... 아휴!!!
사실의 의미는 뭐냐, 이스라엘이 믿음의 단체인데요, 반드시 믿음의 조상의 연장선이 나와요.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티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아들을 잡는 겁니다. 죽이는 겁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자기 아들이 어떤 남 때문에 죽는 것, 왕따 당해서 죽는 그건 가능하지만 자기 손으로 자기 아들을 어떻게 죽여요? 뭐 칼로 죽이는 거니까 눈 감고 찔렀을 것이다? 아마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주님께서 “아브라함아 니 목졸라 죽여라!”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을 가지고 믿음의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행함이 되느냐 하면 어떤 믿음도 행함을 배출해낼 수가 없어요. 내놓을 수가 없어요. 어떤 믿음도. 왜냐하면 모든 믿음은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믿은 믿음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의 가치를 뭉개버리는 그런 행함으로 자기 믿음 뒤에 붙이지를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코자 하는 그 믿음, 그 믿음에 조화가 되고 그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행함을 갖다 붙여요. 근데 그 믿음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믿겠다는 말은 그거는 연속성의 문제거든요. 연속성. 왜냐하면 현재에 있는 나를 내가 납득이 되는 나를 건지겠다. 제가 아침에 설교했잖아요. ‘나’ 아닌 ‘나’를 구원한다고요? 내 아닌 내는 내가 죽을 수 없는, 내가 불가능한 죽음 저편에 있어요. 저편에 누가 있느냐, 홀로 예수님이 계세요. 예수님의 세계에 다른 사람이 들어간다?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 저편에서, 그게 부활의 영, 또는 부활의 능력, 부활의 영인 성령을 주게 되면 불가능한 그것이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가능이 일어나버려요. 주님의 힘으로 가능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거기에 믿음을 보면서, 믿음, 소망, 사랑을 보면서 “주여!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왠지 낯섭니다. 이거는 내 본성도 아니고, 내 속성도 아니고, 전혀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바로 40년 광야는 아브라함이 아들 잡는 것을 40년 동안 늘였다고 보세요. 그러면 매일같이 불가능한 거예요. 매일같이 불가능한....., 물론 그 불가능을 광야에서 주께서는 시험을 했지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한테 해당사항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러니까 이미 산 자식이나 죽은 자식이나 이미 자기 자식이라는 것에서는 떠나버렸어요.
“초태생은 다 내게 돌리라” “니가 어린양 피 발라 살았냐?” “살았습니다. 우리 장자는 살았습니다.” “내놔! 저건 죽었지만 니는 살았으니까 살았으면 도로 너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님이라도 헤어지면 도로 남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님에다가 점하나 붙이면 남이 된다는 사연을 아십니까? 도로 가면 안 되거든요.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만들어놓고 불가능한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이게 가능하면 도로 애굽으로 가라 이 말이에요. 갈 사람은 가라 이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어린양의 피를 갖고 있는 사람을 test, 시험하는 거예요. 마치 아들이삭을 잡듯이, 그 시험을 가지고 집단적인 시험을 해보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잡았다고 하니까, 니 한테는 해당 안 된다니까 니는 구경하기만 하면 돼? 이제는 니 차례야.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는 그와 똑같은 맥락으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집어넣고 애굽에서 건져낸 아들을, 이제는 건져낸 아들의 집합, 잠재된 집합이 새롭게 광야를 통과하거든요.
광야를 통과하면서 그들은 연속성을 잘라버려야 돼요. 이제는 이 아들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내 의견을 개입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뜻이에요. 아브라함의 행함입니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잡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아들은 주님이 주신 원칙, 다시 말해서 내 아들 잡으라는 그 말씀의 준칙에 합치되기 위해서 내 아들을 주셨나이다가 말씀대로 시행하겠나이다가 되어버려요.
그게 광야에서는 뭐냐,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떡 줘놓고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이 떡은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살던 그 나를 유지하라고 준 게 아니고, 애굽에서 살던 그 플러그를 뽑고, 절단시키고 내가 나 아닌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관된 절차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으라는 것이 광야 40년이다 이 말이죠.
박영선 목사가 이런 소리를 했어요. “애굽에서 건져낸 것은 하나의 시범조니까 요단강에서 그걸 잘 정신 차려 기억해가지고 요단강도 들어가면 된다고. 왜? 구원은 단회성이 아니고 반복성이니까.” 지금 박영선 목사가 놓친 것이 뭐냐 하면, 왜 박영선 목사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배웠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연속성을 유지해요. 연속성. 근데 연속성은 아무리 정신 차리고 과거를 거울삼아 해도 못 들어가요. 맨 그 인간이기 때문에.
이걸 모르면 기독교 다 이단 돼요. 이걸 모르면. 과거의 나를 비춰서 미래에 나로 집어넣지 마세요. 미래에 예수그리스도가 고대하는 나는 따로 있어요. 그걸 위해서 과거가 미리 깔려있는 겁니다. 미리 양탄자처럼 깔려있는 거예요. 시간을 반대로 보세요. 반대의 시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시선으로 바라봐버리면 과거가 주님을 위한 과거인 것이 다 보이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나를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자꾸 미래의 어떤 상상된 세계에만 집어넣는데 그 세계는 나의 세계이지 주님의 세계 아닙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뭐 문제 낼 것도 없지만, 문제를 내놓고 이것이 연속성인가 불연속성인가를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실제적인 문제니까 여러분이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웃돈 오천만원 주면 분양권 팔아도 됩니까?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냈어요. 아파트 살라고 했는데, 250대 1인데 당첨 되었어요. 근데 근처에 있는 떴다방에서 와가지고 묻습니다. “아이구 집사님. 나도 같은 교인인데 요번에 같이 당첨되어서 주의 은혜입니다. 오천만원 줄 테니까 분양권 저한테 파세요.” “이 동네는 분양권 1년 동안 전매 못하게 되어있는데요?” “아이고, 다 할 수 있어요. 그런 것은 우리한테 맡기고 파세요.” 할 때 팔까요? 말까요? 이것이 광야와 연관해서.
정답은 “니 맘대로 하세요.”인데, 왜냐하면 뭐가 정답이냐, ‘아하! 이게 연속성이구나!’ 이게 연속성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연속성 외에는, 그러니까 모든 일어난 일을 연속성으로만 해석하지 연속성 외에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애굽적인 속성의 연속성입니다. 그렇게 매 맞고 아무리 매 맞아도 애굽에서 납득이 되는 일이 오늘도 납득이 돼요. 오천만원 더 주는데 미쳤다고 안 팔아? 이래 되는 거죠. 공짜 돈인데. 세금 떼고 뭐해도 사천만원 남는데 그걸 왜 안 팔아요? 횡재인데. 땅 파보세요. 오 천 원도 안 나와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설교 뭐라고 했어요? 그런 몸은 구원받지 못해요. 다른 몸으로 구원받죠. 그럼 다른 몸은 예수님의 몸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 본인이 이미 연속성을 주장하지 않아요. 자신의 원이 무엇인지 알아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넘어가게 하옵소서.” “어떻게든 오천만원 받고 분양권 팔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원대로 마옵시고” 라고 불연속성을 집어넣는 사람, 그거 성도입니다.
그거 집어넣고 오천만원 받으세요. 아, 오늘도 좋은 요령 가르쳐준다. 일단 그거 집어넣고 받으시게 되면 우연히 당첨된 것이 우연히 아니고 주님의, 오천만원 공짜로 벌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돼서 돈 챙길 때는 챙기라고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어쨌든 간에 내 몸은 내 몸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몸이 내 몸을 낯설게 다룬다 이 말이죠. 오천만원 분양권 따기 위해서 애쓰고 기도해서 분양권 딴 게 아니잖아요. 기도했어요? 그럼 할 말 없고. 그냥 무심코 던져 놨는데 됐잖아요.
그렇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나의 위기로 봐야 된다 이 말이죠. 오천만원 벌든지 안 벌든지 관계없이. 이거는 내가 다룰 대상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게 광야 40년이에요. 광야 40년은, 이게 광야 40년이 끝나는 지점이 어떤 지점이냐 하면 더 이상 연속성 가지고 집적대지 않는 기간, 다시 말해서 앞으로 니가 연속성 한다면 아예 너는 쫓겨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간섭한다는 자체가 이미 성도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간이 40년 기간이에요. 얼마나 고마운 기간입니까? 누가 집적대겠습니까? 누가 간섭하겠어요?
어떤 CF(SKY Life-하늘을 보라 광고)에 보니까 커다란 농구선수 서장훈이 하얀 옷 입고 자꾸 쑤시는 것이 있어요. 주께서 자꾸 푹푹 쑤시는 거예요. 우리를 푹푹 쑤시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딨어요. “연속성은 아니데이~ 불연속성이데이~ 이번에 오천만원 준 것도 니가 예상한 것이 아니고 내가 예상해서 준 거야. 줬다고 자랑하지 말고. 준 거 뺏을 수도 있어 정신 차려. 하여튼 무조건 애굽 쪽은 아니야. 약속 쪽이야.” 하고 푹푹 쑤시는 그 기간, 40년 기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말씀을 이렇게 지켜보게 되면, 말씀을 지킨다고 나서게 되죠. 말씀을 지킬 때에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애굽에서 나온 나를 내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방식이에요. 아무리 한국교회 뭐 비판하고, 뭐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고. 내가 이 말씀 지키면 복 주겠지, 하는 이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근데 사라지지 않는 이것이 바로 나의 애굽의 문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요. 왜? 그걸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연속성이 살아있기에 불연속성이 마중을 나간다는 것을 알잖아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줍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데요.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을 내게 지키려고 시도를 하게 돼요. 시도를 하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말씀의 오류가 생겨버립니다. 근데 오류가 생긴 것을 우리는 모르죠. 자기는 잘 지켰다고 생각을 하는데.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쉬운 예인데요.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내가 5분전에 알던 세상이 있어요. 근데 5분후가 되면 그 세상에 수정이 일어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어 있어요. 5분전에 세상 보는 것하고 달라요. 그만큼 5분 동안 살아있기 때문에. 늘 바뀝니다. 그럼 10분 지나면 10분 전하고 세상이 완전히 또 달라요. 모든 변화가.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만든 현실은 내가 설치는 대로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사실. 따라서 비록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항이 있더라도 나는 내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입니다. 제 이야기가 민수기 14장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10번이나 시험하고도, 너희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시험했기 때문에, 34절에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자, 싫어버림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주께서는 말씀을 주게 됩니다.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애굽적인 본성을 가지고 그것을 지킵니다. 지키는데 그 결과가 이상하게 내가 기대한 결과대로 되지 않고 이게 틀어지게 되어 있죠. 틀어진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40년 광야 가운데 있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게 틀어지거든요. 틀어지게 되면 뭘 포기하느냐 하면, 이 현실은 내가 5분 전에 봤던 것, 10분 전에 봤던 것, 내가 본 그 관점인 그것이 용인되지 않음 속에 우리가 낯설게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한 모든 것은 나답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겠죠. 이 현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의 개성이 있고 나만의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메시아는 특징이 없어요. 메시아의 특징은 뭐냐, 특징 없는 인물이에요. 메시아 있는 지역을 보려고 아무리 찾아도 바리새인들은 찾아내지를 못했어요. 왜,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심지어 예수님이 특별한 개성이 없고 특징이 없다는 사실은 구원받은 사람들도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언제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언제 돌아보았습니까? 나도 모르겠는데요? 저는 주님한테 한 것 없는데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는 모르지?” “저는 모르지요. 내 개성만 찾고 내 특징만 자랑하는 줄 밖에는 모르죠.” “사실은 그거는 나를 위해서 너가 그 일을 했어야 하는 일인거야.” 라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여, 제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왜 주의 일인 줄을 몰랐죠?” “그거는 너의 특징과 남한테 내세울 너의 개성만 자꾸 추구하다보니까, 니가 니 생각만 하다보니까 이 주어진 현실의 중심을, 특징 없는 중심인물을 몰랐던 거야.” 우리가 몰랐던 거죠.
우리는 평범하지 않으려고 해요. 남한테 자랑질을 꺼내서 이것 자랑질 하려고 내놓습니다. 우리가 그냥 평범하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를 위해 오신 구세주는 정말 우리의 얼굴을 뜨겁게 할 정도로 너무나 평범해요. “이 작은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러면 그 작은 형제 가운데 “나는 예수 믿는다.” 뭐 이런 것이 쓰여 있습니까? “손목 내봐! 손목 내봐! 손목에 뭐 있는가.” 그렇게 조사할까요?
이러시면 됩니다. 우리의 개성, 우리의 특징, 우리의 자랑거리, 다 애굽에서 나온 연속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메시아를 사랑하고 감사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지금 시험기간 속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잡으라!” “내 아들인데? 아니지 주님의 아들이니까 잡아야지. 내 아들인데?” 만날 이러고 있어요. “니 인생 이렇게 살아야지!” “내 인생인데? 아니지 주님의 인생이지. 그래도 내 인생인데? 그래도 주님의 인생이지.” 뭐 하는 겁니까? 매일같이 자기하고 다투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연속적인 자기와 낯선 자기가 우리 속에 늘 싸우고 있을 때, 주께서 이미 구원받게 해놓고 우리로 하여금 매일 연속적인, 내가 생각한 그 믿음이라는 게, 내가 생각한 성도는 왜 성도가 아닌지를. 우리는 정말 소리 소문 없이, 정말 내세울 것 없는 주님처럼, 누가 봐도 못 알아볼 정도로 평범하게 살아갑시다. 아무리 봐도 성도 아닌 것처럼. “마치 ~~아닌 것처럼” 사도 바울의 구호고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주장, 내 특징 말고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남한테 알리고 싶고 외치고 싶고 자랑질 하고 싶은 것이 삶의 보람인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정말 낯선 세계에 놓여있고 낯선 세계로 끊어지듯이 매일같이 잘났듯이 가고 있음을, 주께서 이렇게 이끌고 있음을 저희들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