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신 7장 8-11절(보응하시는 하나님)1507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7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 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의 법이 들어왔을 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법 말고 요것만 지키면 됩니까? 라는 생각을 갖기 쉬워요. 법이 수천 가지가 아니고 수만 가지가 아니거든요. 딱 지정된 고것만 지키면 나머지기 고 틈 사이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우리 재량에 맡기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죠.
자식에게 “너는 두시부터 세시까지 숙제해!” 하면 애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세시까지 숙제하고 난 다음에는 게임해도 되지?” 이래 나오거든요. 법이라 하는 것은 마치 전체를 커버cover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커버를 못하고 군데군데 어떤 지뢰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만 피해가게 되면 나머지기 부분은 우리가 멋대로 살아도 숙제 다 한 것처럼,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염두에 두시는 거예요. 이 법을 지키라 하면 우리는 반드시 그걸 곱게 받는 법이 없어요. “지킬 테니까 딴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해도 하나님께서는 상관하지 마세요. 지키라는 숙제할 테니까 숙제 내지 않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재량껏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토 달지 마시고 숙제 한 것에 대해서는 참 잘 했어요.☺☺ 라는 도장이나 찍어주세요.” 라고 그런 심보를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은 그 당시에 줄 때는 몰라요.
그러나 율법이 퍼지면서 율법이 갖고 논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율법을 가지고, 율법 있다는 것을 가지고 구원을 확보하고 나머지기 일반적인 행동은 자신의 욕망으로 살았던 사람, 유대족이죠.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미 구약 성경부터 나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 가지 예가 있는데 시간관계상 다하지 못하고 역대상 21장에 보면 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자기 백성의 숫자를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걸 누가 시키느냐, 사탄이, 악마가 시킨 거예요. 악마는 다윗에게 이걸 시키면서 숫자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그 법이 그 전에 없다 이 말이죠. 법에 없는 것을 행했기 때문에 이거는 법에 저촉이 안 되는 것이 되고 말죠. 그래서 다윗이 숫자를 헤아렸더니만 결국은 숫자 헤아린 것으로 말미암아 칠만 명이 사흘 동안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거는 메르스 전염병으로 서른여섯 명 죽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칠만 명이 전염병으로 다 죽었어요.
그렇다면 사전에 숫자 헤아리지 마라는 법이 들어 있었어야 돼요. 그러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면 “아아! 사탄아! 시험 들게 하지 마라. 여기 숫자 헤아리지 말라고 나왔는데, 내가 이걸 어길 수가 있느냐?” 이렇게 해서 숫자를 헤아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법에 보니까 숫자 헤아리지 말라는 것이 일언반구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거는 되는 줄 알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나쁜 것이 되고 말았어요. 법과 법 사이에 또 법이 있었던 거예요. 요 법만 지키고, 법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또 법이 있었던 겁니다.
또 예를 들면,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승리한다는 그러한 법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울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드렸는데 제사를 드릴 제사장인 사무엘이 오지를 않았어요. 적들이 쳐들어오는 다급한 상태에서. 백성들은 제사 드려야 전쟁한다는, 그래야 하나님께서 함께 있음을 아니까. 당사자가 오지를 않으니까 그래서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가려고 하다가, 딱 드리고 난 뒤에 사무엘이 와가지고 “왜 당신이 제사를 드렸느냐?”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럼 그 전부터 다급할 때는 왕이 한다든지, 해도 된다든지, 이런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도 없이 새롭게 발생된 거예요. 새롭게 발생된 상황에서 과연 그 법에 저촉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나중에 징벌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정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문자 이상의 것이 있는데, 율법은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적용되고 새롭게 해석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율법이 이런 내용일거야.’하고 우기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일 조차도, 내가 미처 알지 못하게 되는 그 범위를 넘어선, 율법 저촉이 됨을 차후에 율법께서 그렇게 해석을 내려버립니다.
자,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 줘 놓고 율법 못 지키도록 하나님께 훼방을 하는 전략을 세우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은 각자 자기 삶의 자리가 전부라 생각하고, 일종의 인간이 사는 골목길이 있잖아요. 쉬운 예를 들면 어릴 때 골목길에 살다가 골목길을 따라가면 중앙 광장이 나와요. 특히 서유럽의 도시 국가나 폴란드, 체코, 안 가봤습니다만 뭐, 발길 따라 세계를 보게 되면 거기에 골목 나오고 중앙에 보면 광장이 나와요. 거기서 거리 예술가들이 공연하고 관광객들에게 동전 받고 하는. 각자의 골목길을 벗어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광장에 모이게 하는 겁니다. 광장에 모이게 되면 율법에 의해서 벌 받고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총체화, 집단된 거기에서 복이 나오고 저주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야고보서에 보면 이래 되어 있어요. 그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저주 받는다 되어 있어요. 자기가 광장에 안 나서고 골목에서 지 혼자 나 율법 지켰어! 하다가는 고거는 광장에 나와 봐! 니가 모르는 법을 니가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광장에서 알 수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축복과 저주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나왔고 아브라함을 인정하면 복 받고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받습니다.
그 아브라함으로부터 계속해서 축복과 법에 대한 근거가 확장이 돼요. 그 확장되면서 그것이 율법까지 파급이 돼요. 율법을 그냥 법으로 보면 안 돼요. 율법을 들춰야 돼요. 율법을 들추면 율법 뒤에, 거기에 어떤 동일한 인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이 역사가 흘러가고 율법이 많아지면서 이렇게 바뀌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 그렇다면 모든 율법은 걸려들으라고 있는 거예요. 죄 지으라고 있는 거고요.
골목에서, 내가 사는 골목에서 빼내어서 모든 율법이 집결되는 그 장소로 이끌어내는 기능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율법의 집결 장소에 뭐가 있느냐, 바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모든 총화가, 총집합이 십자가, 따라서 십자가를 믿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영생을 받고, 복을 받고. 십자가를 모르게 되면 아무리 착해도 저주받는다는 사실이 율법의 중앙에서 그렇게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의 중앙에 있는 그 십자가가 율법의 총화라면, 그러면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되잖아? 라고 나오거든요. 근데 십자가는 믿어야 될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 법의 집합이 십자가라며? 법의 집합이 십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법의 집합이 되어 버리면 무엇이 떨어져 나가버리느냐 하면 “내가 지켰습니다.”가 같이 떨어져 나가요. 십자가는 “내가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는 행함이 통하지 않아요. 이 법을 지켰습니다. 어겼습니다는 되지만. 십자가 앞에 가면 어겼습니다. 지켰습니다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몸이 바뀌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가게 되면, 계속 내 몸은 율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 내 몸이 지켰을까? 안 지켰을까? 내 몸이 결부되어 있는데, 십자가 앞에 가버리게 되면 “니 몸은 요기까지! 요까지! 집에 돌아가세요.” 내보내고 이제는 하나님은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상대해요. “너는 대기상태에 있어. 너는 집에 가 있어. 애들 노는 곳이 아니야.” 주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이제는 행함과 상관없이, 택한 백성이 누군 줄 모르지만, 택한 백성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사 대신 저주를 받게 되면 그게 십자가거든요. 십자가 지고 부활해서 부활한 효과를 주게 되게 되면, ‘아, 구원이라는 것은 나의 행함과 무관하구나!’ 라는 것을 아시는 겁니다.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인생은 자기기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광장으로 이끌어내서, “니 몸 말고 내 몸” 이거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니 몸 말고 내 몸” 너 자아 천국 못 가고 주님의 자아가 심어지면 그거 천국 가는 거예요. 만약 니 자아를 유지하고 싶다, 그럼 지옥 가서 많이 유지하세요. 부자가 지옥 가서도 나사로한테 물 달라고 막 시키잖아요. 아직 자아가 남아있어서. 천국 가면 어떻습니까? 그냥 주의 은혜입니다. 감히 고개도 못 들고 그냥 면류관 반납하죠. 낯짝 들 수도 없어요. 그냥 그 앞에 납작 엎드려서.
이 자아는 이미 주님이 점령했던 자아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졌던 자아고. 지옥 간 사람은 아직도 땅땅 큰소리치며 나사로한테 “나사로야 물 가져와!” 어디 다방이가? 식당도 아니고. 물 가져와! 자기 자신이 그대로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을 뭐냐, 율법 판으로 만들어버리고, 율법 판에서 어떤 인간이 착하고 신앙생활 잘해도 거기서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완전히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본의 씨름을 스모라 하는데, 스모 경기를 저녁 7시에 하니까 6시부터 입장이 되는데, 세 살 네 살 애들이 거기에 모래판이 있으니까 저그 동네 놀이터인줄 알고 막 모래장난하고 이러는 거예요. 관리하는 현장 직원들이 가가지고 모래판을 밀고하는데. 나중에 덩치 크고 이상한 팬티 입은 스모선수들이 경기해야 하는 그런 것은 모르고 애들은 지들끼리 노는 거예요. 그러다가 7시가 가까이 됐어요. 쿵쿵 소리 내면서 거인들이 들어옵니다. 할 때, 진행요원들이 “애들은 가라! 여기 니들이 노는 놀이터 아니야!” 하고 쫓아내잖아요.
예수님의 율법은 마귀를 겨냥하는 거예요. 마귀라는 스모선수와 예수님이라는 스모선수지, 애들 같은 우리가 노는 판이 아닙니다. “애들은 가세요. 어이, 여기 노는 곳이 아니야.” 하고 훌쳐내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주니까 깜짝 놀랐어요. 저그가 놀아서 이거 잘 놀면 천당 가는 줄 알고. 그들은 율법대로 하는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이 시시하게 여겼던 그 외 다른 상황들을, 위험한 사태들을 자꾸 만들어버려요. 율법에서 지정한 그 법 조항 말고 법과 법 사이에서 위반한 사례를 추가적으로 자꾸 유발시켜버렸다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자기 노는 씨름판인줄 알고 “그래도 율법 지켰잖아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나라에 아주 악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기는 양이 많으면서 종이 양 한 마리밖에 없는데 자기 양은 놔두고 한 마리밖에 없는 종의 양을 잡아가지고 손님 대접했습니다.” 하니까 다윗이 지가 흥분해가지고 “뭐 그런 뻔뻔한 인간이 있어? 그 인간은 율법대로 네 배나 갚아야 하고 그 인간은 죽어야 마땅해. 왜 이거는 법이니까.” 라고 하니까 나단이 하는 말이 그거는 “니 생각이고. 바로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줄 몰라요.”
우리가, 성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적한다는 겁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하고 내가 나를 못살게 굴고 벌 세워요. 채찍질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자꾸 우기는데 그거는 하나님의 보응이 아닙니다. 그거는 지금 놀지 말아야 될 동네에 착각해서 노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즉각적인 보응과 천대에까지 복을 준다는 게, 이거는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 내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 설명을 하면서 요 대목이 상당히 어렵거든요. 왜냐하면 여기 “너희를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해내셨나니” 할 때 그 바로의 손에서 속량해내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해서 “애굽아! 빠이빠이 우리는 딴 백성이다.” 하고 이렇게 우겼는데, 그 속량했던 속량의 능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애굽의 제 2의, 제 3의 바로 왕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야 속량했던 그 힘이 과거의 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의 힘으로 계속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누누이 막 사세요.” “우리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라고 이야기했던 이유가 “그 속량의 힘이 지금도 계속해서 발휘하고 있습니다.”는 표현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막 안 살아버리면 우리는 잘나서 구원받게 되고 이미 구원의 능력은 우리한테 더 이상 적용이 안 되는 그러한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처음에 죄 용서 받았을 때는 못난 인간 되다가 갑자기 용서받고 잘난 인간으로 행세하게 돼요.
그런 경우가 참 많은데, 우리교회 처음 나올 때, 예배 처음 드릴 때는 열한시 예배인데 열시 반에 나와요. 세상에 이런 말씀이 다 있노? 시간이 점점 더 짧아져서 나중에 열한시 십오분, 이십분, 그렇게 된다니까요. 왜, 알아버렸으니까. 뭐, 잘났는데요. 아직 골목에 있어요. 중앙에 나와야 해요. 중앙의 십자가 앞으로 계속 나와야 돼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더 많아져야 돼요.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오신 분이 저한테 질문 하나 하셨는데, 큐어 축제를 반대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서울에 계신 분인데 대구동성로에서 큐어 축제를 하는데 반대하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큐어축제가 뭐냐 하면, 동성애자들이 무지개 축제란 이름으로 성(性)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시위는 하기 뭐해서 이름을 바꿔서 축제라는 이름으로, 동성애자들끼리 모여서 서러움을 좀 풀고 대외적으로 우리도 같은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알려서 동성애에 대한 나쁜 인식을 이렇게 개선해보고자 하는 그 축제인데, 그 반대 축제하기 위해서 기독교단체에서 거기에 또 차비 써가면서 모인 거예요. 그래서 아, 그런 일 때문에 오셨구나, 하고 평가를 유보했는데, 어제 방송에 보니까 송현여고 하고 현풍고등학교 하고 토론을 하는데, “이 큐어 축제에 대해서 고등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 서로 토론하시고 반대의견을 제시해주세요.” 라고 이렇게 돼있어요.
그래서 그 토론을 들어보니까 누가 이기느냐 하면 동성애에 찬성하는 쪽이 이겨요. 왜 이기느냐 하면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토론의 장이고, 자유민주주의는 토론의 장이고, 자유민주주의니까, 자유민주주의 뜻이 뭐냐 하면 자유라 하는 것은 토론하는 뜻이고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누구나 표가 한 표 라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합쳐서 자유민주주의에요. 토론하되 동등한 자격으로 하는 것, 그게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거든요.
따라서 헌법에 의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껏 삶을 표현할 수 있고, 누가 누구를 억누르지 않고,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공동체라면, 이 공동체에서 성소수자들이 남자가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데,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자기들은 법적 권리를 다 찾으면서 남자가 남자와 결혼하고 여자는 여자끼리 결혼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라에서 나오는 법적이고 경제적인 혜택을 배제한다는 것은 이 민주사회에서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큐어 축제의 취지입니다.
“미국의 많은 기독교단체가 이미 인정했고, 영국의 성공회도 인정했고, 가톨릭도 이제 인정할 분위기고, 전 세계가 동성애도 같은 인간으로서 있다. 주도 사실은 고난 받은 자고, 주님은 사실은 고난 받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성소수자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것은, 이거는 전체주의, 기성세대가 주의 사랑을 제한되게, 줘야 될 곳에 주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즐기니까 이거는 주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어긋난다. 따라서 주를 사랑한다면 성소수자들에게도 주의 사랑을 베풀어서 그들도 나라의 혜택을 입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전파다.” 지금 분위기가 이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해답을 내놓는 사람들이 없어요. 해답을 몰라요. 사람들이.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보응하시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제가 해답을 내놓겠습니다. 해답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 땅에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생활 하는 것, 그거 벌 받는 거예요. 지금 벌 받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성소수자들이 이걸 부러워하고 있으니까 이게 문제가 된 거예요. 사람 사는 게 벌 받는 거예요. 천국 가면 여자도 남자도 없고 결혼도 없어요.
그러면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산다는 것은 전부 다 벌 받는 겁니다. 혹시 행복할까봐 결혼해서 개떡 됐잖아요. 망했잖아요. 무르지도 못하고. 어떤 아줌마에게, 다시 태어나면 당신의 남편과 다시 살겠습니까? 80퍼센트가 NO!! 못살겠다는 거예요. 자식 때문에 살지 안 그러면 벌써 이혼했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로마서 1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26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절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따라서 이 하나님의 계명, 이 말씀이 말씀화 되기 위해서는 결혼, 남녀가 결혼하는 것 말고 다른 식으로 보응 받는 그 몸들에게 주셨으니 그게 동성애자에요. 니는 동성애해서 벌 받고 나는 동성애 안 해서 벌 받고 둘 다 벌 받는 중이에요.
자유민주주의? 이것도 벌 받는 중이에요. 우리는 수감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교도소에요. 교도소에서 데모하기를, “저 사람이 받는 벌을 나도 받게 하옵소서.” 이런 데모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무지개 축제하면서. 그럴 리 없을 것 아니에요. 자기들끼리는 남녀가 결혼해서 행복한데 왜 우리는 남자와 남자가 결혼하는 것이 왜 불행의 씨앗이 되어야 하느냐?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것 때문에 하는 거잖아요. 근본적으로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행복할 권리가 없습니다.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교회도 이야기 안 해요. 성당도 이야기 안 해요.
왜냐? 교회 자체가 “행복 줄 테니까 교회 오세요.”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회부터가 “여러분! 벌 받고 있는데 벌 받는 이유를 알려줄게요.” 이렇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 힘들지요? 교회 오세요. 하나님 사랑 듬뿍 받아서 행복하세요.” “부자 되세요.” 이러고 사람을 끌어 모은 거예요.
그리고 큐어 축제를 반대 집회 하려면 복음을 이야기해야 되지 복음 외에 다른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을 반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로마서 1장부터 해서 성경 여러 구절에 동성애자들은 저주받는다고 했는데 나는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 곳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당신의 축제를 반대하는 것도 그러니까 이해하세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우리도 만만치 않게, 수월치 않게 벌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죠. “우리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벌 받았고 당신들은 남자가 남자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 좋아하는 그런 벌 받고 있어요.” 왜냐, 정신적 장애자니까. 정신병자거든요. 그것도 심한.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동성애하지 않고 이성애한다고 그것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에요. 왜 나는 남자면서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면서 여자를 좋아하느냐? 아하! 나한테는 이런 식으로, 중앙 광장의 골목길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하면서 이런 좁은 골목길에서 숨어가지고 평생을 지내지 말고 나오라는 겁니다. 나와서 중앙광장으로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작용이 바로 그겁니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 자손에게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 자손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능은 사실은 주님의 두 가지 속성에서 나오는 기능이에요. 하나는 저주의 기능, 하나는 사랑의 기능, 용서하는 기능. 그 기능 중의 하나를 우리가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고. 그걸 저주로 임하게 되면, 누가 자기 저주하는데 좋아 할리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예수 안 믿어. 내 힘으로 행복을 쟁취할거야.’ 이래 하면 부자처럼 지옥 가는 거예요.
세상을 이처럼 율법을 가지고 분류하는 작업 자체가 정당화되는 식으로 깔아놓은 겁니다. 쫙 밑에 깔아놓고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아무도 복 받을 사람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내가 너를 구원했다고 하면 감사하는 거고. 구원받지 못할 자는 예수님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게 되면 나는 당신하고 놀 생각 없거든요. 나는 내 힘으로 살 거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이렇게 되면 이건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이 판정이 난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이런 거예요. 옛날에 미션임파서블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지금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참 복음적인 것이 담겨 있어요. 뭐냐 하면 그 정보원이 미션임파서블, 불가능한 사명을 감당할 때 꼭 이상한 곳에서 녹음테이프를 줘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이 녹음테이프는 5초 내에 파괴됩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율법이 있는 이 곳에서 살 수 없어요. 우리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사명이 주어지게 되면 그 사명은 그 다음에 우리의 일생으로 5초 이후에 우리에게 퍼져버려요. 사명이 우리한테 들어와 버립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갉아먹죠. 뭐가? 사명이 우리를 갉아먹어요. 그러면 우리에게 딴 세계가 점점 더 온 몸으로 짜릿하게 전기를 일으키며 다가와요. 뭐 이런 세계가 다 있느냐?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는데 누구 하나 내 대신 죽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영생에 나라에 가다니? 천국 가다니? 뭐 이런 희한한 세계가 다 있나? 그것을 보여주면 그게 사명이에요.
어떤 시골에 있던 친구가 철딱서니 없이 서울에 있는 친구를 만나가지고 “나도 이제 농사일 버리고 서울에 온다.” 이렇게 하니까 서울에 오래 살던 친구가 “야야! 니 충격 받지 말고 내 말 들어라. 서울에는 물놀이해도 돈 주고 물놀이해야 된다.” 시골 친구가 충격 받았어요. 우리 촌에는 개천이 그냥 놀던 덴데, 서울에는 물놀이도 돈 주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도 이 친구가 “그래도 서울 살란다.” “왜?” “나는 돈 삼천 만원가지고 제빵제과 기술을 배워서 제과점 차리겠다.” 이렇게 하니까 서울 친구가 하는 말이 “니가 충격 받지 말고 들어라. 서울에서는 삼천 만원 가지고 한 가지 종류의 빵만 만든다. 붕어빵.”
여러분! 천국이요? 충격 받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행함 없이 구원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선 깔듯이 보일러 선 깔듯이 우리는 지킬만한 법만 깔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사이에 우리가 어길 수밖에 없는 새로운 법이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괴수되게 만드는 그 작용이 이미 구원받았던, 구원시켜주신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속성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