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신 7장 12-16절(언약과 복)1507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7장 12-16절입니다. 구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식당에 음식을 주문했는데. 식당에 음식 주문할 때 꼭 갈등이 생기죠. 주문을 하고 기다리리다보니까, 옆 테이블의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이는 경우를 경험할 겁니다. 비빔냉면 시켰는데 물냉면이 더 맛있어 보이고, 물냉면 시키면 비빔냉면이 더 맛있는 것처럼. 옆 테이블의 음식이 그렇게 맛있게 보일 때 ‘딴 걸 시킬 걸.’ 하는 그런 생각이 들죠. 그래도 여러분들은 다들 점잖은 분들이라서 옆에 있는 테이블의 음식에 숟가락 들고 달려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예의가 있으니까. 남의 음식에 숟가락 들고 달려들면 안 되죠. 그 정도 예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 대해서는 예의가 없어요. 방금 읽었던,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병은 적들에게 줄 것이다. 이 말씀, 이 음식, 예수님이 시킨 겁니다. 우리가 숟가락 들고 가면 안 돼요. 우리가 숟가락 들고 하면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을 주문한 적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 더운데 길바닥에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 카페베네에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 “혹시 여기 말씀 주문했습니까?” 아무도, 커피주문하고 팥빙수 주문했지, 말씀 시킨 사람은 없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도 말씀을 주문하지 않습니다. 유치원 애들에게 물어보세요. 혹시 여기서 신명기 5장 주문하신 분 있습니까? 없습니다. 숟가락 들고 젓가락 들고 나오면 안 돼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주문하시고 혼자 맛있게 드시려는 짬뽕입니다. 자장면입니다. 주님이 먹겠다는데, 왜 숟가락 들고 먹고 난 뒤에 맛이 없네, 못 지키겠네, 누가 뭐라고 했어요. 지 것도 아닌데 남의 것 가지고 왜 짭니까, 뭡니까, 지키려고 애썼는데, 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복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거든요. 복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니까 그 복이 탐이나가지고 주님이 주문해서 주님 혼자 지키는 말씀에 젓가락 들고 덤벼든 거예요. 혹시 복 얻을까 싶어서. 니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 하라. 그거 주님 혼자 시킨 거거든요. 그거 조용기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혼자 시킨 거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숟가락 들고 젓가락 들고 지 거 만들라고 수십 년 교회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고 신학교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뭐 풀로 만든 신학교, 풀로 만든 신학교인지 물로 만든 신학교인지, 칼빈 신학교, 총신이고, 총신은 모든 신의 총합체를 총신이라고 하거든요. 장신이고, 오래간다고 해서 장신이거든요. 총신이고 장신이고 합신이고 그거 다 소용없습니다.
신학교 없어도 천국 간사람 한 둘이 아니에요. 정리해드립니다. 말씀은 우리 게 아닙니다. 뺏지 마세요.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말씀 주셨고 주님은 홀로 맛있게 드시고. 우리는 뭐냐 우리는 그냥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죠.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주워 먹고 영생 얻게 되는 겁니다. 영생 얻게 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 말씀을 예수님이 안 지키고 남이 지키면 어떻게 되는가. 남이 지키면 벌 받죠. 벌 받습니다. 왜 지킬 잽도 못되고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못 지키겠는데요.” 하면 좋잖아요. 그런데 꼭 그렇게 안 나와요. 악한 인간들이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요. 더 악에 악을 더한 것이 뭐냐 ‘지켰다’가 나와요. 바리새인이에요. 이거는 더 못됐어요. 더 악질이에요. ‘지켰다’가 돼버려요. 요거는 지켰고 딴 거 한 번 슬슬 도전해볼까? 이래 나와요.
십일조를 지킨다고요? 아무도 못 지킵니다. 그런데 봉투에다 십일조 쓰면 십일조 지킨 겁니까? 더 못됐어. 십일조 했고! 이래 나옵니다. 교회 나오면 안식일 지켰고! 이래 나와요. 예배 참석했고! 이래 나옵니다. 어떤 말씀도 인간은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말씀이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문장은 멘트로 되어 있고 언어로 되어 있잖아요. 그 언어에 규격 되어 있는 그 언어의 내용은 거기에 딱 일치되도록 포착이 될 때 지킴이 성립이 돼요.
그런데 그 언어가지고, 주의 계시가지고 모든 인간들에게 이렇게 대조를 해보면 일치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일치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요한복음 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모세 율법 가지고 낑낑거렸는데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너희들이 모세 율법을 지켰다 하니까 죄가 더 심하고 모세가 너희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모세 율법이 너희들을 정죄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모세 율법의 정죄가 뭐냐 하면 그야말로 저주죠. 너희들은 율법을 가지고 지키겠다고 하는 그것이 주제파악이 안 되가지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신 이론이 맞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자기가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줬다면, 본인이 “손대지마! 손대지마! 내가 지킬게.” 이렇게 나와야지 여기에 “너희는”, 다수, 그러니까 2인칭 복수, “너희는” 마치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처럼. 지키라는 용어를 꼭 쓰는 이유가 뭐냐, 이게 궁금하겠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것이 이렇습니다. 사후적개념, ‘사’라는 것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후’라는 것은 그 후에,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소급해서 보게 되면 백성이 없던 자리에 백성이 생겨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될 때, 그 때에 너희가 그 너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 너희에 성급하게 덜렁 달려들지 말고, 이 너희에 지금 우리 너희라고 달려들지 말고, 처음부터 너희라 하는 것은 너희에게 말씀을 주신 ‘나’가 너희를 새롭게 창조할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이 말입니다. 지금의 너희 말고 내가 일방적으로 다 지키고 나면 그때 ‘아 주님께서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럼 그 너희가 누구지?’
그때 너희가 누구라 하는 것을, 그때 내가 너희를 새롭게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이 말씀이라는 규격에 맞도록 하시는 자격자가 이 말씀의 유일한 완성자, 실행자, 말씀 주신 분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그렇다 해도 말씀을 주셨으니까 덤벼들 것이 아니냐? 덤벼들 것을 예상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언약을 가지고 비교대상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 좋은 예가 뭐냐, 신데렐라 동화에 나오는 ‘신발 주인 찾기’ 이벤트가 바로 그겁니다. 파티 한 번 열어놓고, 12시 종 치기 전에 도망가게 만들어놓고, 신발 한 짝 잃어버리고, 맨발로 집에 왔을 때, 왕자가 신발 들고 찾아가죠. “신발 맞는 사람 혹 여기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욕심 부린 언니들이 지 발에 맞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끼워 넣어가지고, 이거 신발 안 맞거든요. 그런데 종도 아니면서 아주 비천한 종처럼 살아가는 그 배다른 동생인가 하는 그 애가 신발 한 번 신어보니 자기 신발처럼 딱 맞더라 이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 구원하실 때, 우리 신발 치수 다 쟀습니다. 신발 치수가 언약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언약을 들고 찾아나서는 거예요. “혹시 이 중에 내 백성 계십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왕자님은 신발 들고 나서는데 우리 주님은 언약 들고 나서십니다. 언약 들고. 하나님의 언약 들고 나서요. 그러니까 언약이 없다고 칩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언약이 없다고 칩시다. 언약이 없는 세상은 언니들만 행세하는 세대. 언니들만. 언니들만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언니판 세상이 될 거예요. 그 세상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 같이 뉴스에서 대하는 이 세상이 될 겁니다. 뉴스나 드라마나 우리가 매일 같이 거기에서 보는 세계는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이냐 아니냐를 측정하는 기준이 완전히 삭제된 그 세상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광주 강의에서 그런 강의 했거든요. 개구리하고 사람하고 차이점이 뭐냐? 질문 하나 던져놓고 개구리하고 사람하고 차이점은 개구리에다 언약을 넣고 사람에다 언약을 넣게 되면, 만약에 진짜 사람 같으면 언약적인 요소, 하나님의 형상이 반응을 나타날 때 그거는 사람이고 개구리는 백날 그 앞에 성경 갖다 대어도 개굴개굴 소리밖에 못하죠. 그건 사람이 아닌 거예요.
제가 개구리하고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고 질문을 했지만, 뭐 가까이 질문하면 사람 가운데 사람 같은 사람 누구냐? 하고 같은 질문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들이대가지고, 신발을 들이대가지고 천국의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가지고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가지고 결정하는데 천국 백성도 아니면서 천국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신데렐라 언니들이죠. 언니들이 마중을 나와요. 그 대표적인 언니가 누구냐 하면 큰 언니가 바리새인, 둘째 언니가 사두개인, 셋째 언니가 서기관들, 넷째 언니가 개혁주의자들.
예수님께서 그 언니들을 보고 이렇게 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 이야기를 언니들이 들었으면 굉장히 좋아할 거예요. 그거 좋아할 문제가 아닙니다. 열심히 했냐? 열심히 했습니다. 최선을 다했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헛짓했구나. 그 이야기입니다. 다 헛짓 한 거예요. 소용없는 짓 한 거예요.
성경에 보면 재미나는 대목들이 많은데요. 그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데, 참, 여름에 속이 시원한 말씀이 나와요. 왜냐하면 그 백부장 이야기 나오면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 했습니다. “야, 백부장이 믿음 좋구나. 천국 간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속이 안 시원할 텐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희들이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여기지만 너희들은 천국에서 쫓겨 나갈 것이고, 주인도 아니면서 먼저 선점했다고 차지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늦게 믿어도 괜찮아요. 늦게 출발해도 괜찮습니다. 거북이처럼 한숨 자도 괜찮아요. 토끼라고 해서 천국 가는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가지 말고요. 쫓겨난다는 것, 그게 왜 기분이 좋냐 하면은 백부장은 이미 쫓겨난 자들의 민족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들은 쫓겨났지만 이방인들은 이미 쫓겨난 자들, 처음부터 쫓겨난 자들이에요. 그런데 주께서는 본 자손이 있던 자리를 물려받아서, 본 자손 쫓겨나고 자기가 가니까 이 백부장이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왜 바리새인들이 쫓겨 가느냐 하면 그들은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고 여기고 언약의 성취된 그 주체로서 본인들이 거기에 가득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천국에 넣어주시는 것은 천국은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 그 사실 앞에서 “그동안 우리는 헛짓했습니다.”는 고백만 내놓으면 돼요. 예수님 앞에서 “저는 고개를 못 듭니다. 다만 죄인일 뿐입니다.” 라는 그 소리만 하면 돼요. 합격입니다.
신데렐라 아가씨가 “이렇게 안 찾아오셔도 되는데 찾아오시니 고맙습니다.” 그 소리만 하면 돼요. “안 찾아오기만 해봐라. 신발 어떻게 해버린다.” 이렇게 노리면 안 돼요. 그걸 저는 평소에 이렇게 했습니다. 인생에 어떤 목적과 기대를 하지 마세요. 실망합니다. 어떤 목적과 기대를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어떤 기대와 목적을 할 수 있는 그런 자격자가 없습니다. 모든 주인공이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니거든요. 안 되는데 되게 하셔야지요. 그래야 감사가 되지, 될 줄 알았는데 되게 돼버리면 주님의 감사가 삭제가 되면서 거기에 내가 하나의 주체로서 끼어들어가게 돼요. 옆 테이블에 주님이 짬뽕 시켰는데 지는 자장면 시켜놓고 자장면 주니까, 에이, 짬뽕 안 주고? 국물이나 주지?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언약 자체가 규격이 있고 내용이 따로 있다고 했죠? 그 내용에 의해서 포착이 되어야 해요. 그 신발짝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봅시다. 15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임하지 않게 하신다,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애굽의 악질이 임해야 구원받아요. 이거 무슨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이래 나오시면 곤란해요.
지금 우리는 이 말씀에, 신데렐라 신발이잖아요. 신발이 신발로 우리한테 현실화되려면 이게 그대로 우리한테 와야 된다 이 말이죠. 오게 되려면 우리가 그대로 애굽 사람이 되어서 애굽의 악질을 모두 맞아야 된다니까요. 말씀 해석의 순서가 그래 되어야 한다니까요. 하여튼 말씀 해석할 때 뭐 나쁜 것 있잖아요? 다 뽑아내세요. 뽑아내서 다 나한테 적용시키세요. 그게 순서라니까요. 그게 순서에요. 그게 왜 순서냐 하면 내가 말씀을 지키지 못했다는 순서가 그 순서밖에 없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성경에 예수 믿으라 했잖아요? 믿지 마세요. 그건 순서가 아니라니깐요. 순서가 되려면 안 믿는 순서를 반드시 거쳐야 돼요. 내가 미쳤나? 예수 믿게? 그걸 반드시 거쳐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예수 믿지 마라는 거예요. 아마 못 믿게 하실 거예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안 믿어지는데 믿는다는 것은 백퍼센트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거짓말이니까, 이번 주 수련회에 해야 될 내용을 미리 하면, 이걸 가건물이라고 하는데, 토해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믿음이 있잖아요? 이걸 전부 다 토해내게 해요. 토해내서 이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서 이 거짓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수사의뢰하겠습니다. 백퍼센트 마귀에게서 온 거거든요.
천국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천국가고 싶어가지고 우리가 예수 믿는 거예요. 백퍼센트 거짓말이거든요. 그래서 주께서는 구원을 시키는데 믿는다는 것을 끄집어내가지고 이걸 천사한테 검사받게 해요. “야 이거 어디서 왔냐? 검사해봐라!” “예. 이거 가짜인데요.” “내 그럴 줄 알았어.” 마귀가 집어넣어줬어요. 그걸, 믿는 걸 토해내야 됩니다. 우웩~~ 하고 토해내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믿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은 적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여! 합창 할 것이 아니고 이걸 하고 싶어요. “주여! 저는 믿은 적이 없습니다.” 수십 년 믿어도 이 한마디만 하면 그때부터 구원받습니다. 제가 너무 확답을 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소리 하겠습니까?
“주여, 저는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되었습니다.” 이런 고백, 이 순간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이 순간이......, 믿지도 않았는데 구원되었어요. 이 횡재!! 주께서 일을 그렇게 꾸몄죠? 내가 알거든요. 그 사람을 사후적,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자라고 이야기해요. 예수 믿는 자. 예수님이 주체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앞으로 남은 여생, 앞으로 천국 갈 때까지 누가 다 집어넣겠어요? 주께서 심심하면 백화점 데려가서 신발사주고 또 신발사주고. 맞추기만 하면 다 맞아요. 왜, 백화점 전체가 나를 위한 백화점이니까. 어떤 신발도 전부 다. 주께서 주신 짬뽕이고 자장면이고. 주께서 자기 먹으려고 했던, 그걸 부스러기라도 나누어 주려고 했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내가 예수 믿은 적이 없는데 몽땅 주의 것이 되었잖아요.
주의 것이 되었으니까 그 다음부터 신발이든 옷이든 전부 다 주님의 것에 딱 맞는 것을, 주님의 것을 우리에게 매일같이 제공하시는 겁니다. 무안에 계신 우집사님께서 제 아내를 위해서 옷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세상에 치수가 어떻게 그렇게 딱 맞는지요.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그렇게 딱 맞을 수가 없어요. 딱 맞아요. 이게 대구 와서 치수를 잰 적이 없어요. 왜 맞는가? 내게 맞춤이 아니고 내 자체가,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것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주님 주신 것은 딱 딱 맞게 되어 있어요.
범사에 감사가 되고, 왜? 이미 내가 주님 이것 좀 해주세요. 라고 내가 아예 기대를 삭제시켜 놓으니까 뭘 줘도 감사, 뭘 줘도 행복, 뭘 줘도 축복, 뭘 줘도 고마운 것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그 과정은 반드시 우리가 애굽에서 받은 악질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왜, 악질마저도 감사가 되어야 돼요. 아, 슬슬 주께서 구원해주려고 한 번 죽어보라고 손을 벌리신 작업 속에, 이미 우리가 그 프로젝트 속에, 프로세스, 그 공정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시편 50편 5절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언약이라 하는 것은 뭐냐, 언약이라 하는 것은 어떤 서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로 하는 거예요. 제사란 뭐냐 죽음이에요. “니가 보기에 니는 살았나?” “저는 살았습니다. 충성!” “내가 보기에는 니 죽었어.” “제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니 앞에 뭐가 있지?” “예. 제사 있습니다.” “제사 봐! 너를 죽이는 제사가 니 눈앞에 있는데 니는 죽은 거야.” 언약 안에서, 니는 죽고 언약 안에서 우린 산거예요. 이걸 신약 안에서는 예수 안에서 살았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지금 예수 안에서는 살아있고 예수 밖에서는, 이건 언약이 없기 때문에 개구리에요. 죽었어요. 인간이 아닙니다. 죽은 거예요. 신데렐라가 신발을 안 신으면 그 왕자의 부인이 될 수 없어요. 근데 신발을 신는 순간 왕자의 부인이 되는 거예요. 왕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 될 때 나한테 나의 적은 없어요. 주님의 적이니까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내가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애굽의 악질이 임한다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장차 일의 모든 것이 마감되고 난 뒤에 지옥 갈 사람들에게 영원한 애굽의 저주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너의 적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적이기 때문에 마땅히 저주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나름대로 친절하게 했지만 우리는 이 언약에서 눈 돌리면, 이 기준에서, 내가 인간됨을 결정하는 언약에서 눈 돌리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주체가 되어 버려요. ‘아이고 내 현실, 내 인생, 아이고 내 자식, 내 남편’ 다시 내가 돌아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언약의 적을 만들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 언약의 적이 되게 하십니다.
방법은 뭐냐 하면 성막 끝에 보게 되면 하나의 태피스트리, 천사 그림이 있죠. 그래서 언약에서 어떤 적이라든지 주체자가 인격이 되기 전에 중간 과정이 뭐냐 하면 천사가 등장해요.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라 할 때 천사가 오죠. 그리고 성막에 천사가 오죠. 그러니까 성막의 제일 마지막 그림이 천사가 왔다는 것은 천사를 통해서 죽이는 죄와 그 복이 성막 진 바깥으로 이스라엘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이해 못하게 되면 멸망하게 되고 그 오해해서 멸망한 이스라엘 속에서 새로운 인격이 나오는데 그 분, 인자되시는 예수님이 나와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해내요. 있는 것은 무로 돌리고 무에서, 죄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해내는 그 기능이 지금 신명기 주신 이 말씀 가지고 이렇게 새롭게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 언약을 통해서 날마다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파괴가 날마다 병행해서 진행이 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끝으로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여기 29절 볼 때에 지금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삼성병원에 있다는 이건희 회장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여기다가 온 사람 다 대입하세요. 안철수, 문재인, 뭐 전부 다 대입하세요. 존귀하게 보이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요걸 쉽게 하면 언약적인 반응을 못 나타내면 짐승 같도다. 애초부터 죽은 자요, 사람 아닙니다. 이런 언약적인 자부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 우리 것 아니었고 주님 것이었는데, 우리가 성급하게 젓가락 들고 덤벼들었습니다. 쫓겨나야 마땅한데, 그 쫓겨남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해주시니 모든 영광을 주님만 홀로 받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