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6강 [신앙의 증거]
여섯 번째 강의의 제목은 ‘신앙의 증거’입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신앙이 있습니까?” 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찾아온 증거를 말합니다. “나한테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증거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본인의 의식의 흐름에서 나왔고 그것은 인간의 기억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의미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증거, 하나님께서 “너는 신앙 있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뭐냐? 그런 의미의 신앙의 증거를 생각하는 겁니다.
신앙의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붙여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누굴 붙여주는가? 우상 숭배자를 붙여주시는 혜택을 입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증거입니다. 우상섬기는 자를 우리에게 붙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우상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친화적이고 정감을 나타내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두드러기처럼 나타나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성과는 달리 우리의 감정은 왠지 이끌리는 겁니다.
그것이 사사기 2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사기 2장 14-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초반, 옷니엘, 에훗, 삼갈, 그리고 드보라, 기드온, 이런 초반의 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해서 그들을 이렇게 괴롭게 하는 것이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만 괴롭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오래 하게 되면 그 체제에 적응하게 되어 있어요.
오히려 그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괴로워요. 어떤 영화에 보면 이 정재(염석진)가 독립군 세 명을 팔아먹었어요. 임시정부 경무국대장을 하면서 일본헌병대 앞잡이가 되어서 독립군을 팔아먹었거든요. 마지막에 독립군에게 걸려서 마지막에 “왜 자기의 동지를 팔아먹었습니까?” 하니까 정말 복음적인 내용이 마지막 멘트에 나옵니다. “해방될 줄 몰랐습니다.” “왜 친일파를 했습니까?” “나는 이대로 죽 갈 줄 알았지요. 해방될 줄은 몰랐습니다.” 해방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고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마지막 때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니엘이 되는 거예요.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나를 바뀐다. 이 세상은 끝났다. 끝났다. 왜 끝났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해서 우리는 천국으로 바뀐다.” 이것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품어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다니엘 같은 이 시대의 사사지요.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아이고, 괜히 오버를 했는데?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초반에는 그래도 느낌이 있지요. 하지만 그 괴로움도 여러분 여러 번 받으면 아예 무반응 적입니다. 그래서 사사의 강도가 외부에서 자기내부문제로 응축이 되면서 삼손에 이르러서는 이제 사사가 민족이고 뭐고가 없어요. 그저 사랑 찾고 애인 찾아서 그냥 자기 힘을 소비하는 그런 사사로서 마감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백성들아, 블레셋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니까 그냥 이 현실에 순응해라.” 흔히 하는 말로 “계란으로 바위 친다고 바위가 깨지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안 깨지지요. 깨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계란이 깨집니다. 계란이 깨지면서 그 깨진 자에게서 나왔던 그 계란의 노른자가 그 계란이 살아있을 때 죽인자보다 더 많았다고 되어 있어요. 삼손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삼손이 없는데서 나온 나실 인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안 생겨도 되는 자식이 생겼는데 그 생긴 것은 나실 인의 기능을 가지고 살면서 그 나실 인의 최종 모습은 “죽어라.”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 죽어야 된다는 사명을 본인이 용납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기 속에 역시 무의식이 작용하니까. 육적인 본성이 있으니까. 사명이나 민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나귀턱뼈로 사람 때려죽이는 이런 것은 뭐냐 하면, “내 여자 내놓으란 말이다.” 하고 술 처먹고 하는 행패 있잖아요. 여자 집 앞에 가서 “나 왔다! 오빠 왔다! 이제 창문 열어다오!” 꼭 이런 동네 망나니, 그것도 정식으로는 못하고 술 한 잔 먹고 용기를 내서 하는 그런 비겁한 망나니짓을 하는데 그게 나실 인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세우신 나실 인이에요. 그것도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규정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 나실 인이 그렇게 살면서 뭔가 흘린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수수께끼에요. 수수께끼의 특징은 정답이 더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수수께끼보다 수수께끼 푼 정답이 더 어려워요. 수수께끼가 이렇다, 하는 그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수수께끼의 근처도 안간 거예요. 그러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풉니까? 산 사람은 못 풀어요. 사망처리 된 사람만 풀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래요. 죽은 자에게만 알려주고 살았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내용인 사사기를 우리는 지금 겁 없이 보고 있습니다.
“그냥 내용이 어떻게 흘러갑니까?” 한다면 한 시간이면 이거 다 해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한 시간 만에 사사기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냥 지나가면 햄버거 가게 가는 것이 바빠서 이발소는 안간 것이 돼요. 뒤에 늦게 온 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앞에 것은 나중에 다시 들으세요. 이발소 거쳐서 햄버거가게를 가야 하는데 햄버거가 그립다고 구원받고 싶다고, 천당 가고 싶다고 그냥 간 거예요. 이발소 가서 자기 목 날아가는 그것은 생각도 안하고. 그렇게 돼야 되는데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성급하게 해방이나 구원이나 자기영생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증거를 주셨는가? 우상섬기는 자를 그 사람에게 붙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누가 붙여줬는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붙여주신 거예요. 붙여줄 때 우상 섬기는 자가 거북스럽거든 아직 신자 맞고 우상섬기는 자가 거북스럽지 않다면 뭔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북하라고, “너하고 전혀 속성이 다르니까 저쪽은 지옥 가는 쪽이고 너는 천국 가는 쪽이기에 둘이 만나 이야기해보니 어떠냐? 대화가 통하더냐?” “잘 통하던데요? 카페베네 가서 두 시간동안 이야기하는데 잘 풀리던데요?” 하나님이 ‘이상하다. 그러면 같은 편인 모양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사를 보냅니다. 그게 사사기에요. 사사기 끝났어요. 하나님께서 붙여줬는데 “힘듭니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상을 좋아하다니! 구원자를 보내소서.” 하고 부르짖으면 “그래, 다음에 보내주마.” 그렇게 되는데 이게 자꾸 반복이 되다 보니까 점점 더 나중에는 부르짖지도 않아요. 나중에는 삼손이 개인적으로 목마르다고 부르짖은 그것밖에는 없어요. 삼손이 부르짖은 그 샘이 ‘엔학고레’, 이름도 희한하다. 사사기 15장 19절,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 15:18, 19)
엔학고레라는 뜻이 뭐냐 하면 ‘부르짖는 자의 샘’ 목말라 죽을 뻔 했다가 그 샘에서 마시고 다시 회복된 그 샘. 사사기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몇 지 증거를 주신 것이 있지요. 그 증거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적용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진멸, 그냥 키워드만 쓸게요. 진멸, 부르짖음, 우상, 그리고 이것을 포함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쟁’이라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 3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여기서 ‘전쟁’이 나오는데 우리가 아는 전쟁으로 바로 가지 마시고 이 전쟁을 이해할 때는 제가 앞에 이야기 한 진멸, 부르짖음, 우상을 경유해서 전쟁의 개념을 파악을 해야 됩니다.
의미파악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이게 물(H2O)이다.’ 한다고 해서 그걸로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똑같은 물이라도 눈에서 나온 눈물은 의미가 달라요. 같은 편지라도 산 사람이 보낸 편지하고 죽은 자가 보낸 편지하고 그 내용이 달라요. 이미 사망처리가 된 사람의 편지와 산 사람의 편지가 다릅니다. “너는 나하고 같이 사망처리 되었기에 내가 보낸 편지를 이해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게 신약성경에 성령 받은 자에게 성령으로 보낸 편지, “♬성령으로 쓴 편지는~” 이렇게 성령으로 쓴 편지.
성령으로만 알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그 내용을 몰라요. 그래서 편지를 보고도 그냥 패스하는 경우가 많아요. “뭐냐 이거? 너 볼래?” 그 편지가 고린도교회에서 천대를 받아요. 그런데 그 편지가 천대를 받아서 바람에 날려서 공중에서 A난이도로 공중에서 두 바퀴 반 돌아서 떨어지다가 얼굴에 척 달라붙었는데 “뭐야?” 하고 떼어보니까 “십자가복음으로 구원받는다.” 해서 그 사람 구원 받았네요. 이거 뭡니까? 그 사람이 바로 주께서 주신 신앙의 증거를 가진 거예요.
신앙의 증거의 특징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내 행함이 요만큼도 섞이지 않은 채 구원받았다.”는 그것이 바로 신앙의 증거입니다. 어떤 신앙의 증거도 자기 행위, 인간의 행위가 담겨 버리면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편지, The Letter from the devil, 마귀로부터 온 편지에요. 인간의 행함이 들어오면. “안식일 지켜야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원하는 겁니다.” 마귀로부터 온 편지에요. 어떤 사람은 성경 그대로 읽어놓고 “자, 믿으십니까?” 마귀로부터 온 편지에요. 왜? 의미가 없거든요.
그 의미가 그렇게 전하는 당신의 의미로 와서 전하세요. 왜?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사사니까. 그냥 글자로 된 거 말고 십자가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왔습니까? 그냥 H2O가 아닙니다. 기쁨의 눈물입니까? 슬픔의 눈물입니까? 우리의 주체를 거쳐서 나와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주체 자리에 누가 대기하고 있느냐 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대기하고 있기에 주님이 풀어주는 의미로서 풀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의미가 뭐냐?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것이 주체만 다르지요. 주님의 주체만 이렇게 나와 버리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의미가 풀어지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빨리 예수 이름 불러. 그러면 구원받아.” 남묘호렌게쿄 믿는 사람들이 주문외우는 것처럼 “빨리 예수 이름 외쳐. 그러면 구원 받아.” 이것은 마귀가 외치는 마귀의 증거가 되겠지요. 성경구절 쓴다고, 그걸 그대로 쓴다고, 아나운서가 성경 통독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작업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나운서가 또 화를 낼 거예요. “내가 기도하면서, 성령에 충만해서 바이브레이션이 되도록 까지 벌벌 떨면서 했는데…….” 벌벌 떨든 말든 하나님의 신비와 그 신비 아님의 기준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벌벌 떠는 게 문제가 아니고 “주여, 저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고백이 나와야 되지요. “감히 나 같은 인간이 성경을 볼 수 있다니 내가 이토록 죄인인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지 “역시 나는 이미 하나를 알고 있는데다가 또 추가적인 것까지 알았으니까 나는 대단해” 이것은 전형적으로 악령 받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전쟁을 알지 못할 때 이 전쟁의 주인은 진멸과 부르짖음과 우상으로 형성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 던져놓고 스스로 회수하는 방식으로 피조물에 언약을 던졌거든요. 그러면 언약을 던지고 성취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단어가 몇 개 나왔느냐 하면, 전쟁 나왔지요? 진멸 나와서 둘, 전쟁은 세 번째, 우상,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언약, 여섯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 이 여섯 가지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 일곱 번째 개념인 바로 땅, 또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전쟁, 진멸, 부르짖음, 우상, 땅, 언약, 이것은 전부 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한테는 모든 것이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낯선 용어들이에요.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침입이 되지 않는 한 ‘내가 이런데 왜 신경을 써야 돼?’라고 강력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용어입니다. 특히 어떤 용어가 제일 맘에 들지 않느냐 하면, ‘우상’이라는 거예요. 우상은 뭐냐? 신이 아니면서도 신인 듯 행세하는 가짜신이거든요. 이게 가짜 신인 거예요. 이 가짜 신의 판정을 누가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대변하느냐 하면, 주체 자, 주체, 하나님의 주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께서 따로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하나님이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이름을 가진 것처럼 나도 이름을 가지고 참여하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냐? “너희들처럼 나도 주체로서 활동해서 너희들과 함께 섞여서 활동을 같이 하겠다.” 또는 “동행하겠다.”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개입을 한 거예요.
그 이름이 개입하면 반드시 벌어지는 것이 뭐냐?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쟁의 양상이 뭐냐? 전 시간 끝내면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싶다.” 한다고 했는데 그게 뭐냐? 진멸이고 부르짖음이고 우상 섬김으로 티 나는 것, 표 나는 것, 이것이 하나의 증거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는 것, 가짜 신이라는 것, 이게 기분 나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성경에서는 이것이 우상이지만 일반 세상에는 우상이 아니고 그냥 ‘신’이에요. 다른 말로는 그냥 ‘하나님’입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네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 믿으십니까? 우상이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안 믿고 누구 믿어야 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로마서 10장에 나와 있는데요?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에요. 주 예수.
그러면 예수 앞에 ‘주’라는 글자 하나 더 붙이면 되는 것인가? 그런다고 ‘주 예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진멸돼야 돼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하고. 이방인에 대한 진멸과 부르짖음, 그리고 약속의 땅, 천국, 천국에서 살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진멸한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필연적인 결과를 기꺼이 수용하는 그러한 신, 그러한 하나님, 실제 활동하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언약대로만 실행하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이 우상이 아닌 거예요.
만약에 하리수가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여자가 좋으니 여자가 되게 해주세요.” 할 때 끝에다가 뭘 붙입니까? 기도 끝날 때 뭘 붙여요? “예수 이름으로” 하잖아요. 예수 이름이 갖고 있는 이런 기능과 자신이 남자인데 여자가 되게 해달라는 그 기능과 이게 합치가 됩니까, 안됩니까? 합치가 안 되지요. “하나님, 집 사 주세요.” 자기 혼자 안 되면 어린 쌍둥이 애들까지 동원시켜서 집 사달라고 하는 그것이 합치가 되지를 않지요.
무엇 때문에 그런가 하면, 이것 때문에, 진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 어서 세상을 진멸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 그리고 뒤에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거 딱이에요. “대가야관광호텔 진멸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어서 주께서 재림하셔서 우리 집부터 해서 모든 것이 전부다 진멸되게 하옵소서. 우리 아들 결혼하는 내년 1월 달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미리 다 모든 것이 다 진멸되게 하옵소서.”
누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우상입니다. 우상숭배가 티가 난 거예요. 주의 이름을 뒤에 괜히 붙였어요. 붙일 내용도 아닌데 붙인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붙여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아침인가,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주기도문은 뭡니까?” 제가 서 있는 채로 답변을 했어요. 제가 미국이 가스펠펠로우십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인데 주기도문이 뭐냐?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없었던 우리가 새롭게 생긴 우리가 될 때 비로소 예수님만 알고 있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그 ‘우리’가 우리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해서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라고 넣어줄 때, 그 영역에 넣어줄 때 비로소 발생되는 그 주기도문이 주기도문이에요. 따라서 그 주기도문 앞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뭐냐 하면, 달라는 겁니다. 집사 달라, 우리교회 부흥시켜 달라, 그저 장학금 받게 해 달라, 뭐 달라, 뭐 달라, 그저 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기도하면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한테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알아서 배급해 줬다는 겁니다. 군에 가서 “스마트폰 사주세요, 중대장님!” 이런 것 없어요. 군대라는 그 조직에 필요한 것은 군대에서 전부 다 배급이 되어 있어요. “소대장님, 야구 글로브 사주세요.” 야구 글로브가 전쟁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전쟁하는 군인이 야구 글로브 끼고 공 던지기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전쟁에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거예요. 그야말로 복음으로 전신갑주를 입게 하는 것으로만 주께서는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신의 이름으로 한 업적이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나와요. “나는 그게 싫은데요?” 싫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을 때 우리가 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 뭐냐? 부르짖음이에요. “이제 그만 나를 놔주세요!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나 혼자 그냥 살래. 제발 주님이여, 저에게 찾아오지 마세요.” 옆에서 “너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나?” “너는 몰라도 돼. 주여, 제발 저를 그냥 놔두세요. 넓은 길을 가든 좁은 길을 가든 내가 알아서 이정표 보고 갈 테니까 그냥 놔두세요.”
이 부르짖음, 이게 특별히 없는데서 생긴 이스라엘 단체기 때문에 이런 혜택줍니다. 이런 혜택이 여러분에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이속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뭡니까? 이방인이에요. 내놓은 자식이에요. 이것은 이스마엘처럼 내놓은 자식이기 때문에 사사기에서 해당되는 것은 전부 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우리한테는 이게 해당사항 없어요.
그래서 다른 민족은 무슨 짓을 해도 가만 놔두지만 이스라엘은 조금만 잘못되어도 언약대로 안했다고 맴매, 회초리로 때리는 거예요. 그 모습을 우리는 사사기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사사기가 조금 이해가 되었지요. ‘아, 자기 아버지에게 얻어맞는구나. 내 일은 아니고.’ 으악, 하면 ‘또 성적 나쁘다고 옆집 애 얻어맞는구나. 내 일은 아니고.’ 나는 성적 나빠서 꼴찌해도 괜찮아요. 저 집은 예민한 아버지가 매일 때려요. “이래가지고 언약대로 백점 맞겠어?” 막 때리는 거예요. “아버지가 절에 다니는 친구하고 사귀라고 했잖아요.” “일부러 사귀라고 했지. 왜? 성적 내려가라고.” 옆에 있는 이방인들이 보고 “저것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납득이 안돼요.
지금 교회도 아니고 교회 다닐 마음도 없는 사람이 사사기를 보게 되면 딱 한마디 해요. “옛날이야기네. 옛날 이스라엘민족의 과거이야기네. 그래서 뭐? 지금은 21세기인데 옛날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데? 우리도 삼국시대 이야기, 선덕여왕 이야기 해볼까?” 이렇게 나와요. 누가? 김용옥 박사가. “단군자손의 신은 따로 있는데 왜 이스라엘의 신, 예수쟁이 기독교의 신, (어떤 사람은 ‘개독교’라고 하는데) 왜 자꾸 남의 역사만 쳐다보면서 그들에게만 메시아가 있다고 하는가? 왜 그렇게 편협 적이고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편향된 그런 시선을 가지면 어떻게 광복 70년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가 소통해서 한 나라가 되겠는가?”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주여, 진멸하게 하옵소서. 아, 저래서 진멸 당해야 되는구나.”
공직자의 임무는 뭡니까? 바로 나라에 충성하는 거지요. 나라의 녹을 먹고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공직 자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다니엘이 있었지요. 다니엘의 임무가 뭡니까? 다니엘의 임무는 바벨론 왕국이 번성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나 다니엘 입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이 나라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 그걸 가지고 짐승의 나라에서 순교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꼭 죽어야 순교가 아닙니다. 그런 멘트를 날린다는 것이 바로 순교를 당하는 것인데 당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십자가로서 호적이 사망처리 되어 있습니다. 죽은 놈 또 죽여 봐야 소용없거든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 믿어지잖아요. 우리가 안 믿어지지요. 안 믿어지는데 주께서는 우상, 이런 것들을 느껴지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죽여주옵소서.” 이런 소리가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는 그런 사태가 이 산을 내려가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강아지가 아프다든지 그런 것. 강아지가 밥을 안 먹는다든지 그런 것. “주여, 강아지가 아픕니다. 주께서 은혜로 지켜주지를 못하고. 나는 귀한 말씀 들으러 왔는데.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거창한 순교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나올 때 주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기에 구원되었지 우리 같으면 벌써, 진즉에 주님과 ‘굿바이’ 하고 일 끝났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 앞에 도망을 치세요. 치시면 주님의 고무줄,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이 여러분의 허리를 도로 잡아당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재미있겠지만 무엇을 수반하는가? 부르짖음을 수반하기에 좀 괴로워요. 시발점의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우상섬기는 자, 다시 말해서, 우상숭배를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을 모른다. 하나님의 언약을 모른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면서 친했던 사이가 나에게 사기나 치고 나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줄 때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소급해서 차후 적으로 알아야 돼요. 그게 바로 주께서 만들어 준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실패해야 돼요. 우리는 실패해야 되고 법을 위반해야 비로소 우리 속에서 법이 살아나요. 위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법을 줬거든요. 그 과정이 사사기입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기에 주께서는 전쟁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강한 압박이 들어옵니다. 압박이 들어오는데 그 압박으로 들어오는 나라들의 특징이 뭐냐? 사사기 2장 13절,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바알과 아스다롯은 부부지간입니다. 무슨 신이 부부가 되는가? 신이 부부가 되는 이유는 보이는 내 모습에서 이걸 동질성으로 확장하다 보니까 내가 납득이 되는 범위까지 신은 계속 나에게 포착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으면 자손이 번창하게 되잖아요.
‘이러한 요소를 신이 줬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닮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닮은 신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만들어내면서 신에 가까우면서도 나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바알과 아스다롯, 부부신이 되는 겁니다. 이 부부 신에게 늘 제사 드리고 섬기게 되면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같이 채워줄 수가 있지요. 이 부부 신뿐만 아니고 현재 신들이 총 집합 한 곳이 어디인가? 힌두교입니다. 힌두교 축제를 보면 얼굴에 분칠을 덕지덕지해서 가관입니다. 안 가봤습니다만 여행지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보면 힌두교 축제를 보여줘요.
그리고 캄보디아에 가면 유적지 중에 뭐가 있습니까? 앙코르와트, 그것이 힌두교의 신화를 바탕으로 세운 신전이거든요. 힌두교가 거기까지 전파되었으니까. 그리고 로마그리스신화, 그것은 뭐냐? 하나의 패밀리 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질서체제. 이러한 질서를 주셨다는 것은 신의 세계에 이렇게 닮은꼴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고 다만 그 모방체제의 질서가 우리에게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아쉽고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신에게 뭔가 요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신에게 기도하게 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는 거예요.
이 신의 특징은 뭐냐? 그 자리를 떠나는 겁니까? 아니면 사수하는 거예요? 그 자리를 사수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 “진멸하라, 토벌하라. 애고 짐승이고 다 죽여 버리라.” 하는 거예요. “다 없애버려라. 네가 없앤다면 너는 우상 안 섬기는 것이고 없애지 않고 남겨둔다면 결국 너 자신도 너무나 우상과 닮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그들은 우상을 좋게 여기고 살았어요. 평화롭게. 질서를 잡는 것이 최고의 뭡니까, 질서를 잡는 것이 최고의 악이라고 했지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몸만 편하면 되니까.
그래서 주께서는 거기에 뭘 집어넣는가? 전쟁을 집어넣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 출애굽 할 때, 전쟁할 때, 어떻게 전쟁했는가? 전쟁할 때 누구의 전쟁인가? 너의 챙길 것을 챙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전쟁이지요. 출애굽기 15장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이렇게 했잖아요. 가스펠송에 이런 가사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고 나의 노래고 나의 구원이라면 여호와한테 얻어 챙긴 것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믿어서 뭔가 새롭게 얻어 챙긴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뭘 얻어 챙겼기에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고 나의 힘이고 노래’라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혹시 힘 가졌어요? 혹시 승진되셨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는데 뭘 얻었기에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정말 궁금해서 묻고 싶어요. 오 목사님, 구원 받았습니까? 구원 받아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애 셋? 그것은 구원과 관계없어요. 그것은 사이가 좋으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보세요. 없잖아요.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상과 언약의 여호와의 차이점이 뭐냐? 우상은 내가 노리는 것이 있고 노리는 것을 내가 기도하는 노동을 하게 되면 그 노동의 대가로 내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인데 여호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호와부터 먼저 등장하고, “그런데 얘들아, 여호와를 믿나?” “그래 믿는다. 믿는데 우리가 뭘 얻었지? 미쳤다. 우리가 얻은 것도 없는데 왜 믿지?” 뒤에 나와요, 뒤에. 그 뒤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바로 죄에서, 사망에서, 율법에서, 저주로부터 구원이거든요. 특히 힘으로부터 구원, 전부 다 돈은 안 되는 거예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 이거 한다고 해서 삼송그룹에 취직되는 거 아니잖아요. 아무짝도 소용없는데 하나님은 좋대요. “기쁘다. 내 백성아.” 이러고 있다고요. 뭘 줘놓고 기뻐해야지요. 내가 안 기쁜데, 내가, 내가 안 기쁜데. 내가 안 기쁜데 뭘 줬다고? 제가 목사니까 목사의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 이렇게 저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왜 감사한데?” “저의 죄에서, 사탄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지옥에서 저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너 이번에 위임목사 투표에서 떨어졌는데?” “에이 씨!” 목사해서 생계유지 하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정작 내가 원하는 돈 줄줄 알았지요.
위임목사 되면 ‘의수히’ …… 이 단어를 처음 알았어요. 목사들 위임 식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성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이제 당회장 목사님이 위임목사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의수히’, (이게 ‘기꺼이’라는 뜻이거든요, 옛날 말로 ‘의수히’) 생활비 드리고 사모님한테는 한복 한 벌, 목사님에게는 양복 한 벌 해드리겠습니까?” 임시당회장이 와서 위임 식 하는데 와서 묻고 있는데 ‘아니오’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예” “그러면 이제 위임목사 되어서 은퇴할 때까지 재직하게 됩니다.” 하게 되면 그 목사와 사모가 “아싸! 파이팅!” 이제 이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 한 연금 보장됩니다.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게 기쁠까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 이게 기쁠까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위임목사에서 쫓겨나게 만드시는 겁니다. 내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뭘 알 때까지. 정작 네가 하는 멘트,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합니다.” “정말 네가 기뻐하냐?” 하는 것을 묻지를 않아요. 다만 그 멘트를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죄 문제에 대해서는 차차 앞으로 살아가면서 죄짓게 하실 것입니다. 우상 섬기게 하실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쪽으로 예수 이름을 남발하고, 여호와 이름을 남발하고, 삼위일체를 남발하고, 그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30배, 60배, 100배, 그걸 찾고자 하는 우상숭배의 모습을 살아가면서 보여줄 거예요.
그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토록 우상숭배자구나.’ 그것이 바로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 있어요. 여러분! 우리 더 살아야 돼요. 지금 죽으면 안돼요. 더 살아야 됩니다. 더 살아서 죄를 더 알아야 되고, 더 지어야 되고, 특히 이 출애굽기 15장의 이 전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거든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애굽이 이 세상 전부를 말하는데 전에 했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 애굽이 뭐냐 하면, 힘의 체제에요. 권력체제입니다. 권력체제에서 나라는 것은 이 힘의 어떤 지점에 취직이 되어야 여기서 어떤 주체성이 보장을 받습니다. “너는 어느 회사 다녀?” 그렇게 묻게 되는 거예요. “너는 누구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 어느 회사 다니는데?” 보통 딸을 시집보낼 때 사윗감이라고 남자친구를 데려오게 되면 신부의 아빠와 엄마가 제일 먼저 묻는 게 뭡니까? “어느 회사 다니는고?” 인물이야 딱 보면 아니까. “내 딸을 사랑하느냐?” 그런 것 안 물어요. “한 달 월급이 얼만데? 그 회사 장래는 있는 회사인가?”
그거 묻고 그 다음에 묻는 게 뭐냐? 혹시 어디 아픈데 없는가, 가정병력이 없는가, 그런 것 물어요. 전부 다 자기 딸과 관련된 것 물어요. 자기 사위의 장래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습니다. 그걸 왜 물어요? 어차피 내 사람 될 것을 그걸 왜 물어요? “내 딸과 몇 년 사귀었느냐?” 해놓고 제일 마지막으로 그냥 말려니 찝찝해서 한마디 하는 것이, “교회는 다닐 거지?” 결국은 이 권력체제에서 묻는 사람이나 물음당하는 사윗감이나 돈, 힘이라는 권력체제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안 벗어나려고 애를 써요. 왜? 그게 나의 주체니까. 그게 나의 나다움이니까.
거기서 어떻게 구원이 나와요? 구원이 안 되어야 되지요. 구원이 안 돼야 밥 먹고 살지 구원 되어버리면 백수 되는데 그건 안 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가지고 “나는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원하는 타입의 하나님이 아닌데요? 아, 불쾌하네. ‘너는 죄라?’ 아, 진짜 듣는 오빠 불쾌합니다. 제가 죄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냥 가세요.”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선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으니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선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까 그냥 가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정작 구원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건져내는데 이분이 바로 여호와 이름이거든요. 여호와 이름의 가시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신앙의 증거로서 가시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요. 장차 오실 메시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이 A라는 층에서는 뭐든지 가시적이어야 돼요. 인간이 쓰는 언어가 일치의 한계가 있잖아요. 한계 있는 그 언어의 그 한계를 아시고 여기에 들어와 버려요. 인간의 언어의 그 구조와 체제에 주께서 멈추지 않고 들어와 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물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이 말렸어요. “죄인만 들어오지 의인은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하는 말씀이, “네가 나에게 세례를 줘야 해.” “회개할 것도 없는데 왜 세례를 줍니까?” “아니, 그렇게 해야 돼. 내가 죄를 뒤집어 쓸 거야. 죄를 뒤집어 써야 이 죄가 십자가에서 죽고 나는 사흘 만에 부활될 거니까 네가 나한테 세례를 줘”서 죄도 없으면서 죄에 합류하는 작업을 해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친절해요?
바깥에서 “날 믿어라”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예 우리가 비밀리에 저지른 죄, 그 현장까지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가져가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런 주님을 여러분이 사랑하고 싶다면 좀 더 사세요. 좀 더 사시면 또 새로운 양상의 아담의 죄들이 나올 겁니다. 긴장하지 마시고요. 자기가 자기 죄를 방어하게 되면 반드시 긴장하게 되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요. 굉장히 어색해요.
그걸 윤도현은 ‘어설픈 내 사랑’이라고 해요. 어설픈 사랑이라고. “빈 가슴 애태우며 난 기다리겠지 어설픈 내 사랑은” 얼마나 어설프면, “못되게 눈 돌리며 외면한 니 모습 모른 척 할래 한번쯤은 날 뒤돌아보며 아파했다 믿을래.” 뭘 지 맘대로 믿어요. 이건 중요한 거 아니니까 그만 합시다. 하나님의 이름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뭘 확산시키는가? 너희가 어디서 구원되었느냐, 그걸 하는데 애굽에서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것은 예선전이고요 본선에서는 누구하고 싸우는가? 바로 어린양의 취지와 싸우게 됩니다. 그 어린양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모세언약, 율법이 나옵니다. 율법, 어린양을 매일같이 반복을 해줘야 돼요. 매일같이 반복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진멸해야 되고 우상은 용서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너희를 상대로 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전쟁을 모르고 있으니까 전쟁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변에 주께서 사용하시는 우상섬기는 민족들을 다 동원시켜요.
그런 잡스런 것들을 불러서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공격하도록 하는 겁니다. 공격하게 하고 거기에 어설픈 사사들을 등장하게 해서 어설픈 방식으로 전부 다 어설픈 전쟁을 하면서 결국 승리는 누구의 승리인가? 바로 여호와께서 너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너희에게 이 약속의 땅을 약속의 땅답게 만드는 책임자로서 그 임무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제사, 제사를 그들은 버리고 “이제 뭐 살만한데. 이제는 서로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 그래서 그들은 쫓아내지를 못한 것이 아니고 쫓아내지를 않았던 거예요. 자기 좋은 것으로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큰 실수한 거예요. 힘에서 힘을 가지고 나온 게 아닙니다. 힘 있는데서 힘없이 나온 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신앙의 증거가 뭐냐? 주께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 빼는 겁니다. ‘구원은 말이나 칼이나 활이나 군대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러분은 이게 다들 이해되시지요? 힘이나 권력이나 재물로 사람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힘을 빼고, 힘 빼면 죄인 되지요 뭐, 죄인 되게 하시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과정으로 이미 우리를 강제로 집어넣은 거예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만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족족 다 빼버리고 거기에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을 집어넣어서 우리가 내 이름으로 살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빼는데 뺄 때 제대로 빼십니다. 아주 끝까지 빼십니다. 그게 사망처리 하는 거예요. “너는 이제부터 내가 죽은 자로 간주하고 나 때문에 산자로 간주해주겠다. 네가 뭘 해도 네가 받았단 자식들, 가정, 그 모든 것은 네 이름으로 등기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등기해야 해.” 그렇다고 또 갑자기 세무소에 가서 예수 이름으로 등기 새로 한다고 그러지 마세요. 그 사람들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마시고 이 땅에서 죄 지으라니까요. 악착같이 한 푼 더 아끼고 그래야 돼요. 하지만 그것마저 주께서 더 죄 지으라고 주신 하나님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세요. “주여, 저는 나밖에 모르는, 나만 사랑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 토해내는 색다른 부르짖음입니다. 식사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