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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9강-적은 무리 (신7;7) 1507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7. 15. 08:03

2015-07-12 15:04:28 조회 : 71         
   적은 무리150712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적은 무리(신명기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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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7-12 15:53 

적은 무리

2015년 7월 12일                            본문 말씀: 신명기 7:7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수를 논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평범합니다. 크기와 양을 논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 생존의 틀이 됩니다. 숫자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 인간 세계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정확한 숫자 챙기기와 그리고 늘어가는 힘을 측정하는데 있어 숫자는 자연적으로 도입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에 입각해보면, 정작 하나님께서 관심 갖는 크기는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 25:11) 즉 ‘죄의 중대함’에 관심 둘 수 있어야 성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의 중대함’의 해결책이 어떻게 해서 ‘주의 이름’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나의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애초에 전환된(소유된) 자들에게 있어 의도적으로 ‘주의 이름’께서 죄를 증가시켜 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주님의 이름’에 속한 주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나의 이름’으로 행세한 몸은 ‘주의 이름’이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본인에게 밝혀진 사항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이름’이 이 세상에 등장하는 통로가 결코 인간들이 기대하는 힘과 사물의 증대나 혹은 힘과 사물의 구조와 질서의 갖추어짐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완벽한 교회 제도나 체제를 갖추어지는 바로 그것이 결코 ‘주의 이름’의 작업 목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단이나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이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유발되는 현상은 바로 ‘죄의 발생과 증대’입니다. ‘증대增大’로 인하여 ‘중대(重大)함’이 가능합니다. 개인이 되었던 집단이 되었던 죄의 증대성을 막을 재주는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이나 활동이 번지면 번질수록 죄가 같이 번지고 커져갑니다. 따라서 이런 인간 세계의 특징은 ‘주의 이름’의 안목에서나 가능하지 결코 그 체제 안에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안목으로서 전체 사항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그는 바벨론 나라의 실제적 통치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 속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 속한 현실임을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자신이 꿈이 자신이 미처 장악할 수 없고, 도리어 자신의 세계마저 부분으로 전환시키는 낯선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꿈의 내용이 뭔지 잊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꿈을 잊어도 무방하지만, 왕은 그 꿈이 자신을 부분으로 만드는 전체임을 감잡았기에 억지를 부리면서도 자기가 꾼 꿈을 신하들이 찾아내라고 닥달냅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이 세상이 천국이 단절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단절의 현상은 인간의 내부에 장착되면서 성도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곧 ‘나의 이름’ 중심의 현실 체제가 ‘주의 이름’ 중심의 체제로 바뀌는 것이 곧 ‘죄 사함’을 성사시키는 상황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위상을 말해줍니다. 그들 속에 세상의 중심이 계시는 겁니다. 죄 사함은 바로 그 중심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 예가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내려 엘리사를 만나보려고 했지만 정작 만나보지 못하고 처방지시만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본인 ‘내부적 단절 현상’으로 이어집니다. 요단강물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게 됩니다. 같이 간 종들이 만류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깨끗이 병이 나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내부의 균열을 경험하고 이런 균열을 야기시킨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인정합니다. 즉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신이 자기 현실의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중심되시는 분에 의해 야기된 주변으로 밀려나옴을 믿습니다.

그는 문둥병 걸린 이유마저 여호와 하나님을 결부시키면서 자신의 땅, 즉 아람 나라의 땅의 사람임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의 땅의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엘리사 앞에 나아가서 하는 말이, “제가 우리 고향의 신, 즉 림몬신을 섬길 때도 저는 참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임을 인정하는 바를 허락하소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중심의 현실을 구축하기 위한 숫자 계산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수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많지 않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불안하고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모두들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지지 아니하면 아무도 자신을 살려내지 못한다고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책임진다는 말은, 힘을 모아야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힘을 모으게 되면 내부적으로 자아 균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포기가 성립되기 곤란합니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언약 중심체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주어지고 그 약속대로 ‘주의 이름’께서 어떻게 구체화시키는 것이 목격자가 되어야 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인간인지라 여전히 다른 민족들처럼 숫자적으로 힘이 증대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이 그런 속성을 후대에 흘러보내졌습니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수를 소규모로 조정해서 결코 이스라엘은 수의 많음에 의존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는 다른 현실 중심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죄의 증대’에 관심 있습니다. 죄의 증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가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희생자의 투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시려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희생자이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12:32에 보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외로움, 서러움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지켜려는 죄인임을 간파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죄의 중대함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래서 저의 이름을 벗기시고 주의 이름 속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고 기도합니다.』

 

39강-신 7장 7절(적은 무리)1507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7장 7절입니다. 구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다른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서 택했다는 것이 큰 나라에 비해서는 마치 푼돈같이, 그게 없어도 무방한, 있는지 없는지 분간 안 되는, 그냥 밟아버리면 곧장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민족을 내세워서. 다니엘에 보면 결국에는 다니엘서에서 큰소리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누구한테 굴복을 하느냐 하면 사로잡혀 온 유대인 소년, 다니엘에게 굴복하죠. 애굽 나라 총수가 바로 왕인데, 그 바로 왕이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면 결국은 그 요셉이라는 소년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공부를 잘했다든지, 다니엘이 공부를 잘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아는 한계 바깥의 이야기를 하니까 그 점에 대해서 복종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아는, 바깥의 것을 안다고 구라를 누구나 떨 수 있거든요. 교주되고 싶어서. 나는 종교를 갖겠다. 무슨 종교? 무교. 이건 무교라는 이름의 괴상한 교주가 등장하는 겁니다. 바깥의 것을 안다고 하면 사람들이 혹해가지고 나한테 돈 갖다 주고 나한테 굴복하지 않겠느냐, 그런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요,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꿈을 꾸었는데 본인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개꿈 꿨구나!’ 하고 잊으면 되는데 잊고 싶어도 그 꿈이 자신의 인생을 주도해버리니까 그 꿈을 풀지 아니하면 본인이 도저히 감당을 못하겠는 거예요.

꿈은 꿨는데 무슨 꿈이지 모르고. 그걸 남한테 “내 꿈 뭐야?” 하고 물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느부갓네살 왕이 바보 아니잖아요. 꿈은 자기가 꿔놓고 남들보고 뭐라고 하는 것은 이건 터무니없는 말인데, 문제는 터무니없는 짓을 본인이 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몰아세우는 다른 힘이 있었던 겁니다. “여봐라! 너희들이 내가 꾼 꿈을 알아내지 않으면 내가 다 죽인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자신이, 본인이 그렇게 답답하다는 이야기에요. 뭐, 부하 못 죽여서 심술 난 사람이 아니고요. 평소의 본인이 아니에요. 이거는 뭔가 본인이 생각해도 이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뭔가 낯선 중심의, 낯선 세상 핵심에 휘말려 든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렸습니다. 근데 그 순간부터 본인은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린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소년 말을 듣고 자기를 고친다니까 고치러 갔는데, 고친다는 사람은 만나보지도 못했어요. 나중에 고치고 난 뒤에 만났고, 그 전에는 만나보지를 못했고, 그냥 처방전을 내려 줬는데 처방전이 참 희귀합니다. “요단강 물속에 일곱 번 들어가라”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들어갔다 나왔으면 좀 진전된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첫 번째 들어갔을 때 아무 진전의 모습도 안 보이고,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안 보여요. 이거 약 잘못 쓴 거 아니에요? 이거 뭔가 실수한 것 아니에요? 하면 할수록 효과가 없어요. 여섯 번째까지.

마지막 일곱 번째에, 나아만 장군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그 강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인은 이미 마음이 떠났어요. ‘내가 참 마음이 약하니까 헛된 것한테 다 속아 넘어가는구나. 내가 바보 아니라고, 보이스피싱 안 당하려고 마음 다 잡고 있지만, 마음 약하니까 다 당하구나.’ 하는 식으로. 신하들이 “이왕 왔으니 딱 한 번 남았으니까 해보세요.” 해보니까 병이 깨끗하게 나았어요. 그때 나아만 장군은 문득 마음속으로 결심을 했어요. “내가 앞으로 림몬신이 있거든, 아람나라 림몬신이라고 있어요. 남들 보기에 림몬신을 섬기든, 산당에서 기도하든 관계없이 내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에 이미 문둥병을 보내줘서 여호와를 아는 계기로 삼았다면, 앞으로 내가 어떤 희한한 신을 섬기더라도 제가 여호와 섬기는 것으로 그렇게 간주해주실 거죠? 그렇게 생각해주실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이래 된 거예요.

이 말은 나아만 장군으로 하여금 “내 행위를, 내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제 행위를 제가 믿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어요? 내가 기도해도 기도 안 한 것으로 쳐주시고, 내가 헌금해도 헌금 안 한 것으로 쳐달라는 거예요. 내가 구원되기 시작한 시작점은 나와 관계없이, 나로부터 출발한 것은 끊어진 상태에서 주께서 시작했잖아요? 주께서 시작했기에 나는 제 삼자가 되겠습니다.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나는 제 삼자가 되겠다는 뜻이에요. 나의 구원에 대해서. 물론 이렇게 나아만 장군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렇게 하지만.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흙을 퍼가요. 흙을. 흙을 퍼가서 나의 고향은 이제 여기라는 거예요. 바뀌었다는 거예요. 가나안 땅이. 내가 내 죄를, 내 한계를 느꼈던 그 곳이 바로 나의 땅이에요. 가나안 땅이 나의 땅이 아니고. 가나안 땅을 왔다 갔다 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가나안 땅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더 이상 나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몸을 갖고 살게 되었다는 그것을 기념하는 흙으로 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그러한 절단, 단절이라고 하는데, 단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요, 이미 예수그리스도 안에 내장되어 있어요. 단절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단절된 계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그냥 죽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되었거든요. 안 살려줬으면 어쩔 뻔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알면서도,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본인이 그 자리에 들어갈 때에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자기 뜻과 주의 뜻이 다르다는 사실을 거기서 고백을 해놓습니다. 이것은 단절에, 단절에, 그것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어설프게 맡기지 말고 다 맡겨라. 올인이죠. 완전 다 맡겨라. 그리고 다 맡겼는데 안 해주면 그건 아직도 다 맡긴 게 아니에요. 덜 맡긴 거예요. 그럼 다 맡기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때 가봐야 아느냐. 아닙니다. 처음 자리에, 내가 없던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자리,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구원 못 받아요. 야곱이 없어지는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야곱은 이스라엘로 다시 삽니다. 아브라함은 구원 못 받습니다. 아브라함 그 딴 거 소용없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언약가운데 새롭게 부여받은 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언약 관계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 자. 그전까지는 하나님의 새 언약, 십자가와 모호했는데, 십자가 때문에, 이제 십자가 증거 하라고 새로운 일자리를 부여받은 거예요. 반도체 회사가 이렇게 큰데, 공정이 많은데, 니는 사장하지 말고 말단의 품질 검사하는데 그 자리, 그럼 그 사람은 반도체 공장 안에서 일자리 하나 맡은 거예요. 근데 이 일자리와 사장과 연관되어 있잖아요. 그 연관된 것을 언약관계라고 합니다.

비록 나는 세상에 별을 떨어지게 못하고 비 오게 하지 못해요. 하지만 연관되어 있어요. 누구하고? 나에게 일자리를 맡긴 그리스도께서 비를 내리시고 햇빛주시고. 연관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 연관된 자리를 무슨 자리라고 하냐면 의의 자리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요. 시편 25편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저한테 질문하러 왔다가 결론내리고 가는 사람들이 참 재미나요. 궁금해서 물으러 왔다가 나중에 해결하고 가면서 또 매일 그 소리가 그 소리네요. 그 소리가 그 소리되려고 우리는 평생을 살아온 겁니다.

맨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 백숙 국물 맛이 그 맛이 그 맛이 아니에요. 오실 때마다 맛있거든. 자기 인생의 맛을 느끼세요. 이 백숙의 국물의 맛을. 분명히 뭐 들어가고 뭐 들어가고 뻔해요. 레시피는 뻔한데 뭔가 달라요. 뭔가 다르다고요. 레시피는 똑같은데 뭔가 들어가는 것이 달라요. 심지어 먹는 사람의 배고픔과도 관계가 돼요. 제가 읽어드리려는 것이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 이게 맛이 다르다니까요.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요 대목입니다. 주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크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주님께서 언약관계 속에서 크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뭐냐 하면, 우리 죄가 크다는 경우에만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겁니다.

근데 오늘 본문 신명기 7장 7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다른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것은, 적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애굽에 살 때, 애굽에 살면서 우리가 기껏 신경 쓰는 것은 뭐냐 하면 수입이 얼마냐? 니 부동산이 얼마냐? 양적인 큼, 양적으로 더 크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믿는 거예요. 심지어 한 때 유행했던 “우리 지경을 넓히게 하옵소서” 역대하에 나오는, 그게 왜 그렇게 유행되느냐 하면 얼마나 평소에 그걸 노렸느냐 이 말이죠. 기도해서 영토, 부동산 넓히겠다고 얼마나 기도했느냐 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부동산 넓히는 것, 수입 많은 것, 재산 많은 것, 아파트 평수 넓은 것, 그런 것 신경 쓸 때에, 그거도 신경 쓰지만 자기 몸무게 늘어나는 것도 신경 많이 쓰죠. 그런 것 신 경 쓸 때에 정작 놓치고 뭘 가리느냐 하면 내 죄과가 중대함은 자꾸 놓치게 되는 거예요. 내 죄과가 중대함을 놓치게 되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요. 주의 이름이. 그거 뭐 어디다 써먹으려고. 아무데도 써먹을 데 없죠.

주께서는 우리 죄과를 중대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 죄의 수위를 조절합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일상에 울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달려 그렇게 볼륨이 조정되느냐. 올리면 높아지고 낮아지고 하는, 그런 것에서, 우리는 뭣 때문에 울고불고 하느냐. 그게 다 허구고 허상인데. 그거는 언약관계 아니거든요. 그러면 언약관계 아니라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내가 만든 관계만을 관계라고, 중요한 의미 있는 관계라고 우깁니다. 그 중심에 누가 있어요? 내가 있잖아요. 나의 존재함이. 나의 존재함에서 이미 현실을 구축해놓으니, 그게 나의 존재와 무관한 것은 우리한테는 시큰둥하게 되고 관계없는 게 돼버립니다.

자, 그래서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아를 뭐로 바꾸느냐, 언약관계에 의해서 새롭게 수립된 자아를 제공합니다. 근데 그 자아가 뭐냐 하면은, 결국은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과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아입니다. 나를 위한 자아는 없고 주님을 위한 자아만이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자아가 있는 겁니다. 그런 자아가 있을 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지느냐. 그 다루어지는 요소로 전쟁이라는 이 단어로 해소가 됩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전쟁은 자기의 명예와 소유를 위한 전쟁입니다. ‘존 로크’ 라는 사람은 말했어요. 처음으로 법률적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법률적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무엇에서 탈출하자는 것을 했느냐 하면 타고난 신분은 그게 다 허구구나. 헛방이다. 돈이 최고지 니가 뭐 양반출신이냐, 성주냐, 그거는 끝났다. 그 시절 끝났다. 이제는 돈이 나를 말해준다. 그러면 신분제도에서는 뭐냐 하면, 누가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해줘야, “니는 양반이야. 우리는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야.” 그게 난 줄 알았는데, 나는 나라는 나를 내가 만들 생각을 해보자는 겁니다. 내가.

내가 나다운 것을 내가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그럼 내가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소유가, 돈이 많으면 남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그때부터 나는 남보다 우수한 존재로서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교육이에요. 교육하는 목적이 뭔데요? 나는 내가 만들기에요. 내가 만들기. 남이 만들지 않아요. 남은 아무 필요 없어. 내가 나를 계획 세워서 내가 나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다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만드는 계획에 하나님이 동의한다면 내편 먹어주는 거예요. 누가 주인인지 종인지 분간이 안돼요. 이번 일만 성사 잘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라는 허장강의 유명한 멘트처럼. 이번 일만 성사되면 헌금 단단히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모든 것이, 시장 경제에서 주체라 하는 것은 얼마나 가졌느냐로 결정되거든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언약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니 중심에서 나온 것이지 그건 하나님의 현실체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현실체제가 아닌 사람을 어떻게 천국백성 만드는가. 아까 시편 25편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이렇게 간다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무엇과 연결이 안 되느냐 하면,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그거는 약간 이해되는 것 같아요. 돈 번다고 죄를 많이 지은 것 같은데. 왜 용서가 주의 이름으로 용서가 된다는 그 고리, 연결 관계, 이게 인간의 언어를 동원해서 설명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설명이 안돼요. 나의 죄악이 많아졌는데 주의 이름으로 용서된다,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죄 짓고 싶어서 죄 짓는 게 아니고 일부러, “하나님. 일부러 죄 짓게 했지요?” 이래 되는 거예요. 내가 죄 짓고 싶어서, 죄가 취미가 아니라 일부러 하나님께서 내 죄악을 중대하게 만든 거예요. 내가 풍선의 고무껍데기라면 거기다가 헬륨가스를 훅훅하고 불어넣으시는 분은 주님이 그렇게 불어넣으신 거예요. 빵 터지라고. 이 생각이 지금 미친 거 아니에요? 그것을 마귀는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니가 돈 번다고, 돈을 사랑한다고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 따라서 번 돈 가지고 남을 위해서 베풀어줘라.” 요게 마귀의 제안입니다. 안 속아 넘어갈 위인이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어요. 내가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그럴 때 내가 그것을 발설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 사람의 죄를 발설하지 않고 꾹 인내하고 참는 거예요. 그럼 참으면 참을수록 이게 뭐가 되느냐. 고매한 품성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 고매한 품성이 문제에요. 점점 더 자신의 의로움으로 이게 모양새가 바꾸어지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남을 용서하지 마라고. 남을 용서하면 용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나의 의로움으로 장착이 되어 버려요. 나의 마일리지가 쌓인다니까요. 이렇게 되면 내 죄가 중대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의로움이 점점 더 늘어나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뭔가 외쳐버려야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버려야죠. 근데 남이 잘못했을 때는, 남일 때는 당나귀 귀라고 하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여자 분들이 이야기할 때 그걸 뭐라고 하면 “니만 알고 있어라.” “너한테만 하는 이야기인데.” 요런 식으로.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성도의 특징은 자기 의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자기 의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계속 유지하게 되면 문둥병 걸리든지 사단이 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믿지 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굳이 안 믿어도 되는데 니가 왜 의도적으로 나를 믿으려고 하느냐? 자꾸 믿으려고 하니까 그 믿는 것이 나의 의로, 마일리지가 쌓이게 되는 겁니다. 쌓이게 되는 것을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느냐. 우리로 하여금 신앙인으로 낭패를 보고 큰 실패를 하게 만들어요. 남보고, 이건희보고 당나귀 귀라고 하지 말고 내 귀보고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순간이 오게 만들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그걸 외치게 만드는 순간이 와요. 망해도 진즉에 망해야 될 걸. 무슨 염치로.....,

그럼 누가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나에게 미련 갖고 희망 갖게 만드는가. 바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숫자가 많다는 거예요. 여기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냥 숫자가 많은 것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집단이 형성되는 겁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이 그 탑이거든요. 바벨탑을 혼자서 못 만들어요. 다 모여야 만드는 것이 바벨탑이에요. 그 바벨탑 요소가, 그 창세기 11장 요소를 우리가 분배받았어요. 할당받았습니다. 그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무너진 조각조각들이 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조각으로 스며들었어요. 하나의 집단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고려해주고 나를 사람으로 받아주는 그 집단을 원합니다.

왜? 우리가 국가를 사랑합니까? 왜? 태극기에 눈물 납니까? 아직도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내가 먹혀들어가고 거기서 인정해주고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만약에 미국 가서 대한민국이라는 그것이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미국 국적으로 바꿀 겁니다. “나보고 군에 가라고? 시민권 가졌는데?” 안가죠. 군에 가면 고생하고 인기 없어지는데. 고만 미국 시민권 가지고 미국에 볼 일 있다고 가버렸죠. 사실은 뭐 계획 있다고 가버렸다고요. 인기 떨어져서 삼 십 넘어 사십이 되어 나는 대한민국에 온다고 하니까 오지 마래요. 유승준 보고. 병무청에서. “인정해주세요.” “니는 니 놀던 곳에서나 잘 놀아라.” 인정해주지 않아요.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왜 나를 사랑하는 무리가 적으니까?” 이래 나오죠. 유승준이 예수 잘 믿어요. 잘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이에요. 하여튼. 사람들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편 들어주는 사람의 많은 무리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무리에 있다 보니까 서로 서로가 자기한테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죠.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잘라내기 시작을 합니다. 그럼 대한민국 국적 바꿀까요? 뭐 외계인으로? 아니에요. 이 땅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나의 원수가 되는 식으로, 니 관계를 현실관을 다시 한 번 조정하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왜냐하면 주님은 같은 패가 아무도 없었어요.

주님은 십자가 달릴 때, 열 두 제자 도망 다 갔어요. 아무도 함께 있지 않았어요. 그 십자가의 고난을 우리는 나누어서 할당받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언약관계라는, 새로운 자아를 할당받는 것이 됩니다. ‘아, 내 속에 주님의 조각조각이 들어왔네!’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외로워도 괜찮아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어떤 의미에서 성도는 자꾸 주님한테 따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왜 자꾸 저를 힘들게 합니까?” 그거 버리면 되는데. 주님 쪽에서 시작한 일이라서 버릴 수가 없어요. 제 아내가 부탁을 했는데 설교할 때 제발 유행가 좀 그만하라고. 제발 좀 천박하니 그만해라. 쉽게 말해서 내가 나를 사랑해서 한패 먹었는데 왜 자꾸 내 패에서 떨어지려고 하느냐 그런 뜻이죠. 그러나 적당한 걸 우에 합니까? 주께서 하신 것을.

그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그지 같은 사랑. 얼마나 아파야 사랑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얼마나 아파야 됩니까? 니가 바로 문둥병 나아만 장군이다. 끝까지 자기 결정을 믿으려고 하지 마라. 니 결정은 개 같은 결정이라 아무 소용이 없다. 니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 니 인생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아! 내가 나를 믿는 것이 하등 내 구원에 도움이 안됐구나!’ 라는 것을 늘 알게 만드는 것은 바로 무리 속에, 집단 속에, 대기업 속에 있더라도 이상하게 끝까지 내편이 없어요. 동창생, 식구들, 숫자 내편 많은데 내편은 없습니다. 그때, 없는데 왜 이렇게 편 많습니까? 이렇게 돼야 되요. 주께서 붙여주신 형제이기 때문에, 내 사람 되지 말고 주의 사람, 주님을 경유해서 다시 우리 같은 형제라고 한 거라고. 그것이 바로 주께서 만들고자 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숫자 적어요? 안 적습니다. 많아요. 많지만 적다고 하는 것은, 니가 원해서 만든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경유해서, 주님이 살려놔서, 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가 결국은 적은 숫자가 아니죠. 누가복음 12장 3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라”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적은 무리라도 한 열 두 명은 되겠죠. 그럼 좀 줄입시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두 세 사람. 세 명 많죠? 그럼 두 명으로 갑시다. 두 명도 많으면 혼자하세요. 혼자서, 교도소에서, 주님 찬미하면서, 천국 갔던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나중에 천국 가게 되면 그 사람들 만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외로움, 성도가 가지는 보편적인 특징이고 속성인줄 압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참으로 우리는 고통스럽고 싫습니다. 서로 이야기 통하고, 복음 통하고, 어려울 때 도와주고, 그런 많은 숫자를 우리가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아시기에 주께서 그것이 바로 우리 죄의 중대함이고. 그런 죄를, 같은 죄를 용서받은, 주의 이름으로 바꿔치기로 구원받은, 주님이 함께 있는 저희들임을 다시 한 번 찬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9강-신 7장 7절(적은 무리)150712-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