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38강-불쌍히 여기지 말라(신7;1-5) 1507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7. 6. 08:20

2015-07-05 15:28:18 조회 : 41         
   불쌍히 여기지 말라 150705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불쌍히 여기지 말라(신명기 7:1-5)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FLugTbbNdTs, Hit:3

 이근호 15-07-05 16:08 
불쌍히 여기지 말라

2015년 7월 5일                              본문 말씀: 신명기 7:1-4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만일 네가 〜 하면 나중에 멸망 당한다”는 언질이 결코 말씀을 더 잘 순종하게 하는 동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협박이나 공갈처럼 들리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보다 힘을 가진 쪽에서의 강요가 자신의 현 가치와 의미를 유지하는 것에 필요하다는 생각에 마지 못해 순종하는 척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꾸 반복해서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게 되면 나중에 화가 나서 일부러라고 반발하고 싶은 심사가 일어나게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말씀을 더 잘 지키라고 밀어붙이시는 식으로 말씀을 주신다”는 오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을 독려차원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너는 망하도록 내가 그렇게 조성하게 있다’는 취지로 주신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에는 망합니다. 하지만 그 망하는 취지와 이유를 아는 순간, 그 사람은 망하지 않고 구원받게 된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이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버틸 수 있는 권한이 아예 애초부터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을 추방시킨 취지도 이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전혀 아까운 존재가 아닙니다. 데리고 있고 싶은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나머지는 아닙니다. 그 메시야를 드러내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대상 아님’의 집단 속에 자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포함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망하도록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인간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게끔 유도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각가지 지시와 규범들을 인간에게 제공하신 것입니다. 즉 “미래는 우리 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말씀을 준수하면 우리의 미래는 복된 세상이 될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말씀에 순종 못하면 저주받은 세상이 되기에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는 생각이 바로 이미 인간의 저주받아 마땅한 근거로 작용합니다.

인간이 망하는데도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홀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드높이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근거로 제시됩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과 연관된 말씀으로 이 작업을 실시하십니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간 어린양’입니다.

유월절날, 처음 히브리인들이 단체로 애굽나라를 떠나던 날, 그들은 기이한 행위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문간에 ‘죽음’으로 칠하는 행위입니다. 즉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자신이 들어가야 될 ‘땅’이 자신의 살아있는 행위로 말미암아 얻게 된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외의 인물의 죽음에 근거해서 ‘약속의 땅’이 성사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당한’ 바로 그분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땅에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죽음’에 참여하게 된 자의 몫입니다. 다른 이는 아니됩니다. 이는 처음부터 인간을 위한 좋은 세계, 좋은 땅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약속의 땅이 제대로 된 땅답게 되려면, 유월절의 죽음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일어나게 하는 환경이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공간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불쌍히 여기지 말라’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곧 “너희 안에는 남을 불쌍히 여겨줄 그런 능력이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 세계, ‘어린양의 죽음’이 적용되지 않는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들 상호간에 ‘불쌍히 여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러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갖고 싶어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어느 남이 갖고 있으면 우리면 그 사람의 목숨이 보다 더 연장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내가 갖고 싶은 미모를 미리 갖고 있는 사람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되면 자발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건강을 되찾도록 기도하게 마련입니다. 또 평생이 같이 고생만 했고 자신도 많이 도움을 받았던 한 가족이 어려움에 처하면 동정하면서 도와줄 궁리를 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불쌍히 여김’이 성사되는 경우들은 나와 어떤 요소와 동질성을 보이는 요소가 발견될 경우에는 처참하게 절멸되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에서 금을 탐했던 경우와 같습니다. 비록 적의 금이지만 평소에 내가 원했던 금이기에, “금이 무슨 죄가 있어. 내가 보관해야지”하면서 가져 가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이방민족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의 멸절을 내심기대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본질이 과연 어떠함을 익히 알고 있는지를 묻는 상황입니다. 여호수아 11:20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대단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나타내고 싶습니다. 이는 착함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찾아오기를 원한다는 말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전쟁은 바로 이러한 본성에 거슬리고 반대가 되는 성격을 요구하는 전쟁입니다. 제발 저주받는 자 되게 하라는 겁니다.

제발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천국이, 억울한 분의 죽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억울함은 인간들의 착함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그 성향으로 야기된 억울함입니다. 소위 자기 잘남으로 인해서 참된 천국이 무시당하고 모독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억울한 죽음이 반복해서 적용하게 되면, 이 세상 그 어느 인간도 남을 불쌍히 여기거나 은혜를 줄 수 있는 입장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즉 자신의 저주를 자진해서 수용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해 이는 오직 예수님 이외는 없다는 말입니다. 착함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참된 동정은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이 근본 죄인임을 자백하는 바탕에서 나온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동정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즉 자신의 착함을 포기하는 행위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동정(同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7-05 19:54 
38강-신 7장 1-4절(불쌍히 여기지 말라)1507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7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272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방금 읽었던 본문만 제대로 알아도 구약 성경을 제대로 해석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 본문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 4절에 나오죠.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 라는 것을 목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망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거예요. 망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진멸 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진멸되고 망하기 직전까지라도 “설마? 하나님이 우리를 내칠까?” 라고 그렇게 상상도 못했어요. 다른 민족하고 차이를 생각해보세요. 다른 민족은 하나님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하나님 찾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예수 찾지도 않고 부처 찾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 찾았습니다. 따라서 예수 찾는 우리를 내치시고 멸망시킨다는 것은, 예수 찾는 그 순간, 순간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상상 못하죠. 따라서 그때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어요.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창생입니다. 똑같아요.

“설마? 주께서 나를 벌할 일이 없을 거야.” 같은 편이니까. 주께서는 “같은 편? 좋아하네.” 주님은 인간하고 같은 패 먹지 않습니다. 같은 편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편먹을 분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고 기뻐하는 자도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예수님만 사랑하는 아들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골라내고 분류시키는 작업이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너 아니고,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야.” 이걸 가지고 영어로 remnant 남은 자, 라고 해요. 계속 남기고, 남기고, 남기고, 남기는 겁니다.

어릴 때 그런 게임 많이 하잖아요? 강가나 바닷가에서 모래 쌓아놓고 가운데 막대기 꽂아놓고 가위바위보 해서 막대기가 무너지지 않도록 모래 파내기 하는 게임. 어릴 때 그거 하면서 무슨 내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돈이 있어야 내기를 하지. 하여튼 나무젓가락 막대기 꽂아놓고 모래 해놓고 그 아슬아슬한, 넘어질까 하는 그 아슬아슬함. 주님께서는 그런 게임을 하면서 아예 처음부터 넘어지도록 하신 겁니다. 누가 해도 실패하도록,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누가 해도 실패하도록.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죽지 않는다고요. 인간이 죽지 않는 이유는,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만이 죽어야 돼요. 다른 사람은 안 죽어요. 누구 죽었다고요? 부활 때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줄 알았지롱? 아니거든.” 다시 살려냅니다. 문제는, 다시 살려낼 때는 그 분류되는 원리원칙이 우리들의 행함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의 속성을 거기다가 덮쳐버리죠. 임의대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과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을 일방적으로 분류시켰습니다.

그럴 때, 행위 책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님, 이거 너무 불공평합니다.” 라고 하게 되면, 주께서 뭐라고 하셨겠습니까? “너희들 시작이 곧 끝이니라.” 처음부터 너를 만들 때 이미 끝이라는 정보를 심어서 인간을 이 땅에 출생시킨 겁니다. 인간은 처음만 알았지 끝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끝, 마감에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나님의 속성 따라 인간은 두 종류가 된다는 것이 끝입니다. 이미 끝은 확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확정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는 인간들은 맨날 이런 소리해요.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마지막 대사가 그 대목이에요. 전에 터미네이터는 “I'll Back, 다시 돌아온다.” 이번 대사는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보세요. 조조 6000원 합니다.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까지 낙담할 필요가 없다. 우리끼리 힘을 규합하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세계는 펼칠 수 있다.” 라는 것이 바로, 그런 발언, 그런 멘트가 나오도록 주께서는 몰아세운 거예요. 인간을. 모든 인간을. 이거 뭐 교회, 종교 필요 없어요. 결국 마지막은 “주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옵소서.”

주님께서는 희망주기 위해서 교회 오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비전vision 주기 위해서 교회 오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 세상 끝이 이미 너 안에 정보로써 이미 입력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주님의 끝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 사람이에요. 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딴 게 아닙니다. 끝장을 보여주는 거예요. 끝장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모든 것이 끝이 되었을 때,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와요. “동정하지 말라. 불쌍히 여기지 말라.” 7장 2절에. 제 눈에는 이런 것도 잘 띄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잘 띠질 않는지.....,

“절대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겁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바로 이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왜 불쌍히 여기는가. 같은 동류라고 생각해서, 같은 패라고, 같은 편으로 잡기 위해서 불쌍히 여기거든요. 만약에 내가 동정했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한다면 그래도 불쌍히 여길 거냐?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한 것은 이게 깊은 뜻인데,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아무리 남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 해도 기어이 너희는 남들을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나의 원수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 것이라고 예언을 하시고 그리고 4절에 마지막에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을 진멸하더라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동정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남을 동정하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여기 1절 마지막에 그 대목이 나옵니다.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에 대해서 사람들은 내심 부러워하는 심성을 인간을 숨길 수가 없어요. ‘아휴, 나도 저렇게 교인수가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교회도 자기 건물 가졌으면 좋겠다. 가게 세 얼마 내고 있지 말고. 불안, 불안 언제 가게 세 올릴지 모르고, 다시는 쫒아내지 않도록 아예 내 가게 세웠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그 생각은 뭐냐 하면, 반드시 모델을 염두에 두게 마련이거든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니까 예배당 큰 게 있으면 ‘아! 부럽다.’ ‘부럽다.’ 이래 되는 거예요. 부럽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좋겠네.’ 그런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요 밑에 00교회 여자 목사를 만났어요. 대뜸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우리 교회 사가이소.” “곰팡이 사가이소.”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 곰팡이 얼마에 사겠습니까?” 이렇게 돼야 되는데, 갑자기 “우리 교회 사가세요.” 갑자기 동정할 여지가 사라져요.

우리는 동정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내심 은근히 노렸던 어떤 목표가 조기에 내 안에 달성되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희망 없는 삶이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이 있고 그 부러워한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인내하고 참으면서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언젠가는 좋은 날 오겠지.’ 하는 순간 우리는 뭘 잊어버리느냐 주께서 망하게 위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내심 반발하고 있는 중입니다. “망해라 이 놈아.” 우리는 “언젠가는 좋은 날 오겠지.” 이거 뭐 코드가 맞지를 않아요.

자, 여기서 문제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망할 걸. 뭐 깔짝깔짝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마치, 니가 내 말을 못 지켜서 망하는 것처럼 이렇게 자꾸 유도시키는 거예요. 아, 이 말 재밌죠. 이미 망하도록 이스라엘을 해놓고, 마치 행위 언약에 불순종해서 망한 것처럼 그렇게 몰아세우시는, 요 주님의 얄미움. 주님의 꼼수. 그거는 왜 그러느냐, 모든 사탄에 속한 인간들을 다 넘어트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 그때 우리가 말씀을 못 지켜서 그래.” “그때 언약 지켰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 안 할 걸.” “그러나 힘들더라도 분발하자. 우리 선배들은 못 지켰지만 우리는 열심히 분발해서 말씀 지켜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축복을 따내자. 이게 우리의 희망이야.” 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결국은 메시아를 살해했잖아요.

그 바리새인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는 바로 자기 의를 수집하기 위한 짓거리였고, 그것이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성당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직도 희망을 갖는데, 그 희망은 말이 희망이지 딴 게 아니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며, 자기 능력이 하늘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의 무한을 테스트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교회 다니고 종교를 갖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착해질 수 있는가? 누가 누가 착하나? 하나의 배틀battle, 시합에 나서는 겁니다. 누가 누가 착한지. 그래서 옆에 있는 교인들이나 집사들이 전부 다 경쟁자에요. ‘칫, 지가 착하다고? 나는 니보다 더 착해.’

그러나 착함에 대해서는 일곱 족속만큼 따라갈 수 없어요. 일곱 족속들이 자기 종교에 대해서 자기 자학적일 정도로 자기들 신에서 성심성의껏 순종하고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토종종교이기 때문에, 이거는 제대로 전통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그걸 어릴 때부터 안 섬기면 부모한테 혼나요. 거기에 비해서 여호와 종교는 어떻습니까? 떠돌이 종교에요. 그걸 유목종교, 떠돌이 종교. 떠돌이종교라는 말이 이상한데, 떠돌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떠돌게 만들면서 오늘도 실패다. 늘 이렇게 뭔가 섬겼는데 뜻대로 안 돼요.

아브라함이 세겜에 가서 하나님이여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자식을....., 이렇게 말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기근이 임해가지고 어디로 내려갔느냐 하면 애굽,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갔는데, 이거 떠돌이거든요. 떠돌이가 살 방법이 뭐냐, 자기 아내를 바로 왕에게 성性 상납시키는, 자기 아내를 바쳤죠. 뭐, 이뻤던 모양이죠. 맘에 들었던 모양이죠. 성경에 보면 사라를 탐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죠. 이름이 사라라는 말은 그만큼 이쁘다는 뜻이죠. 이쁘지도 않은데 사라라고 붙이면 화나죠. 사라 이름이 이쁘다는, 이 이쁜 아내를 성 상납시키는데, 그런데 그 순간 자기가 복의 근원이라는 주님의 계시가 무효로 돌아간다는 것.

주님께서 주신 계시를 내가 뭔가 지킬 수 없다는, 여력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못 깨달으면 막 살아야죠. 막 사는 것이 그거라니까요. 자기 아내를 바치는 거요. 그건 그냥 자기 포기에요.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에게서 나가 빠져나온 거예요. 수류탄이다!! 하고 그냥 빠져나온 거예요.

누가 관여했는가. 하나님이 직접 관여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러한 낌새를 미리 아브라함한테 일러줬으면 아브라함의 자존심이 얼마나 살겠어요? “니가 아내를 바쳐보게 되면, 아내와 동침하고 난 뒤에 오후 3시 43분경, 바로 왕이 뒤집어질 것이다. 그때 고소하다 이 놈아. 어딜 감히 건드려? 하고 너의 존재감이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스토리를 짜면 기분 좋을 건데.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건드렸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완전히 디스Diss 시켰어요. “니는 이 사실을 몰랐지? 니는 그냥 자기 마누라나 팔아먹는 그런 인간밖에 안 돼. 더러운 인간!! 그것도 남편이라고 아내를 지켜줘야지. 이게 뭐야? 지 살겠다고 아내 팔아먹는 이 못된 인간!!” 도리어 인간을 꼴아 박게 만들어요. 오늘 본문에서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이유가 초점이 돼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사랑한다는 하나님이 왜 나를 미워하시는 식으로 자꾸 다가오시는가?

그것은 바로 신명기 7장의 땅은 이스라엘이 살 땅이 아니고 유월절의 어린양의 살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찍 죽음을 당하신 분의 소유지 너희들 소유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살 곳이 없어서, 이 곳에 보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 동정한다는 그 말이 하나님이 쓰시는 말과 그것을 받는 이스라엘의 말에, 이 단어에 엄청난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갈라졌어요. 그 갈라짐을 메꾸는 일차적인 방법이 뭐냐, 불쌍히 여기지 말라입니다. “불쌍하지?” “예. 불쌍합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 니는 그 민족을 불쌍히 여길 그런 잽도, 그런 권한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좀 어렵죠.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 이게 좀 어떤 사람에게는 쉬울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더 복잡해질 겁니다. 어떤 신학생이 저한테 전화를 한 열통화도 넘게 했어요. 계속 묻는 것이 딱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는데,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 죄의 용서가 됩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그 말이 성경에 있는 것은 알겠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게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왜 약속이 그래야 됩니까? 내가 안 믿어지는 약속을 왜 하셨습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납득이 되는 약속을 해야지 내가 의아한 약속을 하나님 니가 뭔데 왜 주십니까? 그런 뜻이라 말이죠.

 그 분은 지금 주님이 손대서 신났어. 진짜 알아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강제로 잃어버린 것 같아. 그 자아라는, 자기 의. 지금 신학생이에요. 그런데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에요. 전부다가. 그러니 얼마나 착해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사들은 지도 안 믿으면서 사기 치려고 강단에 서거든요. 근데 이 사람은 얼마나 솔직합니까? 믿지도 않으니까 그걸 알기 전까지는 이 강단에 못서겠다는 것이죠. 뭐, 아주 대단한 고집입니다. 믿어질 때까지 못서겠다는 거예요. 이 강단에 서게 되면 사기꾼이 되니까. 참 주님께서 일을 저렇게 하시는 것이 정상인 듯싶어요.

여호수아 11장 20절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이해하기가 참 곤란했을 거예요.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이겁니다. 꼭 저주를 박아야 되고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너희를 앞장 세워서 그들을 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도사 말씀에 의하면 이 말은 뭡니까? “목사님. 이래야 됩니까?” 라고 또 이렇게 물을 거예요. “왜 이래야 됩니까?”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에요. 우리는 나만 은혜 받지 말고 남들도 은혜 받는 것이 우리의 착한 심성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로 은혜입지 못하게 하고 저주받는 자들이 되게 하라고 하면 내가 지금껏 고이고이 간직했던 나의 착함이 완전히 개망신되는데, 내가 그걸 못 참겠다는 거예요. 나는 나쁜 남자 되고 나쁜 여자 되는데, 왜 졸지에 예수 믿고 더 착한 남자 안 되고 나쁜 남자가 되어야 합니까? 도대체 나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거 못 견뎌서 우리교회 나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죠. 도저히, 이 나쁜 남자, 이게 싫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냐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그 착함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마지막 악마의 무기가 그거에요. 착함을 발굴해서 십자가를 가려버려라. 이거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어요. 이 약속의 땅은 유월절 어린양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 간다고 하니까 마치 내 소유인양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집 사가지고 이사 간다고 하니까 자식들이 왜 좋아합니까? 지 집도 아닌데. 자기 명의로 되어 있어요? 아빠, 엄마 명의로 되어 있어요. 공동명의인데 지가 왜 좋아합니까? 설마 우리를 버릴 리가 있겠는가? 바로 고 설마? 버릴 리가 있겠는가? 라는 그것을 위해서 오늘 본문 신명기 7장 4절이 있습니다. “니가 방금 ‘설마?’ 라고 했어?” “네. ‘설마?’라고 했습니다.” “버릴게.” 버려야 ‘아하, 그 나라가 내 천국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천국이 내 천국 아닙니다.

그런데 천국만 이야기하면 마치 이야기 들은 그걸로 천국 된다고 오해들을 하시는데,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정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 11장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허수아비에요. 여호수아를 장악하는 것은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에 의하면 놀랍게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언약 받았는데, 언약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 들어가라 나는 못 들어가는 신세다.” 그게 주의 언약 발생 과정과 절차입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알아요. 너희들은 죽음을 몰라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다 기왕에 지옥 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살아오셔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 이 사람은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들이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건 지난 수요일에 제가 했지요. 다윗은, 다윗의 놀라운 말은 내가 니한테, 사람한테 죄지은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 죄지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 앞에는 사람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눈 앞에 뵈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나 열 두 사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사람 같은 게 무슨, 칼로 죽인다, 안 보여요. 돌로 쳐 죽인다, 안 보여요. 스데반집사님 같은 경우는 돌 던지는 사람들 신경도 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니나 내나 똑같이 멸망당해야 마땅한데, 니가 잘났고 내가 못났고, 네가 잘났고 니가 못났고, 이거는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이미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 분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그 의식이 우리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까 기도한 것처럼 ‘아하! 이미 잃어버렸구나.’

그럼 우리가 앞으로 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어째서 내가 잃어버려야 마땅한지를, 그 이유를, 이제는 살아가면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왜? 이미 얻었기 때문에. 이미 얻은 자만이, 이미 잃어버려도 괜찮아요.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잃어버려도. 온유한 자? 그런 것 생각하지 마세요. 칭찬받는 사람? 그거 상관없어요. 그거는 우리한테 소용없어요. 유월절 양의 땅이기 때문에, 유월절 양의 특징이 뭐냐, 유월절의 죽음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유월절 죽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죽음에 대해서 애굽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어떤 누구도 아이디어를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아까 전도사 말대로 “왜요? 왜?” “아버지. 갑자기 우리 집에 냄새나는 양의 피를 왜 바릅니까?” “이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야.” “아니, 약속인줄 아는데 왜 그 약속이어야 하고, 다른 약속은 안 되고 왜 그 약속이어야 합니까? 사자가 왔을 때 돈 보따리를 내놔라든지 하는 그 약속은 안 되고 왜 양의 피를, 죽음이라는 것이 왜 약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살아있는 우리의 착함과 성의와 정성과 열심, 새벽기도 나오는 것, 성경 보는 것, 이런 열심들이 약속에 들어가면 안 되고, 그거는 빠져야 되고 죽음이, 누구나 기피하는 죽음이 약속이어야 됩니까?” “그거는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니한테 알려주실 거야. 우리는 다만 시키는 대로 해야 돼.” “그러면 그 약속은 언제 옵니까?” “니가 바로 니 때를 거쳐서..” 그 약속이 불현 듯 오는 것이 아니고, 그 가는 절차 중에, 그 도중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죠. 우리 세대가.

그래서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올 겁니다. 그러면 다윗 시대 사람들은 그러한 연결된 선상에 존재하죠. 그러면 새로운 소망이 나오죠. 그건 뭐냐,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소망. 이미 같은 선상이기 때문에 주께서 시작한 일이 주께서 끝이 될 것이고, 그 끝의 요소가 이미 우리한테 장착되어 있는데, 그 장착된 내용이 뭐냐,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세상을. 그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이,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동정하라는데요? 오늘 본문에는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데요? 이거 내용이 뭘까요? 이거 서울 의존교회에서 했어요.

“니 마음으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마음으로 동정하게 될 것이다.” 근데 니 마음 접고 주의 마음 나오려면, 니는 절대로 남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그 원칙을 지켜줘라. 만약에 내가 동정하는 사람이 되게 되면 이것은 바로 자기 의가 새롭게 또 하나 생기는 것이 되니까.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동정할 수 없게 만들어요.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만. 왜 우리는 남을 동정할 수밖에 없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그쪽이 갖고 있기 때문에 동정하는 거예요.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꼭 잘난 사람에게 친근감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가게 손님이 와도 이쁜 사람한테는 말 하나라도 더 하죠. 못난 사람한테는 안 사려면 빨리 가라하고. 이쁜 것들은 어디가도 환영받고. 모양새가 잘 살아 보이고. 원래 잘 사는 사람은 여유부리잖아요. 가진 자의 여유 아닙니까? 없는 사람들은 악바리로 살지만. 있는 사람들은 여유 있게 부드럽게 산다고요. 그러니까 좋은 분위기에 호감이 있죠. 동정하게 되고, 동정한다는 말은 부럽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동정이 순수한 동정이 되지 못하고 은근히 노림수를 노리는 동정이 된다 이 말이죠. “니 학교 가거든 공부 못하는 애들하고 놀지 마라.”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 애 공부 잘하나? 그럼 동정해 줘라. 왜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나오잖아.” 이래 된다 말이죠. 모든 성경을.

결국은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동정하지마라 하면 동정하고, 때로는 동정해라 하면 동정 안하고. 이런 식으로. ‘아, 우리는 진작 잃어버린 자 맞구나.’ 그걸 깨달으면서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잃어버린 자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주 놓쳐버립니다. 마땅히 잘나야 되고 마땅히 천국가야 할 존재인줄 착각했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