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신 6장 20-25절(후일의 계명)1506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 20-25절입니다. 구약성경 272페이지입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자기 아들이 아버지보고 “이 성경 말씀이 무슨 내용입니까?” 라고 물어보게 되면, 평소에 말씀에 관심이 있는 부모 같으면 참 기특하고, 대견스럽고, 고맙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이 될 것입니다 만은, 평소에 말씀이 관심 없는 부모한테 그걸 물으면 꼭 들킨 느낌이 들어요. 딴 데 신경 쓰고 자기가 별로 관심두지도 않는 일에, 멀리한 것을 물으면 “얘가 혹시 나보다 더 믿음 좋은 게 아닌가?” 라는 어떤 열등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겁나죠. 자칫 또 교회에 미쳐서 신학교에 간다고 하면 뒷바라지를 해줘야 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그런 걱정도 되는 거죠.
말씀이라는 것이 마치 건드리면 안 되는 것처럼, 폭탄, 지뢰밭처럼, 이것 건드리면, 갑자기 돈이 확 빠져 나간다든지 해서, 신세가 망치는 것처럼 겁이 난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다는 뜻이죠.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비켜서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잘 살아왔다. 아들아! 근데 그걸 건드리나? 좋은 길 놔두고 그렇게 험한 길 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 차마 이 말은 못하고 목사님한테 물어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너는 이렇게 이야기하라. 근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과거에 그러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걸 들을 때에 아, 과거에 그러했기 때문에,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의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그러면 그걸 듣는 자식은 뭐냐, 과거이야기, 과거 이야기, 계속 과거이야기로, 이제는 흘러 가버린 지난 추억 같은 거다 이 말이거든요. 그것은 뭐냐,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아, 아버지. 말씀은 현실하고 상관이 없네요.” 그렇게 될 공산이 굉장히 큰 겁니다.
그러면 과거이야기, 과거 우리 민족 잘 나갔던 이야기, 꼭 현실에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과거 자랑하잖아요. 과거에 잘 나갔던 것. 근데, 만약에 아들이 거기서 부모를 좀 편하게 하기 위해서 “예. 알겠습니다. 과거에 좀 잘나갔다 이 말이군요.” 하고 공부하러 가면 되는데, 또 캐물어요. “그렇다면 과거의 하나님하고 지금의 하나님하고 뭐 좀 다릅니까?” 이래 물으면 부모는 마음에 확 부담이 되죠. 그 다음에 나올 말은 뻔하거든요. “아버지는 왜 과거만 기억하고 지금은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삽니까?” 하는 그런 추론이 곧 들어올 것 같아요.
과거에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했다면 똑같은 원리와 똑같은 원칙으로 지금에 적용되려면 “아버지 지금은 애굽이 없지 않습니까?” 뭐 애굽이라는 연극무대 장치가 있고 거기서 바로 왕이 있어야 되고 거기서 놀라운 기적이 발생돼서 탈출했다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어야 될 텐데. 과거의 바로의 애굽이라는 나라가 지금은 현재에는 없다면 우리는 그때 그 기쁨, 구원받은 감격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다시 체험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가서 공부나 해라. 쓸데없이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데. 더 묻는 게 아니야. 그건 니가 살아가면 알게 될 거야. 오늘 이정도 끝. 쉿 입 다물어!”
자식이 그 말을 묻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는 나보다 인생을 살아갔기 때문에 지금 어린 내가 묻는 질문을 아버지도 분명히 했을 텐데. 그때 아버지는 어떤 해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근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물어 본 적도 없어. 어디까지나 지난 일이, 지난 일이 되고 말았어요. 결국은 말씀이라는 것이 책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말씀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족 간에, 식구 간에,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이 주고받고, 말씀이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상관없이 말씀이 알아서 스스로 말씀대로 이 세상을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법이라, 계명이라, 말씀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누가 만들었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법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법이 우선이에요. 인간은 뭐냐, 말씀이 제공하는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들, 그 사고방식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신 것이 돼요.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또 다른 말로 하면 니가 이렇게 죄인이 분명한데, 니가 어떻게 이렇게 자고 나니까 의인되었느냐? 그 절차에 어느 천사가 가져갔느냐? 누가 왔다 갔느냐? 누가 도대체 손댔느냐? 유명한 치킨 CF에 그런 내용이 있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말이 나오느냐 말이죠. 그 닭다리가 우리 자신이라면 “주님이여,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길래 제가 이렇게 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되었습니까?” “그게 바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과 똑같은 원리를 너한테 적용시킨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체험을 하고 있다고 누가 물을 때, 자녀가 물을 때, “우리는 다 죄인이야. 하지만 우리는 다 천국 가. 왜? 주님이 지금도 무슨 짓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똑같은 원리와 원칙으로.” 그것 때문에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성경책에 있으니 목사한테 물어보라가 아니라, 자식이 묻는 것은 진짜 궁금증이 있어서 묻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식으로 아버지한테 묻게 하는 것은 자식을 통해서 아버지를 각성시키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부모만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그렇게 교육시키도록 만남의 장을 늘 그렇게 형성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그 말씀의 원칙에 있어서, 방금 제가 원칙을 언급했어요. ‘죄인을 의인되게 한다.’ 그리고 전에 십계명에서도 언급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제가 또 할 수 있는 것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 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제 담당이죠. 십계명 주고 난 뒤에 제사법 줬다, 따라서 십계명으로 끝이 아니고 제사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중보자 없는 하나님은 없다고 이야기했죠. 중보자 없는. 나하고 계명하고 하나님을 바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말씀대로 중보자가 드러나야죠. 그래서 “자식아! 하나님 믿으면 안 되고 중보자를 믿어야 돼.”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도 니같은 의문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을 받고 보니까 ‘아! 나 아니고 예수님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보자가 왜 왔는데? 왜 왔는데? 바로 이 죄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관리하고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 해결해주시려고 중보자가 들이닥친 거예요. 그러면 중보자께서 개입이 되게 되면, 이게 신약이거든요. 구약에는 그걸 제사 제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전에 시간관계상 제가 못한 것이 있어요. 욥 이야기하면서, 욥에게 평소에 관심두지 않았던 다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개입했다고 했습니다. 근데 처음에 욥의 문제에 있어서, 욥은 내 문제, 자기 개인의 문제만 해결되면 그만 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하나님의 원리가 뭐냐 하면, 욥기 42장 7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 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욥의 문제가 사적으로 행복했던 그 시절로 회복되는 것이 욥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욥을 제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밟아버리죠.
그것을 저는 오전에 ‘제물의 여성화’라고 언급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제물의 여성화에요. 여자의 후손하고 관련된 제물이어야 제물이지, 남성은 큰소리만 쳤다가 결코 내놓을 것도 없이 가죠. 희생이 된다는 것, 성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물이 된다는 사실. 물론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탐을 내고, 천국 가는 것을 탐을 내는데, 그 탐을 내는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겁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또는 서양 역사를 통해서 성경책에 부활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 기독교에 영향에 속했던 많은 백성들, 민중들은, “신부님. 어떻게 하면 부활됩니까?” 이제 부활에 욕심을 내고 부활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뭐 난리도 아니에요. 싯타르타, 부처가 이야기했잖아요. 생로병사라고. 생로병사로 끝내면 인생이 너무 헛바퀴 도는 거거든요. 얼마나 안타까워요. 산등성이에다 돌을 밀어 넣었다 했는데 쪼르르 내려가고. 또 하고 또 하고....,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인생이 백날 살아도 헛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정말 이것은 자살하고 싶을 겁니다.
근데 해결책이 뭐냐,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하지만, 이게 성경에서는 부활이 된다는 거예요. 부활. 뭐 불교야 그냥 무슨 소리를 못합니까? 인간이 지어내는데. 아무것이 없어도 큰 소리 치면 되지만. 그런데 복음은 뭐냐 증거가 있잖아요. 실제로 부활이 있다는 것으로 증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이 계시잖아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부활의 첫(first) 열매라고 하거든요. 그 첫 열매라 하는 것은 second, third, 두 번째, 세 번째, 열매가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세일sale 기간,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니까. 이 기간을 어떻게 놓칩니까? 이 기회를? 그러니까 기독교 영향 하에 있던 그 유럽 사람들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가 다니고 온갖 설움 다 참아내면서 기어이 부활은 해야 되겠다고. “아이고, 생로병사 사는 것도 지겨워, 죽어서까지 지옥가면 이런 낭패가 어디 있겠느냐. 이 땅에서도 고생한 것이 서러운데. 그래도 하나는 건져야지. 부활은 돼야지.” 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되려면 이게 문제가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몸의 부활이냐, 영혼의 부활이야, 아니면 몸과 영혼의 연합체 부활이냐, 하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벌어지는 겁니다. 몸의 부활이라면 영혼은 개판처럼 그냥 막 살아도 상관없이 돼버려요. 몸이 부활한다면. 영혼은 내 정신으로 어떤 나쁜 생각해도 관계없이 돼버려요. 그렇잖아요? 죽은 무덤이 열리면서 내 몸이 산다니까. 무덤 열리면 내 몸이 살잖아요. 그러면 몸이 사니까 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죠. 몸 하나만.
그렇다면 우리 정신문제, 영혼문제, 윤리도덕문제, 뭐 개떡같이 해도 상관없죠. 몸은 어차피 부활될 건데. 이래서 비윤리적이라고 문제고. 그 다음에 영혼만 산다 하니까 몸이 귀찮아. 빨리 죽고 싶어. 차라리 교회 다니지 말고 어디 저 사막 같은데 가서 기둥위에 올라가 굶어죽어 빨리 천당 가고 싶어요. 그리고 사자야 물어라 해서 동물한테 물려죽기를 기다리고. 그 방법이 너무 자학적이라면 촛불 들고 시청 앞에 가면 되고.
시청 앞에서 데모하다가 일부러 날아오는 최루탄에 맞아서 지는 맞고, 지 자손들은 보상금 타내가지고, 자손들한테는 훌륭한 유산 남길 수 있어서 좋고, 지는 일찍 순교해서 좋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억눌린 자를 위해서 순교해서 지는 영광 받고. 그 방법을 쓰면 되겠네요? 안 그러면 문둥병자한테 일부러 기어들어가서 문둥병으로 죽든지. 천주교의 성자 데미안처럼. 안 그러면 톰 소여 울지마 해가지고 이 더운데 가서 기타치고 찬송 부르고 하다 거기서 대장암에 걸려 죽든지. 방법은 알아서 하세요. 이거 뷔페니까. 골라먹는 재미가 있으니까. 31가지 골라먹는 재미로 입맛대로 골라먹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영혼은 부활되는데 이 몸이 귀찮아.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몸의 부활이네. 영혼의 부활이 아니고. 이게 해결책이 없네. 그래서 여기서 온갖 아이디어가 신학 역사 속에서 다 튀어나옵니다. 온갖 아이디어가 나와요. 부활될 때, 쌍꺼풀 수술했는데 쌍꺼풀 그대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문제.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폭탄 터져서 공중분해 됐는데 그래도 나중에 부활될 때는 내 몸 내가 알아서 다 챙겨가지고 하나로 독수리 오형제 모이듯이 모여서 그렇게 부활됩니까? 그거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부활되느냐? 하는 건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일성 문제’라고 합니다. 동일성 문제.
동일성, 자아의 불멸성, 불사성이라고 해요. 동일성 문제, 이 동일성 문제가 이게 해결이 안 되네요. 왜냐하면 분명히 연세 많으면 사진 못 찍잖아요. 자기가 보고 자기가 놀랩니다. 내가 이렇게 늙었나 싶어서. 그런데, 인간은 분명히 젊을 때하고 달라요. 다르지만, 아무리 못생긴 귀신같은 사진이지만 분명히 이거는 남이 아니고 나라는 것을 알잖아요. 어떻게 그러냐 이 말이죠. 성형을 해서 전부 다 남의 얼굴로 바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이 그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장담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을 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신학자들이 뭔가 해답을 제시해야 되는데...., 왜 동일성 문제냐, 동일성만 부활이 되니까. 동일성, 한패가 되어야 하니까. 부활되거든요. 몸이 부활된다 이 말이죠. 근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사도 바울의 이 부활 대목에서 우리한테 요청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도 부활된다는 소식으로 부활 소식이 다가와야 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 있기 때문에 나는 오직 오늘도 감사하며 살아가지.” “부활과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라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고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지금.
“돈 있는데 뭐가 불쌍해?” 이러면 그거는 더욱더 불쌍한 자라는 거예요. 불쌍한 자들 나가서 한 번 구경해 볼까요? 십자가도 모르고 부활도 모르고.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평소에 부활, 십자가 생각 안 하면 그거는 불쌍한 사람들하고 똑같은 인간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에 신경 쓰고 나의 동일성에 신경 쓰잖아요?” 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오해이십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데 그거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고, 성경은 나의 동일성이 아니고 언약의 일관성이에요. 말씀의 동일성입니다. 말씀 속에 계신 예수님이 그때 예수님이나 지금 예수님이나 동일한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믿는 사람, 은혜를 정말 아는 사람 같으면요. 제발 조심스럽게 인생 살지 마세요.
인생을 조심스럽게 산다는 말은, 이거는 내가 내 인생 관리하지 않으면 동일성이 유지 안 된다, 부활 안 된다고 그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뭔가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믿음이 아니에요. 아예 애를 써요. 용을 쓰고. 아슬아슬해요.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해서 못 보겠어요. 뭐, 조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도 조심하고 저것도 조심하고. 삐꺽 잘못하면 벌 받고. 삐꺽 잘못하면 사업 망하고. 자식 안 되고, 남편 안 되고, 자기 안 되고. 다리 부러지고. 과속 위반 딱지 끊고. 뭐 불안 불안해.
조심하지 마세요. 우리 인생은 조심한다고 해결될 인생이 아닙니다. 나의 조심스러움, 그래서 나의 건전함이 지속되는, 나의 동일성의 지속이 구원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내 자신에게 애착을 가지고 내 자신에게 집착을 한다는 것은, 그거는 곧 박살날 자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런 자아를 박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주시는, 말씀의 완성에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말고, 내가 따로 장만한 의는 박살나야 될 의며, 그렇게 박살 나셨으면, 여러분은 행운아입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그게 박살 안 났다면, “주여, 저 언제 나의 잘남을 박살내시겠습니까? 또 무슨 사태가 나서 나의 잘남을 박살내시겠습니까?” 망했다! 또 망했다! 그러나 망했다고 생각하는데 망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아직도 글 쓸 여유는 있다는 말이거든요. 우리가 남 망한 것에 대해 같이 웃지를 못하는 이유가 나도 언제 망할지 모르는, 위태하기 때문에 그러는데 그것도 조심하는 거예요. 남이 망했을 때는 마음대로 축하해주시고 그 벌 받아서 나도 망하더라도 각오 하세요. 왜냐하면 망해도 주의 동일성은 살아있기 때문에. 말씀의 동일성은 살아있기 때문에.
죄가 무엇이냐, 의가 무엇이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바로 애굽 되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바로, 바로 왕이에요. 제가 부엌에서 뭘 만지다가, 평소에 부엌에 잘 안 가는데, 설거지하는 시간 외에는 잘 안가거든요. 뭐 어쩌다 보니까 이쑤시개 통을 건드려서 온 사방에 다 흩트려놨어요. 저는 생각했어요. ‘이것도 분명히 주께서 복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태를 벌이셨구나.’ 그런데 이거하고 복음하고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쑤시개 통에 하나하나 주워서 다 넣었어요. 찔리기도 하면서. 억지로 쑤셔 넣다 보니까 어긋맞게 되어서 엉망이 된 거예요. 그런데 통 밑바닥을 탁탁 치니까 알아서 지들이 질서 잡혀서 원상회복이 딱 되어가지고 집사람은 이쑤시개 통이 떨어진 줄 몰라요. 완전히 정상적으로 되었으니까.
주님의 방법이 이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탕탕탕! 전부 다 나는 못난이. 탕탕탕!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탕탕탕!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탕탕탕! 바로 성도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온다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홍해 한 가운데서 성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홍해를 잊지 말라! 에이, 건너왔는데? 아니에요. 추억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에요. 우리는 기억을 해버리면 기억을 담을 나의 동일성을 유지할 거예요. 반대로 하세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영혼을 주님의 기억, 지금도 반복되는 기억에다가 아낌없이 헌납하세요. 재료로 제공해 드리세요. “주여! 이런 추억도 주님의 의에 쓸데 있겠습니까?” “다 쓸데 있어.” 하고 주께서는 받아주십니다.
아니, 반대로 날마다 주께서 쓸모없는 재료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오늘도 죄 짓게 하십니다. 죄를 지어야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아요. 날마다 탕탕탕! 거리시면서 “낫씽nothing, 니는 아무것도 아니야. 니가 뭐 전도를 하고? 아무것도 아니야. 똑같아. 전에나 지금이나 똑같아. 너는 너의 잘남이 너의 살아가는 동기유발이었어. 그런 속성은 오늘도 나올 거야.” “이만큼 했으니까 요번주는 복 받겠지요?” 라는 생각이 또 다시 기어 나올 거예요.
그럴 때 아들이 묻지요. “아버지, 말씀이 뭡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세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졌느니라.” 아들이 있다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무슨 말입니까?” “후일에 너에게 말씀이 너를 찾아오거든, ‘아! 나나 아버지나 똑같은 구원받는 체험을 했구나!’ 라고 이야기해라. 바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노사연으로 끝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바로 왕과 애굽,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 현실 한 가운데에 놓여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애굽에서 벗어났다고 우겼는데, 사실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속에서 애굽이 튀어나오고, 우리가 바로 애굽이며, 그런 우리를 위해서 구원받은 분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이끌어내어서 죄인이 의인되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