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사랑과 윤리(1) ] (TAPE 1,2) (여기서부터는 TAPE 1) 이번 여름 수련회는 로마서가 중심테마가 되겠는데, 먼저 오늘은 '이웃사랑과 윤리'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여기서 일단 누가복음 10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먼저, 네 자신을 아는가? 여기서 제시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웃사랑에 대해서 물어오는데,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통해서 먼저 "네 자신을 아는가?" 라고 따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은 이러이러한 자다" 라고 하심으로서, 그 이웃을 가지고 먼저 이웃을 묻는 자의 헛점과 그 죄를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즉 "니가 먼저 죄인임을 알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개념이 나오면, 우리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되는 줄로 알지만, 하지만 성경말씀이 도리어 우리 자신을 치고 문제를 삼고있다는 것이다. 즉 "과연 나는 이웃사랑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것을 말할 자격이 되는가?" 라고 말이다. 그것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즉, 죄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 것을 모아서 포장을 해도, 그것이 결코 이웃사랑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사랑은 인간에서 나올 수 없어 !! 성경은 이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물로 나타나야만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비단 그것이 이웃사랑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든, 부부간의 사랑이든, 선후배간의 사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 사랑은, 은사이기에 !! 그러면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원래 참 사랑의 실천자는 하늘에 계신데, 즉 하늘에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속성이 우리에게 닿게 되면, 그래서 그것이 그분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인데, 이런 사랑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인 30절에 보면 분명히 은사에 넣고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받아야만 된다" 라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은사는, 그 강조점이 '하나' !! 그렇게 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 주체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복잡한데,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라고 하는데, 그러한 분이 따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데 에베소서에는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하나' 라는 것이다. 5절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라고 하는데, 즉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교사와 목사 등, 서로가 하는 일이 다양한데, 그것이 모두가 '하나' 라는 것이다. 우리가 각각의 다양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것은 바로 한 분에게서 공급을 받았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은사를 받아서 발휘하면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은사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사랑이라는 은사에 대해 적용시켜서 이야기하자면, "사랑은 반드시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예를 들어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사는 부부가 있다고 하자.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겠는가? 그들의 대화를 잠시 엿들어보자. * 아내 : 당신은 왜 저를 이렇게 사랑합니까? 그러니 남편 사랑이 따로 있고 아내 사랑이 따로 있는데, 어디로 뭉쳐졌는가? 예수님에게, 즉 하나로 모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항상 하나를 지향하는데, 물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약을 올리는 소리일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부부사랑을 통해서 자기들 감정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결혼하지 말라' !!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매우 파격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이왕에 사랑의 원천이 하나라고 하면 구태여 결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내를 통하든지, 남편을 통하든지, 결국은 하나로 모인다고 하면 말이다. 예수님을 남편으로 여기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고전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그런데 억지로 결혼을 하면 이 하나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결혼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할까?" 라고 하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나누어져서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까?" 라는 것으로 바뀌니 말이다. 물론 요즘은 이런 여자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사도바울에 의하면, 사랑이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주고받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단계로 만드시는데, 처음에는 흙을 가지고서 사람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어서 산 사람, 즉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두 단계인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질문조차 하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그냥 흙도 필요가 없이 사람으로 만들면 되는데, 그리고는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1단계와 2단계로 만든 것은, 그것은 곧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어떻게 죽을 가능성이 있는고 하니, 이렇게 산 사람을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사이에 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만 흙으로 돌아가고, 그런데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영생이 보장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산 사람' 이란 것은, '죽을 사람' 이란 것도 동시에 포함되는데, 즉 죽을 가능성이 있는 산 사람이라는 말이다. 지금 어려워서 죄송한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죽을 가능성이 내포된 산 사람 !! 하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런 식으로 살아있기는 싫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번 살았으면 마음껏 에덴동산에서 뛰어 놀아야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너는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지마" 라고, 그렇게 제한을 가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자유이냐는 것이다.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자유인데, 즉 자기는 이렇게 행동했는데, 그런데 저쪽에서 그만 "그것은 안 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저쪽의 자유이지, 자기의 자유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요? 말이 너무 어려운가요? ◈ 인간 개념이 서로 달라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은, "너는 죽을 수도 있어" 라는 것이고, 그러나 우리 인간 쪽에서는 "이왕 살려주셨으니, 앞으로는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서로가 생각하는 인간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 개념이 말이다. 제 아무리 성경을 보고 신학을 공부해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창조했으니 도와주소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주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면에 "하나님, 어떻게 하면 살고, 또 어떻게 하면 죽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삶과 죽음을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산 인간,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 "하나님, 제가 왜 아픕니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다 나을 텐데"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플 수도 있고, 안 아플 수도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있는 게 곧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고 은혜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개념 자체부터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말이다. ◈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면서, 인간은 그렇게 서로가 부딪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루소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했는데, 인간은 사회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것인데, 서로 다 같은 의미라는 말이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산다는 것을 정의하기를, '더불어 사는 것', 바로 그것이란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창세기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것, 바로 그것을 두고서 '산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두고 말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그것을 산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성경하고 공동체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지 말이다. 오직 말씀 앞에서 살아야만 제대로 산다는 것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말이다. 캔디 노래도 모르느냐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지,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공동체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성령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람이 그리우니까, 한이 맺혔으니, 그런 자기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교회' 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복음 2장을 한번 살펴보자. (눅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 외로움이 아닌, 사명감이 없어서 !! 여러분도 아는 말씀인데, 여기에 '안나' 라는 여선지자가 등장하는데, 과부가 된지 84년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항상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면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요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목사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외로움이 아니라 사명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외로운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사명감이 없어서 심심하니까 온갖 사고를 다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운동'을 한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나 루소를 언급한 것은, 그런 철학자들이 인간의 모든 속성을 잘 대변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더불어 한번 잘살아보려고 한 것이 창세기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바벨탑이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왜 만들었는가? 건설한 취지가 다시는 흩어지지 말자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산가족은 싫다는 것이다.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서울의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만들면서 무려 200억이나 들여서 조형물을 만들려고 했는데,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취소되었지만, 그것이 원통형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국가를 상징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원통형이 보여주는 것이, 더불어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인간의 행복이고 전부라는 말이다. ◈ 현대 목회란, 교인들을 달래주는 것 !! 그러면 요즘 교인들이 어떠한가? 말씀은 원하지 않지만 목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교인들을 달래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교에서 어렵게 '목회학' 이라고 해서 가르치고 하는데, 목회는 달래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지옥으로 보내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한 평생 동안 익혀왔던 개념들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연 어떤 인간이 말씀에 순종을 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을 몇 년이나 버티겠느냐는 말이다. 산골짜기에서 슬레이트로 된 집에서 기도원을 운영하는 사람은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벽돌로 된 번듯한 건물을 짓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멋있는 콘도를 말이다. 눈에 띠는 것은 탐이 나고, 하지만 그런 탐심을 겁내는(?) 사람은 없는데, 그게 흑심이 될 때까지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을 지킨다고 한다는 것이다. ◈ 탐내지 말라 !!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가? 그 많은 구약의 성경구절 가운데서 "탐내지 말라" 라고 하면서 인간의 탐심을 끄집어내면서, 인간 속에는 이미 죄가 장악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을 예로 들어서 말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마치 이웃을 도와주니까 구제처럼 보이고, 십분의 일을 바치니 십일조로 보이고,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탐심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수건으로 가리면 되는가? 그러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없어지는가? 그러한 마음과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창세기부터 말하고 있는 인간이란 개념이, 지금의 우리의 욕구, 즉 우리 신체가 요구하는 인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말이다. ◈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다 ?? 선악과는 알다시피 저주인데,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요즘 선악과가 없는데 무슨 선악과입니까? 저는 따먹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아담이 어떻게 범죄를 했는가? 선악과를 따먹고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씨앗인가? 바로 아담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아담 안에 있는 인생은, 아담의 그런 선악체계에 모두 포함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선악과를 모릅니다. 따먹지 않았습니다.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에 의해서, 다른 말로 율법에 의해서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고, 모두가 다 정죄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이 날마다 우리를 쑤시고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악이 아닌 생명나무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생명나무를 따먹어야지" 라고, 그렇게 자기가 따먹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 라는 인간은 무엇을 행동하고 선택하기 그 이전에, 그 환경이 하나님의 죽음의 법과 생명의 법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 무엇이 우리를 저주케 했으며, 또한 살리는가? 여러분은 이런 상황이 기분 나쁜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우리를 저주케 했으며 또한 살리는지를, 오직 그것만을 이야기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달래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당신이 믿던 말던 간에, '복이냐? 저주냐?' 라는 환경 가운데 당신은 놓여있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건방지게 마치 자기가 살리는 것처럼 설치지 말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조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검사를 하려고 왔는데, 그 결과가 간이 나쁘다고 나왔으면, 아무리 조카든 삼촌이든 간에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산촌은 간이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고 삼촌이 "조카야, 니가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이 아니냐는 말이다. ◈ 아저씨, 나무에 매달리지 마세요 !! 오늘새벽에 두류공원에서 운동을 하는데, 웬 할아버지가 나무에서 매달리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 나무에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야하는데, 제 아무리 새벽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나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할아버지라고 하면 안 되고, "아저씨, 나무에 매달리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겠는가? 당장에 "내가 여기 매달린다고 해서 이 나무가 부러지는가? 내가 땅을 밟는다고 해서 어디 땅이 꺼지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하고 그 자리를 유유히 뜨면 되고 말이다. 물론 젊은 놈에게(?) 새벽부터 그런 잔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기가 차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자기 의(義)에 사로잡힌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게 곧 저주인데 말이다. 예수님의 얼굴 뒤에 후광이 있는 것처럼, 사람 뒤에는 자기 의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행동이 나쁜 줄 알면서도 자기 의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 이웃사랑이란, 그 이웃의 실체를 밝혀주는 것 !! 그러니 사랑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이런 자기 의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라고, 그것을 들추어 내어주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엑스레이를 찍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웃사랑이란, 그 이웃의 실체를 밝혀주는 것인데, 즉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신 의로 말미암아 지옥에 갑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곧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웃의 본질을 밝혀주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말을 바꾸어서, 조금 전에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나 루소의 입장에서 보면, 루소의 입장에서는 이웃사랑이란 더불어 사는 것인데, 즉 루소가 말하는 이웃사랑은 그 이웃의 약점을 덮어주고 장점을 부각시켜주는 모습이란 것이다.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말이다. "당신은 훌륭합니다. 대단합니다" 라고 말이다. MBC의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칭찬합시다' 라는 프로도 바로 이런 종류의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왜 여기에 박수를 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며느리가 시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시집' 이라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의 이웃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동양의 '효(孝)' 개념이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효를 두고 자기 의(義)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제 여러분도 성경에 대한 틀이 좀 짜여졌지 싶은데, 아닌가요? ◈ 다시 요약하면 !! 지금까지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혼자서는 외로워서 못사니 서로 더불어서 살아가는데, 즉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가 중요한데, 이 공동체는 마치 온실처럼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만 받는, 그런 공간이란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해도 좋은 말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뭐가 필요한고 하니, 법(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빌려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이라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 율법을 도용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두고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즉 "너희들은 지옥 불에 들어가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이스라엘' 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라는 말이다.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 십자가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양쪽 진영을 다 파악함으로서 !! 아직 본격적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잠시 십자가에 다시 정리하자면, 십자가란 양대 진영이 서로 반대해서 생긴 것인데, 한 쪽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고, 다른 쪽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쪽을 보고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했고, 또한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율법을 모르는 자', 또는 '이단' 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를 알려고 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한 이유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율법을 모르는 자라고 한 그들의 심정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쪽 진영의 사고방식을 다 알아야, 비로소 십자가 사건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회를 먹을 때 초장에 찍어먹는데, 그렇게 피를 찍어먹는다고 해서 십자가를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십자가 사건은 양쪽의 서로 상반되고 배치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아담에 속한 자들인데, 그러니 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기독교의 환경이 무엇인가? 예배당에 가면 무엇이 걸려 있는가? 십자가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터져 나와야만 그것이 교회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사건이 터지려고 하면 양쪽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이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구나. 아하, 이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이단이라고 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 중간에 끼어 들어서는 "야, 십자가의 피만 바르면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용해서 자기가 천당에 가기만을 소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듯이 그렇게 십자가 피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 오늘날 교회는 적이 없어 !! 이렇게 되니까, 분명히 예수님 당시에는 적이 있었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만 모였는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은 도대체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비싼 밥을 먹고 헛소리를 했다는 말인가?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왕건' 이라는 드라마에서, 궁예가 "나는 미륵이로다" 라고 하니까, 신하가 뭐라고 하는가? "처음에는 미륵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그러자 궁예가 신하를 보고 "마구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마귀라는 말이다. 인터넷에 보니, 그게 경상도 말로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면, 무엇이 마귀인지, 그것이 대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저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로마서 12장의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는 것만 인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엉터리로 인용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 공동체의 사랑에 대한 고발 !! 지금 우리가 이웃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사랑은 자기 조직의 번영과 발전을 꾀하고, 우리 속에 있는 죄악 된 모든 자질을 동원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런 우리의 것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사랑은 은사이어야만 한다고 했는데, 그 은사는 예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십자가를 지신 분이고, 그 십자가 사건을 예수님으로부터 마귀라는 소리를 들은 자들이 유발시켰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을 베푸시니,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단이라고 했고 말이다. ◈ '이단' 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 !! 그러니 우리가 이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일종의 엑스레이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푸니까, 자기도 예수님을 따라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어떤 사랑이기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율법을 모르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 낙오된 자들, 즉 소경들, 절름발이들,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그러한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참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더불어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는가? 더불어 살아가는 동네에서 누가 낙오가 되었는가? 세리와 창기들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낙오된 자들,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자들에게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가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당시 인간 세상에 대한, 즉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사랑에 대한 고발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악한세대가 된다는 것이다. 즉 더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그런 더러운 세상에서 건져주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인들이 무슨 재주로 애굽의 권세를 이겼는가? 그들은 결코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을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가? 어떤 골짜기로 데리고 가시는데, 해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축축한 물기가 있는 해골도 아니고 바싹 마른 해골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 DNA가 복제가 되겠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과연 이런 하나님의 질문이 성립이 되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니가 나를 믿는가?" 라고 말이다. 같은 질문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한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데,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안 되는 것을 되게 했으면, 이런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사랑을 하려고 하지 말고, 안 되는 사랑을 누가 먼저 우리에게 주셨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주신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말이다. "아, 나는 아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천국에 가게 되는구나" 라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전부이고 확증인데,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내일부터 로마서와 야고보서 강의에 들어가는데 말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사랑만은 않겠어요 ♪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사랑은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가 강의를 하면서, 공개석상에서 윤수일이라는 대중가수에게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사랑만은 않겠어요' 라는 게 있는데, 아니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 사회가, 이 공동체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윤수일은 왜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고 하니,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에는 눈물만 남으니 사랑은 하지 않겠다는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가수의 말이 맞다는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의 주체자가 부각이 된다는 말이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서 자식을 키우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큼 기대가 더욱 더 커진다는 말이다. 첼로리스트 장한나의 부모가 얼마나 희생을 했는지 모르는데, 그만큼 공이 더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부모사랑은, 자기 자식이란 전제 조건하에서 상대를 다듬고 닦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경우에도, 사랑했던 교인이 다른 교회로 떠나가 버리면 그야말로 미친다는 말이다. 그 동안에 심방을 간 것이 몇 번이었고, 저녁마다 기도한 것이 몇 번이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교인이 되어서 목사의 사랑을 모르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바뀌는 것이고, 결국 윤수일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인간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대 !! 그렇게 인간사랑은 처음부터 미움이 포함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상대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인데, 즉 '자기애(自己愛)' 라는 말이다. 자기를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말하는 사랑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이런 사랑을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정복욕', 혹은 '지배욕'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말이다. 그런 사랑이 바로 춘향전에 나오는 사랑타령이라는 것이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머리가 좋으신가? 인간사랑은 '자기애(愛)' 이고, 여기에는 미움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데 이런 '자기애'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누가 슬그머니 왔는고 하니까,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이다. 메시야가 오니, 사람들이 좋아서 자기 사랑으로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제자들의 모습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로 변했다는 것이다. 즉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래야 그 다음에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공로이고 기도덕분이지,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성령은 인간들의 모든 것들이 다 들통이 나고 부서진 다음에, 즉 "너희들은 이것밖에 안 돼" 라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것들을 좍 밀어버리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만은 않겠어요" 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것이 곧 미움이니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방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거나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섬긴다는 것이다. ◈ 육신에 죄를 정하사 !!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이 오시기 이전에 십자가 사건이 먼저 일어나는데, 그래서 인간의 죄가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3절을 보면,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라고 되어있는데, 즉 죄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인간의 육체는 죄다" 라는 것을 규정지었다는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래서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죄의 모양으로 오시는 것이, 그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신이 죄가 아닐 수도 있다" 라는 말을 사전에 미리 다 차단해버린다는 말이다. 너무 어려운가요? ◈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것은, 육체에 대한 규정 !!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것은, 예수님의 육신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이 아니라 모든 육신을 말이다. 그래서 그 모든 육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로 인해서 더러운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규정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육체로부터는 나올 수가 없는데,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육신이 문제가 아닌데, 육신은 부활해서 살아나면 되고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몸도 살아난다는 말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죄와 더불어 있으면 곧 죽음 !! 구약에서 죽음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창세기 2장에서는, 죄와 더불어 있으면 죽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날아다니고 뛰어다녀도 말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이름이 '아담(흙)' 이라는 말이다. 어떤 착한 일을 하고 무엇을 해도 말이다. 산 것이 아니기에 죽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움직여도 죽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개념정리가 상당히 중요한데,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면서 경험한 선입관들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서로 충돌이 되면서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서로 충돌해서 다운이 되어버리듯이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성경에서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죽을 수도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제 아무리 날뛰고 설쳐도 죽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살아있는 인간과는 다르니 말이다. 즉 원래 창조한 모습이 아니니 죽었다고 간주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출발점이 어떠해야 하는고 하니, 지금 자기 앞에 성경책이 있고, 그리고 자기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그래서 성경책을 믿어서 천당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것을 묻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죄를 짓지 않은 정상적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러니 이것 자체가 전혀 말씀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의 개념이 새롭게 !!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늘에서 누군가가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와 섞여서 어떤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자체를 문제 삼아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모든 것들이 다 정상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고 나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죄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데,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죄가 무엇인지, 그게 새롭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개념이 새롭게 재정립되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인간들이 죄인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 이렇게 되니 그동안 "이렇게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니 믿자" 라고 했던 유대인들의 종교관이, 그들의 구원관과 선택관이 모두 다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탈락된 문둥병자와 창기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그들에게 낙원이 허락된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그렇고 말이다. ◈ 인간은 없어. 오직 죄인밖에 !! 이근호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이단소리를 듣는데,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이단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시고 오직 그분만을 믿자" 라고 하는데 무엇이 이단이냐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할 수가 있는데 왜 그런 가능성을 제외시키느냐는 것인데, 하지만 도대체 이 세상에 인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죄인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고 은혜이고 은사라는 말이다. 봉사와 헌금 등 모든 것이 다 말이다. 이런 모든 은사는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두 시간을 기도한다고 해서 자기도 그렇게 따라할 필요가 없고, 100만원을 헌금한다고 해서 자기가 따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예수님 한 분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구원해주시니 말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예수님의 증인이고, 참된 사랑을 받은 자, 즉 성도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다. ◈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완벽한 분 !! (여기서부터는 TAPE 2)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오는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별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ㅋㅋ),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라고 하는데, 분명히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좀 죄인이 된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기분이 나쁘냐는 것이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는 완벽한 분인데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니 우리가 진정 죄인이라면 그분만을 바라보면 되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짓거리를 좀 하지 말고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 됨으로, 그래서 그분만이 오직 구원자임을 드러냄으로서 영광을 돌려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솜씨를 자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무슨 자존심인가? 그러한 것이 왜 필요한가? 죄인이 된 것이 이렇게 기쁜데 말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니 혼자 기뻐해라" 라고 하지 싶은데(ㅋㅋ), 구세주가 계시기에 죄인이 된다는 것이 기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변명을 하고 감추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즉 "내가 나무에 올라간다고 부러지나?" 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 미안하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이 왜 오셨는고 하니까, 죄인을 건지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다. 그것이 이사야서 53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12절에 보면 역시나 놀라운 말씀이 나오는데, 앞부분을 알지만 그 뒷부분은 잘 모르는데 말이다. 11절과 12절을 살펴보자.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먼저 11절에 보면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 뒤에 보면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분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지기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그러니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죄 문제로 부끄러워하고, 자기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몸부림친다면, 그것을 담당하신 분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담당자에게 모두 맡기면 되는데 말이다. ◈ 할머니, 담당자인 저에게 주세요 !! 예를 들어서, 어떤 할머니가 동사무소에 갔는데, 글자를 하나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담당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글씨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계속 글씨를 모른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소란을 피운다면, 그것은 그 담당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 할머니 : 내가 글씨도 모르고, 나는 죽어야 돼.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이 믿음인데,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 담당자를 믿는다는 말이다. 죄에서 구원하시는 전문가를 말이다. 이렇게 쉬운데, 그런데 왜 그것이 안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모세를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가? 심지어는 죽이려고도 했는데, 그래서 모세가 "가만히 있어라" 라고 했는데, 물론 홍해를 건너고는 "여호와는 우리 용사이시니" 라고 하면서 춤을 추기도 했지만 말이다. 14장에서 그렇게 죽이려고 하다가 말이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이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런데 구세주가, 즉 죄의 담당자가 오셨다는 것이다. 대신해서 기도해주시는 분이 오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자기 의(義)에 완전히 둘러 싸여있기에, 더불어 함께 사는 것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이다. "목사님, 저의 마음을 좀 위로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저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요. 그래서 저는 그만 죽고 싶어요"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 이웃사랑의 모델은 예수님 !! 지금까지 계속 서론적인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웃사랑의 모델은 예수님이 보여주셨다" 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데, 즉 "여러분, 이웃사랑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 "영감님, 나무에 올라가지 마세요" 라고 해야하는데, 그것보다도 더 큰사랑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기 주제파악을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몸이 많이 아프세요?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천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자기 의(義)에 도취되어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도 백 배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말을 하면 오해를 받을 소지가 다분하지만 말이다. ◈ 예수님의 참 사랑이 왜 세상에서는 이단으로? 참 사랑은 예수님께서 주셨다는 것은 다 아는데, 그러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지만,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는 이단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왜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오히려 그 악독한 바라바를 풀어주도록 요구를 했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참 사랑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는 이단으로, 즉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라바보다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예수님의 참 사랑이 십자가라는 순교로 갈 수밖에 없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죄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죄 아래 놓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데, 바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준비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즉 도대체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밝혀낸다는 것이다. 사실은 설교자가 얼마나 어려운지, 일주일에 설교를 10번씩 하면 1년이면 모든 밑천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는 목사들이 엄청 많은데, 토요일만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설교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참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죄에 위해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그것을 파고들게 되면 설교할 것들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시간이 1시간도 모자라는데, 물론 목사들의 이러한 설교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것이 준비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ㅋㅋ). ◈ 죄(罪) - 학문과 지식과 교양, 윤리와 도덕,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 그런데 이것이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죄(罪)라는 것이 그냥 죄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학문과 지식과 교양,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순수한데, 즉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교양 앞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 저는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어요. 굳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어요. 너무 오버하시는 것 아닙니까? 종에게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과학자의 경우라면, "예수님도 진리이지만 나의 학문도 진리이다" 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수학 선생의 경우에는, "1+1=2" 라는 것을 진리라고 믿고 말이다. 그것이 곧 죄인데 말이다. 수학 선생님을 보고, 수학이 죄라고 하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목사의 경우에는 "예수님, 이번 저의 설교는 너무나 멋있습니다. 그것은 괜찮지요?" 라고 나오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담하셨는데, 그런데 거기에 실어야 되는 것을, 즉 교수의 경우에 가르치는 것을, 의사를 경우에는 치료하는 것을, 그리고 목회자의 경우에는 그런 목회자체를 죄라고 인정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목회만큼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영역에서 자기 담당구역은 그만 빼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실어도 말이다. 물론 조폭의 두목 경우에는 조금 갈등이 생기겠지만, 그러나 결론은 같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그러니 목회자의 임무는? 여기서 바로 목회자의 임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을 일일이 찾아내어서 죄임을 지적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 자신도 포함을 해서 말이다. 그래서 설교시간은 먼저 목회자 자신의 붕괴시간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칼로 일일이 해부하는 시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장로가 열심히 십일조를 한 죄, 권사가 철야기도를 한 죄, 심지어 성경말씀을 백 독한 죄, 그런 것들을 일일이 다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 자체가 바로 죄이니 말이다. 어떤 목사는 목회는 하나님이 시킨 것이니 죄가 아니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죄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목회자는 교인들을 따라 다니면서 일일이 그 죄를 다 지적해야 하니 얼마나 바쁜가? 지금 우리가 교재로 가지고 있는 '이웃사랑과 윤리' 라는 글은 무엇인고 하니, 죄라는 것이 각각 부분마다 각각의 대목마다, 그 죄라는 것이 '이웃사랑' 이라는 이름의 윤리로 확산되고 있음을 고발하는 리포터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전교조라면, 전교조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 아닌가? 수산물을 취급하는 공동 어시장의 사랑이 무엇인가? 외국 수산물을 거부하고 우리나라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잘 팔아주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요즘 수협에서 전화가 얼마나 자주 오는지 모르는데, 자기 수협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좀 팔아달라는 것이다. 기장수협의 경우에는 미역을 팔아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교회의 목사인줄 알고 그런 전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몬테소리' 라는 곳에서는 무슨 그리 전화를 많이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못된 소리가 아니냐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우리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공부해야 좀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해야만 죄라고 생각하지, 자기 몸 자체가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또 다른 무엇을 챙기고, 거기에 대해서 지적하면 되받아 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면서도, 그렇게 육신의 열매를 맺고 있으면서도 소위 '성도'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도라면 이러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 모든 것이 죄이기에, 그것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 디모데전서 1장에서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런 죄 아래에 있는 자들은 구하려 오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구원자가 왔는데, 담당자가 왔는데 무엇이 더 두렵겠느냐는 것이다. ◈ 이제 본격적으로 리포터를 !! 그래서 각 부분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의 한계가 점점 더 드러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한계가 다음과 같은 점이라는 것이다. 이제 리포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 예를 들면, 루게릭이라는 병(ALS)이 있다. 감각과 신체의 틀은 그대로이나 온 몸이 너무나도 무기력해져서, 심지어 입술조차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내려버리는 질병으로서 치료약이나 예방법도 없다. 그저 죽는 날만을 기다리면서 인공 호흡기로 생명이 연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병에 대한 치료제 계발을 과연 어느 나라가 담당하는 것이 합당할까? 앓고 있는 환자의 입장에서 가장 큰 이웃 사랑이라면 어떤 것은 말하는가? 그것은 일시적인 고통을 완화하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시중들어주고 사랑하고 위로 격려해 주는 것보다, 아예 치료제를 계발해서 자진해서 우뚝 서서 걷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의 도움이 없을 것이다. 여기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저귀를 갈아주고 자기를 간호해주는 것보다는 치료제를 개발해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나도 인간이다" 라고 할 수 있도록 말이다. ◈ 피아제 - 자긍심 고취 !! 이것이 바로 교육 심리학자인 '피아제'의 교육이론인데, 즉 '자긍심 고취' 라는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존듀이' 라는 미국의 교육학자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교사는 자꾸만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도와주면 교사를 계속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의 장점을 잘 개발해주고, 그것을 정립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1950년 이후에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채택해서 지금까지 해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대교육에 있어서 교육행정은 존듀이에게서, 그리고 교육심라는 피아제에게서 모두 다 나오는데, 즉 인간을 하나의 개체로서 인정을 해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폐증과 같은 것이 있는 학생들은 부모에게나 국가적으로 봐서도 그야말로 애물단지라는 것이다. 특히 목회자 가정에 이런 아이가 있으면 어떠한가? 그야말로 미친다는 말이다. 사모가 더한데, 목사는 가정의 문제는 사모에게 맡기면 그만이니 말이다. 이런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 때문에 소위 은혜가 안 된다고 하는데 말이다.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 가운데 반듯하게 사는 것이 기적인데, 아마 목사님들은 지금 제 말이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 그러면 이웃사랑인 치료제는 어떻게? 그러니 결국 이웃사랑은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인데, 그게 우리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치료제가 그냥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뱔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든 자금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몇 조의 돈이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돈은 어떻게 조달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강대국이 후진국을 착취함으로 말미암아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기계를 하나 싸게 팔아놓고 부속 값은 엄청나게 비싸게 받고 말이다. 물론 고장이 나도 미국의 기술자를 가서 불러와야만 되고 말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악랄하게 벌어들인 자금이 루게릭병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 귀여운 내 딸, 하리수 !!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처럼 행동을 하고 연기자나 모델이 되고 할 때, 요즘 하리수가 엄청나게 뜨는데 말이다. 그러니 하리수의 엄마의 경우에, 자기 딸이 얼마나 대견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욕을 할지 몰라도 말이다. 소위 '트랜스젠더' 라는 신종용어를 만들어가면서 돈을 벌어다주니 말이다. "너로 말미암아서 국가와 민족에게 기쁨이 되다면, 너는 이 나라의 훌륭한 일군이다" 라고 하는 게 그 가족들의 주장이란 말이다. 그러니 조금만 멀어지면 이웃사랑이 안 되고, 물론 가족들의 경우에는 이웃사랑이 되어버리고 말이다. 그런데 제2의 하리수가 등장해서 그만 자기 딸의 인기가 떨어졌다면, 그렇게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던 엄마도 "남자가 저게 뭐꼬?"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의 밥그릇을 빼앗아갔으니 말이다. 그게 바로 인간인데, 그게 곧 이웃사랑의 한계이고 말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5장을 한번 살펴보자.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GIVE AND TAKE !!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아주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즉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지 말라. 그러니 베풀고 싶으면 자기에게 다시 갚아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라. 그래야 하늘의 상이 크다" 라고 하시는데 말이다. 이것은 바로 누가 상을 받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 자체에 한계가 있으면, 그런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기준에 전혀 부합되지 못한다는 것을 좀 알아달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인간이 거리의 거지들을 모아놓고서 잔치를 베풀겠느냐는 것이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도 전혀 없는데 말이다. 어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일이 있는가? 이렇게 인간이란 서로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데, 즉 서로 'give and take' 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2페이지를 보자. ** 또 다른 예는, 휴대폰 회사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을 간격으로 하여 쉴새없이 신제품을 계발하고 쏟아내고 있는데, 이는 소비자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그래서 과소비를 유발시키게 된다. 하나를 만들더라도 오래 쓰고 식상되지 않는 디자인을 계발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따질 때 그것이 참된 절약에 부합되는 기업 윤리이다. ◈ 과소비가 곧 미덕 !! 요즘 휴대폰들이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낭비임에 분명한데, 아니 휴대폰 화면이 세 줄이면 어떻고 일곱 줄이면 어떠한가? 무슨 TV도 아니고 말이다. 과거에는 생산이 먼저였고 소비가 후자였는데, 그런데 요즘은 먼저 소비가 형성되고, 그 기호에 맞추어서 생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소비중심의 경제구조라는 말이다. 그러니 과소비나 허영심을 유발해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광고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경제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렇게 모순점이 많다는 것이다. 소위 'IT산업'이 이제는 내리막길인데(?), 왜 그런고 하니 제 아무리 기술을 부르짖어도 구매력이 뒤따라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TV를 벽에 걸던지 선반 위에 놓던지 그것이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냉장고 문에서 냉기가 나오던지 나오지 않던지 간에 그 안이 시원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자동차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것이 나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소비를 유도하고 이런 제품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야하는 것은, 이런 제품들이 나와야 기술축적이 되는 것이고, 그래야 수출을 해도 경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출을 열심히 해야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 형제나 가족들이 취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에서 계속해서 신제품을 개발해서 경쟁력을 갖추어야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공장을 세우고, 그렇게 공장을 세우면 촌에서 놀고 있는 우리 형수가 취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가 학교에 다녀도 다니고 말이다. 분명히 낭비인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허영심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 산 속의 중들이 나빠요 !! 중들이 머리를 깎고서 산에 들어가서 폼을 잡는데, 그러나 다 그렇게 해버리면 누가 먹여 살리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착한지, 그러한 인격적 인간이 아니라, 얼마나 돈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는지, 바로 그러한 기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구매력을 말이다. 사회가 이러한 것을 요구하니, 남자가 여자가 된 것도 다 상품으로 내어놓고, 또한 음치도 돈이 되고, 그야말로 온갖 것들을 왕창 다 쏟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나쁘다고만 하겠는가? 오히려 절에 들어가서, 속세를 떠나서 살아가는 듯한 중들이 더 나쁘지 말이다. 도대체 떠나가는 어디를 떠난다는 말인가? 물론 산 속에 들어가서 굶어서 죽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사회라는 것이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청난 태풍이 부는데,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그 태풍이 피해 가는가? 같이 휩쓸려서 가는데, 왜냐하면 다 같은 배에 탔으니 말이다. 물론 자기들만 피해간다고 하는 별 희한한 인간들도 있지만 말이다. ◈ 모든 사람이 'NO' 라고 할 때, 나는 'YES' 라고 말한다 ?? 그리고 CF를 보면 "모든 사람이 'NO' 라고 할 때, 나는 'YES' 라고 말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이 'NO' 라고 하면 자기도 'NO' 라고 해야하고, 'YES' 라고 하면 'YES'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같이 동참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처세술' 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것이 과연 진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진리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진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내 죄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즉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해주면 그것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남들이 NO' 라고 하면 'NO' 라고 하고, 'YES' 라고 하면 'YES' 라고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이 'NO' 라고 할 때에 자기는 'YES' 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디 천국에 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담당자가 왜 왔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렇게 같이 살아가면서 자기 죄를 알라는 것이다. 간단한데, 전혀 복잡하지를 않다는 말이다. 오늘 좋은 것을 하나 가르쳐주는데, 즉 "남들처럼 살면서,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지 않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예수를 믿는 자들의 면면을 보라는 것이다. 어떤 자들인지 말이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와 거지, 참으로 희한한 자들만 모아놓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즉 "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주님에게 다 맡기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복잡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합동 측의 노회를 가도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누가 물으면 주께서 전도하라고 하시는 줄로 알고, "예, 저놈들은 이단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오히려, 고넬로가 베드로를 전도해 !!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전도하려고 어디 환장을 하고 난리를 피웠는가? 그게 전혀 아닌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어디 베드로가 기도해서 내려왔는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미 고넬료를 변화시켜놓고 베드로를 부르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보자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는고 하니, 율법에 의하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들만 가득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보자기에 든 음식을 먹으라고 하니까, 베드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두고 야단을 치신다는 것이다. 즉 "어떻게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니가 속되다고 할 수 있는가?"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먹은 사람이 곧 고넬료라는 말이다. 주님이 깨끗하다고 하면 깨끗하다는 것이다.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러므로 여기 사도행전 10장에서, 먼저 주님께서는 율법이 던져지면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넬로가 베드로를 전도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율법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양쪽 다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고넬료, 모두 다 말이다. ◈ 교회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들의 모임 !!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서로가 바짝 마른 해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해골, 최 해골, 김 해골, 박 해골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골도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 하나라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해골들이 능히 살겠는가?" 라고 하시면, 물론 우리는 "무슨 수로 해골들이 살겠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능히 살려줄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 : 야, 해골들! 이리 와봐.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분이 따로 계심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 주님에게 '고맙습니다' 라는 말밖에 아무런 다른 할 말이 전혀 없는 자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신자이고, 그러한 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안 되는가? 아직도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고, 즉 아주 고귀하고 순수하게 보이는 인간미에 이끌려서 그렇다는 말이다. 헨델의 음악이 참으로 은혜가 되고, "1+1=2" 라는 것은 분명히 진리인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죄라고 하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 성만찬의 경우에 !! 성만찬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이다. 즉 "성만찬을 하면 은혜가 온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의 주장은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 확실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사용하는 포도주의 도수는 몇 도이고, 누가 거행해야 은혜가 되는지, 그런 기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은혜를 몰고 다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즉 "은혜는 이리와"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만찬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집사가 성만찬을 하면 은혜가 오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들이 붙들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이라는 말이다. 즉 성만찬을 거행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생각하기만 하면 말할 수 없는 감격의 눈물이 줄줄 흐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살과 피를 생각만 하면 이렇게 감격스러운데, 이것을 어떻게 나 혼자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을 되풀이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같이 은혜를 나누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이렇게 은혜로운 성만찬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성만찬은,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 !!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그것도 역시 죄인데, 그것이 곧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종교의 행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만찬은 성만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만찬은 모든 삶에 확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하, 나의 이런 이런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만찬이 성만찬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확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에서 참여해서 죽고 아프고 병든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자기의 죄를 묻지 않고 참여해서 말이다. 자기 죄를 묻지 않고 돌아보지 않아서 말이다. 즉 평소 그 사람의 본질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에 확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교육 현장에서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 간의 경쟁력을 도입하지 아니하면 학생들은 학문을 이해하고 그 학문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갖출 의욕을 유발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국가 경쟁력이 남의 나라보다 뒤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경쟁력이란 보다 높은 보상이 마련되어야 가장 큰 효과를 보는데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 인류 대학 합격을 위한 입시 경쟁이다. ** 물론 국가적 입장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인재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의 공교육은 일선 학교장에게는 전혀 먹혀 들어갈 수가 없다. 누가 자진해서 나서서 이류 고등학교 되겠다는 학교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인원수를 일류 대학에 진학시킴으로서 그 고등학교는 교육 능력에 있어 사회적으로 보장받게 되어 있고 보상받게 되어 있다. 그 학교에 보다 더 많은 인재들과 자본이 들어온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태되게 되어 있다. ◈ 우리나라 공교육 문제는 '평균이 낮다' !! 이제 공교육의 문제인데, 그래도 고국에서 한번 살아보려고 미국에서 온 사람이 이 교육문제 때문에 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공부를 제법 했는데, 우리나라에 오니까 그만 꼴찌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존심이 어디 허락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교육과 우리나라의 교육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미국의 공교육 개념을 그대로 베끼고 있는데 말이다. 미국에는 어디 과외가 없고 경쟁이 없는가?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쟁이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왜 "나는 한국에는 도저히 못 살겠다. 다시 미국에 가야되겠다" 라는 현상이 벌어지느냐는 말이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는 놈은 미국에 가서도 잘한다는 말이다. 미국과 한국의 공교육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한국은 이런 공교육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 평균을 나누는데 있어서, 그 평균이 낮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평균이 낮다는 것은, 학생들의 평균점수가 낮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공교육에 대해서 국가가 요구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엘리트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어서, 이 엘리트들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대다수의 교육 대상자들에게 자극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도 엘리트가 되고 말 거야"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간 만들기' 라는 높은 수준의 교육이 아니고, '안정된 직업 가지기' 라는 낮은 수준의 교육이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봐라. 서울대에 가면 출세한다" 라는 공식을 만들어서, 다들 그렇게 공부하도록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공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공부를 하도록 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미국보다 수준이 낮기에 과외나 지나친 경쟁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 서울대학에 넣어주는 것이 곧 이웃사랑 !! 이것을 일선 고등학교의 교장들이나 선생들이 모르는가? 안다는 것이다. 알지만 서로가 경쟁이 되니 어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너거 학교는 서울대학에 몇 명이나 들어갔노? 15명이나 갔나? 우리는 한 명 뿐이야" 라고, 그렇게 되면 그 교장 자리가 온전하겠는가? 그렇게 교육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수준이 낮다는 것은 수학점수의 평균이 낮다는 말이 아니라, 교육의 목적을 바라보는 눈이 낮다는 말이다. 미국에서 과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학교에 그런 과외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투자를 많이 해서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니 "누가 더 잘되고, 못되는가?" 라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한다" 라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아니라, "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야 사람대우를 받는다" 라는 것이 강하니, 엘리트가 좋다는 것을 부각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놈은 칭찬하고, 그렇지 않는 놈은 마치 인간도 아닌 것처럼 앞에서 당기니, 그렇게 되면 부모의 마음은 무엇이겠는가? "내 자식은 몇 등인가?" 라고, 당장에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틀을 부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교장 선생님의 이웃사랑이란 무엇인가? 설령 교장 선생님이 "여러분, 교육이란 인간을 올바른 만드는 것입니다. IQ도 중요하지만, EQ도 중요합니다.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하더라도, 학부형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 교장 선생님, 그렇게 해서 몇 명이나 서울대에 들어가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은 결국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서울대학에 한 명도 넣어주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자기 학교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서울대학에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러면 그 감성지수인 EQ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돈이 되느냐는 말이다. 요즘 자율야구가 어쩌고 하는데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성적이 말해준다는 것이다. 성적이 나지 않으면 감독도 당장 잘리고 만다는 것이다. 아마도 직장에 들어가면 실감이 나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리 인간답게 살려고 해도, 특히 보험회사의 경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약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학교를 다닐 때의 그 청춘과 낭만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아줌마, 여기 요실금 보험이 있어요. 보장이 너무 좋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름 이성과 양심을 이야기하던 인간이 요실금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냐고 할지 몰라도, 현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웃사랑이란 개념자체가, 그 빛이 비추어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이웃사랑은 없었는데, 자기 사랑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인인데, 즉 목사가 아무리 사랑을 한다고 해도, 그 교인이 다른 교회에 가게 되면 밤에 잠도 못 자고 뒤집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가정 내의 윤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자식들은 장례식을 치르면서, 귀찮고 번거롭다는 생각보다는 보편적으로 죄송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대가없이 내리 사랑을 받아서 오늘날 자신의 존재가 형성되었는데, 거기에 대해 부모님에게는 변변한 보답도 제대로 못했기에 무척 아쉽고 살아 생전에 진작 좀 편하게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해서 괴로워한다. 그래서 공자는 3년 상을 치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 효도의 경우에도 !! 이제는 효도의 문제인데,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자식들은 장례식을 치르면서 죄송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서 제사도 지내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인간적인 이웃사랑이냐는 말이다. 이런 것도 없다고 하면, 그게 기계이지 인간이냐는 것이다. 너무나 비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가 목사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 라고 하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한 '컴플렉스' 라는 것인데, 즉 부모 밑에서 자라다보니까 부모의 기대치가 그만 자기의 이상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부모가 보란 듯이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만 그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니, 부모가 자기에게 요구한 것을 들어주면서, 자기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대상이 그만 사라지고 나니,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황당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원수를 갚기 위해서 금강산에 가서 열심히 무술을 연마했는데, 그런데 그 원수가 그만 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원수를 목을 쳐야 드라마가 완성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원수가 모기에 물려서 뇌염으로 죽고 만다면, 그 드라마가 얼마나 시시하겠느냐는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드라마틱하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제발 상상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실은 예수님 중심으로 해서, 즉 예수님의 지배하에 있는데, 그러니 자기 중심의 세계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상상의 세계를 말이다. 그것은 젊은 날의 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눈을 감으면 생각하는 것이 망상이고, 눈을 뜨면 생각하는 것이 상상의 나래인데, 하지만 성경에 보면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 뒤에 나오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요한일서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오늘밤에 잘 주무시고,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담당자가 오셨고, 그렇게 오신 이유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줄 압니다. 그러니 우리가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절망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을 믿는 기쁨이 언제나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답변 - 용서는 주님의 사랑으로 되는 것이지, 우리가 사랑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용서가 아니라 주님의 용서를 소개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 마련된 것을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질문 - 그러면 노아의 경우에 자식들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어떠합니까? * 답변 - 노아의 자식들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준 것은 언약인데, 그러면 다음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창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 답변 - 방금 참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구약에 나오는 어떤 행위를 가지고 예수님이 인용을 하셔도, 그것이 곧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이 회개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의는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이용하신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정당하다든지 의롭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답변 -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이 오지 않고 예수님이 바로 오시면 그만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아브라함인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을 이용해서, 그 아브라함에게서 언약을 끄집어내어서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죄인의 역할인데, 바로 그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는데, 그것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기 위함인데, 아브라함의 의로운 행동을, 그 의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답변 - 그러니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허다한 허물의 덮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문제인데, 마치 그것을 예수님을 믿고 난 뒤의 의로운 행동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의로운 행동이 따로 있고, 의롭지 않은 행동이 따로 있고,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모든 것이 은혜인데, 이렇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은, 자기가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은혜인데, 즉 '봐준다' 라는 것이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문제로 삼자는 것인데, 그러면 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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